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인
(孫牧人,
1913年
4月 13日
~
1999年
1月 9日
[1]
)은
韓國
의 大衆音樂 作曲家이다. 本名은
손득렬
(孫得烈)이다.
손 안드레
,
樣相抛
(楊想浦),
任員
(林園)이라는 예명도 使用했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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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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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南道
晋州
出生이다. 아버지가 韓醫師인 집안에서 태어나 比較的 富裕한 幼年 時節을 보냈다. 〈노들江邊〉의 作曲者
문호월
은 손목인의 外四寸 兄이다.
京城府
에서 재동普通公立學校와
중동學校
를 卒業했는데, 學窓 時節
大韓基督敎靑年會聯盟
에서 會員으로 活動하면서 西洋音樂을 接하게 되었다.
도쿄 音樂學校
에서
피아노
演奏를 工夫하던 中
오케레코드
社長인
이철
의 눈에 띄었고, 첫 作品인 〈他鄕살이〉(原題 〈他鄕〉)가 크게 人氣를 끌어 單숨에 注目받는 新銳 作曲家로 떠올랐다.
日帝强占期
韓國人의 떠돌이 情緖를 잘 代辯한 曲으로 꼽히는
고복수
노래의 〈他鄕살이〉 外에
이난영
이 불러 높은 人氣를 누린 〈
木浦의 눈물
〉
[2]
과 고복수의 代表曲 〈짝사랑〉李 特히 有名하며, 그 外에도 〈해조곡〉, 〈靑노새 歎息〉, 〈뗏木 二千里〉, 〈아빠의 靑春〉 等 수많은 히트曲을 發表했다. 이난영과 고복수,
남인수
,
腸洗淨
,
김정구
,
박단碼
等이 손목인이 作曲한 노래를 불러 人氣를 모았다.
中日 戰爭
勃發 以後부터 日帝의
軍國主義
政策에 符合하는 親日 歌謠를 作曲하기 始作했고, 〈二千五百萬 感激〉, 〈참사랑〉, 〈봄날의 化身〉, 〈그대와 나〉, 〈寵厚의 起源〉 等 戰爭터에서 壯烈하게 죽는 것을 美化한 노래를 남겼다. 이로 因해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音樂인 部門에 包含되었으며, 市民團體가 記念事業 中止를 要求하기도 했다.
[3]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에서는 손목인을
김해송
과 함께 《
日帝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
》에 明示된 親日反民族行爲 決定 審議 對象者 名單에 올렸지만 作曲家가 갖고 있던 當時의 社會的 位相이 相對的으로 낮았다는 事實이 認定되어 棄却했다.
[4]
光復 後에는 〈아내의 노래〉, 〈슈사인 보이〉 等을 히트시켰으며,
日本
映畫 音樂界에서 活動한 것을 始作으로 映畫 音樂 分野에서도 活動했다. <아내의 노래>는
1948年
금능인(김능인) 作詞로 김백희가 <안해의 노래>라는 題目으로 發表하였고, 4年 뒤 유호가 開寫하여 심연옥이 吹入하면서 히트시켰다. 〈카스바의 女人(
日本語
:
カスバの女
)〉은 日本에서의 最大 히트曲이며 作曲家
길옥윤
이 1968年頃에 開寫하여
패티김
의 노래로 發表되어 우리들의 마음에도 오래 記憶되고 있다.
1964年
韓國音樂著作權協會
初代 會長을 지냈다. 末年에는
美國
으로 移民을 가 生活하였고,
1987年
花冠
文化勳章
을 授與받았다.
1989年
韓國歌謠作家協會
를 設立하고 初代 會長을 맡기도 했다.
1999年
作曲한 노래의 著作權 問題를 協議하기 위해
도쿄
를 訪問하여 머무르던 中 死亡했으며 雜誌 <핫윈드> 發行人으로 在職할 當時 淫亂한 寫眞과 함께 頹廢的인 內容의 記事를 揭載한 탓인지
[5]
1992年
1月 22日
不拘束 立件됐다.
韓國과 日本에서 가요 1千餘 曲, 뮤지컬 50餘 曲, 映畫音樂 70餘 篇의 作品을 남겼으며, 韓國 歌謠의 歷史에 不滅의 자취를 남겼다는 評을 받고 있다.
[6]
손목인은
박시춘
의 時代가 本格的으로 열리기 全義 트로트 樣式을 代表하는 作曲家로, 섬세하고 感覺的인 박시춘의 旋律과는 對照的으로 線이 굵고 安定的이라 좀 더 男性的인 느낌을 주는 音樂을 驅使했다. 트로트 外에도
재즈
에 能하여 後期作人 〈슈사인 보이〉나 〈아빠의 靑春〉에는 재즈風의 雰圍氣가 묻어 있다.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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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177~179쪽쪽.
ISBN
978-89-90626-26-4
.
- 박성서 (2005年 11月 1日). “作家 探究 [04] 作曲家 孫牧人 - 손목인의 人生讚歌, 1913-1999”. 韓國歌謠作家協會步.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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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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