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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盧 요시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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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盧 要시츠네
源 義?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미나모토盧 요시쓰네
왕대잎과 용담꽃
王대잎과 龍膽꽃
無事 情報
時代 헤이안 時代 末期 ~ 가마쿠라 時代 初期
出生 헤이地 元年 (西紀 1159年)
死亡 盆地 5年 尹 4月 30日 (西紀 1189年 6月 15日)
改名 우시와카마루, 茶羅王
別名 九老
誡命 捐館通山源公大居士
官位 종오위下 左衛문위 劍鼻位社 , 俚謠 局社
氏族 세이와 겐지 다메요시 流 ( 가와치 겐지 )
父母 미나모토盧 요시토모 , 도키와 高젠
兄弟姊妹 요시히라 , 도모나가 , 요리토모 , 요시카度 , 마레요시 , 노리料理 , 젠歲이 , 期엔 , 要시츠네 , 步몬히메 , 老奴 온카打 , 이치조 요시나리
配偶者 情實: 사토 高젠 ( 가와高에 時게料理 의 딸)
妾室: 시즈카高젠 , 와라비 히메 ( 다이라노 도키타다 의 딸)
미나모토盧 要시츠네
日本語式 漢字 表記 源 義?
가나 表記 みなもと の よしつね
國立國語院 標準 表記 미나모토盧 要시츠네
로마字 Minamoto no Yoshitsune

미나모토盧 요시쓰네 ( 日本語 : 源 義? , 1159年 ~ 1189年 )는 日本 헤이안 時代 末期, 가마쿠라 時代 初期의 武將으로 日本人들에게 比較的 人氣있는 悲劇的 英雄이다. 미나모토盧 요시토모 의 9남이며, 가마쿠라 幕府 의 初代 쇼군人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의 異腹同生이다. 兒名은 우시와카마루 (牛若丸)이다.

아버지 요시토모 事後 生母인 도키와 高젠 과 避身하였으나 그의 外祖母가 다이라노 기요모리 에게 붙잡히자 도키와는 기요모리에게 投降했다. 以後 이福 兄 요리토모가 劇的으로 再起하여 擧兵하자 그 麾下에서 活躍하였다. 헤이케 의 敗北 後 兄 요리토모와 葛藤하던 途中 쫓겨나 結局 히라이즈미 에서 自殺하게 된다.

生涯 [ 編輯 ]

誕生 [ 編輯 ]

요시쓰네는 헤이地 (平治) 元年(1159年), 헤이地의 난(平治の?) 이 한창이던 中에, 가와치 겐지의 塗料(棟樑) 미나모토盧 요시토모 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도키와 高젠 은 構造老人(九條院)에서 일하던 下級 宮人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요시토모는 다이라노 기요모리 와의 싸움에서 守勢에 몰려, 長男 요시히라 ㆍ次男 도모나가 ㆍ3男 요리토모 와 함께 誤와리國 으로 도망치던 中에 家神의 背反으로 殺害되었다. 이때 憂時와카(요시쓰네)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도키와는 憂時와카와 다른 두 아들을 데리고 야마토國 의 山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自身의 어머니가 기요모리에게 붙잡힌 것을 알자 子息들과 함께 기요모리 앞에 出頭했고, 子息들은 자라서 出家한다는 條件으로 목숨을 건졌다. 以後 도키와는 기요모리의 妾이 되었다가 다시 空家 (公家) 이치조 나街나리 (一?長成)에게 보내져 그와 婚姻하였다.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11살 때에 [主席 1] 우시와카마루는 교토 近郊의 구라마社(鞍馬寺)에 맡겨졌고 自身의 이름을 샤나오(遮那王)라 하였다. [主席 2] 以後 自身의 出生의 祕密을 알고, 스님이 되는 것을 拒否하고 구라마社를 떠나 스스로 元服을 行한 뒤, 오슈 의 對豪族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를 찾아간다.

요시쓰네가 오슈로 가게 된 데에는 히데히라의 丈人이자 政治諮問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나리 (藤原基成)가 어머니 도키와의 男便이었던 이치조 나가나리의 種牡第(從兄弟)의 아들이었던 因緣으로 그 緣줄을 따랐을 可能性이 높다. [主席 3] 元服을 올린 場所에 對해서는 《헤이地모노가타리(平治物語)》에는 오미 國 街某君(蒲生郡)의 카가미老슈쿠(鏡の宿), 《基케이키(義?記)》에는 아버지 요시토모가 最後를 맞은 땅인 誤와리 局에서 元服을 올렸다고 했으며, 이름은 겐지 緣故의 돌림字인 '요시(義)'에 세이와 겐지의 始祖인 쓰네모토王(經基王, 미나모토盧 쓰네모토)의 '쓰네(經)'를 더해 '요시쓰네(義經)'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지쇼ㆍ駐에이의 난 [ 編輯 ]

지쇼 4年( 1180年 ) 8月 17日에 異服兄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즈 에서 軍士를 일으킨다는 消息을 듣고 오슈를 떠나 그 麾下에 參與하였다. 이때 히데히라는 요시쓰네가 떠나는 것을 極口 말렸으나 요시쓰네는 끝내 몰래 오슈를 빠져나왔고, 히데히라는 사토 쓰구노部 (佐藤繼信)ㆍ 다다노部 (忠信) 兄弟 等 數十 氣를 붙여주어 함께 가도록 했다고 한다. 한便 후지(富士) 講義 싸움에서 勝利한 뒤 요리토모는 氣勢 江 에 陣을 치고 있었는데(지금의 시즈오카 縣), 이곳에서 요시쓰네는 요리토모를 처음으로 만났고, 以後 요리토모는 다른 동생인 미나모토盧 노리料理(源範賴)와 요시쓰네 두 사람에게 軍權을 맡겨 헤이케 討伐에 나서게 한 뒤, 요리토모 自身은 東쪽을 다스리는 데 專念하게 된다.

1181年 기요모리가 죽은 뒤 헤이케는 漸次 기울기 始作했고, 各地에서 일어나는 겐지들의 反헤이케 擧兵에 밀린 헤이케는 結局 교토를 떠나 本據地인 西쪽으로 落鄕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安土쿠 天皇 三種神技 를 함께 가지고 가버린다. 駐에이 2年( 1183年 ) 7月에 起訴 요시나카(木曾義仲, 미나모토盧 요시나카)가 헤이시를 교토에서 몰아내고 가장 먼저 교토에 들어간다. 하지만 高시라카와 法皇은 헤이시 追討의 功績을 論하면서 1等을 요리토모로 두고 요시나카를 2等으로 두는 等 요시나카를 낮게 評價하면서, 거꾸로 요리토모가 교토로 들어와주기를 期待하였다. 8月 14日에 요시나카는 後繼 天皇으로서 自身이 直接 擁立한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를 薦擧하지만 高시라카와 法皇은 이에 激怒하고, 요시나카를 제치고 요리토모에게 선지를 내려(주에이 2年 10月의 선지) 요리토모에게 간토 地域의 支配權을 認定해주기에 이르면서 兩者間의 對立은 激化된다. 요리토모는 尹10月 5日에 가마쿠라를 떠났지만, 다이라노 料理모리로부터 교토의 深刻한 食糧不足 狀況을 傳해듣고 교토로 가는 것을 中止하고, 代身 요시쓰네와 나카하라노 지카요시 (中原親能)를 對官으로서 교토에 보냈다. 當時 舊敎였던 救助 社다자네 의 日記 《교쿠요》윤 10月 17日組에는 "'요리토모의 아우인 九老(九郞)'라는 者가 大將軍으로서 數萬의 軍兵을 거느리고 교토로 왔다"고 하면서, 구로에 對해서 "이름은 모르겠다"고 적었다. 이것이 貴族의 日記에 요시쓰네가 처음으로 登場하는 事例이다.

요시쓰네와 지카요시는 11月에 오미 國에 이르렀는데, 그 軍勢는 5,6百 基에 達하는 것으로서 모두 다 데리고 교토로 가는 것은 어려웠다. 그 사이 요시나카와 法皇 사이에 武力 衝突이 勃發하여, 요시나카가 法黃君이 있던 法住寺戰을 쳐서 法皇을 幽閉하는 地境까지 이르렀다. 이세국 에서 法皇의 北面武士였던 오에노 幾微土毛 (大江公朝)로부터 교토의 消息을 傳해들은 요시쓰네는 多急히 事態의 急變을 요리토모에게 報告하는 한便, 스스로 二世 國 사람들이나 이즈미老카미(和泉守) 다이라노 老父카네 (平信兼)와 連繫하여 兵力 增强에 힘썼다. 요시쓰네의 노토(??)로 꼽히는 이세노 요시모리(伊勢義盛)도 二世의 才地武士로서 이때 요시쓰네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駐에이 3年( 1184年 ) 正月에 노리料理가 도고쿠에서 援兵을 거느리고 와서 요시쓰네와 合流하고, 20日에 노리料理軍은 誤美國 세타 에서, 요시쓰네軍은 야마시로國 다와라(田原)에서 總攻擊을 開始했다. 그리고 우지 講義 싸움에서 요시나카의 部下 將帥 시다 요시히로 (志田義廣)의 軍勢를 쳐부수고 교토로 들어왔다. 逃亡친 요시나카는 九里쓰(粟津)의 싸움에서 戰死했다.

그 사이 헤이시는 힘을 回復하여 후쿠하라(福原, 只今의 효고현 고베시 )까지 進出했고 요시쓰네는 노리料理와 함께 헤이시 追討의 名을 받는다. 2月 4日에 요시쓰네는 溺水君을 거느리고 하리마 國을 돌아 美쿠社(三草) 山에서 다이라노 스케모리 (平資盛) 等의 헤이시軍에 夜襲을 敢行해 쳐부수고, 노리料理도 臺數君을 거느리고 出廷했다. 사흘 뒤인 7日에는 이치노타니(一ノ谷) 싸움에서 淨甁 70期로 히요度離苦에(?越)의 險峻한 비탈을 따라 내려와 헤이시 本陣을 奇襲한다. 混亂에 빠진 헤이시軍은 그대로 무너지고 가마쿠라軍은 大勝을 거두었다. [主席 4] 교토에 들어올 무렵만 해도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요시쓰네는 요시나카 追討나 이 이치노타니 싸움에서의 活躍으로 歷史의 舞臺에 華麗하게 登場하게 된다.

蘭의 終結과 교토 滯留 時節 [ 編輯 ]

이치노타니 싸움 以後 노리料理는 가마쿠라로 돌아가고, 요시쓰네는 교토에 남아 교토의 治安 維持에 힘쓰면서 基나이 地域의 才地武士들의 組織化와 같은 地方軍政을 行했으며, 지샤 所有의 領地 다툼이나 民情에도 關與했다. 겐랴쿠 元年( 1184年 ) 6月 에 調整은 요리토모의 薦擧를 받은 노리料理 等 겐지 武裝 3人의 地方官 任命을 行했지만, 요시쓰네는 여기에서 빠져 있었다. [主席 5] 以後 요시쓰네는 헤이시 追討를 위해 西쪽으로 떠날 豫定이었으나, 8月 6日 에 다이라노 老父카네가 일으킨 ' 3日의 헤이시의 난 '이 터지는 바람에 出廷하지 못했고, 代身 노리料理가 西쪽 出陣을 맡게 되었다. [主席 6] 8月에 노리料理는 大軍을 거느리고 山尿道로 進軍해 규슈로 向했고 이 무렵 요시쓰네는 3日의 헤이시의 亂의 後處理에 精神이 없었다. 이 渦中인 8月 6日에 高시라카와 法皇으로부터 사에몬쇼이(左衛門少尉)ㆍ게비이시(檢非違使)에 任命되었다. 9月에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의 周旋으로 가와高에 時게料理 (河越重賴)의 딸인 사토 高젠 (鄕御前)을 正室로 맞이했다.

한便 노리料理의 遠征軍은 軍糧이나 兵船 調達에도 어려움을 겪는 等 進軍이 停滯되고 있었다. 이에 요시쓰네는 高시라카와 法皇에게 西쪽 出陣을 許諾해줄 것을 要請해 許諾을 얻었다. 겐랴쿠 2年( 1185年 ) 2月에 새로운 君을 編成한 요시쓰네는 暴雨를 뚫고 少數의 배만으로 出擊, 普通 사흘이 걸리는 距離를 不過 몇 時間만에 走破하여 시코쿠 사누키국 세토나이카이 에 있던 헤이시의 據點 야시마 (屋島)를 奇襲한다. 山이며 民家까지 불태워버리면서 少數의 軍士를 大軍으로 부풀려 보이게 하는 作戰이었고, 怯을 먹은 헤이시는 도망쳐버렸다. 노리料理도 규슈 圖解에 成功하여, 헤이시 最後의 據點이었던 나가토 國 히코緦麻의 背後를 遮斷했다. 요시쓰네는 水軍을 編成해 히코緦麻로 進擊했는데, 陰曆 3月 24日 段노우라(壇ノ浦)의 싸움 에서 勝利하여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宿願을 이룬 요시쓰네에게 全勝을 致賀하는 法皇의 勅使가 當到했고, 이치노타니나 야시마 等地에서의 공훈자로서 헤이시로부터 빼앗은 三種神技(검은 물속에 가라앉아버렸다)를 받들고 4月 24日에 교토로 改善한다.

요리토모와의 對立 [ 編輯 ]

以後 兄 요리토모와의 사이가 벌어져 쫓기는 身世가 되고 마침내 朝廷으로부터 兆敵으로 몰리게 된다.

겐랴쿠 2年( 1185年 ) 4月 15日, 요리토모는 自身의 許諾도 받지 않고 朝廷으로부터 無斷으로 任官받은 간토의 武士들에게 교토에서의 任務 遂行을 命함으로써 事實上 그들의 도고쿠 歸還을 禁止했다. 또한 4月 21日 헤이시 追討에서 사무라이도코로 의 쇼視(所司)로서 요시쓰네의 補佐를 맡았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로부터 "요시쓰네는 始終 追討의 공을 自己에게만 돌리고 있습니다."라 적은 書信이 요리토모에게 이르렀다.

한便 요시쓰네는 앞서의 요리토모의 名에 不服해 單노우라에서 잡은 다이라노 무네謀利 (平宗盛)ㆍ 기요무네 (淸宗) 富者를 데리고 5月 7日에 교토를 떠나 가마쿠라로 改善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쓰네에게 不信을 품은 요리토모는 무네謀利 富者만을 가마쿠라에 들였을 뿐,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主席 7] 이 때 가마쿠라 郊外의 야마우치 腸(山內莊) 考試高에(腰越, 現 카마쿠라視) 만푸쿠사에 留置된 요시쓰네는 5月 24日, 兄 요리토모에게 自身에게는 反逆의 뜻이 全혀 없음을 呼訴하는 書信을 요리토모의 側近 오에노 히로모토 를 통해 요리토모에게 보냈다. 有名한 考試高에 腸(腰越狀)이다.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의 憤怒를 산 原因은 《아즈마카가미》의 說明대로라면 許可없이 棺위를 받은 것 外에도 헤이시 追討에서 軍監으로서 요리토모를 섬기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意見을 듣지 않고 獨斷으로 일을 進行시킨 것, 段노우라 戰鬪 以後 노리料理의 管轄인 규슈에 對한 越權 行爲, 麾下의 도고쿠 武士들에게는 些少한 잘못도 놓치지 않고 甚하게 責望하며, 요리토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性敗하여 武士들의 미움을 사는 等의 잦은 獨斷的 行動 때문이었다. 主로 사이고쿠 武士들을 引率해 헤이시를 滅한 요시쓰네의 많은 專攻은, 銀賞을 바라고 요리토모를 따랐던 도고쿠 武士들이 專攻을 세워 銀賞을 받을 機會를 빼앗는 結果를 招來했고, 當時 가마쿠라 政權의 基盤이었던 도고쿠 고케닌들의 不滿을 사게 되었다.

그 中에서도 特히 요리토모의 許可도 없이 棺위를 받았다는 事實은 아직 棺위를 授與받을 地位가 되지 못했던 요리토모의 存在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主席 8] 또한 單노우라에서 요시쓰네의 性急한 攻擊으로 安土쿠 天皇이나 니이노 亞麻를 自殺로 몰아가고 調整과의 去來 材料로도 써먹을 수 있었던 寶劍(三從神氣의 하나)을 잃어버린 일은 요리토모의 前後 構想에 蹉跌이 빚어지게 했다. [主席 9]

그리고 요시쓰네의 軍事的 才能과 德望이 法皇의 信用을 사고 또 武士들의 人心을 모으는 것은 무가 政權 確立을 目標로 하는 요리토모에게는 威脅的인 것이었다. 요시쓰네는 單노우라에서 改善한 뒤 일찍이 헤이시가 獨占해왔던, 인세이의 軍事的 뒷받침로서 기능해온 人奴미큐視(院御?司)에 補任되었을 뿐 아니라 헤이시의 捕虜인 다이라노 도키타다 의 딸 와라비히메 (蕨?)를 아내로 맞이했다. 한때 헤이시가 지녔던 傳統的 地位를 요시쓰네가 이어받으려 한, 或은 高시라카와人이 그에게 잇도록 하려는 움직임은 요리토모가 容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結局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했고, 6月 9日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에게 무네謀利 富者와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데리고 교토로 돌아갈 것을 命했다. 요리토모를 깊이 怨望하게 된 요시쓰네는 "간토에 不滿을 품은 者가 있거든 요시쓰네에게로 오라"고 말해버렸다. 이를 들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領地를 죄다 沒收했다. 요시쓰네는 오미 局에서 무네謀利 富者를 斬首하고, 시게히라를 앞서 시게히라 自身이 直接 불태웠던 도다이사에 보냈다. [主席 10] 이 渦中인 8月 16日에 이루어진 智謀쿠에서 이른바 겐지 6人의 西魏 任官에서 요시쓰네는 이요노카미를 兼任하게 된다. 한便 9月에 이르러, 요리토모는 교토의 로쿠兆 호리카와 邸宅에 있는 요시쓰네의 모습을 찾도록 가지와라노 가게토키 의 嫡男 街게스에 (景季)를 보내어 일찍이 요시나카를 따랐던 叔父 유키이에 追討를 要請했지만, 요시쓰네는 바짝 야윈 몸으로 나타나서 自身의 甁, 그리고 유키이에가 같은 겐지임을 들어 그것을 拒絶했다.

謀反 [ 編輯 ]

10月, 요시쓰네의 病은 핑계이며, 이미 그가 유키이에와 內通하고 있다고 判斷한 요리토모는 요시쓰네 討伐을 決定하고 게닌(家人)인 道士보노 쇼슌 (土佐坊昌俊)을 교토에 보냈다. 10月 17日, 土沙步 等 60餘 기가 교토의 요시쓰네 邸宅을 夜襲(호리카와野兎堀川夜討)하지만, 스스로 門을 나와서 應戰하는 요시쓰네에 유키이에가 加勢하여 戰鬪는 襲擊한 側의 敗北로 끝났다. 붙잡힌 쇼슌으로부터 이 夜襲이 요리토모의 名임을 알게 된 요시쓰네는 쇼슌을 죽이고 유키이에와 함께 교토에서 요리토모 打倒의 旗幟를 들었다. 그들은 高시라카와 法皇에게 다시 住商하여, 10月 18日에 요리토모 追討의 人센을 얻었지만, 요리토모가 아버지 요시토모를 供養하는 法要를 24日 열면서 家神을 모은 적도 있었으므로 요시쓰네에게 贊同하는 勢力은 적었다. 교토 周邊의 武士들도 요시쓰네에게 加擔하기는커녕 거꾸로 敵對視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또한 以後 法皇이 요시쓰네 追討의 人센을 내면서 요시쓰네는 더욱 窮地에 빠졌다.

29日에 요리토모가 直接 軍을 이끌고 요시쓰네 追討에 나서자, 요시쓰네는 西쪽에서 體制를 整備하기 위해 규슈行을 꾀했다. 11月 1日에 요리토모가 스루가 國의 氣勢 江에 이르렀고, 11月 3日 요시쓰네 等은 규슈의 오가타(?方) 집안을 依支해, 3百 氣를 이끌고 교토를 떠났다. 途中에 셋쓰 겐지의 다다 유키쓰나 (多田行綱) 等의 襲擊을 받아 이를 擊退하기도 했다. 6日에 一行은 셋쓰 國 誤오모노우라(효고 現 아마가사키시 )에서 船團을 짜서 규슈로 가려 했지만, 途中에 暴風으로 難破하는 바람에 主宗은 흩어지고 셋쓰로 밀려와 버렸다. 이로써 요시쓰네가 규슈로 가는 것은 不可能해졌다. 11月 7日에는 요시쓰네가 가지고 있던 官職을 모두 박탈당했다. 11月 25日에는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人센이 여러 쿠니마다 내려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리토모는 12月, 앞서 요리토모 追討의 선지를 作成했던 者나 親요시쓰네派 舊敎들을 解任하게 하고, 요시쓰네 等의 追捕를 위해 여러 拘泥에 슈고(守護)와 지토(持頭)의 設置를 要求했고, 요시쓰네 代身 요리토모의 對官으로서 교토에 들어온 好調 도키마사 를 통한 調整 사이의 交涉 끝에, 設置를 인정받는데 成功한다.

요시쓰네는 그의 家臣들이나 愛妾인 시라뵤시(白拍子) 시즈카 高젠 (靜御前)과 함께 요시노 에 몸을 숨겼지만, 여기에서도 追討를 받고 시즈카 高젠은 붙잡혔다. 逃亡친 요시쓰네는 半카마쿠라派 貴族이나 지샤의 도움으로 교토 周邊에 숨기도 했지만, 이듬해( 1186年 ) 5月에 이즈미 局에서 叔父 유키이에가 가마쿠라側에 被殺되고 各地에 潛伏해 있던 家臣들도 次例대로 發覺되어 殺害된다. 그러한 가운데, 요시쓰네의 이름이 요시쓰네에서 요시유키(義行)로 改名되었다가(《교쿠요》 5月 10日條) 다시 요시카打(義顯)로 改名당하고 있는데(동서 11月 24日條) 모두가 요리토모의 意向에 依한 것으로 調整 側에서의 消息일 뿐, 요시쓰네 本人이 이를 認知하고 있었는가에 對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人이나 貴族들이 요시쓰네를 일부러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疑心한 요리토모는 同年 11月에 "교토側에서 요시쓰네 便을 들겠다면 大君을 보낼 것"이라며 脅迫하기도 했다.

교토에서 더 발붙일 곳이 없게 된 요시쓰네는 家臣들과 함께 다시 한 番 오슈에 몸을 依託한다. 《아즈마카가미》 盆地 3年( 1187年 ) 2月 10日의 記錄에 보면 요시쓰네는 秋布網을 뚫고 二世ㆍ미노를 지나 오슈로 向했는데, 一行은 도다이사 再建을 위한 權軫 一行으로 變裝하고서 情實 사토 高젠과 딸을 데리고 히라이즈미에 숨었다고 한다.

最後 [ 編輯 ]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는 간토 西쪽을 制霸한 요리토모의 勢力이 오슈에까지 미치는 것을 警戒하여, 요시쓰네를 將軍으로 세우고 가마쿠라에 對抗하려 했지만, 盆地 3年( 1187年 ) 10月 29日 病으로 숨을 거둔다. 히데히라가 죽은 뒤 요리토모는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에게 요시쓰네를 잡아들일 것을 調整을 통해 强하게 壓力을 加했다. 한便 요시쓰네는 盆地 4年( 1188年 ) 2月에 데와국 에 나타나 가마쿠라側과 戰鬪를 벌이고, 이듬해( 1189年 ) 1月에는 교토로 돌아오려는 意志를 담은 요시쓰네의 便紙를 가진 히에이 山의 僧侶가 붙잡히는 等 여러 모로 再起를 圖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스히라는 세 番에 걸친 가마쿠라의 壓迫에 屈服해, '요시쓰네의 指示를 따르라'고 했던 아버지의 遺言을 어기고 尹4月 30日, 5百 基의 病死로 요시쓰네 主從이 있던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高老母가와노타치(衣川館)를 襲擊했다. 이때 요시쓰네 主宗은 모두 10餘 期에 지나지 않았다. 요시쓰네의 노토들은 次例次例 죽임을 當했고, 包圍당한 요시쓰네는 一切의 싸움도 하지 않은 채 지佛堂에 들어가 夫人 사토 高젠과 그 딸(當時 네 살)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 31歲였다. 또한 요시쓰네의 家神이었던 무사시步 벤케이 는 온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요시쓰네를 지키다 선 채로 죽었다는 傳說도 생겨났다.

事後 [ 編輯 ]

요시쓰네의 목은 술에 담가져 黑漆된 函에 넣어, 닛타 다카히라 (新田高平)에 依해 43日 뒤에 가마쿠라 로 보내졌다. 盆地 5年( 1189年 ) 6月 13日 와다 요시모리 (和田義盛)와 가지와라노 가게토키 等에 依해 考試高에의 바다 위에서 檢證이 이루어져 요시쓰네의 목이 틀림없음이 確認되었다고 한다.

傳承에는 그 뒤 목은 후지사와에 묻혀 그곳에 詩라하타 神社에서 모시게 되었으며, 몸은 구리하라視 구리고마노누마쿠라(栗駒沼倉)의 한間모리(判官森)에 묻혔다고 하며, 그가 最後를 거둔 오슈 高老母가와구의 韻制止 (雲際寺)에는 요시쓰네 一家가 自害한 直後 그 屍身이 처음 安置되었다 하여 요시쓰네 夫婦의 位牌가 安置되었는데, 지난 2008年 8月 6日 에 火災로 消失되었다.

傳說 [ 編輯 ]

悲劇的 英雄 요시쓰네의 生涯는 사람들의 同情을 불러 일으켰고 日本에서는 이러한 心理를 가리키는 用語인 호간비키 ( 日本語 : 判官?? )가 登場하게 되었다. 또한 英雄으로 描寫된 요시쓰네의 生涯는 架空의 이야기나 傳說이 次例次例로 附加되면서 事實과는 크게 동떨어진 요시쓰네上(像)이 形成되었다.

요시쓰네와 關聯된 傳說 中에서 가장 有名한 傳說로는 高祖 大橋 에서 무사시步 벤케이 와 만났다는 傳說, 陰陽師 기이치 好겐 의 딸을 통해 轉嫁의 竝書인 《 六道 》와 《 三略 》을 훔쳐서 배웠다는 傳說, 기누가와 戰鬪 때 벤케이를 선 채로 죽였다는 傳說 等이 있다. 이러한 傳說들은 요시쓰네 事後 200年 後인 무로마치 時代 初期 무렵에 지어진 《 基케이키 (義經記)》를 통해서 世上에 傳해지게 된다. 特히 《六道》 中에서 〈好卷(虎?)〉을 배운 요시쓰네가 지쇼·駐에이의 난 을 勝利로 이끌었다는 傳說이 傳해진 以後부터 日本에서는 成功을 위한 必讀書를 도라노마키 ( 日本語 : 虎の? )라고 부르게 되었다.

요시쓰네-칭기즈 칸 설 [ 編輯 ]

미나모토盧 요시쓰네와 칭기즈 칸

요시쓰네가 에조치 를 통해 大陸을 건너 칭기즈 칸 이 되었다는 傳說( ja:義?=ジンギスカン? )이 있다.

不死說과 北行설 [ 編輯 ]

호간비키(弱者를 同情하는 心理)는 後날 요시쓰네가 오슈 方向으로 北쪽으로 逃走했다는 不死說과 北行說을 낳았는데 이러한 傳說의 原形은 무로마치 時代 에 지어진 短篇 小說인 《 오토機조시 》 說話로 推定된다. 이 說話는 요리토모 擧兵 以前 當時에 靑年 時代였던 요시쓰네가 當時 오시마(渡島)라고 불리던 홋카이도 로 건너가서 怪異한 일을 겪는다는 內容을 담고 있다. 이러한 說話는 後날 日本에서 에조치 (홋카이도)의 아이누 에 對한 知識이 늘어나면서 기누가와로 避難을 간 요시쓰네가 에조치로 건너가서 아이누의 王이 되었다는 傳說로 바뀌게 된다.

大衆 文化 [ 編輯 ]

悲劇的 英雄 미나모토 요시쓰네는 많은 日本人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大河드라마를 包含한 다양한 作品 속의 有名 人物로도 자주 登場한다.

게임 [ 編輯 ]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 이 때의 도키와의 逃亡이나 그 뒤의 이야기는 《 헤이地모노가타리 》나 《깃케이키》등의 軍談小說에 詳細히 실려있지만 그들 記錄의 性格上 어디까지가 事實인지를 判別하기는 어렵다.
  2. 軍記小說이나 여러 傳說에 依하면 11歲(15世라고도) 때 自身의 出生을 알고, 僧侶가 되기를 拒否하고 구라마 山을 돌아다니며 武藝에 힘썼고, 구라마 山에서 텐구 假面을 쓴 逃亡者로부터 劍術을 배웠다고도 한다.
  3. 히데히라의 庇護를 받게 되는 過程에 對해서, 傳承에서는 샤나吳의 나이 16歲 때에 街네우리 氣치지(金賣吉次)라는 沙金長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는 當時 오슈와 교토 사이를 자주 오가던 商人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創作된 虛構의 人物로 여겨지고 있다.
  4. 《헤이케모노가타리》와 《겐페이성쇠기》에 따른 것이다. 《아즈마카가미》 駐에이 3年 2月 7一助에도 요시쓰네가 淨甁 70基를 거느리고 히요道理高에에서 攻擊했다고 하여, 이 戰鬪에서 요시쓰네가 큰 役割을 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 '싸움'에서 요시쓰네가 完遂한 役割이나 '비탈길에서부터 攻擊'하는 것이 實際로 있었던 일인지에 對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理論도 提示되고 있다.
  5. 《아즈마카가미》6月 21日組에는 요시쓰네는 强하게 任官을 바랬지만, 요리토모가 許諾하지 않았다는 記錄이 있다. 이는 지行國主人 요리토모 아래에서 現地에서의 資金 徵收를 行할 任務가 있었던 노리料理 等과, 교토에 머무르며 헤이시와의 最前線에 位置해 있었던 요시쓰네와의 役割의 差異 때문이었다고 看做하는 說이 있다(모토키 [2007]).
  6. 또한 《아즈마카가미》에 依하면 요시쓰네의 西쪽 出陣이 停止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理由를 들고 있다.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의 推薦을 얻지 않고 高시라카와 法皇에 依해 사에몬소위에 게比耳시소위(判官)로 任官되어, 종5爲하 官位와 함께 인에 오르는 것을 許諾받았다. 이에 對해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이것은 내가 바란 것이 아니지만 法皇이 여러 勳功을 無視할 수 없다며 억지로 주신 것으로 辭讓할 수 없었다"고 報告했다. 하지만 요리토모는 "요시쓰네가 내 뜻을 거스른 것은 이番 일만이 아니다"라 激怒하며 요시쓰네를 헤이시 追討에서 除外시켜 버렸다. 그러나 最近의 硏究에 따르면 요시쓰네가 西쪽 地方에 出陣하지 않았던 것은 3日의 헤이시의 난 때문이었고 임관은 이 時期에는 그다지 問題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見解가 있다(모토키 [2007], 히媤누마 [2005]).
  7. 엔케이本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한 番 가마쿠라에 들어와 요리토모와 대면했다고 되어 있다.
  8. 最近의 硏究에서는 요시쓰네가 헤이케 追討에서 除外된 것은 교토의 治安 維持를 위해서이지 《아즈마카가미》의 說明대로 前年 7月의 게非이시 任官으로 因한 요리토모와의 對立 때문은 아니라는 見解가 提起되었다(上?手ら [2004] 上?手雅敬,p.43-44、元木 [2007] p.129-130). 《교쿠요》 겐랴쿠 2年 6月 30日組에는 "쿠로에게 賞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란 말인가, 다른 깊은 뜻이 있어서란 말인가?"라며 銀賞의 不平等을 쓰고 있지만, 오히려 요리토모는 8月의 智謀쿠에서 요시쓰네를 이요노카미로 推薦하며 그의 功績에 相應하는 銀賞을 準備하고 있었다. 地方官 就任과 同時에 게非이시를 移任하는 것이 當時의 原則이었지만, 요시쓰네는 高시라카와仁義 慣例를 無視한 人事에 依해 이요노카미가 된 뒤로도 繼續 게非이時에 社에몬쇼이를 兼職하고 있었고, 가네자네는 이에 對해서 "大夫위를 겸한 일은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쓰고 있다. 모토키는 요시쓰네의 가마쿠라 召喚이 不可能해진 盆地 元年 8月의 이 '게非이시 留任(留任)'李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決定的 要因이었다고 主張했다(p.154-156). 한便, 昏鼓 카즈토는 定해진 組織이 아니었던 幕府 創設期의 요리토모에 있어 고케닌이 調整에 接近해 자유로이 任官되는 것은 큰 問題였고, 從來의 설대로 任官 問題가 요리토모와 요시쓰네의 決裂, 나아가 요시쓰네 沒落의 發端이었다고 主張하고 있다(『武力による政治の誕生』講談社選書メチエ, 2010年).
  9. 요리토모는 노리料理에게 充當한 書信에서 헤이시가 散調다카쿠라노미야(三條高倉宮, 모치히吐王), 起訴 요시나카가 '山의 미야人 度바노 욘노미야(鳥羽四宮, 實際로는 高시라카와 法皇의 黃自認 원혜 法親王)」를 殺害한 것 卽 皇親 殺害 行爲가 곧 그들 勢力의 沒落으로 이어졌다는 認識을 갖고 있었고, 때문에 安土쿠 天皇의 保護를 嚴命하고 있었고(《아즈마카가미》에 收錄된 '盆地 元年 正月 6日의 요리토모 書信' 中에서), 三種神技의 確保에 對해서도 같은 命令을 내리고 있었다.(《아즈마카가미》 盆地 元年 3月 14日條) 이는 요시쓰네에게도 똑같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요시쓰네는 安土쿠 天皇을 保護하지도 못했고, 더욱 行方不明된 寶劍에 對해서도 尤史 하치만區에 劍을 찾게 해달라는 祈禱를 드렸을 뿐(엔케이本 《헤이케모노가타리》) 積極的인 搜索을 하지 않았다. 덧붙여 요리토모나 調整은 노리料理나 사에키 카게히로 等에 明解 以後 2年 가까이 漁夫를 시켜 寶劍을 찾도록 했다(《아즈마카가미》문치 元年 5月 5日條 및 盆地 3年 6月 3日條, 《교쿠요》문치 2年 3月 4日條 및 文治 3年 9月 27日條)는 記錄이 있다.(谷昇「後鳥羽天皇在位から院政期における神器政策と神器?」(初出:『古代文化』60?2?、2008年/所?:谷『後鳥羽院政の展開と儀?』思文閣出版、2010年)
  10. 덧붙여 엔케이本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보면 요시쓰네는 一旦 가마쿠라에 들어와 요리토모와 대면한 後에 교토로 돌아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現存하는 '考試고에腸'이라 傳해지는 것에 對하여 眞僞를 疑心하는 說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