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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圖章을 使用했을까?[청계천 옆 寫眞館]|東亞日報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圖章을 使用했을까?[청계천 옆 寫眞館]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1月 29日 13時 27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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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歷史博物館長(최병구)은 29日 2023年 서울未來遺産 記錄 事業의 結果를 묶은 調査報告書 『서울의 印章舖』를 發刊했다고 밝혔다.

서울文化未來遺産記錄 네番째 報告書 [서울의 印章舖]/ 서울歷史博物館 提供

서울未來遺産記錄 事業은 2020年부터 近現代 市民들의 生活史를 主題別로 整理하는 作業이다. 이番에 發刊된 『서울의 印章舖』는 네 番째 作業이며 그 前에 發刊된 報告書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間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驛沙鉢물館에서 作成한 報道資料와 參考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東亞日報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寫眞을 追加해 近現代史의 한 斷面을 ‘圖章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서울市內에 있는 印章舖 ‘朴人當’/ 東亞日報 DB

▶印章舖는 말 그대로 印章을 製作하는 가게이다. 只今은 ‘컴퓨터 圖章’이라고 불리는 機械 조각 印章이 登場했지만 그 前에는 사람이 直接 手作業으로 깍아서 圖章을 만들었었는데 그 作業을 했던 가게에 對한 記錄이다.

▶朝鮮時代 韓國의 印章은 크게 璽寶(璽寶), 관인(官印), 死因(私印)으로 區分된다. 個人이 使用하던 人丈人 死因(私印)은 書畫(書?)의 樂觀(落款)이나 書籍의 藏書印(藏書印) 程度에 그쳤다.

金九-신규식 先生 임정직人 첫公開- 金九 主席의 職印(왼쪽)과 신규식 先生의 職印. 各各 ‘金九之印’ ‘申圭植印’이라고 새겨져 있다/ 東亞日報 DB
印章이 普遍的으로 使用된 것은 日帝强占期 以後의 일이다. 朝鮮總督府가 朝鮮에서 日本人의 經濟活動을 合法的으로 保護하고, 朝鮮人들의 經濟活動을 統制하기 위한 手段으로 1914年에 「人間證明規則」을 頒布하며 强制 導入됐다. 國家次元에서 印鑑 使用을 强制하면서 印鑑 圖章을 만드는 가게도 成業하게 된 것이다.

▶ 1974年에는 「國家技術資格法」의 施行으로 引張工藝機能社(1級· 級·技能士補)
資格試驗 制度가 導入됐다. 하지만 凝視 需要 減少로 인해 2004年에 廢止됐다. 2000年代 들어 컴퓨터 印章 製作과 署名 去來價 一般化되고, 公認認證書 導入 等을 거치며 印章業은 줄곧 斜陽産業의 길을 걷고 있다. 한便, 2000年代 以後 印章은 文化商品으로서의 價値를 擴張하고 있다. ‘胎줄 圖章’이나 ‘水制 圖章’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印章이 代表的이다.

1976年 圖章破棄 競演大會 /東亞日報 DB

1970年代 印章工藝 技能士 實技試驗/서울歷史博物館 提供
▶ 이番 서울역사박물관의 調査 結果, 서울에서 1950年代부터 活動해 온 오래된 印章舖 5곳과 印章 名將들이 새삼 照明을 받았다. 朴人當(博印堂), 거인당(巨印堂), 玉璽當(玉璽堂),
餘原電人幇(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等 5곳이다.

□ 都心部 印章舖의 터主大監, 朴人當(博印堂)의 박호영
○ 朴人當은 印章舖 中 唯一하게 서울未來遺産(2020-004號)로 指定됐다.1978년부터 관철동에서 ‘朴人當’이란 商號로 運營하고 있다.
○ 朴人當 박호영은 1938年에 咸鏡南道 新興郡에서 出生한 避亂民이다. 6· 5戰爭乙겪으며 避亂民의 配給 圖章을 만든 것이 印章業에 從事하게 된 契機가 됐다. 1954年上京해 中區 신당동, 乙支路5街, 수하동, 다棟 等地에서 여러 印章舖를 運營하며인장 技術을 익혔다. 2004年에 大韓民國 印章工藝 名將으로 選定됐다./서울역사박물관 提供


□ 印章業의 革新을 이끈, 거인당(巨印堂)의 유태흥
○ 거인당은 서울에서 唯一한 印章 特性化 거리인 ‘창신동 印章의 距離’에 있다.창신동에서 손꼽히는 ‘下請 專門 業體’였지만 몇 해 前부터 職員 없이 運營 中이다.
○ 거인당 유태흥은 1941年에 京畿道 파주시에서 出生했다. 1960年에 上京海童話百貨店(現 新世界百貨店) 人帳簿에 就業해 서울 生活을 始作했다. 以後中區 북창동과 충무로를 거쳐 1978年에 鐘閣에서 ‘거인당’을 開業하고, 1983年에창신동으로 移轉했다.
○ 유태흥은 印章業에 從事하면서 수조각 機械, 陳列用 샘플 等 多樣한 印章 關聯製品과 機械를 考案해 印章業 發展을 이끌었다. 2008年에 大韓民國 印章工藝 名將으로 選定됐다./ 서울歷史博物館 提供


□ 新世界百貨店 印章 코너 35年, 玉璽當(玉璽堂)의 移動日 現役時節 모습
○ 玉璽黨은 1975年에 新世界百貨店에 入店했다. 百貨店의 運營 方針上 獨自 상호를사용할 수 없어 2009年에 百貨店 賣場을 닫을 때까지 ‘신세계백화점 印章 코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百貨店이라는 특수한 空間에서 35年 동안 運營한 唯一한 印章舖다.
○ 玉璽黨의 移動일은 1939年에 慶尙北道 安東에서 出生했다. 1961年에 大學進學을 위해 上京했지만, 生活費를 벌기 위해 서울에서 印章業을 始作했다.인장업계에서 理論家로 定評이 나 있는 人物로 2002年에 大韓民國 人장공예名將으로 選定됐다.


□ 印章 技術의 價値를 널리 알린, 餘原電人幇(如原篆印房)의 최병훈
○ 與原電人坊은 1977年부터 30餘 年 동안 강북구청 앞 3坪 空間에서 ‘삼양사’라는 商號로 運營됐다. 강북구가 도봉구, 蘆原區로 分區될 때마다 새로 開設漢字치구 行政에 必要한 印章과 고무印을 製作했다. 2009年에 現在 位置(水踰洞293-3)로 移轉하면서 名稱을 ‘餘原電人幇’으로 變更하고 印章 硏究所 兼 作業室로運營하고 있다.
○ 與原電人放의 최병훈은 1950年에 全羅北道 長水郡에서 出生했다. 1964年에上京해 學校와 印刷所에서 筆耕士로 일했다. 1976年에 (寺)韓國人場業聯合會에서 實施한 印章 技術 敎育을 修了하고 印章業에 入門했다. 1985年에 韓國人田硏究會를 設立하고, (寺)傳統工藝機能保存協會에 加入해 活動하는 等 印章製作 技法에 關한 硏究를 꾸준히 해왔다. 2001年에 大韓民國 印章工藝 部門1號 名匠에 選定됐다.


□ 印章 技術에서 藝術로, 인예랑(印藝廊)의 황보근
○ 인예랑은 1985年부터 鍾路區 인사동에 터를 잡은 印章舖다. 仁寺洞 쌈지길부근에 처음 자리를 잡고 隣近에서 2~3番 자리를 옮겼다. 10餘 年 前 建國빌딩으로 移轉해 現在까지 運營 中이다.
○ 인예랑의 황보근은 1950年에 慶尙北道 蔚珍郡에서 出生했다. 1971年에 上京海스승 유태흥의 도움으로 鐘閣에서 10年間 印章業을 했다. 1980年代부터 人葬儀더 높은 境地를 위해 書法(書法)의 必要性을 느끼고 書藝와 塡刻에 沒頭했다.이러한 努力으로 印章業界에서 唯一하게 書藝와 殿閣의 藝術性을 인정받은 人物이다.2012년에 大韓民國 印章工藝 名將으로 選定됐다./서울역사박물관 提供


▶報告書는 서울 印章舖의 特性으로 첫째, 都市化 過程에서 손재주 있는 地方 사람이 서울에 定着하면서 擇한 業種 中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戰爭이 끝나고 生計 手段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中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社長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業種이 印章業이었던 것이다. 冊床만 있으면 創業할 수 있는 業種이기 때문이다. 이番에 調査한 서울의 引上抛 5곳 모두 1950年代 以後 上京한 志望民이 運營한다는 共通點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漢字를 工夫했고 손재주를 武器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印章舖 하는 사람들은 5·16 以後에 다 地方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會社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近方이 다 會社였어요. 옛날에는 官公署에서 文書를 處理하는 데 使用하는 印章이 300~400種에 달했어요. 그래서 技術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印章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印刷 技術者보다 印章 技術者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年生, 거인당) 인터뷰


1960년대 인장 노점/한영수 작가/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0年代 印章 露店/한영수 作家/ 서울歷史博物館 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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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印章舖의 두 番째 特性으로는 類似 業種과 空間을 共有한다는 點이다. 서울의 높은 賃貸料를 堪當하며 내 店鋪를 마련하기 어려운 狀況에서 印章舖는 다른 業種과 空間을 共有하는 方式을 積極的으로 活用해왔다. 引張 作業에는 넓은 空間이 必要하지 않기 때문에 可能했는 데 印章業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特히 類似 業種인 印刷所, 文具店 等의 한쪽 空間을 利用해 營業하는 境遇가 많았다. 都心에 있는 大型 文具店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印刷所에는 ‘人帳簿’가 있었다.

“1964年에 乙支路5街에 있는 印刷 가게 門 앞에 冊床 하나 빌려서 獨立을 했어요.”
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

“가게에 冊床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貰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社가
한 5~6名 있었어요. 그래서 1970年代부터는 圖章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
材料만 取扱했죠.“ 박순옥(남, 1930年生, 靈光인재사) 인터뷰


追憶의 圖章집2019年 2月 21日. 官公署 周邊이나 市場 어귀에는 한두 坪 남짓의 圖章집이 흔했다. 자그마한 作業臺에는 圖章 固定用 조각대와 낡은 彫刻칼 몇 個가 全部였다. 굳은살 박인 손은 작은 圓 안에 이름 석 字를 瞬息間에 새겼다. 寫眞=유동현 仁川이야기發電所代表/東亞日報 DB

▶서울 印章舖의 세 番째 特徵은 都市 發展에 따라 浮沈을 겪었다는 點이다.
서울은 1960年代부터 1980年代까지 30年 동안 壓縮成長을 했다. 1970年代 江南
開發이 本格化하기 以前 서울의 主要 施設과 企業體는 四大門 안쪽 地域에 密集했다.
當然히 그 時期 서울의 印章舖는 代表的인 商店街인 鍾路와 충무로 一帶에 자리했다. 以後
歐露工團, 汝矣島 開發 等 굵직한 都市 開發을 쫓아 印章舖度 移動해 營業을 이어갔다.

“내가 印章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棟 58番地였어요. 거기서 先生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工團 韓日銀行 바로 옆에 있다가 軍隊 갔다 와서 1977年에 대일사를 開業했어요. 거기서 2年 있다가 汝矣島 국민은행 本店이 있는 中央빌딩으로 옮겼죠. 1980年에 汝矣島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年生, 韓國人場協會 會長) 인터뷰

朴人當 박호영 名匠 인터뷰2019年 8月 10日/ “넓을 朴(博), 博士(博士)에 쓰는 글字지요. 여기에 圖章 人(印)字를 써서…. 뭐, 塗裝에 對해서는 좀 안다는 意味로 지은 거지요. 허허.”도장 새기는 技術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한다는 石材 박호영 名匠. 2004年 政府로부터 名匠 稱號를 받았으니, 自他公人 最高인 셈입니다.박 名將은 45年째 서울 종로구 관철동 隣近에서 圖章을 새기고 있습니다. 한때 오르는 月貰를 堪當하지 못해 자리를 옮긴 적도 있지만 ‘朴人當’이란 이름만큼은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의 가게를 낸 지도 벌써 40年이 넘었습니다. 칼을 처음 잡은 것으로 따져보면 60年이 더 됐습니다.“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圖章 파는 일은 열일곱 살 때부터 했어요. 예전에 돈을 좀 벌었을 때는 印刷所, 文具店으로 事業을 擴張해본 적도 있었는데 잘 안 되더라고. 다 그만두고 그냥 圖章만 파고 있어요.”1·4후퇴 때 家族과 함께 故鄕 咸鏡道를 떠나면서 始作한 他鄕살이. 이 일이면 밥은 굶지 않겠다 싶어 始作한 일입니다. 이렇게 외길. 圖章 새기는 손技術이 卓越하다는 所聞이 퍼져 前(前) 大統領을 비롯해 많은 名詞가 그의 顧客이 됐습니다. 數百萬 원을 呼價한다는 象牙(象牙)부터 수牛角(水牛角·물소 뿔), 霹棗木(霹棗木·벼락 맞은 대추나무) 같은 貴한 材料들이 그의 손에서 世上에 하나밖에 없는 印章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銀行 預金通帳에도 圖章 代身 사인이 들어가는 時代지만 朴人當만큼은 如前히 옛 名聲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손으로 새긴 圖章은 같은 글字라도 똑같은 模樣이 하나도 없어요. 僞造가 不可能하지요. 財産과 관계있는 書類에 圖章을 찍어야 하는 理由예요.”간단히 說明하는 그의 表情에 年輪 못지않은 自負心이 배어 있습니다. 주성원 記者/ 東亞日報 DB
1960年代 後半부터 서울에서는 現代式 高層 建物과 넓은 道路를 建設하고,
駐車場과 公園을 만들어 都心을 現代化·高度化하는 ‘都心再開發’ 事業이 展開됐다.
이에 따라 都心의 底層 苦蜜 建物의 商家를 賃借한 印章舖들은 都心再開發과 함께
잦은 移轉을 하며 浮沈을 겪었다.

1950年代 後半 서울 騷動桐 大英印刷社. 한영수 作家/ 서울歷史博物館 提供


“只今 영풍문고 짓기 前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中 하나를 保證金 50萬 원에 얻었어요. 空間은 한 坪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車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年 半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保證金 50萬 원에 위로비 150萬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萬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年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


뿌리 깊은 일본의 도장 문화. 2021년 8월 26일/                                                                                                                                     일본인 사토 마사루(佐藤勝) 씨가 사용하는 4개 도장. 왼쪽부터 인감인 지쓰인(實印), 은행 거래용 긴코인(銀行印), 일반 사무용 미토메인(認印), 택배 수령용 간이 도장 샤치하타(シャチハタ)다. 많은 일본인이 3, 4개 도장을 용도별로 만들어 사용한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동아일보 DB
뿌리 깊은 日本의 圖章 文化. 2021年 8月 26日/ 日本人 사토 마사루(佐藤勝) 氏가 使用하는 4個 圖章. 왼쪽부터 印鑑人 지쓰인(實印), 銀行 去來用 긴코인(銀行印), 一般 事務用 미토메人(認印), 宅配 受領龍 肝이 圖章 샤致賀打(シャチハタ)다. 많은 日本人이 3, 4個 圖章을 用途別로 만들어 使用한다. 도쿄=朴亨埈 特派員/ 東亞日報 DB

▶ 서울歷史博物館 최병구 館長은 “印章은 우리나라와 日本, 臺灣 等 東아시아 一部 國家의 특수한 文化임에도 不拘하고, 獨創性과 藝術性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印章의 戰勝 斷絶이 憂慮되는 狀況이다. 이番 調査를 통해 印章 細工 技術과 道具를 現場 調査 方式으로 생생하게 記錄해냈다는 點에서 앞으로 貴重한 資料가 될 것으로 期待한다.”라고 傳했다. 『 서 울 의 人 腸 抛 』 兆 사 步 故 서 는 서 울 驛 사 박 물 管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閱覽할 수 있다. 購入은 서울冊房(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歷史博物館 내 記念品店에서 可能하다. (價格 14,000원, 問議 02-739-7033).

2009年 2月 27日.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거인당 유태흥 名匠 인터뷰 寫眞/東亞日報 DB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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