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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曜뒷談]黑雨 김대환을 기리는 奇異한 追慕祭|東亞日報

[土曜뒷談]黑雨 김대환을 기리는 奇異한 追慕祭

  • 東亞日報
  • 入力 2013年 3月 9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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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쓰즈미 기타 아리랑 탱고… 소리의 大同祭를 바칩니다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원서동 북촌창우극장에서 열린 김대환 추모 콘서트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은 이광수(가운데 꽹과리 든 이) 사물놀이패의 타악이었다. 시원한 빗소리가 쏟아지듯 신명나는 두드림의 초혼(招魂)이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日 午後 4時, 서울 鍾路區 원서동 북촌창우극장에서 열린 김대환 追慕 콘서트의 序幕을 열어젖힌 것은 이광수(가운데 꽹과리 든 이) 四物놀이牌의 打樂이었다. 시원한 빗소리가 쏟아지듯 신명나는 두드림의 초혼(招魂)이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1. 2013年 3月 1日 午前 9時 - 兄님, 봄입니다.

‘김대환 兄님 봄입니다. 13. 3. 1.’

零下 2度. 삼월이라지만 봄치곤 좀 추운 아침이었다. 서울 세검정 自宅에서 장사익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午後에 있을 어떤 祭祀 생각에 그는 설렜다. 이날은 ‘兄님’李 죽은 날이었다. 打樂 演奏者, 細書가(細書家), 모터사이클 狂, 또는 다 합쳐 自由인. 누군가는 기인, 狂人. 다른 이는 천상예人이라 부르는 사람, 故(故) 김대환 兄님(1933∼2004).

#2. 2013年 3月 1日 午後 3時 - 舞臺 위의 ‘빅 브러더’

서울 鍾路區 원서동, 昌德宮 옆에 볕이 들었다. 宮 西쪽 담벼락 밖에 있는 北村창우극장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舞臺 위 왼쪽에는 장사익이 아침에 쓴 ‘김대환 兄님 봄입니다’가 걸렸다. 오른쪽에는 日本의 傳統音樂 名人 오쿠라 쇼노스케가 當日 써내려간 般若心經이 붙었다. 그 아래는 남流蘇 畫伯이 그려온 그림이 차지했고, 이 모두 위에 스크린이 자리했다. 가운데는 김대환의 자리였다. 꽁지머리에 동그란 眼鏡을 끼고 왼손으로 턱을 괸 모습이 마치 오늘 舞臺를 監視하는 ‘빅 브러더’ 같다. 큰兄님? 그래. 오늘 모인 사람들은 그를 兄님, 큰兄님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냥 ‘크신 분’이라 일컫기도 했다.

#3. 2013年 3月 1日 午後 4時 - 影幀, 살아나다

100席짜리 劇場에 觀客 180名이 들어찼다. 넘쳐난 사람들이 客席 사이 階段에, 舞臺 위 兩便 가장자리에까지 흘러 앉았다. 汎濫 같았다. 20名 넘는 演奏者들도 숨는 法 없었다. 그들이 兩班다리인지 똬리인지를 틀고 앉은 舞臺 한쪽이 곧 待機室이었다.

舞臺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映像이 나타났다. 검은 재킷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帽子를 눌러쓴 그의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북채, 장구채, 드럼 스틱을 섞어 總 6個의 채를 야무지게 틀어쥔 그가 내리치는 北에서 천둥과 비의 소리가 들고났다. 김대환의 號는 黑牛(黑雨·劍은 비)다. 밤에 쏟아 붓는 검은 비처럼 보이지 않지만 竹篦처럼 人間을 깨우는, 存在의 소리. 1994年, 김대환이 日本의 부토(日本 現代舞踊의 한 갈래) 團體를 訪問했을 때 연주한 實況 映像이었다. 演奏家 그치자 우레와 같은 拍手가 또 다른 暴雨를 만들어냈다. 舞臺 오른쪽으로 日本人들도 보였다. 日本 傳統 北 連奏 名人 오쿠라 쇼노스케도 있었다. 始作이었다. 한바탕 춤판, 소리판, 웃음판. 愉快한 김대환 9周忌 追慕 콘서트의, 눈물 한 방울 없는 발칙한 追慕祭의 始作은 더 발칙했다. 獵奇的인 葬禮였다.

추모 콘서트 무대에 오른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追慕 콘서트 舞臺에 오른 거문고 演奏者 허윤정.
#4. 2004年 3月 1日 밤 - 이런 葬禮 봤소?

서울 新村洞 세브란스病院 葬禮式場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소리만 좇던 큰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우리까지 조용해지면 되겠느냐’는 숙덕임이 信號였다. 고 박병천 先生의 씻김굿이 始作됐다. 춤꾼 李愛珠의 煞풀이와 장사익의 소리가 더해졌다. 아예 김대환이 生前에 錄音한 音盤이 틀어졌다. 여기 강은일의 解禁, 허윤정의 거문고가 섞여들며 산 者와 죽은 者의 奇妙한 合奏가 始作됐다. 鎭魂을 위한 卽興演奏가 始作됐다. 옆 殯所에서 들고 일어났다. “肅然한 자리에 웬 딴따라들이 몰려와서 騷亂이오?!” “이거, 미친 것들 아냐!?” 抗議하러 온 다른 弔問客들은 葬禮式場에서 펼쳐지는 異色 風景에 이내 빠져들었다. 藝人들의 樂器와 목청에서 暴雨처럼 넘쳐나는 曲(哭)인지 曲(曲)인지 모를 소리는 한 番도 들어본 적 없는 異常한 追慕였고 그 나름대로 悽然한 意識과도 같았다.

#5. 2013年 3月 1日 午後 4時 30分 - 四物놀이

징, 꽹과리, 장구, 北. 이렇게 事物(四物)李 늘어서자 舞臺 위가 꽉 찼다. 앞선 映像 속 故人의 演奏를 이으려는 듯 韓國 打樂의 眞髓인 四物놀이가 펼쳐졌다. ‘타다앗 타다앗 탓 타다다앗.’ 이광수 先生의 꽹과리가 장단을 主導하는 가운데 舞臺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生前 寫眞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꽁지머리를 늘어뜨린 채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을 掌匣 낀 손으로 그러쥐고 있는 야무진 모습. 事物은 모터사이클이 驅動되듯 一絲不亂하게 音의 空間을 疾走했다.

#6. 2004年 3月 3日 午前 - 都心을 흔든 奇異한 路祭

서울 세종로 四거리에 번쩍이는 巨大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30臺가 늘어섰다. 건널목에 멈춰 선 市民들의 눈길이 거기 固定됐다. ‘局長(國葬)이라도 열린 걸까. 어마어마하군.’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行列은 光化門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故人이 30年間 苦行 같은 練習을 했던 인사동을 한 바퀴 돌아 大學路로 向했다. 運柩 行列이었다. 路祭의 先頭에 김대환의 遺構가 있었다. 大學路의 재즈카페 ‘千年동안도’와 길에서도 큰兄님을 追慕하는 산 者들의 風樂이 이어졌다.

그는 生前에 오토바이狂이었다. 그의 演習室을 2層에 印 서울 仁寺洞 아리랑 名品館 앞에 할리 데이비슨 한 臺가 멈춰서 있으면 ‘여기 김대환 練習 中’이라는 뜻이었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노래도 있지만 그는 오토바이로 리듬을 탔다. 舞臺 위에 巨大한 오토바이를 올려두고 ‘투두頭두 투두頭두 툿 套頭 툿 套頭’ 하는 排氣筒 소리에 맞춰 북을 두들기던 有名한 ‘오토바이-打樂 協演’은 傳說이 아닌 實際였다.

#7. 2013年 3月 1日 午後 5時 - 韓國의 아버지, 절 받으세요

事物이 演奏를 그치자 이날 公演의 社會를 맡은 白髮童顔의 傳統公演 演出家 진옥섭이 입술을 뗐다. “오늘 이 자리에는 正말 많은 분들이 자리했습니다. 앞서 映像에서 잠깐 봤던 日本의 부토 舞踊家분들을 모시겠습니다. 큰 拍手로 맞아주세요.”

津靑色 衣裳을 맞춰 입은 日本 女性 둘, 街伽倻 사나에와 도모에 시즈네가 舞臺에 올랐다. 冥想音樂을 背景으로 그들은 無表情한 얼굴로 매우 느리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부토를 췄다. 부토는 日本의 傳統藝術인 가부키와 爐에 西歐 現代舞踊이 結合돼 만들어진 前衛 舞踊의 一種이다. 그들의 悠長한 춤은 9分間 이어졌다. 세로로 선 북을 亂打하는 김대환 先生의 全身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演奏曲 ‘沙漠’이 舞臺를 이어받았다. 스페인風의 憂愁에 찬 기타 演奏가 달콤쌉싸래한 分散和音과 神經質的인 트레몰로를 오가며 5分 30秒 동안 客席을 사로잡았다.

日本傳統 打樂 演奏의 名人으로 꼽히는 오쿠라 쇼노스케가 바통을 이었다. 韓國과 日本의 演奏者들이 3·1節에 벌이는 妙한 이어달리기였다. 그는 舞臺에 오르자마자 客席을 등지고 中央의 김대환 寫眞을 向해 큰절부터 올렸다. 이어 작은 장구처럼 생긴 日本 傳統 打樂器 쓰즈미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두들기며 ‘이야우허우虛!’ 하는 奇異한 口音을 내기 始作했다.

音樂的 父親에 對한 例였다. 오쿠라는 김대환을 ‘韓國의 아버지’라 부른다. 김대환은 1980年代부터 日本 舞臺에 進出했다. 旣存 拍子體系를 解體하고 無秩序 속에 秩序를 담아내는 그의 絶妙한 프리재즈 打樂 演奏를 먼저 알아본 건 재즈 마니아가 많은 日本이었다. 오쿠라는 1990年代 김대환을 만나고 音樂的 交流를 이어갔다. 그는 김대환 追慕 콘서트에 1回 때부터 빠짐없이 參席했다. 오쿠라는 “김대환 先生은 音樂的 테크닉과 人格 兩面에서 내가 만나본 最高의 人物”이라며 “追慕祭의 場所는 좁지만 (그를 그리는) 생각은 宇宙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오쿠라의 演奏에 京畿民謠 소리꾼 김보라의 謳吟이 겹쳐졌다. 韓日 音樂人의 卽興校監은 第3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음은 오쿠라의 口音과 打樂에 요코者와 가즈야의 傳統 피리 連奏, 아키 와쿠나이의 日本語 詩朗誦이 합쳐졌다.

1일 오후 김대환 추모 콘서트의 마지막 무대는 장사익의 노래였다. 김대환의 생전 사진(뒤)이 무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日 午後 김대환 追慕 콘서트의 마지막 舞臺는 장사익의 노래였다. 김대환의 生前 寫眞(뒤)李 舞臺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 曳引, 기인, 狂人, 아니 그냥 ‘크신 분’에게 ▼

요코者와는 가슴팍에 오카리나와 닮은 피리를 곱게 받쳐 든 채 口音을 했는데 陰性이 피리에 닿으며 나는 背音(倍音)李 獨特한 雰圍氣를 자아냈다. 客席은 알 수 없는 言語와 낯선 소리의 이채로운 組合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장사익은 “追慕 콘서트가 始作된 初期에는 客席에서 ‘3·1節에 日本의 뿌리가 담긴 傳統音樂이 韓國 땅 가운데에서 堂堂히 울려 퍼지는 게 말이 되느냐’는 큰소리도 나왔다”고 回顧했다.

公演 熱氣는 中盤을 넘어서며 달아올랐다. 解禁 演奏者 강은일은 신시사이저, 콘트라베이스 演奏者와 함께 散調 자진모리와 리베르탱고, 密陽아리랑을 넘나들었다. 고석진의 신명나는 모둠北 演奏는 元老 트럼펫 演奏者 崔先輩와의 協演으로 이어졌고, 허윤정의 거문고와 元日의 징이 加勢하며 音階와 拍子 體系의 境界는 흐물흐물해졌고 舞臺는 뜨거워졌다.

故人의 演奏가 다시 登場했다. 有名한 北과 오토바이 排氣筒의 生前 協演 場面이 스크린 위에 흘렀다. 그 音波가 舞臺 위 演奏者들의 實時間 演奏와 겹쳐졌다. 生과 社가 交感하고 疏通하기 始作했다. 9年 前 故人의 葬禮式場에서 열린 奇怪한 合奏가 再演되는 영험한 瞬間이었다.

時間은 어느새 7時를 向하고 있었다. 진옥섭은 “여러분의 膀胱이 2倍가 되는 이 公演, 올해는 多幸히 若干 짧아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피날레를 裝飾하러 장사익이 舞臺에 올랐다. 김광석의 기타 伴奏에 맞춰 ‘빛과 그림자’로 목을 푼 그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하며 ‘大田 블루스’를 구성지게 뽑았다. 客席과 舞臺는 비로소 하나가 돼 ‘大田發 0時 50分’을 提唱했고 장사익은 ‘김대환∼ 김대환∼ 김대환의 블루스’로 노랫말을 바꿔 불렀다. 이제 ‘追慕’는 온 데 간 데 없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잔치가 됐다. 손으로 턱을 괸 채 深刻한 表情을 한 김대환의 影幀까지도 신명과 諧謔의 一部가 되는 듯했다. 어느새 曲目은 ‘봄날은 간다’로 바뀌었다. 고석진의 北, 崔先輩의 트럼펫 演奏가 加勢했다. “C마이너, 아니, C로, ‘돌아가는 三角紙’ 한番 해봐∼” 장사익의 注文에 崔先輩의 트럼펫이 먼저 운다.

洋樂과 國樂, 古典과 卽興, 韓國과 日本의 精神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런 舞臺를 어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할 때쯤 舞臺에 出演陣이 모두 올라온다. 늘 마지막은 이거다. ‘아리랑’.

“日本분들度 1원 한 張, 국물 하나 없어요.”(장사익) ‘盧 개런티’, 出演料 없는 公演이다. 근데 한 500萬 원씩 받은 이들처럼 죽기 살기로 演奏한다. 신명을 길게 끈 演奏가 끝나자 장사익이 影幀에 대고 先唱한다. “大患 兄님, 빠이빠이!” “빠이빠이!!” 무슨 追慕歌 以來?

#8 2013年 3月 1日 午後 9時 - “兄님, 빠이빠이!”

서울 仁寺洞 韓食집 ‘兩班宅’. 1萬 원씩 내면 김대환 追慕 콘서트 뒤풀이에 누구나 同席할 수 있다. 밥만 먹는 게 아니라더니 果然 그렇다.

된醬찌개를 곁들인 食事에 텁텁한 막걸리까지 한 巡杯 돌고 났다. 舞臺 위에서 한바탕 놀았던 演奏者들이건 客席에서 한바탕 놀았던 觀客들이건 區分 없이 70餘 名이 하나가 됐다.

參加者들이 깨끗이 비운 밥床을 무르子 食堂 房 두 칸을 이어붙인 空間이 그대로 마당이 되고 작은 콘서트腸이 됐다. 四物놀이를 이끌던 이광수 名人이 ‘修德寺의 女僧’을 ‘땡기’자 고석진이 엿장수 가위 演奏로 座中을 壓倒했다. 金光石, 장사익, 崔先輩, 김보라, 오쿠라, 요코子瓦家 번갈아가며 못다 한 노래와 演奏를 들려줬다. 술기운 올라 듣는 質樸한 트로트는 프리재즈와 다른 맛을 보여줬다. 이날의 異常한 追慕는 마지막까지 그 以上含意 根源인 愉快함을 잃지 않았다. 3·1節 萬歲三唱度, 曲도 아닌 이런 것으로. “사랑은, 아름답게! 郵政은, 길게! 人生은, 즐겁게!… 兄님,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서울 인사동 김대환 박물관에 전시된 고인의 손톱 크기의 세서(細書) 작품. 그는 역동적인 타악 연주와 대비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 쓰기에도 혼신을 다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서울 仁寺洞 김대환 博物館에 展示된 故人의 손톱 크기의 세서(細書) 作品. 그는 力動的인 打樂 演奏와 對比되는 般若心經과 金剛經 쓰기에도 渾身을 다했다. 장승윤 記者 tomato99@donga.com
▼ 打樂-재즈 椄木한 巨匠 김대환의 삶과 奇行(奇行) ▼

■ 韓國 最初 록그룹 드러머… 프리재즈 序幕

“그분은 ‘音樂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요.”(거문고 演奏者 허윤정)

“그분 人生을 어떻게 整理해? 몇 時間 取材해서 몇 字 끼적일 거면 쓰지도 마요. 여기 옛날 記事들 있어. 이거 綜合해서 大江 마감하든지.”(유재만 ‘아리랑 名品館’ 社長)

5日 午後 만난 柳 社長은 20年間 김대환을 後援하며 臨終까지 지켰다. 1970年 베트남 사이공(只今의 호찌민)에서 士兵으로 服務 中이던 柳 社長은 當時 韓國 慰問團長으로 온 김대환을 案內하며 因緣을 맺었다. 1985年, 騷音 問題 때문에 아무도 演習室을 내주지 않자 焦燥한 마음에 인사동을 徘徊하던 김대환과 偶然히 邂逅한 뒤 當時 ‘人事 슈퍼마켓’(只今의 아리랑 名品館 자리) 2層의 작은 空間을 練習 場所로 내줬다. 김대환은 每日 午前 6時 할리 데이비슨을 가게 앞에 세워두고 演習室로 올라와 午後 10時까지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터지도록 북을 두들겼다.

김대환은 ‘最初’와 ‘劇團’을 平生 꼬리票처럼 달고 다녔다. 록과 헤비메탈, 國樂과 재즈를 넘나들다 結局 뿌리인 打樂의 世界로, 소리의 宇宙로 들어갔다.

1933年 仁川에서 태어난 김대환은 1950年代 末 仁川 東山高 2學年을 中退하고 美8軍 舞臺에서 드러머로 活動을 始作했다. 1960年代 初 신중현과 함께 韓國 最初의 그룹사운드라 불리는 ‘애드포’를 結成했다. 1965年과 66年에는 KBS와 MBC의 專屬 樂團에서 드럼 스틱을 잡았다. 1970年 신중현의 그룹 ‘퀘션스’에 合流했다. 1971年에는 그룹사운드協會의 初代 會長으로 推戴됐다. 조용필度 김대환을 통해 프로 音樂界에 入門했다. 김대환이 최이철(‘사랑과 平和’), 조용필과 結成한 ‘金트리오’를 통해서였다.

록의 代父로 자리매김한 그는 未練 없이 록을 떠났다. 1970年代 中盤부터 서울 季冬의 小劇場 ‘空間사랑’에서 강태환(색소폰), 崔先輩(트럼펫)와 結成한 ‘江트리오’로 10年間 活動하며 韓國 프리재즈의 序幕을 열었다.

1985年 강태환과 함께 大韓海峽을 건너가 日本 재즈界에 進出했다. 이 무렵, 한 톨의 쌀알에 直接 만든 道具로 般若心經 專門 283字를 새겨 넣었다. 이 古今에 類例가 없는 세서(細書) 作業은 1990年 世界 기네스북에 登載됐다.

美國과 日本을 오가며 演奏 活動을 하던 그는 1993年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할리 데이비슨 排氣筒과 協演해 世上을 놀라게 했다. 七旬을 바라보던 2000年까지 그는 프랑스 아비뇽國際音樂祭, 日本 오사카 간사이 페스티벌, 英國 애든버러 國際 재즈 페스티벌 같은 굵직한 國際 行事에 招請됐다. 그는 外國에서도 고집스레 오토바이 투어를 이어간 速度狂이었다. 高校 中退의 그는 2004年 1月에는 漢城大(當時 한완상 總長)에서 名譽哲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旣存의 藝術的 範疇와 틀을 뛰어넘어 人間의 創意力과 想像力을 소리와 글씨의 領域에서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破格的으로 승화시킨 藝術人’이라는 게 學位 授與의 邊이었다.

2004年 肺炎이 惡化돼 入院하고 그해 3月 1日 結局 숨을 거두기 한 달 前까지도 그는 오토바이 헬멧과 여섯 個의 북채를 놓지 않았다. 練習 벌레였던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데 時間을 쏟기 아깝다며 혀끝을 잘라버린 이야기도 有名하다.

柳 社長은 “1990年代 中盤, 日本 音樂家 기타로(‘실크로드’ 等 TV, 映畫 音樂으로 有名한 人物)와 도쿄 산토리홀에서 연 合同 콘서트는 그의 名演奏 中 하나”라며 “數十 臺의 신시사이저로 火星의 壁을 쌓은 其他爐를 北 한 臺를 내세운 原初的 打樂으로 壓倒한 그는 북채를 내려놓고 ‘落葉歸根(落葉歸根)’이란 書藝를 쓰고는 舞臺를 내려왔다. 火星과 拍子의 잎사귀는 華麗해 보이지만 音樂의 뿌리는 두드림이라는 意味였던 듯하다. 그에게 반한 現地人들에게 둘러싸여 두 時間 동안 사인會를 이어간 記憶이 생생하다”고 했다.

김대환은 세 次例 솔로 音盤(‘黑牛’ ‘默祐’ ‘黑頃’)을 냈지만 只今은 모두 絶版돼 求하기 힘들다. 진옥섭은 “卽興이란 말을 너도나도 쓰고 싶어 하는 世上이 됐지만 김대환 先生이 先驅한 卽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貪내는 卽興”이라고 했다.

김대환은 숨은 才能을 꿰뚫어보는 데 卓越했다고 知人들은 입을 모은다. 風物牌에서 太平簫를 불던 장사익의 音聲을 알아보고 ‘山토끼를 불러보라’고 한 뒤 ‘拍子를 세지 말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라’며 個性 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才能을 깨운 逸話도 膾炙된다. 장사익은 “머금지 않고 물을 스쳐 흘려보내고도 난(蘭)이 꽃과 香氣를 피워내는 理致처럼 金 先生이 스치듯 던진 한 마디의 무게가 엄청났다”고 했다.

강은일은 “1989年 김덕수 四物놀이 大會에서 제 演奏를 듣곤 ‘樂器를 들고 날 찾아오라’고 하셨다. 1990年 日本 公演을 함께하고 ‘黑牛’라는 音盤도 함께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大學校 3學年 때 懇切히 꿈꾸던 東亞 콩쿠르 對象을 받은 뒤 目標를 잃은 狀況에서 先生은 新世界를 열어보여 주셨다. ‘音樂을 깨라’ ‘解禁에서 징 소리를, 색소폰 소리를 내보라’던 그의 一喝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북촌창우극장을 세운 演劇演出家 허규(1934∼2000)의 딸인 거문고 演奏者 허윤정도 김대환을 통해 音樂의 新世界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金 先生을 알게 됐고 강은일이 國樂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도 參與하게 됐다. 그는 事物이 통하는 理致를 아는 鎭靜한 藝術人이었다”고 돌아봤다.

黑牛의 이름 아래 모인 이들은 來年 10周年 追慕祭를 ‘終日 祝祭’와 展示로 擴大한다는 計劃을 벌써 세우고 있다.

임희윤 記者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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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追慕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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