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子들은 各處에서 獨立을 宣言하고 萬歲를 부르는데… 無知蒙昧하고 身體가 허약한 女子의 一旦(一團)이나 같은 國民, 같은 良心의 所有者이므로 躊躇함 없이… 同胞여, 빨리 分期瑕疵.’ 1919年 3·1獨立宣言書보다 한 달 앞서 썼다는 大韓獨立女子宣言書다. 中國 西間島에서 活動하던 愛國婦人會가 女性들의 獨立鬪爭을 督勵하기 위해 쓴 檄文이었다.
▷3·1運動은 男女 區分 없이 온 國民이 團結했던 民族運動이었다. 女性으로는 主로 柳寬順 烈士만 記憶되지만 17歲 나이로 3·1運動에 參與했다 獄中 殉國한 東風新 烈士도 있다. 이듬해 이를 再演했다 獄苦를 치른 培花女學校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小恩命 안옥자 안희경 等 ‘第2 柳寬順’도 적지 않았다. 1920年 平南道廳에 爆彈을 投擲했던 安敬信 烈士처럼 작고 軟弱한 몸으로 抗日 武裝鬪爭에도 參與한 ‘無名’의 女性도 많다.
▷獨立運動家 男便을 둔 아내의 犧牲과 毅然함은 끈질긴 獨立運動의 밑거름이자 武器였다. 新興武官學校를 세운 友黨 李會榮 先生의 아내인 이은숙 女史는 兩班家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他地에서 獨立運動家들을 밥해 먹이고 삯바느질로 軍資金을 대는 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다. 쪽紙 한 張 남길 수 없었던 當時 獨立運動家의 숨결을 細細히 記錄한 ‘西間島 시종기’라는 回顧錄도 썼다. 島山 安昌浩 先生의 아내인 이혜련 知事는 子女 5名을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아내, 엄마로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美國에서 大韓女子愛國團을 構成하고 獨立資金을 募金해 祖國을 도왔다.
▷1909年 3月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朝鮮人 全體의 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며 死刑을 앞둔 安重根 醫師와의 面會는 끝내 하지 않았던 어머니 組마리아 女史. 安 義士 死後에도 臨時政府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 亦是 獨立運動家였다. 그럼에도 女性 獨立運動은 잊혀진 歷史다. 나라 잃은 설움에 家父長制 束縛까지 女性의 삶은 二重 三重으로 苛酷했을 터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이름은 찾지 못한 女性 獨立運動家가 많다. 더 늦기 前에 熾烈했지만 가려진 삶이 穩全히 빛을 보기를 바란다.
우경임 論說委員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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