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誕生한 지 100年이 됐다. 臨政 誕生과 運營에 많은 先烈의 땀과 犧牲이 있었지만 그中에서도 李東寧 先生의 功勞는 두드러진다. 1919年 3·1運動이 일어나자 先生은 中國 상하이로 건너가 臨時議政院의 初代 議長을 맡아 臨政 樹立의 産婆役을 했다. 그리고 統合 임정의 內務總長, 國務總理, 大統領 代理, 國務令, 主席 等을 하면서 20餘 年 동안 臨政을 이끌었다. 金九도 ‘白凡逸志’에 ‘今日의 誤認(吾人)을 있게 한 裏面에는 이동녕의 支援이 있어 可能하였다’고 하였다.
先生의 筆體는 한 劃으로 하나의 글字를 쓰는 ‘連綿型(連綿型)’이다. 이는 世上에서 일어나는 複雜한 일을 單純化하고 事物의 連結 關係를 理解할 수 있는 ‘複合的 思考力’이 있음을 의미한다. 또 情緖가 豐富하며 自信感이 있고 乾燥하지 않으면서도 人情과 義理가 깊음을 알려준다. 빠르고 比較的 큰 글씨를 보면 勇氣가 있고 判斷이 빠르며 積極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先生의 洞察力과 指導力이 임정의 礎石을 놓고 이끄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先生은 1910年 庚戌國恥 以前부터 敎育이나 言論을 통한 啓蒙運動의 方式으로는 日帝의 侵略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判斷하고 武裝鬪爭으로 轉換해 戰爭을 벌여 獨立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先生이 初代 所長을 맡았던 新興講習所는 抗日武裝鬪爭의 主役들을 養成했다.
先生은 좋은 行政家이기도 했다. 글字를 始作할 때 윗部分의 餘白이 거의 없는 것은 積極性을 말해준다. 橫의 間隔과 글字 間의 間隔이 모두 넓은 것에서는 새로운 環境에 適應을 잘하지만 조심스럽고 思慮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올라가는 筆劃은 肯定的인 思考를, 긴 가로선과 세로線은 忍耐心이 剛하고 일을 잘 마무리한다는 것을 意味한다. 先生은 老軀를 이끌고 金九와 함께 光復軍을 創設하다가 持病으로 殉國하면서 臨政 傘下의 세 政黨이 統合해서 大同團結해 달라는 遺言을 남겼고 結局 그 뜻은 이루어졌다.
구본진 辯護士·筆跡 硏究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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