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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雙코피’의 傳說…레슬링 박장순은 그만큼 懇切했다[이헌재의 人生홈런]|東亞日報

‘시베리아 雙코피’의 傳說…레슬링 박장순은 그만큼 懇切했다[이헌재의 人生홈런]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2月 17日 12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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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手 時節 體重 調節로 힘들어했던 박장순 삼성생명 監督은 요즘은 잘 먹고, 熱心히 運動을 해 選手 時節 體重을 그대로 維持하고 있다. 박장순 監督 提供
어느 種目이건 太極마크를 단 選手들의 훈련량은 一般人들의 想像을 超越한다. 그런데 同僚 選手들조차 안쓰럽게 쳐다보는 種目이 하나 있다. 바로 레슬링이다. 레슬링 選手들은 쉴 새 없이 뛰고, 구르고, 器具를 들고, 相對를 메친다. 태릉選手村 時節 레슬링은 가장 먼저 運動을 始作해 가장 늦게 끝나는 種目이었다.

안 그래도 힘든 레슬링 選手들을 더 괴롭히는 건 ‘體重 調節’이다. 힘을 쓸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體重 種目인 레슬링은 잘 먹으면서도 自己 體級의 體重을 正確히 맞춰야 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박장순 감독이 상대 선수를 공격하고 있다. 경기 중 선명하게 보이는 복근이 인상적이다. 동아일보 DB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박장순 監督이 相對 選手를 攻擊하고 있다. 競技 中 鮮明하게 보이는 腹筋이 印象的이다. 東亞日報 DB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金메달리스트인 박장순 삼성생명 監督(55)도 例外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體重 調節을 잘 利用해 韓國 格鬪技 種目 選手로는 唯一하게 올림픽 3個 大會 連續 決勝 進出이라는 快擧를 이뤘다.

朴 監督은 1988年 서울 올림픽 레슬링 男子 自由型 68kg級에서 銀메달을 땄고,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74kg級 金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1996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같은 種目 銀메달을 收穫했다. 레슬링 그랜드슬램(올림픽, 世界選手權, 아시안게임, 아시아選手權 金메달)을 達成한 그는 2016年 世界레슬링聯盟(UWW) ‘名譽의 殿堂’에 헌액됐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세계레슬링연맹으로부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장순 감독. 동아일보 DB
2016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世界레슬링聯盟으로부터 名譽의 殿堂에 헌액된 박장순 監督. 東亞日報 DB
어린 時節 그는 體軀가 작은 便이었다. 元來 씨름 選手였지만 몸집이 작아 레슬링으로 轉向했다. 大田體高를 卒業한 그는 輕量級人 56kg級 選手로 한국체대에 入學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오니 피자, 치킨 等을 平素 보지 못했던 飮食들이 차고 넘쳤다. 朴 監督은 “얼마나 맛있는 게 많던지 밥을 세 空器씩 먹었다. 몸무게가 10kg 以上 늘고, 키도 10cm以上 컸다. 잠자고 있던 몸속의 힘이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1988年 서울올림픽엔 68kg級으로 出戰했다. 當時 그는 앞만 보고 뛰었다. 大會 前 어느 날 選手村에서 그는 러닝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옆에 한 黑人 選手가 같이 뛰고 있더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選手는 當代 最高의 陸上 스타 칼 루이스(美國)였다. 그는 “事實 올림픽이 그렇게 큰 大會인 줄 몰랐다. 칼 루이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매트 위에선 相對 選手가 누구든 힘과 霸氣로 밀어붙였다”고 했다.

銀메달을 딴 後 그는 男子 74kg級 競技를 보러 갔다가 人生의 轉換點을 맞게 된다. 華麗한 技術로 매트를 平定하던 케네스 먼데이(美國)가 金메달을 따는 걸 눈앞에서 본 것이다. 마음 속에선 “저 選手와 한番 붙어보고 싶다”는 불길이 솟아올랐다.

박장순 監督이 所屬팀 삼성생명 選手들과 포즈를 取했다. 레슬링 選手들은 좋은 食單과 꾸준한 鍛鍊으로 군살없는 몸매를 갖고 있다. 박장순 監督 提供
當場 74kg으로 體級을 올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體級을 올린 決定的인 契機가 된 건 1990年 初 열린 유럽 투어였다.

첫 大會가 열린 러시아에서 그는 體重 調節에 애를 먹었다. 아무리 努力해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 絶望한 그는 化粧室에서 自身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 코피를 냈다. 그렇게 單 1g이라도 줄여보려 한 것이다. 이 모습을 본 當時 코치는 “自身을 괴롭히지 말고 그냥 運動場을 뛰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 시베리아는 밤에 零下 40度까지 내려갔다. 흐르는 雙코피를 休紙로 틀어막고 運動場을 뛰고 또 뛰었다. 그만큼 懇切했고, 그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어떻게든 體重을 맞춘 그는 그 大會 金메달을 땄다. 優勝을 한 건 좋았지만 1m도 넘는 大型 트로피를 받은 게 또 다른 問題였다. 以後 프랑스와 터키, 美國 等을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移動을 거듭할 때마다 트로피는 한두 군데씩 부서지기 始作했고, 韓國에 오기 前 그는 神主단지처럼 모시던 트로피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베이징 아시아게임에서 金메달을 딴 後 그는 體級을 74kg級으로 올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박장순 감독.   동아일보 DB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當時 박장순 監督. 東亞日報 DB

74kg級에서 만난 ‘偶像’ 케네스 먼데이와의 對決은 連戰連敗였다. 첫 만남에서 폴로 敗했다. 以後에도 좀처럼 相對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鼓舞的이었던 건 맞對決이 거듭될수록 點數 差가 좁혀졌다는 거였다. 5番째 對決에서는 팽팽한 對決 끝에 延長戰에서 敗했다.

그는 傲氣가 생겼다. 먼데이를 이기기 위해 바르셀로나 올림픽 3個月 前부터는 親舊도 만나지 않고, 外出도 하지 않으며 修道僧처럼 살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그는 運命처럼 올림픽 決勝에서 먼데이를 다시 만났다. 그가 세운 作戰은 ‘버티기’였다. 作戰은 成功이었다. 競技 終了 15秒를 남기고 그는 태클을 試圖해 먼데이를 쓰러뜨렸다. 1-0 勝利였다. 5戰 6期 끝에 꿈을 이룬 瞬間이었다. 朴 監督은 “如前히 먼데이를 尊敬한다. 먼데이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며 “只今도 그를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내 人生을 바꿔준 選手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여러 개의 메달을 딴 선수들이 2012년 한 행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사격 진종오, 태권도 황경선,  레슬링 박장순.   동아일보 DB
올림픽에서 여러 個의 메달을 딴 選手들이 2012年 한 行事에서 포즈를 取했다. 왼쪽부터 射擊 진종오, 跆拳道 황경선, 레슬링 박장순. 東亞日報 DB
朴 監督은 1996年 애틀랜타 올림픽 같은 種目에서 銀메달을 따고 隱退한 後 國家代表 트레이너로 指導者 生活을 始作했다. 以後 삼성생명 레슬링團 監督이 됐고, 2016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國家代表 監督을 맡기도 했다.

74kg級 選手로 隱退한 그는 20餘 年이 지난 只今도 74kg의 몸무게를 維持하고 있다. 指導하는 選手들과 一週日에 두세 番 程度 함께 訓鍊한다. 그는 “瞬間 스피드만큼은 只今도 自身 있다. 스피드가 있으면 技術이 完璧하지 않아도 景氣를 主導해 나갈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示範을 보이려면 恒常 準備되어 있어야 한다. 體重이 더 늘지 않게 몸 管理에 神經을 많이 쓴다”고 했다.

박장순 監督은 요즘도 꾸준한 山行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管理한다. 寫眞은 朴 監督이 伴侶犬과 散策을 하는 모습. 박장순 監督 提供
타고난 壯士였던 朴 監督은 選手 時節 레슬링 選手들이 많이 하는 ‘줄 타고 오르기’의 匠人이었다. 11m 높이의 줄을 한 番에 10番씩 오르내렸다. 그걸로는 性이 차지 않아 15kg 圓盤을 발에 매고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그는 “나뿐 아니라 레슬링 國家代表 選手라면 大部分 서울에서 釜山까지 줄을 탔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잘하지 못했던 건 달리기였다. 當時 태릉選手村에 입촌한 選手들은 불암산 頂上까지 뛰어오르곤 했는데 그는 레슬링 選手 中 꼴찌를 도맡아 했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싫을 것 같지만 그는 요즘도 가끔 집이 있는 南楊州 別內에서 佛巖山까지 登山을 하곤 한다. 그는 “選手 때는 佛巖山 山神靈님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서 運動을 했다. 요즘도 가끔 佛巖山 登山을 하며 佛巖寺에 들르곤 한다”고 했다.

쉬는 날엔 아내와 함께 旅行을 떠나곤 한다. 最近에도 江原道 江陵과 襄陽을 다녀왔다. 그는 “平日에 熱心히 選手들을 指導한 뒤 休日에는 마음을 비우고 再充電을 한다”며 “選手들에게도 運動할 때는 最善을 다하고, 쉴 때는 화끈하게 쉬고 오라고 한다”고 했다.

박장순 監督이 龍仁 삼성생명 訓鍊場에서 두 팔을 벌리고 포즈를 取했다. 背景에는 朴 監督이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金메달을 땄을 當時의 모습이 보인다. 龍仁=이헌재 記者
그는 一般人들에게 ‘腹筋’의 重要性을 强調했다. 性別과 나이를 떠나 腹筋에 힘이 떨어지면 몸 全體가 처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굳이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器具를 들며 腹筋 運動을 할 必要는 없다. 집에서 소파 위에서나 方席을 깔고 앉아 엉덩이를 붙인 채 발을 反復해서 들어 올리는 가벼운 動作으로도 充分하다”며 “TV를 볼 때든, 쉴 때든 이렇게 한 달 만 꾸준히 하면 腹筋을 통해 에너지가 생기고, 굽어 있던 어깨가 펴지는 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바닥에 엎드린 채로 兩손과 兩발을 들어 올리는 動作도 몸의 均衡을 維持하는 데 아주 좋다”고 덧붙였다.

20年 가까이 삼성생명 監督을 맡고있는 그는 沈滯에 빠진 韓國 레슬링 自由型의 未來를 女子 레슬링에서 찾고 있다. 삼성생명은 2021年 女子 自由型 레슬링팀을 創團했고, 所屬 選手 천미란이 4月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아시아選手權 女子 自由型 50㎏級에서 銅메달을 따는 等 成果를 내고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4位에 오른 천미란은 來年 파리올림픽 出戰을 目標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박장순은 “日本은 女子 레슬링 强國이다. 우리도 못할 게 없다. 좋은 選手들을 잘 키워 새로운 메달밭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 같은 指導者가 되려는 그의 人生 最終 目標는 選手村長이다. 大韓體育會 理事도 맡고 있는 그는 “選手로서, 또 指導者로서 幸福한 人生을 보냈다. 언젠가는 選手村長으로 내가 살아온 人生과 노하우를 後輩 選手들과 함께 나누는 꿈을 꾼다. 그날을 위해 하루하루를 熱心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記者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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