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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語 講義 挑戰하는 스타講師 김미경 “只今도 새벽 4時 半 氣象”[復讐者들]|東亞日報

英語 講義 挑戰하는 스타講師 김미경 “只今도 새벽 4時 半 氣象”[復讐者들]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5月 13日 15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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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毒舌’ ‘아트스피치’ ‘김미경의 리부트’ 等 베스트셀러 作家이자 動機附與 講師 김미경. 그가 3年 만의 單獨 著書 ‘김미경의 마흔授業’을 出刊했다.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提供

毒舌과 慰勞가 섞인 動機附與, 自己啓發 講義로 有名한 스타講師 김미경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代表(58)에게도 20年 넘는 無名(無名) 時節이 있었습니다. 廣告會社 職員, 피아노學院 院長을 거쳐 20代 後半이 되어서야 ‘企業 講師’ 일을 始作한 그는 한참 동안 이름 없는 講師로 살았는데요. 모든 걸 다 이뤘을 것 같았던 ‘40代 김미경’李 實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不安하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唯獨 고단한 40臺를 보낸 그가 ‘成功 强迫’ ‘完成 强迫’에 갇힌 40臺를 慰勞하는 冊을 냈습니다. 올 2月 出刊한 新作 ‘김미경의 마흔授業’입니다. 出刊 2個月 만에 累積 販賣 部數 15萬 部를 記錄했을 程度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김미경이 많은 世代 中에서도 40代를 위한 冊을 쓴 理由가 궁금했습니다. 또 그의 40代는 어땠는지도요.

궁금症을 解消하기 위해 동아일보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김미경을 만났습니다. 40代를 위한 김미경의 助言(https://youtu.be/gI5Sfc9LQRg)과 2030世代를 위한 김미경의 苦悶相談(https://youtu.be/Bv6cLfuUytA)을 東亞日報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9살에 ‘企業 講師’가 된 그는 40代 後半에 이르러서야 認知度를 갖게 됐다. 18年 間 이름 없는 講師로 活動한 것이다.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 캡처

―先生님의 40代는 어떠셨나요?
“40代의 前 無名 講師였고 집 한 채 없이 가난했고 세 아이 돌보며 講義 다니느라 늘 時間에 허덕이던 사람이었어요.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손에 쥔 件 없었어요. ‘아트 스피치’ ‘언니의 毒舌’ 같이 有名稅를 가져다 준 著書는 모두 40代 後半이 되어서야 나왔어요. 講義를 始作한 건 29살이었으니까 18年間 말 그대로 이름 없는 講師였어요.”

孔子는 40歲를 不惑(不惑)이라고 불렀습니다. 世上일에 眩惑되어 갈팡질팡하거나 判斷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어, 스스로 判斷하고 스스로 自身의 길을 가게 됐다는 意味입니다. 예로부터 40代는 20, 30代 努力했던 것을 報償 받고 完成하는 時期로 알려졌습니다.

―成果 없는 無名의 40臺를 어떻게 버티新 건가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난 알잖아요. 努力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아줄 때까지의 時間과 내가 나를 알아주는 時間이 다른 것뿐이죠. 甚至於 남들이 늦게 알아봐줄수록 좋아요. 實力이 아주 많이 쌓이거든요. 10年 努力한 것보다 18年 努力하니 實力이 훨씬 많이 쌓였던 거예요. 無名 時節을 努力하며 보냈기에 40代 後半에 이르러서 認知度가 생기고 有名해진 거죠. 누구에게나 無名의 時代는 있어야 해요. 謙虛한 態度로 實力을 쌓을 期間이 必要하니까요.”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 캡처

―精神的으로 힘들진 않으셨나요?
“왜 안 힘들었겠어요.(웃음) 40代가 되면 異常하게 마음이 고3처럼 되는 거 아세요? 다 커버린 것 같고 다 산 것만 같아요. 고 1,2 때 熾烈하게 工夫하다 高3이 되어 修能을 치고 나면 人生이 다 끝나버린 것만 같은 氣分이 드는 거죠. 고3처럼 40代가 되면 20, 30代 努力한 人生의 成果가 나야 하는 느낌인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40代가 되면 年俸도 높고 집도 貸出 없이 한 채는 가져야 하고 커리어 部門에서도 頂點을 찍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50代 以後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것마냥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40大寒테 50代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면 ‘거기 사람 사는 데예요?’ 이런 視線으로 봐요.(웃음) 40臺가 지나면 어떤 希望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게 絶對 아니거든요. 절 보세요. 50代부터 有名해졌어요. 財産의 大部分을 50代에 벌었는걸요.”

50代가 되어서야 비로소 職業的 成功을 거둔 그가 ‘動機附與 講師’라는 職業을 갖게 된 건 29살 때였습니다. 그는 元來 音樂徒였습니다. 연세대 作曲科를 卒業했고 廣告 會社에서 CM송 製作하는 일을 했으며 피아노學院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時節, 音樂을 專攻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엄마 德分이에요. 邑內에서 작은 洋裝店을 손수 運營하셨는데 그 德에 제가 시골에서 大學에 갈 수 있었어요. 우리 엄만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自己 人生을 開拓하기 위해 스스로 努力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밀어줬어요. 같은 子息이라 할지라도 더 努力하는 子息을 좋아했죠. 그래서 제가 音大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가 죽어라고 벌어서 學費 대줄게’라고. 大學 入學했을 때 엄마는 너무너무 기뻐하셨죠.”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 캡처

―音大 卒業 後 어떤 일을 하셨나요?
“大學 卒業 後 廣告 會社에 들어가서 CM송 作曲하는 일을 맡았어요. 근데 一年 半도 못 다녔어요. 組織生活이 안 맞더라고요. 모두가 같은 時間에 出勤하고 退勤하잖아요. 모두가 定해진 돈을 받는 것도 싫었고요. 왜 7時에 退勤해야 하나? 난 12時까지 일하고 3倍 벌고 싶은데 같은 생각을 했어요. 結局 會社 그만두고 집에 피아노 한 臺 갖다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근데 아이들이 漸漸 늘어나는 거예요. 아예 學院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 事業을 始作하신 거네요.
“學院을 차리려면 돈이 必要할 거 아니에요. 처음엔 資本金이 없어서 銀行에서 貸出을 받았어요. 貸出金이 많으니 잠이 안 오더라고요.(웃음) 貸出은 많이 받았는데 院生들은 많이 없었으니까요.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새벽 4時 半이면 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於此彼 잠이 안 오니 學院에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한동안 새벽 出勤했어요.
우리 엄마 따라한 거였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벽 祈禱를 다녔던 엄마가 그러셨거든요.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서 念願을 해’ 宗敎가 없는 저는 祈禱는 안 하고 아이들을 많이 오게 할 方法을 窮理하러 아침 일찍 學院에 나갔어요.”

―새벽 4時 半부터 피아노學院에 가서 뭘 하셨나요?
“처음엔 새벽에 學院 나가서 어떤 行動을 하기보다는 걱정하는 데에만 時間을 쓰는 거예요. 걱정만 하면 解決은 하나도 안 되잖아요. 代身 念願하는 마음으로 엄마들에게 便紙를 쓰기 始作했어요. 아이들 寫眞을 하나하나 두고 ‘내가 當身의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피아노를 예쁘게 잘 치는지’에 對한 내 생각을 便紙로 써서 엄마들한테 보냈거든요. 便紙에 感動한 엄마들이 所聞을 내기 始作했고 1年 半 만에 學生이 200名으로 늘었죠.”

音樂을 專攻했던 그는 學院 成功 事例를 發表한 것을 契機로 ‘企業 講師’의 길을 걷게 됐다.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提供

業界에는 所聞이 쫙 났습니다. 28살 女性이 어떻게 學院 經營을 이렇게 잘하느냐는 거였죠. 어느 날 그는 피아노 學院 院長들 세미나에 講師로 招請을 받게 됩니다.

―‘講師 김미경’의 첫 데뷔였네요.
“成功 事例를 發表해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當然히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講義를 해 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있는 이야기를 便하게 해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講義計劃書를 만들었어요. 내가 왜 새벽 4時 班을 擇했는지, 4時 半에 일어나서 5時間 동안 뭘 했는지, 便紙를 쓰면서 뭘 느꼈는지, 學院에 안 오는 學生들을 어떻게 管理했는지 써내려갔죠. 當然히 反應은 暴發的이었어요.(웃음) 새로운 꿈이 생기더라고요. 講義로 먹고 사는 職業을 갖고 싶다고요.”

인터넷이 없던 時節, 새로운 꿈이 생긴 그는 ‘가르치는 걸로 먹고 사는 職業’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書店으로 向했습니다. 어떤 冊에서 그는 ‘企業 講師’를 發見하게 됩니다. 只今은 動機附與 講師의 母胎가 된 職業입니다.

―피아노 學院을 熱心히, 또 잘 運營하셨기 때문에 講師가 될 수 있었던 거네요.
“살면서 느낀 건데요, 一旦 臨界點을 넘겨야 해요. 뚜껑이 열릴 때까지 부글부글 끓어서 부풀어야 해요. 一旦 뚜껑이 열린 後엔 3가지가 넘는 다른 機會로 連結돼요. 萬若 제가 글을 쓴다고 생각해봐요. 글 分野에서 어느 程度까지 무르익으면 뚜껑이 열리겠죠? 그럼 豫測하지 못했던 다른 分野의 韻들과 連結이 되는 거죠. 근데 뚜껑이 열리지 않고 덮여 있잖아요? 그럼 아무 機會도, 可能性도 생기지 않아요.”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 캡처

40代 後半 여러 베스트셀러를 쓰고 本人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進行했을 程度로 스타講師로 成功했던 그에게도 試鍊은 있었습니다. 講義料가 主 收入源이었던 그에게 팬데믹 期間은 酷毒했습니다. 오프라인 講義가 줄줄이 取消되면서 한 달 講義料가 0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所謂 말해 잘나가다 고꾸라진 거잖아요. 衝擊이 크셨을 것 같아요.
“몇 個月間 通帳에 0원이 찍히더라고요. 너무 놀라고 걱정되고 힘들었어요. 그때도 피아노 學院 차렸을 때랑 같았어요. 돈 버는 方法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돈을 버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돈이 움직이는 方向을 살펴보면 돼요. 사람보다 돈의 速度가 훨씬 빠르거든요.
팬데믹 3年 동안 빅테크 企業 株價가 확 올랐잖아요. 全 世界 돈이 그리로 모인 거죠. AI, 블록체인, NFT…. 모두 팬데믹 때 急激하게 成長했어요. 돈이 가리키는 方向이 디지털 分野인 거예요. 그러던 中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轉換)’이라는 槪念이 머릿속에 박혔고 그때부터 工夫를 始作했어요.”

팬데믹을 겪기 前까지만 해도 그는 카카오톡 外엔 使用할 수 있는 SNS가 없었다고 합니다.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한참 걸릴 程度로 그의 디지털 리터러시는 最下 水準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接한 後 코딩을 배우기 始作했습니다.

―實行力이 엄청나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코딩은 배우기 어렵잖아요.
“工夫가 實行力 있을 게 뭐 있어요. 그냥 하면 돼요.(웃음) 關聯 冊을 사고 映像을 보는 거죠. 배운 知識을 제 일에 適用하기로 했어요. 오프라인에서 했던 모든 講義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作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온라인 敎育 플랫폼 會社를 創業했습니다.”

팬데믹 期間 그가 孤軍奮鬪한 內容은 2020年 7月 出刊된 ‘김미경의 리부트: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法’이라는 冊에 담겨 있습니다. ‘김미경의 리부트’는 英文版으로도 飜譯돼 美國 아마존 電子冊 ‘傳染病 分野’ ‘비즈니스 計劃 및 展望 分野’에서 베스트셀러 1位에 올랐습니다. 國內에서는 出刊되자마자 主要 書店 베스트셀러 1位를 휩쓸었습니다.

還甲을 앞둔 그는 5年 前부터 새로운 挑戰을 始作했습니다. 바로 英語 工夫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海外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던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美國 現地에서 ‘英語 講義’를 하는 것입니다.

―55歲부터 英語工夫를 다시 始作하셨다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當然하죠. 每日 새벽 네時 半에 일어나서 몇 時間씩 英語工夫를 했어요. 그게 5年이 훌쩍 넘었죠. 言語 工夫는 어릴 때 하라고 하지만 55살에 始作해도 可能하긴 하더라고요.(웃음) 3年 前에 美國 펜실베이니아 大學에서 講義한 적이 있는데 當時 유튜브 映像 照會數가 850萬 回를 넘겼어요. 덩달아 自信感도 붙었죠.”

世界的 碩學 제레미 다이아몬드와 通譯 없이 인터뷰를 進行하는 김미경. MKTV 캡처

―‘銃, 菌, 쇠’의 著者인 世界的 碩學 제레미 다이아몬드,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의 最年少 終身 敎授 애덤 그랜트, 美國 出身 世界的 投資者 짐 로저스 等 海外 名士들과 對談 인터뷰도 하셨더라고요.
“美國 現地 直講의 꿈을 위해 천천히 밟는 段階인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通譯 없이 英語로 進行한다는 目標를 세웠죠. 처음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取消하고 싶은 誘惑이 몰려왔어요. 인터뷰 前날엔 不安해서 잠도 못 자고 敎授님 쓴 冊을 몇 달에 걸쳐 原書로 다 읽었죠. 敎授님 映像 스크립트度 뽑아서 외우다시피 했어요. 質問할 內容도 미리 다 외웠죠. 인터뷰 一週日 前부터는 英語 先生님과 每日 役割을 바꿔가며 實戰처럼 練習했어요. 負擔이 큰 만큼 正말 努力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取消하고 싶은 誘惑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只今 成長筋肉을 키우고 있는 中이다. 筋肉에 傷處가 날 程度로 運動해야 筋肉이 단단해진다”며 스스로를 鍛鍊했습니다.

世界的 碩學들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自信感을 쌓은 그는 올해 末 美國에서 첫 番째 講義를 始作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英語로만 하는 講義입니다. 50代 後半인 그가 還甲의 나이에 새로운 挑戰을 始作하는 셈입니다. 還甲은 普通 隱退하고 쉬는 나이입니다. 休息 아닌 挑戰을 擇한 理由를 물었습니다.

“理由는 簡單하죠.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여러 나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言語를 驅使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막내가 昨年에 故3이었어요. 아이들 다 스무살 넘었고 獨立했으니 이젠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잖아요. 제 講義가 海外에서도 통하는지 直接 確認하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只今도 새벽 네時 半이면 起牀합니다.(웃음)”

李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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