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賤民으로 태어나 當代 文人들과 交流… 種2品 作爲까지 받아|동아일보

賤民으로 태어나 當代 文人들과 交流… 種2品 作爲까지 받아

  • 東亞日報
  • 入力 2013年 9月 9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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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分社會 朝鮮時代 개川에서 龍이 된 男子들] <1>嘉義大夫 寸은 유희경

《 班常의 區別이 뚜렷했던 朝鮮時代에 微賤한 身分과 弱者로서의 限界를 뛰어넘어 出衆한 能力으로 成功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川에서 태어나 龍이 된 男子, 이른바 ‘개龍男’입니다.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은 10日부터 12月 3日까지 12回에 걸쳐 每週 火曜日 午後 2∼4時 ‘能力으로 難關을 헤쳐 간 사람들’을 主題로 歷史文化講座를 開催합니다. 이 가운데 特히 눈길을 끄는 개龍男의 이야기를 要約해 紙面에 連載합니다. 》

朝鮮 中期의 所聞난 妓生이자 女流詩人人 매창(1573∼1610)李 사랑한 男子, 當代 學者들이 모여든 文化 舍廊房을 이끈 文人. 바로 賤民 出身으로 種2品(朝鮮時代 18品階의 벼슬 中 네 番째 品階) 嘉義大夫 作爲까지 받은 寸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이다.

“南쪽 地方 桂娘(매창)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오늘 그 眞面目을 보고 나니/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1591年 봄날 南道를 旅行하던 유희경이 매창을 처음 찾아와 지어 준 시다.

유희경이 매창보다 28歲 위였지만 둘은 첫 만남부터 剛하게 끌렸다. 두 사람이 賤民과 妓生이라는 身分에 對한 共感帶가 있었고 文學이라는 共通의 言語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듬해 壬辰倭亂이 일어나고 유희경이 義兵으로 나서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유희경의 文集 ‘촌은집’에 따르면 그는 生前에 種2品 嘉義大夫 爵位를 下賜받고 死後에는 鄭2品(18品階 中 세 番째) 漢城府 判尹에 追贈됐다. 歷代 位인 1000餘 名을 記錄한 ‘동국始華휘성’에는 檀君, 王建, 李成桂 等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賤民으로 태어난 유희경은 13歲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三年喪을 치렀는데 이 消息이 當代의 學者 남언경의 귀에 들어갔다. 남언경에게 正統 禮法을 배운 유희경은 賤民으로는 드물게 손꼽히는 賞·葬禮 專門家로 成長했다. 一般人에게 賞·葬禮 全般을 助言하고 葬禮를 도맡아 했다.

그는 喪家집에 불려 다니면서 틈틈이 詩를 즐겨 지었다. 文治主義 國家 朝鮮에서는 身分이 낮다고 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 禁止되진 않았고 書堂에서 누구나 글을 익힐 수 있었다. 유희경은 讀書堂을 드나들면서 領議政을 지낸 박순을 만났다. 유희경의 詩를 높이 評價한 박순이 그에게 本格的으로 詩를 가르쳤고 그는 더 많은 士大夫와 交流하게 되었다.

유희경은 1601年 昌德宮 西쪽 溪谷 衿川 近處에 돌을 쌓아 침流大(枕流臺)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詩를 썼다. 壬辰倭亂 以後 이곳에는 領議政을 지낸 이원익과 ‘芝峯類說’을 쓴 李睟光을 비롯해 當代의 내로라하는 學者와 官僚들이 찾아와 詩를 나누고 風流를 즐겼다.

李睟光은 침類臺를 가리켜 “넓은 바위 周圍에는 복숭아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 있고 시냇물 兩쪽으로는 꽃비가 흩뿌리니 緋緞 물결이 춤추는 것 같다. 옛날의 武陵桃源이 이보다 더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當代의 文化 舍廊房이던 침類臺를 드나든 學者들은 大部分 徐敬德의 學風을 繼承한 이들이었다. 徐敬德은 當時 異端으로 取扱된 陽明學과 道敎를 받아들이는 等 開放的 性向이 剛했다. 이 때문에 賤民 出身 유희경과도 隔意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 時期는 身分 移動이 가장 活潑한 時期였다. 유희경은 壬辰倭亂 때 義兵으로 나가 싸운 功績을 認定받아 良人이 되었고, 以後 兩班 士大夫들과 本格的으로 交流를 始作했다. 1609年에는 朝廷에서 中國 使臣들의 接待費用을 堪當하기 어려워지자 婦女子들의 半指를 거둬 充當하자는 解決策을 내 鄭3品 堂上官의 爵位를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이 다시 만난 것은 離別 後 15年 만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의 故鄕인 全北 扶安의 名所를 함께 돌아다니며 詩를 읊고 사랑을 노래했다. 하지만 뭇 男性을 相對해야 하는 妓生과 妻子息이 있는 有婦男의 사랑이 이뤄질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3年 뒤 매창은 世上을 떠났다.

유희경이 末年에 지은 詩들에는 如前히 매창에 對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그 누가 너의 玉骨 故鄕 땅에 묻어 주리/정미년에 多幸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講義=신병주 건국대 史學科 敎授   
整理=신성미 記者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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