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商家(喪家)에서 내 설움에 曲(哭)한다’는 말이 있다. 어릴 적 집안 어른의 殯所에 가면 亡者의 配偶者와 子女보다 훨씬 서럽게 痛哭하는 이가 꼭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疑訝했지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 순 없었다.
어느 程度 나이를 먹고 알았다. 家族보다 더 嗚咽하는 사람의 相當數는 亡者와의 因緣이나 哀痛함 때문이 아닌 自身의 感情을 濾過 없이 쏟아내는 一種의 鬪士(投射)를 한다는 걸. 누가 봐도 더 슬플 사람 앞에서 公開的으로 펑펑 우는 일이 故人과 遺家族을 얼마나 위하는 行動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行爲가 無理 없이 받아들여지던 時節이 있었다.
盧會燦, 최인훈, 황현산 等 우리 社會에 足跡을 남긴 人物들이 떠났다. 황현산 評論家는 生前 소셜미디어로 活潑히 大衆과 疏通해 그를 기리는 글이 類달리 많다. 故人과의 追憶을 回顧하거나 그의 著作物에 對한 稱頌이 主를 이루지만 몇몇은 좀 異質的으로 느껴진다.
얼핏 봐도 故人과 오프라인에서 큰 因緣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눈물이 날 것 같아 先生님 冊을 못 펴겠다’거나 ‘寫眞과 이름만 봐도 눈물이 나서 소셜미디어에 못 들어오겠다’고 한다. 그를 時代의 辭表(師表) 或은 唯一한 큰어른으로도 치켜세운다. 하지만 故人의 동생 황정산 詩人은 葬禮 後 ‘兄을 國民 스승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兄은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權威나 個人崇拜를 싫어했다’는 글을 남겼다.
한 인플루언서(소셜미디어 等에서 많은 追從者를 거느리며 相當한 影響力을 發揮하는 個人)는 ‘황현산 先生이 아버지와 한날한時에 돌아가신 것을 慰安으로 삼는다’라고 썼다. 두 亡者가 生前 어떤 因緣이었는지는 모르겠다. 設使 있다 해도 本人이 喪主로 정신없을 渦中에 父親의 死亡과 法的 他人의 죽음을 엮어 트윗을 날리는 行動이 많은 共感을 살까.
이에 對해 한 트위터리안은 ‘自己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寫眞 添附해서 感性 팔고 있는 것 理解가 안 감. 거기에 황현산 先生 돌아가신 것까지 엮어서’라고 指摘했다. 表現이 좀 거칠지만 喪禮 中 尙州가 不特定 多數에게 소셜미디어로 父母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 아직 社會的으로 널리 通用되지 않는다는 點도 勘案해야 한다.
勿論 血族만 切切한 追慕와 哀悼를 할 資格이 있는 건 아니다. ‘個人 計定에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쓰는데 무슨 相關이냐’는 反論도 妥當하다. 하지만 公開 소셜미디어에 올린 有名人에 關한 글이 100% 個人 用途일 순 없다. 波及 效果를 몰랐을 理 없으니 內容에 對한 論爭은 一定 部分 不可避하다.
이런저런 일들을 보면서 디지털 時代의 適切한 哀悼 方式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殯所를 찾든 온라인 弔問을 하든 核心은 眞情性이다. 황현산의 冊 한 番 안 읽어 보고 ‘故人의 冥福을 빈다’고 쓰거나, 남들에게 ‘大體 무슨 因緣이길래 저렇게까지…’란 느낌을 주는 過度한 感情 表現은 自制해야 하지 않을까. 過猶不及과 中庸의 美德은 언제나 有效하다.
※R.I.P=
Rest in Peace의 줄임말로 영미圈에서 亡者의 永眠을 비는 表現. 韓國의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와 類似한 뜻이다.
하정민 디지털뉴스팀 次長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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