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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最大 露出作 映畫 ‘詩’ 만든 사람은 監督 아닌 백건우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東亞日報

윤정희 最大 露出作 映畫 ‘詩’ 만든 사람은 監督 아닌 백건우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月 25日 13時 5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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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윤정희 ‘切親커플’ 러브스토리 3話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근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반가워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백건우 윤정희 夫婦가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近處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반가워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自己 뭐 마실래? 카푸치노?


지난달 25日,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近處 카페에 들어선 윤정희는 化粧室을 다녀오겠다는 백건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묻긴 하지만 答은 이미 알고 있다. 카푸치노. 백건우度 알고 있다. 윤정희는 카페라테를 마신다.

추운 겨울에도 카페 밖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백건우 윤정희는 꼬마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어머 쟤 좀봐“하고 좋아했다.

두 사람이 이 카페를 찾은 理由는 또 있다.

1976年 백건우 윤정희는 에펠塔 近處 샤요宮 現代美術館에 展示를 보러 갔다가 프랑스 俳優 알렌 퀴니를 봤다. 밤의 訪問客, 라돌체비타, 엠마뉴엘 等의 主演을 맡은 프랑스 當代 最高의 男子 俳優였다.

백건우는 ”멀리서 그를 보고 둘이서 ‘神奇하다’ 하고 있는데 그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 쪽(윤정희)에게 말을 거는 거에요“라며 逸話를 傳했다. 只今으로부터 43年 前 일이지만 아직도 그의 목소리에는 興奮이 담겨 있었다.

부인이 알란 퀴리에게 헌팅 당했던 이야기를 하며 신나하는 백건우. 윤정희가 그런 남편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夫人이 알란 퀴리에게 헌팅 當했던 이야기를 하며 신나하는 백건우. 윤정희가 그런 男便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百) 알란 퀴리가 ‘내가 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當場 다음날 좀 만날 수 있겠냐’그래요. 그래서 만난 게 바로 只今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카페에요. 여기서 ‘自己가 10年 동안 構想한 映畫가 있는데 女主人公을 이 쪽(윤정희)에게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이 쪽(윤정희)李 映畫俳優라는 것을 全혀 모른 狀態에서. 俳優가 俳優를 알아 본 건지 東洋的인 魅力과 西洋的인 魅力을 同時에 갖고 있대요. 그러더니 몽파르나스에 있는 自己 집으로 우리 둘을 招待해 소파에 앉혀 놓고 90分 동안 혼자 이 映畫를 시놉시스臺로 演技하더라고요.“

그러나 윤정희의 프랑스 映畫 데뷔는 成事되지 못했다.

”(尹) 그 쪽이 願한 게 金髮 머리에 파란 눈을 한 東洋 女人이었어요. 當時 딸 珍稀를 妊娠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고, 나 自身이 그런 모습을 하는 게 잘 와 닿지 않아 拒絶했죠.“

윤정희는 브래드 피트 主演의 映畫 ‘티벳에서의 7年’에서 어머니 役割 出演을 提議 받기도 했다. 프랑스語가 能通한 윤정희는 ”只今이라도 스토리와 役割이 좋으면 프랑스에서도 演技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윤정희는 1966年 本人이 지은 假名이다. 元來 이름은 손미자.

윤정희는 ”‘청춘극장’ 오디션을 앞두고 제가 지었어요. 俳優가 되더라도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에 ‘고요 情(靜)’에 ‘계집 喜(姬)’로 이름을 지었죠. 朝鮮의 마지막 皇后 윤비를 생각하며 性을 ‘尹’으로 했어요.“

‘청춘극장’ 오디션에 몰린 1200餘 名은 漢江邊에서 女俳優 황정순을 붙잡고 ‘어머님~’하고 嗚咽하는 場面을 注文받았다. 한 番도 演技를 배운 적이 없는 윤정희는 當時 눈물을 펑펑 쏟았다. 타고난 演技者여서 可能했을까. 祕訣의 內幕을 알고 보면 좀 荒唐한 理由였다.

”(尹) 當時 오디션 1等은 賞金 50萬 원도 받았어요. 그런데 所聞을 듣자 하니 누가 돈을 내고 1等을 內定 받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그러면 안 하겠다’고 오디션場을 걸어 나왔어요. 男子 두 名이 쫓아오더니 ‘내 생각에는 當身이 될 것 같다’며 저를 잡아요. 나중에 보니 助監督이었는데, 돌아오긴 했지만 분이 안 풀리는 거에요. ‘내가 只今 이 되지도 않을 걸 왜 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演技를 하는데 眞짜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뽑혔죠.“

윤정희가 광고 촬영 도중 차에서 쉬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백건우가 몰래 찍은 사진. 사진제공 백건우
윤정희가 廣告 撮影 途中 車에서 쉬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백건우가 몰래 찍은 寫眞. 寫眞提供 백건우

윤정희는 演技하면서 眞짜 韻敵은 몇 番 없다고 털어놓았다.

”當時에는 눈물이 또르르 예쁘게 흘러야 했어요. 그런데 眞짜 울면 눈물이 그렇게 흘려지나요. 그래서 슬픈 表情을 짓고 ‘컷’ 하고, 얼른 眼藥을 넣고 다시 찍었죠. 그러나 2010年 映畫 ‘詩’ 마지막 場面에서는 眞짜로 演技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원 테이크로 찍었죠.“

1967年 데뷔作 청춘극장이 大히트를 치면서 瞬息間에 히로인이 됐다.

-데뷔 以後 프랑스 工夫하러 떠나기 前 7年 동안 300篇을 찍었습니다. 可能한가요.

”올바른 方向은 아니었죠. 하지만 當時에는 TV도 잘 없던 時節이잖아요. 映畫는 國民들의 스트레스를 解消하고 幻想을 꿈꾸게 하는 거의 唯一한 娛樂거리였어요. 多作이 不可避했죠. 하루에 다른 세 篇을 찍기도 했어요. 臺詞를 외울 수가 없어서 프롬프터를 보면서 演技 했어요. 同時 錄音이 아니니까 可能했죠. 그래도 시나리오는 꼼꼼하게 골랐어요. 나중에 映畫振興院에 시나리오를 寄贈하려고 찾아보니 500個가 있더라고요. 最小限 200篇은 안 했다는 거죠.“

-남정임, 문희와 함께 ‘女俳優 1世代 트로이카’로 有名했습니다. 競爭意識은 없었나요.

”왜 없겠어요. 스트레스도 있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내가 안 하면 이 役割이 다른 두 名에게 가겠지’ 이런 생각으로 選擇하기도 했죠. 세 名을 두고 팬心이 競爭하면서 映畫 붐을 일으키는데도 도움이 됐어요. 저에게 血書를 보낸 男子 팬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映畫 밖에서 우리 셋은 잘 지냈어요. 신성일 先生님이 집으로 招待해 파티를 열었는데 거기서 셋이 자주 만났죠.“

배우 신성일이 1960년대 후반 여배우 트로이카를 구축한 윤정희, 문희, 남정임(왼쪽부터)과 함께 찍은 사진. 신성일은 자주 집으로 여배우 셋을 함께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俳優 신성일이 1960年代 後半 女俳優 트로이카를 構築한 윤정희, 문희, 남정임(왼쪽부터)과 함께 찍은 寫眞. 신성일은 자주 집으로 女俳優 셋을 함께 招待해 파티를 열었다. 동아일보 資料寫眞

自然스레 지난해 11月 世上을 먼저 떠난 신성일 이야기로 話題가 옮겨졌다. 윤정희는 신성일과 99篇의 映畫에서 남女 主演으로 呼吸을 맞췄다. 지난해 11月에는 韓國映畫評論家協會 功勞賞 施賞式에서 ”이 賞을 신성일 先生님에게 바치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났을까요.

”神 先生님도 저랑 비슷해요. 꿈속에 사시는 분이죠. 제가 나이가 어리지만 좋은 親舊였어요. 撮影하다가 짬이 나면 어김없이 ‘미스 尹’ 하고 부르며 제 옆으로 와서 人生 相談을 하셨어요. 늘 靑年 같은 분이에요. 政治하실 때도 저와 議論하셨어요,“

-그래서 하라고 했나요.

”제가 뭐 하지 말라고 할 資格도 없잖아요. ‘아휴 좋죠’ 했죠. 뭐“

國會議員을 마친 後 신성일은 賂物收受 嫌疑로 2年 동안 服役했다. 신성일은 後날 여러 次例 當時 베토벤 冊을 들고 矯導所로 面會 온 백건우 윤정희 夫婦에게 고마움을 表示한 적이 있다. 當時 그 冊을 고른 건 백건우였다.

”(百) 우리 夫婦가 그 분과 워낙 가깝게 지냈어요. 當然히 찾아가야죠. 베토벤만큼 人生에서 苦痛을 많이 겪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도 自己 意志로 勝利한 사람이니까 힘을 얻으라고 드렸죠. 그랬더니 出所할 때 베토벤 곱슬머리가 됐더라고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에서 신성일과 윤정희가 남여 주인공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승옥의 小說 ‘霧津紀行’을 映畫化한 ‘안개’에서 신성일과 윤정희가 남女 主人公을 맡아 熱演하는 모습. 동아일보 資料寫眞
신성일은 別世 18日 前, 東亞日報와의 生前 마지막 인터뷰에서 來年 釜山 國際映畫祭 出品作을 準備하며 윤정희와 함께 할 100番 째 映畫를 提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 拒絶했나요.

”캐서리 햅번이 出演했던 ‘黃金 蓮못’을 리메이크 한 映畫였어요. 아버지와 딸의 葛藤 속에서 깨진 家族을 붙이는 어머니 役割이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 드라마가 津하게 그려지지 않고 登場人物이 늘어나 若干 散漫해진 것 같아서…. 99篇도 엄청난 거죠.“

-當時 最高의 女俳優였는데, 權力層에서 接待와 같은 個人的인 連絡은 없었습니까.

”誘惑이 많았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全혀 안 나갔어요. 最高位層 人士가 外國人 손님이 오니 좀 나오라고 했는데 제가 ‘나는 妓生이 아니다’고 안 나갔죠. 그래도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다시는 오라는 소리는 안했어요.“

女俳優 트로이카 中 남정임과 문희는 1970年代 初 結婚과 함께 스크린을 떠났다. 홀로 남은 윤정희에게는 人氣를 獨차지할 수 있는 絶好의 機會였지만 1973年 프랑스 留學을 決定했다.

백건우가 프랑스 북부 해변도시 도빌에서 부인 윤정희를 찍어준 사진. 백건우는 영화 ‘남과 여’의 느낌이라고 소개했다 사진제공 백건우
백건우가 프랑스 北部 海邊都市 도빌에서 夫人 윤정희를 찍어준 寫眞. 백건우는 映畫 ‘南과 女’의 느낌이라고 紹介했다 寫眞提供 백건우

-家族들이 말리지 않았나요.

”元來 갈 豫定이었어요. 오히려 父母님들은 좋아하셨어요. 工夫를 좋아하는 걸 아시니까요. 엉뚱한 곳 가는 게 아니라 映畫 工夫하러 가는 거잖아요. 西江大 프랑스語 敎授님을 찾아가 프랑스語 敎習을 別途로 받았죠. 이제 보니 건우 백 만나려고 여기 온 건가 봐요.“

윤정희는 映畫 理論을 工夫하기 위해 소르본대(파리3大學)를 擇했다. 映畫社와 映畫 分析을 工夫했다. 學校에 韓國 學生도 없어 俳優 出身인지도 모르는 프랑스 親舊들과 自由를 滿喫했다. 그래도 틈틈이 韓國으로 돌아와 映畫를 찍었다.

1976年 백건우와 結婚 後에도 스물 便을 더 찍었다.

윤정희가 320篇의 映畫 中 最高의 人生作으로 꼽은 作品은 2010年 이창동 監督의 映畫 ‘詩’다. 홀로 孫子를 키우며 늦은 나이에 詩를 배우는 할머니 役割로 칸 映畫祭에서 레드카펫을 밟았고, LA 批評家協會賞 女優主演賞을 받았다.

백건우는 映畫 ‘詩’를 ”하늘에서 祝福 받은 映畫“라고 表現했다.

”시나리오가 到着했는데 全體 107信 中에 98신이 이 쪽(윤정희)李 나와요. 只今 이 나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映畫를 끌고 나가는 이 程度의 比重을 가진 映畫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아요. 日本이나 東南아시아 程度까지만 알려졌던 윤정희가 世界的으로 알려지는 契機가 됐죠.“

2010년 영화 ‘시’로 칸영화제 시상식 직후 한국기자들과 인터뷰를 갖는 윤정희 이창동.
2010年 映畫 ‘詩’로 칸映畫祭 施賞式 直後 韓國記者들과 인터뷰를 갖는 윤정희 이창동.

-極 中 役割이 윤정희 本名인 ‘미자’에요. 李 監督의 提案인가요.

”(尹)李 監督이 처음에는 아예 城까지 해서 제 本名인 ‘손미자’로 가져왔어요. 조금 甚하다 싶어 ‘양미자’로 定했죠. 그런데 正말 저랑 共通點이 많아요.“

백건우가 다시 거들었다.

”참 神奇해요. 李 監督과 이 쪽(윤정희)이 서로 모르거든요. 映畫祭에서 만나면 人事 程度 하는 사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正確하게 이 쪽(윤정희)을 그려냈는지 몰라요. 親舊들이 그래요. 悲劇的인 映畫인데 繼續 웃음이 나오더래요. 이 쪽과 너무 똑같아서.“

-어떤 共通點이 있는데요.

”(百) 어린애 같은 것, 때로는 바보 같은 것, 아름다움을 追求하는 것, 뭔가 만들어가고 싶어 하고, 조그만 것에도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것“

윤정희가 눈을 흘기면 말했다.

”건우 白이 나보고 옷도 벗으라고 했잖아요. 난 옛날에 ‘러브신’ 撮影할 때 얼굴 안 보이는 部分은 다 帶域이 했어요. 그 때 苦悶은 내 帶域으로 몸이 예쁜 내가 와야 되는데 하는 거였죠.“

‘映畫狂’인 백건우는 夫人의 옷을 더 벗게 한 自身의 選擇에 確信을 갖고 있었다.

”李 監督은 60代 女性의 몸을 보여주고 싶어 했어요. 正말 어쩔 수 없이 男子 老人과 잠자리를 해야 하는 恥辱을 表現해야 하는데, 허리까지는 카메라가 잡아야 그나마 表現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내가 等 程度로는 안 된다고 했죠.“

-延期 人生 最高로 많이 露出한 거네요.

”(尹)그럼요. 저는 앞으로도 絶對 옷 안 벗을 거에요. 그래도 저는 아직도 詩와 같은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

<1日 第4火는 배고픔과 외로움을 딛고 일군 ‘백건우의 音樂人生’ 이야기를 傳해드립니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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