예루살렘 公議會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예루살렘 公議會 (Council of Jerusalem) 또는 예루살렘 宗敎會議 基督敎 最初의 公議會 로 알려진 事件이다. 新約聖書 에서는 使徒行傳 15張에 나오는데, 基督敎 를 유대敎의 한 宗派로 理解하여 토라 ( 律法 , 毛細 5景), 割禮 等의 유대敎 傳統을 强調한 유대基督敎人과 유대敎 基督敎 間의 獨立을 主張하며 反律法的 모습을 보이던 이房 基督敎人間의 神學 論爭이 있었다.

歷史的으로 注目할만한 또 하나의 注目할 만한 예루살렘 公議會는 1672年에 열린, 都市테오스 告白書를 議決한 東方正敎의 에큐메니컬 시노드이다. 西유럽의 宗敎改革이 東方正敎 안에 끼친 衝擊을 除去하고, 旣存의 敎理를 全體 正敎會 次元에서 再確認하기 위해서 當時 예루살렘의 總大主敎였던 都市테오스의 信仰告白을 東方 正敎의 普遍的 立場으로서 決定하였다.

最初 公議會의 發端과 進行 [ 編輯 ]

小아시아 안티오키아 敎會에서 모세五經을 비롯한 舊約聖書의 律法遵守問題에 對해 律法遵守를 主張하는 紐帶 그리스도교人과 이房 그리스도 敎人 間의 敎理 論爭이 예루살렘 公議會를 主催하게 된 契機가 되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 敎會에서는 사도 바울 바나바 (Barnabas) 그리고 吏房 그리스도 敎人들을 예루살렘 에 代表로 보내어 사도 들과 예루살렘 敎會의 兄弟들에게 이 問題를 議論하게 하였다. 오랜 討論 끝에 사도 베드로 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平等하므로 異邦人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恩惠로 救援을 얻는다"고 宣言했고, 公議會 參席者들은 그의 말에 沈默으로 同意하였다. 또한 유대人이 大部分인 예루살렘 敎會의 座長인 예수 의 동생 사도 야고보 가 나서서 敎理를 다음과 같이 整理한다.

  • 偶像 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라.
  • 淫亂한 行動을 하지 말라.
  • 목 졸라 죽인 짐승 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 [1]

使徒들과 예루살렘 公議會는 敎會 代表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를 안티오키아에 派送해 예루살렘 公議會의 結果를 便紙로 알렸다.

1672年 예루살렘 시노드 의 背景과 進行 [ 編輯 ]

西유럽에서 일어난 宗敎改革 은 約 百餘 年 뒤에 東方正敎 안에서도 相當한 波長을 가져왔다. 오스만투르크 의 支配 아래 놓인 東方正敎는 그 勢力이 萎縮되었고, 따라서 正敎會 內部的으로 유럽의 基督敎 勢力과 結託하여 政治-宗敎的으로 獨立하려는 試圖가 있었으며, 그 先頭에 섰던 사람은 이스탄불의 에큐메니컬 總大主敎였던 키릴로스 壘카리스 였다. 그는 오스만투르크 帝國의 基督敎 神學敎育 禁止 政策에 따라 西유럽으로 留學을 가게 되었는데, 特히 제네바에 留學하면서 칼뱅 系列 改新敎 勢力과 交流 關係를 맺게 되었다. 이 因緣을 基盤으로 西유럽의 改新敎 國家들로부터 癌中으로 支援 받아 오스만투르크 帝國으로부터의 獨立을 試圖하였다고 推定되며, 그를 위하여 칼뱅 神學을 全面的으로 受容한 새로운 信仰告白을 1631年, <그리스도교 信仰의 東方敎會적 告白>이라는 이름으로 出刊하였다. 勿論 이러한 不純한 試圖를 오스만투르크 帝國 政權은 默過하지 않았고, 그는 抑留되었다가 1638年 끝내 교살당하였으며, 그 屍體는 바다에서 發見되었다.

그의 被殺 以後 東方正敎는 內部的으로 浸透한 改新敎 神學의 影響力을 積極的으로 排除하기 始作하였고, 그 頂點은 바로 1672年에 열린 예루살렘 시노드 였다. 키릴로스 壘카리스 의 信仰告白을 條目條目 反駁한 都市테오스 信仰告白書가 나왔고, 1672年의 公議會는 이를 東方正敎의 普遍的 立場으로서 主張하였다. 그러나 改新敎 神學의 影響을 排斥하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神學的 立場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졌다는 內的 批判이 18世紀 以後 러시아 正敎會를 中心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聖經 目錄 等의 몇몇 決定에 對해서는 一部 國家의 正敎會에서 受容이 留保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當時 聖經 目錄에 對한 決定文 一部이다.

The Acts and Decrees of the Synod of Jerusalem, The Confession of Dositheus (Eastern Orthodox, 1672)

In the year of Salvation 1672, on the 16th [day] of the month of March, in the Holy City of Jerusalem

Question 3. 어떤 冊들을 當身은 聖經이라고 부르는가?

가톨릭 敎會의 規範에 따라서 우리가 聖스러운 經典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冊들을 키릴(로스)은 라오디케이아 시노드로부터 모두 다 모으고 列擧한 다음에, 그는 - 特히 '솔로몬의 智慧, 유딧, 土비트, 用意 歷史(벨과 龍), 수산나의 歷史, 마카비들, 그리고 시라의 智慧(週 : 集會서) - 에 無知한 바보처럼.. 相當히 惡意的으로 '아포크리파(外景)'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 冊들이 마찬가지로 眞實된 (聖經의) 다른 冊들처럼 聖經의 眞實된 一部라고 判斷한다. 옛 慣例에 따라서 가톨릭 敎會는 우리에게 聖스러운 福音들과 聖經의 다른 冊들, 疑心할 餘地 없는 聖經의 다른 部分들, 그들에 對한 拒絶이 否定되는 이 冊들을 우리에게 傳해 주었다.

그리고 萬若, 아마도 이 모든 冊들이 다른 冊(->원정경)들과 언제나 비슷한 水準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 하더라도, 시노드들과 많은 가톨릭 敎會의 옛 卓越한 神學者들 모두가 이 冊들 亦是 聖經의 나머지로서 여겨서 셈하였다. 이 모든 冊들을 우리는 情景이라고 判斷하며, 聖經임을 우리는 告白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聖書 硏究者들은 피를 먹지 말라는 말은 當時 異邦宗敎에서 피를 먹는 風習을 따르지 말라는 卽, 異邦宗敎의 習俗을 따르지 말라는 뜻으로 解釋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