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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都圈/메트로 像像]낳아준 땅 爲해 飽和 속으로 ‘푸른 눈의 韓國人’|東亞日報

[首都圈/메트로 像像]낳아준 땅 爲해 飽和 속으로 ‘푸른 눈의 韓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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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3年 4月 15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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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터지자 美서 돌아와 再入隊

은평평화공원 윌리엄 쇼 대위 동상
恩平平和公園 윌리엄 쇼 大尉 銅像
“韓國에서 태어났으니 韓國 사람입니다. 내 祖國에서 戰爭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便하게 工夫만 하고 있겠어요. 내 祖國에 平和가 온 다음에 工夫를 해도 늦지 않아요.”

6·25戰爭 當時 外國에서 留學하던 韓國 學生의 便紙가 아니다. 美國人인 윌리엄 해밀턴 쇼 海軍 大尉(韓國名 鉏葦簾)가 1950年 9月 仁川上陸作戰이 끝난 뒤 이성호 當時 海軍 中領(5代 海軍參謀總長)에게 한 말이다. 美軍 將校로 第2次 世界大戰에 參戰해 軍服務를 마친 쇼 大尉는 6·25戰爭이 勃發하자 ‘第2의 祖國’ 韓國을 위해 自進 再入隊해 싸우다 녹번리(現 서울 은평구 녹번동) 戰鬪에서 散花했다.

녹번동 恩平平和公園에 가면 그의 韓國사랑과 犧牲精神을 기리는 銅像(寫眞)이 있다. 높이 2.2m(氣團 包含 3.5m)의 銅像은 正服을 입고 차렷 姿勢로 自身이 피를 흘렸던 이 땅을 凝視한다. 2008年 안병태 前 海軍參謀總長의 建議로 論議를 始作해 은평구와 在鄕軍人會가 建立推進委員會를 構成했고, 2010年 6月 6·25戰爭 60周年을 記念해 現 位置에 銅像을 세웠다.

1922年 6月 平壤에서 宣敎師로 活動하던 윌리엄 얼 쇼의 아들로 태어난 쇼 大尉는 平壤에서 高等學校까지 마치고 美國으로 건너가 웨슬리언臺를 卒業했다. 1943年 海軍 少尉로 任官해 1945年 노르망디 作戰에 參加했다. 1947年 轉役한 뒤에는 韓國으로 와 鎭海 海軍士官學校에서 英語와 陷穽 運用術 敎官으로 生徒를 가르치며 草創期 우리나라 海軍 發展에 貢獻했다.

다시 美國으로 돌아가 1950年 하버드대에서 博士課程을 밟던 中 6·25戰爭이 勃發하자 그는 韓國을 돕기 위해 美 海軍 大尉로 再入隊했다. 父母에게 “韓國人들은 自由를 지키려고 奮鬪하고 있는데 이를 도우려 欣快히 가지 않고 戰爭이 끝난 뒤 돌아가려는 것은 良心이 許諾하지 않는다”는 內容의 便紙를 남기고 韓國으로 向했다.

以後 聯合軍의 仁川上陸作戰과 서울 奪還 作戰에 參加한 그는 1950年 9月 22日 美 海兵 7聯隊의 서울 進擊에 앞서 녹번리에서 後方偵察 任務를 遂行하다 人民軍의 銃彈을 맞고 散花했다. 死亡 當時 29歲였던 쇼 大尉는 現在 父母와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 外國人 墓域에 잠들어 있다. 1956年 政府는 그에게 金星을지武功勳章을, 美國 政府는 은성勳章을 各各 追敍했다.

김재영 記者 redoot@donga.com
#6.25 #恩平平和公園 #윌리엄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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