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희|記者 購讀|東亞日報
김재희

김재희 記者

東亞日報 DX本部

購讀 27

推薦

엔터테인먼트 業界를 取材하는 放送·映畫 擔當 記者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記事 안에 담겠습니다.

jetti@donga.com

取材分野

2024-03-29~2024-04-28
文化 一般 55%
人物/CEO 7%
産業 3%
檢察-法院判決 3%
패션 3%
音樂 3%
社會一般 3%
人事一般 3%
기타 20%
  • “TV 맞은便에 소파, 傳統 居室構造 곧 사라질 것”

    집 꾸미기 烈風이 이어지고 있다. MZ世代에선 더 뜨겁다. 趣向을 重視하는 데다 코로나 19로 인한 ‘집콕’ 文化 擴散 때문이다. ‘오늘의 집’ 같은 온라인 인테리어 플랫폼도 많이 活用한다. 14日 出刊된 ‘家具, 집을 갖추다’(싱긋)의 著者인 김지수 매스티지데코 代表理事(53·寫眞)는 “집을 꾸미는 것이 ‘나만의 작은 文明’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有名 브랜드 가방, 外製車처럼 誇示하기 위한 消費가 아니라 私的인 空間을 나만의 趣向으로 채워 넣는 行爲이기 때문이다. 서울 麻浦區의 한 카페에서 16日 金 代表를 만났다.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時間이 길어지자 旅行, 外食에 쓸 돈을 高價의 家口를 購入하는 데 使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듯 그는 집 안 構造와 家口는 社會·文化的 脈絡에 맞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朝鮮時代에 鏡臺, 小盤같이 낮고 작은 家口가 많았던 理由도 17世紀 小氷河期 擴散에서 찾는다. “小氷河期 時節 추위가 또 닥칠지 모른다는 不安感에 朝鮮 사람들은 暖房 시스템을 溫突로 바꿨습니다. 溫突의 擴散은 坐式文化로 이어졌고, 坐式 家具가 發達하게 됐죠.” 코로나19 以後에도 집 꾸미기에 對한 關心은 持續될까. 金 代表는 “그렇다”고 答한다. 사람들이 消費 活動을 집에서 解決하는 ‘홈코노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집에서 즐기는 ‘홈파티’의 便安함, 居室 소파에서 ‘혼술’을 하며 온라인動映像서비스(OTT)를 보는 安樂함을 쉽게 놓진 않을 것이란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은 집 안에서 즐기는 法을 찾았습니다. 집이라는 작은 宇宙 안에서 내가 中心이 되는, ‘韓國式 히키코謀利(雲屯型 외톨이)’ 世代가 住居文化를 이끌어 갈 겁니다.” 그가 展望하는 未來 집의 特徵은 ‘커지는 居室’이다. 過去 居室은 家族이 모여 TV를 보는 空間이었다. 이젠 各自 房에서 携帶電話를 갖다 보니 居室은 無用之物이 됐다. 놀고 있는 居室은 業務, 食事, 休息 空間으로 다양하게 活用될 것이라는 게 그의 豫想이다. 居室에 둘 大型 테이블, 테이블 높이에 맞는 소파 等 家口도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TV를 두고, 맞은便에 소파를 놓는 傳統的인 居室 構造는 解體될 겁니다. TV와 소파의 자리에는 큰 테이블이 놓일 거예요. 저희 집 居室엔 通院목 테이블人 2m 길이 우드슬래브가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요. 여기서 아이들이 宿題도 하고, 저도 業務를 봐요. 이런 집이 普遍化되는 時代가 곧 오지 않을까요?” 아파트도 內部에 屬한 베란다가 아니라 壁에서 突出된 발코니를 갖춘 아파트가 人氣를 끌 것이라고 展望했다. 발코니는 하늘을 마주하기에 햇살과 바람을 바로 맞을 수 있다. “週末에 綠陰이 짙은 郊外로 旅行을 떠나고 快適한 테라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의 趣向이 아파트에도 옮겨 올 거라고 봐요. 탁 트인 곳에서 平和로움과 安樂함을 느끼며 自然의 품에 안기길 願하는 人間의 本能은 變하지 않으니까요.”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8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작은 원룸도 내 趣向대로”…길어진 집콕이 불러온 ‘집 꾸미기’ 烈風

    요즘 MZ世代 사이에서 ‘집 꾸미기’가 人氣다. 원룸에 살더라도 내 趣向에 맞는 家具들로 채워진 空間을 만드는 것, 卽 ‘작은 집 예쁘게 꾸미기’가 重要해진 것이다. ‘오늘의 집’ ‘집닥’ 같은 온라인 인테리어 플랫폼은 MZ世代의 必須 어플리케이션이다. 40萬 원을 呼價하는 이탈리아 브랜드 아르떼美데의 버섯 模樣 電燈의 佳品은 10萬 원 안팎에 날개 단 듯 팔려나간다. 數百~數千萬 원을 呼價하는 家具들로 가득한 강남구의 ‘더콘란샵’도 ‘핫 플레이스’다. 所得 水準의 向上, 趣向을 重視하는 MZ世代의 特性과 함께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 19)으로 인한 ‘집콕’ 文化 擴散이 집 꾸미기 烈風에 불을 지핀 것이다. 14日 出刊된 ‘家具, 집을 갖추다’(싱긋)는 집을 꾸미는 것이 ‘나만의 작은 文明’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名品가방, 外製車처럼 남에게 誇示하기 위한 消費가 아니라, 至極히 私的인 空間을 나만의 趣向으로 채워 넣는 行爲機 때문이다. 집 꾸미기의 烈風은 잠깐의 流行이 아니라, 持續되는 흐름이 될 것이라는 著者 김지수 매스티지데코 代表理事(53)를 16日 서울 麻浦區 카페에서 만났다. 코로나 19의 影響으로 집에서 보내는 時間이 길어지자 旅行, 外食 等에 쓸 돈을 高價의 家口에 投資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듯, 著者는 집안 構造와 家口는 社會·文化的 脈絡에 맞게 바뀌어 왔다고 말한다. 朝鮮時代에 鏡臺, 小盤과 같이 낮고 작은 家口가 많았던 理由도 17世紀 小氷河期의 擴散에서 찾는다. “17世紀 小氷河期 時節 朝鮮에서도 大凶作, 大飢饉, 傳染病의 猖獗이 일어났습니다. 굶주린 百姓들은 暴動과 民亂을 일으켰죠. 民亂으로 全燒된 집들이 많았던 데다가, 추위가 또 닥칠지 모른다는 不安感으로 朝鮮 사람들은 暖房시스템을 溫突로 바꿨습니다. 溫突의 擴散은 坐式 文化로 이어졌고, 坐式에 맞는 坐式家口가 發達하게 됐죠.” 코로나 19 以後에도 집 꾸미기에 對한 사람들의 關心은 持續될까. 金 代表는 ‘그렇다’고 答한다. 사람들이 바깥에서의 消費 活動을 집 안에서 解決하는 ‘홈코노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直接 料理를 하고, 音樂을 골라 들으며 親舊들과 즐기는 ‘홈파티’의 便安함, 寢臺에서 ‘혼술’을 하며 온라인動映像서비스(OTT)를 보는 安樂함을 쉽게 抛棄하진 않을 것이란 說明이다. “코로나 19로 사람들은 집 안에서 참는 게 아니라 즐기는 方法을 찾았습니다. 집안에서는 미처 經驗하지 못했던 것들을 經驗함으로서 多樣性을 맛본 거죠. 집이라는 작은 宇宙 안에서 내가 中心이 되는, ‘韓國式 히키코謀利’ 世代가 리빙 文化를 이끌어 갈 겁니다.” 著者가 展望하는 未來의 집의 特徵은 ‘커지는 居室’이다. 過去의 居室은 家族들이 모여 TV를 보는 空間이었다. 이제 家族 構成員들은 各自의 房에서 핸드폰을 가지고 논다. 집에서 가장 넓은 空間인 居室이 無用之物이 된 것이다. 놀고 있는 居室은 業務, 食事, 休息 空間으로 다양하게 活用될 것이라는 게 著者의 展望이다. 부엌은 漸次 사라지고, 居室은 漸漸 커지는 집, 著者가 그리는 未來의 집이다. 집안 構造의 變化에 따라 居室에 둘 수 있는 大型 테이블, 테이블 높이에 맞는 소파 等의 家具도 많아질 것이라는 게 金 代表의 豫測이다. “TV를 두고, 맞은便에 소파를 놓는 傳統的인 居室의 構造는 解體될 겁니다. TV와 소파의 자리에는 큰 테이블이 代替할 거에요. 저희 집 居室이요? 通院목 테이블人 2m 길이 우드슬랩이 한 가운데 놓여져 있죠. 여기서 아이들 工夫도 봐주고, 저도 業務를 봐요. 이런 집의 構造가 普遍化되는 時代가 곧 오지 않을까요?”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7
    • 좋아요
    • 코멘트
  • 동아일보 連載 ‘南山의 部長들’ 臺灣서 中國語로 飜譯 出刊

    中央情報部 部長들이 主導한 工作 政治를 통해 朴正熙 政權 18年을 照明한 논픽션 ‘南山의 部長들’(폴리티쿠스·寫眞)이 最近 臺灣에서 中國語로 飜譯 出刊됐다. ‘南山의 部長들’은 김충식 嘉泉大 特任副總長이 동아일보 記者 時節 2年 2個月 동안 連載한 記事를 모아 1992年 出刊한 冊이다. 只今까지 約 55萬 部가 팔렸다. 2020年 이병헌 이성민 等이 出演한 同名의 映畫로도 開封해 코로나19 餘波에도 不拘하고 490萬 名이 觀覽했다. 日本 最大 出版社인 고단샤(講談社)도 1994年 飜譯 出版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6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90代에 ‘미니멀리즘 巨匠’ 오른 火가 에레라 別世

    極端的 미니멀리즘을 追求하며 巨匠으로 認定받은 쿠바 出身 畫家 카르멘 에레라(寫眞)가 別世했다. 享年 107歲. 美國 뉴욕타임스는 그가 12日(現地 時間) 뉴욕 맨해튼 自宅에서 숨을 거뒀다고 14日 報道했다.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난 故人은 幼年 時節 프랑스 파리와 獨逸 베를린 等에서 美術을 工夫했다. 아바나에서 大學을 다니며 建築學을 專攻했고, 敎授였던 男便을 만나 1939年 美國 뉴욕으로 移住했다. 1948年부터 파리에서 活動하며 有名 갤러리인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에 作品을 展示해 作家로 認定받았다. 1954年 뉴욕에 定着했지만 89歲까지 한 作品도 팔지 못했다. 黑白의 組合, 單純한 幾何學 構造를 使用해 미니멀리즘을 선보였지만 注目받지 못했다. 2004年 中南美 出身 藝術家들의 作品을 紹介하는 뉴욕 프레데리코 세베 갤러리 展示가 分岐點이 됐다. 評論家들은 幾何學的 미니멀리즘을 다룬 에레라의 作品이 藝術史的으로 重要한 意味가 있다고 評價했다. 에레라는 이 展示에서 作品을 처음 販賣했다. 그의 作品은 現在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英國 런던 테이트모던 美術館 等에 展示돼 있다. 2009年 5萬 달러(約 6000萬 원)였던 作品 값은 2014年 16萬 달러(約 1億9000萬 원)로 뛰었다. 故人은 生前 인터뷰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언젠가 버스가 온다는 말처럼 結局 時間의 問題다. 난 100年 가까이 기다렸다”고 말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6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冊의 香氣]韓 사람의 權力慾이 ‘모두의 不幸’ 되지 않게 하려면

    腸베델 보카사는 歷史上 惡名 높은 獨裁者 가운데 한 名이다. 軍士 쿠데타로 執權한 그는 國名을 中央아프리카共和國에서 中央아프리카帝國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皇帝 보카사 1世라 稱했다. 1977年 戴冠式에는 政府 豫算의 4分의 1에 該當하는 2200萬 달러(現 換率로 約 263億 원)가 投入됐다. 自身에게 反旗를 드는 이들은 鰐魚가 득실대는 蓮못에 빠뜨렸다. 그의 惡魔的 行態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英國 런던代(UCL) 國際政治學과 敎授인 著者는 보카사를 비롯한 權力者들 數百 名을 硏究해 어떤 사람이나 시스템이 더 쉽게 權力을 쥐고 濫用하는지를 分析했다. 사이코패스 性向의 사람들이 權力을 손에 넣는 過程과 잘못된 시스템으로 因해 權力者가 惡人이 되는 過程을 集中 追跡했다. 惡人들은 어떻게 權力을 얻었을까. 著者는 進化論에서 答을 찾는다. 先史時代에 더 많이 사냥하고, 不足 間 戰爭을 勝利로 이끌려면 健壯하고 殘酷한 이가 指導者가 되어야 했다. 鎭火는 指導者 選擇의 프레임을 우리 腦에 새겼는데, 이것이 只今까지 作動하고 있다는 것이다. 美國 歷代 大統領들은 當代 男性들의 平均 키보다 컸다. 女性보다 男性에게, 키 작은 男性보다 키 큰 男性에게 權力이 쏠리는 傾向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人間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어떻게 보이는지에 더 執着한다. 그 結果 權力을 얻는 데 能하고 自己 中心的으로 思考하는 ‘惡한 리더’에게 더 끌린다. 權力者들이 權力을 濫用하는 理由도 스스로가 惡人인 境遇가 많아서라고 말한다. 他人의 歡心을 사고 이를 自身에게 유리하게 利用하면서도 罪責感을 느끼지 않는 사람일수록 權力者가 될 可能性이 높다는 것이다. 惡한 權力者를 낳는 건 個人의 性品 以上으로 腐敗한 시스템에 原因이 있다. 外交官 免責特權이 주어진 美國 뉴욕시에서 各國 大使들이 不法駐車를 일삼은 事例가 代表的이다. 뉴욕市長이 不法駐車를 反復할 境遇 番號版을 取消하는 ‘三振 아웃制’를 施行하자 外交官들은 비로소 不法駐車를 멈췄다. 나쁜 國家의 시스템은 權力者의 選擇을 더 利己的이고 惡한 方向으로 끌고 간다는 걸 보여준다. 腐敗한 이의 손에 權力을 쥐어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통계학자 에이브러햄 월드의 ‘生存者 偏向 誤謬’를 參考하라고 말한다. 월드는 第2次 世界大戰 勝戰 可能性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戰爭 中 生存한 戰鬪機를 補强하기보다 擊墜된 戰鬪機를 分析해 이를 改善하는 戰略을 짰다. 著者는 現在의 權力者에게 問題가 있다면 擊墜된 戰鬪機처럼 사람들의 視野에서 사라진, 다시 말해 權力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를 指導者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權力을 탐하는 者가 가장 腐敗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組織 안에서 無作爲로 標本을 抽出해 淸廉性 試驗을 進行하거나, 監視의 焦點을 下位職이 아닌 任員에 맞추는 方案도 提示한다. 하지만 現實 世界에서 權力을 願치 않지만 리더십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얼마나 實現 可能할지에 對한 疑問은 如前히 남는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2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主人公들의 臺詞가 正말 좋아서… “드라마 臺本집 제발 팔아주세요”

    “臺本집 사고 싶다. 제발 팔아주세요.” 지난달 終映한 SBS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臺本 比較映像(寫眞)에 지난해 12月 달린 댓글이다. 放送社는 드라마 場面 아래로 臺本 字幕이 흐르는 映像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學窓時節 離別한 主人公 최웅(최우식)과 국연수(김다미)가 10年 만에 再會해 서로의 마음을 確認하는 6話 映像에 對한 視聽者 關心이 特히 높았다. 該當 映像의 照會數는 9萬 回를 넘었고 ‘臺本집을 내달라’는 댓글이 달렸다. SBS 關係者는 “다른 作品들에 비해 臺詞가 좋다는 視聽者 反應이 많아 實際 臺本과 比較한 映像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臺本 比較映像에 對한 높은 呼應은 出版市場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12日 豫約販賣를 始作한 ‘그 해 우리는’ 臺本집 1·2卷(김영사)은 예스24와 알라딘에서 1月 셋째 週 週間 綜合 베스트셀러 1, 2位를 各各 차지했다. 지난달 終映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臺本집度 예스24와 알라딘에서 1月 넷째 週 基準 綜合 베스트셀러 2, 8位에 各各 올랐다.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臺本집 1·2는 지난해 10月 알라딘에서 週間 綜合 베스트셀러 1, 2位를 휩쓸었다. 2020年 發賣된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臺本집은 예스24 小說·市·戱曲 分野 7位에 올랐다. 9日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1月∼올 1月 臺本집 販賣量은 2019年 1月∼2020年 1月에 비해 3倍 以上으로 急增했다. 김유리 예스24 에세이·藝術 MD는 “마니아層이 탄탄한 드라마는 팬들이 臺本집을 2, 3卷씩 重複 購買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臺本집에 對한 關心이 뜨거워지면서 一部 出版社는 드라마 企劃 段階부터 放送社와 臺本집 出刊을 協議한다. 박은경 김영사 弘報팀長은 “‘그 해 우리는’ 製作 消息을 接하고 放送社에 臺本집 出刊을 먼저 提案했다”고 했다. 臺本집이 人氣를 끄는 건 드라마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多角的으로 鑑賞하고자 하는 需要가 있어서다. 金相万 엘리 마케팅팀長은 “팬들이 臺本과 實際 演技에서 달라진 大使는 무엇인지까지 比較해 본다”고 말했다. 박은경 팀長은 “드라마에서 省略된 敍事를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아 臺本집을 ‘無削除 作家판’으로 내고 있다”고 했다. 出版社가 臺本집을 펴내면서 關聯 굿즈(商品) 製作에도 積極 나서고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 1·2를 낸 出版社 청어람은 드라마 場面을 담은 葉書集을 製作하고 있다. 박문수 청어람 室長은 “放送社가 이벤트를 통해 一般人에게 極少量 配布한 ‘캐릭터 葉書集 모음집’을 갖고 싶다는 要請이 많아 該當 葉書集 라이센스를 取得하여 臺本집 限定數量 굿즈로 活用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10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드라마 ‘그 해 우리는’ 人氣에 臺本집度 베스트셀러 1位

    ‘臺本집 사고 싶다. 제발 팔아주세요.’ ‘(臺本比較映像을) 하도 많이 봐서 臺詞를 다 외울 地境이에요.’ 지난달 25日 終映한 드라마 ‘그 해 우리는’(SBS)의 臺本比較映像에 달린 댓글들이다. SBS는 드라마 속 場面 아래 臺本이 흘러가도록 編輯한 映像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特히 學窓時節 離別한 主人公 최웅(최우식)과 국연수(김다미)가 10年 만에 再會해 서로의 마음을 確認하는 6話 엔딩의 臺本比較映像에 쏟아진 反應은 뜨거웠다. ‘다시 만났으면 잘 지냈냐고. 힘들진 않았냐고. 나는 좀 많이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잖아… 어떻게 지냈어. 말해봐. 어떻게 지냈어 너’라고 말하는 최웅의 大使와, ‘우리가 헤어진 건, 다 내 傲慢이었어. 너 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내 傲慢’이라는 硏修의 내레이션이 겹쳐진 場面이었다. 該當 映像의 照會數는 9萬 回를 넘었고, ‘臺本집을 내 달라’는 等 380餘個의 댓글이 달렸다. 臺本比較映像에서의 뜨거운 反應은 그 해 우리는의 臺本집 販賣量에서 立證됐다. 지난달 12日 豫約販賣를 始作하자마다 그 해 우리는 臺本집 1·2는 예스24, 알라딘 等 온라인 書店에서 베스트셀러 上位圈에 올랐다. 出刊 直後인 1月 셋째 週에는 예스24와 알라딘에서 週間 베스트셀러 1, 2位를 차지했다. SBS 關係者는 “그 해 우리는은 다른 드라마에 비해 臺詞가 좋다는 視聽者들의 反應이 많아 直接 臺本과 比較할 수 있도록 映像을 올렸다. 臺本比較映像에의 關心이 臺本집의 人氣로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傳했다. 드라마 臺本집 市場이 커짐에 따라 放送社, 出版社는 드라마 팬들을 臺本집으로까지 誘引하는데 集中하고 있다. 出版社는 드라마의 特性을 살린 臺本집 굿즈(商品) 製作에 集中한다. 그 해 우리는의 境遇 高等學校 時節 최웅과 硏修의 풋풋했던 戀愛 時節이 주된 背景인 點을 살려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名札을 굿즈로 製作했다. 그 해 우리는의 出版社인 김영사 關係者는 “臺本집은 드라마 팬들의 所藏欲求를 刺戟하는 것이 重要해 커버나 굿즈를 더 예쁘게 만드는데 最近 더 心血을 기울인다”며 “그 해 우리는의 名刹 굿즈는 全部 消盡됐고, 海外에서 版權 問議를 할 때 굿즈度 같이 製作해달라는 要請을 했다”고 傳했다. 出版社와 放送社에서 臺本집 마케팅에 心血을 기울이는 理由는 臺本집 市場이 漸次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스24에 따르면 2019年~2020年 對備 2021年~2022 初 國內 TV 드라마 臺本집 販賣量은 46.3% 增加했다. 지난달 終映한 ‘옷소매 붉은 끝동’(MBC)도 예스24와 알라딘에서 1月 넷째週 基準 各各 베스트셀러 2, 8位에 올랐다. 예스24의 김유리 에세이·藝術 MD는 “그 해 우리는 팬들의 境遇 所藏本 槪念으로 臺本집을 2~3卷씩 重複 購買하는 傾向도 보인다”고 說明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09
    • 좋아요
    • 코멘트
  • [冊의 香氣]科學者의 눈, 欲望 아닌 本質을 보라

    사람을 살려야 할 醫學이 그 反對로 活用됐다면?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는 일이 2008年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다. 外科醫師 파올로 마키아리니는 有名 醫學저널 ‘랜싯’에 機關誌를 成功的으로 移植했다는 論文을 發表했다. 以後 그는 患者 8名에게 人工 機關紙 移植 手術을 追加 執刀했고, 그 結果 患者들의 狀態가 好轉됐다는 論文을 7篇이나 내놓았다. 이는 모두 거짓이었다. 마키아리니가 手術한 患者 大部分이 副作用으로 死亡하자, 이들을 돌봤던 醫師들이 疑問을 提起했다. 마키아리니를 雇用하고 硏究를 支援했던 카롤린스카技術大는 手術과 論文 作成에 어떤 違法行爲도 없었다며 그를 庇護했다. 하지만 合倂症으로 苦痛 받는 患者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報道되면서 大學도 調査에 着手했다. 그 結果 마키아리니는 患者 狀態를 造作했고, 쥐를 對象으로 한 機關紙 移植 實驗 데이터를 僞造한 것으로 드러났다. 劃期的인 發見으로 世上을 떠들썩하게 했던 科學者들이 硏究 結果가 거짓이었음을 是認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英國 心理學者인 著者는 마키아리니의 事例처럼 데이터를 漏落하고, 寫眞을 造作해 成果를 부풀리는 境遇가 科學界에 澎湃하다고 暴露한다. 科學界 最高 水準의 저널인 ‘네이처’ ‘사이언스’에 揭載된 論文 中에서도 데이터 造作 等 硏究 不正行爲로 한 해에 數百 篇의 論文이 撤回되는 現實을 赤裸裸하게 보여준다. 有名 科學者들도 造作의 誘惑을 避해갈 수 없었다. 간수 役割의 被實驗者가 罪囚 役割의 被實驗者를 虐待하게 되는 結果를 導出한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監獄 實驗’은 心理學 歷史上 가장 有名한 硏究로 꼽히지만 數十 年이 지나서야 민낯이 드러났다. 짐바르도가 實驗에 간수 役割로 參與한 이들에게 어떻게 行動할지 詳細한 指針을 준 錄取錄이 公開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例外는 아니다. 황우석 前 서울大 敎授가 2004年 人間 胚芽 複製에 成功했다는 論文을 ‘사이언스’에 發表했다가 細胞 寫眞을 造作한 事實이 發覺돼 바닥으로 墜落한 事件은 韓國 科學界의 數値로 남아 있다. 著者는 造作을 통해 結果를 부풀리려는 欲望이 科學界의 ‘出版 偏向’에 起因했다고 指摘한다. ‘科學文獻은 科學 過程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對한 徹底한 記錄이어야만 하는데, 科學 文獻 亦是 新聞처럼 새롭고 흥미로우며 明確한 主題가 있는 스토리를 偏愛한다’는 것이다. 저널 編輯者와 論文 檢討者들은 硏究 結果가 얼마나 흥미로운가에 따라 論文 揭載 與否를 決定한다. 이를 科學界에서는 出版 偏向이라고 부른다. 그 結果 肯定的인 結果만 認定되고 無效로 나타난 結果는 서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現實을 바꿀 수는 없을까. 著者는 方法論이 妥當할 境遇 結果와 相關없이 論文을 揭載해 주는 저널을 만드는 方案을 提案한다. 論文 出版의 모든 過程에 對해 누구든 接近할 수 있도록 硏究에 使用된 데이터, 데이터 分析에 使用된 統計 프로그램의 코드 等을 公開하는 ‘오픈 사이언스’도 方法이 될 수 있다. 映畫의 한 場面처럼 食飮을 全廢하고 硏究만 하던 科學者가 종이뭉치를 들고 뛰쳐나와 ‘유레카!’를 외치는 것이 有意味한 發見이라는 생각이 오랜 期間 科學界에 뿌리내렸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著者는 말한다. 當場은 덜 興奮되더라도 제대로 된 方法論을 거쳐 堅固한 結果를 導出하는 過程이 重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大部分의 科學은 갑자기 結論的 眞理로 跳躍하기보다는 漸進的으로 累積되는 性格을 띤다. 그래서 科學은 元來 지루한 學問이었다. 그리고 科學은 結局, 다시 지루해져야 한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05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探究慾이 貪慾과 재미에 홀릴때…과학은 거짓말을 한다

    사람을 살려야 할 醫學이 그 反對로 活用됐다면?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는 일이 2008年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다. 外科醫師 파올로 마키아리니는 有名 醫學저널 ‘랜싯’에 機關誌를 成功的으로 移植했다는 論文을 發表했다. 以後 그는 患者 8名에게 人工 機關紙 移植 手術을 追加 執刀했고, 그 結果 患者들의 狀態가 好轉됐다는 論文을 7篇이나 내놓았다. 이는 모두 거짓이었다. 마키아리니가 手術한 患者들 大部分이 副作用으로 死亡하자, 이들을 돌봤던 醫師들이 疑問을 提起했다. 마키아리니를 雇用하고 硏究를 支援했던 카롤린스카 技術大學은 手術과 論文 作成에 어떤 違法行爲도 없었다며 그를 庇護했다. 하지만 合倂症으로 苦痛 받는 患者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報道되면서 大學도 調査에 着手했다. 그 結果 마키아리니는 患者 狀態를 造作했고, 쥐를 對象으로 한 機關紙 移植 實驗 데이터를 僞造한 것으로 드러났다. 劃期的인 發見으로 世上을 떠들썩하게 했던 科學者들이 硏究結果가 거짓이었음을 是認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英國 心理學者인 스튜어트 리치는 新刊 ‘사이언스 픽션’(더난出版)에서 마키아리니의 事例처럼 데이터를 漏落하고, 寫眞을 造作해 成果를 부풀리는 境遇가 科學界에 澎湃하다고 暴露한다. 科學界 最高 水準의 저널인 ‘네이처’, ‘사이언스’에 揭載된 論文 中에서도 데이터 造作 等 硏究 不正行爲로 한 해에 數百餘 篇의 論文이 撤回되는 現實을 赤裸裸하게 보여준다. 有名 科學者들도 造作의 誘惑을 避해갈 수 없었다. 간수 役割의 被實驗者가 罪囚 役割의 被實驗者를 虐待하게 되는 結果를 導出한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監獄實驗’은 心理學 歷史上 가장 有名한 硏究로 꼽히지만 數十 年이 지나서야 민낯이 드러났다. 짐바르도가 實驗에 간수 役割로 參與한 이들에게 어떻게 行動할지 詳細한 指針을 준 錄取錄이 公開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例外는 아니다. 황우석 前 서울大 敎授가 2004年 人間 胚芽 複製에 成功했다는 論文을 ‘사이언스’에 發表했다가 細胞 寫眞 造作이 發覺돼 墜落한 事件은 韓國 科學界의 數値로 남아있다. 著者는 造作을 통해 結果를 부풀리려는 欲望이 科學界의 ‘出版 偏向’에 起因했다고 指摘한다. ‘科學文獻은 科學 過程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對한 徹底한 記錄이어야만 하는데, 科學 文獻 亦是 新聞처럼 새롭고 흥미로우며 明確한 主題가 있는 스토리를 偏愛한다’는 것이다. 저널 編輯者와 論文 檢討者들은 硏究 結果가 얼마나 흥미로운가에 따라 論文 揭載 與否를 決定한다. 이를 科學界에서는 出版 偏向이라 부른다. 그 結果 肯定的인 結果만 認定되고 無效로 나타난 結果는 서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現實을 바꿀 수는 없을까. 著者는 方法論이 妥當할 境遇 結果와 相關없이 論文을 揭載해 주는 저널을 만드는 方案을 提案한다. 論文 出版의 모든 過程에 對해 누구든 接近할 수 있도록 硏究에 使用된 데이터, 데이터 分析에 使用된 統計 프로그램의 코드 等을 公開하는 ‘오픈 사이언스’도 方法이 될 수 있다. 映畫의 한 場面처럼 食飮을 全廢하고 硏究만 하던 科學者가 종이뭉치를 들고 뛰쳐나와 ‘유레카!’를 외치는 것이 有意味한 發見이라는 생각이 오랜 期間 科學界에 뿌리내렸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著者는 말한다. 當場은 덜 興奮되더라도 제대로 된 方法論을 거쳐 堅固한 結果를 導出하는 過程이 重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大部分의 科學은 갑자기 結論的 眞理로 跳躍하기보다는 漸進的으로 累積되는 性格을 띤다. 그래서 科學은 元來 지루한 學問이었다. 그리고 科學은 結局, 다시 지루해져야 한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2-04
    • 좋아요
    • 코멘트
  • 靈끌해도 티끌… 내집 마련이 뭐길래

    집 샀다는 사람들은 흔히 ‘靈끌했다’고 말한다. 靈魂까지 끌어모으듯 最大限으로 貸出을 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산 게 아니라 銀行이 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2030 靈끌族’李 首都圈 아파트를 大擧 사들이기 始作했다는 한 온라인 記事를 보며 ‘서영동 이야기’ 마지막 章의 主人公 牙營은 생각한다. ‘끌어모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靈魂은 大體 어떤 靈魂일까. 나는 靈魂마저도 實속이 없네.’ 牙營처럼 靈끌을 해도 티끌人 30代 初盤의 時間制 講師가 있다. 反對로 父母를 잘 만나 靈끌할 必要 없이 新婚 生活을 34坪 自家에서 始作한 세훈度 있다. 承服은 靈끌韓 돈으로 不動産 사고팔기를 反復해 아파트 두 채와 建物 所有主가 된 두 男妹의 아버지다. 25坪 아파트에 靈끌韓 돈을 얹어가며 42坪 아파트에 安着했지만 層間騷音 葛藤으로 온 家族이 苦痛받는 희진은 어떤가. 어딘가에서 본 듯한, 또는 나 自身과 비슷한 人物들이 서영동에 산다. 서영동 사람들이 苦悶하는 건 靈끌로 살 수 있는 집만은 아니다. 이들은 내 집 장만을 위한 日常의 奮鬪 속에서 沒廉恥함과 부끄러움을 생각한다. 끌어모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靈魂은 大體 무엇인가를 苦悶한 牙營처럼 말이다. 不動産 投資라는 熾烈한 戰爭 앞에 내 靈魂은 얼마나 깨끗한가. 이들은 집에만 목을 매느라 家族에게 疏忽하고, 나보다 나은 집에 사는 他人을 猜忌 嫉妬했던 自身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한다. 貸出 利子를 갚는 서영동 사람들의 팍팍한 삶은 우리의 現實과 닮아 있어 익숙하다. 익숙하지 않은 건 팍팍한 삶을 살아내느라 우리가 잊었던 價値다. 그 價値의 中心에는 家族이 있다. 男동생에게만 집을 贈與하려는 아버지를 미워했던 自身에 對한 부끄러움, 生業에 바빠 神經 쓰지 못한 사이 癡呆에 걸린 어머니에 對한 안쓰러움, 어렵게 마련한 42坪 아파트에서 아랫집과의 葛藤으로 괴로워하는 中學生 딸에 對한 未安함…. 내 집 마련의 奮鬪에서 出發한 冊은 집 안에서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家族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家族의 不幸 앞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내 집’의 安樂함은 집의 坪數와 時勢 差益보다 더 重要한 價値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2-01-29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人口絶壁, 함께 잘 사는 移民政策 必要”...共存 위한 提案들[히어로콘텐츠/共存]

    “韓國語를 배워서 아이와 疏通하려 했던 ‘그랜마 비(Granma B)’가 없었다면, 우리 아이는 美國 어린이집에 適應하지 못했을 겁니다.” 東亞日報 히어로콘텐츠 ‘共存: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 시리즈가 報道되자 권석준 成均館大 工大 敎授는 17日 페이스북에 該當 記事를 共有하며 美國 留學 經驗을 紹介했다. 어린이집 先生님이 아이에게 英語를 强要하지 않고 直接 韓國語를 배워 보살폈다는 얘기다. 이에 李某 氏도 美國에서의 育兒 經驗을 떠올리며 “아이를 돌봐주는 곳에서 ‘WATER=MOOL(물)’이란 式으로 重要한 單語를 적어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讀者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포털 사이트 等에서 ‘共存’ 記事를 共有하며 海外에서 異邦人으로서 겪은 어려움과 現地人의 따뜻한 도움을 紹介했다. 우리가 異邦人으로서 도움을 받았듯 移住民들을 돕자는 趣旨다. 海外 韓人僑胞나 留學生 讀者들은 現地 移民政策을 알리며 ‘共存 政策’을 提案했다.○ “大選 走者, 移民政策 마련하라”1회 ‘한 洞네, 두 世界’(17日子 A1·2·3面), 2回 ‘移住民들 떠나지 못하는 섬’(18日子 A1·2·3面)에서 指摘된 言語敎育 問題에 共感하는 讀者가 많았다. 네덜란드에 사는 韓國人 장某 氏는 “네덜란드처럼 就學 前 現地語 敎育을 支援하면서, 아이의 言語治療 費用까지 國家가 支援해야 한다”고 提案했다. 3回 ‘사다리 없는 移住民 아이들’(19日子 A1·2·3面)에 報道된 移住民 비자 制度에 對한 代案도 나왔다. 移民 人材를 國內에서 育成하도록 비자를 改編하자는 얘기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代表는 美國 실리콘밸리 滯留 經驗을 紹介하며 “美國은 비자制度가 柔軟하다는 印象을 받았고, 移民 辯護士도 많았다”며 “能力 있는 移住民을 採用하는 인프라가 必要하다”고 强調했다. 大選 走者들이 移民 政策을 積極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美國 오하이오주립대를 나온 송주영 氏는 “人口絶壁은 가장 時急히 다뤄야 하는 問題인데, 兩黨 大選走者들의 公約에서 人口 問題 및 移民者 政策에 對한 제대로 된 긴 文章 하나 찾지 못했다”고 批判했다. 元喜龍 國民의힘 選擧對策本部 政策本部長은 2回 記事를 言及하며 “엄마 아빠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비자가 있건 없건 아이는 學校에 가고 豫防注射를 맞고 아프면 治療를 받을 수 있어야 좋은 나라”라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열띤 討論 觸發‘共存’ 시리즈는 포털 사이트와 SNS에서 移住民에 對한 열띤 討論을 觸發시켰다. 1回에 알려진 ‘백운동 新築 아파트 入住民’이라고 밝힌 한 讀者는 “피자집, 네일아트 社長님 等이 모두 外國人인데 다 좋은 분들이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했다. 反面 한 누리꾼(ohyu****)은 “不法 滯留者 아이들보다 自國民 아이가 于先”이라고 主張했다. ‘外國人 勞動者를 받아들이지 말고 國內 勞動者 賃金을 向上시켜야 한다’(k1m4****), ‘未登錄 兒童의 滯留 資格을 認定하면 이를 惡用하는 外國人들이 暴增한다’(enef****)는 댓글도 있었다. 專門家들은 共存을 위한 相互理解 敎育이 必要하다고 强調했다. 강동관 移民政策硏究院長은 “漠然한 敵愾心을 없앨 수 있도록 正確한 情報에 根據한 相互 理解와 疏通이 必要하다”며 “多文化는 葛藤의 씨앗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할 資源이라는 點을 알려야 한다”고 助言했다. “人口絶壁 時代, 共存 위한 移民政策 마련을”미등록 移住兒童 滯留資格 緩和, 2025年 3月까지만 施行 ‘彌縫策’外國人 兒童 就學前 保育支援… 未登錄 兒童 放置 問題도 論議를 法務部가 20日 國內 未登錄 移住兒童의 滯留資格을 緩和했지만 如前히 限時的으로 施行되는 ‘彌縫策’이라는 指摘이 나온다. 人口絶壁 時代, 移住民과의 共存을 위해 長期的인 觀點에서 移民 政策의 큰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날 發表된 未登錄 移住兒童 滯留資格 緩和 方案은 2025年 3月 31日까지 限時的으로 施行된다. 이때까지 國內 居住期間을 채우지 못하면 對象이 될 수 없다. 初中高校에 在學 中이거나 高校를 卒業한 兒童만 對象으로 한 點도 問題다. 韓國語가 서투르거나 經濟的으로 어려워 學校에 늦게 들어가거나 中途에 學業을 抛棄하는 移住兒童도 많기 때문이다. 就學 前 兒童을 위한 保育 支援策이 마련되지 않은 點도 限界다. 只今은 合法的으로 滯留하는 登錄 外國人도 韓國 國籍이 아니면 保育料를 支援받지 못한다. 保健福祉部는 保育費 支援 對象을 ‘大韓民國 國籍을 가진 者’로 制限하고 있다. 人權團體들은 對象을 ‘國內에 居住하는 모든 사람’으로 擴大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이영아 京畿移住兒童保育네트워크 幹事는 “稅金을 내는 登錄 移住民의 英·幼兒 子女에게 保育費를 支援하지 않는 건 差別”이라며 “未登錄 兒童은 放置해도 되는지도 論議해야 할 때”라고 했다. 고영인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지난해 7月 外國人 영·幼兒에게도 保育費를 支援하는 嬰幼兒保育法 改正案을 代表 發議했지만 이 안은 國會에 繫留됐다. 問題를 根本的으로 解決하려면 出生登錄制 施行이 時急하다는 指摘도 나온다. 未登錄 移住兒童을 出生登錄하면 身分이 證明돼 어린이집 入所나 學校 入學, 豫防接種 等 福祉惠澤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政府는 지난해 11月 出生登錄制 導入 方針을 公式化했지만 法 制定, 시스템 마련 等을 거쳐 2024年 以後에나 施行할 것으로 보인다. 專門家들은 政府가 長期的인 觀點에서 移民政策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助言한다. 이일 公益法센터 어필 辯護士는 “移住民을 어떻게 遮斷하고 統制할 것인가가 아니라, 移住民과 어떻게 같이 잘 살 것인가를 苦悶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히어로콘텐츠팀▽팀長: 이새샘 記者 iamsam@donga.com▽記事 取材: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송은석 남건우 記者▽그래픽: 김충민 記者▽編輯: 한우신 記者▽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사이트 開發: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共存’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具現한 사이트(together_intro)로 連結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21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인도네시아系 대성氏 “海兵 入隊 申告합니다”[히어로콘텐츠/공존]

    海岸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지난해 10月 25日, 海兵隊 敎育訓鍊團 앞은 入所者 家族들로 가득했다. 윤대성 氏(20)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었다. 映像通話 畵面엔 인도네시아 親舊들이 있었다. 映像通話가 끝나자 엄마 에코디르미야띠(에코·50) 氏는 아들 대성 氏를 꼭 안았다. ‘이런 날이 現實이 될 줄이야.’ 대성 氏는 韓國에서 태어나 中學校까지 마치고 엄마의 나라인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志願者들만 軍隊를 간다. 대성 氏에게 軍隊는 必須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氏는 韓國人 아버지, 인도네시아人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大韓民國 國籍을 抛棄하고 인도네시아 國籍을 取得하면 인도네시아에 定着할 수 있었다. “大韓民國에서 태어났으면 軍隊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番 가는 軍隊,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대성 氏) “다녀올게요!” 대성 氏는 敎育訓鍊團 入口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看板 아래로. 看板의 文句는 ‘海兵隊는 이곳에서 始作된다’. 대성 氏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眞짜 韓國人’은 이곳에서 始作된다고. ● 우리는 多衆正體性 世代2000年代 初盤 結婚移住女性, 移住勞動者 增加 等으로 國內 移住民이 急激히 늘기 始作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子女들이 成人으로 자랐다. 軍隊를 가고, 就業을 準備한다. 統計廳에 따르면 國內 移民者 2歲(韓國人으로, 父母 中 1名 以上이 歸化者이거나 外國人)는 2020年 28萬 名이었다. 2040年엔 2.5倍로 뛸 것으로 展望된다. 美國을 韓國系, 中國系 美國人이 이끌듯 韓國을 인도네시아系, 스리랑카界 韓國人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대성 氏는 2002年 京畿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職場을 따라 光明市, 필리핀, 京畿 안산시 等을 오갔다. 初等學校 때부터는 쭉 安山에서 자랐다. “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分인 건 初等學校 2學年 運動會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랐는데요.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初等學校 同窓 李允宰 氏(20)가 말했다. 대성 氏가 손꼽는 ‘切親’이다. “多文化 아이라도 좋은 點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어요. 대성이는 性格 좋고 雰圍氣도 잘 띄워서 親해졌어요.” 대성 氏에게 變曲點은 中學校 3學年, 2017年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會社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印度네시아에서 새 機會를 찾고 싶었다. 于先 대성 氏를 2018年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대성이가 運動만 좋아하고 工夫를 안 했어요. 韓國은 競爭이 너무 熾烈하니까 外國語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韓國에서 大學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男便은 韓國에 남게 됐어요.”(에코 氏) 대성 氏는 홀로 인도네시아 者와틍아주 스마랑으로 갔다. 인도네시아의 代表 貿易都市 스마랑. 대성 氏는 貿易都市의 國際學校를 擇했다. 인도네시아語와 英語를 同時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安山 원일중 3學年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學年 윤대성’이 되었다. “이슬람敎人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時 半에 祈禱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禁食聖月) 期間에 같이 金食道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케이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親舊들이 韓國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德分에 저도 人氣 많았죠.” 先生님들은 大部分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寄宿舍엔 인도네시아는 勿論이고 中國,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等 온갖 國籍의 親舊들이 있었다. 대성 氏는 이렇게 3年을 보내며 다양한 言語와 文化를 消化했다. 韓國과 인도네시아를 結合한 事業을 構想하는 靑年이 됐다. 이른바 ‘多重正體性’ 世代다. 여러 言語와 文化에 익숙하고 다른 사람, 다른 文化를 잘 받아들이는 世代. “韓國 親舊들을 불러서 같이 事業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케이팝 틀어주고 韓國 演藝人 寫眞을 걸어놓은 人氣 飮食店이 있거든요. 근데 社長이 中國人이에요. 韓國人인 제가 떡볶이처럼 有名한 韓國 飮食으로 장사하면 더 잘되지 않을까요?”● 남다른 戀愛“化粧品 原料의 成分까지 알아야 마케팅에서도 競爭力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대성 氏 누나 윤송이 氏(22)는 ‘K뷰티’ 專門家를 꿈꾼다. 皮膚가 나빠졌을 때 韓國 化粧品으로 나아진 經驗 德分이다. 只今은 한 大學 바이오化粧品科에 다닌다. “于先 韓國 化粧品 會社에서 經驗을 쌓을 거예요. 그 後에 韓國 化粧品 市場과 인도네시아 化粧品 市場을 連結해 보고 싶어요.”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지지만, 戀愛를 할 땐 말 못 할 苦悶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年 前 男子親舊를 사귀기 始作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氏는 外貌나 말套 모두 平凡한 韓國人. 男子親舊는 송이 氏가 移住民 2歲란 걸 몰랐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追憶을 더 많이 쌓기 前에…. 男子親舊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偶然히 告白의 機會가 왔다. “나 엄마랑 姨母 結婚式에 參席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氏의 말에 男子親舊가 操心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人이냐고. “응.” 以後 4年째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氏가 苦悶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親舊가 移住民 2歲란 事實 때문에 男子親舊와 헤어졌다. “親舊의 男子親舊가 ‘우리 家族한테 네 엄마 韓國 사람이라고 하라’고 했대요.” 송이 氏의 苦悶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初等學生 때 한 또래 아이는 송이 氏를 놀렸다. “너 다문화잖아.” 先生님은 授業 時間에 多文化 家庭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學生이 多文化 家庭이죠?” 班 親舊들의 視線이 쏠렸다. 송이 氏는 그 先生님이 미웠다. ‘굳이 내 이름을 言及해야 하나.’ 學校에서 비슷한 移住背景 親舊들은 種種 이름을 잃었다. 先生님들은 이름 代身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中國!” 傷處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傷處가 없었다면 저도 堂堂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性格이에요.” 엄마 에코 氏는 송이 氏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高等學生 때 用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進路도, 大學도 定했다. 傷處를 받은 적도 있지만 송이 氏는 앞으로도 繼續 韓國에서 살아갈 생각이다. 親舊들에겐 當然하지만 송이 氏에겐 當然하지 않은 일이다. 家族들이 인도네시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이 氏는 혼자서라도 韓國에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故鄕으로 느껴지진 않아요. 저는 韓國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송이 氏와 대성 氏처럼 移住民 2世들은 이제 韓國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아픔이 있지만 希望을 얘기한다. 韓國 社會는 努力한 만큼 成功할 수 있는 社會라고. 20年 뒤, 果然 70萬 名義 ‘多重正體性 世代’는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世界를 어떻게 바꿀까.한국 擇한 移住背景 靑年들2000年代 初盤 結婚移住女性, 移住勞動者 增加 等으로 國內 移住民이 急激히 늘기 始作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子女들이 成人으로 자랐다. 軍隊를 가고, 就業을 準備한다. 統計廳에 따르면 國內 移民者 2歲(韓國人으로, 父母 中 1名 以上이 歸化者이거나 外國人)는 2020年 28萬 名이었다. 2040年엔 2.5倍로 뛸 것으로 展望된다. 美國을 韓國系, 中國系 美國人이 이끌듯 韓國을 인도네시아系, 스리랑카界 韓國人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 ‘다름’은 나의 힘移住民 2, 3世들은 어릴 때부터 自身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認識하며 자란다. ‘다름’은 移住民 2歲가 成長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을 잘 理解하고 돕는다. 스리랑카界 韓國人 서현식 氏(29)는 2016年 京畿 安養 YMCA에 入社했다. 現在 市民事業部 팀長으로, 共同體 活性化를 위한 講演을 主管한다. 畫像會議 플랫폼인 ‘줌(zoom)’ 活用法 講義는 直接 한다. 安養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團 院長은 現識 氏의 疏通 能力을 稱讚했다. “幼兒부터 어머니들까지 多樣한 年齡帶와 일하면서 모든 世代와 疏通하는 悠然함을 키웠더라고요.” 한 學父母는 現識 氏를 ‘까만콩 先生님’으로 記憶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어요. 自己紹介度, 프로그램 說明도 先生님들 中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어요.” 現識 氏는 1993年 스리랑카 中南部 웰리마다시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韓國人, 어머니는 스리랑카人이다. 2002年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韓國 企業이 撤收하며 家族은 韓國行 飛行機를 탔다. 現地 國際學校를 다니던 現識 氏는 瞬息間에 ‘안산시 渦動初 3學年’이 됐다. 當時 現識 氏가 다니던 學校엔 移住背景 學生이 거의 없었다. 只今의 安山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를 外界行星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神奇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時間에 저를 보려고 敎室 窓門에 宏壯히 많은 親舊가 몰려들었죠.” 2002年 월드컵으로 생긴 ‘蹴球 붐’ 德分에 現識 氏는 蹴球를 하며 親舊를 사귀었다. 中學校 때 始作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現識 氏는 專門 크루에서 活動하며 地域, 學校 祝祭에 나가기도 했다. 現識 氏는 自身의 색다른 背景을 오히려 積極的으로 살렸다. 高等學校 때는 競技差世代委員會 委員長을 맡았다. 靑少年 政策, 多文化 政策을 提案했다. “移住背景 學生도 韓國 社會의 一員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人種이나 社會的 地位에 따라 사람을 對하는 態度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 現識 氏는 2012年 新安山臺에 入學해 電子情報通信學을 專攻했다. 하지만 大學 때 다녀온 海外 奉仕活動이 進路를 바꾼 契機가 됐다. 필리핀의 貧困 地域에 사는 사람들과 6個月間 어울렸다. 本人도 先入見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쌍하니까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平等한 사람’으로 對하는 게 더 重要했어요. 돈을 많이 벌기보단 다양한 사람을 偏見 없이 만나 疏通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現識 氏의 동생 샤니 氏(26)도 偏見을 씩씩하게 딛고 成長했다. 샤니 氏가 韓國에 첫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때를 어렴풋하게 記憶한다. 韓國人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氏 손을 잡고 幼稚園을 찾았다. “外國人 아이는 안 돼요.” “韓國人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분이 할머니예요.” “外國人 아이는 無條件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 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氏) 結局 洞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氏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歲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學窓 時節 愉快하지 않은 經驗도 있다. 高等學校 2學年 때 歷史 時間이었다. 先生님은 샤니 氏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韓國史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點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氏는 授業 내내 氣分이 나빴다. 授業 後 先生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韓國人이고, 전 어렸을 때부터 韓國에서 살았어요. 제가 왜 韓國史를 몰라도 돼요?” 샤니 氏는 더욱 단단해졌다. 高校 卒業 뒤엔 바로 就業에 뛰어들었다. 製藥會社, 物流會社를 거쳐 非營利 團體에서 일했다. 低所得層 韓國人, 難民, 多文化 家庭 等에 企業이 後援한 物品을 傳達하는 役割을 맡았다. 最近엔 京畿 안양시의 한 病院에 就職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安定的인 職場이 必要해서다. 20代이지만 이미 個人年金에 加入했다. 月給의 折半은 貯蓄하려 아낀다. “居室 하나, 房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아파트 請約을 넣어서 獨立할 생각이에요.” 남을 돕는 일은 繼續하고 싶다. 스리랑카 移住民 相談을 하는 어머니처럼 신할리즈語(스리랑카 第1言語)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 “非營利 團體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或是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移住民들을 많이 봤어요. 스리랑카語를 배워두면 남을 도울 수 있는 機會가 많을 것 같아요.”● 그래도, 韓國韓國 社會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移住 靑年들도 있다. 移住民 2歲 부디(假名·26) 氏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父母님을 따라 韓國에 와 初等學校, 中學校를 모두 安山에서 다녔다. 言語도, 文化도 韓國이 익숙하다. 韓國에서 平生 살 생각으로 韓國 이름도 지었다. 부디 氏가 高校 1學年이 됐을 때 삶에 龜裂이 생겼다. 父母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通報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持病이 惡化돼 扶養을 해야 했다. 未成年者였던 부디 氏는 父母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 高等學生 부디 氏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世界였다. 인도네시아語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學校 授業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韓國이 늘 그리웠다. 혼란스러운 高校 生活 끝에 決心했다. ‘韓國 大學으로 가자.’ 부디 氏는 2019年 서울의 4年制 大學에 入學했다. 꿈에 그리던 韓國이었지만 生活은 碌碌지 않았다. 保證金 300萬 원에 月貰 30萬 원짜리 원룸을 겨우 救했다. 大學 登錄金 外에도 月貰, 生活費 等으로 每달 70萬 원假量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氏는 學生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規定上 아르바이트 자리를 求할 수 없다. 未來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就業에 成功해야만 就業비자를 받아 韓國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就業의 길은 韓國人 靑年에 비해 더 좁다. “韓國語와 인도네시아語를 모두 가르치는 先生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任用試驗은 外國人이 應試할 수 없어요. 契約職 敎師도 韓國人을 選好하더라고요. 안 되면 通譯 일을 하려고 觀光通譯案內士 資格證을 알아보고 있어요.” 特技를 살려 情報技術(IT) 企業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氏는 初等學生 때 이미 簡單한 게임을 만들었을 程度로 IT 實力이 뛰어나다. 부디 氏는 韓國이 才能 있는 移住民 靑年과 더불어 일할 方法을 찾아주길 苦待한다. 政府와 企業이 採用의 門턱을 낮추면 多樣한 끼와 資質로 寄與할 準備가 돼 있다. 移住民 2世들은 이제 韓國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學校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社會를 알아간다. 現實을 더 날것으로 接한다. 아픔이 있지만 希望을 얘기한다. 韓國 社會는 努力한 만큼 成功할 수 있는 社會라고. “自立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努力해야 해요. 支援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努力을 制度가 뒷받침해 주면 더 좋고요.”(샤니 氏) “鞍山 밖에서도 移住民 2世들을 支援하는 센터나 機關이 늘고, 프로그램 質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현식 氏) 이들은 말한다. 共存은 尊重에서 始作된다고. 多樣性을 尊重하는 文化가 社會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年 뒤, 70萬 名의 國內 移住民 2世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記者 iamsam@donga.com▽記事 取材: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송은석 남건우 記者▽그래픽: 김충민 記者 ▽編輯: 한우신 記者▽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사이트 開發: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共存’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具現한 사이트()로 連結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20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韓國 사나이’ 되려 海兵隊 支援…印尼서 돌아왔어요”[히어로콘텐츠/공존]

    海兵隊에 入隊하고, 就業 準備를 하고, 남다른 戀愛와 結婚에 苦悶한다.성인이 된 韓國 移住民 2歲, ‘多重正體性 世代’가 共存으로 向한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訪問해 보세요. 다양한 寫眞과 映像, 인터랙티브 效果가 結合된 새로운 形式의 記事로 共存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인도네시아에서 大韓民國 海兵隊로2021년 10月 25日. 海岸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海兵隊 敎育訓鍊團 앞은 入所하는 이들과 家族들로 꽉 찼다. 아들과 父母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瞬間까지. 윤대성 氏(20)는 그 瞬間까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스타그램 라이브 畵面 건너엔 인도네시아의 風景과 親舊들이 있었다.드디어 인도네시아 親舊들과의 離別 人事가 끝났다. 그제야 대성 氏 어머니 에코디르미야띠(에코) 氏(50)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날이 現實이 될 줄이야.’에코 氏가 그리지 못한 오늘이었다. 대성 氏는 몇 年 前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志願者들만 軍隊를 간다. 떠났던 아들은 海兵隊를 가겠다며 다시 韓國으로 왔다.“대성이가 高等學校 때 인도네시아로 간 뒤엔 繼續 거기서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軍隊는 가야 한다’ ‘나이 들어서 가면 힘드니 大學 前에 海兵隊를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대성 氏에겐 軍隊는 必須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氏는 韓國人 아버지, 인도네시아人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이다. 大韓民國 國籍을 抛棄하면 인도네시아에 定着할 수 있었다. 그는 왜 굳이 海兵隊를 擇했을까.“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軍隊는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番 가는 軍隊,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 (대성 氏)“대성이는 眞짜 사나이, 자랑스러운 韓國人이 되고 싶어 했어요.” (에코 氏)“대성이는 高等學校 때부터 軍隊 간다고 했어요. 恒常 男子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죠.” (누나 송이 氏)大韓民國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眞짜 사나이가 되려고. 대성 氏가 海兵隊를 가는 理由다. 인도네시아에서 바삐 살면서도 잊지 않았다. ‘난 韓國人이다. 軍隊에 가야 한다.’“다녀올게요!”대성 氏는 敎育訓鍊團 入口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看板 아래로. 看板의 文句는 ‘海兵隊는 이곳에서 始作된다’. 대성 氏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眞짜 韓國人’은 이곳에서 始作된다고.내 故鄕은 案山, 그리고 스마랑大聲 氏는 2002年 京畿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職場을 따라 光明市, 필리핀, 안산시 等을 오갔다. 그러다가 初等學校 때부터는 쭉 안산시에서 있었다. 安山이 그의 첫 故鄕이다.“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분인 건 初等學校 2學年 運動會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라서 대성이한테 어머니가 外國人이었냐고 물었죠. 하지만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초등학교 同窓 李允宰 氏는 대성 氏가 손꼽는 ‘切親’이다. 安山 親舊들은 대성 氏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도 隨時로 連絡했다. “어릴 때부터 ‘多文化 아이’라고 일부러 멀리하는 雰圍氣는 아니었어요. 좋은 點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죠. 대성이도 그래서 親해졌어요.”대성 氏에게 變曲點은 中學校 3學年, 2017年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會社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印度네시아에서 새 機會를 찾고 싶었다. 于先 대성 氏를 2018年 인도네시아로 보냈다.“대성이가 運動만 좋아하고 工夫를 안 했어요. 韓國은 競爭이 너무 熾烈하니까 外國語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韓國에서 大學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男便은 韓國에 남게 됐어요.” (에코 氏)大姓 氏는 홀로 인도네시아 者와틍아주 스마랑으로 왔다. 인도네시아의 代表 貿易都市다. 대성 氏는 貿易都市의 國際學校를 擇했다. 인도네시아語와 英語를 同時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安山 원일중 3學年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學年 윤대성’이 되었다.“이슬람교인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時 半에 祈禱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禁食聖月) 期間에 같이 金食道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K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親舊들이 韓國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德分에 저도 人氣 많았죠.”서머스타고 先生님들은 大部分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寄宿舍엔 인도네시아는 勿論이고 中國,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等 온갖 國籍의 親舊들이 있었다. 대성 氏는 이렇게 3年을 보내며 인도네시아語와 英語에 能熟해졌다. 다양한 文化를 배웠다.“원래 인도네시아 말은 거의 못해서 맨 땅에 헤딩했어요. 每日 애들이랑 인도네시아語랑 英語로 말하니까 빨리 늘더라고요.”대성 氏는 韓國語와 인도네시아語, 英語에 能通한 人材로 돌아왔다. 이른바 ‘多重正體性’ 世代다. 여러 言語와 文化에 익숙하다. 다른 사람, 다른 文化를 잘 받아들이는 世代다.다중정체성은 꿈을 爲한 ‘스펙’이다.“돈을 모으면 韓國 親舊들을 불러서 같이 事業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K팝 틀어주고 韓國 演藝人 寫眞을 걸어놓은 人氣 飮食店이 있거든요. 근데 社長이 中國人이에요. 韓國人인 제가 떡볶이나 불닭 볶음麵처럼 유튜브에서 有名한 韓國 飮食으로 장사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요?”‘다중정체성’ 世代韓國多文化敎育硏究學會에 따르면 多重正體性은 한 사람이 두 가지 以上의 人種과 文化가 만들어낸 여러 要素들을 受容하면서 形成된 正體性이다.2000년대 初盤, 結婚移住女性, 移住勞動者 增加 等으로 國內 移住民이 急激히 늘기 始作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子女들이 成人으로 훌쩍 자랐다. ‘移住民 2歲’가 學校 울타리를 넘어 社會로 나온다.이민자 2歲(父母 中 1名 以上이 歸化者이거나 外國人)는 2020年 28萬 名이었다. 2040年엔 2.5倍로 뛴다. 美國을 韓國系, 中國系 美國人이 이끌 듯, 韓國을 인도네시아系, 스리랑카界 韓國人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독백과 告白 사이“化粧品 原料의 成分과 製造過程을 알아야 企劃이나 마케팅에서도 競爭力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大企業에 當然히 가고 싶지만 中小企業부터 就業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대성 氏 누나 윤송이 氏(22)는 인도네시아에 韓國 化粧品을 알리는 ‘K뷰티’ 專門家를 꿈꾼다. 皮膚가 나빠졌을 때 韓國 化粧品으로 治療하며 K뷰티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한 大學 바이오化粧品科에 다닌다.“우선 韓國 化粧品 會社에서 經驗을 쌓을 거예요. 그 後에 韓國 化粧品 市場과 인도네시아 化粧品 市場을 連結하는 役割을 해보고 싶어요.”송이 氏의 또 다른 꿈은 韓國에서 繼續 살기. 親舊들에겐 當然하지만 송이 氏에겐 當然하지 않은 일이다. 家族들이 어머니의 故鄕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홀로서기가 힘들지라도 송이 氏는 혼자라도 남을 생각이다.“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故鄕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제가 韓國人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韓國에서 안 태어났으면 슬펐을 程度로 韓國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진다. 하지만 戀愛할 땐 말 못할 苦悶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年 前 男子親舊를 사귀기 始作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氏는 外貌나 말套 모두 平凡한 韓國人. 男子親舊는 송이 氏가 移住民 2歲란 걸 몰랐다. ‘우리 엄마,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이 말은 繼續 獨白으로만 머물렀다.“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追憶을 더 많이 쌓기 前에…. 男子親舊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우연히 告白의 機會가 왔다. “나 엄마랑 姨母 結婚式에 參席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氏의 말에 男子親舊가 操心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人이냐고. 송이 氏는 맞다고 했다. 그렇게 송이 氏는 4年 間 사랑을 키우고 있다.송이 氏가 苦悶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親舊가 移住民 2歲란 事實 때문에 男子親舊와 헤어졌다. 3年이나 사귄 사이었는데도 그렇게 남이 됐다. “男子親舊가 自己 家族한테 ‘네 엄마 韓國 사람이라고 하라’고 强要했대요.” 그래서 더욱 송이 氏는 告白하기가 쉽지 않았다. 獨白과 告白 사이를 數없이 오갔다.송이 氏의 苦悶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學校 班 親舊들에게 當付할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 外國人인 거 祕密로 해줘.”송이 氏는 자라며 자꾸 그렇게 祕密이 생겼다. 아픈 經驗이 알알이 마음에 박혔다. 先生님은 授業 時間에 多文化 家庭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學生이 多文化 家庭이죠?” 班 親舊들의 視線이 송이 氏에게 쏠렸다. 송이 氏는 그 先生님이 너무 미웠다. ‘그냥 넘어가면 좋겠는데 굳이 내 이름을 言及해야 하나.’ ‘多文化라고 刻印시켜야 하나.’學校에서 비슷한 移住背景 親舊들은 種種 이름을 잃었다. 先生님들은 이름 代身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中國!”傷處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傷處가 없었다면 저도 堂堂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性格이에요.”엄마 에코 氏는 송이 氏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高等學生 때 用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進路도, 大學도 定했다.딸에게 祕密인 엄마, 皮膚色도 言語도 다른 學父母. 쉽지 않은 길이었다. 冷帶의 視線이 많았다. 韓國人 男便과 사랑에 빠져 合法的으로 韓國에 왔을 뿐인데 말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只今까지 송이의 初, 中, 高等學校 擔任先生님을 모두 記憶할 程度로 學校를 자주 찾아갔어요. 親舊들을 隨時로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줬어요. 正말 最善을 다했어요.” 學校에 찾아가 先生님 말이 理解가 안 되면 男便에게 바로 電話해 先生님에게 바꿔줬다. 初等學校 3學年 때 한 先生님은 ‘인도네시아 飮食을 싸 와 달라’고 했다. 에코 氏는 부지런히 볶음麵을 만들어 송이 氏를 통해 보냈다. 송이 氏에겐 愉快하지 않은 記憶이다.아빠 刑官 氏(58)는 아내를 더 아끼고 尊重하려 했다. 그게 最高의 敎育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기 始作할 땐 엄마 이름을 아빠 이름보다 먼저 외우게 했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 사람이 애들을 情感 있게 잘 키워줘서 恒常 고마워요.”다름은 나의 힘‘다름’을 받아들이는 經驗은 移住民 2歲가 成長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 다른 社會를 잘 理解한다. 共感한다. 그리고 돕는다.‘2016년 新安山臺 電子情報通信學科 卒業, 2016年 安養 YMCA 入社. 現 市民事業部 팀長.’ 스리랑카界 韓國人 서현식 氏(29)의 스펙이다. 安養市民에게 氣候, 環境, 生態 關聯 講演과 小모임을 마련해준다. 줌(ZOOM) 活用法, 寫眞 動映像 編輯 講義는 直接 한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으로 인한 距離두기 時代, 사람 사이 距離를 좁히는 技術을 가르친다. 그의 志向은 ‘마을 共同體 回復’. 市民들이 共同體 價値에 注目하고 그 價値를 지키는 삶을 꿈꾼다. 只今 當場의 目標는 ‘內的 成長’이다.“우선 30代 中盤까지는 經驗으로 內的 成長을 하고 싶어요. 於此彼 80, 90代까지 살 텐데 內的으로 成長한다면 30代 中盤 以後부턴 알아서 必要한 돈을 벌지 않을까요. 只今 當場은 ‘집 사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현식 氏는 安養 YMCA의 核心 人材다. 管理者級 中에선 가장 젊다. 安養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團 院長은 現識 氏의 疏通 能力을 稱讚했다. “幼兒부터 어머니들까지 多樣한 年齡帶와 일하면서 모든 世代와 疏通하는 悠然함을 키웠더라고요.”현식 氏가 가르치던 한 學生의 學父母는 現識 氏를 ‘까만콩 先生님’으로 記憶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自己紹介度, 프로그램 說明도 先生님들 中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던 記憶이 있어요.”한국인 아버지와 스리랑카人 어머니는 現識 氏를 1993年 스리랑카 中南部 地域 웰리마다(WELIMADA) 市의 한 山間 마을에서 낳았다. 2002年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韓國 企業이 撤收하며 家族은 韓國行 飛行機를 탔다. 現識 氏 나이 9歲 때였다. 現地 國際學校를 다니던 現識 氏는 瞬息間에 ‘안산시 와동초등학교 3學年’이 됐다. 當時 現識 氏가 다니던 學校엔 移住背景 學生이 거의 없었다. 只今의 安山과는 너무도 달랐다.“우리가 外界行星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神奇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時間에 敎室 窓門과 門에 저를 보려고 宏壯히 많은 親舊가 몰려들었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저도 그런 狀況이 神奇했죠.”2002년 월드컵 以後 분 ‘蹴球 붐’ 德分에 現識 氏는 몸으로 부딪히며 親舊를 사귀었다. 中學校부터 始作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現識 氏는 專門 크루로 活動하며 地域, 學校 祝祭에 나가기도 했다.현식 氏는 自身의 背景을 오히려 積極的으로 살렸다. 高等學校 때는 競技差世代委員會 委員長을 맡았다. 靑少年 政策, 多文化 政策을 提案했다. “移住背景 學生도 韓國 社會의 一員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人種이나 社會的 地位에 따라 사람을 對하는 態度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현식 氏는 2012年 新安山臺에 入學해 電子情報通信學을 專攻했다. 情報技術(IT)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IT 企業에 就職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大學 때 參與한 海外 奉仕活動이 進路를 바꾼 契機가 됐다. 필리핀의 貧困 地域에서 6個月間 奉仕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렸다. 對話하며 그들의 傷處에 다가갔다. 아픔을 共感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벌기 보단 다양한 사람을 偏見 없이 만나 疏通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현식 氏가 韓國 社會를 돕는 奉仕者로 成長한 건 어머니 徐阿이라 氏(50) 影響도 있었다. 徐 氏는 安山 外國人住民相談支援센터에서 스리랑카 移住民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徐 氏는 移住民들을 돕고 있지만, 移住民들이나 아이들에게 늘 얘기한다. 남들이 우릴 도와주길 바라지 말라고. 스스로 熱心히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늘 ‘해봐’ ‘안 해보고 抛棄하지마’라고 말해요. 현식이가 힘들었을텐데 努力을 많이 했죠.”현식 氏의 동생 샤니 氏(25)도 어릴 적 愉快하지 않은 經驗이 있다. 샤니 氏가 韓國에 첫 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 때를 어렴풋하게 記憶한다. 韓國人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氏 손을 잡고 幼稚園을 찾았다. “外國人 아이는 안 돼요.” “韓國人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 분이 할머니에요.”“외국인 아이는 無條件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氏)結局 洞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氏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歲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移住 兒童을 拒否하는 어린이집들이 많다니 神奇하네요.”한국에서의 出發부터 障礙物이 있었지만 샤니 氏는 傷處만 받고 있지 않았다. 堂堂하게 맞섰다.고등학교 2學年 때 歷史 時間이었다. 先生님은 샤니 氏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韓國史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點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氏는 唐慌했다. 授業 내내 氣分이 나빴다.수업 終了 鐘이 울리자마자 敎室을 나가는 先生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韓國人이고 저 어렸을 때부터 韓國 살았어요. 제가 왜 韓國史 몰라도 돼요?”샤니 氏는 高校 卒業 後 바로 就業했다. 製藥會社, 物流會社를 거쳐 非營利 團體에서 일했다. 低所得層 韓國人, 難民, 多文化 家庭 等에 企業이 後援한 物品을 傳達하는 役割을 맡았다. 移住背景 靑少年의 ‘꿈 찾기’를 돕는 講演을 열기도 했다.최근엔 京畿 안양시의 한 病院에 就職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安定的인 職場이 必要해서다. 獨立 準備도 始作했다. 20代이지만 이미 個人年金에 加入했다. 月給의 折半은 貯蓄하려 아낀다. 收益이 安定的인 種目 中心으로 株式 投資도 한다. “居室 하나, 房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只今은 父母님이랑 살지만 아파트 請約을 넣어서 獨立할 생각이에요.”그래도 앞으로 남을 돕는 일은 繼續 하고 싶다. 스리랑카 移住民 對象 通譯과 相談을 하는 어머니처럼 싱할라어(스리랑카 第 1言語)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비영리 團體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或是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移住民들을 많이 봤어요.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스리랑카 말은 내 正體性을 찾기 爲해서라기보단… 엄마 보니까 通譯 要請이 너무 많아 拒絶할 때가 있을 程度더라고요. 배워두면 展望이 좋을 거 같아요.”샤니 氏의 이름은 ‘아름답다’는 싱할라어 ‘프샤니’에서 따왔다. 外家에서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德分에 ‘샤니빵’이란 別名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이름이 좋아요.”그래도, 韓國韓國 社會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移住 靑年들도 있다. 移住民 2歲 부디 氏(假名·26)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父母님을 따라 韓國에 와 初等學校, 中學校를 安山에서 모두 다녔다. 言語도, 文化도 韓國이 익숙하다. 韓國에서 平生 살 생각으로 韓國 이름도 지었다. 부디 氏가 高校 1學年이 됐을 때 삶에 갑자기 龜裂이 생겼다. 父母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通報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持病이 惡化돼 扶養을 해야 했다. 未成年者였던 부디 氏는 父母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등학생 부디 氏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世界였다. 인도네시아語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學校 授業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韓國이 늘 그리웠다.혼란스런 高校 生活 끝에 決心했다. ‘韓國 大學에 돌아가자.’ 부디 氏는 2019年 서울의 4年制 大學에 入學했다. 꿈에 그리던 韓國이었지만 生活은 碌碌치 않았다. 保證金 300萬 원에 月貰 30萬 원짜리 원룸을 겨우 救했다. 大學登錄金 外에도 月貰, 生活費 等으로 每달 70萬 원假量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氏는 學生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規定上 아르바이트를 求할 수 없다. 未來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就業에 成功해야만 就業비자를 받아 韓國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就業의 길은 韓國人 靑年에 비해 더 비좁다. “韓國語와 인도네시아語를 모두 가르치는 先生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任用考試는 外國人이 應試할 수 없어요. 契約職 敎師도 韓國人을 選好하더라고요. 안 되면 通譯 일을 하려고 觀光通譯案內士 資格證을 알아보고 있어요.” 特技를 살려 情報技術(IT) 企業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氏는 初等學生 때 이미 簡單한 게임을 만들었을 程度로 IT 實力이 뛰어나다. 부디 氏는 韓國이 才能 있는 移住民 靑年과 더불어 일할 方法을 찾아주길 苦待한다. 政府와 企業이 採用의 門턱을 낮추면 多樣한 끼와 資質로 寄與할 準備가 돼 있다. 移住民 2世들은 이제 韓國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學校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社會를 알아간다. 現實을 더 날 것으로 接한다. 아픔이 있지만 希望을 얘기한다. 韓國 社會는 努力한 만큼 成功할 수 있는 社會라고. “自立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努力해야 해요. 支援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努力을 制度가 뒷받침 해주면 더 좋구요.”(샤니 氏)“鞍山 밖에서도 移住民 2世들을 支援하는 센터나 機關이 늘고, 프로그램 質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現識 氏) 이들은 말한다. 共存은 尊重에서 始作된다고. 多樣性을 尊重하는 文化가 社會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年 뒤, 70萬 名의 國內 移住民 2世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팀의 ‘同行: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는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取材 : 李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 송은석 남건우 記者▽動映像 編輯 :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記者▽프로젝트 企劃 : 위은지 記者▽사이트 製作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9
    • 좋아요
    • 코멘트
  • “어엿한 韓國人이 될래요” 高麗人 4歲 이고리의 꿈[히어로콘텐츠/共存]

    “어엿한 韓國人이 될래요”… 高麗人 4歲 이고리의 꿈“저는 잘할 것 같아요. 저 自身을 믿어요.” 지난해 12月, 京畿 安山市 선일中學校의 한 敎室. 先生님과 高等學校 進學 相談을 마친 허가이 이고리(16)가 당차게 말했다. 이고리는 特性化高가 아니라 一般系高를 志望했다. 이고리가 1志望으로 定한 學校는 成績이 中上位圈인 學生들이 많이 進學한다. 이고리의 目標는 한국외국어대나 서울대 露語路文學科 合格. 이고리는 러시아語 通譯士로 活躍할 꿈을 꾼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 國籍의 高麗人 4歲다. 세 살이 되던 2009年, 엄마를 따라 韓國으로 건너왔다. 海外同胞 子女는 特性化高를 選好하는 便이다. 經濟的으로 넉넉하지 않아 就業을 빨리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애初부터 一般系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담임 先生님은 이고리에게 競爭이 덜한 다른 學校를 推薦했었다. 이고리가 韓國人 아이들에게 밀려 內申에서 不利할 수 있어서다.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學習 雰圍氣가 좋은 環境에서 工夫해 願하는 大學에 꼭 合格하고 싶었다. 이고리는 名門大에 合格할 수 있을까. 일감 끊길 걱정 없는 職場을 찾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와 엄마가 그토록 願하는 ‘코리안 드림’을 이뤄 더 나은 삶을 向한 ‘사다리’에 오를 수 있을까.○ 韓國人의 條件이고리는 꿈에 부풀다가도 外三寸을 생각하면 멈칫한다. 外三寸은 우즈베키스탄 大學에서 韓國語學科를 나와 韓國에서 러시아語 通譯士로 活動했다. 그러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으로 外國人 入國이 줄어 일감이 끊겼다. ‘大學을 나온 三寸도 힘든데, 大學조차 안 나오면 더 힘들겠구나.’ 不安定한 滯留 資格도 ‘이방인’이란 꼬리票였다. 지난해까지 이고리 같은 中央아시아 國籍 高麗人 同胞는 韓國 高校나 大學을 卒業해야 在外同胞(F4)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고리는 아직 高校 卒業 前이라 엄마의 家族으로서 訪問同居(F1) 비자를 받아 지냈다. 이 비자로는 滯留 期間을 1年마다 延長받아야 했다. 이고리에게 올해 膳物같이 滯留 資格이 주어졌다. 法務部가 이달 3日부터 國內 初中高校에 다니는 未成年 高麗人 同胞에게 F4 비자를 附與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고리는 여러 偏見과 싸워야 한다. “넌 只今 軍隊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外國人 銓衡으로 大學 쉽게 가서 좋겠다.” 親舊들은 嫉妬 半, 부러움 半이 담긴 弄談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는 굳게 決心한다. ‘반드시 어엿한 韓國人이 돼야지.’ 이고리는 F4 비자를 받아 兵役義務가 생기면 꼭 海兵隊에 가겠다는 目標도 세웠다. 家族 所望 짊어진 이고리세살때 엄마따라 韓國으로… 未成年 高麗人 同胞에게올해부터 F4婢子 滯留資格, 周邊 憂慮에도 一般高 進學大學卒業하고 반듯한 職場… 未來의 땅에 자리잡고 싶어○ 차가운 ‘할아버지의 땅’이고리의 할아버지인 高麗人 2歲 金게오르기 氏(65)도 孫子의 苦悶을 알고 있다. 平凡한 韓國人으로 좋은 職場을 가지려는 孫子의 奮鬪를 理解한다. 게오르기 氏도 故鄕에선 ‘엘리트’였지만 韓國에선 바닥부터 始作했다.게오르기 氏는 이고리가 韓國에 오기 1年 前인 2008年 韓國 땅을 밟았다. 51歲, 남들은 隱退를 꿈꿀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李로자 氏(62)가 糖尿로 한쪽 눈의 視力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治療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 政府는 移住民에게 排他的으로 變해 갔다. 이고리 家族은 異邦人처럼 疏外됐다. 그는 ‘할아버지의 땅’ 韓國으로 가기로 決心했다. 더 故鄕 같은 韓國으로. 타슈켄트國立師範大 歷史學科 卒業張, 校長까지 지낸 敎育者로서의 커리어, 房 4個짜리 아파트, 自動車, 別莊까지 모두 家族을 위해 버렸다. 첫 일터는 釜山의 造船所였다. 午前 8時부터 午後 9時까지 하루 13時間, 20kg에 가까운 裝備를 들고 일했다. 每日 밤 손이 저렸다.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뒀다. 不足한 韓國語 實力으로는 변변한 일을 求하기 힘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기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食用 개 畜舍에서 일하던 時節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肉體的 苦痛보다 더 힘든 건 무너진 自尊心이었다. ‘校長 先生님’은 ‘移住勞動者 金 氏’가 됐다. 造船所를 그만두고 일했던 總角무 農場에서 農場 主人이 퍼붓는 辱說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故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韓國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家族들 말을 듣고 자랐다. 子息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말했다. “韓國이 우리의 未來다.” 딸 옥사나(42) 氏에게도 ‘未來의 땅’ 韓國은 碌碌지 않았다. 獄舍나 氏는 우즈베키스탄 現地 大學에서 心理學을 專攻했다. 하지만 韓國語가 能熟하지 않은 그가 韓國에서 求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몸이 고된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獄舍나 氏는 大學을 卒業했기 때문에 F4 비자를 받았다. 就業은 可能하지만 淸掃 等 單純勞務는 할 수 없었다. 訪問就業(H2) 비자를 받으면 이런 일을 求할 수 있지만 本國의 家族을 데려올 수 없다. F4 비자로 이고리와 함께 韓國에 온 獄舍나 氏는 人力事務所 數十 곳을 돌아야 했다. 事情을 딱히 여긴 安山의 한 工場 代表가 몰래 일을 줬다. 單純作業에 임금도 낮아 韓國人들은 忌避하는 일이었지만 感謝했다. 獄舍나 氏는 出入國事務所에서 未登錄 勞動者 團束을 나왔을 땐 다른 外國人 同僚들과 倉庫에 숨었다. 摘發되면 비자가 取消돼 出國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時節은 아직도 傷處로 남아 있다. 어느 날 上司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그는 當場 쫓아가 서툰 韓國語로 소리 질렀다. “나도 熱心히 일해요. 내가 外國에서 왔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警察에 申告해요?”‘한국인의 條件’을 갖출 機會가 없진 않았다. 獄舍나 氏는 法務部의 ‘社會統合프로그램(KIIP)’을 履修하면 榮州(F5)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456時間 동안 敎育을 받고 試驗에서 一定 點數를 따면 된다. 낮엔 工夫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力不足이었다. 當場 生計가 急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면 週末에 工夫할 時間이 딱 4時間 있었어요. 밤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工夫해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 네 家族은 入國한 뒤 5年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氏가 工場 同僚였던 韓國人 男便과 2013年 再婚한 뒤 分家했지만 只今도 月貰로 산다. 이고리 房에 있는 家口는 이고리 무릎에도 닿지 않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全部다. 그래도 이고리는 肯定한다. “바닥에서 工夫하다 보면 나중에 ‘眞짜 冊床’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感謝하겠어요.”○ 26年을 異邦人으로 살다26년째 韓國에서 異邦人처럼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氏(60) 家族도 비슷하다. 母國에서 좋은 學閥과 職業을 가졌어도 韓國에선 低所得層을 못 벗어난다. 어티겅도야 氏는 1996年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韓國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師範大를 卒業하고 大學 講師로 일했지만 月給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어티겅도야 氏는 가난을 脫出하려고 觀光비자로 韓國에 왔다. 産業硏修生 制度는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서울 廣津區 미싱 工場에 就業했다. 月給은 몽골로 부치는 生活費와 月貰로 다 나갔다. 觀光비자 延長을 위해선 3個月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飛行機票 살 餘裕가 없었다. 結局 未登錄 身分이 됐다. 每日 머리를 맞으며 일했다. 工場 앞 公衆電話에서 두 딸과 通話하는 時間이 唯一한 樂이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是非를 거는 韓國人 同僚들의 텃勢가 甚했다. 그는 6個月 만에 工場을 나왔다. 도움을 찾던 그를 救援한 건 逆說的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月 40萬 원을 받으며 서울外國人勤勞者宣敎會에서 通譯을 始作했다. 2年間 全國을 돌며 賃金 滯拂을 겪는 外國人 勞動者, 男便에게 맞은 結婚移住 女性들의 通譯을 맡았다. 1999年 宣敎會가 災旱몽골人學校를 세우면서 그도 先生님으로 일할 機會를 얻었다. 安定的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飛行機票 살 돈을 모아 몽골로 떠났다. 觀光비자를 재발급받고 다시 韓國으로 돌아왔다. 觀光비자 延長을 위해 3個月마다 入國과 出國을 反復했다. 그러다 2005年 特定活動(E7) 비자를 받게 됐다. 災旱몽골人學校가 公式 學校로 認可받으면서 그도 外國人 專門人力으로 인정받게 됐다. 韓國에 산 지 10年 만에야 安定的으로 머물게 됐다. 未登錄 代물림 危機 어티겅도야26년전 地下房 未登錄者로 始作, 敎師된 語티겅도야이번엔 딸-孫子-孫女가 ‘不法滯留者’ 될 危機에미싱工場-通譯-敎師 거쳐 專門人力認定 E7婢子 받아美서 碩士 받고 韓國에 온 딸, 申告없이 알바했단 이유로職場 잃고 榧子까지 滿了… 不安定-低所得 身分 악순환어티겅도야 氏는 F5 비자를 取得할 생각도 했지만 所得이 발목을 잡았다. F5 비자를 取得하려면 年 所得이 前年度 1人當 國民總所得(GNI) 以上이어야 한다. 지난해 基準 約 3788萬 원이다.○ 3代째 代물림되는 未登錄 굴레지난해 12月 어티겅도야 氏는 서울 광진구의 한 地下鐵驛 近處 골목을 굽이돌아 걸었다. 15分假量을 걷자 그의 屋塔房이 나타났다. 階段은 欄干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程度로 가팔랐다. 屋塔房 天障은 바람이 많이 불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氏에게 이 집은 韓國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다운 집’이다. “옛날엔 地下房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 비자’로, ‘地下房에서 屋塔房’으로, ‘미싱 工場에서 몽골學校’로…. 어티겅도야 氏는 피나는 努力으로 滯留 資格을 얻어냈다. 집도, 職場도 熾烈하게 지켰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氏의 얼굴에 진 그늘은 如前하다. 26年間 겪은 不安의 電鐵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 氏와 孫子孫女 때문이다. 자야 氏는 몽골 現地 大學에서 中國語를 專攻하고, 美國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經營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韓國에 定着한 엄마와 女同生을 따라 2016年 韓國에 들어왔다. 韓國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을 제대로 工夫해 世界에 알리겠다는 꿈이 컸다. 現實은 생각과 달랐다. 美國 留學까지 마친 자야 氏는 禮願藝術隊 碩士 卒業 뒤 2年間 韓國에서 求人求職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志願書를 넣었다. 職群도 가리지 않았다. 자야 氏는 몽골語, 中國語, 英語, 韓國語까지 4個 言語에 能通하다. 하지만 外國人인 그를 받아주는 會社는 없었다. 올해 初에야 스마트폰을 輸出하는 貿易會社가 그를 採用했다. 그도 外國人 專門人力이 받는 E7 비자를 받게 됐다. ‘安定的으로 國內에 머물 수 있게 되나.’꿈은 한瞬間에 물거품이 됐다. 자야 氏가 E7 비자를 發給받으려고 出入國事務所에 過去 所得 資料를 提出할 때였다. 事務所 職員은 자야 氏가 過去 遊學(D2) 비자를 받은 채 아르바이트한 事實을 問題 삼았다. 자야 氏는 D2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當局에 申告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結局 자야 氏는 첫 出勤도 못 한 채 職場을 잃었다. 그의 비자가 滿了되면서 男便과 두 아이의 同伴(F3) 榧子까지 잃었다. 자야 氏 夫婦와 아이들 모두 未登錄 危機에 處했다. 그는 滯留 資格을 얻으려 行政訴訟 中이다. 어티겅도야 氏의 시름도 깊어졌다. 孫子 유루티츠(‘宇宙’라는 뜻의 몽골語)는 세 살 때 韓國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다. 孫女는 2020年 韓國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애들은 韓國이 自己 나라나 다름없어.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韓國에 있고 싶어요’라고 해. 每日 밤 하나님한테 祈禱해. ‘欲心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韓國에 있게 해 주세요.’”○ ‘貯水池 아이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안산에서 多文化敎會를 運營하는 박천응 牧師는 이고리, 유루티츠 같은 移住民 子女들을 ‘貯水池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父母의 社會經濟的 地位를 물려받아 韓國 社會의 底層에 고인다는 意味다. “父母 世代는 本國에서 有能해도 韓國語나 滯留 資格 問題로 大部分 單純 勞動에 從事합니다. 經濟的 問題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敎育을 받지 못하죠. 工團 地域 勞動者 子女는 工團 人力의 ‘貯水池’에 高여요. 父母에 이어 工團 勞動者가 되죠.” 安山의 한 高等學校 敎師도 低賃金 일자리만 바라보며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高麗人 아이들에게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工場에서 일하며 돈 벌겠다’고 말하는 境遇가 많아요. 아이들은 父母를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거죠.” 移住背景 兒童들이 貯水池 아이들로 남지 않으려면 安定的인 滯留 資格을 줘야 한다는 指摘이 나온다. 法務部는 中央아시아 出身 未成年者 高麗人 同胞들에게 F4 비자를 주기로 하면서 國內 初中高校에 在學해야 한다는 條件을 달았다. 未就學 兒童, 經濟·言語的 問題로 學校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除外됐다. 中央아시아와 달리 러시아 國籍의 高麗人 同胞에게는 條件 없이 F4 비자가 發給된다. 高麗人志願센터 ‘너머’의 김준태 서울相談所長은 “國內 雇傭 狀況이나 行政 便宜 때문에 國籍에 따라 同胞 비자를 달리 주는 것은 差別”이라고 했다.자녀들만큼은 貯水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쓴 게오르기 氏와 어티겅도야 氏의 바람은 이뤄질까. 지난해 11月 安山의 한 食堂에서 家族들과 모인 게오르기 氏는 淡淡히 말했다. “子息들 便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餘恨이 없어. 내 딸이 잘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工夫 잘하고 좋은 職場을 가져야 돼.” 이고리만은 願하는 일을 하며 꿈을 이루기를. 그게 이고리 家族이 ‘사다리’를 오를 마지막 機會다. 이고리는 一般高 進學을 始作으로 通譯師의 꿈을 向해 간다. 美國 留學까지 했지만 就業이 挫折된 자야 氏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고리는 마음이 흔들릴 때 自己 이름의 뜻을 떠올린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意味다. “제 家族을 지키는 剛한 사람이 될 거예요.” 히어로콘텐츠팀▽팀長: 이새샘 記者 iamsam@donga.com▽記事 取材: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송은석 남건우 記者▽그래픽: 김충민 記者▽編輯: 한우신 記者▽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사이트 開發: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共存’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具現한 사이트(3)로 連結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9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孫子만은 險한 일 안 하길”…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히어로콘텐츠/공존]

    할아버지-엄마에겐 차가웠던 ‘機會의 땅’16歲 少年은 꿈꾼다… 韓國서 따듯한 日常東亞日報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訪問해 보세요. 다양한 寫眞과 映像, 인터랙티브 效果가 結合된 새로운 形式의 記事로 共存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열심히 工夫해서 좋은 大學에 가서 저에게 맞는 科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安定的인 會社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지난해 12月 어느 날, 京畿 安山市 先일中學校. 一般系 高等學校 願書를 쓴 뒤 進路 相談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平素 愉快하고 自信感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高麗人 4歲다. 러시아語와 韓國語에 能通한 長點을 살려 通譯家를 꿈꾼다. 目標 大學도 定했다. 韓國外大나 서울대 露語路文學科. 러시아語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語로 對話한다.하지만 이런 꿈도 外三寸을 생각하면 사그라진다. 外三寸은 우즈베키스탄 現地 大學에서 韓國語學科를 나와 韓國에서 러시아語 通譯士로 活動했다. 하지만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에 外國人 入國이 急減하며 일감이 끊겼다. 只今 宅配 配送을 하고 있다.‘대학을 나와도 한 職場에서 安定的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卒業狀조차 없으면… 나도 三寸처럼 될 수 있겠구나.’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韓國의 좋은 大學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할 수 있어. 러시아語를 完璧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中央아시아, 地球의 6分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상담을 해주던 임미은 先生님은 이고리를 激勵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果然 좋은 大學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職場에 就職할 수 있을까.이고리 같은 海外同胞 子女는 特性化高 進學을 選好하는 便이다. 經濟的으로 넉넉하지 않은 境遇가 많아서다. 特性化高 卒業 뒤엔 바로 就業 前線에 뛰어들 수 있다.한국어 實力이 不足해 實習 中心인 特性化高를 擇하는 아이들도 있다. 外國에서 살다가 韓國에 온 中道入國 靑少年들이 主로 그렇다.선일중에서도 지난해 移住背景 學生 52名 中 24名은 特性化高를 志望했다. 特性化高 志望生은 例年보다 줄긴 했다. 京畿道 內 一般高度 學費가 無償이 됐기 때문이다. 經濟的 負擔 때문에 망설이던 移住背景 學生들도 一般高에 志願하게 됐다.“이주배경 아이들은 高等學校 登下校 交通費조차 負擔으로 느끼는 境遇가 많아요. 學校 工夫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不透明하죠. 一旦 高等學校만 卒業하면 外國人銓衡으로 大學 가긴 比較的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以上의 努力이 必要해요.”(임미은 先生님)이고리는 그럼에도 一般高에 가기로 일찌감치 決心을 굳혔다. 이고리가 1志望으로 쓴 高等學校는 中上位圈 成跡의 學生들이 志望하는 學校다. 事實 擔任先生님은 다른 學校를 推薦했었다. 이고리가 內申에서 不利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學習 雰圍氣가 좋은 環境에서 工夫해 願하는 大學에 合格하기 위해서다.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大學에 가고 싶다. 엄마 金 옥사나 氏(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담임인 將軍휘 先生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言語 感覺과 승부욕을 稱讚했다. 언젠가 그 資質이 빛을 發할 것으로 믿는다.“한국도 單一民族國家에서 多人種國家로 變化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二重言語 能力, 活潑한 性格은 先入見 없는 社會를 만드는 데 寄與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4년에 걸친 ‘韓國人 되기’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年 엄마를 따라 韓國에 왔다. 韓國에서 올해 13年째를 맞는다. 家族들과는 러시아語를 使用한다. 韓國 生活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語가 語塞하다. 家族들이 놀릴 程度다.“이고리, 러시아 發音 語塞해졌네.”이고리는 겉보기엔 韓國人이지만 法的 韓國人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出身 엄마는 海外同胞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韓國에 들어온 뒤 韓國人 아버지와 再婚했다. 엄마가 再婚한 뒤 韓國에서 낳은 동생도 韓國人이다.“전 우리 집에서 돌 같은 存在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韓國人이죠. 엄마도 同胞비자가 있어 韓國人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外國人이었죠.”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中央아시아 出身 高麗人 4世는 滯留 資格이 不安定했다. 經濟 活動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韓國 高等學校를 卒業하거나 大學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條件을 채우지 못해 10年 넘게 어머니의 同伴 家族 資格(F1婢子)으로 韓國에 머물렀다. 中學校에 入學한 뒤 便宜店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就業 等 經濟 活動이 禁止되기 때문이다. 이고리는 1年 마다 出入國事務所에 가서 비자를 更新해야 했다.그러던 그에게 올해 膳物같이 滯留 資格이 주어졌다. 法務部가 이달 3日부터 國內 初·中·高校를 다니는 中國 및 高麗人 同胞의 未成年 子女들에게도 F4비자를 附與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願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滯留 期間도 3年마다 延長할 수 있다. 旣存에는 러시아 國籍의 高麗人에게만 나이와 相關없이 F4街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中央아시아 國籍의 未成年 高麗人은 韓國 高等學校를 卒業해야 F4비자가 나왔다. 法務部는 러시아 國籍 同胞에게는 러시아의 經濟規模가 크고 新規 不法滯留者 發生 比率이 낮다는 理由로 F4비자를 주고 있다.이고리는 多幸히 滯留 資格을 얻었지만 運이 좋은 境遇다. 未就學 兒童이나 言語 또는 經濟的 問題로 學校 밖으로 밀려난 移住 兒童들은 이 惠澤을 못 받는다. 法務部는 滯留 資格을 주며 條件을 달았다. ‘國內 初·中·高校에 在學해야 F4비자를 받는다.’안산시 高麗人志願센터 ‘너머’의 金英淑 센터長도 이 點을 안타까워한다.“한국어 實力 不足으로 學業을 따라가지 못해 學校를 그만둔 學校 밖 高麗人 靑少年들이 正말 많아요. 똑같은 同胞인데 國籍에 따라 滯留 資格을 달리 주는 것은 差別이에요.”법무부는 F4비자를 附與할 中央아시아 國籍 高麗人 範圍를 漸次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이고리는 艱辛히 滯留 資格을 얻었지만 여러 偏見과 싸워야 한다. 法的 韓國人은 아니기 때문이다.“야, 넌 軍隊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친구들은 嫉妬 半, 부러움 半이 담긴 弄談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반드시 떳떳한 韓國人이 되고 말아야지.’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兵役義務가 생기면 꼭 海兵隊에 갈 생각이다.이고리의 外할아버지인 高麗人 2歲 金 게오르기 氏(65)도 孫子의 苦悶을 알고 있다. 平凡한 韓國人으로 좋은 職場, 좋은 家庭을 꾸리려는 孫子의 奮鬪를 理解한다. 게오르기 氏도 故鄕에선 ‘엘리트’였지만 韓國에 온 뒤 바닥부터 始作해야 했기 때문이다.게오르기 氏는 이고리가 韓國에 오기 1年 前인 2008年 韓國 땅을 밟았다. 51歲, 남들은 隱退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李 로자 氏(62)가 糖尿로 한쪽 눈의 視力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治療하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게오르기 氏는 먼저 韓國으로 留學 간 아들의 生計도 돕고 싶었다.결국 큰 決心을 했다. 타슈켄트 國立師範大 歷史學科 卒業張, 校長까지 지낸 敎育者로서의 커리어, 房 4個짜리 아파트, 自動車, 別莊까지 모두 家族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韓國으로 떠나왔다.‘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釜山의 한 造船所였다. 午前 8時부터 午後 9時까지 하루 13時間 동안 20kg 가까운 裝備를 들고 일했다. 每日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氏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不足한 韓國語로는 변변한 일을 求하기가 힘들었다. 쌀 農場, 간醬 工場, 建設 現場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食用 개 畜舍에서 일하던 時節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육체적 苦痛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自尊心이었다. ‘校長先生님’은 ‘移住勞動者 金 氏’가 됐다. 造船所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總角무 農場에서는 農場 主人이 퍼붓는 辱說을 견뎌야 했다.“한국어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韓國에 오기 前엔 내가 高麗人, 韓國人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막상 韓國에 오니 徹底한 異邦人임을 實感한 게오르기 氏. 그래도 그는 故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한국에서 반드시 成功하고 말겠어.’그는 어렸을 때부터 ‘韓國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家族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子息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韓國이 우리의 未來다.”딸 옥사나 氏에게도 ‘未來의 땅’ 韓國은 碌碌지 않았다. 獄舍나 氏는 우즈베키스탄 現地 大學에서 心理學을 專攻했다. 하지만 韓國語가 能熟지 않은 그가 韓國에서 求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險한 일뿐이었다.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婢子 所持者는 經濟 活動은 可能하지만 淸掃, 包裝, 廚房補助 같은 單純 勞務에는 從事할 수 없기 때문이다. 人力事務所를 數十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事情을 딱히 여긴 安山의 한 工場 代表가 몰래 일을 줬다. 獄舍나 氏는 3年間 製品에 필름 附着하는 單純 作業을 하며 지냈다. 出入國事務所에서 未登錄 勞動者 團束을 나왔을 땐 倉庫에 숨어야 했다. 摘發되면 비자가 取消돼 出國해야 했기 때문이다.그 時節은 아직도 그에게 傷處로 남아 있다. 어느 날 工場에서 上司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當場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나도 熱心히 일해요. 내가 外國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警察에 申告해요.”게오르기 氏와 옥사나 氏 父女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氏 病院費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네 家族은 入國한 뒤 5年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氏가 工場 同僚였던 韓國人 男便과 2013年 再婚한 뒤로는 分家를 했지만 月貰로 산다.이고리는 집에서 工夫할 空間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房엔 冊床과 寢臺를 놓을 空間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全部다. 집에서 工夫할 空間이 없어 이고리는 試驗 期間에 學校에 남아 工夫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肯定한다.“오히려 現在 狀況을 肯定的으로 받아들여요. 每日 바닥에서 工夫하다 보면 나중에 ‘眞짜 冊床’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感謝하겠어요.”#1. 韓國語가 서툴러 出身國 經歷을 살리지 못한 채 單純 勞務에 從事한다.#2. 劣惡한 勞動 環境에 지쳐 韓國語를 배우지 못한다.#3. 韓國語가 不足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이런 惡循環을 이고리 家族은 充分히 經驗했다. 熱心히 努力해도 經濟的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기회가 없진 않았다. 獄舍나 氏는 法務部의 ‘社會統合프로그램(KIIP)’을 履修하면 榮州비자(F5婢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韓國語, 韓國文化, 韓國社會 理解 敎育으로 構成된 프로그램을 履修하기엔 버거웠다. 465時間假量 敎育을 받고 試驗에서 一定 點數를 取得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工夫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力不足이었다. 當場 生計가 너무 急했다.“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週末에 工夫할 時間 딱 4時間 있었어요. 그래서 工夫 잘 못 했어요. 4段階까지는 合格했는데 5段階에서 떨어졌어요. 5段階 붙으려고 夜間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工夫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氏)金英淑 센터長은 移住民들이 社會經濟的 地位를 대물림받는 現實을 안타까워했다.“고려인들은 現地 同和 政策으로 韓國語가 서투르고 韓國文化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授業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時間이 없는 高麗人이 大部分입니다.”고려인 比重이 높은 安山의 한 高等學校 敎師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고려인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工場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境遇가 많아요. 아이들은 父母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지난해 11月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동생 수빈이까지 온 家族이 모여 外食을 했다. 할아버지는 氣分이 좋아져 목소리를 높였다.“난 結局 成功했어요. 아들도 잘 살고 있고, 딸도 韓國人 男便이랑 結婚해 韓國에서 살고 있잖아.”게오르기 氏에게 成功은 그런 것이다. 子息들이 ‘穩全한 韓國人’李 돼 韓國 땅에서 堂堂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13年 동안 부드럽던 敎師의 손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勞動者의 손과 바꿔 얻어낸 成功이다. 그에게 孫子 이고리는 成功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다.“아들, 딸이 便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餘恨이 없어. 내 딸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工夫를 잘하고 좋은 職場을 가져야 돼.”(게오르기 氏)“이고리는 大學校를 꼭 한 個는 가야 해. 하나라도 붙어서 工夫해야 해. 그래야 힘든 일 안해.”(로자 氏)“나중에 우리 아들 通譯 일 같은 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會社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리 아들 大學 工夫해서 나중에 成功하면 좋잖아요.”(옥사나 氏)이고리만은 單純 肉體勞動이 아닌 ‘便한 일’을 하기를. 成功하기를. 그게 이고리 家族이 ‘사다리’를 오를 唯一한 機會다. 家族들 말을 듣던 이고리가 말했다.“제가 우리 家族의 마지막 남은 希望인 거죠.”26년을 異邦人으로 살다26년간 3臺가 韓國에서 살았다여전히 딸과 孫子, 孫女는 追放 危機李고리의 家族처럼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臺가 韓國에서 誠實하게 살아도 不安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低所得層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母國에서는 學事, 碩士를 取得한 엘리트與도. 韓國에서 20年 넘게 事故 없이 熱心히 일해도….26년째 異邦人처럼 韓國에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氏(60) 家族이 그렇다. 1996年 몽골에서 韓國에 와 家庭을 이뤘다. 그는 多幸히 滯留 資格을 維持하고 있지만 딸, 손주들은 모두 未登錄(不法滯留) 身分이 될 危機다.어티겅도야 氏는 지난해 10月 28日에도 어김없이 出入國事務所를 찾았다. E7婢子 延長을 위해서다. 每年 찾는 곳이지만 事務所 앞 橫斷步道를 건널 때부터 손이 떨린다.“10월 30日이 지나면 내가 不法 되는 거야. 出入國事務所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벌벌 떨면서 가.”(어티겅도야 氏)함께 온 몽골學校 先生님 2名까지 無事히 비자 期間 延長을 마쳤다. 이들은 出入國事務所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어티겅도야 氏는 1996年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韓國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師範大를 卒業하고 大學 講師로 일했다. 하지만 月給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産業硏修生 制度도 있었지만 門이 좁았다. 어티겅도야 氏는 가난을 脫出하려 無作定 觀光비자만 믿고 韓國으로 건너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工場에 就業했다. 번 돈은 月貰와 두 딸을 위해 몽골로 父親 生活費로 다 나갔다. 觀光비자 延長을 위해선 3個月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지만 飛行機票 살 餘裕가 없었다. 結局 觀光비자를 延長 못 해 未登錄 身分이 됐다. 每日 머리를 맞으며 일해야 했다. 工場 앞 公衆電話에서 두 딸과 通話하는 時間이 唯一한 樂이었다. 어티겅도야 氏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是非를 거는 韓國人 同僚들의 텃勢를 버티지 못하고 6個月 만에 工場을 나왔다.일할 곳을 찾던 그를 救援한 건 逆說的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月 40萬 원을 받으며 서울外國人勤勞者宣敎會에서 通譯 奉仕를 始作했다. 2年 동안 宣敎會議 권성희 牧師와 全國을 돌았다. 賃金滯拂을 겪는 外國人 勞動者, 男便에게 맞은 結婚移住 女性들의 通譯을 맡았다.“당시 移住勞動者 10名 中 9名은 賃金滯拂을 겪었어요. 어티겅도야 本人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移住民 身分이었지만 自身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왔죠. 韓國語를 못 하는 移住勞動者를 代身해 工場까지 찾아갔어요. 賃金을 주지 않는 工場主와 싸웠어요.”(권 牧師)正義感 剛한 그에게 未登錄이란 身分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1999年 宣敎會가 災旱몽골人學校를 세우면서 그도 先生님으로 일할 機會를 얻었다. 安定的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몽골로 떠나 觀光비자를 再發給 받은 뒤 韓國으로 돌아왔다.그렇게 3個月마다 入國과 出國을 反復하다 2005年 E7비자를 받게 됐다. 災旱몽골人學校에서 外國人 先生님으로 일하며 비자 發給 對象인 外國人 專門人力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韓國에 산 지 10年 만에 어렵사리 未登錄 身分을 벗어났다.어티겅도야 氏는 F4비자는 받았지만 이보다 더 安定的인 永住權을 取得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現實의 壁은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所得이다. F5(榮州)비자를 取得하려면 年 所得이 前年度 1人當 國民總所得(GNI) 以上이어야 한다. 2021年 F5비자를 申請할 境遇 年 所得은 3萬1881달러(藥 3788萬 원)를 넘어야 한다.이주민들은 韓國語 實力이 不足해 單純 勞務에 從事하는 境遇가 많다. 榮州비자 發給에 必要한 所得 要件을 갖추기 어려운 게 事實이다.몽골학교를 세운 서울 廣津區 나섬교회의 유해근 牧師는 어티겅도야 氏가 安定的인 身分을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몽골학교 先生님 中 韓國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됐고, 韓國語가 유창해 가장 永住權을 딸 可能性이 높은 분이에요. 하지만 敎師 月給으로 榮州비자가 要求하는 所得 要件을 맞출 수 없죠.”대물림되는 未登錄 굴레지난해 12月, 비자 更新 以後 한 달餘 만에 만난 어티겅도야 氏는 왼쪽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넘어져 왼쪽 네 番째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서울 地下鐵驛 광나루驛에서 대로 사이 골목으로 굽이돌아 15分 程度 걸어 그의 屋塔房에 到着했다. 階段은 欄干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程度로 가팔랐다.어티겅도야 氏는 學校에 出勤을 했다가 孫女까지 어린이집에서 下院시켜 오는 길이었다. 그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屋塔房 階段을 힘겹게 올랐다.옥탑방 外壁은 初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기엔 力不足이다. 헐거운 틈 사이로 바람이 새고, 파이프가 얼어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天障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氏에게 이 집은 韓國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 같은 집’이다.“16평 程度 될까. 그래도 男便이랑 살기에 넓어. 房도 세 個야. 저쪽 放은 손주 놀이房이야. 옛날엔 地下房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비자로, 地下房에서 屋塔房으로, 미싱工場에서 몽골學校로. 어티겅도야 氏는 피나는 努力과 忍耐로 滯留 資格을 얻어냈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氏의 얼굴에 진 그늘은 如前하다. 自身이 26年間 겪은 不安과 苦痛의 電鐵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와 孫子, 孫女 때문이다.자야 氏는 몽골 現地 大學에서 中國語를 專攻하고, 美國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經營學 碩士를 받았다. 韓國에 定着한 엄마와 女同生을 따라 2016年 韓國에 들어왔다. 韓國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을 제대로 工夫해 보겠다는 꿈이 컸다.“K팝, K스타가 世界的으로 有名하잖아요. 韓國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을 工夫해서 나중에 몽골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에 그대로 椄木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미국 留學까지 마친 자야 氏는 碩士 卒業 뒤 2年間 韓國에서 求人求職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志願書를 넣었다. 貿易, 마케팅, 通譯 等 職群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外國人인 그를 받아주는 會社는 없었다. 올해 初에야 스마트폰을 輸出하는 貿易會社가 그를 採用했다. 이제 外國人 專門人力이 받는 E7비자를 받을 資格이 됐다. 安定的으로 國內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야 氏는 이제야 몽골, 美國, 韓國의 言語와 文化를 두루 涉獵한 人材로 認定받는 瞬間이 오나 싶었다.하지만 꿈은 瞬間 물거품이 됐다. 자야 氏가 E7비자를 發給 받으려고 出入國事務所에 過去 所得 資料를 提出할 때였다. 事務所 職員은 자야 氏가 D2비자를 所持한 채 아르바이트한 事實을 問題 삼았다. D2婢子 所持者는 單純 아르바이트도 當局에 申告해야 하는데 申告 없이 일한 點이 不法이란 說明이었다.결국 자야 氏는 첫 出勤도 못한 채 職場을 그만뒀다. 그의 비자가 滿了되면서 男便과 두 아이의 同伴비자(F3)까지 剝奪됐다. 자야 氏 夫婦와 아이들 모두 未登錄 危機에 處한 것이다. 그는 現在 滯留 資格을 얻으려 行政訴訟을 進行 中이다.“이 나라에 해 안 끼치고 合法的으로, 平凡하게 살고 싶었어요. 未登錄이 안 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데….”딸에 이어 孫子와 孫女까지 未登錄 危機에 處하며 어티겅도야 氏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자야 氏가 行政訴訟에서 敗하면 비자를 延長 받지 못한다. 손주들도 몽골로 가야 한다.손자 유루티츠(宇宙라는 뜻의 몽골語)가 特히 걱정이다. 유루티츠는 세 살 때 韓國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 됐다. 孫女는 2020年 韓國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애들은 韓國이 自己 나라나 다름없어. 自己 엄마랑 얘기할 때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韓國에 있고 싶어요’라고 한대. 그래서 每日 밤 제가 하나님한테 祈禱해요. ‘하나님, 너무 欲心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2, 3年 만이라도 韓國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저수지를 벗어나 헤엄칠 수 있을까국내 移住背景 兒童들이 韓國 社會의 ‘下流’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基本的으로 安定的인 滯留 資格을 確保할 수 있어야 한다는 指摘이 나온다.한국 政府도 未登錄 兒童 問題를 苦悶하고 있다. 法務部는 지난해 未登錄 移住兒童이 一定 要件을 갖추면 特別 滯留를 許可하겠다고 發表했다. 國家人權委員會가 2020年 “長期滯留 未登錄 移住兒童에 對한 强制退去를 中斷하고 救濟策을 마련하라”고 勸告한 뒤다.하지만 유루티츠는 未登錄 身分이 되더라도 救濟받을 수 없다. 救濟策은 韓國에서 태어나 15年 以上을 國內에서 滯留하며 初等學校를 卒業해야 適用된다. 게다가 2025年 2月까지만 限時的으로 施行된다.국가인권위원회는 이 救濟策에 對해 “2萬 名으로 推算되는 未登錄 移住兒童 中 500名 以下 少數의 移住兒童만 救濟할 뿐”이라고 評價했다.시민단체와 法曹界에서도 批判이 나온다. 安山 原曲法律事務所의 최정규 辯護士는 政府가 問題를 放置하고 있다고 指摘한다.“국내에서 出生했든 中道入國 兒童이든 本人 意志와는 關係없이 未登錄 身分이 됐다는 點은 같습니다. 이는 出生地로 差別을 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받는 傷處와 混亂을 생각해야 합니다.”안산에서 多文化敎會를 運營하는 박천응 牧師는 이고리, 어티겅도야 氏의 손주들 같은 移住家庭 子女들을 ‘貯水池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父母 世代의 社會經濟的 地位를 克服하지 못한 채 社會의 底層에 고인다는 意味다.“이주배경 아이들의 父母님 世代는 本國에서 有能했어도 韓國語나 滯留 資格 問題로 大部分 單純 勞動에 從事합니다. 經濟的 問題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敎育을 받지 못하죠. 工團 地域 勞動者들의 子女는 工團 人力의 貯水池예요. 父母에 이어 工團 勞動者가 되는 惡循環에 빠지는 거죠.”이고리의 高等學校 進學, 자야 氏의 大學院 碩士 取得. 이 모두 貯水池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이고리는 이제 꿈을 向해 첫걸음을 내디딜 準備를 하고 있다. 一般高 進學을 始作으로 大學을 나오고 通譯士가 될 것이다.석사학위가 두 個나 있고 美國 留學까지 했지만 就業이 어려웠던 자야 氏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고리는 自己 이름의 뜻을 생각한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意味다. 엄마와 家族들을 지킬 수 있도록 剛해지고 싶다.“뭔가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剛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전 제 家族을 지키는 剛함을 가진 사람이 될 거예요.”공존 - 네番째 이야기 : 나는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입니다 1月 19日 公開이고리처럼 “그래도 大韓民國에서 태어났으면 軍隊는 가야지”라고 말하며 海兵隊에 간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靑年이 있다. 갓 스무 살, 남들은 避하지 못해 안달인 軍隊를, 그것도 海兵隊를 왜 自願해서 가려고 했을까.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팀의 ‘同行: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는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取材 : 李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 송은석 남건우 記者▽動映像 編輯 :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記者▽프로젝트 企劃 : 위은지 記者▽사이트 製作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8
    • 좋아요
    • 코멘트
  • ‘透明人間’된 여섯살 조나단[히어로콘텐츠/共存]

    “未登錄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 “未登錄이 뭐예요?” “父母님이 不法 滯留하는 분의 아이요.” “어휴, 저희는 안 돼요.” 인도네시아人 夫婦가 韓國에서 낳은 조나단(假名·6)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어린이집을 가지 못했다. 國內에 出生申告조차 되지 않은 未登錄 移住兒童이기 때문이다. 父母가 비자 更新에 失敗하면서 영문도 모른채 未登錄 身分을 물려받았다. 태어났다는 事實조차 證明하기 어려운 ‘透明人間’李 된 셈이다. 조나단은 未登錄 身分 탓에 어린이집도, 文化센터도, 그 어디에도 가기 힘들었다. 조나단에겐 京畿 수원시의 두 坪(藥 7m²) 남짓한 원룸이 거의 唯一한 世界였다. 조나단이 자라며 집은 漸漸 좁게 느껴졌다. 조나단이 돌이 지났을 무렵 엄마 와티(假名·39) 氏는 어쩔 수 없이 조나단을 데리고 뒷山으로, 市場으로 外出을 始作했다. 살얼음板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未登錄 兒童은 病院 治療조차 거부당할 수 있어 걱정이 컸다.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怯이 났어요. 비자 滿了 後엔 保健所에서 豫防 接種조차 拒否當했거든요.”○ 조나단의 두 坪 世界 와티 氏는 아이를 언제까지 放置할 순 없었다. 아이가 滿 세 살이 지난 2019年 末 와티 氏 夫婦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計劃을 세웠다. ‘來年 봄에 돌아가 애를 적응시켜 2學期부터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飛行機便을 알아보고 짐도 쌌다. 그런데 이듬해 初 突然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 事態가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19 確診者가 늘었다. 夫婦는 防疫이 不安한 母國으로 아들을 보내기가 두려웠다. 코로나19街 野俗했지만 方法이 없었다. 生計까지 어려워졌다. 日傭職 勞動者인 男便은 月給이 일정치 않았다. 와티 氏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으니 難堪했다. 2019年 겨울, 食堂 淸掃 일을 求한 적은 있다. 勤務時間은 午前 7時부터 10時까지. 食堂이 門을 열기 前이라 조나단을 데려가 일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겨울옷으로 꽁꽁 싸맨 조나단을 乳母車에 태우고 일터로 向했다. 걸어서 30分 距離를 찬바람 맞으며 오가면서도 일감이 있어 幸福했다. 하지만 코로나19 擴散勢가 甚해져 이마저도 그만둬야 했다. 生計를 이으려면 조나단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飮食을 만들어 移住民들에게 팔기 始作했지만 生活費는 如前히 不足하다. 어린이집이 조나단을 받아줄 方法은 없는 것일까. 韓國人 兒童이 많은 어린이집은 餘地를 안 주는 便이다. 學父母들 反撥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더군다나 京畿 水原市 移住兒童은 비자가 있든 없든 保育費를 全혀 支援받지 못한다. 父母가 保育料 全額을 내야 한다. 어린이집은 移住勞動者 父母들의 일자리가 不安定하다는 點을 안다. 保育料가 밀릴까 봐 걱정돼 入所를 拒否하는 것이다. 水原어린이집協議會 側은 “水原市廳이 外國人 兒童을 電算에 登錄해야 入所할 수 있다. 未登錄 兒童은 團體 傷害保險 加入도 안 돼 或是라도 다치면 補償을 못 받는 點도 負擔”이라고 했다.돌고 돌아 安山 밖엔 答이 없다미등록 移住兒童, 어린이집-學校서 받고 進學-비자 相談 先生님들도 있어 돌아와○ 移住 속의 移住 “未登錄 移住兒童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安山에 있대요.” 조나단을 拒否한 어린이집이 10곳이 넘었을까. 조나단을 안타깝게 여긴 水原의 한 敎會 敎師가 지난해 와티 氏에게 안山行을 提案했다. ‘인도네시아에서 水原으로 移住해 겨우 定着했는데….’ 移住에 이은 移住는 버거웠다. 와티 氏는 水原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未登錄人 조나단을 선뜻 받아준 病院, 育兒用品을 물려주던 집主人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그래도 와티 氏는 5年째 살던 水原을 떠날 勇氣를 냈다. 조나단을 위해서. 多幸히 安山의 한 어린이집이 그해 5月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決定했다. 조나단 父母의 旅券과 조나단의 病院 出生證明書만 確認하고 入所를 許諾했다. 어린이집 全體 兒童의 90% 以上이 移住 背景 兒童이어서 별다른 先入見이 없었다. 保育料를 未納한 外國人 父母들을 督勵해 본 經驗도 있었다. 安山의 이러한 保育 環境 뒤엔 地方自治團體의 支援이 있었다. 안산시는 2018年 京畿道에서 처음으로 自體 豫算으로 登錄 外國人에게 保育費를 주기 始作했다. 保育費 支援 德에 安山 어린이집들은 移住兒童들을 수월하게 받게 됐다. 經驗이 쌓이면서 移住民 學父母들의 子女 保育料가 밀릴 것이란 先入見도 깨졌다. 와티 氏는 移徙까지 열흘이 남았는데도 一旦 登院을 始作했다. 조나단 손을 잡고 水原에서 安山까지 地下鐵과 徒步로 1時間씩, 往復 2時間을 오갔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곤 近處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近處 길을 映像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와티 氏는 登院과 下院을 每日 反復하기 힘겨웠지만 뿌듯했다. 조나단은 새로운 韓國語 單語와 表現을 今方 배워오곤 했다. 엄마와 헤어질 때도 떼쓰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네시아語로 이렇게 힘줘 말했다. “엄마, 나 너무 빨리 데리러 오지 마. 나 7時間 程度는 있어야 해.” 安山에 定着하는가 싶었다. 조나단이 어린이집을 한 달 다녔을 무렵, 또 危機가 찾아왔다. 지난해 여름 코로나19 再擴散으로 安山 어린이집마저 登院이 中斷됐다. 맞벌이 父母 等 특수한 境遇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緊急 保育이 始作됐다. 어린이집에선 緊急 保育을 申請하려면 父母의 在職證明書가 必要하다고 했다. 하지만 비자가 滿了돼 日傭職으로 일하는 조나단 아빠는 在職證明書를 낼 수 없었다. 每月 所得이 일정치 않으니 月給 明細서도 내질 못했다. 게다가 와티 氏는 둘째를 妊娠했다. 입덧이 심해졌다. 病院 診斷書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暫時만이라도 아이를 받아주세요.’ 懇切한 마음이었지만 所用이 없었다. “詩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여긴 코로나 確診者가 많이 나오는 地域이라 (詩 側에) 저희만 봐달라며 (入所를 許容)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園長)여섯살 조나단-열여섯 亞딜벡韓國이 自身의 집이라는 조나단어린이집 찾아 水原서 安山으로 移住淸州로 移徙갔던 아딜벡, 다시 유턴 ○ 言語를 잃다조나단은 水原에 이어 安山의 원룸에 다시 孤立됐다. 成人 네 名이 앉으면 꽉 차는 空間. 조나단은 먹고 자는 건 勿論이고 工夫와 놀이까지 이곳에서 다 解決해야 한다. 親舊는 結局 엄마뿐이다. 와티 氏는 조나단이 水原에서보다 더 걱정됐다. 韓國語 實力이 제자리걸음度 아닌, 뒷걸음질이기 때문이다. 元來 조나단은 인도네시아語로는 말이 많은 아이다. 周邊 이웃들이 ‘짹짹이’란 別名을 붙여줄 程度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韓國人 親舊들을 만나면 섣불리 다가가질 못한다. 조나단 家族을 돕고 있는 水原 敎會의 인도네시아人 牧師 아구스(假名) 氏도 이 點을 深刻하게 여긴다. 韓國語는 韓國에서 살기 위한 基本 中 基本이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韓國語 水準은 두 살 程度로 보여요. 單語들만 말해요.” 엄마마저 韓國語를 거의 못해 惡循環이다. 조나단은 엄마의 서툰 韓國語를 듣고 자랄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다 보니 社會性도 떨어진다. 조나단은 때때로 火를 못 참고 모든 걸 自己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애들은 火가 나면 울거나 떼를 쓰기 마련이지만 조나단은 어른들의 화난 表情을 따라 한다. 조나단이 韓國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解決될까. 조나단은 單 한 番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 “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조나단 할아버지) “제 집은 韓國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 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映像으로만 만나봤다. 많게는 이틀에 한 番 인도네시아語로 通話한다. 익숙해질 法도 하지만 조나단은 分明히 線을 긋는다. “韓國에서 살고 싶다”고. 와티 氏는 굴레를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다. 防疫 與件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말을 배우고 親舊를 사귈 時間을 놓쳐버린다. 未登錄 兒童을 救濟할 方法은 없는 것일까. 法務部는 지난해 4月 “國內에서 태어나 15年 以上 居住하고 國內 中·高校를 다닌 兒童에게 滯留를 許可한다”고 發表했다. 하지만 이 制度는 2025年 2月까지만 施行된다. 조나단은 여섯 살. 9年을 채우고 나면 2031年이 된다. 制度가 終了된 지 한참 뒤일 것이다. 조나단은 지난해 11月 末 艱辛히 어린이집에 가기 始作했다. 父母가 코로나19 백신 接種 證明書를 提出해 登院 許可를 받았다. 暫時 救濟는 받았지만 如前히 不安하다. 臨時로 許可를 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未登錄 移住兒童의 保育을 保障하는 制度는 如前히 없다.○ 安山으로 돌아오는 사람들安山으로 모여드는 移住民은 조나단 같은 嬰幼兒만이 아니다. 올해 高等學校에 入學하는 누르街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아홉 살 때인 2015年, 高麗人 3歲인 어머니를 따라 安山에 왔다. 카자흐스탄 經濟가 惡化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딜벡 家族은 4年 만에 아버지 職場을 따라 안산시에서 忠北 淸州市로 移徙했다. 아딜벡은 安山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移住民이 많은 安山을 떠나 韓國人이 많은 곳에서 自身의 實力을 確認해보고 싶었다. 아딜벡이 다니던 安山 先日中은 移住背景 學生이 全體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淸州의 學校에선 한 學年에 서너 名 程度뿐이다. “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絶對 男子들끼리 密接 接觸을 안 하거든요. 安山에선 韓國 애들도 그런 장난 안 쳐요. 우리가 싫어하는 걸 아니까요.” 아딜벡은 文化的 差異에 唐慌했다. 成績도 갑자기 떨어졌다. 淸州 學校에서 본 첫 中間考査 點數는 平均 60點臺였다. ‘元來 班에서 3等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아딜벡은 精神이 번쩍 들어 工夫에 매달렸다. 多幸히 이듬해에는 平均 80點臺 後半까지 點數를 끌어올렸다. 이番엔 高等學校 進學이 問題였다. 아딜벡은 카자흐스탄에서 證券社 애널리스트였던 아버지처럼 金融界 進出을 꿈꾸고 있다. 中學校 1學年 때부터 株式 工夫를 始作할 程度로 金融에 關心이 많다. 經營과 金融에 特化된 特性化高 進學이 目標다. 하지만 淸州에선 이런 特性化高를 찾을 수 없었다. 進路나 비자 問題를 相談할 곳이 없는 點도 難關이었다. 安山의 선일中엔 多文化部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語에 能通한 先生님이 비자 問題를 詳細히 案內해줬다. 다른 先生님들도 移住背景 學生들 處地를 워낙 잘 理解해 ‘맞춤型 進路 相談’을 해주곤 했다. 洞네엔 高校 進學을 助言해줄 高校生 移住背景 先輩들도 많았다. 하지만 淸州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 ‘安山밖에 答이 없다.’ 아딜벡 家族은 結局 1年도 채 되지 않아 安山으로 돌아왔다. 如前한 冷待에 挫折하는 ‘그들’案山, 移住民 家族의 保育 環境 越等 京畿道 次元 支援 늘리려하자 거센 反撥 日-獨은 國籍 相關없이 兒童 福祉 惠澤 ○ 섬을 징검다리로安山의 移住民들이 다른 地域으로 수월하게 건너가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試圖도 있었다. 2019年 京畿道議會에서는 ‘京畿道 移住兒童 條例案’李 發議됐다. 條例案은 移住兒童을 ‘大韓民國의 國籍을 가지지 아니한 18歲 未滿의 사람’으로 規定해 惠澤을 保障했다. 條例案이 通過됐다면 조나단度 水原 어린이집에 갈 可能性이 높았다. 하지만 이 事實이 알려지자 條例案을 主導한 김현삼 議員은 勿論이고 100名이 넘는 京畿道議員들에게 ‘文字 爆彈’이 쏟아졌다. 外國人 反對 團體들이었다. 安山에서는 10次例가 넘는 反對集會가 열렸다. 金 議員 집 앞에서도 示威가 벌어졌다. “反對 團體분들은 移住民들이 아이를 앞세워 韓國에 들어오고, 韓國人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 金 議員은 ‘失敗한 條例案’을 씁쓸하게 回想했다. 1980, 90年代 半月工團에서 일했던 그는 工團 狀況을 누구보다 잘 안다. “移住勞動者가 不足해 注文量을 生産해 내질 못한다고 社長님들이 하소연합니다. 內國人은 採用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移住民에 對한 認識은 바뀌지 않아요.” 特히 嬰幼兒 保育은 移住民 支援의 死角地帶다. 初等學校 때부터는 유엔 兒童權利協約에 따라 外國人이든 內國人이든 公敎育을 받을 수 있다. 保育은 다르다. 稅金을 꼬박꼬박 내도 外國人에겐 保育費 支援 惠澤이 없다. 지난해 京畿道議會는 登錄 外國人住民 子女에게 保育費를 直接 支援하도록 明示하는 條例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京畿道 內에서 移住兒童에게 保育費를 別途로 支援하는 地自體는 鞍山, 富川, 始興, 군포시 等에 그친다. 그마저도 詩 自體 豫算으로 解決한다. 京畿道는 條例 通過 뒤에도 支援 豫算을 編成하지 않았다. 京畿道 側은 “外國人 保育費 支援은 豫算이 많이 들고, 中央政府가 해야 할 일”이라고 說明했다. 다른 國家들은 어떨까. 日本은 2019年부터 國籍을 묻지 않고 滿 3∼5歲 어린이에게 無償保育과 父母 對象 育兒敎育을 始作했다. 獨逸은 自國에서 태어난 모든 兒童에게 出生證明書를 發給한다. 出生登錄이 되면 保育 支援이나 豫防接種 等 福祉 惠澤을 받기 수월해진다. 조나단처럼 ‘保育 差別’을 받는 아이들이 많다. 조나단의 水原 親舊인 미카엘(假名·3)과 안나(假名·2)도 未登錄 移住兒童이다. 韓國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이집에 갈 수가 없다. 아이 父母는 조나단처럼 어린이집을 찾아 水原에서 安山으로 移徙할지 苦悶 中이다. 國家人權委員會에 따르면 國內 未登錄 移住兒童은 約 2萬 名 規模로 推算된다. 人權團體는 規模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豫想한다. 外國 國籍 兒童은 出生 登錄을 하지 않아 統計에 잡히지 않은 兒童들이 있을 수 있다. 와티 氏는 아이들이 父母 탓에 不幸으로 삶을 始作하질 않길 懇切히 바란다. “아이는 神이 주신 祝福이잖아요. 아이의 未來에 父母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히어로콘텐츠팀▽팀長: 이새샘 記者 iamsam@donga.com▽記事 取材: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記者▽그래픽: 김충민 記者▽編輯: 한우신 記者▽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사이트 開發: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共存’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具現한 사이트()로 連結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8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원룸에 갇힌 6살…‘透明人間’李 된 조나단[히어로콘텐츠/共存]

    外國人 比率 13%. 韓國에서 外國人이 가장 많이 사는 都市. 韓國 多文化의 메카. 移住民들의 江南. 京畿 安山. 安山 移住民들은 말한다. ‘내 國籍은 安山’이라고. 安山의 土壤에서 移住背景의 다양한 韓國人이 자란다. 누군가는 ‘眞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海兵隊에 가고, ‘韓國人의 條件’을 채우려 就業 代身 大學 進學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拒否에 單칸房에 갇혀 살다 言語를 잊고 26年을 異邦人처럼 살며 三代 家族을 이룬다.외국인 比重이 5% 以上이면 ‘多文化社會’로 불린다. 案山은 이 比重을 2008年 넘겼다. 2008年 韓國에서 多文化 地域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第 2, 第 3의 安山이 생겨나고 있다. 2020年, 코로나19 擴散에 國內 外國人이 史上 처음 줄었다. 中小企業 10곳 中 6곳은 生産에 蹉跌이 생겼다. 農家 일손 不足에 農産物 값이 치솟았다. 移住民과의 共存은 避할 수 없는 未來다. 果然 韓國은 共存할 準備가 되어 있을까. 取材팀은 지난해 8~12月 ‘案山인’ 100餘 名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訪問해 보세요. 다양한 寫眞과 映像, 인터랙티브 效果가 結合된 새로운 形式의 記事로 共存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九十七, 구십팔, 九十九, 백!”2021年 12月 6日 京畿 안산시의 한 어린이집 隣近 놀이터. 그네 타기에 한창인 조나단(假名·6)은 韓國語로 크게 數字를 외쳤다. 엄마 와티(假名·39) 氏가 등을 밀어줄 때마다 拍子 맞춰서. 조나단은 인도네시아人 夫婦가 낳은 아이다.“스낭 다탕 크 테카(어린이집 오니까 좋아)? 푸냐 트만 바냑 디 테카(어린이집에 親舊 많아)?”(와티 氏)“이야 스낭(응 좋아). 바냑(많아요).”(조나단)어린이집은 조나단이 가장 좋아하는 場所다. 조나단은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짹짹이’가 된다. 짹짹이는 어른들이 붙여준 別名이다. 조나단이 好奇心도, 말도 많아서다. 韓國語가 서툰 엄마, 아빠에게 韓國語도 가르쳐준다.“나 化粧室 가요.”(와티 氏)“‘갔다 올게요’라고 해야지.”(조나단)“간지러워.”(아빠)“‘가려워’가 맞아.”(조나단)“어린이집에서 실컷 놀며 에너지를 쏟고 와서 그런지 집에서 잠도 잘 자요. 짜증도 덜 내고요.”(와티 氏)어린아이를 가진 父母에게는 익숙한 風景이다. 하지만 조나단과 와티 氏는 어렵게 얻어낸 幸福이다. 이들에게는 迂餘曲折이 많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인도네시아를 떠난 夫婦는 京畿 수원시에 定着했다. 水原은 ‘第2의 故鄕’이 됐다. 하지만 안산시로 다시 떠나야 했다. ‘移住 속 移住’를 敢行해야 했다. 조나단은 인도네시아人 夫婦 舊스티(假名·41) 氏와 와티 氏의 아들이다. 夫婦가 結婚한 지 13年 만인 2016年 5月 수원시에서 낳았다. 조나단이 未登錄 移住兒童이 된 건 夫婦의 國內 비자가 滿了돼서다. 父母가 비자 更新에 失敗하면서 ‘韓國밖에 모르는’ 조나단은 韓國에 滯留할 수 없는 身分이 됐다. 透明人間처럼 살게 됐다.수원시의 두 坪 남짓한 원룸房. 保證金 300萬 원에 月貰 38萬 원짜리인 조나단 家族의 보금자리. 조나단에겐 이곳이 世界의 全部였다. 未登錄 身分 탓에 어린이집도, 文化센터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조나단이 萬 1世가 될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걷기 始作하니 집이 漸漸 좁게 느껴졌다. 와티 氏는 조나단을 操心스럽게 데리고 다녔다. 조나단은 다치면 病院조차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동네 놀이터, 傳統 市場,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怯이 났어요. 비자가 滿了되고 나서는 保健所에서 豫防 接種조차 拒否當했거든요.”인도네시아에서 온 信徒들이 다니는 水原의 한 敎會가 그나마 安全한 空間이었다. 비슷한 處地의 未登錄 外國人들이 있었고, 인도네시아語로 疏通할 수 있었다. 이젠 敎會마저 자주 가기 어려워졌다. 2020年 初부턴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 擴散으로 出入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아이가 자라며 원룸은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아이의 活動 幅이 넓어졌다. 조나단이 말하고 뛰어다니는 데 익숙해진 세 살 무렵이었을까. 와티 氏의 몸과 마음도 지쳐버렸다.생계까지 어려웠다. 日傭職 勞動者인 구스티 氏의 所得은 일정치 않았다. 한 달에 80萬 원밖에 못 벌 때도 있었다. 와티 氏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었다.식당에서 門 열기 前 淸掃하는 일을 求한 적은 있다. 午前 7時부터 午前 10時까지 淸掃를 했다. 조나단을 乳母車에 태워 놓고서.이마저도 코로나19로 3個月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飮食을 만들어 팔아보려 했지만 놀아 달라고 떼를 쓰는 조나단을 堪當하기가 어려웠다.“계속 밖에 나가자고 해요. 집에선 TV와 스마트폰만 보려 하고요. 저는 冊이라도 보여주려다가 싸우죠.”조나단은 인도네시아語로는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洞네 놀이터에서 만난 韓國人 親舊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다.“같이 놀고 싶어 하면서도 어려워하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수원 敎會의 先生님 金某 氏는 어린이집을 解決策으로 提案했다. 韓國語를 배우고 親舊들도 사귈 수 있는 空間.“未登錄 이주아東이지만 敎育받을 權利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야말로 꿈이었죠.” 와티 氏 代身 어린이집을 알아봐 준 金 氏가 當時를 回想했다.“세 살짜리 未登錄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미등록이 뭐예요?”“부모님이 不法 滯留하는 분의 아이요.”“어휴 저희는 안 돼요.”단칼에 拒絶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돈을 잘 낼 수 있다’는 말은 입가에만 맴돌았다.“대화가 돈 얘기까지 가지도 않아요. 純化시켜서 ‘未登錄’ 아이라고 하면 어린이집에선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러다 ‘不法 滯留者’라고 하면 氣怯하며 電話를 끊는 패턴이 反復됐죠.”(김 氏)그렇게 拒絶當한 어린이집이 10餘 곳에 達했다. 어느새 3年이 흘렀다.와티 氏도 조나단이 繼續 透明人間처럼 지내는 게 싫었다. 2019年 末부터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計劃도 세웠다. 飛行機 篇을 알아보고 짐까지 다 쌌다. 그런데 突然 코로나19街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 確診者가 增加하고 있었다.“조나단에게 韓國이 더 安全할 것 같았어요. 더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와티 氏)“未登錄 移住兒童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安山에 있대요.”조나단의 안타까운 事情을 보던 交友 金某 氏가 代案을 내놨다. 안산시로 아예 移徙를 하는 것이다.“안산에는 未登錄 移住兒童들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많았어요. 保育料를 아예 안 내도 되는 곳도 있고, 조금 싼 곳도 있었어요.”(김 氏)安山市에는 外國人住民相談志願센터, 글로벌靑少年센터 等 外國人 父母들이 情報를 얻기 쉬운 곳들이 많다. 保育과 敎育 與件이 좋은 便이다. 案山은 移住民 學父母들의 ‘대치동’인 셈이다.‘인도네시아에서 水原으로 移住해 겨우 定着했건만 水原에서 安山으로 또 移住해야 하다니.’이주에 이어 移住를 하긴 正말 쉽지 않았다. 水原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保健所에서 未登錄이란 理由로 豫防 接種을 拒否當한 조나단을 받아준 病院, 育兒用品이 모자란 조나단에게 用品을 물려주던 집主人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와티 氏는 勇氣를 냈다. 이미 5年째 살아 ‘第2의 故鄕’李 된 水原이지만, 조나단의 어린이집 入所가 가장 重要했다. 安山의 한 어린이집이 2021年 5月 28日부터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했다.안산에서 求한 집에 入住할 수 있는 날짜는 2021年 6月 8日. 조나단의 어린이집 入所日보다 10日假量 뒤였다. 와티 氏는 조나단을 데리고 水原 집에서 安山 어린이집까지 地下鐵로 往復했다. 地下鐵과 徒步로 1時間씩, 往復 2時間이 걸렸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近處에서 기다려야 했다.“‘안산 適應’을 練習했어요.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近處 길을 映像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아직 安山에는 親舊가 없어요. 週末에 水原 敎會를 가서 敎人들을 만나요.”(와티 氏)水原의 一部 어린이집들이 조나단을 拒否한 理由는 다양하다. 于先 韓國人 子女들이 많은 어린이집은 굳이 移住兒童을 받을 必要性을 못 느낀다. 韓國 學父母들의 反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수원시에서 移住兒童은 韓國人 兒童과 달리 保育費 支援을 全혀 받지 못한다. 父母가 保育料 全額을 내야 한다. 未納하면 어린이집 財政에 問題가 생길 수 있다. 移住勞動者人 父母는 일자리가 不安定한 便이라 保育料를 밀린 채 달아날 수 있단 視角이 있다.수원시 어린이집 200餘 곳을 會員으로 둔 水原어린이집協議會 側은 未登錄 兒童에 難色을 표했다.“외국인 兒童은 水原市廳이 電算시스템에 直接 登錄해 줘야 入所할 수 있어요. 어린이집이 마음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未登錄 兒童은 團體 傷害保險에 加入도 안 됩니다. 或是라도 다치면 補償을 못 받는 點도 負擔입니다.”안산의 狀況은 달랐다. 未登錄 移住兒童의 入所를 許容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非政府機構(NGO)가 運營하는 一部 어린이집은 아예 保育料를 받지 않았다.“아이는 登錄이든 未登錄이든 差別받지 않고 敎育받을 權利가 있어요. 안산시도 未登錄 兒童은 保育料를 支援하지 않아요. 그런데 父母가 돈을 낼 수 있다고 하면 똑같이 機會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안산의 한 어린이집 園長)이 어린이집은 조나단 父母의 旅券과 조나단의 出生證明書만 確認하고 入所를 許諾했다. 全體 兒童의 90% 以上은 移住背景 兒童이어서 先入見이 없었다. 保育料를 未納한 外國人 父母들을 督勵해 본 經驗도 있었다.행복했던 期間은 한 달에 不過했다. 코로나19 擴散으로 같은 해 7月 初 어린이집 登院이 全面 中斷됐다. 맞벌이 父母 等 특수한 境遇에만 아이들을 돌봐주는 緊急 保育이 始作됐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다. 어린이집이 父母님의 在職證明書를 要求했지만, 비자가 滿了된 舊스티 氏는 在職證明書를 提出할 수 없었다. 每月 所得이 일정치 않아 在職證明書를 代身할 만한 月給 明細서도 내지 못했다.“조나단 아빠가 雇用됐던 企業이 不渡났고, 以後 새로 옮긴 會社에서도 일감이 없어서 繼續 會社를 옮겨 다녔어요.”(목사 아구스 氏(假名))李 渦中에 와티 氏에게 둘째가 생겼다. 와티 氏는 입덧이 심해지자 病院 診斷書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아이를 받아주세요.’ 懇切한 마음이었지만 所用이 없었다.“시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코로나 確診者가 많이 나오는 地域이라 (詩 側에) 저희만 봐달라며 (入所를 許容)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園長)2021年 11月 12日. 工事 中인 어린이집을 찾은 조나단은 와티 氏의 손을 잡고 正門 近處에서만 서성였다.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조나단, 어린이집이네. 어린이집 다시 가고 싶어?”와티 氏가 말을 걸었지만, 조나단은 어린이집을 쳐다보기만 했다.어린이집은 낯선 모습이었다. 시멘트 外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工事 廢棄物이 자루에 담겨 入口에 잔뜩 쌓여 있었다.조나단이 없는 사이 全面 리모델링 工事에 들어간 것이다. 緊急 保育 對象인 어린이들은 臨時로 마련된 다른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 조나단은 어린이집 親舊들을 보고 싶지만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 수도 없다.두 坪 원룸에 다시 갇히다조나단은 安山의 房 한 칸짜리 원룸에 다시 孤立됐다. 어른 네 名이 앉으면 꽉 차는 空間. 조나단은 이곳에서 먹고 자는 것은 勿論이고 工夫와 놀이까지 다 解決해야 한다. 親舊는 結局 엄마뿐이다.집에서 500m 距離에 있는 公園이 조나단의 唯一한 놀이터다.“공원에 나가자.”와티 氏의 말에 조나단은 재빨리 일어섰다. 모래놀이龍 삽과 桶을 들고서. 날씨가 좋을 땐 一週日에 두 番 理想을 찾는다. 하지만 겨울엔 이마저도 어렵다.와티 氏는 未登錄 身分으로, 낯선 安山이란 都市에서 더욱 움츠러든다. 어느 날 조나단이 熱이 많이 났다. 水原에서라면 자주 가던 病院을 찾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와티 氏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어느 病院이 未登錄人 우리를 받아줄까.’다른 곳도 함부로 갈 수가 없다. 조나단은 冊을 좋아하지만 地域 圖書館을 아쉽게 지나치기만 한다.와티 氏 帽子는 둘 다 韓國語가 서투르다.“쉬 안 가? 쉬 안 갈래?”와티 氏가 韓國語로 묻자 조나단은 “응”이라고만 했다.서툰 韓國語를 듣고 자란 조나단의 韓國語도 더디다.“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韓國語 水準은 두 살 程度로 보여요. 놀 때 單語들만 말해요. 文章을 만들어서 自己 意思를 傳達하는 건 아직 안 돼요. 인도네시아 말은 되게 잘해서 ‘짹짹이’라고 別名을 붙여 줬을 程度인데 말이죠.”조나단 家族을 돕고 있는 인도네시아人 牧師 아구스 氏는 조나단의 言語 能力이 걱정이다.사회성도 떨어지고 있다. 조나단은 火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든 걸 自己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점점 애 같지 않아졌어요. 애들은 울거나 떼를 쓰는데 조나단은 어른들처럼 火를 내더라고요. ‘너 가만히 안 둘 거야’ 같은 險惡한 말을 해요. 表情도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는 것을 따라 해요.”(와티 氏)조나단이 韓國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解決될까. 조나단은 單 한 番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제 집은 韓國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映像으로만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조나단은 分明히 線을 긋는다. 韓國에서 살고 싶다고.조나단과 비슷한 處地의 아이들은 많다. 조나단이 다니는 敎會만 해도 未登錄 移住兒童 미카엘(假名·3)과 안나(假名·2)가 있다. 韓國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다. 미카엘과 안나의 父母들도 어린이집에서 繼續 拒否를 當했다. 이제 水原에서 安山으로 理事를 苦悶 中이다.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國內 未登錄 移住兒童은 約 2萬 名 規模로 推算된다. 人權團體는 規模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豫想한다. 外國 國籍 兒童은 出生 登錄을 하지 않아 統計에 잡히지 않은 兒童들이 있을 수 있다.이 아이들이 갈 곳은 安山뿐이다. 안산시는 2018年 京畿道에서 처음으로 市 豫算으로 登錄 外國人 住民 子女에게 保育費를 支援하기 始作했다. 2020年에는 全額 支援을 實施하기로 決定했다. 지난해부터 누리過程 保育費 24萬 원을 全額 支援하고 있다. 어린이집들이 保育費 支援을 받으니 移住兒童들도 入所하기 수월해졌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移住民 家族들은 安山으로 收斂한다. 案山은 移住民이 모이는 섬 같은 곳이 됐다.경기도의 移住兒童 保育 實態를 調査한 이영아 아시아義昌 常任理事는 移住民 保育 政策이 安山 外의 地域에서도 擴大돼야 한다고 强調한다.“외국인 兒童이 늘어난다는 건 韓國에서 家族을 形成해 살아가는 移住民들이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保育 政策은 家族 全體를 도울 수 있어요. 保育費를 支援하는 地方自治團體가 늘어나야 합니다.”결국 돌고 돌아 安山으爐安山의 ‘移住民 인프라’를 찾아 또 다른 移住를 하는 移住民들은 조나단뿐만이 아니다.올해 高等學校에 入學하는 누르街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온 少年이다. 열 살 때인 2015年, 高麗人 3歲인 어머니를 따라 安山에 왔다. 카자흐스탄 經濟가 惡化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아딜벡 家族은 4年 만에 安山에서 忠北 淸州로 移徙하게 됐다. 아버지가 職場을 淸州로 옮겨서였지만 事實 安山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딜벡은 移住民이 많은 安山 밖 다른 地域에서 스스로 實力을 알아보고 싶었다.“공부도 熱心히 하고 韓國語도 잘하고, 適應을 잘했어요. 그래서인지 ‘韓國 아이들과 제 實力으로 競爭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죠.”(임미은 先日中 敎師)아딜벡이 다니던 安山 先日中은 移住背景 學生이 全體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淸州의 學校에선 移住背景 學生이 한 學年에 서너 名 程度뿐이었다. 아딜벡이 처음 겪어보는 環境이었다.“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絶對 男子들끼리 密接한 接觸을 안 하거든요. 安山에선 韓國 애들도 中央아시아 出身 애들이 싫어하는 걸 잘 아니까 그런 장난 안 쳐요.”아딜벡은 文化的 差異에 唐慌했다. 이른바 ‘一陣’ 같은 親舊들은 赤裸裸하게 對했다.“너희 나라로 돌아가.”아딜벡은 갑작스러운 性的 下落에도 唐慌했다. 轉學 온 淸州 學校에서 본 中間考査 點數는 平均 60點臺였다. ‘元來 班에서 3等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시험 難度가 높아지며 脆弱한 韓國語 實力이 발목을 잡았다.“2학년 되고 나서 놀긴 했지만…. 社會 같은 科目에선 제가 別로 안 좋아하는 敍述形이 正말 많이 나오더라고요.”아딜벡은 精神이 번쩍 들어 工夫에 매달렸다. 多幸히 이듬해에는 平均 80點 後半까지 點數를 끌어올렸다. 이番엔 高等學校 進學이 問題였다. 아딜벡은 經營 分野에 特化된 特性化高에 가고 싶었다. 카자흐스탄 證券業界에서 일했던 아버지처럼 金融界 進出을 꿈꾸고 있다. 이미 中學校 1學年 때부터 株式 工夫를 始作할 程度로 關心이 많다. 特性化高를 가면 衣類 事業도 試圖해 보고 싶다. 하지만 淸州 近處에는 그런 特性化高가 없었다.진로 選擇을 相談하고 비자 問題를 相議할 곳이 없는 點도 問題였다. 安山의 선일中엔 多文化部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語에 能通한 先生님이 비자 問題를 詳細히 案內해줬다. 一般 先生님들도 移住背景 學生에게 익숙해 ‘맞춤型 進路相談’을 해주곤 했다. 高等學校에 進學한 移住背景 先輩들도 있어 쉽게 助言을 求했다. 하지만 淸州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아딜벡 家族은 1年도 채 되지 않아 安山으로 돌아왔다. 結局 安山밖에 答이 없다. 이렇게 移住民들은 安山으로 收斂된다. 案山은 移住民의 섬이다.섬이 징검다리가 되려면안산 아이들이 다른 地域으로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려는 試圖도 있었다.2019년 京畿道議會에서는 ‘京畿道 移住兒童 條例’가 發議됐다. 條例案은 移住兒童을 ‘大韓民國의 國籍을 가지지 아니한 18歲 未滿의 사람’으로 規定했다. 未登錄이든 登錄이든 關係없이 支援 對象으로 본 셈이다.‘이주아동은 出生登錄 될 權利를 갖는다’고 明示하기도 했다. 出生登錄은 移住兒童의 規模를 把握하고 最小限의 福祉 支援을 하기 위한 첫 단추다. 條例案이 通過되면 조나단度 水原에서 어린이집에 갈 可能性이 높다.하지만 이 事實이 알려지자 ‘文字 爆彈’이 쏟아졌다. 條例案을 主導한 김현삼 議員은 勿論 다른 京畿道議員에게 文字메시지가 쏟아졌다. ‘難民 反對’ ‘多文化 反對’를 외치는 外國人 嫌惡 團體들이었다. 안산시에서는 10次例가 넘는 集會가 벌어졌다. 金 議員 집 앞에서도 示威가 벌어졌다.“단체들과 따로 面談까지 했지만 說得할 수가 없었어요. 反對 團體 분들은 移住民들이 아이를 앞세워 韓國에 들어오고, 結局은 韓國人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김 議員은 이 ‘失敗한 條例案’을 씁쓸하게 回想한다. 1980, 90年代 半月工團에서 일했던 그는 工團 狀況을 누구보다 잘 안다.“요즘 社長님들이 移住勞動者가 더 必要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어 注文量을 못 댄다는 거예요. 內國人은 採用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移住民에 對한 認識은 바뀌지 않고 있죠.”독일 政府는 自國에서 태어난 모든 兒童에게 出生證明書를 發給한다. 泰國이나 베트남 같은 開發途上國度 大部分 國籍과 關係없이 出生登錄을 해준다. 政府가 兒童들을 出生登錄 하면 兒童의 人權侵害 與否를 確認할 수 있다. 豫防 接種 같은 基本的인 福祉 支援도 할 수 있다. 日本은 2019年부터 國籍을 묻지 않고 滿 3~5歲 어린이에게 無償保育 및 幼兒敎育을 해준다.보육 側面에서 支援을 强化하려는 試圖도 있었다. 지난해 京畿道議會는 登錄 外國人住民 子女에게 保育費를 直接 支援하도록 明示한 條例를 통과시켰다. 흔히 外國人 住民이 늘어나면 福祉 負擔도 늘어날 거라는 豫想이 많다. 移民政策硏究院에 따르면 移住勞動者가 韓國 全體의 所得稅收에 寄與하는 額數는 2017年 1兆 원을 넘어섰다. 住民 關聯 政策 豫算은 2018年 基準 8500億 원 規模에 그친다. 稅金을 꼬박꼬박 내도 保育에선 差別을 받는 것이다.조례는 通過됐지만 그뿐이었다. 現在 京畿道 內에서 移住兒童에게 保育費를 別途로 支援하는 地自體는 鞍山, 富川, 始興, 軍浦 等에 그친다. 그마저도 詩 自體 豫算으로 解決하고 있다. 京畿道에서는 條例 通過 뒤에도 支援 豫算을 編成하지 않았다.“외국인 保育費 支援은 豫算 規模가 크고, 地自體가 아닌 中央 政府가 해야 할 일입니다.”현재 保健福祉部는 指針을 통해 保育費 支援 對象을 ‘大韓民國 國籍을 가진 者로서 住民登錄法에 依해 住民番號를 正常的으로 附與받은 萬 0~5歲 兒童’으로 制限한다. 이 指針의 根據가 되는 嬰幼兒保育法을 살펴보면 國籍에 따른 差別이 容認되고 있다. ‘嬰幼兒는 自身이나 保護者의 性, 年齡, 宗敎, 社會的 身分, 財産, 障礙, 人種 및 出生地域 等에 따른 어떠한 種類의 差別도 받지 아니하고 保育되어야 한다.’ ‘國籍’李 文句에서 빠져 있다.이 條項에 國籍을 包含시키는 嬰幼兒保育法 改正案이 지난해 7月 國會에 發議됐다. 하지만 懸案에 밀려 本格的인 論議는 始作되지 못했다. 게다가 복지부는 國籍 中心으로 設計된 다른 社會保障 制度와 連繫해 論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표류가 끝나는 그날까지와티 氏에게 安山은 如前히 낯선 땅이다. 하지만 조나단을 위해 適應해야 하는 곳이다.“아직 適應 期間이라 조금 낯선 땅이에요. 實은 아직도 水原을 그리워해요. 언젠가는 家族들이 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거예요. 조나단이 韓國에서 中學校, 高等學校를 卒業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와티 氏는 조나단 같은 아이가 더 異常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아이는 神이 주신 祝福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이의 未來에 父母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위해 사는 곳을 옮기지 않고 本人이 사는 곳에서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는 環境이 되면 좋겠어요.”공존 - 세 番째 이야기 : 移住民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1月 18日 公開어린이집뿐만이 아니다. 조나단 같은 移住背景 兒童들은 學校를 다니면서도 韓國語를 잘하는지, 滯留 資格이 있는지 끊임없이 試驗받는다. 이런 條件을 갖춰도 아이들은 韓國 社會의 ‘下流’에 고일 수 있다는 不安感에 시달린다. 異邦人에서 벗어나기 위해 工夫에 더욱 매달린다. 2009年 우즈베키스탄에서 韓國에 온 少年에겐 高等學校 進學조차 切實하다.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 ‘共存’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取材 : 李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記者▽動映像 編輯 :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記者▽프로젝트 企劃 : 위은지 記者▽사이트 製作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7
    • 좋아요
    • 코멘트
  • 全校生 449名中 韓國人 初等生은 여섯名뿐…[히어로콘텐츠/공존]

    ‘案山인’ 100名에게 듣다매년 꾸준히 늘던 國內 外國人 數가 2020年 統計 作成 以來 처음으로 줄었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에 飛行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들의 빈자리는 컸다. 일손 不足에 中小企業 10곳 中 6곳은 生産에 蹉跌을 빚었다. 農家는 農産物을 收穫하지 못해 아우聲이었다. 이듬해엔 國內 總人口度 처음으로 減少했다. 人口絶壁 時代, 減少한 人口를 代替하는 移住民과의 共存은 避할 수 없는 課題가 됐다. 多文化社會(住民 中 5% 以上이 外國人)로 分類되는 市郡區는 이미 全國에 70餘 곳.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韓國에서 外國人이 가장 많은 都市 京畿 안산시를 中心으로 答을 찾아본다. 東亞日報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8月부터 4個月間 安山에서 100餘 名을 만났다. 移住民의 삶을 幼兒期부터 中壯年期까지 生涯段階別로 密着 取材했다. 韓國의 瘠薄한 現實에 힘겹게 뿌리 내리는 高麗人, 몽골人 三代 移民家族의 歷史를 追跡했다. 韓國人들의 率直한 속내도 들어봤다. 東亞日報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訪問해 보세요. 다양한 寫眞과 映像, 인터랙티브 效果가 結合된 새로운 形式의 記事로 共存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너, 韓國人이었어?” 지난해 12月 17日 京畿 安山市 檀園區 安山원곡초등학교 近處 粉食집. 原曲初 5學年 양주원(12)에게 같은 班 親舊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한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親舊는 주원이와 알게 된 지 3年 만에 주원이의 國籍을 처음 알았다. 親舊가 놀란 理由는 原曲秒에 워낙 韓國人이 없어서다. 原曲初 學生 449名 가운데 祖父母 때부터 韓國에서 산 韓國人은 6名뿐이다. 나머지는 外國人이거나 外國人 父母에게서 태어나 韓國 國籍을 얻었다. 주원이는 1學年 때부터 原曲秒에 다녔지만 3學年 때서야 깨달았다. ‘아, 우리 學校엔 韓國人이 別로 없구나.’ 2年 前 어느 날, 다른 學校 近處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韓國語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겐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原曲初에선 러시아語, 中國語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난 外國人 親舊 좋은데”…주변선 “그 學校 왜 다녀”아파트촌-빌라촌 두 個의 世界애初엔 한洞네였던 安山 원곡동-백운동… 移住民 늘어나며 2個의 銅으로 나뉘어한국인 外國人 사이 보이지 않는 큰 壁安山市에서도 원곡동은 外國人 比率이 70%나 된다. 원곡동엔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바로 옆 백운동엔 新築 아파트가 櫛比해 對照를 이룬다. 원곡동과 백운동 警戒에 原曲秒가 있다. 원穀草를 中心으로 원곡동과 백운동은 다른 世界처럼 나뉜다.○ 높아지는 ‘國境’이날 午後 1時 半頃 原曲初 正門을 나온 아이 50餘 名 大部分은 원곡동 빌라村으로 向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名假量만 빌라村 反對便에 있는 新築 아파트로 갔다. 新築 아파트는 原曲初에서 걸어서 10分도 안 되는 距離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屬한다. 주원이 家族은 지난해 8月 백운동 新築 아파트로 移徙했다. 주원이는 이 아파트에서 原曲初 親舊를 보질 못했다. “엄마, 우리 班에 韓國人이 나랑 先生님밖에 없어.” 주원이 어머니 최지윤(假名·46) 氏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韓國 아이가 別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疏外되는 거 아닌가.’ 不安感에 주원이를 轉學 보낼까 苦悶도 했다. 周邊에서도 걱정을 키웠다. “주원 엄마, 왜 그 學校엘 보내?” “다른 學校에 안 보내?” 하지만 주원이는 原曲초가 좋다. 주원이가 5年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지윤 氏도 생각을 바꿨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지민(假名·39) 氏는 생각이 좀 다르다. 原曲秒보다 조금 더 먼 關山初로 딸을 6年째 보내고 있다. 딸을 關山秒에 보내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딸이 幼稚園에 다닐 때부터 일찍이 住所地를 親庭으로 옮겼다. 原曲初 配定을 避하기 위해서였다. “原曲初 敎育課程이 너무 多文化 아이들 爲主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多文化 아이들이 오히려 韓國 애들을 王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 다른 韓國人 學父母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關山初로 配定받을 方法을 찾았다. 家族이 다 같이 管山草 近處로 잠깐 移徙를 다녀오기도 했다. 地域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原曲初 配定을 避하는 ‘꿀팁’李 공유됐다. 아파트 入住民들은 入住 6個月 前인 지난해 初부터 “原曲初 配定 反對”를 외치기 始作했다. 安山敎育支援廳에 100件이 넘는 民願을 넣었다. 通學區域을 關山初까지 넓혀 달라는 要求였다. 이런 움직임에 原曲草島 行動에 나섰다. 안복현 原曲初 校長은 學父母 說明會까지 열었다. 移住背景 學生은 ‘韓國語 實力에 따라 水準別 授業을 한다’, ‘韓國人 學生에게 被害가 없다’고 알리려 했다. 하지만 學父母들은 言聲을 높였다. “왜 그런 學校에 다녀야 합니까?” “學校 成績이 全國 몇 等인 거예요?” 敎育支援廳은 結局 지난해 7月 아파트 通學區域을 關山初까지 넓혔다. 入住民들은 두 學校 가운데 選擇해 支援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通學區域 變更 뒤 원穀草를 選擇한 入住民은 單 한 名도 없었다. 지난해 10月 基準 原曲初 學生 中 移住背景 學生은 98.6%다. 忌避 對象은 學校만이 아니다. 住民들은 原曲初 隣近 地域을 지나치지도 않으려 한다. 韓國人 學父母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 “原曲初 뒤쪽은 가지 말아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智旻 氏가 원곡동에 간 건 2年 前 知人 食堂을 訪問한 게 마지막이었다. “食堂 가는 것도 무서워요. 外國人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害코지할 것 같고…. 혼자서는 絶對 못 가요.” 하지만 住民들의 두려움은 부풀려진 面이 있었다. 警察 關係者는 “원곡동 犯罪率은 높지 않다. 韓國 어느 洞네를 가든 벌어지는 술 먹고 다투는 事件이 있는 程度다. 治安은 安定된 便이다”라고 했다. 원곡동과 백운동 사이의 壁이 높지만 두 棟은 5年 前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원곡1·2棟, 원곡동은 原曲本洞으로 불렸다. 2017年에서야 只今처럼 나뉘었다. 백운동 住民 數가 크게 늘었고, 數字로 나뉜 洞名을 整備해야 할 必要도 있었다. 勿論 다른 理由도 있었다. 송바우나 安山市議員은 “外國人이 많다는 원곡동에 對한 否定的 認識이 名稱을 바꾸는 데 影響을 미쳤다”고 말했다. 원곡동이 처음부터 ‘移住民 洞네’였던 것은 아니다. 원곡동은 1970年代 後半 半月工團 背後都市로 成長했다. 鍍金, 染色 工場에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傳統 製造業이 漸次 기울며 産業團地가 萎縮됐다. 사람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原曲初 앞에서 20年假量 文房具를 運營하는 洪某 氏(66)는 원곡동의 變化를 몸소 體感했다. “15年 前쯤부터 韓國人들은 漸漸 고잔동 같은 洞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外國人들이 채웠어요.” 2012年 35%였던 원곡동 外國人 住民 比重은 지난해 2倍로 늘었다. 일손이 不足했던 公團의 中小企業 社長들은 移住民들을 반겼다. 빈 敎室이 늘던 學校들도 다시 붐비기 始作했다. 한때는 中國人들이 늘었지만 最近엔 러시아, 中央아시아에서 온 移住民들이 모여든다.언어장벽탓 잘 못 어울려… 親한 親舊는 다 러시아系”案山, 우리 모두의 이야기全國 곳곳 初中高 移住背景 學生들 늘어한국 알리고 뿌리 尊重하며 거리 좁혀야한국인 學生 認識 바꿀 ‘共存 敎育’도 必要○ ‘國境’ 너머의 아이들어른들이 세운 壁 때문에 原曲初 아이들은 學校 밖을 나올 때 비로소 낯선 世界를 만난다. 우즈베키스탄 國籍 高麗人 피브키나 이리나(15·女)는 初等學校 2學年 때 父母님을 따라 韓國에 왔다. 줄곧 원穀草를 다니다 2020年 卒業했다. 原曲初에선 適應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러시아語를 하는 二重言語 先生님이 工夫를 도와줬다. 러시아語로 얘기할 親舊들도 많았다. 이리나는 原曲初에서 韓國語를 못하는 親舊들의 通譯을 맡을 程度였다. 每日 2時間씩 꾸준히 學校에서 韓國語 授業을 들은 結果였다. 이리나는 정든 원穀草를 卒業하며 韓國 學生이 더 많은 원곡중을 選擇했다. 지난해 3月 基準 원곡중의 移住背景 學生 比率은 17.8%다. “러시아 애들이 많은 中學校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韓國人이 많은 學校에서 韓國語를 더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中學校에 오고 나서 말數가 더 줄었다. 親한 中學校 親舊는 러시아系 아이들 4名뿐이다. “같은 班 韓國人 親舊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韓國人 親舊들은 다른 班 애들이랑 親해요.” 韓國人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韓國語가 늘기 힘들다. “先生님과 班 애들이 다 같이 있는 團體 채팅房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眞짜의 俗語)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學校에서 있었던 일을 채팅房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글을 읽기만 해요.” 學校 工夫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先行學習을 한 數學은 그나마 낫다. 어려운 單語가 많은 國語, 歷史가 큰 問題다. “國語, 歷史는 머릿속에서 飜譯이 잘 안 돼요. 問題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解釋해봐야 해요.” 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며 틈틈이 美術學院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安山에서 高等學校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留學을 떠나 美術大學을 나올 생각이다. ‘大學을 마치면 韓國으로 돌아와 디자인 會社에 就業하리라.’ 하지만 이런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韓國 사람이 아니니 會社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절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 이리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學校엔 韓國人도, 外國人도 아닌 自身에 混亂스러워하다 本國으로 돌아간 아이도 있다.○ 障壁을 허무는 사람들原曲初는 아이들이 壁을 넘어서도록 애쓰고 있다. 京畿道敎育廳이 指定한 多文化國際革新學校답게 러시아語, 中國語 講師가 主要 敎科를 通譯해준다. 出身 國家 言語를 가르치는 授業도 마련했다. 移住背景 아이들이 韓國에 定着하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趣旨다. 四物놀이와 民謠, 跆拳道와 테니스 授業도 한다. 밴드部를 따로 運營하며 藝體能 敎育에 공들인다. 이런 活動이 아이들 間 距離感을 좁힐 것이란 믿음에서다. 原曲初는 移住民 敎育 歷史가 쌓이며 移住民 學父母들의 ‘8學群’처럼 成長했다. 移住民 學父母들은 通學券에서 벗어난 安山 常綠區, 京畿 시흥시 等에서도 ‘遠征 通學’을 시킨다. 原曲初에도 어려움은 있다. 韓國人이 워낙 없다 보니 中國系, 러시아系 아이들은 母國語로 對話하며 끼리끼리 어울린다. 安 校長은 “韓國 아이들이 一定 比率 以上이어야 外國人 아이들도 韓國語를 배울 意志를 가진다”고 말했다.○ 安山, 우리 모두의 이야기願穀草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全國 곳곳에서 移住背景 學生들이 늘고 있다. 敎育部에 따르면 지난해 全國 初等學生 中 4.2%가 移住背景 學生이다. 比重이 9年 前(1.1%)에 비해 4倍假量으로 늘었다. 이런 學校들은 原曲秒에 ‘共存 노하우’를 묻는다. 大邱의 新黨初等學校도 그中 한 곳이다. 2018年 移住背景 學生이 全體의 折半에 조금 못 미쳤지만, 只今은 65%에 이른다. 大邱 新當初에는 隣近 성서工團에서 일하는 移住勞動者 子女들이 다닌다. 原曲初처럼 遠距離 通學을 하는 學生도 있다. 移住背景 學生 맞춤型 프로그램이 있다는 所聞이 돌아서다. 學校는 急激히 늘고 있는 移住背景 學生을 받아들이느라 奔走하다. 敎育 現場에서는 ‘言語’가 共存의 첫 단추라고 말한다. 二重言語 講師를 늘리고 韓國語 特講을 두루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移住背景 學生들이 特定 學校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상규 安山瑞草 校監은 韓國語 豫備學校를 提案했다. “外國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學生은 豫備學校에서 韓國語를 배운 뒤 一般 學校에서 授業을 듣도록 支援했으면 좋겠어요.” 안복현 原曲初 校長은 韓國人 學生의 認識을 바꿀 ‘共存 敎育’도 必要하다고 말한다. 移住民이 많은 獨逸이나 아일랜드는 相互文化 敎育을 모든 學校에서 實施한다. “힘든 일은 移住民들이 하는 게 當然한 거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惠澤이 가면 ‘逆差別’이라고 해요. 내 子息이 外國에 갔다면 그런 待遇를 받길 願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 ‘國境’은 如前히 堅固하다원곡초 바로 앞엔 또 다른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原曲秒에선 이 但只 韓國인 學生들이 原曲秒에 入學하리라고 期待한다. 2023年 入住가 始作되면 原曲秒에 韓國 學生이 늘고, 共存이 더 可能하리라고. 하지만 地域 住民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公認仲介業所에선 벌써부터 通學區域 變更 얘기가 나온다. “入住 時點에 住民들이 民願을 넣으면 아파트 通學區域이 關山初로 擴大될 거예요. 아파트 價格이 좀 더 올라갈 수 있죠.” 이 團地 再開發組合 關係者는 原曲初 移住民 아이들이 오히려 轉學 갈 거라고 壯談했다. “學校에 韓國 아이들이 많아지면 移住民 아이들이 轉學을 가게 될 거예요. 1, 2年만 있으면 學校 雰圍氣가 (韓國人 中心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 韓國人과 移住民이 어울려 산다는 選擇肢는 어른들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國境은 如前히 堅固하다. 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2020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팀의 ‘共存: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記者 iamsam@donga.com▽記事 取材: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記者▽그래픽: 김충민 記者 ▽編輯: 한우신 記者▽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사이트 開發: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7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너 韓國人이었어?”…전교생 中 韓國人은 單 6名[히어로콘텐츠/共存]

    外國人 比率 13%. 韓國에서 外國人이 가장 많이 사는 都市. 韓國 多文化의 메카. 移住民들의 江南. 京畿 安山. 安山 移住民들은 말한다. ‘내 國籍은 安山’이라고. 安山의 土壤에서 移住背景의 다양한 韓國人이 자란다. 누군가는 ‘眞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海兵隊에 가고, ‘韓國人의 條件’을 채우려 就業 代身 大學 進學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拒否에 單칸房에 갇혀 살다 言語를 잊고 26年을 異邦人처럼 살며 三代 家族을 이룬다.외국인 比重이 5% 以上이면 ‘多文化社會’로 불린다. 案山은 이 比重을 2008年 넘겼다. 2008年 韓國에서 多文化 地域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第 2, 第 3의 安山이 생겨나고 있다. 2020年, 코로나19 擴散에 國內 外國人이 史上 처음 줄었다. 中小企業 10곳 中 6곳은 生産에 蹉跌이 생겼다. 農家 일손 不足에 農産物 값이 치솟았다. 移住民과의 共存은 避할 수 없는 未來다. 果然 韓國은 共存할 準備가 되어 있을까. 取材팀은 지난해 8~12月 ‘案山인’ 100餘 名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訪問해 보세요. 다양한 寫眞과 映像, 인터랙티브 效果가 結合된 새로운 形式의 記事로 共存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한국에서 外國人이 가장 많이 사는 都市, 安山. 그中에서도 唯獨 外國人이 많은 洞네가 있다. 바로 원곡동이다.외국인 比率 70%(1萬4139名). 10名 中 7名이 外國人이다. 半月工團과 街까원 원곡동 빌라村, 再開發이 마무리되고 있는 백운동 新築 아파트團地. 그 境界에 國境을 그리듯, 安山原曲初等學校가 있다. “너 韓國人이었어?”하교길 粉食집에서 安山原曲初 5學年 양주원(12)을 같은 班 親舊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12月 칼바람에 두 볼이 발갰다. 親舊는 3年 만에 주원이의 國籍을 처음 알았다.“주원이도 다른 나라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이런 錯覺엔 理由가 있다. 原曲初 學生 中 韓國人은 單 여섯 名에 不過하기 때문이다. 1學年 때부터 原曲秒에 다닌 주원이는 3學年 때서야 原曲初의 특별함을 깨달았다. 2年 前 어느 날, 下敎하며 다른 學校 親舊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韓國語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게는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原曲初 近處에선 下校 時間에 러시아語, 中國語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아, 우리 學校엔 韓國人이 別로 없는 거구나….’주원이네 班 數學 時間엔 韓國人 先生님과 러시아語 先生님 두 분이 들어온다. 러시아語 先生님은 러시아에서 온 親舊들에게 러시아語로 數學을 알려준다. 點心 給食 메뉴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러시아 소고기 飮食), 탄두리 치킨에 라氏(印度 飮食). 原曲初 近處엔 러시아에서 온 學生들에게 러시아語로 數學科 國語를 가르쳐 주는 學院도 있다.이날 午後 1時 半頃 原曲初 正門을 나온 아이 50餘 名 中 大部分은 원곡동 빌라村으로 向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名假量만 빌라村 反對便인 新築 아파트 團地로 向했다. 新築 아파트 團地는 原曲初에서 걸어서 10分도 안 되는 距離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屬한다. 印度가 좁은 빌라村과 달리 印度도 道路도 넓은 아파트 團地. 原曲秒에 다니는 大多數 아이들에겐 낯선 곳이다.주원이 家族은 지난해 8月 백운동 新築 아파트로 移徙했다.“아파트에 原曲初 다니는 애가 한 名도 없어요. 元來 6學年 兄 한 名이 原曲初 다녔는데 關山初로 轉學 갔어요.”주원이가 다니는 아파트 近處 跆拳道 學院이나 論述 學院에도 原曲初 親舊는 없다. 學校와 달리 學院엔 親舊들이 全部 韓國人이다. 주원이에겐 外國人이 大多數인 學校와 韓國人이 前婦人 學院이 너무도 다르다.“엄마, 우리 班에 韓國人이 나랑 先生님밖에 없어.”주원이 어머니 최지윤 氏(假名·46)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한국 아이가 別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疏外되는 거 아닌가.’지윤 氏는 不安感에 주원이를 轉學 보낼까 苦悶도 했다. 周邊에서도 걱정을 키웠다.“주원 엄마, 왜 그 學校엘 보내?”“다른 學校에 안 보내?”하지만 주원이는 싫다고 했다. 주원이는 原曲초가 좋다. 좋은 親舊, 좋은 先生님이 있는 우리 學校니까. 지윤 氏도 주원이가 5年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학교에서 中國語나 러시아語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고, 앞으로 外國人이 더 많은 世上에서 살 테니 미리 適應하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같은 아파트 團地에 사는 김지민 氏(假名·39)는 6學年인 딸을 關山秒에 보낸다. 原曲秒보다 조금 더 멀다.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2016年 初等學校 入學을 앞둔 딸의 住所地를 親庭으로 옮겼다.“원곡초 敎育課程이 너무 多文化 아이들 爲主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多文化 아이들이 오히려 韓國 애들을 王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주변 韓國人 學父母들도 마찬가지였다. 管山草 配定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이 住所地만 옮기거나, 아예 家族이 다 같이 잠깐 그쪽으로 移徙 다녀오기도 했다. ‘僞裝轉入’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父母 마음은 大槪 그랬다.‘한국 애라서 疏外되면 어쩌지?’ ‘이러다 國語 成績 떨어지면 안 되는데….’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原曲初 配定을 避하는 ‘꿀팁’李 공유됐다.“원곡초 配定인데 어떡해요.”“빨리 住所를 옮기세요. 入學하고 난 뒤 轉學시키긴 어려워요.”한국인 學父母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원곡초 쪽으로는 가지도 말아야 해.”어른들도 마찬가지다. 智旻 氏가 원곡동에 간 건 2年 前 知人 食堂을 訪問한 게 마지막이었다.“식당가는 것도 무서워요. 外國人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害코지 할 것 같고…. 혼자는 絶對 못 가요.”높아지는 障壁원곡동과 백운동은 國境으로 갈린 것 같지만 5年 前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過去 원곡 1, 2동이었다. 원곡동은 原曲本洞으로 불렸다. 2017年에서야 只今처럼 나뉘어졌다.백운동 地域 住民 數가 크게 늘었고, 數字로 나뉜 洞名을 整備해야 할 必要도 있었다. 여기에 원곡동에 線을 그으려는 輿論도 作用했다.“외국인이 많다는 원곡동에 對한 否定的 認識이 名稱을 바꾸는 데 影響을 미쳤죠.”(송바우나 安山市議員)障壁은 더 높아졌다.“원곡초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어요.”백운동 新築 아파트 入住民들은 入住 6個月 前부터 原曲初 配定에 反對하기 始作했다. 住民들은 京畿道安山敎育支援廳에 100件이 넘는 民願을 提起했다. 通學區域을 關山初까지 넓혀달라는 內容이었다.안복현 原曲初 校長은 學父母 說明會를 열었다. 移住背景 學生들은 韓國語 實力에 따라 水準別 授業을 하니 韓國 學生들 被害가 없다는 點을 알리고 싶었다. 韓國人 學生들이 惠澤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弘報하려 했다.하지만 安 校長은 그 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學父母들이 言聲을 높였다.“왜 그런 學校에 다녀야 합니까?”“학교 成績이 全國 몇 等인 거예요?”안 校長은 애써 準備한 說明 資料를 다 紹介하지도 못했다.교육지원청은 結局 지난해 7月 決斷을 내렸다. 新築 아파트 通學區域을 原曲初, 關山初로 指定했다. 學父母들은 둘 中 한 곳을 選擇할 수 있게 된 것. 新築團地 一部 洞에선 管山草가 가깝다는 理由에서였다. 管山草는 빈 敎室이 많지만, 原曲初는 隣近 再開發이 끝나면 過密學校가 될 수 있다는 點도 作用했다.신축 아파트 學父母들에겐 選擇肢가 두 곳이 됐다. 하지만 原曲秒에 入學한 아이는 單 한 名도 없었다. 原曲初 忌避 現象은 더 심해지고 있다. 原曲初 1, 2學年엔 주원이처럼 祖父母 때부터 韓國人인 學生이 單 한 名도 없다. 지난해 10月 基準 原曲初 學生 數는 總 449名. 이 中 移住背景 學生은 지난해 基準 98.6%, 443名이다.원곡동은 어떻게 이렇게 變했을까. 原曲初 앞에서 20年假量 文房具를 하는 洪某 氏(66)는 원곡동의 變化를 몸소 體感했다.“15년 前쯤부터 韓國人들은 漸漸 고잔동 같은 洞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移住勞動者들이 채웠죠. 그러면서 外國 아이들이 늘었어요.”사람들이 애들을 漸漸 적게 낳은 탓도 있었다. 隣近 工團 때문에 空氣가 나빠져 사람들이 떠난다는 얘기도 들렸다. 원곡동 外國人 住民 比重은 2012年만 해도 35%였다. 2021年엔 70%나 됐다.주민 이명자 氏(41)도 원곡동과 함께 컸다. 祖父母 때부터 원곡동에 산 土박이다. 自身은 勿論이고 딸, 아들까지 같은 원穀草를 나왔다. 명자 氏가 원穀草를 卒業한 時期는 1994年. 當時만 해도 원곡동은 安山의 中心이었다. 활기차게 돌아가는 半月工團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원곡동 中에서도 原曲初는 人氣 學群이었다.20년 뒤 큰딸이 入學할 때는 原曲初의 位相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原曲秒에 보낸다고 하면 다른 學父母들은 명자 氏를 ‘特異하다’고 했다.“거기 外國人 다니는 學巧잖아요.”“수준 떨어지는 學校에 왜 굳이 아이를 보내요?”명자 氏는 2018年 原曲初의 마지막 韓國人 學父母會長을 지냈다. 只今은 中國人 學父母가 會長을 맡고 있다. 명자 氏가 會長을 맡는 동안 韓國 學生들은 한 名, 두 名씩 轉學을 갔다. 反面 移住背景 學生들은 京畿 安山市 常綠區, 京畿 시흥시에서 애써 轉學을 왔다.국경 너머의 아이들 어른들이 만든 原曲의 國境. 이 너머의 世界를 原曲初 學生들은 卒業 後에야 接한다. 原曲初에선 自身과 비슷한 處地의 移住背景 學生들만 主로 만나기 때문이다. 卒業하면 學校 때와는 溫度가 다른, 차가운 現實과 마주한다.우즈베키스탄 國籍의 高麗人 피브키나 이리나(15·女)는 初等學校 2學年 때 父母님을 따라 韓國에 와 줄곧 원穀草를 다니다 2020年 卒業했다.초등학교 때는 適應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原曲初에는 러시아語를 하는 二重言語 講師가 있었다. 러시아語로 얘기할 親舊들도 많았다.“처음에는 韓國 애들이랑 놀았어요. 漸漸 러시아에서 온 親舊들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거의 러시아語 할 줄 아는 親舊들이랑 놀았죠.”이리나는 原曲初에서 韓國語를 못하는 親舊들에게 通譯士였다. 每日 두 時間씩 꾸준히 韓國語를 배운 結果였다. 6學年 때부터는 밴드部에 들어가 學校에서 公演을 했다. 防彈少年團의 ‘봄날’, 盧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기타로 쳤다. 밴드部 活動을 한 뒤부터는 學校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졌다. 親舊들과 기타를 치고 싶었다.이리나는 정든 원穀草를 卒業하며 韓國 學生이 더 많은 원곡중을 選擇했다. 지난해 3月 基準 원곡중의 移住背景 學生 比率은 17.8%다.“러시아 애들이 많은 中學校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韓國人이 많은 學校에서 韓國語를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하지만 이리나는 오히려 中學校에 오고 나서 말數가 더 줄었다. 韓國人 親舊와 親해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나의 中學校 親舊는 러시아系 아이들 네 名뿐이다.“같은 班 韓國人 親舊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韓國人 親舊들은 다른 班 애들이랑 親해요.”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韓國語가 늘기 힘들다.“선생님과 班 애들이 다 같이 있는 團體 채팅房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眞짜의 俗語)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學校에서 있던 일을 채팅房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그냥 글을 읽기만 해요.”공부도 漸漸 어려워졌다. 數學은 그나마 낫다. 우즈베키스탄에서 先行學習을 한 터였다. 하지만 어려운 單語가 많은 國語, 國史가 큰 問題다.“국어, 歷史는 머릿속에서 飜譯이 잘 안 돼요. 問題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解釋해봐야 해요.”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는 틈틈이 時間을 쪼개 美術學院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具體的인 計劃도 세웠다. 安山에서 高等學校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留學을 가 美術大學을 나오고 싶다. 大學을 마치면 韓國으로 돌아와 디자인 會社에 就業하고 싶다. 韓國에서 자랐으니 韓國에서 繼續 살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꿈이 漠漠하게 느껴진다.“제가 韓國 사람이 아니니 會社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공존을 試圖하는 사람들原曲初는 國境을 지우려 애쓰고 있다. 이리나 같은 아이들이 壁에 부딪히지 않도록.원곡초 數學時間엔 韓國語와 러시아語, 中國語가 들린다. 各 言語 講師가 該當 言語圈에서 온 學生들을 돕는다. 러시아語 擔當 김율리아 先生님(29)은 나눗셈 記號 等 中央아시아圈과 다른 韓國의 符號와 表記法 等을 가르친다.“한국어로 意思疏通에 어려움이 없는 學生이라도 數學問題를 理解하고 푸는 데는 도움이 必要할 때가 있어요. 그런 學生들을 돕기 爲해 協力授業을 進行합니다.”원곡초는 京畿道敎育廳이 指定한 多文化國際革新學校다. 移住背景 學生에게 韓國語와 母國語를 같이 가르친다. 韓國 定着을 도우면서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趣旨다.정서적 融合道 돕는다. 四物놀이와 民謠, 跆拳道와 테니스 授業을 한다. 밴드部를 따로 運營하며 藝體能 敎育에도 공들인다. 原曲初 安 校長은 藝體能 活動이 아이들 間 距離感을 좁힐 것으로 믿는다.“음악이나 運動은 말이 안 통해도 아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契機가 됩니다.”‘세계 飮食 體驗의 날’도 한달에 한番 運營된다. 給食 때 다양한 國家 飮食이 나오는 날이다. 감惠恩 原曲初 營養士는 아이들이 給食을 패밀리 레스토랑 外食처럼 반길 때마다 뿌듯하다.“친환경 式自在로 無償 給食을 한다고 얘기하면 아이들이 ‘왜 비싸고 좋은 걸 우리에게 주나요’라고 물어요. ‘여러분이 자라서 이 나라 國民으로 같이 健康하게 살라고 支援하는 거예요’라고 說明해주죠. 그러면 아이들이 ‘感動이에요’라고 해요.”원곡초 德에 5學年 제임스(假名·12)는 빠르게 韓國에 適應했다. 2019年 아버지를 따라 韓國에 왔을 때만 해도 韓國語를 한 마디도 못했다.하지만 제임스는 2年 만에 流星과 羅老號 發射에 對해 韓國語로 說明하는 ‘宇宙 少年’이 됐다.“과학자가 돼 宇宙를 硏究하고 싶어요. 學校에서도 科學 時間이 第一 좋아요. 重力이나 加速度 같은 어려운 表現은 유튜브로 豫習하고 있어요.”제임스의 동생 3學年 주디(假名·9)가 가장 좋아하는 場所는 學校 圖書館이다. 주디 亦是 水準別 韓國語 授業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韓國語 發音은 서툴지만 야무지게 表現한다.“음악 時間에는 아름다운 氣分이 들고, 體育時間에는 신나는 氣分이 들어요.”주디는 昨年까지 親舊들이 ‘놀자’고 말할 때 親舊들을 노려보기만 했다.“‘놀자’는 말을 ‘놀리자’로 알았어요. 날 놀리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젠 그 差異를 알아요. 그래서 親舊들이 많아졌어요.”원곡초에서도 어려움은 있다. 中國과 러시아系 아이들이 大多數를 이루며 다른 나라 아이들은 少數者가 됐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 제임스는 皮膚色이 다르다는 理由로 中國系 親舊에게 놀림 받았다.모국어로만 말하는 아이들은 韓國語를 배울 機會를 놓친다. 韓國人과 移住背景 學生이 골고루 섞인 學校에서 일하다 지난해 原曲秒에 온 한 先生님은 이 點이 憂慮스럽다.“한국 아이들이 一定 比率 以上이어야 外國 아이들도 韓國語를 배울 意志를 가져요.”교사들의 負擔도 加重된다. 러시아系 學生이 最近 急增해 164名이나 된다. 隣近에 러시아語로 韓國語와 數學을 가르치는 學院이 생겨날 程度다. 하지만 原曲初의 러시아語 二重言語 講師는 둘 뿐이다.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런 現象은 原曲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移住背景 學生이 곳곳에서 늘고 있다. 敎育部에 따르면 2021年 全國 初等學校 學生 中 4.2%가 移住背景 學生이다. 比重이 9年 前(1.1%)에 비해 4倍假量으로 늘었다. 實際로 原曲初 隣近의 安山署初等學校 亦是 지난해 基準 移住背景 學生이 全體의 折半 水準이다.중학교와 高等學校에서도 비슷한 現象이 벌어지고 있다. 安山 선일中學校도 移住背景 學生 比率이 50%를 넘었다. 安山國際비즈니스高等學校도 19%假量이 移住背景 學生이다.전국에서 비슷한 環境의 學校들이 原曲秒에 ‘共存 노하우’를 묻는다. 大邱의 新黨初等學校도 그 中 한 곳이다. 2018年 移住背景學生이 全體 學生의 折半에 조금 못 미쳤지만, 只今은 65%에 이른다.대구 新當初에는 隣近 성서工團에서 일하는 移住勞動者 子女들이 다닌다. 다른 洞네에서 新黨初로 遠距離 通學을 하기도 한다. 移住背景學生 學生들을 위한 맞춤型 프로그램이 있다는 所聞이 돌아서다.학교는 急激히 늘고 있는 移住背景 學生에 奔走하다. 시의적절하게 對應하기 어려울까 憂慮가 나온다.“언젠가 先生님들이 韓國語로 授業하기 어려워질까 봐 걱정이네요.”앞으로 人口가 줄며 外國人을 받아들이는 건 不可避하다. 只今 늘고 있는 移住背景 아이들은 그들의 2歲, 3歲를 낳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爲한 ‘共存 政策’이 必要할 때다.교육현장에서는 最大限 많은 學校에 移住背景 學生을 위한 制度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移住背景 學生들이 特定 學校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자꾸 한 學校에만 移住背景學生들이 몰리다보면 韓國人 學父母들이 該當 學校를 忌避하게 됩니다.”(안복현 原曲初 校長)“우리學校는 베트남 出身 學生들이 많아 自己들끼리 어울리며 베트남語를 主로 써요. 韓國 아이들과 어울릴 機會가 적다 보니 韓國語를 배우는 速度가 느려요.”(김진성 新當初 交感)안상규 安山瑞草 校監은 韓國語 豫備學校가 必要하다고 말한다.“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學生은 韓國語 豫備學校에서 韓國語를 가르친 뒤 一般 學校에서 授業을 들을 수 있도록 支援했으면 좋겠어요.”다문화 敎育 焦點이 移住背景 學生들에게만 맞춰져 있다는 點도 問題다. 旣存 韓國人 學生도 달라진 現實을 받아들이고 共存하도록 敎育해야 한다는 指摘이 많다. 地域社會가 國境을 긋지 않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인구의 27%가 移住背景 出身인 獨逸에선 一般 學校에 相互文化 敎育을 勸한다. 移住民에겐 獨逸 文化를 가르친다. 移民者가 늘어난 아일랜드도 2005年 初等學校부터 高等學校까지 水準別 相互文化 敎育 過程을 마련했다.국경은 如前히 그곳에 있다‘원곡초 마지막 韓國人 學父母會長’ 명자 氏는 原曲初 隣近에 工事 中인 新築 아파트 團地에 2023年 入住한다. 原曲初 바로 코앞에 있는 團地다. 原曲初에서는 期待도 나온다. 이 團地의 通學區域만큼은 原曲初에만 配定될 것이라고. 原曲秒에 韓國 學生이 늘면 共存이 더 可能하리라고.하지만 地域 住民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隣近 公認仲介業所에선 벌써부터 通學區域 變更 얘기가 나온다.“입주 時點에 住民들이 民願을 넣으면 아파트 通學區域이 關山初로 擴大될 거예요. 아파트 價格이 좀더 올라갈 수 있죠.”이 團地 再開發組合 關係者는 移住民 아이들이 오히려 轉學 갈 거라고 壯談했다.“통학구역이 바뀌지 않더라도 韓國 아이들이 많아지면 그 學校의 移住民 아이들이 轉學을 나가게 될 거예요. 1, 2年만 있으면 學校 雰圍氣가 (韓國人 中心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한국인과 移住民이 어울려 산다는 選擇肢는 좀처럼 어른들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國境은 如前히, 그곳에 있다.공존 - 두 番째 이야기 : 京畿 安山도, 移住民의 섬 1月 17日 公開願穀草 先生님들은 移住背景 學生들에게 適應의 ‘첫 단추’로 韓國語를 꼽는다. 하지만 移住背景 아이들은 韓國에서 나고 자라도 韓國語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조나단은 2016年 韓國에서 태어났다. 父母님은 인도네시아人이지만 조나단은 韓國을 떠나본 적이 없다. 5年 동안 ‘조나단의 世界’는 팔 뻗으면 世間이 손에 닿는 水原의 원룸이 全部였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만 繼續 거절당했다.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希望은 安山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水原으로, 水原에서 安山으로. 조나단의 父母님은 아들을 위해 ‘移住 속의 移住’를 敢行한다.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 ‘共存’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取材 : 李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記者▽動映像 編輯 :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記者▽프로젝트 企劃 : 위은지 記者▽사이트 製作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6
    • 좋아요
    • 코멘트
  • ‘安山이 故鄕’이라고 말하는 移住民들…그들과 韓國이 ‘우리’가 되려면[히어로콘텐츠/공존]

    外國人 比率 13%. 韓國에서 外國人이 가장 많이 사는 都市. 韓國 多文化의 메카. 移住民들의 江南. 京畿 安山. 安山 移住民들은 말한다. ‘내 國籍은 安山’이라고. 安山의 土壤에서 移住背景의 다양한 韓國人이 자란다. 누군가는 ‘眞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海兵隊에 가고, ‘韓國人의 條件’을 채우려 就業 代身 大學 進學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拒否에 單칸房에 갇혀 살다 言語를 잊고 26年을 異邦人처럼 살며 三代 家族을 이룬다.외국인 比重이 5% 以上이면 ‘多文化社會’로 불린다. 案山은 이 比重을 2008年 넘겼다. 2008年 韓國에서 多文化 地域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第 2, 第 3의 安山이 생겨나고 있다. 2020年, 코로나19 擴散에 國內 外國人이 史上 처음 줄었다. 中小企業 10곳 中 6곳은 生産에 蹉跌이 생겼다. 農家 일손 不足에 農産物 값이 치솟았다. 移住民과의 共存은 避할 수 없는 未來다. 果然 韓國은 共存할 準備가 되어 있을까. 取材팀은 지난해 8~12月 ‘案山인’ 100餘 名을 만났다.동아일보는 創刊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부터 持續的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番 히어로콘텐츠 ‘共存’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價値와, 境界를 허무는 디지털 技術을 融合한 差別化된 報道를 志向합니다. 旣存에 經驗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特化 報道는 히어로콘텐츠 專用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取材 : 李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寫眞·動映像 取材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記者▽動映像 編輯 : 남건우 記者 박세진 디지털콜라팀長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記者▽프로젝트 企劃 : 위은지 記者▽사이트 製作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記者 hcshi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남건우 記者 woo@donga.com}

    • 2022-01-16
    • 좋아요
    • 코멘트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