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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던 朝鮮 떠나 100年 넘게 우리 춤, 우리노래 지켜온 藝術家들[전승훈 記者의 都市散策]|東亞日報

힘없던 朝鮮 떠나 100年 넘게 우리 춤, 우리노래 지켜온 藝術家들[전승훈 記者의 都市散策]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7月 28日 12時 24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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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 여는 주재근 정효國樂文化財團 代表

지난해 열린 제1회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지난해 열린 第1回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
“世界 곳곳에는 700萬 名의 우리 同胞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狀況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춤, 우리노래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藝術家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全世界에 흩어져 살고 있는 在外 韓民族 同胞와 藝術人들을 招請하는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가 올해도 8月18日 서울 서초구 國立國樂院 우면당에서 열린다. 이 祝祭는 지난해 光復節에 서울 서초구 國立國樂院 우면당, 南山國樂堂, 정효아트센터에서 記念式과 招請公演, 祝賀公演, 講習 等 3泊4日 동안 열렸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等 5個國에서 活動 中인 40餘 名의 傳統藝術人들이 參與했다.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를 開催해 온 主人公은 정효國樂文化財段의 주재근 代表(48)다. 株 代表는 國立國樂高等學校에서 代金을 專攻하고, 國樂理論을 가르치는 大學 敎授(博士), 21年間 文化體育觀光部 傘下 公務員으로 經歷을 쌓은 後 現在는 民間藝術團體 運營者로 活動하고 있다. 公演現場과 理論, 行政經驗 等 다양한 活動을 하면서 傳統文化藝術의 大衆化를 이루는 데 힘써왔다.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를 企劃하게 된 動機는.

지난해 열린 제1회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
지난해 열린 第1回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
“全 世界에 살고 있는 700萬 名의 우리 同胞들 中에는 19世紀 朝鮮이 힘이 없어 移住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歷史도 있습니다. 故國을 떠난 우리 民族은 高麗人, 朝鮮族, 第一僑胞 等으로 불리우며 100年이 훨씬 只今도 世界 곳곳에서 우리 文化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을 故國이 잊지 않았다는 事實을 일깨워주고, 우리 文化를 더 잘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올해 이 祝祭는 ‘新種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 19)’로 因해 8月18日 하루만 열리며 國內에서 居住하고 있는 在外同胞 藝術家들과 國內 名人 名唱 等이 舞臺에 오른다. 在日同胞인 民營치(打樂), 쿠라시케 우희(舞踊), 김보경(伽倻琴), 쿠와히로유키(打樂), 朝鮮族 藝術家인 최민(大笒), 윤은화(洋琴), 北韓出身 舞踊手 최선아, 美國僑胞 서훈정(판소리)이 出演한다. 또한 國內 名人으로는 문정근(춤), 김영동(大笒), 이수현(춤), 산유화어린이民謠合唱團(民謠) 等이 參與한다.

―앞으로 世界韓民族公演藝術祝祭는 어떻게 發展해나갈 것인가.

창덕궁 고궁공연 해설하는 주재근 대표
昌德宮 古宮公演 解說하는 주재근 代表
“全世界 韓民族 藝術家들의 네트워킹을 위해 常設的인 ‘韓民族公演藝術센터’ 建立도 推進할 計劃이다. 이 센터를 據點으로 全世界 韓民族公演藝術家들이 커뮤니티를 形成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全世界 跆拳道 道場을 통해 跆拳道 普及이 世界化 됐듯이 世界韓民族公演藝術센터를 통해 國樂과 클래식 等 우리 韓國音樂의 世界化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目標이다. 只今은 傳統公演藝術에 局限하고 있지만 漸次的으로 西洋音樂을 하는 海外 韓民族 公演藝術家로도 範圍를 擴大할 計劃이다.”

한양대 國樂科에서 音樂人類學 博士學位를 한 그는 文化體育관광부 公演傳統藝術과, 國立國樂院 等에서 文化藝術 振興政策을 擔當해 온 公務員으로 21年間 일한 뒤 退職, 우리 音樂의 大衆化를 硏究하고 企劃하는 이를 해왔다. 그는 정효아트센터에서 國樂界 新人演奏者들과 元老級 藝術人과의 疏通의 場을 만드는 한便, 傳統音樂은 勿論 西洋의 클래식까지 韓國의 公演文化 發展을 目標로 하는 (寺)公演傳統藝術未來硏究院度 設立해 運營하고 있다.

창덕궁 고궁공연
昌德宮 古宮公演
그는 文體部 公務員 時節 ‘宮闕에서의 國樂公演’을 처음 試圖하고, 파리萬國博覽會에 展示됐던 國樂器를 112年만에 故國에 歸還시키는 展示를 企劃하고, ‘萬波息笛’ 3D 立體映像을 만드는 等 國樂界에 影響을 끼친 굵직한 事業을 推進해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百方으로 뛰어다니며 豫算을 마련해 事業을 推進하는 것이 그의 特技다.

“2006年 우리 音樂을 外國人이나 市民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더 親近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苦悶하던 때였다. 문득 高宗이 100餘年 前 駐韓外交使節들과 宴會를 베풀었던 德壽宮 정관헌에서 駐韓 外國大使와 夫人들을 위한 行事를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보다 많은 駐韓 外交使節이 오기 위한 誘引策이 必要했다. 그때 外國大使와 夫人들에게 맞춤 韓服을 膳物해 주면 모두들 오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結果는 大舶이었다. 獨逸, 日本 等 40個國 60名의 駐韓 外交使節이 參與했고 이들은 우리의 傳統音樂과 宮中舞踊鑑賞과 四物놀이 體驗, 傳統茶와 茶菓를 즐기고 마지막 順序로 德壽宮 正殿에서 記念 寫眞을 찍었다. 이날 行事는 當日 저녁 9時 메인뉴스에 重要하게 報道됐다.

창덕궁 궁중연례악
昌德宮 宮中宴禮樂
이를 契機로 2008年부터는 德壽宮은 勿論 昌德宮 延慶堂에서 常設國樂公演을 열게 됐다. 그런데 當時에는 宮에서 行事를 한다는 것은 想像도 못할 社會雰圍氣였다. 文化財廳에서도 一回性 行事는 몰라도 常設公演에는 難色을 표했다. 그래서 古宮活用審議委員會에 參席해 直接 PT를 하며 說得한 끝에 겨우 許可가 떨어졌다. 每週 木曜日 午後 2時와 4時에 昌德宮 깊은 곳에 位置한 延慶堂 公演은 입所聞을 타고 最高 感動의 公演 舞臺로 所聞이 났다. 한 英國 會社 任員은 서울에 出張을 數十番 왔지만 갈 곳이 없었는데 대낮에 이렇게 멋진 公演을 本件 本人 人生에서 生涯 最高였다고 讚辭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始作된 古宮公演은 文化財廳의 ‘古宮달빛紀行’ 事業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古宮公演의 成功에 이어 地域마다 文化財로 指定돼 있는 古宅(古宅)에서도 公演이 열리게 됐다. 예전 朝鮮朝 선비들이 風流音樂을 즐겼던 것처럼 故宅에서 우리의 音樂과 舞踊을 즐기는 것이다. 이에 各 地自體와 協力해서 全國의 古宅을 選定하여 音樂會를 열었는데 週5日制와 맞물려 觀光客들에게 큰 人氣를 얻게됐다.”

―大笒 演奏者에서 公務員이 된 契機는.

“國立國樂高等學校에서 代金 演奏者를 꿈꿨다. 그런데 專門的인 大笒 演奏者로 國立國樂院이나 KBS國樂管絃樂團 團員으로 가는 것보다 大學에서는 國樂理論을 專攻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傳統音樂을 體系的으로 整理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連奏 한番 하는 것 보다 더욱 價値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大學 卒業 後 1994年 敎學社 音樂編輯 擔當으로 入社해 敎育課程 改編에 따른 中學校 音樂敎科書를 새롭게 製作하는 任務를 맡았다. 國樂 理論을 專攻한 사람으로써 서태지와아이들로 代辯되는 時代的 感覺에 맡는 新鮮한 國樂을 敎科書에 넣을 수 있게 돼 마음이 설렜다. 當時 敎科書에 國樂과 洋樂의 比率은 10:90 程度였는데 國樂比率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國樂大衆歌謠로 人氣를 얻고 있던 ‘꽃盆네야’, ‘山도깨비’ 等을 作曲者 許諾을 直接 받고 國樂關聯 寫眞들로 세련된 寫眞들로 모두 交替했다. 音樂敎科書의 革新이라 할 程度로 바꾸었는데 當時 敎科書 著者 中 西洋惡 專攻 敎授분이 最終本을 보고 왜이리 國樂이 많냐며 自己는 承認 못하겠다고 敎科書를 바닥에 내팽겨쳐 버렸다. 그 분이 돌아가자마 마자 擔當 課長님께 辭職書를 내고 化粧室에 가서 世上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이것이 只今까지 國樂을 對하는 우리 社會였구나’ 생각을 하니 모든 傳統國樂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다. 그때 다짐하였던 것이 앞으로 國樂이 우리 社會에서 제대로 待接받기 위한 일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株 代表는 1997年 9月 文化體育觀光部 國家公務員 特採로 學藝硏究士로 任用됐다. 21年 동안 國立民俗樂院, 國立國樂院 國樂硏究室, 國樂振興과, 掌樂課, 國立釜山國樂院 等 公演, 硏究, 振興 等의 國樂의 全般的인 일을 맡았다. 그는 “特히 2006~2008年 文化體育觀光部 傳統藝術팀에서의 勤務는 國立國樂院만이 아닌 國樂界와 文化藝術界 全般을 살펴보는 契機가 됐다”며 “當時 만들어낸 國樂政策과 豫算은 只今도 進行되고 있으며 文化藝術政策의 必要性을 實感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와도 因緣이 깊다. 2005年 9月27日子 동아일보에 났던 ‘1900年 파리萬國博覽會에 展示됐던 國樂器가 發見됐다’는 記事를 보고, 이 國樂器를 112年 만에 프랑스에서 故國으로 歸還하는 展示를 企劃했다.

고국으로 돌아 온 파리만국박람회 국악기 전시
故國으로 돌아 온 파리萬國博覽會 國樂器 展示
“當時 國立國樂院 國樂博物館 運營을 맡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記事를 보고 언젠가는 프랑스에 있는 國樂器들을 가져와야겠다는 決心을 했다. 2011年 프랑스國立圖書館에 所藏하고 있는 朝鮮王室 儀軌 297卷이 돌아와 國家的 이슈가 됐는데, 2012年에 파리萬國博覽會에 出品된 國樂器를 가져오는 것도 또 다른 큰 意味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躊躇하지 않고 無酌定 파리 音樂博物館으로 달려가 동아일보 寫眞에서 伽倻琴을 들고 서 있던 필리프 브뤼귀에르氏를 만났다. 國樂器 13點을 韓國으로 가져가 展示하고 싶다고 하자 欣快히 承諾해 주었다. 막상 承諾을 받고 보니 豫算이 問題었다. 當該年度 豫算은 昨年에 企劃財政部를 通過해 確保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다 보니 豫算은 全無했다. 일은 저질렀고 抛棄하면 國際的 信賴度가 무너지고 해서 協贊을 받으러 뛰어 다녔다. 좋은 일에는 다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實感했다. 아시아나航空에서 貨物運送을 協贊해 주었고, 우리銀行, 프로비스타호텔, 고흥곤國樂器等에서 協贊金을 내준 것이다. 公務員이 일을 만들어 땀을 흘려가며 뛰어다는 것을 보고 프로비스타호텔 會長님이 注意깊게 보고 계시다 後에 當身이 設立한 정효國樂文化財團에 代表理事를 내게 맡아달라고 付託하였다. 1900年 파리萬國博覽會 出品 國樂器의 國內展示는 모든 言論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YTN에서는 仁川國際空港에서 樂器 歡迎式을 實時間으로 生中繼 放送을 했다. 2012年 파리萬國博覽會 展示 成功은 2013年에 1894年 시카고萬國博覽會에 出品됐던 國樂器의 國內展示로 이어졌다. 이番 展示 豫算 確保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는데 新世界에서 지난해 展示를 보고 每年 2億원을 協贊해 주기로 한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 온 파리만국박람회 국악기 전시
故國으로 돌아 온 파리萬國博覽會 國樂器 展示
그는 2003年 國樂博物館에서 新羅 ‘萬波息笛’ 說話를 素材로 한 3D 立體映像을 만들기도 했다. 豫算確保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企劃財政部 豫算 擔當官을 10番 以上 찾아가 泣訴한 끝에 1億8000萬원의 豫算을 받아 ‘萬波息笛’을 製作할 수 있었다. 以後 國立國樂院 國樂博物館에서 3D 立體映像을 만든 것을 보고 國立中央博物館 어린이博物館, 國立晉州博物館 等에서도 3D 立體映像을 만들게됐다.

―公務員에게는 豫算을 따내는 일이 가장 重要한데, 노하우는.

“2018年 10月 國立釜山國樂院 掌握課長으로 勤務를 하면서 가장 큰 賞을 받았다. 文化體育觀光部 前 職員이 每年 투표하여 職級別로 바람직한 管理仔詳을 選定 授與하는데 2019年에 바람직한 管理者賞을 殊常한 것이다. 當時 國立釜山國樂院에서 深刻한 懸案이 있었는데 契約職 團員 約 30餘名이 2年 經過돼 正規職 轉換을 要求한 것이다. 問題를 푸는 方法은 두가지였다. 내가 있을 때 違反한 것이 아니니 그냥 時間끌기 하다 서울로 發令받아 가는 것, 아니면 積極的으로 對處하여 正規職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勿論 正規職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絶對的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A안, B안等을 마련해 于先 個人的으로 아는 辯護士에게 相談을 하여 法的 檢討를 끝내고 實行에 들어갔다. 企劃財政部와 文化體育觀光部가 있는 世宗市를 釜山에서 하루가 멀다 찾아가고 企劃財政部 擔當者 카톡으로 每日 같이 메시지를 남겼다. 釜山의 오늘 날씨가 어떻고, 재미있는 콩트度 보내고 스토커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該當되는 團員들을 앞세워 企劃財政部로 찾아가 눈물로 切迫함을 呼訴하기도 했다. 2018年 末 企劃財政部 擔當者에게 카톡이 왔다. 國立釜山國樂院 團員 15名 增員하기로 했다는 文字였다. 그대로 心臟은 멈추었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正말 世上은 努力하면 안되는 것이 없구나 라는 人生의 眞理를 새삼 알게 됐다.”

―代金을 專攻하게 된 契機는.

“全南 麗水의 시골 마을 女先生님 自炊房에서 본 베토벤 石膏 頭像은 아직도 내 人生의 强烈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 學年에 30名 남짓의 한 半밖에 없는 全校生 300餘名의 아주 작은 初等學校로 첫 赴任한 女先生님은 시골 어린이들에게 演劇과 리코더를 가르쳤다. 수많은 별빛이 고요하게 출렁거리는 麗水 밤바다 앞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等 리코더 合奏團의 練習은 各種 大會에서 上으로 이어졌다. 初等學校 6學年때 서울로 轉學을 오게 된 뒤 낯설음을 適應하는데도 리코더가 제格이었다. 쉬는 時間 敎室 한便에서 始作된 리코더 演奏는 長期자랑 때마다 단골로 불려졌고 그 人氣는 中學校까지 이어졌다. 當時 進路는 國史 先生님이 되는 것이 目標였는데 音樂先生님이 國立國樂高等學校 進學을 勸해주었다. 國樂이라는 拒否感은 全혀 없었고 오히려 一般 人文系高等學校 보다는 藝術界 高等學校에서 즐겁게 靑春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國立國樂高等學校가 學費도 없고, 每月 奬學金을 준다는 것은 魅力的이었다. 入學 後 專攻 樂器 選擇을 하게 되는데 伽倻琴 거문고 等 絃樂器는 關心이 全혀 없었고 작은 피리 보다는 가로로 비켜 부는 커다란 代金이 近似해 보였다. 代金을 專攻으로 選擇하고 先輩들의 宮中音樂부터 民間의 散調音樂까지 生前 처음 들어보는 音樂들은 클래식이나 歌謠와는 다른 妙한 魅力的인 音樂으로 靑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世界韓民族藝術祝祭를 企劃하게 된 데 對해 大學에서 國樂學을 專攻하면서 海外의 音樂交流에 對한 必要性을 切感했기 때문이라고 說明했다.

“大學에서 本格的으로 國樂學의 世界를 가르쳐주신 권오성 敎授님은 國樂만이 아닌 西洋音樂學, 人類學, 宗敎學, 民俗學, 言語學 等으로 事故를 넓고 깊게 해 주었다. 弟子는 스승이 가는 길을 뒤따르는 境遇가 많은데 恩師이신 權 敎授님은 中國, 日本,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等 아시아 國家들의 音樂의 學問的 交流에 이바지하신 분이다. 敎授님의 海外 出張이나 세미나, 뒷풀이 자리에서 世界 여러나라의 音樂家와 學者들과의 만남은 國際音樂交流의 必要性과 眼目을 키우게 되었다.”

―가장 安定된 職場으로 꼽히는 公務員은 왜 그만두었나.

“2019年 講師法이 通過되자 出講하고 있던 이화여대 韓國音樂科에서 兼任敎授는 9時間 以上 맡아야 한다는 通報를 받았다. 公務員 規定上 4時間 以上 外部出講은 禁止돼 있었다. 오랜 苦悶 끝에 21年間의 公務員 生活을 그만두고, 이제는 社會에서 뜻을 實行하는 時點이라 생각됐다. 2019年 4月30日子로 명예퇴직하고 5月1日子로 民間 最初 國樂文化財團인 정효國樂文化財團 代表 理事로 새로운 삶을 始作했다. 沈滯 危機의 정효國樂文化財段이 只今은 여러 企劃公演으로 話題의 中心이 되고 있다. 2020年부터는 國內 最高 權威의 東亞國樂콩루르가 열리는 場所가 됐다. 앞으로도 여러 機關과 協業하는 文化財團을 志向하고 있다. 2學期부터는 梨花女大 招聘敎授 外에 한양대와 韓國藝術綜合學校 兼任敎授로 公演企劃론, 弘報마케팅론, 國樂學硏究方法論, 國樂士特講, 國樂文獻特講等 여러 講義를 맡고 있다. 國樂을 專攻하는 大學院生들이 社會經驗을 쌓고 能力을 發揮할 수 있도록 하고 公演文化藝術政策 마련 및 代案 提示를 위한 社團法人을 지난해 7月에 設立했다.”

株 代表는 올해 5月부터는 文化財廳 無形文化財專門委員과 文化體育관광부 傘下 韓國國際文化交流振興院 國際交流諮問委員, 서울市南山國樂堂 藝術專門委員으로 活動하고 있다. 그는 “엘리트 體育에서 生活體育으로 政策이 變함으로써 體育이 活性化 됐듯이 ‘엘리트 音樂에서 生活音樂으로’라는 모토를 내건 ‘大韓民國生活音樂祝祭’를 計劃하고 있다”며 “21年間의 文化藝術行政經驗을 바탕으로 國家文化브랜드 上昇과 온 國民에게 幸福을 느낄 수 있는 文化藝術政策 開發 및 活用, 그리고 地域의 均衡的 文化發展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音樂의 强國인 우리나라에 아직 國立音樂博物館이 없는 것이 아쉽다”며 國立音樂博物館 建立 推進에 對한 必要性도 提起했다.

전승훈記者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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