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在美 韓人 靑年들 낮엔 일하고 밤엔 訓鍊받으며 獨立의 꿈 키워|동아일보

在美 韓人 靑年들 낮엔 일하고 밤엔 訓鍊받으며 獨立의 꿈 키워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1月 11日 03時 00分


코멘트

[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88화> 美國 下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며 독립군 양성을 본격화했다(왼쪽 사진). 미주 한인 최대 군사단체였던 대조선국민군단은 하와이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며 위용을 과시했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박용만은 1914年 하와이에 臺朝鮮國民群團을 創設하며 獨立軍 養成을 本格化했다(왼쪽 寫眞). 美洲 韓人 最大 軍事團體였던 臺朝鮮國民群團은 하와이에서 市街行進을 벌이며 威容을 誇示했다.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提供
‘美日戰爭은 韓國의 獨立을 回復할 一帶 機會로다. 美日戰爭이 되면 日本의 勢力이 韓國과 滿洲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日本이) 專制政治를 쓰는 러시아는 이겼으나 8000萬 人口가 다 兵丁인 美國을 어찌 當하리오.’

美國 韓人團體 共立協會의 機關紙 공립신보는 1907年 9月 6日子 社說에서 美日戰爭은 韓國이 獨立할 機會라고 强調했다. 1907年은 헤이그 萬國平和會議에 密使를 派遣했다는 理由로 高宗이 强制 廢位되고 정미의病이 일어난 때이다. 風前燈火 같던 祖國의 處地를 걱정하던 在美 韓人들은 事實上 大韓帝國이 사라지게 됐다는 생각으로 美日戰爭說을 擧論하며 獨立戰爭 準備를 서둘러야 한다고 促求했다.

美日戰爭說은 韓人들만의 바람은 아니었다. 美國과 日本이 葛藤을 빚으면서 美國人들의 反日 感情은 相當히 激化된 狀態였다. 1905年 캘리포니아 州議會는 日本人移民制限法을 通過시켰고 1906年 샌프란시스코에선 日本人 學生 入學 禁止를 包含한 反日運動을 펼치고 있었다. 美國 內 日本人들이 美國의 港口와 砲隊 位置를 偵探해 地圖를 作成하다가 發覺됐다는 報道도 잇따랐다. 日本이 美國을 侵攻한다는 美日戰爭說은 바다 건너 유럽에서도 나돌 程度였다.(독립기념관 ‘韓國獨立運動의 歷史’)

韓半島에서 地理的으로 멀리 떨어진 在美 韓人들은 主로 對美 外交와 個人의 實力 養成에 集中했다. 하지만 박용만(建國訓長 大統領章)을 비롯한 武裝鬪爭論者들은 美國 땅에서 軍 指揮官들을 育成해 앞으로 滿洲나 沿海州 等에서 펼쳐질 獨立戰爭에 寄與하기를 期待했다. 이들은 美日戰爭이 터지면 日本이 敗北하고 韓國의 獨立이 可能할 것이라고 믿고 軍事學校 設立에 공을 쏟았다. 美 本土와 하와이에 居住하던 500餘 名의 大韓帝國 軍人 出身들이 여기에 힘을 보탰다. 祖國 光復에 寄與하겠다고 다짐한 韓人 靑年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軍事訓鍊을 받는 고단한 生活을 기껍게 여겼다.


○ 네브래스카 韓人少年兵學校

생도들이 생활했던 하와이 오아후섬 아후이마누 병영의 1915년 모습.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生徒들이 生活했던 하와이 오아후섬 亞후이마누 兵營의 1915年 모습.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提供
박용만은 獨立協會 萬民共同會 保安會 等에서 啓蒙運動을 벌이다 獄苦를 치렀다. 以後 그는 海外에서 武力抗爭을 통한 國權 回復을 꾀하겠다며 1905年 美國으로 亡命했다. 그리고 4年 程度 흐른 1909年 6月 네브래스카州 커니 地域의 한 農場에 ‘韓人少年兵學校’를 열었다. 海外 最初의 獨立軍官學校였다. 美國 聯邦政府와 州政府의 認可를 받아내 軍隊에서 使用하는 銃을 購入했고 軍 出身 김장호에게 軍事訓鍊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隣近 헤이스팅스地域의 大學(헤이스팅스臺)으로부터 敎室과 運動場 使用의 許諾을 받아낸 뒤에 學校를 大學 構內로 옮겼다.

이곳 學生들은 平素에는 各自 다니던 學校에서 工夫하고 6∼8月 여름放學 3個月 동안 헤이스팅스學校에 들어왔다. 낮에는 農場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木銃을 들고 軍事訓鍊을 받는 힘든 生活이었다. 勞動과 軍事訓鍊을 竝行하는 ‘屯田兵’으로 만들어 獨立戰爭에 對備하자는 박용만의 構想이 反映된 結果였다. 學生들은 軍事學科 歷史 數學 科學 等을 익혔다. 敎育課程은 美國의 陸軍士官學校人 웨스트포인트 方式을 따랐고 3年制로 進行됐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에 韓人公會를 만들어 모든 韓人을 加入시킨 뒤 한 사람當 每年 3달러씩 내도록 해 學校 運營資金으로 썼다.

韓人少年兵學校는 1914年까지 100餘 名의 卒業生을 輩出했다. 박용만이 1911年 대한인국민회 機關紙 新韓民報 主筆로 招聘돼 떠나면서 弱化됐지만 韓人少年兵學校는 在美 韓人들의 獨立意識을 鼓吹하고 以後 美洲 地域에서 活潑했던 軍人養成運動의 起爆劑가 됐다.(‘한국독립운동의 歷史’)

멕시코 韓人들도 同參했다. 멕시코 韓人 中 200餘 名이 大韓帝國 軍人 出身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韓人들을 對象으로 1909年 5月부터 每日 1, 2時間씩 兵法體操를 가르쳤고 1910年 2月에는 生徒 33名의 숭無學校를 設立하기도 했다.


○ 庚戌國恥 悲報에 軍人養成運動 擴散


庚戌國恥(8月 29日)가 臨迫한 1910年 7月 4日, 대한인국민회 北美地方總會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共同大會에서 日本을 敵國으로 定하고 對應活動을 벌이기로 決意했다. 外交的인 宣傳戰과 軍事人材 陽性을 담은 9個項의 決議案이 通過됐고, 이를 推進할 愛國同盟短刀 結成됐다. 軍人養成運動을 통한 獨立戰爭을 本格的으로 進行하기로 했다는 意味였다. 愛國同盟段이 結成된 建物은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街에 現在도 남아 있다. 이곳은 1909年 美 本土의 共立協會와 하와이의 韓人合成協會가 합쳐진 국민회 總會館으로 使用되기도 했다. 지난해 12月 1日 午後 現場을 訪問했다. 總會館의 當時 모습은 사라지고 外觀이 나무로 裝飾된 3層 個人住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와이地方總會도 7月 4日 호놀룰루에서 代表會議를 열고 抗日 鬪爭과 軍人養成事業을 擔當할 帶同供辰丹을 組織했다. 愛國同盟段과 帶同供辰丹은 武藝奬勵門을 發表하고 軍事敎育 敎材도 出刊했다. 以後 在美 韓人社會에서 軍人養成運動이 本格化되면서 1910年 말까지 캘리포니아 캔자스 와이오밍 等에서 訓鍊半 義勇訓鍊隊 少年兵學院 等이 組織됐고 軍事訓鍊이 進行됐다.

하와이의 軍事訓鍊은 다른 地域보다 體系的으로 이뤄졌다. 하와이地方總會는 1910年 11月 煙霧部를 만들어 多數의 韓人이 居住하는 地域에서 每日 저녁 木銃으로 軍事訓鍊을 시켰다. 軍事訓鍊에 參加한 韓人들은 200餘 名에 達했다. 이때 하와이 韓人 300餘 名이 義兵隊를 組織해 獨立戰爭을 일으키고자 韓國으로 出發했으며, 美 本土와 멕시코 主宰 韓人들이 武器와 彈藥을 購入해 故國으로 보낼 準備를 하고 있다는 所聞이 나돌았다. 日帝는 在美 韓人들의 軍人養成運動이 尋常치 않다고 判斷하고 하와이 地域 軍事訓鍊 움직임을 담은 諜報報告書를 作成하기도 했다.


○ 박용만의 ‘山 넘어 兵學校’

네브래스카에서 韓人少年兵學校를 세웠던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自身의 꿈을 크게 펼칠 機會를 잡았다. 1912年 하와이地方總會 機關紙 新韓國寶 主筆로 赴任한 그는 이듬해 하와이 州政府로부터 特別警察權을 承認 받아 韓人自治制를 實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事業 財源을 確保하기 위해 國民義務金制度도 貫徹시켰다.

1941년 미일전쟁 이후 재미 한인들이 미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달고 다닌 배지.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1941年 美日戰爭 以後 在美 韓人들이 美國의 勝利를 祈願하며 달고 다닌 배지.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提供
박용만은 1914年 6月 오아후섬 카할루에 ‘臺朝鮮國民群團’과 ‘對朝鮮國民軍士官學校’를 創設했다. 韓人들은 農場主와 耕作 都給契約을 맺은 파인애플 農場을 軍團에 넘겨주고 農事를 지어 얻은 利益을 寄附하는 方式으로 軍人養成運動을 積極 도왔다. 軍隊 經驗이 있는 이들은 아예 敎官으로 參與했다. 軍團 幕舍 落成式은 國恥日인 8月 29日 韓人 600餘 名이 지켜보는 가운데 進行됐다. 권영신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理事長은 “當時 하와이는 美洲 地域 最大의 韓人社會였다”며 “박용만은 自身이 主張해온 武力抗爭을 準備하기 위해 하와이로 가서 陸軍士官學校처럼 먹고 자고 하는 群團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와이軍司令部는 박용만에게 軍團 設立을 認可하면서도 實際 銃器 使用은 許可해주지 않았다. 學生들은 軍團에서 寄宿하면서 農莊에서 勞動하고 틈틈이 軍事訓鍊을 받을 때 木銃을 利用해야만 했다. 敎科 內容은 韓人少年兵學校의 것을 발전시켜 28種의 敎材를 使用했다. 호놀룰루의 東北쪽 큰 山 너머 溪谷에 軍營이 位置해 學校는 ‘山 넘어 兵學校’, 生徒들은 ‘山 넘어 아이들’ 또는 ‘우리 獨立軍’이라는 別名으로 불렸다. 軍團 學生은 103名에서 始作해 300餘 名으로 늘었고, 祖國光復戰爭에 參加한다는 생각에 士氣도 높았다.(‘미주 韓人의 民族運動’)

第1次 世界大戰에서 聯合國에 加擔하면서 美國과 親密한 紐帶關係를 맺은 日帝는 1915年 여름 美 國務長官에게 臺朝鮮國民群團의 活動 中斷을 强力히 要求했다. 이에 美國 政府는 하와이 總督에게 박용만과 追從者들의 武器 所有 與否와 日本 內政 干涉 및 叛亂 煽動 與否를 調査하라고 指示했다. 壓迫을 받은 하와이 州政府는 하와이地方總會에 承認했던 特別警察權을 取消했다. 이즈음 外交論을 重視하는 李承晩 系列이 하와이地方總會를 掌握한 것도 惡材였다. 박용만의 臺朝鮮國民群團을 財政的으로 뒷받침했던 하와이地方總會의 支援을 期待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인애플 凶作으로 收入이 줄고 農場主가 美 政府의 壓力을 의식해 農場 都給契約을 延長하지 않으면서 臺朝鮮國民群團은 結局 1917年 門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韓人들의 軍人養成運動은 1919年 3·1運動을 契機로 다시 불꽃을 피웠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3·1運動 100年 #美國 #美日戰爭 #박용만 #臺朝鮮國民群團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