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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듣네”…45년 간 親舊이자 夫婦, 파트너였는데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東亞日報

“오늘 처음 듣네”…45년 간 親舊이자 夫婦, 파트너였는데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月 11日 13時 57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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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윤정희 ‘切親커플’ 러브스토리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
파리=동정민特派員 ditto@donga.com
지난 5日 동아일보에서 새해를 맞아 새로 始作한 ‘切親 커플’ 시리즈 1回로 報道한 피아니스트 백건우-映畫俳優 윤정희 夫婦의 이야기는 큰 話題가 됐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난 後 45年 동안 親舊이자 夫婦, 그리고 파트너로 함께 살아가는 러브 스토리가 아름다웠다는 反應이 많았습니다.

이들 夫婦와는 4次例, 모두 12時間 동안 인터뷰를 進行했습니다.

“平生 둘이 같이 이렇게 오래 인터뷰한 건 처음”이라고 말한 그들은 인터뷰 동안 여러 次例 “當身 正말 그랬어? 나도 오늘 처음 들었네”라고 놀라했습니다.

夫婦끼리도 미처 알지 못했던 只今껏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사랑과 人生 이야기를 오늘부터 每週 金曜日 午後 2時 傳해드립니다.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
파리=동정민特派員 ditto@donga.com

지난달 25日, 백건우 윤정희 夫婦와 함께 파리 소르본 大學가 近處 뒷골목에 들어섰다. 中國 泰國 베트남 料理를 모두 다루는 허름한 아시아 食堂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光明珠가(‘光明酒家’).

“看板도 45年 前 그대로네”

백건우는 門 앞으로 다가갔다. 윤정희는 門에 붙어 있는 메뉴 그림을 보고 “이거 맞네”라며 반가워했다.

1974年 어느 같은 날 백건우는 彫刻家 文身 氏와 함께 이 食堂에 들어섰고, 中國人 親舊와 食事를 마친 윤정희는 나오는 길이었다. 食堂 門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 말을 잃었다.

“(尹) 우리가 만난 그 날 記憶이 나요. 파리 소르본대에서 映畫 工夫를 할 때인데 映畫 分析 科目 宿題를 하기 위해 近處 映畫館에서 잉그리드 버그만 回顧展을 보고 밥 먹으러 왔죠. 不過 몇 秒만 엇갈렸어도 우리 둘은 못 만났을 거에요. 이런 偶然이 없죠. 저 사람이 파리에 있을 거라고는 想像도 못했거든요.”

“(百) 當時 파리에 韓國 食堂이 거의 없었어요. 韓國 飮食이 너무 그리워서 留學生들이 이 食堂 廚房長에게 국수 뽑는 法을 가르쳤죠. 칼국수 비슷하게, 거기에 배추와 中國 고추醬, 고기를 넣어서 매콤하게 먹었죠. 참 맛있었어요. 價格도 너무나 低廉했거든요.”

두 사람은 3年 前 結婚 40周年에도 이 곳을 찾아 국수를 먹었다. 백건우는 “華麗한 곳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追憶을 찾고 싶었죠. 근데 맛이 예전만 못하더라구요”하며 웃었다.

“食堂에서 만난 以後 우리는 한時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백건우의 말처럼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불같은 사랑에 빠진 것은 2年 前 아쉬운 헤어짐이 있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1972年 9月, 백건우는 뮌헨올림픽 文化 祝祭 때 열린 윤이상 作曲家의 오페라 ‘심청’ 初演을 觀覽하러 公演場에 들어갔다. 한 女子가 다가와 自己 자리를 물었다. 백건우 바로 앞자리였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첫 만남이다. 15살 때 美國으로 건너간 백건우는 最高의 女俳優 윤정희의 存在를 몰랐고, 美國에서 有名한 피아니스트 有望株였던 백건우를 윤정희度 몰랐다.
백건우는 그 瞬間을 人生 最高의 瞬間으로 꼽았다. “아무 條件도 없이 남과 女 그 自體로 만났으니까요”라고 말했다.

-當時 美國에 있던 백건우, 韓國에 있던 윤정희가 뮌헨까지 왜 갔습니까.

“(百) 뉴욕에서 工夫하고 있을 때에요. 잘츠부르크에 公演을 하러갔다가 마침 윤이상 先生님이 뮌헨에서 韓國 素材 오페라를 超然한다고 해서 갔어요. 큰 意味가 있었죠. 그동안 中國 素材 오페라는 많았는데 제가 아는 한 韓國 主題 오페라는 처음이었거든요. 當時 오페라 심청은 저한테는 라보엠이나 나비 夫人 以上의 意味가 있었죠.”

“(尹) 신상옥 監督과 함께 찍은 映畫 ‘孝女 심청’李 뮌헨에서 上映됐어요. 워낙 映畫 撮影이 바빴을 때라 獨逸까지 가기 힘들었는데 巨匠 申 監督 ‘빽’으로 갈 수 있었죠.”

오페라 심청을 보러 온 韓國 靑年들은 다음날 映畫도 같이 보고, 麥酒도 함께 마셨다. 麥酒 파티 동안 한 男性이 꽃을 팔러 다가왔다. 유럽은 아직도 食堂 안으로 꽃을 팔러 다가오는 商人들이 많다. 다들 語塞한 沈默이 흐를 때 백건우는 꽃을 사서 말없이 윤정희에게 건넸다.

“(百) 빨간 薔薇꽃 한송이였어요. 아무 말이 必要 없었어요. 꽃이 다 이야기하는데.”

“(尹) 慇懃히 서로 마음에 있었지.”

두 사람의 因緣은 이어졌다. 뮌헨 日程이 끝나고 신상옥 監督은 백건우에게 파리 同行을 提案했다.

“(百) 申 監督이 ‘當身이 前에 파리에 가 본 적도 있으니 같이 가자’며 飛行機票를 사 주셨어요. 셋이서 함께 샹젤리제 散策도 했고, 또 申 監督 없이 둘이서만 에펠塔度 올라갔죠.”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부부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夫婦

두 사람은 ‘썸’을 탔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告白하진 못했다.

“(百) 서로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더 만남을 이어가기가 힘들다는 걸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죠. 파리에서 헤어진 뒤 便紙 한 頭痛이 오가긴 했지만 只今처럼 SNS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期約도 없고, 그렇게 잊혀져갔죠.”

“(尹) 그러니 2年 뒤 만남이 얼마나 映畫 같아요. 그 以上 어떻게 表現할 수가 없어요.”


● 피아노와 만난 백건우

백건우는 1946年 5月 10日 서울에서 태어났다. 누나가 한 名 있다.

5年 뒤 韓國戰爭이 터지면서 釜山으로 無酌定 내려갔다. 백건우는 “避難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映畫 닥터지바고 딱 그거였어요. 汽車타고 가는데 빼곡히 숨도 못 쉴 程度로 사람에 끼어가지고 中間에 몇 番씩 멈추면서 간 記憶이 나요. 지붕위에도 사람이 앉아있었죠”

그렇게 緣故도 없이 釜山 東來溫泉에 자리 잡은 백건우 家族은 어머니가 無窮花 幼稚園을 열어 生計를 이어갔다.

-집에 피아노가 언제 생겼습니까.

“7살 半 때 어머니가 個人敎習을 하려고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를 하나 샀어요. 다른 아이들 가르치시느라 나는 안 가르쳐주셨어요. 그래도 自然스레 피아노를 만질 수가 있었죠.피아노는 主로 아버지가 가르쳐주셨죠.”

-아버지도 피아노를 치셨나요?

“아버지는 獨特하新 분이었어요. 多方面의 朴사셨는데 學校에서 合唱 指揮도 하고, 英語도 가르치고, 붓글씨도 有名했어요. 美軍 部隊에 그림도 그려주고 甚至於 洞네에서 社交 댄스도 가르쳤죠. 피아노는 치시지 못했지만 日本 留學時節 音樂을 많이 들어 클래식에 對한 造詣가 깊으셨죠.”

그러나 아버지의 敎習法에 適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피아노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듣는 音樂 水準은 높고 敎習法은 모르니까 水準에 안 맞는 어려운 曲을 치라고 强要했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즐길 수가 없었죠. 그 當時 피아니스트 先生에게 저를 맡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의 天才的인 素質은 빛나기 始作했다.

-獨奏會를 처음 한 게 몇 살 때인가요?

“9살 半이었죠. 釜山에서 했는데 事實 只今 보면 엉터리였어요. 當時 스웨덴 病院 講堂 같은 곳에서 獨奏會를 했어요. 5學年 때 서울로 移徙와서는 서울市響 김생려 指揮者와 함께 피아노 協奏曲度 했죠.”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부부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夫婦

그는 南山初-장충初-배재중을 거쳐 한양공고에 들어간 백건우는 1學年 때 첫 海外 콩쿠르 參席 機會를 얻었다. 第1回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 國內 選拔 過程을 거쳐 뽑힌 백건우는 漠然하게 ”美國에서 繼續 工夫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焉敢生心’이었다. 뉴욕 가는 데만 도쿄, 하와이, LA를 거쳐 며칠이 걸려야 하는 時代였다. 그 곳에서 運命的인 奇跡이 기다리고 있었다.


● 映畫와 만난 윤정희

윤정희는 1944年 7月 30日 釜山에서 태어났다. 6男妹 中 長女다. 아버지는 와세다大 法大를 나온 遊學 엘리트 知識人으로 釜山에서 新聞記者를 했다. 동생 다섯 中 3名은 美國, 한 名은 韓國에, 막내 女同生은 파리에서 살고 있다.

-그럼 裕福하게 사셨겠네요.

“外할머니가 光州에서 큰 工場을 하셔서 富裕했어요. 우리 집은 아주 돈 많은 富裕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時節에 幼稚園을 나왔으니 中産層 以上은 되죠. 學窓時節 발레, 傳統舞踊, 合唱班을 꾸준히 했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됐죠. 特히 妓生 役割할 때 큰 도움이 됐어요. 父母님이 너무 자유로우신 분이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셨죠.”

-어린 時節 윤정희는 어떤 少女였나요?

“그냥 冊 읽는 걸 좋아하고 늘 꿈속에 사는 조용한 學生이였어요. 제 男便은 只今도 나한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해요. 只今도 꿈속에서 산다고.”

백건우가 끼어들었다.

“(百) 저 사람은 달나라에서 왔어요.”

“(尹) 나는 달은 좋아하지만 달나라에서는 안 살아”

“(百) 映畫 ET를 보면 달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홈(home?집)’ ‘홈’ 하잖아요. 저 사람은 달만 보면 ‘달’ ‘달’ 그러면서 좋아하거든요.”

“(尹) 달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百) 달 볼 때마다 世上에서 처음 보는 달처럼 얼마나 幸福해하는지 몰라요.”
그女의 元來 꿈은 敎授나 外交官이었다. 工夫하는 걸 좋아해서였다. 工夫도 잘했다. 試驗을 쳐서 地域 名門인 全南女中-高를 나왔다. 造船臺에 들어갔다가 고려대 史學科에 編入했고, 俳優가 된 뒤 中央大 演劇映畫科에 들어가 碩士를 마쳤다. 그리고 博士學位를 따러 映畫의 本고장 파리로 向했다.

映畫를 좋아했지만 映畫俳優가 될 생각은 안 했다. 그러다 1966年 映畫 ‘청춘극장’ 오디션 公告가 떴다. 김내성 小說을 알았던 그는 映畫에 끌렸다.

가톨릭 信者였던 그는 明洞聖堂 主任 神父님께 달려갔다.

“映畫俳優를 해도 될까요?”

“勿論이지. 네가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俳優가 된다면…”

演技를 배워본 적도 없는 그가 오디션을 위해 漢江邊에 섰다. 1200對 1의 競爭, 主演 女俳優는 그女의 몫이었다.

< 2回는 두 사람의 結婚式과 新婚, 그리고 北韓에 拉致될 뻔 한 事件을 傳합니다. >

파리=동정민特派員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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