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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샌프란시스코서 울린 銃聲… 韓人들 獨立熱望 일깨웠다|동아일보

탕! 탕! 샌프란시스코서 울린 銃聲… 韓人들 獨立熱望 일깨웠다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1月 4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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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87화> 美國 上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명소인 페리빌딩은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처단한 역사의 현장이다. 샌프란시스코=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美國 샌프란시스코의 觀光 名所인 페리빌딩은 張寅煥 田明雲 義士가 親日 外交顧問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處斷한 歷史의 現場이다. 샌프란시스코=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美國 샌프란시스코의 中心地 유니언스퀘어에서 東쪽으로 10分 程度 걷다 보면 오래된 時計塔이 눈에 띈다. 스페인 세비야 大聖堂의 히랄다 鐘塔을 모델로 1898年에 세워진 이 塔은 높이가 71m에 이른다. 時計塔이 돋보이는 페리빌딩은 한 世紀가 지난 只今도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로 通한다. 지난해 12月 1日 비가 뿌리는 날씨에도 페리빌딩 周邊에는 觀光客들로 북적였다.

112年 前인 1908年 3月 23日, 이 빌딩에서 3發의 銃聲이 울렸다. 張寅煥 전명운 두 醫師가 大韓帝國 外交顧問으로 日帝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親日 美國人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向해 쏜 銃彈이었다. 스티븐스는 가슴과 다리에 銃彈을 맞고 이틀 뒤 숨졌다.

이날 義擧는 朝鮮獨立運動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國內外 韓人들에게 民族獨立과 國權 回復에 對한 熱望을 다시 刻印시켰다. 當時 조선주車君司令部도 “美國에서 스티븐스가 排日 韓國人에게 殺害됐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形勢가 急變해 戰勢가 다시 激增하고 所要地域이 擴大됐다”고 評價했을 程度다. 또 이듬해인 1909年 10月 安重根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射殺하고 李在明은 같은 해 12月 明洞聖堂에서 賣國奴 李完用을 短劍으로 찌르는 일로 이어졌다.

그동안 分裂됐던 美洲 韓人社會도 이날 義擧를 契機로 하나로 뭉쳤다. 1909年 國民會를 거쳐 1910年 誕生한 대한인국민회는 北美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滿洲 等 5個 地方總會를 둔 海外 獨立運動의 最高 機關으로 發展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9年 4月 상하이臨時政府가 出帆하기 前까지 海外에 세워진 臨時政府 役割을 遂行했다.(국가보훈처 ‘無形의 政府 國民會 100年’)


○ 愛國心에 불탄 두 醫師

3月 21日 샌프란시스코에 到着한 스티븐스는 美國 記者들 앞에서 記者會見을 한다. 日本이 韓國을 保護한 뒤로 韓國에 利益 되는 일이 많으며 農民과 人民들은 虐待를 받지 않기 때문에 日本人을 歡迎한다는 詭辯을 늘어놓았다. 그의 거짓 主張은 이튿날인 22日 現地 新聞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報道됐다. 韓人代表 4名은 페어먼트 호텔에 묵고 있는 스티븐스를 찾아가 發言 取消를 要求했으나 그는 “韓國은 獨立할 資格이 없다”며 妄言을 멈추지 않았다.


23日 午前 9時 10分頃,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스티븐스가 日本 領事와 함께 페리빌딩에 들어서려는 瞬間 田明雲이 拳銃을 뽑았다. 하지만 그는 銃을 쏘지 못했고 肉薄戰이 펼쳐졌다. 이때 옆에 있던 張仁煥이 拳銃 3發을 發射했고 스티븐스는 쓰러졌다. 전명운度 어깨에 1發을 맞았다.

두 醫師는 裁判 過程에서 堂堂했다. 張仁煥은 法官에게 “스티븐스가 保護條約을 贊成하니 2000萬 同胞를 毒殺하려는 者이다. 이 盜賊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 同胞가 반드시 滅亡하게 되겠으므로 내가 신명을 내놓고 이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張寅煥과 田明雲이 各各 屬한 大同譜國會와 共立協會가 共同으로 後援會를 만들고 裁判 誠金 7390달러를 모았다. 銃을 쏜 張仁煥은 ‘愛國的 幻想에 依한 2級殺人’ 嫌疑로 25年 禁錮刑을 宣告받았고 전명운은 保釋으로 釋放됐다. 愛國 行爲임을 强調한 辯護人의 勝利이자 韓人들의 辯護 聲援이 結實을 거둔 것이었다.(‘미주이민 100年: 初期 人脈을 캔다’)


○ 無形의 政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에선 韓人合成協會가, 美 本土에선 安昌浩의 共立協會가 代表的인 韓人團體였다. 스티븐스 狙擊 事件 以後 두 團體는 統合 論議를 始作해 1909年 2月 ‘국민회’가 誕生한다. 1910年에는 大同保國回까지 합쳐지면서 美洲韓人團體는 ‘대한인국민회’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設立된 대한인국민회는 1938年 로스앤젤레스로 本部를 옮긴다.

권영신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은 현판을 가리키며 “109년 전 이름에 대한민국이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권영신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理事長은 懸板을 가리키며 “109年 前 이름에 大韓民國이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지난해 12月 4日 찾아간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記念館에는 初期에 만든 懸板이 걸려 있었다. 권영신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理事長은 “대한인국민회는 109年 前에 만들어진 이름인데 只今의 大韓民國 國號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며 “대한인국민회는 國民이 主人이 되는 國家를 志向했다”고 說明했다.

대한인국민회는 庚戌國恥(1910年 8月 29日) 以後 亡國民(亡國民)으로 轉落한 海外 韓人들의 自治政府 役割을 할 中央總會를 設置하고 中央總會(本部 샌프란시스코) 傘下에 北美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滿洲 等 5個 地方總會와 116個 地方會를 뒀다. 義務金이라는 會費도 걷었다. 1912年 中央總會 宣布式에서 박용만은 中央總會가 國家 建設 以前의 臨時政府 體制라는 뜻에서 ‘無形의 政府’라고 宣言했다.

1913年 大韓人국민회의 位相을 높이는 事件이 일어난다. 그해 6月 25日 韓人 11名이 캘리포니아 州 헤밋의 살구農場에 일하러 갔다가 日本人으로 誤認돼 쫓겨났다. 日本 政府가 在美 韓人은 日本 國民이라며 美 政府에 公式 抗議하면서 外交 問題로 飛火됐다.

北美脂肪總會長 李大尉는 6月 30日 브라이언 國務長官 앞으로 電報를 보냈다. “在美 韓人은 韓日合邦 以前에 韓國을 떠났기 때문에 日本의 植民 國民이 아니고 韓國人”이라며 “日本 領事의 干涉을 받지 않도록 해 달라”고 要求했다. 이에 國務長官은 이틀 뒤 “在美 韓人의 問題는 日本 官吏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交涉할 것”이라는 答信을 보내왔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敎授는 “日帝 軍警의 滿洲 進出은 日本 植民 國民을 保護한다는 美名下에 이뤄졌고 똑같은 論理를 美國에서도 使用하려다 失敗한 것”이라며 “이 事件 以後 美洲 韓人들은 日本의 干涉을 받지 않고 持續的으로 獨立運動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3·1運動 以後 宣傳外交展

1919年 中央總會長이었던 安昌浩는 3·1運動 勃發 消息을 상하이에서 보낸 電報를 통해 3月 9日 接한다. 中央總會는 各 地方總會에 이를 傳播하고 美國 等이 알도록 宣傳外交戰을 펼쳤다. 9日 午後에는 美洲 韓人들이 상항韓人監理敎會에 모여 萬歲를 외치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 機關紙 新韓民報는 “壯快하여도 이렇게 壯快하고 신기하與도 이렇게 神奇한 일은 眞實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라고 紹介했다.

재미 한인들은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1차 한인대회를 개최한 뒤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했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제공
在美 韓人들은 3·1運動을 알리기 위해 1919年 4月 14∼16日 필라델피아에서 1次 韓人大會를 開催한 뒤 美國 獨立記念館까지 行進했다. 대한인국민회記念財團 提供
在美 韓人들은 美 言論과 知識人에게 우리의 獨立 意志와 日帝의 野蠻的인 植民支配 實相을 알리기로 하고 4月 14日부터 사흘間 필라델피아의 리틀劇場에서 第1次 韓人大會를 開催했다. 徐載弼이 議長을 맡았고, 美國의 言論·企業·宗敎·敎育界 人士가 多數 參席했다. 韓人이 적은 필라델피아를 開催地로 定한 理由는 이곳이 美國 獨立宣言書와 憲法을 作成한 歷史的인 都市였기 때문이었다. 韓人大會 參加者들은 決議文과 呼訴文을 採擇한 뒤 美 軍樂隊의 演奏에 맞춰 獨立記念館까지 太極旗와 星條旗를 흔들며 市街行進을 했다.(독립기념관 ‘韓國獨立運動의 歷史’)

대한인국민회는 4月 22日 徐載弼을 責任者로 한 필라델피아 韓國通信部를 設立한 뒤 美 國民과 美國社會를 對象으로 宣傳外交戰을 벌인다. 그해 6月에는 ‘韓國評論’이라는 英文 雜誌도 發行했다. 여러 都市에서 親韓派 美國人들의 親友會가 組織됐다. 1919年 3月부터 1921年 9月까지 美國 內에서 韓國 獨立에 同調한 論說과 記事가 9702件이었고, 親日 性向은 50件에 不過했다.(‘재미한인 50年史’)


○ 臨政 財政 뒷받침한 在美 韓人

在美 韓人들의 臨政 支援은 外交와 財政 分野에서 두드러졌다. ‘獨立運動史’는 임정의 財源은 처음부터 끝까지 在美 韓人들에게 크게 依存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몫을 한 것이라고 評價했을 程度다. 在美 韓人이 財政的으로 크게 支援한 것은 海外 同胞 中에서 가장 經濟的으로 豐足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3·1運動 以後 美洲 韓人들은 獨立義捐金 公採金 愛國金 血性金 國民負擔金 獨立金 等 다양한 이름으로 돈을 모아 獨立運動을 支援했다. 1919年 12月 末 대한인국민회 中央總會는 8萬8000餘 달러를 募金해 臨政과 歐美委員部에 3萬2600달러를 보내고 外交宣傳費로 1萬4000달러를 使用했다고 報告했다. 3·1運動을 전후해 美國에서 募金된 獨立義捐金은 約 20萬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독립운동사’)

재미 夫人團體들도 나섰다. 美 本土의 大韓女子愛國團은 日本 商品 不買運動과 함께 寄附金 募金運動을 展開했다. 고추醬 간醬 된醬을 만들어 販賣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1300달러를 臨政과 獨立新聞에 보냈다. 하와이의 大韓婦人救濟會는 3·1運動 때 被害를 입은 愛國志士 家族에게 1500달러를 보냈다. 또 國內에 災難이 있을 때마다 東亞日報, 基督敎靑年會 等에 救護金을 傳達했다. 多뉴바 韓人들은 1920年 3月 1日 市內 主要 道路에서 3·1運動 1周年 記念 퍼레이드도 벌였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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