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희|記者 購讀|東亞日報
김재희

김재희 記者

東亞日報 DX本部

購讀 27

推薦

엔터테인먼트 業界를 取材하는 放送·映畫 擔當 記者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記事 안에 담겠습니다.

jetti@donga.com

取材分野

2024-03-28~2024-04-27
文化 一般 55%
人物/CEO 7%
産業 3%
檢察-法院判決 3%
패션 3%
音樂 3%
社會一般 3%
人事一般 3%
기타 20%
  • 演技人生 50年, 두리랜드 33年 俳優 임채무 “餘生은 醫療奉仕 다니며 살고 싶다”[복수자들]

    日日連續劇, 週末드라마 안房劇場의 ‘탤런트’로 50年, 運營할수록 損害가 더 큰 놀이公園 ‘社長님’으로 33年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나이는 七旬을 넘었습니다. 人生 後半部 餘生은 40年 前 품었던 宿願을 이루며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올해 데뷔 50周年을 맞은 俳優 임채무(75)의 이야기입니다.40년 前, 全國을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다녔던 10年 차 俳優 임채무에겐 所願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山間僻地에 醫療奉仕를 다니는 것. 40年 前이나 只今이나 都市로부터 한참 떨어진 시골의 醫療 인프라는 劣惡합니다. 限平生 농사짓느라 몸을 쟁기처럼 써왔던 어르신들 大部分 무릎과 허리에 골病이 들었지만 제때 治療를 받기란 어려웠습니다. 시골엔 큰 病院이 없었던 탓에, 診療라도 받으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지만 交通便도 如意치 않은 곳이 大部分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歲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을 지켜볼 時間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이 나이가 됐다”는 임채무. 七旬이 넘은 나이, 子息이 子息을 낳아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後에야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4月부터 自身의 이름을 내건 藝能 ENA ‘임채무의 浪漫닥터’를 進行하게 된 겁니다. ‘임채무의 浪漫닥터’는 移動治療所 車를 타고 다니며 全國 各地를 찾아 醫療奉仕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早晩間 시즌2 撮影을 앞두고 있습니다. 임채무는 이番 시즌에서도 出演料를 받지 않습니다. “늘그막에 奉仕한답시고 始作했지만 結局 내가 얻는 게 더 많더라”는 그를 最近 景氣 楊州의 두리랜드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2 撮影을 앞두고 계십니다. “(시즌1 撮影 때) 7個月 동안 20個 넘는 邑面리 시골을 다녔어요. 가서 보니까 어르신의 99.9%가 무릎, 허리는 基本으로 故障이 나 있는데 病院을 안 가시는 거예요. 왜 안 가시느냐 물으면, 마을 交通便이 아무리 좋아도 아침에 한 番, 저녁에 한 番 아니곤 버스가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理由는 시골엔 病院이 없잖아요. 病院 가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고 겨우 豫約을 하면 患者가 워낙 몰리니 診療도 미뤄지고…. 그러다 보면 버스가 끊겨서 집에 오기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귀찮다’ 하면서 病院을 안 가는 거죠.”―의료봉사 하겠다 마음 먹으신 게 40年 前이시라고요. “全國 各地를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하고 夜間 業所나 地域 祝祭에서 行事 뛰던 時節이에요. (시골의 醫療施設이) 그때는 只今보다 훨씬 劣惡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나이 들면 시골로 醫療奉仕를 다니며 살아야겠다고요. 어르신들 治療도 해드리고 맛있는 飮食도 먹여드리고 싶다. 診療 椅子, 醫療器具, 寢臺, 冷藏庫 같은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한 臺 있으면 참 좋겠다. 構想만 한 게 아니라 實際로 해보려고도 했어요. 故 김우중 대우그룹 會長님이 도와주려고 하셨어요.”―김우중 會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當時 演藝人들로 이뤄진 ‘無窮花 蹴球團’이 있었어요. 그때 金宇中 會長이 우리 蹴球團을 支援해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大韓民國 公務員들, 特히 警察, 市廳, 區廳 公務員들이 運動할 時間이 없어서 運動을 못 한다고 하더라. 억지로라도 運動을 해야 몸도 精神도 健康해진다. 有名한 演藝人들이 親善 蹴球大會 하자고 하면 運動하러 나올 것이니 公務員들 불러내서 같이 運動하라.’ 나라와 國民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었어요. 참 尊敬하고 좋아했죠. 私席에서 會長님을 뵐 機會가 있었는데 그때 醫療奉仕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어요. 當時만 해도 (제가) 人氣가 좋았을 때니 팬클럽 會員들이랑 奉仕活動 다니고 싶은데 醫療 車輛 한 臺灣 寄附해줄 수 있냐고 여쭤봤죠.”―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나 欣快히 알겠다고 하시더니 바로 祕書室長을 불러서 이것저것 指示를 하시더라고요. 計劃도 다 세우고 이런저런 計算도 끝내고 기다리는데, 나중에 祕書室에서 連絡에 왔어요. 當時 金額으로 醫療 車輛 製作에만 2億 원이 넘게 들어가는 거예요. 法人 會社에서 個人에게 無償으로 줄 수 있는 方法이 없었어요. 法的으로 問題가 될 수 있던 거였죠. 아쉽지만 抛棄할 수밖에 없었어요.”배우 生活을 하며, 두리랜드를 運營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게 된 건 比較的 最近이었습니다. ‘9988 整形外科醫院’ 이태훈 院長과 獨特한 因緣이 始作되면서부터입니다. 整形外科 專門醫인 이태훈 院長은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1 때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태훈 院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이태훈 院長이 運營하는 ‘9988 整形外科醫院’을 보고 누가 나한테 提報를 했어요. 제 노래 ‘9988 내 人生’ 題目을 베껴서 病院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는 거예요. ‘9988 내 人生’은 2018年에 제가 直接 만든 曲이에요. ‘99歲까지 팔팔(88)하게 살아서 子息 속 썩이지 말자’는 뜻을 담은 曲인데, 이태훈 院長이 許諾도 없이 ‘9988’을 갖다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매니저한테 ‘잘됐다. 著作權 엄청 뜯어내자’ 해놓고 잊어버렸어요.(웃음) 그러고 한참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거예요. 治療를 받아야 해서 어느 病院을 갈까 했는데, 매니저가 9988 病院에 가자고 했죠. 當時 狀況이 危急해서 바로 手術하고 治療도 잘 받았어요. 그러고 이태훈 院長이랑 食事를 했는데 슬쩍 著作權 이야기를 꺼냈죠. 이태훈 院長은 ‘9988’은 自己가 2017年부터 썼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더니 ‘先生님이랑 家族분들 平生 整形外科 診療는 제가 無料로 해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건 됐고 나랑 醫療奉仕하러 다니자’고요.”―촬영이긴 하지만 7個月 동안 每週 奉仕를 다니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나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每週 全國 各地를 다니다 보니 疲困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率直히 있어요. 근데 이걸 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남의 人生을 들여다본다는 게 참 즐거운 日이더라고요. 80歲, 90歲, 100歲까지 健康하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술 담배 적게 하고 飮食 잘 챙겨 먹는 것보다 肯定的이고 樂天的으로 사는 게 가장 重要하더라고요. 慶北 義城에 사는 87歲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분은 아침 10時에 막걸리 半甁, 午後 4時에 막걸리 半甁을 每日같이 마셔요. 막걸리가 거의 株式이야. 근데도 나보다 기운이 훨씬 더 좋아요. 樂天的인 마음으로 즐겁게 사니까.”시골 老人들의 樂天的인 삶을 憧憬한다고 했지만, 事實 임채무는 누구보다 ‘樂天的인 夢想家’에 가깝습니다. 30年 넘게 京畿 楊州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公園 ‘두리랜드’를 運營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企業이 아닌 個人이 놀이公園을 運營하는 건 임채무가 唯一합니다. ‘두리랜드’를 만들어야겠다 決心한 건 1973年 京畿 楊州의 史劇 撮影 現場. 端役을 轉轉하던 無名 俳優 임채무는 自身의 撮影 順序를 기다리다 隣近 溪谷에서 놀던 家族을 發見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엔 깨진 술甁이 흩어져 있고 高聲放歌를 하는 어른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安全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10餘 年이 지난 1989年 그때 그곳에 짓기 始作한 ‘두리랜드’는 1990年 5月 門을 열었습니다.―30년 가까이 두리랜드엔 담도 없고 入場料도 없었다고요.“원래부터 入場料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원씩 받았어요. 門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데려온 父母가 門 앞에 서있는 거예요. 아이는 들어가겠다고 울고, 帽子를 푹 눌러쓴 아버지의 주머니에선 銅錢 소리만 들렸죠. 入場料 때문에 難處한 것 같았어요. 다음 날 職員 불러서 入場料 없애자고 했죠.”1990년대는 그가 CF, 드라마, 夜間 業所에 出演해서 돈을 벌었을 때입니다. 放送에 나가 번 돈이 놀이동산 賣出의 두 倍가 넘었습니다. 私費를 털고 私財를 팔아 職員들 月給을 줬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事情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불러주는 放送도 많이 줄었습니다. 經營 危機로 두리랜드는 2000年代 初 閉場했다 2009年 재개장했습니다. 以後에도 ‘入場料 0원’을 固守하던 두리랜드는 2020年부터 入場料를 받기 始作했습니다. ―入場料를 받으시면서 辱을 많이 먹었다고요. “여태 안 받다가 다 늙어 돈毒이 올랐냐고 辱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돈 받지 말고 다음 달에 門 닫을까요?’라고요. 제가 예전에는 夜間 業所도 다니고 CF, 드라마 撮影도 많았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只今은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근데 電氣稅나 稅金, 人件費에 每달 利子만 7千萬 원이 넘어요. 두리랜드가 亡하면 안 되잖아요. 亡하는 거 막기 위해 入場料를 받게 됐어요.”―두리랜드 運營하느라 생긴 빚이 160億 원이라고 들었어요. “IMF 外換危機 때는 正말 어려웠는데 그래도 入場料 안 받고 運營하겠다는 原則을 固守했어요. 근데 90年代만 해도 人氣 있었던 回轉木馬, 바이킹, 범퍼카 같은 아날로그 놀이器具는 아이들이 더 以上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엔 微細 먼지와 黃沙 때문에 엄마들이 바깥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걸 꺼리잖아요. 그래서 롯데월드처럼 室內 施設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2017年 末에 두리랜드를 닫고 2018年부터 新築 工事를 始作했죠.”VR 같은 새로운 놀이器具를 들여오고 室內 施設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演藝人 임채무의 輸入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結局 汝矣島에 있는 아파트 두 채를 팔았고 子女들 마이너스 通帳까지 끌어 썼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두리랜드는 再開場했지만 정작 그와 夫人이 잘 곳도 如意치 않았습니다. 두리랜드 안 化粧室을 改造해 一 年 넘게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第一 未安하고 고마울 따름”이라며 “두리랜드는 돈 벌려고 運營하는 게 아니다. 빌린 돈 갚으려고 이제 와 入場料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벌었던 돈도 다 쏟아부으시고 빚도 많으신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理由가 뭔가요? “이제 이게 내 삶이에요. 便하게 살 수 있는데 大體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答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어른들을 만나면 이 사람은 나한테 뭘 願할까, 뭘 바랄까를 苦悶하게 돼요. 근데 아이들은 달라요. 아무 計算 없이 웃고 울고 나한테 안겨서 人事도 해주고요. 그런 아이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죠. 가끔 놀이公園에서 만나면 父母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人事를 시켜요. ‘여기 만들어주신 분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正말 感謝하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記者 jetti@donga.com}

    • 2023-06-03
    • 좋아요
    • 코멘트
  • “나는 얼굴마담 아닌 ‘GOAT’”…‘충주시 弘報맨’ 김선태[復讐者들]

    “충주시 얼굴마담이라고요? 저는 고트(GOAT)죠.” 2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 一日 記者 體驗을 온 忠北 충주시 弘報擔當官室의 김선태 유튜브運營專門官(36·主務官)의 말입니다. 忠州의 特産物, 次期 忠州市長 候補(?)…. 김선태는 現時點 反駁 不可한 大韓民國 弘報界 ‘고트’(The Greatest Of All Time·特定 分野 歷史上 最高의 人物)입니다. 2019年 조길형 忠州市長의 勸誘로 혼자 始作한 ‘충주시’ 유튜브는 4年 만에 購讀者 36萬 名을 모았습니다. 3年 前 ‘管짝춤’을 패러디한 ‘生活 속 距離두기’ 弘報 映像 照會數는 852萬 回(19日 基準)에 達합니다. ‘김선태 德에 忠州市長 이름을 외웠다’ ‘유튜브를 보고 처음 忠州 旅行을 다녀왔다’는 댓글이 줄을 잇습니다. 弘報界 ‘고트’에게 브레이크란 없습니다. 충주시議會 速記職員에게 “말한 거 빼달라는 議員님은 없었는지”를 묻고, 保健福祉部 長官에게 “國務會議에 遲刻한 長官은 없었나요?”라며 ‘맑은 눈’으로 直球를 던집니다. 線 넘는 質問들이 不便하지 않은 건 忠州를 사랑하는 그의 眞心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忠州를 잘 모르는 게 너무 속상했다”는 그는 샘 스미스의 ‘Unholy’ 舞臺衣裳을 입고 忠州市 上水源保護區域 關聯 規制를 緩和하는 中部內陸特別法을 通過시켜 달라며 춤을 춥니다. “어제도 마 느그 署長이랑 다 했어”라며 書類를 던지고 半말을 내뱉는 眞相 民願人으로 熱演해 地方職 公務員의 苦衷을 愉快하게 풀어냅니다. 조길형 忠州市長을 ‘길型이 兄’이라 부르고, ‘歸省길 레전드’ 짤을 패러디한 7秒짜리 映像 照會數가 153萬 回를 記錄하는 ‘고트’가 되기까지는 苦衷도 많았습니다. 上司가 企劃案 決裁를 내주지 않거나, 올라간 映像을 지우라고 指示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企劃, 撮影, 編輯을 모두 도맡아 하는 負擔도 컸습니다. 그때 꺾였다면 只今의 忠州市 ‘弘報맨’은 없었을 것입니다. 週末에 企劃案을 올리고 決裁가 나기 前에 撮影하는 ‘先 撮影 後 報告’를 擇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는 質問에 이런 答이 돌아옵니다. “成功하는 길과 亡하는 길이 明確한데 亡하는 길로 가라는 指示를 참을 수 없었다. 내 方式이 옳다는 걸 證明하고 싶었다.”선을 넘다 못해 지워버린 김선태 專門館을 이 만났습니다. “2年 뒤에는 유튜브를 그만 하겠다”는 그의 爆彈 發言을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72RkSPg9p4E)에서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26日 午後 4時 公開되는 2部에서는 막내記者 一日 體驗을 한 김선태 專門觀이 ‘東亞日報 유튜브 購讀者 10萬 名 達成 方法’ 會議에 參與한 現場도 公開됩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有名한 公務員이시죠?선출직 公務員을 除外하고는 제가 最高의 스타죠. 事實 選出職度 이제 可能할 것 같습니다. 忠州市長 出馬요? 于先 公薦을 받아야 하겠죠? ―高卒이라는 所聞은 事實인가요? 亞州大 e-비즈니스學部를 다니다 2學年 때 中退했습니다. 前 文科라 微積分을 배운 적도 없는데 微積分을 英語로 가르치는 거예요.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 工夫를 놨어요. ―그때부터 司法考試를 準備하신 건가요?중퇴 後 6年 동안 司法考試를 準備했습니다. 大學 時節 法 關聯 敎養授業을 들었는데 재밌었어요. 제게 ‘리걸 마인드’가 있다고 判斷했죠. 신림동에서 自炊를 하면서 四時를 準備했는데요, 工夫라는 게 오래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신림동에 PC房이 많거든요. 兄들이랑 게임하면서 PC房에 1500萬 원 程度 썼습니다. 그러다 로스쿨이 생기면서 司法考試가 廢止됐어요. 司法考試와 저는 因緣이 아니었나 봅니다. ―大學校를 自退하고 6年 동안 挑戰한 司法考試에 失敗했을 때 많이 落心하셨을 것 같아요. 後悔를 別로 안 하는 便이에요. 司法考試를 그만뒀을 땐 더 以上 餘恨이 없었어요. 法曹界 近處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司法考試에 失敗하면 法院 公務院으로 많이 가는데 저는 아예 새로운 곳으로 가자는 마음이었어요. 法院에 就職을 했는데 거기서 判事들을 마주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繼續하게 될 것 같았어요. 스스로 悲慘해질 것 같아서 一般行政職 9級으로 試驗을 봤죠. ―2018年 忠州市廳 弘報팀의 SNS 擔當者가 된 後 이듬해 조길형 忠州市長의 勸誘로 유튜브를 始作하셨어요. 유튜브 運營 途中에 때려 주고 싶은 上司가 있었다는 게 事實인가요?올라간 映像을 내리라거나, 이미 製作이 끝난 映像을 올리지 말라는 上司가 있었어요. 火曜日 午後 6時에 無條件 映像을 올리는 건 購讀者와의 約束이잖아요. 그 上司는 유튜브에 對한 理解가 全혀 없었던 거죠. 2019年 채널 開設 後 4年째 地自體 유튜브 中 購讀者 數 1位를 지키고 있는데도 昨年까지 鬪爭을 해야 했어요. 이 程度 成果를 냈으면 믿고 맡겨야 하는데 繼續 證明을 要求하더라고요. 自律을 얻는 過程에서 衝突이 있었지만 只今은 全權을 가지고 있습니다.―상사의 말에 따르는 게 責任을 면하는 方法이기도 하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鬪爭해서 B級 유튜브 콘텐츠를 만드신 건가요?저도 처음부터 使命感에 가득 찬 反骨은 아니었어요. 事實 職場은 돈을 버는 手段인 곳이죠. 그렇지만 제게 주어진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유튜브를 어떻게 하면 成功하고, 어떻게 하면 亡할지 正確히 보이는데 자꾸 亡하는 길로 가라고 하는 指示를 참을 수 없었어요. ‘내가 上司의 指示는 따르지 않지만 반드시 내 方式이 맞다는 걸 證明하겠다’는 確信이 있었어요. 그리고 實際로 證明해냈고요. ―當時 本人이 생각한 ‘明確한 成功의 길’은 무엇이었나요? 地方自治團體 유튜브 콘텐츠 照會數가 너무 안 나오더라고요. 가장 甚한 境遇 照會數 2回인 것도 봤어요. 그 理由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죠. 視聽者 타깃을 全國民으로 잡아서 누구나 재밌게 볼 수 있는 映像을 만들고자 했어요. 大部分의 地自體 유튜브는 本人 地域의 일, 住民들이 소꿉장난 하는 것만 올리니 사람들이 안 봤죠. 저는 그 反對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萬若 本人 같은 後輩가 있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요즘 스스로 자주 다짐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제가 팀長이 된다면 전 아무 소리도 안 할 거예요. 끝까지 해봤는데 成果가 안 나올 수도 있죠. 人事異動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그 後輩가 할 수 있는 것을 最大限 밀어줄 겁니다. 組織에서 별난 아이디어가 採擇되지 않는 理由는 商社 한 두 名의 問題일 수도 있지만 組織 全體의 雰圍氣가 발목을 잡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저 팀員은 저렇게 두다간 큰일 난다”고 上司에게 怯을 주는 목소리들이 많겠죠. 그런 雰圍氣에 동조되지 않는 것도 重要한 것 같습니다. ―組織에서는 協業을 잘하는 職員을 選好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協業을 嫌惡합니다. 特히 유튜브 製作 같은 創意的인 業務는 혼자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企劃한 本人만이 그 콘텐츠를 正確하게 理解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企劃부터 演出, 編輯까지 正確하게 本人의 意圖대로 가야 하는 거거든요. 雜商人이 많으면 콘텐츠의 포인트를 살리기 어려워집니다. 힘들긴 하지만 企劃者의 意圖를 100% 살리기 위해서는 혼자 하는 게 가장 좋아요. ―組織에서 미움을 받는 캐릭터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워할 수밖에 없죠.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는 無條件 辱을 먹을 可能性이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注目도 받는 거죠. 第 유튜브 成功의 裏面이라고도 생각해요. 남들과 다르게 했기에 辱을 먹고, 그래서 유튜브가 잘될 수 있었던 거죠. 內外部敵으로 傷處 안 받으려고 멘탈 管理를 하고 있어요. 웬만하면 惡플度 안 읽으려고 하고요. 2019年 4月 ‘市長님이 시켰어요! 忠州 公務員 브이로그’를 始作으로 4年째 유튜브를 運營하고 있는 김선태는 “2年 뒤 유튜브를 그만하겠다”는 爆彈 發言을 했습니다. 次期 忠州市長 候補로 出馬하려는 計劃일까요? 그가 가장 재밌게 보고 있다는 유튜브 ‘沈着맨’ 메인 PD 자리를 노리는 걸까요? 全部 아닙니다. 올해 서른여섯의 그는 漸漸 ‘에이징 커브’를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Z世代가 재밌어하는 것이 왜 재밌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는 “내려놓을 줄 아는 勇氣도 必要하다”고 말합니다. ―유튜브는 언제까지 하실 생각인가요? 最大 2年 봅니다. 왜냐하면 ‘에이징 커브’(스포츠 스타들이 나이 듦에 따라 身體 能力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成績이 下落하는 現象) 이슈가 있어요. 요즘 젊은 親舊들의 感覺을 못 따라가겠어요. 例를 들어 에버랜드 아마존 익스프레스 알바生 ‘소울리스座’가 全 재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슬슬 젊은 親舊들이 재밌어하는 것에 ‘이게 왜 재밌지?’라는 疑問이 들기 始作한 거죠. 그래서 내려놓을 줄 아는 勇氣도 必要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本人을 正確하게 알아야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年 뒤에는 政治權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視角이 많아요. 最近에는 元喜龍 國土交通部 長官室에서 政策補佐官 자리 提案도 받으셨잖아요. 中央部處와 政黨, 私企業 等 7~8곳에서 移職 提案을 받았어요. 月給이 只今보다 2倍 더 높은 곳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안 가는 理由는 眞情性 때문이예요. 節 스카웃하려는 機關은 제가 그 機關에서 유튜브 弘報를 하길 願하잖아요. 충주시를 알려오던 제가 다른 部處에 가서 그곳을 弘報한다면 果然 眞情性이 느껴질까요? 저는 이제 忠州市 유튜브와 뗄 수 없는 關係가 됐다고 생각해요. 제가 創始者이기도 하니까요. 하하하. ―事實 돈도 眞情性만큼이나 重要하잖아요. 眞情性은 돈에서 나올 수도 있는데, 月給 2倍를 더 준다고 해도 忠州市廳에 남으신 걸 보면 或是 金수저이신가요?금수저 썰도 있었습니다만, 平凡한 집에서 자랐어요. 父母님 두 분 다 先生님이셨어요. 제가 忠州를 宏壯히 좋아해요. 제가 서울에서 生活을 오래 했는데 忠州의 認知度가 낮은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내 故鄕에 對해 다른 사람들에게 全혀 이야기를 못 하겠는 거예요. 說明이 길어지기도 하고 大部分 淸州랑 헷갈려 했고요. 只今 제가 하는 일로 忠州를 알리는 것에 보람이 큽니다. 꼭 報酬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제가 忠州에 寄與하고 있다는 게 기뻐요.―대한민국 모든 組織 上司들에게 한 마디?時代가 바뀌고 있습니다. 後學 養成에 神經 쓰셔야 해요. 너무 意見을 많이 내면 안 좋습니다. 指示가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本質이 흐려져요. 後輩들에게 機會를 많이 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5-20
    • 좋아요
    • 코멘트
  • 英語 講義 挑戰하는 스타講師 김미경 “只今도 새벽 4時 半 氣象”[復讐者들]

    毒舌과 慰勞가 섞인 動機附與, 自己啓發 講義로 有名한 스타講師 김미경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代表(58)에게도 20年 넘는 無名(無名) 時節이 있었습니다. 廣告會社 職員, 피아노學院 院長을 거쳐 20代 後半이 되어서야 ‘企業 講師’ 일을 始作한 그는 한참 동안 이름 없는 講師로 살았는데요. 모든 걸 다 이뤘을 것 같았던 ‘40代 김미경’李 實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不安하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唯獨 고단한 40臺를 보낸 그가 ‘成功 强迫’ ‘完成 强迫’에 갇힌 40臺를 慰勞하는 冊을 냈습니다. 올 2月 出刊한 新作 ‘김미경의 마흔授業’입니다. 出刊 2個月 만에 累積 販賣 部數 15萬 部를 記錄했을 程度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김미경이 많은 世代 中에서도 40代를 위한 冊을 쓴 理由가 궁금했습니다. 또 그의 40代는 어땠는지도요. 궁금症을 解消하기 위해 동아일보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김미경을 만났습니다. 40代를 위한 김미경의 助言(https://youtu.be/gI5Sfc9LQRg)과 2030世代를 위한 김미경의 苦悶相談(https://youtu.be/Bv6cLfuUytA)을 東亞日報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先生님의 40代는 어떠셨나요?“40대의 前 無名 講師였고 집 한 채 없이 가난했고 세 아이 돌보며 講義 다니느라 늘 時間에 허덕이던 사람이었어요.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손에 쥔 件 없었어요. ‘아트 스피치’ ‘언니의 毒舌’ 같이 有名稅를 가져다 준 著書는 모두 40代 後半이 되어서야 나왔어요. 講義를 始作한 건 29살이었으니까 18年間 말 그대로 이름 없는 講師였어요.”공자는 40歲를 不惑(不惑)이라고 불렀습니다. 世上일에 眩惑되어 갈팡질팡하거나 判斷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어, 스스로 判斷하고 스스로 自身의 길을 가게 됐다는 意味입니다. 예로부터 40代는 20, 30代 努力했던 것을 報償 받고 完成하는 時期로 알려졌습니다.―성과 없는 無名의 40臺를 어떻게 버티新 건가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난 알잖아요. 努力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아줄 때까지의 時間과 내가 나를 알아주는 時間이 다른 것뿐이죠. 甚至於 남들이 늦게 알아봐줄수록 좋아요. 實力이 아주 많이 쌓이거든요. 10年 努力한 것보다 18年 努力하니 實力이 훨씬 많이 쌓였던 거예요. 無名 時節을 努力하며 보냈기에 40代 後半에 이르러서 認知度가 생기고 有名해진 거죠. 누구에게나 無名의 時代는 있어야 해요. 謙虛한 態度로 實力을 쌓을 期間이 必要하니까요.”―정신적으로 힘들진 않으셨나요?“왜 안 힘들었겠어요.(웃음) 40代가 되면 異常하게 마음이 고3처럼 되는 거 아세요? 다 커버린 것 같고 다 산 것만 같아요. 고 1,2 때 熾烈하게 工夫하다 高3이 되어 修能을 치고 나면 人生이 다 끝나버린 것만 같은 氣分이 드는 거죠. 고3처럼 40代가 되면 20, 30代 努力한 人生의 成果가 나야 하는 느낌인 거예요.많은 사람들이 40代가 되면 年俸도 높고 집도 貸出 없이 한 채는 가져야 하고 커리어 部門에서도 頂點을 찍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50代 以後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것마냥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40大寒테 50代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면 ‘거기 사람 사는 데예요?’ 이런 視線으로 봐요.(웃음) 40臺가 지나면 어떤 希望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게 絶對 아니거든요. 절 보세요. 50代부터 有名해졌어요. 財産의 大部分을 50代에 벌었는걸요.”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職業的 成功을 거둔 그가 ‘動機附與 講師’라는 職業을 갖게 된 건 29살 때였습니다. 그는 元來 音樂徒였습니다. 연세대 作曲科를 卒業했고 廣告 會社에서 CM송 製作하는 일을 했으며 피아노學院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그 時節, 音樂을 專攻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엄마 德分이에요. 邑內에서 작은 洋裝店을 손수 運營하셨는데 그 德에 제가 시골에서 大學에 갈 수 있었어요. 우리 엄만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自己 人生을 開拓하기 위해 스스로 努力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밀어줬어요. 같은 子息이라 할지라도 더 努力하는 子息을 좋아했죠. 그래서 제가 音大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가 죽어라고 벌어서 學費 대줄게’라고. 大學 入學했을 때 엄마는 너무너무 기뻐하셨죠.”―음대 卒業 後 어떤 일을 하셨나요?“대학 卒業 後 廣告 會社에 들어가서 CM송 作曲하는 일을 맡았어요. 근데 一年 半도 못 다녔어요. 組織生活이 안 맞더라고요. 모두가 같은 時間에 出勤하고 退勤하잖아요. 모두가 定해진 돈을 받는 것도 싫었고요. 왜 7時에 退勤해야 하나? 난 12時까지 일하고 3倍 벌고 싶은데 같은 생각을 했어요. 結局 會社 그만두고 집에 피아노 한 臺 갖다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근데 아이들이 漸漸 늘어나는 거예요. 아예 學院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죠.”―처음 事業을 始作하신 거네요.“학원을 차리려면 돈이 必要할 거 아니에요. 처음엔 資本金이 없어서 銀行에서 貸出을 받았어요. 貸出金이 많으니 잠이 안 오더라고요.(웃음) 貸出은 많이 받았는데 院生들은 많이 없었으니까요.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새벽 4時 半이면 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於此彼 잠이 안 오니 學院에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한동안 새벽 出勤했어요.우리 엄마 따라한 거였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벽 祈禱를 다녔던 엄마가 그러셨거든요.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서 念願을 해’ 宗敎가 없는 저는 祈禱는 안 하고 아이들을 많이 오게 할 方法을 窮理하러 아침 일찍 學院에 나갔어요.” ―새벽 4時 半부터 피아노學院에 가서 뭘 하셨나요?“처음엔 새벽에 學院 나가서 어떤 行動을 하기보다는 걱정하는 데에만 時間을 쓰는 거예요. 걱정만 하면 解決은 하나도 안 되잖아요. 代身 念願하는 마음으로 엄마들에게 便紙를 쓰기 始作했어요. 아이들 寫眞을 하나하나 두고 ‘내가 當身의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피아노를 예쁘게 잘 치는지’에 對한 내 생각을 便紙로 써서 엄마들한테 보냈거든요. 便紙에 感動한 엄마들이 所聞을 내기 始作했고 1年 半 만에 學生이 200名으로 늘었죠.”업계에는 所聞이 쫙 났습니다. 28살 女性이 어떻게 學院 經營을 이렇게 잘하느냐는 거였죠. 어느 날 그는 피아노 學院 院長들 세미나에 講師로 招請을 받게 됩니다. ―‘講師 김미경’의 첫 데뷔였네요.“성공 事例를 發表해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當然히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講義를 해 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있는 이야기를 便하게 해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講義計劃書를 만들었어요. 내가 왜 새벽 4時 班을 擇했는지, 4時 半에 일어나서 5時間 동안 뭘 했는지, 便紙를 쓰면서 뭘 느꼈는지, 學院에 안 오는 學生들을 어떻게 管理했는지 써내려갔죠. 當然히 反應은 暴發的이었어요.(웃음) 새로운 꿈이 생기더라고요. 講義로 먹고 사는 職業을 갖고 싶다고요.”인터넷이 없던 時節, 새로운 꿈이 생긴 그는 ‘가르치는 걸로 먹고 사는 職業’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書店으로 向했습니다. 어떤 冊에서 그는 ‘企業 講師’를 發見하게 됩니다. 只今은 動機附與 講師의 母胎가 된 職業입니다.―피아노 學院을 熱心히, 또 잘 運營하셨기 때문에 講師가 될 수 있었던 거네요.“살면서 느낀 건데요, 一旦 臨界點을 넘겨야 해요. 뚜껑이 열릴 때까지 부글부글 끓어서 부풀어야 해요. 一旦 뚜껑이 열린 後엔 3가지가 넘는 다른 機會로 連結돼요. 萬若 제가 글을 쓴다고 생각해봐요. 글 分野에서 어느 程度까지 무르익으면 뚜껑이 열리겠죠? 그럼 豫測하지 못했던 다른 分野의 韻들과 連結이 되는 거죠. 근데 뚜껑이 열리지 않고 덮여 있잖아요? 그럼 아무 機會도, 可能性도 생기지 않아요.”40대 後半 여러 베스트셀러를 쓰고 本人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進行했을 程度로 스타講師로 成功했던 그에게도 試鍊은 있었습니다. 講義料가 主 收入源이었던 그에게 팬데믹 期間은 酷毒했습니다. 오프라인 講義가 줄줄이 取消되면서 한 달 講義料가 0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所謂 말해 잘나가다 고꾸라진 거잖아요. 衝擊이 크셨을 것 같아요.“몇 個月間 通帳에 0원이 찍히더라고요. 너무 놀라고 걱정되고 힘들었어요. 그때도 피아노 學院 차렸을 때랑 같았어요. 돈 버는 方法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돈을 버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돈이 움직이는 方向을 살펴보면 돼요. 사람보다 돈의 速度가 훨씬 빠르거든요. 팬데믹 3年 동안 빅테크 企業 株價가 확 올랐잖아요. 全 世界 돈이 그리로 모인 거죠. AI, 블록체인, NFT…. 모두 팬데믹 때 急激하게 成長했어요. 돈이 가리키는 方向이 디지털 分野인 거예요. 그러던 中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轉換)’이라는 槪念이 머릿속에 박혔고 그때부터 工夫를 始作했어요.”팬데믹을 겪기 前까지만 해도 그는 카카오톡 外엔 使用할 수 있는 SNS가 없었다고 합니다.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한참 걸릴 程度로 그의 디지털 리터러시는 最下 水準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接한 後 코딩을 배우기 始作했습니다.―실행력이 엄청나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코딩은 배우기 어렵잖아요.“공부가 實行力 있을 게 뭐 있어요. 그냥 하면 돼요.(웃음) 關聯 冊을 사고 映像을 보는 거죠. 배운 知識을 제 일에 適用하기로 했어요. 오프라인에서 했던 모든 講義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作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온라인 敎育 플랫폼 會社를 創業했습니다.”팬데믹 期間 그가 孤軍奮鬪한 內容은 2020年 7月 出刊된 ‘김미경의 리부트: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法’이라는 冊에 담겨 있습니다. ‘김미경의 리부트’는 英文版으로도 飜譯돼 美國 아마존 電子冊 ‘傳染病 分野’ ‘비즈니스 計劃 및 展望 分野’에서 베스트셀러 1位에 올랐습니다. 國內에서는 出刊되자마자 主要 書店 베스트셀러 1位를 휩쓸었습니다. 還甲을 앞둔 그는 5年 前부터 새로운 挑戰을 始作했습니다. 바로 英語 工夫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海外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던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美國 現地에서 ‘英語 講義’를 하는 것입니다.―55세부터 英語工夫를 다시 始作하셨다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당연하죠. 每日 새벽 네時 半에 일어나서 몇 時間씩 英語工夫를 했어요. 그게 5年이 훌쩍 넘었죠. 言語 工夫는 어릴 때 하라고 하지만 55살에 始作해도 可能하긴 하더라고요.(웃음) 3年 前에 美國 펜실베이니아 大學에서 講義한 적이 있는데 當時 유튜브 映像 照會數가 850萬 回를 넘겼어요. 덩달아 自信感도 붙었죠.”―‘총, 菌, 쇠’의 著者인 世界的 碩學 제레미 다이아몬드,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의 最年少 終身 敎授 애덤 그랜트, 美國 出身 世界的 投資者 짐 로저스 等 海外 名士들과 對談 인터뷰도 하셨더라고요. “美國 現地 直講의 꿈을 위해 천천히 밟는 段階인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通譯 없이 英語로 進行한다는 目標를 세웠죠. 처음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取消하고 싶은 誘惑이 몰려왔어요. 인터뷰 前날엔 不安해서 잠도 못 자고 敎授님 쓴 冊을 몇 달에 걸쳐 原書로 다 읽었죠. 敎授님 映像 스크립트度 뽑아서 외우다시피 했어요. 質問할 內容도 미리 다 외웠죠. 인터뷰 一週日 前부터는 英語 先生님과 每日 役割을 바꿔가며 實戰처럼 練習했어요. 負擔이 큰 만큼 正말 努力했습니다.”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取消하고 싶은 誘惑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只今 成長筋肉을 키우고 있는 中이다. 筋肉에 傷處가 날 程度로 運動해야 筋肉이 단단해진다”며 스스로를 鍛鍊했습니다. 世界的 碩學들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自信感을 쌓은 그는 올해 末 美國에서 첫 番째 講義를 始作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英語로만 하는 講義입니다. 50代 後半인 그가 還甲의 나이에 새로운 挑戰을 始作하는 셈입니다. 還甲은 普通 隱退하고 쉬는 나이입니다. 休息 아닌 挑戰을 擇한 理由를 물었습니다. “理由는 簡單하죠.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여러 나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言語를 驅使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막내가 昨年에 故3이었어요. 아이들 다 스무살 넘었고 獨立했으니 이젠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잖아요. 제 講義가 海外에서도 통하는지 直接 確認하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只今도 새벽 네時 半이면 起牀합니다.(웃음)”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5-13
    • 좋아요
    • 코멘트
  • ‘흙수저’ 세라믹 아티스트, 산티아고 巡禮길 8番 걸은 理由는?[복수자들]

    시들지 않는 꽃을 빚는 女子가 있습니다. 세라믹 아티스트인 圖畫 김소영(36)은 2011年부터 12年째 陶瓷器로 빚은 카네이션 브로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宿命처럼 지고 가는 藝術家에게 陶瓷器 카네이션은 生計手段이었고, 抛棄할 뻔한 瞬間 한 걸음을 더 떼게 만든 原動力이었습니다. 切迫했기에 安住하지 않았습니다. 每年 다른 디자인을 開發했고, ‘陶瓷器=그릇’이라는 固定觀念을 깨기 위해 머리와 드레스에 陶瓷器 카네이션을 잔뜩 붙이고 거리를 闊步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令監은 배고픔에서 나오나봅니다. 陶瓷器 카네이션은 돈이 아쉬웠을 때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卒業 後 일하던 쇼핑몰이 廢業 兆朕을 보여 退社하면서 數個月 間 失職狀態에 놓였던 그는 幼年時節 로망이었던 ‘산티아고 巡禮길’을 떠올렸습니다. 當時 手中의 돈은 100萬 원 남짓. 산티아고를 가는데 必要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方法을 苦悶하다 떠올린 것이 陶瓷器 카네이션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 60個의 陶瓷器 카네이션을 만들었고, 300萬 원을 마련해 산티아고行 飛行機에 몸을 실었습니다. 산티아고가 주는 自由와 平穩의 感覺에 눈 뜬 그는 只今까지 8番 산티아고를 갔고, 서울과 釜山을 8番 往復한 距離인 5479km를 걸었습니다. 個人展을 열고, 틈만 나면 산티아고로 훌쩍 그에게는 ‘金수저’라는 疑惑(?)도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陶藝를 始作한 지 10年이 지난 30代 初盤까지도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서울의 作業室을 빌릴 餘力이 안돼 4年 間 歸村을 하기도 했습니다. “陶藝를 繼續 할지 苦悶 된다”는 後輩가 찾아오면 그는 斷乎하게 말합니다. “거지같이 밥 못 먹어도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그만 두라”고 말입니다. 그가 10年 間 스스로에게 해 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꿈’의 또 다른 말은 ‘切迫함’입니다. 재고 따진다면 그만큼 切迫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의 持論입니다. “正말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해선, 안되는 理由 代身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方法을 苦悶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度例도, 산티아고度 놓지 않았습니다. 懇切함이 길을 만든다는 그를 지난달 18日 서울 道峰區 作業室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흙수저 아티스트’로 살아남은 方法(https://www.youtube.com/watch?v=vfHPEB_QCh0)과, 산티아고에서 5479km를 걸은 理由(https://youtu.be/qFSrZbmYEGg)를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12年 間 人氣를 끌고 있는 ‘陶瓷器 카네이션’을 販賣하시고 얼마 前 個人展도 여셨어요. 그런데 세라믹 아티스트가 元來 꿈이 아니었다고요? 美大에 進學해서 陶藝를 처음 接했는데 너무 어려웠어요. 元來 纖維 專攻을 希望했는데 競爭에서 밀려서 陶藝 專攻을 하게 됐어요. 제 마음대로 模樣이 안 나오면 陶瓷室을 爆發시켜버리고 싶을 程度로 싫었어요.도자실 앞에서 엉엉 울기도 했죠. 그런데 제 性向이 現實에 滿足을 못해도 그 생각을 바꾸려고 해요. 陶藝家 싫었지만 어쨌든 해야 하잖아요. 已往 이렇게 된 거, 學校에선 最高가 돼 보자고 마음을 잡았어요. ―‘陶瓷器 카네이션’을 12年 째 만들고 계세요. 陶瓷器 카네이션은 어떻게 始作하셨나요?졸업 後에는 ‘陶瓷器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카페 알바도 하고 쇼핑몰에서도 일했는데 쇼핑몰 社勢가 기울어서 退社를 했어요. 以後 4個月 동안 失職 狀態였는데 그때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6年 쯤 파올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라는 冊에서 산티아고 巡禮길을 처음 接한 뒤에 꼭 가 보고 싶었거든요. 산티아고를 갈 돈을 벌 方法을 窮理하다가 陶瓷器 카네이션을 떠올렸어요. 그 때 手中에 100萬 원 밖에 없었거든요. 밤을 새서 하루만에 60個를 만들고, 트위터를 통해서 販賣를 해서 300萬 원 남짓을 모았어요. 그 돈을 다 털어서 無作定 산티아고로 떠났죠. ―旅行經費 마련을 위해 卒業 後 눈을 돌렸던 陶藝家 業이 된 거네요.맞아요.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陶瓷器 카네이션을 開發했고. 그걸 販賣도 해 보면서 ‘陶瓷器로도 돈을 벌 수 있구나’라는 勇氣가 생겼어요. 이 길을 繼續 가보자는 結論이 났죠.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2012年부터 陶瓷器 카네이션 事業을 本格的으로 始作했어요. 6個月 동안 4000個를 만들고 버리는 施行錯誤를 거치면서 맘에 드는 디자인을 完成시켰어요. 첫 해였던 2011年 販賣量보다 10倍 더 많은 600個를 販賣했어요. ―陶藝는 돈 벌기 힘든 藝術이라는 視線이 있잖아요. 經濟的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陶瓷器 카네이션으로 安定的인 收益을 내신 건지 궁금해요. 30代 初盤까지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버는 족족 作業室 賃貸料와 材料費로 다 나갔거든요. 月에 基本 500萬 원은 들었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죠. 버는 돈은 많아도 그만큼 나가니까 모을 수가 없는 狀況이었어요. 남들보다 몇 倍는 더 일하는데 돈은 안벌리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作業을 始作하면 너무 재밌으니까 그만두質 못한 거죠. ―經濟的 어려움 때문에 그만둘 뻔한 瞬間은 없었나요?2018년 무렵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元來 일하던 作業室이 撤去를 하면서 새로운 作業室을 求해야 하는 狀況이었는데 서울에서 作業室을 救할 餘力이 안돼서 歸村을 擇했어요. 作業室을 알아보던 中 修道院에서 빈 空間을 無料로 빌려주신다고 해서 江原道 洪川, 旌善에서 4年 間 살았어요. 그곳에서 사람도 안 만나고 陶瓷器만 만들면서 齷齪같이 2年 동안 1億 원을 모았어요. ―藝術을 業으로 삼는 사람 中에서는 所謂 ‘金수저’도 많잖아요. 經濟的 壓迫 없이 作品活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剝奪感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財力이 있었다면 더 빨리 成長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돈으로 쉽게 解決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直接 하려다보니 너무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認定이 빠른 便이에요.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건 제 理想일 뿐이잖아요. 돈이 없는 狀態에서 제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건 저에게 주어진 現實이고, 그 現實에서 제가 擇할 수 있는 最善의 길을 가요. 그 길에서 얻는 것도 있어요. 배고픈 狀況에서 어떻게든 齷齪같이 살아남은 過程이 피가 되고 살이 됐어요. 어떤 狀況에 處하더라도 헤쳐나갈 自信이 있어요. 돌아왔던 時間들이 부끄럽지 않고요. ―只今은 安定的인 收益이 있으신가요? 12年 동안 陶瓷器 카네이션을 販賣하고, 陶藝와 마케팅 講義도 하면서 安定的으로 돈을 벌었어요. 이제 어느 程度 安定圈에 접어들긴 했는데, 安定을 抛棄하고 새로운 挑戰을 하려고 하는 時點이에요. ―어떤 試圖인가요?도자기 카네이션이나 액세서리같은 작은 作業들만 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파인아트 作家로 더 큰 規模의 作業을 하고 싶다는 欲求가 생겼어요. 제 世界觀을 담은 作品들이요. 어렸을 때부터 宇宙와 별을 좋아했거든요. 제 作品에 宇宙와 별을 담고 싶어요. 그래서 文化센터, 放課 後 敎室 다 그만 뒀고, 陶瓷器 카네이션 比重도 줄여나가려고 해요. 제 信念은 ‘하나를 抛棄해야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이 門이 닫혀야 反對쪽 門이 열리죠. 1年 程度 거지같이 살면서 제 未來에 投資하려고요. 전 그래서 10年을 봐요. 10年 뒤에는 ‘只今의 選擇을 내리길 잘 했다’고 생각할 거 같아요. “成功한 藝術家의 95%는 ‘金수저’라는 俗說이 있다. 나머지 5%가 나다.” 소영 氏의 말입니다. 예쁜 옷, 비싼 가방을 못 사서 아쉬운 적은 斷言컨대 한 番도 없었습니다. 더 넓은 作業室에서 材料費 걱정 없이 願하는 作業을 하는 것. 그 꿈에 다가가는데 돈이 걸림돌이 될 때 그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마다 숨筒을 틔워준 건 산티아고였습니다. 現實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낯선 이의 微笑와 따뜻한 人事가 ‘酸素呼吸器’와 같은 役割을 했습니다. 이 巡禮길은 예수의 열두弟子 中 한 名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입니다. ―산티아고를 8番이나 가셨다면서요. 그곳의 가장 큰 魅力이 뭔가요?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서로 人事를 해요. ‘部엔 까미노’라는 人事말인데 ‘좋은 길 되세요’라는 뜻이에요. 서로 웃으며 部엔 까미노를 나누면 힘들었던 瞬間들이 씻겨 내려가는 氣分이 들어요. 그래서 그 後론 現實이 힘들 때마다 산티아고를 찾았어요. 只今까지 總 8番, 다 合쳐 5479km를 걸었네요. ―8番이나 간 理由가 뭔가요? 산티아고는 저에게 酸素呼吸器같은 存在예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숨을 돌릴 時點이 必要하잖아요. 陶瓷器는 저를 너무 힘들게 한 적이 많아요. 그 힘듦을 씻어내고 에너지를 다시 채워주는 存在가 산티아고였어요. 제가 다시 달릴 힘을 주는 存在이자 제 故鄕같은 곳이라 每年 찾아요. 제 心臟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陶瓷器, 다른 하나는 산티아고예요. ―가장 記憶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산티아고를 처음 갔을 때 제대로 運動을 안 하고 가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보고 한 스페인 커플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다가왔어요. 커플이었는데, 女子분도 힘들어서 짐을 男子가 들고 있는 狀況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女子분이 10kg이 넘는 第 백팩을 들어줬어요. 제 가방을 매고 걸어가는 女子분 뒷모습은 12年이 지나도 안 잊혀요.―세라믹 아티스트로서의 꿈은 뭔가요?저는 世界的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世界에 제 ‘宇宙별 陶瓷器’를 알리는 게 꿈이에요. 陶瓷器가 單純히 액세서리나 식기뿐만 아니라 하나의 作品으로 穩全히 사랑받는 날을 꿈꿉니다. 來年에 美國 뉴욕에서 展示를 여는 게 目標에요. 一旦 9月 뉴욕行 티켓을 끊었어요. 展示 空間을 物色하려고요. 맨땅에 헤딩이죠. 믿을 건 제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어요. 10年 뒤의 제 모습을 期待해주세요. 김재희記者 jetti@donga.com이지훈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5-06
    • 좋아요
    • 코멘트
  • 한효주, BTS, 聖訓 트레이너가 無一푼에서 論峴洞 헬스場 社長님으로 成功한 祕法은?[복수자들]

    한효주, 聖訓, 金宇彬, BTS 진, 진서연, 최은주…. ‘몸짱’으로 有名한 수많은 演藝人들의 몸을 만든 體育館 館長이 있습니다. 運動만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藝能 프로그램에 나와 신들린 애드리브와 부릅뜬 큰 눈의 ‘虎狼이 館長님’ 캐릭터로 單숨에 스타덤에 오른 人物, ‘바디스페이스’ 양치승 館長(48)을 이 만났습니다. 只今은 ‘演藝人 트레이너’로 有名한 그도 過去엔 俳優 志望生이었습니다. 沈銀河, 한효주 같은 톱스타들이 다녔던 演技學院을 다니며 코믹 액션 俳優를 꿈꿨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家庭形便과 허리 디스크 負傷 等으로 꿈을 접게 됩니다. 駐車 아르바이트, 銀行 請願警察 等 生計型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다가 布帳馬車를 차려 運營하던 中 좋은 機會를 만나 20餘 年 前 처음 體育館(헬스場)을 차리게 됩니다. 그는 타고난 事業家였습니다. 亡해가는 헬스場을 引受해 黑字를 낸 뒤 되파는 方式으로 큰 돈을 모았습니다. 誠實히 모은 돈으로 2008年엔 서울 江南區 논현동에 그만의 固有 브랜드 ‘바디스페이스’를 차렸습니다. 그는 15年 째 같은 자리에서 ‘양치승 館長’으로 통합니다. 어린 時節 家庭暴力에 시달리고 事業에서 큰 成功도 거두고, 믿었던 사람에게 背信도 當하고…. 人生에서 온갖 喜怒哀樂을 겪은 그는 “人生은 映畫 같다. 내 人生엔 코믹, 액션, 멜로, 恐怖, 스릴러가 다 담겨 있다”며 只今은 웃어넘길 수 있다고 합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채널 <復讐者들>에서 億臺 詐欺로 廢人이 됐던 양치승이 運動으로 멘탈을 克服한 祕訣(g)과 無一푼 알바生에서 論峴洞 헬스클럽 館長이 될 수 있었던 成功記()를 보실 수 있습니다. ―元來 俳優를 꿈 꾸셨는데, 꿈은 왜 접으신 건가요? “當時 高等學校 卒業하고 코믹 액션 장르 映畫에 出演하는 俳優가 되고 싶었어요. 沈銀河, 한효주 같은 사람들이 다녔던, 엄청 有名한 演技 學院에도 다녔어요. 근데 軍隊에서 허리 디스크를 다쳐서 除隊하자마자 病院에 入院해야 했어요. 手術費가 없어서 디스크 手術은 못 받고 밤새도록 혼자 再活運動을 해서 겨우 退院했죠. 돈도 없고 몸도 성하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俳優 꿈은 접었어요. 一旦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駐車場 아르바이트, 銀行 請願警察 같은 生計型 아르바이트를 轉轉했어요.”―그러다가 體育館을 始作하셨는데 契機가 궁금해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면 平生 이렇게 살게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本格的으로 布帳馬車를 하면서 돈을 벌기 始作했어요. 布帳馬車 運營하면서 알게 된 보디빌딩 國家代表 選手들과 因緣이 되어 1990年代 後半 첫 體育館을 차리게 됐어요. 그 當時 저는 가진 게 없고 工夫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다 보니 熱心히 일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懇切했기에 正말 熱心히 살았죠. 하루 終日 헬스場에 머물면서 會員들 이름 다 외우고 한 名씩 運動도 가르쳐드렸어요.”그렇게 始作한 헬스場 事業은 漸漸 規模가 커졌습니다. 타고난 事業家였던 그는 營業 利益이 낮은 헬스場을 低廉한 價格에 引受해 會員 數를 불린 뒤 다시 파는 式으로 事業을 擴張했습니다. 한 달 收益이 10~20萬 원에 不過했던 헬스場을 月 收益 5~600萬 圓으로 만들어 權利金을 높여 팔았던 겁니다. ―亡해가는 헬스場들을 引受하신 理由가 뭔가요? “일부러 亡한 헬스場들만 찾아다녔어요. 처음부터 헬스場을 키워서 되팔겠다는 마음보다는 旣存 헬스場도 살려내지 못하면 나에게 헬스場을 運營할 能力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會員數는 많은데 營業利益이 0원에 가까운 헬스場부터 會員數가 아주 적은 헬스場까지 多樣한 케이스를 接하면서 노하우가 쌓였어요.”―헬스장을 살리는 祕法은 뭔가요? “方法은 하나 밖에 없어요. 眞心이에요. 萬若 헬스場이 午前 6時에 오픈하잖아요? 그럼 저는 6時부터 헬스場에 나가서 會員들을 맞이해요. 會員數가 500名 넘어도 얼굴과 이름을 한 名 한 名 다 외우고 人事해요. 門 닫을 때까지 하루 終日 헬스場에 머물면서 直接 運動 가르쳐주고 對話도 나눴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洞네에 입所聞이 쫙 나는거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실하면서 眞心을 다하니까 알아주시더라고요.”노원 隣近에서 始作한 헬스場은 鷺梁津을 거쳐 只今은 江南區 논현동 ‘바디스페이스’가 됐습니다. 一般人에게만 핫한 헬스場이 아닙니다. ‘나 혼자 산다’에 함께 나왔던 俳優 聖訓뿐 아니라 한효주, 金宇彬, BTS 진, 진서연 等 많은 스타들이 그에게 運動을 배웠습니다. ―‘演藝人 PT 쌤’으로도 有名하세요. 演藝人 顧客 誘致 祕法이 있으신가요? “‘바디스페이스’가 있는 論峴洞에는 形便이 넉넉하지 못한 俳優 志望生들이 많이 살았어요. 저희 헬스場은 月 3萬 원으로 會費가 다른 곳에 비해 低廉한 便인데 그조차도 부담스러워서 運動을 그만두는 親舊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親舊들한테 그냥 便하게 돈 안 내도되니 와서 運動하라고 했어요. 여기서 오랫동안 헬스場을 運營하다보니 그때 會員이었던 親舊들이 다 잘 된 거예요. 因緣은 그런 式으로 생기더라고요.”체육관을 運營하면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家族처럼 믿었던 동생에게 크게 詐欺를 當해 다시 일어서지 못할 程度로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크게 詐欺를 當하신 건가요? “헬스場 會員이었는데 막냇同生 삼고 싶을 程度로 좋아했던 親舊였어요. 헬스場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일을 맡겼는데 처음엔 管理를 너무 잘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親舊를 믿고 여러 支店 運營을 맡겼죠. 時間이 지날수록 조금씩 疑心 가는 行動을 했어요. 근데 제가 이 親舊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동생을 믿지 못하는 내가 나쁜 놈이구나’하며 오히려 저를 自責했어요. 5年 程度 지난 後에 보니까 그 親舊가 여러 支店의 帳簿를 빼돌렸더라고요. 數億臺의 損害를 봤어요. 근데 돈보다 사람을 잃었다는 게 큰 衝擊이었어요.”―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背信感으로 後暴風이 甚하셨을 것 같아요. “詐欺 當했다는 事實을 알고 一週日 程度가 第一 甚했어요. 아침에 눈을 딱 뜨잖아요. ‘어제까지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그 親舊에게 예전처럼 電話까지 걸었던 적도 있어요. 衝擊이 너무 커서 詐欺 當했단 事實을 잊어버린거죠. 한동안 제精神으로 살기 힘들었어요. 家族 같은 사람한테 제겐 人生이나 다름없는 體育館을 맡긴 거였어요. 그러다보니 술을 엄청 찾았어요. 體育館에 運動하러 온 會員들이랑 運動은 안 하고 술만 들입다 마셨죠.”배신감과 憤怒를 잊기 위해 틈만 나면 술을 찾았습니다. 4年 넘게 每日같이 過飮하는 生活을 持續하던 中 몸이 以上 信號를 보내왔습니다. 體脂肪率은 40%에 肉薄했고 體重은 100kg가 넘은 겁니다.―피 檢査 했을 때 엄청 衝擊을 받으셨다고요? “피가 맑아야 하잖아요. 찐득찐득해서 血液 循環이 안 될 程度였어요. 이래서는 健康까지 버리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會員들과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瞬間 괴로움은 잊을 수 있잖아요. 너무 괴로웠던 거예요.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술 마시는 걸) 멈추질 못했어요.”―다시 運動을 始作하신 契機는요? “아직도 날짜를 正確하게 記憶해요. 2016年 1月 2日이에요. 年末年初 술을 엄청 마시고 化粧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데 正말 짐승이 따로 없더라고요. 4年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술 마시고 運動도 거의 안 했으니까요. 너무 衝擊을 받았어요. 제가 봐도 이건 正말 아니더라고요. 그날부터 運動을 다시 始作했어요. 하루 4~6時間, 길게는 8時間 程度. 時間 나는 대로 미친 듯이 했어요.”시간 날 때마다 運動에 邁進했던 그는 8個月 만에 ‘完璧한 바디 핏(body fit)’을 回復했습니다. 되찾은 건 健康한 身體뿐이 아니었습니다.―몸이 健康해지니 마음도 괜찮아지던가요? “몸도 몸이지만 멘탈이 正말 좋아졌죠. 몸을 만들고 나서 지난 4年을 술로 虛費한 게 너무 아까웠어요. 振作 運動했으면 더 빨리 힘든 걸 잊고 더 幸福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運動하면서 精神이 健康해진 케이스가 많아요. 저희 헬스場에 憂鬱症 患者들이 되게 많았는데 運動하면서 되게 健康해지더라고요. 運動 經歷을 活用해서 다른 事業을 始作한 親舊들도 많고요. 運動을 하면 삶이 180度 바뀝니다. 眞짜예요.”몸과 마음이 回復되자 그에겐 새로운 機會도 찾아왔습니다. 헬스場 會員이었던 俳優 聖訓과 함께 MBC ‘나 혼자 산다’ 出演 提議를 받은 겁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聖訓을 嚴하게 혼내는 ‘虎狼이 館長’으로 出演하면서 本格的으로 大衆들에게 얼굴을 알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20代 初盤의 꿈을 이제 이루신 거네요. 俳優는 아니지만 放送에 出演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니까요. “44살이 된 後에야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네요.(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무살 때 俳優가 되고 싶었던 理由는 有名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에 (當時) 잘 안 풀린 게 아닐까 해요. 그때 제가 잘 됐다면 只今 같은 謙遜한 마음을 갖지 못할 거예요. 只今의 저는 늦게라도 이런 機會를 가질 수 있는 게 正말 感謝하고 幸福하거든요. 周邊 사람에게도 더 잘 하고 베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요.”―방송하시면서 가장 뿌듯했던 때가 언제인가요? “채널A ‘오은영의 金쪽相談所’에 出演한 적이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家父長的이고 暴力的인 분이셨어요. 어릴 땐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을 程度로 힘들었어요. 出演 提議를 받고 처음엔 苦悶했어요. 放送에 나가 내 父母를 辱하는 것 같잖아요. 근데 제가 나온 映像에 한 댓글을 봤어요. 暴力的인 아버지 때문에 傷處를 많이 받았던 30代 女性이 집에 暗幕 커튼을 달고 갇혀 살았는데, 제 映像을 보고 勇氣를 얻어서 世上으로 다시 나오기로 決心했다는 內容이었어요. 그걸 봤을 때 正말 放送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사람들에게 즐거움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放送 出演 機會가 주어지면 責任感을 갖고 正말 잘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러다 體育館 접고 放送人으로 轉業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放送人과 體育館 館長, 하나만 選擇하라면 저는 無條件 體育館 館長입니다. 放送에 나오는 게 재밌긴 하지만 體育館만큼은 아니에요. 저는 只今도 하루 終日 體育館에 머물면서 運動하러 오시는 會員님들과 수다 떨고 運動 가르쳐드리는 게 좋습니다. 이곳에 있을 때 가장 便하고 幸福하거든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4-29
    • 좋아요
    • 코멘트
  • ‘피지컬100’의 이 몸짱 獨逸人, 事實은 글로벌 컨설팅企業 出身 엘리트였다[복수자들]

    5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 社屋에 발을 들인 한 西洋 男子. 100年 傳統 韓國 言論社에서 보기 힘든 파란 눈의 金髮 사나이에 힐끔거리는 視線들이 꽂힙니다. 一週日에 한 番씩 ‘바프’(바디프로필)를 찍는다는 그는 올블랙 풀正裝 사이로 숨겨지지 않는 筋肉質 몸매를 뽐냅니다. 조각 같은 外貌에 더해 그와 한 발짝 더 멀어지게 되는 理由는 그의 國籍입니다. 그는 國民들이 스스로를 ‘노잼’이라 부르는 나라, 바로 獨逸에서 온 모델 兼 放送人 마르쿠스 플로리안 크라프(30)입니다. 유튜브 ‘코리안브로스’, ‘어서와 韓國은 처음이지?’ 等 放送으로 이름을 알렸고, 最近 넷플릭스 ‘피지컬: 100’에 出演해 獨逸 新聞 헤드라인을 裝飾하며 兩國에서 人氣를 끄는 中입니다. 多少 부담스러운 外貌, 國籍(?)과 달리 인터뷰가 始作되자마자 그는 反戰의 입담을 뽐냅니다. “準備돼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 2013年 映畫 ‘新世界’ 속 政廳의 名臺詞가 韓國 살이 6年 된 獨逸人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라면 먹으러 갈래?” 代身 “소세지 먹으러 갈래?”를 提案하는 그, 傳統市場 商人에게 “社長님, 尊銜이 어떻게 되세요?”라 묻는 그는 스스로를 ‘半國인’이라 부릅니다. 獨逸에서 國際經營學을 專攻한 그는 2015年 崇實大로 交換學生을 왔다가 韓國의 情에 흠뻑 取했습니다. 伏날이면 蔘鷄湯을 끓여다주고, 김치와 콩나물을 싸주는 韓國人들에게서 故鄕의 情趣를 느꼈다고 합니다.세계 1位 컨설팅 企業 딜로이트에 辭表를 던지고 2017年 韓國에 왔지만 人種差別을 當하기도 했고, 放送 涉外 提案이 뜸할 때는 “每日 每日이 不安함 그 雜菜”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한 努力으로 오늘도 버팁니다. 韓國 유튜브 콘텐츠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따라했고, 冊 속 맘에 드는 글句와 新造語들을 메모하며 韓國語를 익혔습니다. “韓國人은 밥심이지” “저는 ‘自慢秋’에요” 같은 口語體를 거리낌 없이 使用하는 獨逸人에게 大衆들은 親近함을 느끼기 始作했습니다. 一週日에 한 番씩 바디프로필을 찍으며 酷毒하게 體力과 몸매를 維持한 毒氣 德에 ‘피지컬: 100’에도 出演하며 有名稅를 타고 있습니다. 버티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目標는 “韓國에서 第一 웃긴 獨逸人 되기”입니다. 獨逸人은 ‘노잼’이라는 이미지를 바꿀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그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사우나 딸린 3層집과, 딜로이트 社員證을 내팽개치고 韓國에 온 이야기()와, 韓國의 會食文化와 MZ世代에 對한 생각()을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獨逸에서 컨설팅企業 딜로이트를 다니셨다고요. 어떻게 韓國에 定着하시게 된 건가요?2015년 崇實大 交換學生으로 처음 韓國에 왔다가 韓國人들과 親해져서 몰려다니고 같이 김치도 때려 먹었어요. 韓國은 저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죠. 以後 獨逸에서 學點 4.5點 滿點에 4.5點으로 大學을 卒業하고 딜로이트라는 컨설팅企業에 入社했어요. 돈을 많이 받는 만큼 夜勤도 오지게 했어요. 다시 韓國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次에 고려대에서 運營하는 奬學生 프로그램에 合格을 한거에요. 붙자마자 바로 딜로이트 때려 치고 나와서 2017年 韓國에 왔어요. 그 後론 쭉 韓國에 살고 있죠. ―고려대 大學院에 合格하셨는데 論山에서 1年 동안 지내셨다고요?한국 政府에서 韓國語를 배우라고 外國人들을 語學堂으로 보내줘요. 저는 論山에 있는 建陽大 韓國語敎育센터로 가게 됐어요. 學校 앞에 치킨집이 있었는데 거기 양념치킨이 너무 맛있었어요. ‘겉바속촉’이었거든요. 獨逸人들은 麥酒만 때려 먹지, 按酒가 없어요. ―論山 生活은 어떠셨어요? 文化衝擊은 없었나요? 論山은 시골이라 저 같은 外國 兩班이 많이 없어요. 나이 드신 분들 눈에 제가 神奇했나봐요. 길거리에서 한 아저씨가 “어디에서 왔냐”고 하셔서 “獨逸에서 왔다”고 하니, 손 敬禮까지 하시면서 “하이~히틀러!”라고 했어요. 버스 技士님이 저를 보고 門을 닫아버린 적도 있어요. 속상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1%도 안돼요. 蔘鷄湯 끓여서 주시고 김치랑 콩나물을 챙겨주신 할머님도 있어요. 獨逸에서는 못 느꼈던 韓國人의 ‘正’이 좋아서 繼續 있는 거예요. ―韓國에서 放送人으로 活動하시기 始作한 契機는 뭔가요?학교에서 알게 된 분이 모델을 해 보라고 提案하셔서 企業 廣告, 衣類 모델 等을 했어요. 外國人들이 出演하는 유튜브 ‘코리안브로스’에서 제가 出演한 映像 하나가 ‘떡床’을 하면서 認知度가 생기기 始作했고요. ―어떤 映像이었나요?한국인들은 썸남, 썸女에게 “라면 먹으러 갈래?”라고 한다기에 “왜 何必 라면이야? ‘소세지 먹으러 갈래?’라고 하면 안돼?”라고 한 말이 엄청나게 話題가 됐어요. 사람들이 저한테 ‘소세지남’이라는 別名을 붙여 줬어요. 最近에는 유튜버 조나단과 함께 撮影한 ‘南山의 外國人들’에서 市場 商人分께 “아이고 金社長~ 이거 참, 반갑구만! 반가워요!”라는 ‘應答하라 1988’ 臺詞를 친 게 話題가 됐어요. ‘K드라마로 韓國語 工夫恨 外國人’이라는 유튜브 쇼츠 照會數가 400萬 回가 넘었더라고요. ―“왜 내 女子다 말을 못해”라는 ‘파리의 戀人’ 大使나, “紅柹맛이 났는데, 어찌 紅柹라 생각했느냐 하시면…”의 ‘大長今’ 臺詞를 읊으시더라고요. 韓國語는 드라마로 獨學하신건가요?‘우왁굳’이라는 게임 스트리머를 좋아해서 그 사람 映像을 보면서 따라했어요. 하도 혼자 중얼거려서 옆집 사람은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또 좋아하는 素材의 冊을 사서 소리 내서 읽었어요. TV나 유튜브를 보면서 재밌는 멘트가 있으면 노트를 해놓고 實生活에서 써 보고요. 獨逸 사람들은 드럽게 재미없어요. 그래서 韓國 유머를 熱心히 배웠어요. ―‘바디 프로필’을 1週日에 한 番씩 찍으신다고요? 스무 살 때까지 肥滿이었어요. 엄청 더운 여름날 呼吸이 안돼서 집에 혼자 있는데 5分 동안 쓰러졌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1年 동안 울면서 40kg을 뺐어요. 아무것도 안 먹으면서 달리기만 했어요. 요즘도 하루에 3時間씩 運動해요. 스케줄 上 時間을 내기 힘들면 새벽에 일어나서 公僕 有酸素 運動을 해요. 바디프로필도 1週日에 한 番씩 찍으면서 繼續 管理를 해요. 살을 빼고 싶은 분들께 一旦 작은 것부터 習慣으로 만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하루 밤 사이에 되는 건 없어요. 間食부터 菎蒻젤리나, 蛋白質이 含有된 菓子로 바꿔보세요. 完璧하게 食單을 할 必要도 없어요. 우리는 機械 아니잖아요? 스스로를 反國人이라 부를 程度로 韓國을 사랑하지만 文化의 障壁에 가로막힌 적도 많습니다. 나이나 職級을 理由로 그를 下待하는 사람도 있었고, ‘會食文化’에 適應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술 마신 다음날 컨디션이 ‘쓰레기’가 된다는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배가 아프다거나 運轉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獨逸에서 딜로이트를 다니다가 韓國 사람들과 일 하고 있어요. 일할 때 兩國의 文化的 差異가 있나요? 韓國은 職場 同僚를 패밀리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일이 끝나면 會食 하고 술도 먹잖아요. 獨逸 사람들은 麥酒는 드럽게 좋아하지만 會食은 안 해요. 會社와 집이 完全히 나눠져 있거든요. 會食할 때 술을 서로 따라주는 文化도 獨逸엔 없어요. 自己 술은 自己가 알아서 마셔요. 근데 코로나 19 以後로 會食 많이 없어지지 않았나요? 萬若 記者님들 아직도 會食을 한다면 部長님이랑 제가 한 番 얘기해봐야겠네요? ―‘꼰대文化’로 傷處도 받으셨다고요.제가 固定으로 들어간 프로그램이었는데 上司가 半말하고 莫大해서 會議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나이가 어리고 外國人이라는 理由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 結局 프로그램은 廢止됐어요. 獨逸은 나이, 職級과 相關없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 말을 자유롭게 해요. ―요즘 MZ世代들의 會社 文化도 火制잖아요. 이어폰 끼고 일하는 ‘맑눈狂’, 獨逸 딜로이트라면 어떻게 바라볼까요?독일에서 第一 重要한 건 ‘effektivitat’, 效率이에요. 이어폰을 끼고 일해야 能率이 오르면 좋은 거 아닌가요? 韓國에서 職員들이 이어폰 끼고 일하는 걸 안 좋게 생각하나요? 마음 좀 여세요. 部長님이 좋아하는 노래 틀어서 이어폰 껴 드리세요. 直接 經驗해보시라고. ―프리랜서의 삶은 不安하잖아요. 딜로이트를 그만둔 걸 後悔할 때는 없나요? 每日每日이 不安함 그 雜菜에요. 화끈한 일거리가 들어오면 眞짜 幸福하지만, 일이 안 들어올 땐 너무 不安해요. 하지만 딜로이트라고 모든 게 좋은 건 아니었어요. 夜勤도 잦았고 하루 終日 事務室에 앉아있는 게 適性과도 안 맞았어요. 모든 일에 長短點이 있는 거죠. 完璧한 건 없어요. 只今의 삶은 不安하긴 하지만 自由가 있어요. 오늘 熱心히 했으면 다음날 餘裕롭게 지내죠. ―롤모델이 있나요?다나카상과 撮影을 같이 했는데 臺本에 없는 멘트도 애드립으로 바로바로 나와서 正말 天才라고 느꼈어요. 그 분이 다나카 컨셉을 4年 동안 밀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다나카賞을 보면서 꾸준한 努力이 答이라는 걸 느껴요. 다나카가 대단하긴 하지만 남과 나를 比較하진 않아요. 나와의 싸움인 거에요. 過去의 나, 只今의 나를 比較하면 돼요. ―플로리안은 어떤 放送人이 되고 싶으세요?그리고 저는 放送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는 게 좋아요. 獨逸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偏見이 있잖아요. 獨逸 사람들이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韓國에서 가장 웃긴 獨逸人이 되는 게 目標에요.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4-22
    • 좋아요
    • 코멘트
  • 춤 추던 籠球選手가 ‘길복순’ 광만이로…박광재 “怪物 配役에 갇히지 않는 俳優 되고 싶다”[복수자들]

    千萬 映畫 ‘犯罪都市2’, 世界的 人氣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시즌2와 ‘스위트홈’에 이어 전도연 主演의 映畫 ‘길복순’까지…. 近來 가장 ‘핫’했던 作品들엔 視線을 확 잡아끈 한 男子가 있었습니다. 덥수룩한 鬚髥, 묵직한 눈빛을 가진 長身의 巨軀(巨軀)지만 웃으면 볼부터 귀까지 발그레해지는 淳朴한 魅力의 俳優 박광재(43)입니다. 채널A ‘天下第一장사’, KBS ‘社長님 귀는 唐나귀 귀’에서 藝能인으로도 活躍하는 그가 10餘 年 前엔 프로籠球 選手였다고 합니다.농구 名文 경복고, 연세대를 卒業한 그는 3點 슛도 잘 쏘는 ‘센터’로 注目 받았습니다. 2003年 드래프트 1라운드 8順位로 LG에 入團하며 프로의 世界에 入門했습니다. 하지만 碌碌치 않았습니다. 當代 最高 籠球選手였던 玄周燁(LG), 徐章勳(전자랜드)을 만나게 되면서 코트보단 벤치에 머무는 時間이 길었습니다. 大學 때까지만 해도 有望株였지만 프로 入團 後부터 주전에서 밀리면서 차츰 自信感을 잃었습니다. 2012年 무렵 練習 途中 발목에 큰 負傷을 입고 結局 隱退를 決心하게 됩니다. 隱退 後 半年 동안 蟄居하던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機會가 찾아왔습니다. 舞臺 위에 서는 俳優가 된 겁니다. 2013年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자코포 役으로 데뷔한 그는 只今까지 映畫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차곡차곡 ‘俳優 經歷’을 쌓고 있습니다. “아직 俳優로 成功하진 못했지만 過程이라 생각하며 最善을 다하고 있다”는 그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프로 入團 後 挫折을 겪었지만 克服해낸 籠球 選手 박광재의 이야기()와 우연한 機會로 演藝界 데뷔 後 훌륭한 俳優가 되기 위한 過程을 보내고 있는 이야기()를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지금은 競技場에서 運動選手들이 춤 추는 일이 많습니다. 運動뿐 아니라 다른 領域에서 自身의 끼를 發散하는 것이 奬勵되는 雰圍氣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年代 中盤 박광재가 活動했을 때만 해도 다른 分野로 注目 받는 運動選手는 歡迎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唯獨 끼가 많았던 그는 코트에선 異端兒 取扱을 받았습니다.―프로 籠球 選手 時節 ‘딴따라’라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요즘은 運動選手들이 競技하다 말고 춤 추는 게 話題가 되기도 하고 좋게 봐주시는데 예전엔 안 그랬어요. 제가 프로籠球 올스타戰에서 춤 췄을 때, 팬들은 되게 좋아해주셨는데 監督님들은 別로 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쟤는 籠球에 關心 없는 딴따라구나’ 이렇게들 생각하셨다고 해요.”―이적 市場에서 ‘人氣 없는 選手’였던 건가요? “隱退 後 술자리에서 허재 監督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우리나라에서 스크린플레이(籠球에서 共 가진 選手를 保護하기 위해 같은 팀 選手가 相對의 進路에 妨害하는 技術)는 最高여서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다들 反對했다’는 거예요. 그때 監督님들 사이에서 저는 ‘籠球 關心 없고 노는 거 좋아하고 演藝界로 가고 싶은 애’로 통했다는 거죠.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속상하긴 했어요. 근데 뭐…. 籠球를 正말 잘했으면 어떻게든 데려갔겠죠?(웃음)” ‘딴따라 選手’라는 誤解도 있었지만 對陣運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當時 大韓民國 農具契 最高 스타였던 玄周燁, 서장훈과 같은 時期, 같은 팀에서 活動했는데, 主戰 競爭에서 밀려 코트보단 벤치에서 머무는 時間이 길어졌습니다. 그는 “兄들은 大韓民國에서 正말 너무 잘하는 選手였기 때문에 競爭으로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프로 入團 1年次, 主戰 選拔에서 현주엽에게 番番이 밀렸던 그에게 會社는 ‘軍隊부터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會社 方針에 反撥하다 軍隊에서도 運動을 繼續 할 수 있는 ‘상무’(國軍體育部隊)가 아닌 公益勤務要員으로 軍生活을 하게 됩니다. ―상무가 아니라 一般 軍生活을 한 理由는 무엇인가요? “1年次 때는 主로 벤치에 있긴 했지만 저 스스로는 漸漸 技倆이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2年次 때 더 熱心히 해서 確固한 立地를 다지고 싶었죠. 근데 會社에선 헤드업 選手(玄周燁)가 있으니까 (於此彼 主戰으로 많이 못 뛸 테니) 軍隊부터 갔다 오라고 한 거죠. 只今 생각해보면 會社 立場에선 저를 配慮해주신 거였어요. 근데 저는 어린 마음에 ‘兄이랑 競爭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어요. 회사랑 싸우다가 結局 常務도 못 갔죠. 살면서 가장 後悔하는 일 中 하나예요.”제대 後 오리온, 전자랜드로 所屬팀을 옮긴 그는 10餘 年間 活動했지만, 選手로서 큰 機會를 받지 못한 狀態로 時間을 보내게 됩니다. 結局 2011~2012 시즌을 마치고 籠球 유니폼을 벗습니다. 練習 中에 입은 발목 負傷이 直接的인 原因이 됐습니다. ―隱退를 해야 했을 程度로 負傷이 甚했나요? “다친 直後엔 걷지도 못했어요. 발목이 꺾이면서 빨래가 짜이듯이 筋肉이 말리면서 정강이뼈度 부러진 거예요. 허벅지까지 通 깁스를 했죠. 手術 받고도 入院 生活을 한참 했어요. 큰 負傷이었어요. 아직까지 발목에 鐵心이 박혀 있을 程度니까요.” ―籠球에 20年 넘게 投資했는데 그만둘 때 挫折이 컸을 것 같아요. “괴로워할 餘裕도 없었어요. 꾸준히 主戰으로 뛰다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甚하게 아쉬웠을 텐데 나중엔 벤치 生活을 오래 했거든요. 選手로 많이 못 뛸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타이밍에 다치게 된거였어요.”은퇴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代 初盤, 누군가는 社會生活을 始作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어린 나이에 始作한 運動이었기에 끝도 빨리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後悔는 없었습니다. 20年 넘게 하루 中 大部分의 時間을 籠球에 投資했고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心情이 複雜하셨을 텐데 再活治療는 어떻게 하셨나요. “選手는 못하더라도 日常生活에 支障은 없어야 하잖아요. 그땐 걷지도 못했으니까 率直히 다른 생각을 할 餘裕가 없었어요. 오직 再活에만 集中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先手를 그만해야겠다고 決心한 後부터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苦悶도 많이 했어요.”―상황이 좋지 않으면 悲觀이나 自己憐憫에 빠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籠球를 하면서 배웠던 것 中 하나가 힘든 狀況을 버틸 수 있는 忍耐心이에요. 選手生活을 하다보면 肉體的으로나 精神的으로 苦痛과 壓迫을 많이 받아요. 버티고 참아낸 經驗 德分에 (負傷 後 再活治療할 때) ‘이 程度는 견딜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운동선수는 隱退하면 主로 監督이나 코치 等 指導者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는 完全히 새로운 選擇을 하게 됩니다. 知人 推薦으로 映畫에서 작은 役割을 맡은 것을 契機로 2013年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出演합니다. 俳優로 살게 된 겁니다.―농구선수에서 배우라니…. 너무 急激한 變化가 아닌가요. “籠球選手 出身 俳優는 제가 처음이긴 하죠. 選手할 때부터 춤도 잘 췄고.(웃음) 끼가 있었어선지 選手 時節부터 엔터테인먼트 쪽에 親하게 지내던 知人이 많았어요. 그 中 한 知人이 제가 隱退하고 쉬고 있을 때 ‘映畫 한 番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監督님이 저 같은 이미지의 캐릭터를 딱 願한다면서요.”―그게 어떤 映畫였나요? “練習을 엄청 했는데 映畫가 準備 過程에 엎어졌어요. 그 映畫를 찍으면서 뮤지컬 俳優 김승대 氏를 알게 됐는데 그 親舊가 뮤지컬 해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率直히 뮤지컬은 自信 없었어요. 演技는 勿論이고 노래도 잘해야 하잖아요. 제가 넘을 수 없는 山처럼 느껴서 拒絶했는데 한 番만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미팅인줄 알고 나갔는데 알고 보니 오디션 자리였어요.”―준비가 안 된 狀態에서 오디션을 보신 거네요. “門 열고 들어가자마자 音樂 監督님이 拍掌大笑를 하셨어요. 왜 웃으신건지 궁금해서 나중에 여쭤봤거든요. 캐릭터에 너무 딱 맞는 사람이 와서 너무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演技力이나 노래 實力보다는 이미지가 맞아서 캐스팅이 됐던 거죠.”‘몬테크리스토’ 以後 그는 媒體 延期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2m가 넘는 長身에 獨步的인 비주얼을 가진 그는 여러 映畫나 드라마에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德分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華麗해졌지만 비슷비슷한 配役이 主를 이룹니다. 乾達, 깡牌, 怪物…. 獨步的 이미지가 ‘俳優 박광재’에겐 機會인 同時에 限界로 作用한 겁니다.―연기자는 이미지만으로 살아남긴 어렵잖아요. 俳優로서 힘든 때도 있으셨나요? “드라마 撮影 때였어요. 監督님이 臺本보다는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臺詞가 끝나도 오케이 사인을 안 주시더라고요. 저로서는 (씬이) 끝났는데 繼續 하라니 唐慌해서 땀이 엄청 났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겨울 場面을 찍었거든요. 옷에 땀이 엄청 젖다보니 저 때문에 再撮影을 하게 됐어요. 그때 正말 많이 萎縮됐어요. ‘옷 얇게 입고 왔냐’는 스태프들이 건네는 말들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고요. 最大限 사람들 안 마주치려고 하고 밥도 車 안에서 혼자 먹었어요.”―드라마는 中間에 下車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버티셨나요? “事前에 臺本 工夫를 많이 했어요. 監督님이 애드리브를 좋아하시니까 (臺本에 없는) 말이나 行動을 미리 準備해갔죠. 12部作 드라마였는데 8部作 撮影할 때쯤 監督님이 ‘진작 그렇게 하지’라고 하셨어요. 稱讚은 받았지만 氣分이 좋기보다는 繼續 힘들었어요.(웃음) 그래도 그만두고 싶진 않았어요. 뭘 좀 제대로 해보고 나서 안 되면 그만둬야지, 只今 멈추는 건 스스로 容納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비슷한 役割 提案만 자꾸 들어오니, 演技者로서 苦悶이 되실 것 같아요. “兩날의 劍이죠. 제가 獨步的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많은 監督님이 찾아주시지만 할 수 있는 配役은 限定的인 거죠. 하지만 感謝한 機會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슷한 役割만 들어오는 理由 中엔 제가 演技力이 不足한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只今도 先生님한테 演技를 배우면서 꾸준히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努力 中입니다.”‘괴물 캐릭터’에 갇히지 않으려는 그의 努力은 천천히 빛을 發하고 있습니다. 最近에 그가 作品에서 맡은 配役을 보면 漸漸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스펙트럼도 넓어졌습니다. 最近 公開된 넷플릭스 映畫 ‘길복순’에서는 請負殺人業體 所屬 킬러 광만이를 延期했고 8月 디즈니플러스에서 公開될 시리즈 ‘무빙’에서는 北韓軍 役을 맡았습니다. ―俳優로서 꿈은 무엇인가요? “率直히 말해 저는 主演은 못 할 것 같아요. 代身 임팩트 있는 助演을 해보고 싶어요. 장르는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激情 멜로도! 映畫 ‘極限職業’의 이병헌 監督님을 正말 좋아해요. 監督님이 불러주신다면 盧 개런티로 出演할 意向도 있습니다.(웃음)”―배우로 잘 안 풀린다고 느끼실 때 籠球選手를 그만둔 걸 後悔하진 않으시나요? “얼마 前 高等學校 籠球部 모임이 있었어요. 大學 때까지 選手生活을 하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은 親舊들이 正말 많더라고요. 어떤 兄은 事業이 잘 되어서 代表가 되고 또 저는 俳優를 하고 있잖아요. 籠球로 始作했다고 해서 籠球로 成功하는 것만이 全部는 아니죠. 그럼에도 只今의 일을 할 때는 最善을 다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 俳優로 成功한 건 아니지만 成功을 向해 나아가는 過程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지 않은 狀況에서도 肯定的인 마음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은 選手 時節 누구보다 熱心히 運動했던 經驗 德分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의 原動力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인터뷰 末尾 그는 映畫 ‘길복순’에 함께 出演한 俳優 설경구가 건넨 助言을 紹介했습니다. 俳優 人生의 座右銘처럼 생각하게 됐다는 말인데요. 그가 俳優로서 本格的인 活動을 始作했을 當時, 籠球 解說 提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籠球選手’라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憂慮가 컸던 當時의 그는 그 提議를 拒絶하려 했다고 합니다. “설경구 先輩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差別點이 籠球選手를 하다가 俳優가 됐다는 건데 그걸 굳이 숨길 理由가 있냐. 俳優뿐 아니라 籠球 解說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長點이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後부턴 오디션 가서도 이렇게 自己 紹介해요. ‘安寧하세요. 籠球選手 하다가 只今은 俳優를 하고 있는 박광재입니다.’라고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4-15
    • 좋아요
    • 코멘트
  • ‘十잡스’ 박재민이 生放送 中 코피 흘린 理由는?[복수자들]

    俳優 박재민(40)에게는 열 個의 職業을 가졌다는 意味의 ‘十잡스’, 挑戰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의 ‘人間 나이키’ ‘프로챌린저’라는 別名이 붙습니다. 헤르微溫느처럼 時間을 自由自在로 쓴다는 뜻에서 ‘재르미온느’라고도 불립니다. 正말 그에게만 하루에 48時間이 주어지는 걸까요? 그는 비보이, 俳優, MC 等 放送人으로 活躍하면서 스노보드 選手, 스노보드 解說委員, 스노보드 國際審判, 3X3籠球 國內審判, 飜譯家라는 多數의 ‘副캐’를 만들어왔습니다. 現在 淨化藝術隊 實用댄스專攻 專任敎授이자 ‘育兒대디’입니다. 學事, 碩士를 마친 서울大에서 글로벌스포츠매니지먼트學 博士課程도 밟는 中입니다. 얼마 前 生放送에서 코피가 났지만 毅然하게 進行을 이어가는 모습이 話題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끼를 多方面에서 뿜어내는 ‘才能 金수저’일까요? 놀랍게도 그는 “어렸을 때 되고 싶은 게 없었다”고 말합니다. 무엇 하나 特出난 게 없는 ‘그림자’같은 存在, 集中力이 떨어지는 ‘散漫한 아이’. 박재민을 바라보는 周邊의 視線이었습니다.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은 많았습니다. 하루는 비보잉 演習室, 다음날은 籠球코트에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圖書館, 또 다른 날은 스키場이었습니다. 好奇心이 많았던 그는 現場에 뛰어들어 直接 몸으로 부딪쳐야 直星이 풀렸습니다. 여러 곳에 기웃거렸지만 全部 曖昧했습니다. 그럼에도 中間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原動力은 딱 한 가지입니다. “재밌으니까.” 나에게 재밌는 건 世上이 뭐라 하든 꾸준히 밀고나갔습니다. “하나만 진득하게 해”라는 世上의 비아냥에 꺾이지 않았던 ‘持久力’이 自身의 가장 큰 才能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2回 만에 下車한 드라마 ‘公州의 男子’(2011年) 속 助演은 11年 뒤 728萬 名의 觀客을 모은 映畫 ‘閑散’ 속 신스틸러를 延期했고, 初等學生도 出戰한 스노보드 大會에서 170名 中 170等을 한 꼴찌는 冬季올림픽 스노보드 解說委員으로 第2의 全盛期를 맞았습니다. 放送과 라디오 固定出演, 大學 講義, 大學院 博士課程, 그리고 ‘딸 바보’ 아빠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지난달 24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持久力을 바탕으로 失敗를 結果가 아닌 過程으로 만들어온 박재민의 삶()과, 入學과 入社라는 目標를 이루고 꿈을 잃은 2末3初들이 삶의 ‘目標’를 設定할 수 있는 方法()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大 出身의 放送人이자 運動選手, 스포츠 解說委員, 飜譯家까지. ‘多才多能’의 代名詞와도 같은 박재민은 어렸을 때 잘 하는 것이 없는 平凡한 學生이었습니다. 授業時間에 ‘꿈’을 쓰라고 하면 다른 親舊들처럼 醫師, 判事, 大統領을 끄적였지만 정작 그는 속으로 ‘되고 싶은 게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춤출 때 가장 幸福했고, 運動하며 땀 흘리는 瞬間 살아있다고 느꼈던 박재민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좋아하는 것을 繼續 했습니다. ―지난해 9月 이순재 先生님이 藝術監督을 맡으신 演劇 ‘僞善者 따르뛰프’ 主演으로 演劇 舞臺에 서셨어요. 近況이 궁금해요. 요즘도 十잡스로 바쁘게 살고 계신가요?평일에는 아침 生放送이 있어서 午前 5時에 일어나요. 7時부터 9時까지 放送을 하고, 끝나면 집에 와서 딸 登院을 시켜요. 火, 목은 淨化藝術隊 敎授로 저녁까지 講義를 하고, 水曜日은 서울대 博士課程 學生으로 學校에서 授業을 들어요. 여러 일을 하지만 요즘 제 삶에서 가장 重要한 건 育兒에요. 저는 ‘十잡스’로 30代를 正말 熾烈하게 살았고, 다양한 經驗들을 했어요. 30代는 欲心이 많았던 時期라면, 40代에 접어든 只今은 모든 選擇의 基準이 아이가 됐어요. 더 以上 ‘나’라는 基準은 제 삶에서 重要하지 않아요. 나를 내려놓게 됐어요. 오롯이 아이를 위해 하루 24時間을 다 쓰는 삶이 보람차고 意味 있고 幸福하다고 느껴요. ―育兒까지 熱情的으로 하시네요.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詐欺캐’ 다워요. 어렸을 때부터 많은 才能을 타고 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出發線이 다르지 않았을까?’ 或은 ‘어렸을 때부터 才能이 다양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初, 中, 高等學校를 통틀어서 저는 單 한 番도 特出난 才能으로 튀는 學生이 아니었어요.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고 成跡도 中位圈人 ‘그림자’같은 存在였어요. ―재민님처럼 끼 많은 사람이 그림자 같은 存在였다니, 잘 想像이 안 가는데요. 學窓時節 어떤 學生이었나요?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많았어요. 關心事가 正말 다양했어요. ADHD로 보일 程度로요. 代身 關心만 갖는 게 아니라 現場으로 뛰어드는 性格이었어요. 高等學生 때 非보잉에 關心이 생기자마자 프로팀을 無酌定 찾아가서 演習室에서 살았어요. 스노보드가 너무 좋아서 選手 登錄을 하고 試合을 나갔고요. 才能을 타고났다기보다 才能을 타고난 사람들 周邊을 恒常 기웃거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散漫하다는 얘길 많이 들었죠. 스키場, 非보잉 演習室, 體育館, 圖書館을 드나들었으니까요. ―曖昧한 才能은 趣味로 삼기 마련인데, 재민님은 어떻게 業으로 꾸준히 키우셨나요? 재밌으니까요. 재미가 第一 重要한 것 같아요. 眞짜 좋아한다면 잘 못해도 繼續 하잖아요. 게임에서 레벨이 가장 낮은 분들도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 하잖아요. 내가 正말 좋아하는 것, 재밌어 하는 것은 實力과 無關하게 推進力과 動機附與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父母님이 工夫하라고 혼내시진 않았나요? 父母님이 宏壯히 嚴하셨는데 삶의 方式에 對해서는 嚴하셨을지언정 삶의 成果에 對해서는 嚴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價値觀을 가질 것인가에 對해서는 宏壯히 많이 혼내셨어요. 禮儀 없는 行動을 한다? 假借 없습니다. 그런데 成跡에 對해 單 한 番도 혼내신 적이 없어요. ‘學院街라’ ‘課外 받아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요. 제 關心事가 다양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曖昧한 才能을 쫓는 過程이 順坦치만은 않았습니다. 10代를 쏟아 부었던 비보이는 어깨 脫骨로 繼續하기 어려워졌고, 學窓時節 코치가 프로選手를 提案했을 程度로 籠球 素質도 뛰어났지만 작은 키, 父母님의 挽留로 籠球選手의 꿈도 접었습니다. 放送人으로 한창 株價를 올리던 2012年 ‘짝 스타 愛情村’ 出演 以後 한 誤報로 所屬社와 契約解止를 當하고 出演하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下車하는 아픔도 찾아왔습니다. 苦痛의 瞬間, 그가 늘 떠올렸던 한 文章이 있습니다. ‘失敗를 結果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멈추면 失敗는 結果가 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失敗는 過程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曖昧한 才能들을 따라가는 過程에서 失敗의 쓴맛도 보셨어요. 프로籠球 選手를 꿈꿨지만 작은 키와 父母님의 反對로 挫折됐고, 어깨 脫骨로 非보잉도 持續하기 어려워졌어요. 뜻대로 안됐을 때 가장 重要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요. ‘失敗가 結果가 되게 하지 말자’. 父母님이 運動選手는 힘든 길이라며 말리셨지만 그게 ‘籠球 抛棄’라는 結果가 되면 안 되죠. ‘籠球選手가 될 수 있는 다른 方法은 뭘까?’를 생각했어요. 籠球를 놓지 않았기에 結局 大學에서 籠球選手를 했어요. 어떻게든 代案을 찾아내서 結果物을 期於이 손에 넣고 마는 性格이에요. 제 뜻대로 안되는 것에 妥協이 안 돼요.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죠. 남들은 승부욕이라고 하는데 全 持久力이라고 생각해요. 승부욕의 出處는 相對方이지만 持久力의 出處는 ‘나’에요. 남을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目標한 바를 이루는 것이 제겐 가장 重要해요. ―失敗해도 挫折하지 않고, 그 失敗를 過程으로 만드는 持久力은 어떻게 키우신 건가요? 저는 다 잘해본 적이 없어요. 비보이度 所屬팀은 有名했지만 제 實力은 別로였고, 籠球도 洞네에서나 잘했고, 스노보드도 잘 하는 選手가 아니었고 工夫도 中上位圈이었거든요. 1等이 아니면 意味가 없다는 壓迫을 平生 받잖아요. 結果物이 重要한 社會에서 저는 좋은 成跡을 내는 차분한 氣質이 없었거든요. 뭔가 熱心히 하고 싶고 欲求는 넘치는데 내 存在 意味를 찾을 수가 없는 거에요. 어디를 가도 注目받지 못하는 中間者이고, 散漫하다는 얘길 들었죠. 그게 아니라는 걸 證明해보이고 싶었어요. 曖昧한 것 안에서 意味를 찾으려 努力하다보니 못해도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性向이 剛해진 거죠. ‘2等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나는 끝까지 버텨보지 뭐’, 이렇게 생각했어요. 버티는 놈이 勝者에요. ―스스로에게 너무 苛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失敗를 失敗로 두지 않고 반드시 過程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壓迫일 수도 있잖아요.압박이라기보다 제가 삶을 對하는 態度에요. ‘짝 스타 愛情村’ 出演 以後 한 誤報로 인해 크게 傷處받고, 넘어졌고, 멈췄어요. 이제와 돌이켜 보면 ‘別거 아니었구나, 克服 可能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을 하죠. 다 내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當時 다이빙에 挑戰하면서 限界를 넘으려 했고, 절에 들어가 마음의 安定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努力했어요. 그때 깨달은 것은 ‘멈추면 失敗가 結果가 되지만 꾸준히 繼續 가면 課程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에요. 世上이 나를 어떻게 評價를 하더라도 내가 繼續해서 나아간다면 評價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요. ―스트레스 管理는 어떻게 하세요?아침에 冥想을 해요. 샤워를 하면서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健康하다 나는 幸福하다’ 이 세 文章을 繼續 되뇌어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올려야 돼요. 웃고 있는 내 모습, 健康한 내 모습, 아이랑 幸福한 내 모습. 이걸 머리에 한 番만 떠올리면 하루의 方向이 달라져요. 내비게이션 目的地를 設定해놓으면 어떻게든 經路를 再探知해서 目的地로 가잖아요. 아침에 ‘疲困하고 짜증나’로 始作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目的地는 ‘짜증’인거에요. 實力은 曖昧하지만 나의 마음이 動하는 것을 꾸준히 쫓아온 박재민. 그는 大入과 就業의 門턱을 넘고 目標를 喪失한 2末3秒(20代 後半~30代 初盤)에게 나에게 재밌는 ‘딴 짓’을 찾으라고 提案합니다. 當場 해야 하는 일을 제쳐둘 程度의 ‘딴 짓’이라면, 그게 바로 나의 適性日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當場의 職業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職業 하나라는 것으로 다 表現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韓國의 靑年들은 大部分 名門大 入學, 大企業 就業을 向해 달려가잖아요. 以後 삶의 目標價 사라졌다는 2末3初들이 正말 많아요. 새로운 適性을 찾는 方法은 뭘까요? 딴 짓을 많이 하세요. 딴 짓은 재밌어서 하는 거에요. 只今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더 하고 싶고, 關心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에요. 그 딴 짓을 稀少性 있게 만들어야 돼요. 저는 스노보드라는 딴 짓이 좋아서 스노보드 審判 資格證을 땄고, 稀少性을 살려서 解說委員을 했어요. 俳優 中에 스노보드 審判 資格證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가 일궈 놓은 것과 제 딴 짓을 連結시켜서 稀少性을 開發하면 業이 될 수도 있어요. ―普通 꿈이나 目標를 職業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職業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온 재민님에게 꿈이란 무엇인가요? 世上이 잘못된 情報를 주고 있는 것 中 하나가 꿈이에요. 꿈이라는 게 이룰 수 있는 걸까요? 꿈은 내가 가고자 하는 理想鄕, 이루고자 하는 헛된 想像이에요. 그런데 講演을 가서 學生들에게 “넌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醫師요, 科學者요, 大統領이요”라고 答해요. ‘꿈=職業’李 된 社會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보니 職業을 가진 以後의 삶에 對해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요. 꿈을 再設定하는 게 2末 3草墳들에게 重要한 것 같아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것이 必要한지 생각해야 해요. ―한 가지 職業만 더 갖는다면 뭘 고르시겠어요? 전 더 以上 갖고 싶은 職業은 없어요. 꿈이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되는 것, 그리고 家族들과 幸福하게 사는 것이에요. 家族을 떠올렸을 때 아이들이 따뜻하다, 돌아가고 싶다, 幸福하다고 느꼈으면 좋겠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라지고 난다면 人類 歷史에 어떤 意味가 남겠어요? 別거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울 必要가 없어요. 그럼 이 世上에서 내가 할 수 있는 役割은 뭔가? 우리 家族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最善을 다 하는 거죠. 제게 職業은 家族을 지키기 위한 攻擊手段이자 防禦手段이에요. ―삶의 目標를 잃어 힘든 이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신다면?“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라는 말, 正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職業 하나로 表現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現代社會에서 職業이라는 게 너무 重要하지만 그것만이 내 삶의 全部 다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삶은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워요. 恒常 내 本質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4-08
    • 좋아요
    • 코멘트
  • “하루 患者 100名 진료하며 作曲했어요” 아이유 ‘라일락’의 作曲家 닥터 兆[復讐者들]

    아이유는 나이를 記錄하는 歌手입니다. 얄궂었던 20代 初盤에 낸 ‘스물셋’, ‘이제 조금 나를 알 것’ 같았던 스물 다섯의 ‘팔레트’, 28살을 記錄한 ‘에잇’…. 熾烈하게 달려온 20臺를 整理하는 意味의 曲 ‘라일락’은 아이유에게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이 曲은 發賣 直後 음원차트 1位를 席卷했고, 美國 빌보드가 定한 ‘2021年 最高의 K-POP 노래’ 3位, 英國 音樂 評論誌 NME가 選定한 ‘올해 最高의 K-POP 노래’ 1位에 選定됐습니다. 라일락의 탑라인(멜로디)을 만든 이는 和聲學 工夫도 한 적 없는 醫師 出身 作曲家 닥터 兆(조민형·37)입니다. 그는 醫大生 時節 授業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밤을 새워 曲을 만들었습니다. 조 氏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데모曲(샘플 音源)을 본 榜示革 하이브 議長(當時 빅히트엔터테인먼트 代表)은 그에게 “新人에게서 보기 드문 新鮮함이 있다”며 그의 可能性을 눈 여겨 봤습니다. BTS를 키운 製作者의 眼目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曺 氏는 “病院 就業해서 남들처럼 平凡한 人生 살아라”는 父母님 걱정을 듣던 골칫거리에서, 累積 스트리밍 1億 回를 넘은 글로벌 히트曲 라일락의 作曲家가 됐습니다. 라일락을 하루아침에 꽃피운 건 아닙니다. 원더걸스 유빈의 솔로앨범부터 트와이스, 구구단, 에이프릴, 마마무, 에이핑크, 있지, 엔믹스까지 그와 作業한 歌手들의 華麗한 라인업 뒤에는 挫折의 瞬間들이 녹아 있습니다.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作曲家가 우리 애들(歌手) 앞길 막는다’ ‘父母님을 害코지하겠다’ 等 惡플 洗禮에 告訴를 苦悶하기도 했습니다. 99曲의 未發昧谷을 지나 어렵사리 世上에 나온 100番째 曲이 酷評을 받기도, 抛棄하려던 瞬間 憧憬하던 歌手의 타이틀 曲을 만들 機會가 주어지기도 한 삶을 살아온 그는 “過程에는 最善을 다하고 結果에는 招演하는 方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지난달 16日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醫師이자 作曲家, 現在는 싱어송라이터 ‘루이드’의 프로듀서로도 活動하고 있는 조 氏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事事件件 劇的인 삶’을 살아왔다는 그가 숱한 傷處를 딛고 라일락을 꽃피우게 되기까지의 過程 (https://youtu.be/jb2PjrtmKcA)과, 아이돌 히트송 作曲 祕訣(https://youtu.be/ix4ZdK8N0Zs)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닥터 組는 中學校 時節 作曲家를 꿈꾸는 親舊를 보며 音樂에 對한 漠然한 憧憬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音樂을 ‘業’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模範生이었던 그는 醫療奉仕를 다니는 醫師를 目標로 熱心히 工夫해서 醫大에 進學합니다. 하지만 幼年時節의 꿈이 그의 內面에서 꿈틀거리기 始作했습니다. 學業은 뒷전이었습니다. 授業이 끝나면 聽力小室이 올 程度로 作曲에만 沒頭했습니다. 醫師와 作曲家를 苦悶하던 中, 榜示革 當時 빅히트엔터테인먼트 代表의 한 마디가 그를 흔들었습니다. “懇切히 願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抛棄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熱心히 工夫해서 高麗大 醫大에 進學한 模範生이셨어요. 音樂을 어떻게 始作하셨나요? 中學校 때부터 音樂을 좋아했지만 本格的으로 作曲을 始作한 건 醫大 進學 後 豫科 때부터예요. 作曲이 너무 재밌어서 只今이라도 始作을 안 하면 죽기 前에 後悔할 것 같았어요. 樂園商街에서 피아노, 스피커 等 作曲 裝備를 12萬 원 들여 사서 들쳐 메고 집에 왔어요. 값싼 裝備들로 授業이 끝나면 집에서 밤을 새우며 데모曲을 만들었어요. 音樂을 너무 많이 들어서 古音 音域臺가 잘 들리지 않는 聽力小室이 왔을 程度예요. 音樂을 제대로 工夫해본 적은 없어요. 只今도 和聲學을 全혀 모르고 코드(和音)도 못 읽어요. 感으로 하는 거죠. ―醫師와 作曲家를 苦悶하다가 榜示革 하이브 議長 때문에 意思를 그만 두셨다고요? 當時 榜示革 議長님이 JYP를 나와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차렸을 때였어요. 房 議長님이 作曲家 志望生들을 爲한 온라인 카페 ‘퓨처 프로듀서’를 만드셨어요. 學窓時節 偶像에게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게 正말 좋은 機會잖아요. 카페에 10個 씩 데모曲을 올렸는데 房 議長님이 그걸 보시고 ‘新人답지 않은 可能性이 보인다’는 댓글을 달아 주셨어요. 그게 因緣이 돼서 實際로 뵀는데, 醫師와 作曲家를 苦悶하는 저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 힘들다. 두 가지 中 더 懇切히 願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때 決斷이 섰어요. ―醫師가 아닌 作曲家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周邊 反對는 없었나요?부모님은 音樂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못 하셨어요. 저에게 “왜 그렇게 音樂에 목을 매냐. 빨리 醫師로 就職해서 돈 벌고, 남들처럼 平凡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제가 남의 말을 듣긴 하지만 參考만 하고, 結局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해야 直星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發掘은 榜示革 議長님한테 됐지만 契約은 JYP와 하셨더라고요.제가 中學生 때부터 JYP 音樂을 正말 좋아했어요. 지오디, 朴芝潤, 별, 비의 音樂을 들으며 자랐죠. 軍醫官 時節 退勤 後 밤새 作曲한 데모曲을 無作定 JYP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新人開發팀 內鮮番號로 電話도 걸었어요. 어느 날 “2AM이라는 그룹이 곧 데뷔하는데 이 曲으로 練習을 시켜 보겠다”고 答이 왔죠. 제 曲이 앨범에 實利眞 않았지만 그 過程에서 朴軫永 PD님도 알게 됐고, JYP와 퍼블리싱 契約도 맺게 됐어요. JYP와 契約을 맺은 뒤 그의 커리어는 坦坦大路였습니다. 2AM, 갓세븐, 미스에이의 멤버 페이, 트와이스 等 JYP를 代表하는 人氣 아이돌 그룹과 作業하며 作曲家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습니다. 人氣 걸그룹의 타이틀曲 作詞와 作曲, 憧憬하던 JYP 所屬 歌手의 타이틀曲 프로듀싱까지. 作曲家라면 누구나 꿈꿨을 機會가 한 瞬間에 危機로 突變한 瞬間들이 잇따랐습니다. 曺 氏는 그 때 “끝까지 (잘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 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結果에 책임지지 않는 懶怠함이 아닙니다. 過程에는 最善을 다하되, 自身의 意志로 바꿀 수 없는 結果에는 執着하지 않는 超然함을 기른 것입니다. ―榜示革, 朴軫永 等 當代 最高 프로듀서에게 인정받으면서 坦坦大路를 걸으셨어요. 作曲家로서 가장 힘들었던 瞬間은 언제에요? 걸그룹 구구단의 타이틀曲 ‘나 같은 애’의 作詞, 作曲을 맡았을 때였어요. 그 때 “왜 저런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作曲家를 붙여서 歌手 앞길을 막느냐”부터 始作해서 “父母님을 害코지하겠다”는 內容까지 音源 사이트 댓글窓을 塗褙했어요. 너무 衝擊을 받아서 악플러들을 告訴할까 苦悶도 했는데, 先輩 作曲家분들이 “告訴 過程에서 精神的으로 더 疲弊해 질 거다”라며 말리셨어요. 걸그룹 타이틀曲을 맡았다는 게 作曲家로서는 重要한 발돋움이기 때문에 그 時間을 否定的으로 浪費하지 말고, 좋은 機會로 여기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원더걸스 出身 유빈의 첫 솔로앨범 타이틀曲 ‘淑女’의 作詞, 作曲, 編曲까지 맡으셨는데 그 때도 心理的으로 힘드셨다고요. 中學校 때부터 JYP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作曲家로서의 첫 目標價 JYP에서 타이틀曲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유빈의 ‘淑女’는 그 目標를 이룬 曲이에요. 제가 作詞, 作曲, 編曲까지 맡았거든요. 죽어도 餘恨이 없을 程度로 幸福했어요. 그런데 豫想치 못한 ‘倭色論難’李 一角에서 提起됐어요. 淑女는 시티팝 장르의 曲이라 시티팝이 胎動한 日本의 1970~1980年代 버블 時代의 雰圍氣가 묻어 있어요. 다만 日本의 當時 雰圍氣를 再演한 것이지, 讚揚한 것은 아니거든요. 倭色論難으로 努力들이 묻히는 것 같아 씁쓸했죠. ―作曲家님의 代表曲 ‘라일락’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2019年 末에 傳貰사기를 當했어요. 新築빌라에 2年 傳貰로 들어갔는데 契約 直後 집主人이 바뀌어있고, 저와 契約한 집主人의 連絡도 杜絶된 거에요. 結局 保證金을 돌려받긴 했지만 그 過程이 너무 고통스러웠고, 收入 없이 貸出金 利子를 갚으면서 經濟的으로도 힘들어졌어요. 돈을 벌기 위해 韓方病院을 나가야 했죠. 물 마실 時間도 없이 하루에 患者를 100名 넘게 診療했어요. 그 時期에 ‘라일락’을 作曲했어요. 다시 오지 않을 機會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쏟아 부었어요. 病院 退勤 時間에 맞춰서 저녁食事를 注文해놓고, 집에 到着하자마자 빨리 밥을 먹은 뒤에 새벽 4時까지 曲을 만들었어요. 午前 9時가 되면 病院으로 出勤하고요. 그렇게 만든 曲이 타이틀曲이 되고, 음원차트 1位에 오른 過程이 全部 非現實的이었어요. ―‘나 같은 애’의 惡플, ‘淑女’의 倭色論難, 傳貰사기까지…. 삶의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 瞬間을 이겨내고 ‘라일락’을 만드신 거네요. 멘탈 官吏는 어떻게 하세요? 저는 멘탈이 剛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끝까지 믿지 않아요. ‘이 曲은 大舶이 날 거야’라고 期待하면 잘 안 되더라고요. 反對로 ‘나는 안 된다’ ‘이게 成功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거꾸로 생각하니 結果가 잘 안 나와도 失望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代身 過程에는 後悔가 남지 않게 最善을 다해요. 結果에는 超然한 마음을 가지려고 스스로에게 注文을 많이 걸어요. ―期待 안하려 해도 期待하게 되고, 結果가 안 좋으면 落膽하게 되잖아요. 結果에 超然한 마음은 어떻게 갖게 되신 건가요? 제 삶이 事事件件 劇的이었어요. 醫大 時節 血壓이 200 가까이 올라서 죽을 뻔한 적도 있고, 傳貰사기도 當했고요. 作曲家가 되고 나서도 힘들게 發賣한 타이틀曲이 辱을 먹거나, 最善을 다한 曲이 美發賣되는 過程을 지나면서 ‘아무리 努力하고 발버둥쳐도 안 풀릴 때는 안 풀리는구나’를 배웠어요. 단단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흔들리는 瞬間, 當然히 오죠. 타고난 性向이 計劃的이고 생각이 많아서 不安한 瞬間이 오면 잠도 못자고 ‘생각의 버튼’을 끌 수가 없어요. 그런 나 自身을 탓하지 않아야 해요. 끝없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나 自身을 탓하는 瞬間 더 힘들어져요. 내 便은 結局 나밖에 없어더라고요. ―作曲家 志望生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끝이 없는 努力은 없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으니 機會가 되고 에너지가 있을 때 後悔가 없을 程度로 努力하세요. 언제까지나 힘들지는 않을 거에요.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4-01
    • 좋아요
    • 코멘트
  • “개한테 눈도 부라리지 마세요”…‘1세대 開通令’ 齒科醫師 박창진[復讐者들]

    伴侶動物 人口가 1500萬 名을 넘어선 時代. 어떤 이들에게 動物은 家族과 다름없는 存在가 됐습니다. 말 못하는 動物의 行動들이 어떤 意味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유튜브에는 ‘개가 짖는 理由’ ‘고양이가 좋아하는 映像’ 같은 映像이 많이 올라옵니다. TV엔 ‘開通令’이라 불리는 訓鍊師가 나와 動物의 行動을 分析하고 矯正해주는 콘텐츠가 汎濫합니다. 只今으로부터 20餘 年 前에도 ‘1世代 開通令’이 있었습니다. 강형욱 氏처럼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분이었죠. 근데 訓鍊師는 아닙니다. 獸醫師나 動物行動學者度 아닙니다. 23年째 서울 麻浦區 弘益大 隣近에서 病院을 運營하는 齒科醫師 박창진 院長(53)입니다.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檢索하면 그間 거쳤던 수많은 職銜이 쏟아집니다. ‘韓國伴侶動物 奉仕團 代表’ ‘動物行動硏究 協會員’ ‘動物補助治療協會 代表’ ‘사람과 動物의 올바른 紐帶關係를 생각하는 모임인 韓國 HAB協會 代表’…. 本業 齒科醫師보다 伴侶動物에 眞心이었던 그는 “멋진 風采의 獨逸産 세퍼트件 族譜를 알 수 없는 洞네 바둑이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訓鍊만 거치면 모든 개는 ‘개 以上의 개’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지난달 27日 서울 마포구에 있는 病院에서 伴侶犬 行動 矯正 專門家 그리고 28年째 齒科醫師로 살고 있는 ‘복수자’ 박창진 院長을 만났습니다. ‘援助 開通令’李 알려주는 ‘개 以上의 개’로 키울 수 있는 강아지 訓鍊法()과 平生 齒科 안 가도 되는 齒牙 管理法()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齒科醫師가 된 건 1995年, 伴侶犬 行動 校庭 일을 本格的으로 始作한 건 2000年代 初였습니다. 獸醫大를 나온 것도 아니고 訓鍊師 일을 專門的으로 배우지도 않았지만 愛犬人이었던 아버지 德分에 어린시절 그는 언제나 개와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치와와부터 세퍼트, 珍島개, 요즘말로 ‘時고르 자브種’이라 불리는 雜種犬도요.―자연스럽게 個와 가까워지신 거군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恒常 개가 있었어요. 只今도 키우고요. 아버지께서 動物을 되게 좋아하셨죠.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기도 하고 다른집 개한테 물려보기도 했어요. 개와 關聯된 다양한 經驗을 두루 했어요.”―개를 키우는 걸 넘어서 ‘行動 矯正’에 關心을 갖게 된 契機는 무엇이었나요. “2002年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開催됐어요. 國際 行事가 열리면서 개를 키우는 文化도 바뀌기 始作했죠. 補身湯 文化는 地下로 숨었고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室內로 들여오는 文化가 생겼어요. 伴侶犬 文化가 流行처럼 번지다보니 葛藤과 分裂도 많았죠. (개를 키울) 準備되지 않은 狀態에서 개를 집에 들였다, 到底히 못 키우겠다며 버리는 境遇도 많았고요. 그때 遺棄犬이 大幅 늘었습니다.”―신구(新舊) 文化가 섞였던 混沌의 時期였네요 “한쪽에선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다른 쪽에선 ‘먹는 개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서로를 非難하고 손가락질하는 狀況이 안타까웠죠. 전 어려서부터 개를 키워봤잖아요. 집에서 개를 키우면 正말 좋거든요. 개나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心理的으로 安定되고 病이 治癒되는 效果도 있어요. 개와 사람들 모두 幸福하고 和睦할 수 있는 方法이 있을 텐데…. 그 무렵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사람과 動物이 더불어 幸福해지는 方法은 없을까 苦悶하던 그는 ‘動物 補助 治療’를 始作하게 됩니다. ‘動物 補助 治療’는 개,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鎭靜되고 便安해지는 것을 利用해 人間의 疾病을 治療하는 方法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醫師 役割을 하는 거군요. “그래서 訓鍊이 必要하다는 거예요. 一般 골든 리트리버가 盲人 案內犬이 되려면 오랫동안 訓鍊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요. 근데 前 트레이닝(training·訓鍊)보다 에듀케이션(education·敎育)을 하자고 이야기했어요. 訓鍊과 敎育은 接近부터 다르거든요.”―훈련과 敎育, 어떤 差異點이 있나요? “訓鍊은 같은 行動을 反復을 통해 練習시키는 거예요. 敎育은 個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自己 行動을 決定하게 만드는 거죠. 特定 行動을 誘導하기 위해선 心理를 알아야 해요. 그러다보니 自然스럽게 ‘動物心理’ ‘動物行動學’을 더욱 工夫하게 됐습니다.”그는 개의 行動 心理를 把握하기 위해 人間의 心理에 關한 硏究書籍을 耽讀했다고 합니다. ‘스키너의 箱子’로 有名한 美國의 心理學者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1904~1990)부터 非强壓的 訓鍊方法을 考案해낸 動物行動學者 카렌 프라이어까지. 그는 “개와 人間은 똑같지 않지만 같은 哺乳類高 腦에는 前頭葉이 있다”며 “사람으로 치면 3~4살 程度의 知能이 있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3~4살짜리 어린 아이를 다루듯 개를 對해야 하나요. “어린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도 마찬가지예요. 때리는 건 勿論이고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안돼요. 暴力, 强壓으로 개를 訓鍊하면 一時的으로 말을 들을 순 있어요. 근데 그건 개가 狀況을 謀免하려고 主人 눈치를 보는 거예요. 校門 앞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先生님과 先生님을 避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學生 같이 되는 거죠.”―감시자와 被監視者의 關係가 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 訓鍊을 持續하면 主人과 개 사이에 紐帶가 全혀 形成되지 않아요. 主人을 좋아하고 尊敬해서 말을 잘 듣게 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말 못하는 動物이잖아요.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理解하려고 더 많은 努力을 해야 하는데 그 程度로 努力하지 않는 거예요.”그는 一部 訓鍊社들이 行하는 바디 블로킹(강아지 앞을 가로막는 訓鍊法)이나 목줄 잡아당기기 같은 ‘强制的 訓鍊法’은 最少化해야 한다고 助言했습니다. 개가 나쁜 行動을 했을 때는 ‘無反應’으로 對應하고 나쁜 行動을 멈추면 補償을 해주는 肯定的 强化 訓鍊이 必要하다는 겁니다.―개가 나쁜 行動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기다려야죠.(웃음) 참敎育엔 忍耐가 必要합니다. 子息 敎育도 그렇잖아요. 强壓的 訓鍊은 반드시 限界에 逢着합니다. 채찍질하는 監視者(主人)가 없으면 否定的 行動이 다시 나와 버려요. 개가 나쁜 行動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確實하고 一貫性 있는 補償을 주는 것이 重要합니다.”―제대로 된 敎育을 위해선 무엇부터 始作해야 하나요. “하루에 5分도 좋고 10分도 좋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키우는 動物을) 觀察해보세요. 쟤는 왜 저기 가서 짖을까, 마루를 빙글빙글 도는 理由는 뭘까. 動物 立場에서 苦悶하는 時間을 갖는 거죠. 참을性 있는 觀察이 敎育의 出發입니다.” 그는 本業인 齒科醫師로 일할 때도 ‘觀察’을 가장 重要하게 생각합니다. 患者의 口腔 內部가 아니라 患者의 行動이나 生活習慣을 觀察하는 겁니다.―정신의학과도 아닌데 患者의 行動이나 生活習慣을 觀察하는 理由는 무엇인가요. “그걸 알아야 왜 蟲齒가 생기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웃음) 우리가 普通 醫療人을 英語로 表現하면 헬스 케어 프로페셔널(health care professional)이라고 해요. 헬스, 卽 健康을 케어하는 專門家라는 뜻이죠. 故障 난 齒牙만 治療하는 게 아니라 齒科治療 없이도 健齒를 維持할 수 있게 管理해주는 役割입니다. 只今의 醫療 시스템에선 治療하는 醫師만 돈을 벌 수 있어요. 健康을 維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醫師에게도 補償이 갈 수 있게 바뀔 必要가 있죠.”박창진 院長은 個의 心理를 分析하고 行動을 矯正했던 것처럼 어린이들이라면 으레 갖는 ‘齒科 恐怖症’ ‘病院 恐怖症’에 對해서도 오랫동안 觀察해왔다고 합니다. 어린 患者들은 病院, 特히 齒科에 가는 걸 무서워합니다. 트라우마가 이어져서 어른이 된 後에도 齒科만은 가기 싫다며 蟲齒를 묵혀두는 사람도 種種 있습니다. 그는 “齒科恐怖症은 다름 아닌 父母에게서 始作되는 境遇가 大多數”라고 말했습니다.―치과공포증이 父母에게서 始作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父母님이 아이들 교육시킬 때 이렇게들 말씀하시잖아요. ‘너 이렇게 이빨 안 닦으면 齒科 先生님이 이빨 다 뽑아버린다!’ ‘젤리나 초콜릿 같은 거 자주 먹으면 나중에 齒科가서 注射 맞는다!’ 이런 말들이요.(웃음) 齒科醫師라는 存在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假想의 恐怖를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齒科 소리만 나오면 아이들은 온갖 想像을 펼치는 거죠. 거기서부터 恐怖가 始作돼요. 子女들이 齒科 治療를 잘 받기 願한다면 先入見을 심어주지 않으심 돼요. 다른 病院도 마찬가지고요.”―환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患者 自體를 들여다보시네요. “사람이 病에 걸리는 過程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性格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平素 어떤 藥을 먹는지, 生活 習慣은 어떤지. 이런 게 重要하단 말이에요. 病 以前에 人間을 먼저 알아야 제대로 된 治療를 하고 豫防을 도울 수 있어요. 醫師는 患者에게 어떤 느낌을 줘야 하냐면, ‘이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구나’ ‘이 사람은 내가 健康하도록 神經을 써주는 사람이구나’ 같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해요. 그래야 醫師가 아니라 醫師 ‘先生님’으로 불릴 수 있지 않겠어요.” ―齒科가 아니라 精神醫學科를 갔어도 잘 맞으셨을 것 같아요. “다시 選擇하라고 해도 齒科예요. 어렸을 때부터 뭔가 만들어서 形體가 나오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精神醫學科는 形體가 없는데 齒科에는 形體가 있잖아요. 工作(工作) 같은 作業이 適性에 맞아요. 예전에 建築 인테리어 會社를 잠깐 運營하기도 했어요. 只今 運營 中인 病院도 直接 지은 거예요.”―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喜悅을 느끼는 便인가요. “建築이나 인테리어는 짧으면 한 달, 길면 6個月 程度면 눈앞에 뭐가 짠하고 나와요. 齒牙 矯正은 훨씬 길어요. 數年 間 治療하고 管理해야 結果가 나오죠. 齒솔질로 健康해지는 건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요. 사람을 붙들고 2, 3年을 가르쳐야 하거든요. 그래선지 短期間에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도 해보고 싶었나 봐요.”치과의사로 살면서 建築, 인테리어 事業에 動物 行動 矯正 治療까지…. 多方面에 活躍하며 眞正한 복수자로 살고 있는 그에게 人生觀을 물었습니다. “人生은 圖畫紙 위에 點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點을 찍다보면 언젠가 그 點들이 線으로 連結될 수 있고, 點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色으로 번져서 全體 領域이 넓어질 수 있죠. 그러다 보면 흰 圖畫紙가 검은色으로 바뀔 수 있어요. 빈 圖畫紙에 點을 찍어나가는 게 여태껏 제가 살아온 方式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記者 jetti@donga.com}

    • 2023-03-25
    • 좋아요
    • 코멘트
  • 낮엔 職場人, 밤엔 와인바 社長… ‘코時局’에도 年 7億 番 이 男子[復讐者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서울 中區 비좁은 印刷골목에 位置한 와인바 ‘十分醫日’, 서울 江南區 街路樹길에서 始作해 4號店까지 낸 와인바 ‘審퍼티쿠시’…. 이곳들의 共通點은 會社를 다니던 平凡한 職場人이 三三五五 意氣投合해 차린 와인바라는 點입니다. MZ世代 사이에서 ‘N잡’ 烈風이 불면서 會社를 다니며 料食業 創業을 하는 이들이 많아진 탓입니다. ‘龍山國際業務地區’가 들어섬에 따라 再開發될 豫定인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 이곳에 자리限 와인바 ‘드포레’ 亦是 8年 次 職場人 이민우 氏(假名·35)가 親舊들 두 名과 함께 차린 곳입니다. 낮에는 職場人, 밤에는 와인바 社長으로 사는 그에게는 週末이 없습니다. 週中에는 會社를 다니고, 週末에는 ‘드포레’로 出勤하기 때문입니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李 한창이던 2021年 末 와인바를 創業해 營業時間制限이라는 難關에도 不拘하고 年賣出 7億 원을 達成하며 順航 中입니다. 職場人들은 한 番쯤 “나도 와인바나 할까?”라는 생각, 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會社와 와인바 竝行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月火水木金金金’을 사는 근면함은 勿論이고, 新메뉴 開發, 손님 管理, 店鋪 擴張 計劃, 職員들과의 疏通까지 神經 써야 할 일이 끝도 없습니다. 旅行地에 노트북을 들고 가고, 退勤 後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할 程度로 일과 삶이 섞여 있지만, 이 氏는 2年 前으로 돌아가도 와인바를 創業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기에 後悔 없이, 하고픈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는 그를 ‘復讐者들’이 지난달 24日 ‘드포레’에서 만났습니다. 그가 이토록 熱心히 사는 理由(https://youtu.be/FwBOSw0WAPc)와, 年賣出 7億 원을 達成한 팁(https://youtu.be/X8GOLKMh634)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와인바 創業을 決心한 契機가 궁금해요. 會社를 다니다보니 제가 올라갈 수 있는 位置의 限界가 보이더라고요. 챗GPT 等 AI가 사람의 役割을 代替해가면서 勤勞 壽命도 짧아지고 있잖아요. 職業 하나만으로는 未來가 保障되지 않는 것 같아요. 會社에서 더 以上 저를 必要로 하지 않을 때 唐慌하기보다 只今부터 차근차근 準備해서 일할 수 있는 壽命을 最大限 延長하고 싶었어요. “난 이제 뭐 해 먹고 살지?”라는 苦悶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가 無氣力하게 느껴지기 싫어요.―카페, 食堂 等 다양한 選擇肢 中 왜 何必 와인바였나요? 첫 番째로 考慮한 건 ‘短歌’였어요. 燒酒를 파는 飮食店은 座席이 每日 가득 車도 일 賣出이 높지 않아요. 술을 팔아야 돈이 남는데, 그中에서도 高價의 술을 파는 게 높은 賣出에 유리해서 와인을 擇했어요. 두 番째로는 와인바에는 注射를 부리는 醉客이 다른 食堂에 比해 相對的으로 덜합니다. 接客이 相對的으로 수월할 것이라고 判斷했어요. 마지막으로는 저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었어요. 나중에 벤처를 創業하고 싶은데, 미리 人脈을 쌓고 親해지기에 와인바가 가장 좋을 것 같았습니다. ―會社와 竝行하기 힘드시지 않나요? 1週日 스케줄이 궁금해요. 月曜日부터 金曜日까지는 午前 9時부터 午後 6時까지 會社 勤務를 하고, 金曜日 退勤 後부터 土曜日, 日曜日은 와인바에서 일합니다. 週中에 會社 退勤 後 와인바로 出勤하는 삶도 살아 봤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會社 生活에 充實할 수가 없어서 週中에는 會社 일에만 集中하고 있어요. 金曜日에 와인바 整理하고 집에 가면 새벽 1時에요. 土曜日 點心까지 쭉 자다가 午後 5時쯤 와인바로 다시 出勤하죠.―회사 다니기도 힘들다는 職場人이 많아요. 이렇게 熾烈하게 사는 理由가 있나요? 저도 어렸을 땐 樂天的이고 걱정 없는 性格이었어요. ‘난 無條件 잘 될 거야’라는 漠然한 確信도 있었고요. 그런데 21살 때부터 家勢가 기울었어요. 내가 當然히 누리던 것들이 當然하지 않게 되면서 毒하게 돈을 벌기 始作했어요. 제 通帳 殘高는 늘 萬 원이 안 됐거든요. 高等學校 卒業한 瞬間부터 집에서 一切 經濟的 支援을 받지 않았고, 會社 인턴과 課外 4個를 竝行하면서 父母님께 用돈을 드렸어요. ―職場人과 와인바 社長,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本人만의 루틴이 있나요?잠들기 前에 來日 할 일을 스마트폰 캘린더에 全部 다 적어요. 正말 別것 아닌 것까지도요. 日程은 他人과 한 約束이잖아요. 絶對 잊어버리지 않고, 남들에게 約束한 內容을 반드시 期限 內에 實行하기 위해서 全部 다 적습니다. 自營業者들이 ‘줄倒産’하던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料食業을 創業하기 위해서는 危機를 機會로 바라보는 大膽함이 必要했습니다. 코로나19로 門을 닫은 食堂들의 特徵이 무엇인지 失敗 事例를 工夫했고, 差別化를 위해 미슐랭 레스토랑들을 全部 돌며 特徵을 把握했습니다. 當時 權利金은 바닥을 쳤던 狀況. 再開發이 豫定된 용산에 ‘權利金 0원’으로 空間을 賃貸했습니다. ―코로나19街 한창 擴散세일 때 創業을 決心하셨어요.식당 營業時間制限이라는 危險 要因도 있었지만 1年 以內로 潛潛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當時 權利金이 거의 바닥을 쳤을 때예요. 特히 第 와인바가 있는 地域은 龍山國際地球가 들어오면서 早晩間 再開發될 豫定이거든요. 그래서 權利金이 0원이었어요. 最小化된 豫算으로 와인바를 차려서 이 時期를 잘 버티자는 생각이었죠. 또 제가 創業을 準備했던 때는 코로나19街 1年 지난 時點이라 失敗 事例를 스터디했어요. 門 닫은 가게들의 共通點은 住居地區, 오피스 地球, 遊興地區 等 ‘單一商圈’에 位置했다는 點이더라고요. 特徵을 하나만 가진 商圈은 危機 狀況에 더 脆弱합니다. 그래서 저는 重複商圈 爲主로 場所를 物色했어요. 龍山, 功德, 良才, 仙遊島 等 住居地球와 오피스地球가 婚材해있는 地域들이 候補였고, 그中 가장 權利金이 싸면서도 住民들의 所得水準이 높은 용산을 擇했습니다. ―‘미슐랭 레스토랑’ 等 잘되는 와인바를 돌아다니며 調査도 많이 하셨다고요. ‘핫플’들의 共通點이 있나요?이미 完璧한데도 繼續 變化를 試圖하고, 그 變化가 不便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다가오는 곳들이 있어요. 그런 와인바들은 社長님이 賣場에 常住하면서 하나하나 細心하게 神經을 써요. 메뉴를 2~3個月 單位로 바꾼다거나, 커틀러리(食器)를 바꾸는 式으로요. 事實 社長이 헤드셰프(廚房長)가 아닌 以上 新메뉴를 繼續 開發하는 건 正말 힘든 일이에요. 하나의 메뉴를 開發하기까지 正말 많은 人力과 資源이 들어가거든요. ―코로나19를 通한 失敗 事例 스터디, 미슐랭 레스토랑 硏究 等 緻密하게 事前 調査를 하고 와인바를 차리셨네요. ‘드포레’만의 差別點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손님들이 不便해하실 만한 部分들을 빠르게 把握하는 거요. 손님들이 말하기 前에 先制的으로 액션을 取하려고 해요. 例를 들어 물甁에 물이 조금만 남아있다고 하면 조용히 새 물甁을 놓아 드려요. 職員을 뽑을 때도 따뜻하고 責任感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해요.―오지게 착한데 일 못하는 職員, ‘싸가지’는 더럽게 없는데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職員 中 누구를 擇하시겠어요?전 착하고 일 못 하는 職員이요. 일이라는 게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第一 많이 받잖아요. 싸가지 없는 職員 한 名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면 全體的인 일에 能率이 되게 떨어지게 될 것 같아요. 職員들이 일하기 싫은 空間이 되면 안 되죠. ―이곳을 ‘네트워킹 아지트’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손님들과 交流도 하시나요?단순히 高價의 와인을 시킨다거나 좋은 職業을 가진 사람들과 人脈을 形成하려고 하진 않아요. 몇 마디 對話를 나눠봤는데 저와 共通的인 關心事가 있거나 性向이 잘 맞는 손님들과는 個人的으로도 連絡을 하는 便이에요. 제가 먼저 連絡處를 여쭤보기도 하고 손님이 먼저 名銜을 주시는 境遇도 꽤 많아요. 本人의 賣場처럼 便하게 느끼시면서 利用하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올해 料食業 創業을 計劃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것만은 꼭 지켜라, 팁을 주신다면?가장 重要한 건 내가 願하는 位置의 不動産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드포레’는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찾기 힘들고, 그게 賣出에 큰 影響을 주거든요. 똑같은 맛과 서비스라도 어디에 位置했느냐에 따라 存廢가 나뉘어요. 두 番째는 제 人生 價値觀이기도 한데 ‘스몰 석세스’라는 單語를 實踐하는 거예요. 큰 目標를 잡고 長期間 달려가기보다 작은 目標를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瞬間 큰 目標도 이루게 될 거라고 믿어요.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3-18
    • 좋아요
    • 코멘트
  • “退社요? 絶對 안 합니다” 老圃 紹介하는 職場人 유튜버 ‘김사원세끼’[復讐者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간판도 없는 허름한 老圃에 ‘이 사람’만 다녀가면 줄이 늘어섭니다. 全國 곳곳에 숨어 있는 老鋪를 紹介하는 유튜버人 세끼 먹는 김사원, ‘김사원세끼’(아래 김사원)입니다. 자꾸 생각 나는 中毒的인 말套, 廣告와 協贊은 一切 받지 않는 뚝심은 基本입니다. ‘美國人들의 丈母님宅’ ‘膾집系의 홍성대, 膾집의 定石’처럼 ‘病맛’과 天才性을 絶妙하게 오가는 描寫力에 힘입어 2020年 1月 유튜브를 始作한지 3年 만에 購讀者가 40萬 名을 넘었습니다. 1週日에 廣告와 協贊 提議가 5件 넘게 들어옵니다. 빅뱅의 大聲, 188萬 名의 購讀者를 保有한 유튜브 채널 ‘피식大學’은 김사원세끼를 패러디한 유튜브 映像을 本人의 채널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셀럽들의 셀럽’李 된 김사원에게 本業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事實 6年次 職場人입니다. 映像에서 얼굴을 公開하지 않고 平素와 다른 목소리를 演技하는 理由도 會社 內 ‘兼業禁止條項’ 때문입니다. 寺院 3年次에 찾아온 슬럼프를 털어내고자 유튜브를 始作했습니다. 退勤 後 허름한 食堂에서 親舊들과 술 한 盞 하는 小小한 日常을 映像에 담기 始作했습니다. 會社에선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그는 유튜브 世界에서 숨겨왔던 自我를 表出합니다. “會食을 하면 山海珍味도 흙맛이죠” “저희 會社는 40年 傳統의 변함없는 月給 맛집(몇 年째 凍結)”과 같이 部長님 앞에서는 털어놓지 못했던 眞心을 速射砲로 쏟아냅니다.10분 짜리 廣告 한 件當 職場人 年俸과 맞먹는 돈을 벌수도 있지만 그는 “絶對 退社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튜브는 徹底히 ‘趣味’로 하겠다는 鐵則 때문입니다. 유튜브가 本業이 되는 瞬間 老圃에 가는 것도, 週末에 映像 編輯을 하는 것도 “일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그는 낮에는 金 代理, 밤에는 김사원으로 살아가는 只今이 幸福하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쉴 時間이 있냐”고 묻지만 그에게는 撮影과 編輯이 ‘힐링’이자 쉬는 時間입니다. 유튜버라는 ‘副캐’를 어머니에게도 숨기고 隱密한 趣味生活을 持續해 온 김사원을 ‘復讐者들’이 지난달 9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會社보다 유튜브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會社를 그만 두지 않는 理由()와, 3年 만에 40萬 購讀者를 保有한 人氣 유튜버가 되는 祕法()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徹底히 身上을 가리는 ‘神祕主義 유튜버’로도 有名하세요. 購讀者 40萬 名을 保有한 4年次 유튜버가 됐는데 周邊에서 알아차린 사람 없나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어머니도 모릅니다. 用돈 올려달라고 하실까봐 祕密로 하고 있습니다. 弄談이고요. 가장 가까운 사람에서 始作해 한두 名씩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祕密이 깨지기 때문에 徹底히 숨기고 있어요. 제가 유튜브 하는 건 저와 老鋪를 가는 極少數의 切親들만 압니다. 손가락 안에 꼽아요. 會社에서 “너랑 말套 비슷한데 너 아냐?”라며 제 유튜브 映像 링크를 보낸 先輩도 있었습니다. 등에서 땀 한 줄기가 흘렀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죠. “저 유튜브 잘 안 봅니다”라고 잡아뗐습니다. ―유튜브를 始作한 契機가 궁금해요.원래 맛집 紹介 유튜브를 즐겨 봤습니다. 그러던 中 ‘내가 이것보다는 잘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때 職場人 3年次라 會社生活에 슬럼프도 왔어요.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죠. 제가 實際로 親舊들과 退勤하고 한 盞 하는 걸 즐기거든요. 제 趣味를 유튜브 映像에 담아보자는 게 始作이었습니다. 巨創한 契機 같은 건 없었어요. ―2020年 1月 첫 映像을 올리고 不過 3年 만에 購讀者 40萬 名이 됐어요. 正말 빠른 速度인데 채널 ‘떡床’ 時點이 언제였나요? 저도 유튜브 始作한지 한 달 동안은 照會數가 100回 程度 나왔어요. 購讀者는 44名이었습니다. 그때 目標價 1年 안에 購讀者 1萬 名을 모으는 거였어요. 그러다 2020年 2月에 올린 李某카세(이모와 오마카세를 합친 말) ‘나드리食品’ 映像이 떡床의 出發이었어요. 그 後부터 照會數가 1000回 씩 나오기 始作했고, 7個月 만에 購讀者 10萬 名이 넘었어요. 2020年 11月에 유튜브 채널 ‘피식大學’에서 저를 패러디한 映像을 올려주신 게 두 番째 떡床 포인트였어요. 패러디 映像 照會數가 138萬 膾가 나왔어요. 그 映像이 올라가고 한 달 만에 購讀者 3萬 名이 늘었습니다. ―周邊에서 흔히 보는 老鋪를 紹介하는 5分 남짓의 映像을 왜 그렇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셨다고 생각하세요? 人氣要因을 分析해보신다면?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많은 職場人들이 共感해주는 것 같아요. 김사원은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뻔뻔한 캐릭터거든요. 그런 모습에 會社員들이 많이 慰勞를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김사원세끼’가 대단한 채널은 아니잖아요. 제가 가는 食堂들이 아무나 못가는 高級 食堂도 아니고, 그냥 周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食堂이에요. 그런 素朴함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人氣의 尺度인 廣告, 協贊 提議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一切 안받으신다고요. ‘食堂 廣告는 안 받습니다’라고 채널에 名詩를 해 놨는데도 一週日에 5件 程度 廣告와 協贊 提案 이메일이 와요. 單 한 番도 받은 적 없습니다. 率直히 흔들린 적 있긴 합니다만, 제가 食堂 廣告를 하지 않아서 購讀者 數가 늘은 건데 이제 와서 廣告를 받는 건 購讀者를 欺瞞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前 김사원세끼 채널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지, 돈을 빨리 벌고 싶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유튜브로 돈 벌 생각을 했다면 1年次 때 廣告만 하다가 이미 이 바닥 떴겠죠. 前 롱런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趣味를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광고, 協贊 받으시면 職場 年俸을 廣告 하나로 벌 수 있는데…. 退社하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유튜브는 제게 徹底히 趣味입니다. 萬若 유튜브가 本業이 된다면 生計維持 手段이 되는 거잖아요. 그럼 映像도 억지로 만들어야 하고, 드립들도 只今처럼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穩全히 콘텐츠 만드는 過程을 즐겨야 그 재미가 購讀者들에게도 傳達되지 않을까요? 勿論 上司한테 깨지고 일이 안 풀릴 때도 힘든 瞬間도 많죠. 근데 그럴 때 老圃에서 한 盞 하는 게 가장 맛있습니다. 자다 일어나서 老圃 가는 게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두 가지를 竝行하시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제가 유튜브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안 바쁘냐”고 묻는데 제가 유튜브에 들이는 에너지는 거의 없습니다. 映像 大部分 5分짜리高, 一週日에 한 個 올립니다. 映像編輯은 週末에 1時間도 안 걸려서 다 해요. 臺本을 쓰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은데 全部 애드립입니다. 저희 집에 옷방 들어가서 생각나는 대로 말해요. 退勤 後에 헬스 가고, 映畫 보고, 冊 읽고 全部 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즐기는 趣味生活을 共有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저한텐 오히려 힘이 되죠. ―會食할 땐 主로 어디 가세요? 老圃 豫約하시나요? 會食은 徹底히 프랜차이즈죠. 이춘복참치, 倉庫43, 투뿔등심을 즐겨 갑니다. 제 돈 주고 가기 힘든 食堂들 爲主로 가야죠. 食堂 豫約해야 하는 社員분들, 會食 빨리 끝내고 싶을 땐 長魚구이집 推薦드립니다. 1人分에 2萬9000원, 3萬4000원이에요. 2人分 시키면 豫算 끝납니다. 집에 가면 8時예요. ‘유튜브는 徹底히 趣味’라는 그의 말은 지나친 謙遜함일까요? 3~4分 남짓의 映像을 1週日에 한 개 꼴로 올리는데도 유튜브 始作 3年 만에 購讀者 40萬 名을 넘겼습니다. 購讀者數보다 더 重要하다는 照會數도 相當히 ‘살발’합니다. 映像 回當 平均 照會數는 42萬 回에 達합니다. 本業 유튜버들보다도 더 成功한 그는 絶對 ‘유튜브나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始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旣存 채널의 限界를 補完할 本人만의 分明한 强點이 있어야 亞流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會社 몰래 有名 유튜버 된 職場人’이라는 冊도 내셨더라고요. 유튜버로 成功하는 꿀팁을 담으셨고, 冊 購買者 對象으로 유튜브 컨설팅도 해 주신다고요. 或是 初步 유튜버들이 共通的으로 하는 失手가 있나요?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番째는 映像을 宏壯히 길게 만들어요. 찍은 걸 다 보여드리고 싶은 欲心이죠. 15分 넘어가는 映像들도 많은데 이거 다 안 봅니다. 映像 視聽 持續 時間이 宏壯히 重要한 指標거든요. 萬若 持續時間이 全體의 50%가 안 된다면 채널 成長이 어렵죠. 두 番째는 콘텐츠의 一貫性이 없다는 거예요. 例를 들어 맛집 유튜버面 맛집만 紹介해야 하는데 中間에 갑자기 기타를 치고 있고, 伴侶犬이 나와요. 勿論 저도 제 伴侶犬 ‘흰둥이’ 出演시킨 적 있습니다만, 딱 8秒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重要하게 생각하시는 게 題目과 섬네일이라고요. 映像을 아무리 熱心히 만들어도 섬네일과 題目이 보기 싫으면 그 映像은 날리는 거에요. 하나 例를 들어 드릴게요.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蠶室 맛집은 처음 봅니다’와,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맛집은 처음 봅니다’ 中 어떤 게 좋은 섬네일과 題目일까요? 두 番째에요. 첫 番째 題目은 蠶室 가는 사람만 누릅니다. 標本을 좁히면 안돼요. 누구나 누를 수 있는 題目과 섬네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맛집 紹介 유튜버라 飮食 맛이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重要할 줄 알았는데 意外에요. 勿論 맛없는 집은 안갑니다. 하지만 맛은 사람마다 基準이 너무 달라요. 第 基準에 맛있어서 紹介를 해도 맛없는 사람은 맛없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맛에 對한 專門家가 아니잖아요. 姨母님 親切하고, 價格 適當하고, 술 잘 들어가면 저한텐 그곳이 最高 맛집입니다. ―김사원 님처럼 유튜브를 副業으로 삼으려는 職場人들이 正말 많은데요, 유튜브를 始作하기 前에 꼭 記憶해야 할 點이 있을까요?‘나도 유튜브나 해 볼까?’라는 마음으로 始作하면 大部分 苦戰합니다. 本人이 즐겨 보는 채널이 있잖아요. 그 채널을 보다가 ‘내가 이것보다는 잘 만들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튜브를 始作하길 推薦합니다. 旣存 채널의 短點을 補完할 아이디어가 있어야 해요. 이미 市場을 掌握한 채널보다 單 한 가지라도 長點이 있어야 亞流가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유튜버로서의 最終 目標는 무엇인가요?사실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이룬 것 같아요. 第 元來 目標價 ‘1年 안에 購讀者 1萬 名’이었는데, 1年 동안 購讀者가 20萬 名이 됐어요. 이미 너무 큰 達成을 했어요. 그냥 제가 김사원이라는 캐릭터에 繼續 愛情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初心을 잃지 않고요. ―김사원에게 幸福이란?‘행복의 閾値’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飮食을 먹어도 幸福을 느끼는 水準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每日 오마카세 먹는 사람이 三角김밥 먹으면 안 幸福하지만 每日 三角김밥 먹다가 오마카세를 먹으면 正말 幸福하겠죠. 저는 幸福의 閾値가 낮은 사람인 것 같아요. 素朴한 것에서 幸福을 자주 느껴요. 小小한 老圃에서 親舊들과 한 盞 하는 것도 제겐 幸福이에요. 舊讀者분들도 제 채널을 통해 素朴하고 小小한 幸福을 많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幸福은 곳곳에 있죠. 日常에 있고요. 김재희記者 jetti@donga.com이지훈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3-11
    • 좋아요
    • 코멘트
  • ‘알록달록한 世上’ 모르지만…적록색약 딛고 이모티콘 作家 된 崔東錫[復讐者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알록달록한 世上’을 몰랐던 이가 있습니다. 赤色과 綠色을 區分하지 못하는 色覺障礙, ‘赤綠色約’을 안고 태어난 이모티콘 作家 ‘동동作家’, 崔東錫 氏(28) 이야기입니다. 赤綠色藥은 最近 人氣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主人公 ‘전재준’李 앓는 色覺障礙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學窓時節 先生님은 그에게 “왜 꽃을 파란色으로 漆하니?”라 물었습니다. “너 이거 무슨 色인지 맞춰봐”라는 親舊들의 짓궂은 質問에 傷處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絶對 職業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落書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림과 일부러 멀리한 건 일찍이 자라난 自激之心의 發露였습니다. 마이스터高에서 電氣를 工夫했고, 高等學校 卒業 後엔 韓國水力原子力(韓水原)에 就業해 發電機를 다루는 일을 했습니다. 애써 外面해 온 ‘本心’과 마주하게 된 건 20代 初盤 때였습니다. 會社 일에 適應하며 餘裕가 생기자 어렸을 적 趣味였던 落書가 다시 하고 싶어진 겁니다. 美術學院을 다니며 每해 띠 動物을 캐릭터로 그리기 始作했습니다. 恥部와도 같았던 色覺障礙와도 正面으로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色彩를 다루는 專門家들이 凝視하는 ‘컬러리스트 産業記事’ 資格證을 따기로 한 겁니다. 學院에선 늘 꼴찌였고, 授業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내쉬는 講師의 한숨이 匕首로 꽂히기도 했습니다. 傷處와 마주하길 自處한 그의 固執은 2017年 빛을 보기 始作했습니다. 그해 띠였던 닭을 캐릭터化한 ‘콩닭콩닭 코코닭’李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通過된 겁니다. 2018年 개띠 해에 만든 ‘찌바’는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崔 氏가 가장 좋아하는 犬種인 시바견을 캐릭터化한 찌바 1彈은 한 달 累積 販賣 數 2萬 個를 넘었습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번 年俸이 韓水原 年俸의 2倍가 되던 2018年 韓水原을 退社했습니다. 이모티콘 作家로 轉業한 그는 찌바를 8彈까지 出市했고, 이모티콘 講師로도 活動하고 있습니다.‘신의 職場’을 그만 두고 콤플렉스를 業으로 삼은 동동作家를 ‘復讐者들’이 지난달 15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만났습니다. 赤綠色藥을 克服한 그의 努力()과, ‘專業 이모티콘 作家’로 살아남는 方法()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成功한 이모티콘 作家가 됐지만 元來부터 그림에 素質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림은 그에게 避하고 싶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어렸을 땐 ‘졸라맨’ 水準의 單純한 그림만 끼적이던 少年이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 콤플렉스를 直視하기로 마음 먹게 됐습니다.―시바견을 모티브로 한 이모티콘 ‘찌바’로 큰 人氣를 끌었어요. 이모티콘 作家는 어떻게 始作하시게 된 건가요? 元來 그림과는 全혀 상관없는 일을 했어요. 就業을 目標로 마이스터高에 進學해 電氣를 工夫했고, 卒業 後 韓國水力原子力(韓水原)에서 發電機를 다루는 業務를 했어요. 反復的인 일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交代 勤務를 해서 하루를 桶으로 쉴 수 있는 날이 생겨 그 時間을 活用해 그림을 배워보기로 했어요. 每해 띠 動物을 캐릭터로 그렸고, 2017年 닭띠 해에 그렸던 ‘콩닭콩닭 코코닭’李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通過됐어요. 하루에 150~200個 씩 팔렸는데 너무 神奇한 거에요. 趣味로만 하던 제 그림을 누군가가 돈 주고 샀다는 거잖아요. 개띠 해였던 2018年에는 시바견을 모델로 한 ‘찌바’를 그렸고, 1彈부터 3彈까지 쭉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通過됐어요. ―元來 그림에 素質이 있으셨어요? 全혀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 그림 그리는 건 콤플렉스였어요. 初等學校 때 身體檢査에서 알게 됐는데 제게 色覺障礙人 ‘赤綠色約’이 있었어요. 信號燈 色 程度는 區分할 수 있지만 노란色과 黃土色처럼 가까운 色들을 붙여 놓으면 區分을 못 해요. 그림도 잘 못 그렸어요. 졸라맨 같은 單純한 그림을 끼적거리던 水準이었죠. 콤플렉스를 克服해보자는 마음으로 美術學院과 컬러리스트 産業技士 資格證 學院을 다니게 됐어요. ―컬러리스트 産業技士 資格證 試驗은 여러 色들을 섞어서 주어진 色에 最大限 가깝게 만드는 試驗이잖아요. 色覺障礙를 갖고 있는데 그 試驗에 通過하는 게 可能했나요? 컬러리스트 産業技士 資格證은 色을 專門的으로 다루는 職業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따는 資格證이라 아주 微細한 色의 差異도 區分할 줄 알아야 해요. 抛棄하고 싶었던 적도 많아요. 學院에서 주어진 色을 만드는 實習을 하는데 全 每番 꼴찌였어요. 先生님이 한숨을 쉬며 제 옆을 지나가실 때도 많았고요. 普通 물감 한 세트 다 쓰기도 힘든데 저는 두 세트도 모자랐을 程度로 밤을 새 가며 練習했어요. 처음엔 30% 가까이 되던 誤差率을 漸漸 줄여서 結局 試驗에 合格했죠. 合格點數를 가까스로 넘겼지만요.(웃음)외면하고 싶은 恥部, 모른 척 살아가도 되는 콤플렉스를 直視하기로 한 다짐 뒤에는 幼年時節의 傷處가 있었습니다. 惡意 없이 던진 親舊들의 장난, ‘未成熟’을 假裝한 差別과 따돌림의 記憶과 崔 氏는 뒤늦게라도 부딪혀보길 擇했습니다. ―赤綠色藥으로 因해 幼年時節 傷處를 받은 記憶도 있으시다고요. 親舊들에게 입고 간 옷을 자랑하려고 “李 朱黃色 옷 예쁘지?”라고 했는데 親舊들이 “그거 軟豆色인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제가 色弱이란 걸 알게 된 뒤부턴 애들이 놀다가 갑자기 “너 이거 무슨 色인지 맞춰봐”라고 質問을 던졌어요. 전 對答을 못하고 우물쭈물 했고요. 그 때 記憶이 아직도 傷處로 남아있어요. 美術時間度 싫었어요. 先生님께서 “너는 왜 이 色을 썼니?”라고 물어보시는 境遇가 있었어요. 저는 빨간色이라고 생각해서 꽃을 色漆했는데 파란色이었더라고요.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많이 萎縮됐어요. ―最近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主人公 전재준度 赤綠色藥을 갖고 있잖아요. 드라마를 보셨을 때 어떠셨어요?전재준은 學校暴力 加害者라 ‘꼬시다’고 생각했는데요(웃음), 전재준의 親딸인 ‘下예솔’도 赤綠色藥을 앓는 건 많이 안타까웠어요. 特히 꽃을 하얗게, 背景은 파랗게 漆해놓은 場面에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저도 똑같은 狀況을 겪어 봤으니까요. 色을 區分 못한다는 理由로 놀림을 받기도 했고, 幼年時節 學校暴力의 被害者가 된 적도 있어요. 中學校 때 뒤뜰로 불러서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저도 더 글로리에서 學校 暴力을 當한 主人公 ‘문동은’처럼 ‘내가 얘네보다는 잘 돼야 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그게 動機附與가 돼서 더 熾烈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모티콘에도 다양한 色이 活用되잖아요. 이모티콘 作家로 일하는데 있어 赤綠色藥이 不便하시진 않나요?제가 비슷비슷한 色을 區分하지 못해요. 그래서 일부러 正確한 色을 使用하려고 해요. 콤플렉스를 逆으로 利用한거죠. 例를 들어 찌바의 色을 定할 때도 曖昧한 黃土色 말고 누가 봐도 正確한 黃土色을 썼어요. 色을 잘 보는 親舊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親舊가 조금 더 正確한 色을 골라주면, 그 色을 貯藏했다가 꺼내 쓰는 方式으로 作業을 해요. 只今은 그 親舊와 같이 일하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꼭 그 도움을 받으세요. 施行錯誤를 겪는 것도 經驗이지만 彷徨의 時間을 줄이는 것도 重要해요. 콤플렉스를 발板 삼아 熾烈한 每日을 살아온 그는 이모티콘 作家로 큰 成功을 거뒀습니다. 찌바로 한 달에 數 千 萬원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모티콘 收益이 韓水原 年俸의 2倍가 되던 時點에는 願하는 일에 集中하고자 韓水原을 退社했습니다. 하지만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反對를 무릅쓰고 退社를 했지만 退社 直後 10番 넘게 카카오톡 이모티콘 未承認을 받으며 1年 半 동안 ‘强制的 經歷斷絶’을 겪어야 했습니다. ―韓水原이 ‘神의 職場’이라 불리는 公企業 中 한 곳이잖아요. 그만 둔다고 했을 때 周邊 反對는 없었나요?어머니의 反對가 甚해서 2年 동안 連絡을 끊고 지냈어요. 父母님 世代는 子息 잘 되는 게 本人의 자랑이잖아요. 어머니가 親舊들에게 ‘우리 아들 韓水原 다닌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고, ‘아들 하나 잘 키웠다’는 뿌듯함으로 살아가셨어요. 그런데 제가 덜컥 會社를 관둔다고 하니 ‘分明 後悔할 날이 올 거다’라며 엄청 말리셨어요. 어머니 固執이 되게 歲時거든요. 어머니를 닮아 저도 한 똥고집 하기 때문에 退社를 敢行했어요. 只今은 和解하고 잘 지내요. 이모티콘으로 번 돈으로 父母님 車도 바꿔 드렸어요.―‘언젠가 後悔한다’던 어머니 말씀처럼 韓水原 退社를 後悔하신 적 있으세요? 있어요. 찌바 3彈까지 乘勝長驅하다가, 退社 直後 낸 찌바 4彈에서 첫 未承認의 쓴맛을 봤거든요. 그 後 1年 半 동안 10番의 未承認을 겪었어요. 그 때 對人忌避症이 와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났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나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1年 半 동안 돈을 못 버니까 自尊感度 많이 떨어졌고요. ―10番이나 未承認을 받은 찌바 4彈을 어떻게 통과시킬 수 있었나요? 처음엔 캐릭터의 魅力만으로 承認을 받을 수 있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具體的인 콘셉트가 必要해요. 4彈은 ‘꼬꼬마 찌바’라고 해서 아기 찌바를 主題로 했는데 캐릭터 모션이나 멘트가 어른스러운 것들도 包含돼 있었어요. 小品이나 멘트를 더 어린 아이처럼 確固히 해서 通過됐어요. 이모티콘은 콘셉트가 正말 重要해요. 株式, 골프, 水泳처럼 내가 關心이 있는 特定 分野를 定하고, 그 分野에서 活用할 수 있는 具體的인 이모티콘을 만드는 게 核心입니다. ―요즘도 이모티콘 作家로 轉業한 걸 後悔하시나요?가끔요(웃음). 이모티콘 作家는 프리랜서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收益이 0이에요. 제가 발로 뛰어서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絶對 懶怠해져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전 이모티콘 轉業을 꿈꾸는 분들에게 ‘반드시 副業으로 해라’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 이모티콘 市場 競爭이 宏壯히 熾烈해요. 1週日에 2000~3000個 100~150個만 出市돼요. 프리랜서가 되면 收益이 不規則的이라 마음의 餘裕도 사라지고요. 처음엔 내가 좋아서 始作했는데 돈 때문에 쫓겨서 이모티콘을 만들어야 하는 狀況이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과 他人의 認定, 둘 다 얻을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長點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對한 正體性이 더 確固해졌고, 일에 對한 보람도 韓水原 때와는 比較할 수 없을 程度로 커요.―적록색약이라는 先天的 障礙를 克服하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專業 이모티콘 作家가 되셨어요. 요즘 콤플렉스를 바라보는 作家님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요. 드라마 때문에 赤綠色藥이 話題가 되면서 제가 赤綠色藥이라는 걸 알고 神奇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때 새삼 ‘아, 赤綠色藥이 나에게도 엄청난 콤플렉스였지’를 느꼈어요. 한때 제 恥部였다는 걸 잊어버렸을 程度로 只今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赤綠色約 때문에 제가 더 齷齪같이 살았고, 限界에 挑戰했기 때문에 只今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오히려 赤綠色藥에 感謝해요.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3-04
    • 좋아요
    • 코멘트
  • 農業人으로 變身한 俳優 황석정 “怪物만 演技하다 끝날까 두려웠어요”[복수자들]

    俳優 황석정(52)에게는 公式처럼 따라오는 修飾語가 있습니다. ‘新 스틸러’ ‘個性派 俳優’ ‘非凡한 外貌’…. 注目받아야 機會가 찾아오는 俳優에겐 더없이 좋은 特徵입니다. 데뷔作인 映畫 ‘고양이를 付託해’(2008년)에서 强烈한 露宿者 延期로 視線을 잡았고 映畫, 드라마, 演劇을 오가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에겐 한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平凡한 役割’을 演技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독특한 캐릭터가 내뱉는 特異한 大使는 쉬웠지만 ‘하늘이 예쁘다’ ‘바다가 푸르다’ ‘사랑한다’ 같은 日常的인 表現은 어려웠습니다. 콤플렉스를 克服하기 위해 神 스틸러 役을 提案받고도 눈에 띄지 않는 助演을 自處한 적도 있습니다. 스타 아닌 俳優로 살고 싶어 했던 選擇이었습니다. 그렇게 俳優로 10年째 살아가던 中, 드라마 ‘그女는 예뻤다’, 藝能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全盛期를 찍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家族의 扶養을 홀로 擔當하게 되고 結婚까지 約束했던 愛人과 離別했습니다. 밀려드는 苦痛으로 過呼吸이 올 程度였습니다. 當時 그의 숨筒을 틔워 줬던 건 다름 아닌 植物이었다고 합니다. 마당에 薔薇를 키우고 뒷山에 나무를 심으며 傷處는 천천히 아물었습니다. 10年 가까이 흐른 只今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웃을 수 있게 됐습니다.지난달 27日 競技 양주시에 있는 ‘미스黃팜’에서 農業人이 된 俳優 황석정을 만났습니다. 스타 아닌 俳優로 살기 위해 孤軍奮鬪했던 이야기(https://youtu.be/BdQ_rRNHpJM)와 植物을 키우며 傷處를 治癒하고 사람들과 交感하게 된 이야기(https://youtu.be/sZl3L_81CUc)를 나눴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俳優이자 農業人 황석정의 이야기를 確認할 수 있습니다.처음부터 俳優를 꿈꿨던 건 아니었습니다. 색소폰 演奏者 아버지, 聲樂을 專攻했던 어머니를 둔 德分에 자연스럽게 音樂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피리를 專攻했던 그는 서울대 國樂科에 入學해 한때 音樂人의 길을 걷습니다.―처음부터 俳優가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네요.“어릴 때는 演劇을 볼 機會가 없었어요. 地方에서 高等學校를 다녔는데 工夫만 시키는 雰圍氣였죠. ‘우리가 靑春을 이렇게 虛費할 수 없다’며 各 班에 한 名씩 모여 無作定 演劇을 練習했어요. 臺本도 없는 얼기설기한 演劇이었는데 새벽 여섯 時에 모여 한두 달 練習했죠. 祝祭 때 처음 舞臺에 섰어요. 興奮한 아이들이 拍手치면서 歡呼하더라고요. 그 歡呼聲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절 보고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거든요.”―무대 위의 感覺을 그때 처음 느끼신 거네요.“나라는 存在가 他人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經驗이었어요. 大學生이 된 後엔 ‘서울대 總演劇會’에 들어갔어요. 人間的인 苦惱, 葛藤이 담긴 演劇을 願했는데 제가 89學番이거든요. 그때 社會 雰圍氣 때문에 아무래도 社會性이 剛한 演劇이 많았죠. 제가 願하는 演劇이 아니었기에 總演劇會는 얼마 못 하고 나왔어요.”―이후 들어간 劇團이 ‘漢陽 레퍼토리’라고요.“창단 直前 公演을 봤는데 유오성, 권해효 先輩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바라던 藝術 世界가 바로 저기에 있구나’ 생각했어요. 劇團에서 설경구 先輩님, 안내상 先輩님, 이정은 언니를 만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俳優가 되겠단 꿈은 없었어요. 人間의 苦惱를 담은 藝術 自體에 興味가 있었죠.”―그런데 어떤 契機로 俳優가 되신 건가요.“포스터 돌리고 劇場 淸掃하는 허드렛일을 했어요. 근데 설경구 先輩님이 술자리에서 ‘너는 꼭 煙氣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演技하는 걸 본 적도 없으신 데도요. 그 말이 剛하게 刻印됐어요.”본격적으로 ‘俳優 授業’을 받게 됩니다. 한 番은 獨白 授業이었습니다. 準備한 演技를 선보이자 ‘漢陽 레퍼토리’를 創團한 최형인 한양대 演劇映畫學科 敎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왜 이렇게 한(恨)이 많니. 아무래도 俳優를 해야 할 것 같다.” ―勇氣가 생겼을 것 같아요.“교수님이 제게 큰 配役도 주셨어요. 主人公이었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어요. 리허설까지 했는데 公演 15日 前에 下車 通報를 받았어요. ‘未安하지만 우리 劇團을 위해 네가 물러나야 되겠다’고요.”―하차 理由가 뭐였나요?“연기를 못 했으니까요.(웃음) 에너지는 充滿했지만 準備된 건 하나도 없었죠. 演技에는 獨白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몸짓도 있고 相對 俳優와 같이 呼吸도 해야 하고…. 演技에 對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예요. 잔뜩 신났다가 人生이 完全히 무너져 내린 아이 같았죠.”배우로서 처음 經驗한 ‘拒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挫折보단 배움을 擇합니다. 大學을 卒業한 二十 代 中盤의 나이였지만 韓國藝術綜合學校 演劇院 演技과의 新入生으로 入學한 것입니다.―어리지 않은 나이에 煙氣 學校의 新入生이 됐는데요.“학교생활은 正말 즐거웠지만 演技 授業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不足함을 많이 느꼈거든요. 神話(神話) 속 캐릭터나 個性 剛한 役割은 곧잘 했는데 ‘平凡한 役割’은 아예 못했어요. 사랑, 아름다움, 슬픔 같은 基本 感情을 表現하는 演技는 到底히 못 하겠는 거예요.”―감정을 表現하는 演技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엄마가 宏壯히 嚴格하셨어요. 大學 卒業 때까지 엄마와 나눈 對話가 거의 없을 程度예요. 그러다 보니 表現이 서툴렀어요. ‘사랑해’ ‘하늘이 파랗다’ ‘꽃이 예쁘다’ 같은 말을 26살이 될 때까지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이 表現을 하려니 오죽했겠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當身을 사랑해요’라는 臺詞를 말하기도 前에 쓰러진 적도 있어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 거예요.”배우로 살아남아야 했는데 그걸(평범한 役割 演技) 못하면 할 수 있는 驛이 別로 없었어요. 繼續 怪物만 延期하다가 끝나게 될까 두려웠거든요.―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努力을 하셨나요?“다른 사람들을 觀察하기 始作했어요. 저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지? 왜 그런 表情을 짓지? 그 過程에서 ‘校監(交感)의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내가 ‘예쁘다’고 表現을 해야 相對도 ‘예쁘다’는 걸 認知하고 즐거워하잖아요. 거기에서 幸福이 오게 되더라고요.”―타인과 交感할 때 幸福을 느끼신 건가요?“표현을 해야만 對象이 實在하고 그 空氣, 그 情緖로 가득 찬다는 걸 느꼈어요. 表現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고 校監은 나를 價値 있게 만든다는 確信이 들었어요. 表現과 校監을 할 수 있다는 건 感謝한 일이라는 걸 남들보다 늦게 깨달은 거죠.”연기를 배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實際 舞臺에 서기까지 苦楚도 겪었습니다. 華城 連鎖 殺人 事件을 素材로 한 演劇 ‘날 보러 와요’ 때 이야깁니다. 처음 그는 ‘南氏 夫人’에 캐스팅됩니다. 男便이 殺人 事件 容疑者로 指目되는 바람에 警察署에 끌려와 넋두리를 늘어놓는 役割로, 110分間 單 한 番 登場하지만 强烈한 印象을 남기는 ‘新 스틸러’ 配役입니다.―‘남씨 夫人’ 말고 ‘朴記者’ 役을 달라고 要請하셨다고요.“‘박기자’는 劇 中 女子 主人公이에요. 魅力的인 女性 俳優들이 맡았던 驛이죠. 제가 하도 哀願해서 演出님이 許諾해주셨어요. 南氏 夫人과 朴記者, 1人 2役을 하게 됐죠. 근데 製作者, 俳優 할 거 없이 怨聲이 빗발쳤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같이 생긴 女性 俳優가 그런 重要한 役割을 한 적이 많지 않았거든요. 結局 舞臺에 서긴 했지만 傷處를 많이 받았죠.”―황석정 氏 外貌가 ‘朴記者’스럽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었죠. 學生 때는 敎授님께도 ‘너 媒體(映畫, 드라마)엔 나가기 힘들 거야’ ‘그런 얼굴로 演技하기 어려울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데뷔 後 10年 넘게 狀況은 달라지지 않았죠. 視聽者 揭示板에 ‘저렇게 생긴 女子가 나와서 못 보겠다’ ‘吐하겠다’는 글도 올라왔어요.”―그럴 때마다 어떻게 對處하셨나요? “無禮한 말들과 함께 살아온 거죠. 하지만 그때나 只今이나 전 이렇게 생각해요. 世上엔 여러 外貌와 性格을 가진 女子들이 살아가잖아요. 여러 생김이 있고 여러 魅力이 있는데 왜 俳優만은 똑같은 테두리에 들어야 하나요? 다양한 나이, 생김새, 性格을 가진 女性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할 거란 確信이 있어요.”―상처가 많았을 텐데 꿋꿋하게 버티新 거네요. “먼저 나 같은 사람이 (大衆에게) 익숙해지면 그게 다리가 돼서 다른 女性 俳優들도 더 便하게 나이, 생김새와 關係없이 자유롭게 活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個性的인 外貌의 女性 俳優들에게 디딤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참고 또 참았어요.”10년 次 俳優가 된 2015年 무렵 그는 드라마 ‘그女는 예뻤다’, 藝能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全盛期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個人的인 삶은 正反對였다고 합니다. 빛이 드리우지 않는 구덩이에 갇힌 氣分이었습니다. ―큰 人氣를 얻었던 時期였는데 왜 不幸하셨나요?“당시의 저는 너무 疲困하고 너무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家族들을 혼자 扶養했고 結婚까지 約束했던 男子와 離別했어요. 사는 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어요. 過呼吸까지 오더라고요. 正말 죽을 것 같았던 어느 날 偶然히 지나가다 장밋가시에 찔렸어요. 손에서 피가 확 나는데…. 分明 아파야 하는데 너무 시원하고 慰勞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내 苦痛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는데 그게 薔薇였어요.”장미에게서 뜻하지 않는 慰勞를 받은 그는 마당에 薔薇를 심기 始作했습니다. 마당 한 가득 數百 그루의 薔薇를 키우면서 마음이 治癒되는 걸 經驗했던 그는 本格的으로 植物을 가꾸기로 합니다. 知人 紹介로 京畿 洋酒 野山에 버려진 땅을 購入했습니다. 撮影 끝나고 子正이 넘은 時間에도 山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았습니다.―산에 나무를 심을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지인이 山에 植物을 심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걸 보면서 ‘아 맞아. 나도 저런 거 좋아하지?’ 란 생각이 들었죠. 山 中턱 버려진 땅에 어린 苗木을 사다 심었어요. 3年 넘게 넝쿨 除去하고 벌레도 잡아주고 물도 주고 하다 보니 나무들이 자리를 잡기 始作하더라고요. 그렇게 8年을 살았어요.”―배우와 竝行했는데 지친 적은 없었나요?“힘들지만 지치진 않았어요. 植物이 주는 즐거움은 苦痛을 相殺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每年 反復되니까 植物의 모습도 똑같을 것 같죠? 植物도 成熟해요. 每年 變하고 每番 다른 모습을 보여줘요. 너무 아름다워요. 元來 趣味로 그림 그렸는데 (植物 키우면서) 그만뒀어요. 아무리 熱心히 그려도 植物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하는 거예요.”1년 前부터 그는 ‘農業인 황석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8年 間 山行을 다녔던 京畿 洋酒 隣近에 敷地 420坪을 買入해 只今은 1萬 3千 그루의 植物을 키우고 있습니다. 水菊, 안개나무 等 심긴 品種도 다양합니다. 農場엔 ‘미스黃팜’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미스황팜’은 어떻게 始作됐나요?“1년 前에 오래된 비닐하우스를 購入했어요. 쥐도 많았고 (비닐이) 찢어진 데도 많았어요. 한 달 넘게 直接 치우고 修理했는데 正말 힘들었어요. 태어나 이렇게 勞動을 熱心히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웃음) 直接 비닐도 갈고 오래된 構造物도 撤去하고 물 供給하는 호스도 設置했어요. 費用도 많이 들었지만 勞動力이 正말 많이 들어갔어요.”―주로 어떤 品種을 키우시나요?“좋아하는 品種을 키워요. 前 꽃을 좋아해요. 香氣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다음 重要하게 생각하는 건 環境이에요. 農莊이 京畿 北部에 있잖아요. 추위에 剛해야 해요. 추위에도 剛하면서 香氣 나는 植物을 主로 키우죠. 代表的으로 水菊이에요. 활짝 피어있는 水菊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 幸福해하고 慰勞를 받으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水菊이 더 좋아졌어요.”―‘농업인’으로 專業하신 건가요?“당연히 本業은 배우죠.(웃음) 다른 欲心이 있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植物 옆에서 살고 싶을 뿐이에요. 農場 옆에 조그마한 農幕에서 살고 싶어요. 큰 집은 必要 없어요. 三三五五 둘러앉아 臺本 읽을 수 있는 程度면 될 것 같아요. 親舊들 오면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주고요. 農場에서 演劇이나 演奏會 같은 公演도 할 거예요. 昨年에 知人들끼리 모여 작은 演奏會를 열었는데 다들 너무 幸福해하시더라고요.”식물을 키우게 된 건 사람에게 받은 傷處를 治癒하기 위함이었지만 只今은 植物을 키우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慰勞를 받고 있습니다. 다음 달 4日 開幕하는 演劇 ‘扮裝室’에 出演하게 되면서 演劇 練習만으로도 바쁜 나날이지만 一週日 세 番은 農場에 들러 植物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햇빛이 쨍하면 가림幕을 치고 濕氣가 차면 換氣를 시키고 病菌이 자랄까 마른 잎을 떼어줍니다. ―農業人 황석정의 꿈은 무엇인가요.“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幸福해지더라고요. 慰安을 주는 것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요. 우리 모두 너무 不安定하잖아요. 삶이란 來日 當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只今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平穩하길 바라요. 저 亦是 고요하고 평화롭고 싶어요.”―배우로서 꼭 해보고 싶은 役割은 있으신가요.“진짜 사랑하는 驛, 眞짜 사랑받는 役을 해보고 싶어요. 커플 演技를 해본 적은 있었는데 코믹한 關係이다 보니 充分히 사랑하는 건 못 해봤어요. 티격태격하는 夫婦 말고 眞짜 사랑하는 安定的인 關係. 그게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합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記者 jetti@donga.com}

    • 2023-02-25
    • 좋아요
    • 코멘트
  • 代辯人이 된 앵커…“‘靑年 政治 어렵다’는 말, 몸소 體驗 中입니다”[복수자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한 이야기와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학창시절 初中高 모두 放送班 아나운서를 맡았을 程度로 ‘뉴스 앵커’를 꿈꿨습니다. 아나운서 試驗을 準備하던 大學 時節엔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父母님과의 電話 通話도 맘껏 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放送局도 마다하지 않고 數次例 門을 두드린 끝에 뉴스 진행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오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신입 아나운서’의 첫 任務는 새벽 뉴스였습니다. 午前 1, 2, 3, 4時 뉴스를 進行하는 1年 넘게 낮밤이 바뀌는 삶을 살았습니다. 6年間 使用한 休暇는 고작 나흘. 쉬는 날 없이 뉴스에 나왔던 그가 ‘非正規職 앵커’였다는 건 널리 알려지지 않은 事實입니다. ‘억척스럽다’ ‘악바리 같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버텼던 理由는 이랬습니다. “正規職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다” “언젠가는 認定해줄 줄 알았고 조금 더 安定的인 環境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많은 同僚들처럼 妊娠, 出産이라도 하게 되면 退社 手順을 밟아야 했습니다. 正規職 勞動者에게 保障되는 ‘出産休暇’ ‘育兒休職’을 使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月까지 YTN ‘뉴스가 있는 저녁’을 進行하던 앵커였지만 只今은 더불어民主黨 常勤副代辯人으로 活動하는 案龜齡 氏(34)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19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10年 남짓 아나운서로 活動하다 最近 政治人으로 變身한 그를 만났습니다. 熾烈한 競爭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기까지의 過程과 放送局 內 ‘非正規職 勞動者’를 代辯하는 政治人으로 새롭게 挑戰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뉴스 앵커 時節()과 代辯人으로서 政治에 挑戰한 이야기()를 確認할 수 있습니다. ●初等學生 때부터 꿈꿨던 아나운서―初等學生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꾸셨다고요?“초등학교 5學年 때인가. 先生님이 한 班에 1名씩 放送班을 뽑겠다면서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어요. 1名만 뽑는다고 하니 왠지 해야 할 것 같았죠.(웃음) 저 包含 여러 名이 손들었는데 先生님이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가위바위보에서 이겼고 그 後부터 줄곧 아나운서를 꿈꿨습니다.”―아나운서 入社 試驗을 準備하던 大學生 때는 放送局 規模나 雇傭 形態도 가리지 않고 經歷을 쌓았다고 들었습니다.“한국낚시방송, KTV, 光州放送…. 採用 公告가 뜨는 대로 志願했어요. 아나운서 試驗을 準備하다보면 똑똑하고 멋진 親舊들을 많이 보거든요. 한 番에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작은 經歷이라도 차근차근 쌓으면 저만의 强點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結局엔 그 戰略이 有效했죠. 왜냐하면 아나운서 採用이 漸漸 經歷者를 뽑는 趨勢로 바뀌었거든요.”그는 KTV 國民放送의 時事 프로그램 補助 進行 리포터에도 志願했습니다. 移轉 廻車를 돌려보며 누구보다 徹底하게 面接을 準備했습니다. 結果는 어땠을까요? 리포터가 아닌 프로그램의 메인MC로 拔擢됩니다. 안龜齡 아나운서의 첫 放送 데뷔였습니다. ―리포터 試驗에 應試했는데 메인MC로 拔擢된 理由는 뭐였나요?“아나운서 志望生은 大部分 支援하지 않았고 設使 支援했다고 해도 熱心히 工夫해온 境遇가 거의 없었다고 해요. 放送 經歷이 없었던 저는 작은 試驗이었지만 正말 熱心히 準備했어요. 프로그램 履歷 工夫부터 以前 廻車 모니터링까지. 面接 끝나고 擔當 PD에게 電話를 받았죠. ‘補助 進行 말고 메인MC를 시키고 싶은데 할 수 있겠냐’고요. 當然히 할 수 있다고 했어요. ‘原稿도 直接 써보겠냐’고도 묻더라고요. 그것 亦是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리포터가 아닌 메인MC로 拔擢된 그는 KTV에서 2014年 6月 全國同時地方選擧, 7月 再補闕選擧 때 中央選擧管理委員會 自體 TV에서 投票所, 開票所 現場을 連結하는 生放送에 出演합니다. 투·開票 生放送은 現職 아나운서들도 經驗하기 힘든 機會인데요. KTV에서 쌓은 經歷은 韓國낚시放送(2015年), KBC(2016年) 合格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뉴스 앵커’의 꿈을 이루기 위한 挑戰은 繼續됐습니다.―방송국 最終面接에서 數도 없이 탈락했다고요?“아나운서 志望生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어요. ‘最終에서 많이 떨어지기 始作하면 붙을 때가 됐다’고요. 2016年 한 해 동안 週末마다 全國을 돌면서 아나운서 試驗을 봤어요. 江原道 原州부터 濟州, 全州, 釜山, 蔚山…. 最終에서 자꾸 미끄러지다보니 나중엔 傲氣가 생겼어요. 한 番은 釜山MBC 最終面接에서 탈락했는데 人事팀에 電話해서 물어봤죠. 왜 떨어뜨리셨냐고요.(웃음)”―인사팀에선 脫落 事由를 말해주던가요?“한창 最終面接에서 많이 떨어질 때였어요. 너무 답답한 거예요. 왜 最終에서 안 되는 걸까. ‘제가 아나운서가 너무 되고 싶어서 그러는데 떨어진 理由를 알려 주세요’라고 하니 人事팀에서 面接官과 連結해주었어요. ‘우리는 이런 理由로 못 뽑았지만 이런 點은 좋았다. 다만 이런 點을 고치면 좋겠다’고 眞心어린 助言을 해주셨죠.”―간절함과 熱意가 넘치셨던 것 같아요.“YTN 試驗 때는 面接 日程과 光州放送 뉴스 時間이 겹치더라고요. 그때도 人事팀에 電話했어요.(웃음) 面接 順序를 第一 뒤로 미뤄주면 안 되냐고 付託드렸죠. 多幸히 順序를 맨 뒤로 바꿔줬고 光州에서 錄畫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택시, 飛行機, 오토바이를 타고 上巖洞 YTN에 到着해 無事히 試驗을 봤습니다. 요즘 流行하는 말 있잖아요. ‘中間에 꺾이지 않는 마음’ 그게 正말 重要해요. 이걸 누군가는 알아주더라고요.”‘열심을 다하면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믿음을 붙잡고 熾烈하게 살았던 그는 마침내 YTN에 入仕합니다. 뉴스 앵커가 된 後 한동안 ‘뉴스에 빠져’ 살게 됩니다. 新入 때는 새벽 뉴스를 進行하느라 午後 9時 出勤, 午前 6時 退勤하는 삶을 反復했습니다.―낮밤이 바뀌는 生活을 1年 넘게 하셨다고요. “뉴스를 進行하고 싶었던 제게 YTN은 羨望의 會社였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充滿했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땐 뉴스 時間에 늦을 까봐 서너 時間 먼저 일찍 到着했어요. 그땐 뉴스를 해야 한다는 使命感으로 살았어요.”새벽, 낮, 저녁. 다양한 時間帶를 오가며 뉴스 앵커로 살았던 期間은 6年 남짓입니다. 새벽 뉴스를 進行할 땐 낮밤이 바뀌었고 午後 7時에 始作하는 ‘뉴스가 있는 저녁’을 맡았을 때는 아침부터 뉴스를 틀어놓고 하루終日 準備했습니다. 豫想치 못한 速報에 對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年間 使用한 休暇는 나흘 뿐이라고 합니다. 온 힘을 다했던 時期였습니다.정규직이 아니니까 대충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더 熱心히 했다. 지난 6年 동안 쓴 休暇는 나흘이다. 2019年 여름 사흘, 2021年 여름 하루. 하지만 非正規職이 休暇를 쓰지 않는 것은 억척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살아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버텼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똑같이 일하고도 差別받는 現實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안龜齡 SNS)―6年間 休暇를 4日 밖에 쓰지 못했다는 게 事實인가요?“회사에서 休暇를 쓰지 못하게 한 건 아니에요. 非正規職이었지만 無給 休暇는 쓸 수 있었어요. 다만 休暇도 안 쓰고 熱心히 하면 누군가 알아줄 거라 생각했고, 조금 더 安定된 環境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期待를 했던 것 같아요.”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動機 아나운서가 妊娠을 하면서 退社를 準備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他意에 依해 그만두게 되느니 스스로 未來를 開拓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새로운 機會도 찾아왔습니다. 지난해 1月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大選 候補 캠프 迎入 提案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2030 靑年 女性 그리고 非正規職 앵커라는 點이 迎入 理由로 作用했습니다. ―政治權으로 가면서 많은 批判을 받으셨어요.“언론사에서 뉴스를 만들어왔기에 政治權에 바로 뛰어든다는 게 어떤 意味인지 알고 있으니 부담스러웠어요. 苦悶도 많이 했고 同僚들에게 被害되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래도 나와 같은 立場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군가는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나와 같은 立場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意味인가요?“저는 非正規職 앵커, 프리랜서 아나운서였어요. 많은 분들이 뉴스를 進行하는 앵커가 非正規職이라는 걸 모르시더라고요. 放送社에서 아나운서는 非正規職으로 採用하는 雰圍氣가 漸漸 굳어지고 있어요. 요즘엔 PD, 作家도 非正規職으로 뽑는 境遇가 많아요. 같은 일을 하고도 非正規職이라는 理由로 差別 받는 與件이 저를 萎縮되게 만들었어요.” 그가 앵커를 그만두고 政治人의 삶을 選擇한 지 어느 덧 1年이 흘렀습니다. 政治人은 살아온 삶을 材料 삼아 哲學과 비전을 밝히고 國民들의 選擇을 받아야 합니다. 自身이 非正規職이었다는 事實과 그間 겪었던 差別, 설움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非正規職 앵커’가 있다는 事實 몰랐을 수도”이재명 候補의 迎入人材로 政治를 始作한 그는 지난해 1月 18日 ‘無給’ 選擧 運動을 始作합니다. 첫 行步는 서울 江南驛 遊說였습니다.―찬조 演說者로 舞臺에 섰습니다. 語塞하진 않았나요?“추운 겨울이었는데 壇上에서 내려오니 어떤 분이 다가오셨어요. 따뜻한 飮料를 주시면서 自身을 就業準備生이라고 紹介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했었던 일, 그만두고 黨에 들어온 理由를 잘 알고 있다면서 應援한다고 해주셨어요. 너무 뿌듯했습니다.”―결과는 所屬 政黨의 敗北였어요. ‘愛人과 헤어졌을 때보다 後遺症이 길었다’고요?“태어나서 처음 겪는 氣分이었어요. 挫折, 슬픔, 敗北感…. 이런 걸 다 섞어놨다고 할까요. 바로 떨치고 일어날 수 없겠더라고요. 黨에 들어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런 氣分이 들까 생각해봤어요. 많은 사람이 하나의 目標를 向해 달렸잖아요. 그 目標價 무너진 거였으니까 그렇게 힘들었던 게 아니었을까요.”―정치권에 入門하고 나서 한 番도 月給을 못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캠프도 自願奉仕 槪念이고 政務職 代辯人은 給與가 없어요. 會社 다니면서 모아뒀던 돈 쓰고 가끔 放送 出演하면서 버는 用돈으로 生活해요. 靑年 政治 어렵다는 말을 몸소 體驗하고 있어요.(웃음) 辯護士나 敎授처럼 專門職 아닌 生計가 解決되지 않는 一般 靑年은 政治에 뛰어들기 힘든 構造예요. 參與 段階부터 기울어진 運動場이 생기는 거죠. 靑年 政治人에 對한 支援은 只今보다 더 擴大되어야 해요.”―돈을 抛棄하고 政治人이 된 理由는 무엇인가요?“누군가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萬若 (政治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非正規職 앵커가 있다는 事實을 只今보다 더 많이 몰랐을 수 있잖아요. 저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되잖아요. 後悔는 없습니다.” 인터뷰가 進行됐던 날(1월 18日)은 그가 政治權에 入門한지 正確히 1年이 된 날이었습니다. 1年次 政治人에겐 多少 이르긴 하지만 政治人에게 ‘選擧’는 避할 수 없는 宿命입니다.― 來年 4月 第22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하시나요?“일단 現實 政治에 발을 들였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領域의 일들을 熱心히 準備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게요. 가볼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보고 싶습니다.”―모든 政治人의 꿈은 大統領이라고 하잖아요. 龜齡 氏가 萬若 大統領이 된다면 가장 처음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캠프의 一員으로 經驗한 것에 비추어 봤을 때, 候補 當事者로 (選擧에서) 뛰면 훨씬 힘들 것 같아요. 얼마나 긴 時間, 모든 걸 쏟아 부어서 準備를 했는지 아니까요. (選擧에서 敗北한) 相對 候補를 불러서 그동안 苦生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食事를 待接하고 싶습니다.”―‘정치인 안龜齡’의 最終 目標는 무엇인가요?“신언서판(身言書判, 身數·말씨·文筆·判斷力)을 고루 갖춘 政治人이 되고 싶습니다. 只今보다 더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價値를 共有하실 수 있게 熱心히 뛰겠습니다.”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2-18
    • 좋아요
    • 코멘트
  • 웹小說 作家가 된 醫師…祕訣은 “每日 100원짜리 글 쓰기”[복수자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 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 耳鼻咽喉科 專門醫이자 웹小說 作家. 어느 하나 碌碌치 않은 타이틀을 서른여덟의 나이에 거머쥔 사람이 있습니다. 웹小說 마니아 사이에서는 ‘한산이가’라는 筆名으로 친숙한 意思 이낙준 氏입니다. 낮에는 醫師, 저녁에는 作家로 二重生活을 하며 쓴 웹小說 ‘重症外傷센터: 골든아워’와 ‘A.I. 닥터’는 드라마化가 決定됐습니다. 그를 뭘 해도 쉽게 成功하는 ‘타고난 天才’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意外로 그는 學窓時節 말썽꾸러기였습니다. 中學校 땐 班에서 20等을 왔다 갔다 했고, 學校가 끝나면 PC房이나 漫畫房으로 直行했습니다. 高等學生 때 뒷심을 發揮해 醫大에 갔지만 거기서도 그는 靑개구리였습니다. ‘醫師는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行政考試를 工夫했고, 인턴時節 專攻을 네 番이나 바꿔 ‘背反의 薔薇’라는 別名도 붙었습니다.여기저기 기웃거렸던 그가 딱 하나 놓지 않았던 것은 小說입니다. 幼年時節 판타지·武俠 小說과 漫畫冊을 끼고 살았던 그는 軍醫官 時節 讀者에서 筆者가 됐습니다. 히트作이 나오지 않아 글 쓰는 걸 抛棄하려던 瞬間도 있었지만 그는 2年 前 病院을 나와 웹小說 作家로 轉業했습니다. 지난달 18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李 氏와 만나 醫師와 웹小說 作家를 竝行한 過程과 成功의 祕訣을 들었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李 氏의 意思 時節(https://www.youtube.com/watch?v=Dln1UcrBxLY)과, 웹小說 作家 때 이야기(https://www.youtube.com/watch?v=cpLziXyGo4I)를 確認할 수 있습니다. ● 班에서 20等 하던 ‘漫畫狂’, 耳鼻咽喉科 醫師 되다―의사 兼 作家라니 學窓時節이 궁금해요. 班에서 1等만 하던 模範生이었죠?중학교 땐 班에서 20等 程度 했어요. 工夫에 關心도 없었고 親舊들이랑 노는 게 좋았어요. 겨울放學엔 親舊들과 군고구마 팔고 放課 後엔 漫畫房을 갔죠. 高等學校 2學年 1學期 때 精神을 차렸어요. 模擬考査에서 400點 滿點에 310點 程度를 받았는데 ‘이 成績으론 내가 願하는 삶을 살 수 없겠다’는 危機感이 들어서죠. 2學年 2學期부터 模擬考査를 每日 풀었어요. 어렸을 때 판타지小說을 많이 읽어서 言語 點數가 받쳐줬던 게 도움이 됐어요. 以後부턴 쭉 全校 1等이었어요. ―고2때부터 熱心히 工夫해서 인하대 醫大에 進學하셨어요. 醫大 時節은 어떠셨어요? 豫科 時節엔 醫師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行政考試를 工夫하기도 했었고, 인턴 때 再活醫學科, 應急醫學科, 眼科, 內科, 耳鼻咽喉科까지 專攻을 네 番이나 바꿔서 別名이 ‘背反의 薔薇’였어요. 耳鼻咽喉科는 귀, 코, 목 세 個 臟器를 보잖아요. 多樣한 診療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서 耳鼻咽喉科를 擇했죠.―여러 곳 기웃기웃 하셨지만 結局 시의적절하게 길을 잘 찾아가셨어요.지금까지도 잘 하는 건 내가 眞짜 좋아하는 게 뭔지 熾烈하게 苦悶하고, 그런 게 생겼을 때 後悔가 남지 않게 最善을 다하는 거에요. 그래야 機會가 왔을 때 잡을 수 있거든요. 삼성서울병원 耳鼻咽喉科 先輩에게서 提案이 왔을 때 그 機會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인턴 때 熱心히 한 德이었죠. ●副業으로 始作한 웹小說, 醫師 收入의 3倍 ―醫師라는 職業 하나만으로도 바쁘셨을 텐데 웹小說은 언제 始作하셨나요?군의관 時節이었던 2016年 처음 웹小說을 始作했어요. 午後 5時에 退勤하고 每日 두 時間씩 A4用紙 4~5張 分量을 썼어요. 그 때 쓴 게 ‘軍醫官, 二界가다’인데 문피아(웹小說 플랫폼)에서 辱 많이 먹었어요. 只今 읽어보면 碑文도 많고, 캐릭터나 構成도 허술해요. 大學에서 文學像을 받은 男동생은 ‘血肉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글’이라고 酷評했죠. ―酷評을 이겨내고 2019年에 쓰신 ‘重症外傷센터: 골든아워’는 웹툰에 이어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게 됐어요. 成功 祕訣이 궁금해요. ‘熱血닥터, 名義를 向해’ ‘醫術의 塔’ ‘닥터, 朝鮮 가다’ 세 篇이 連달아 잘되면서 乘勝長驅하다가 ‘醫느님을 믿습니까?’가 데뷔作 水準으로 亡했어요. ‘重症外傷센터: 골든아워’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無條件 잘 돼야 했기에 大學病院 背景, 義士 主人公, 디테일한 手術 場面 等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넣었어요. ‘財閥집 막내아들’이나 ’어게인 마이 라이프’처럼 웹小說 原作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웹小說이 注目받는 時代가 오면서 제 作品도 빛을 본 것 같아요. ―‘重症外傷센터: 골든아워’의 成功 後 웹小說 作家로 轉業하셨다고 들었어요. 2020年 1月에 病院을 그만 뒀어요. 웹小說 作家 일을 始作할 때 ‘本業의 3倍 以上을 副業에서 벌면 本業을 그만 두자’는 基準을 定했거든요. ―一角에선 낙준 님 作品 照會數가 8000萬 回 程度고, 會堂 100원이니 80億 원을 벌었다는 所聞도 있던데….가장 成功한 두 作品 ‘A.I. 닥터’와 ‘重症外傷센터: 골든아워’ 照會數를 합치면 8000萬 回 程度 돼요. 그런데 無料回次가 있어서 賣出은 全體 照會數의 80%程度에요. 플랫폼 事業者 等과 나누고 나면 前 賣出의 折半 程度를 가져와요. ●“100원짜리 글을 쓰자” 2萬 字씩 每日 執筆하는 法 ―大박作品, 쪽박作品 다 써 보셨는데 ‘成功하는 웹小說의 特徵’은 뭘까요?주인공의 欲望을 讀者가 應援하거나 同一視할 수 있는 小說이 뜬다고 생각해요. ‘財閥집 막내아들’ 主人公 진도준度 나쁜 짓을 하지만 讀者가 그의 欲望을 應援하잖아요. 過去엔 利他的이고 정의로운 主人公이 脚光받았다면 只今은 手段과 方法 가리지 않고 내 것을 챙기는 主人公도 人氣가 많아요. ―‘검은머리 英國醫師’ ‘포스트 팬데믹’ ‘A.I. 닥터’ 總 세 篇을 連載 中이세요. 하루에 2萬 者 넘게 쓰고 있는데 每日 많은 量을 쓰는 祕法이 있을까요?모든 글을 100點으로 쓰려는 欲心은 버려야 해요. 모든 廻車를 最善을 다해 쓰려다보면 마감을 못 할 수 있어요. 讀者와의 約束을 어기는 거죠. 100點 滿點에 90點程度만 지키면 돼요. 저는 100원짜리 글을 쓰는 사람이잖아요(웹소설 會堂 100원). 제 글의 퀄리티가 100원에 合當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新作을 始作할 때 가장 重要하게 考慮해야 할 點은 무엇인가요? 저는 新作을 準備할 때 스스로에게 ‘너 이 素材로 몇 火까지 재밌게 쓸 수 있어?’를 물어요. 웹小說은 300話 以上은 써야 하는 市場이거든요. 아무리 素材가 재밌어도 ‘100話 넘어가면 못 쓸 것 같다’ 싶으면 果敢히 내려놔야 해요. ―時間管理는 어떻게 하나요? 쓸데없는 苦悶時間을 最少化하기 위해 食單을 統一했어요. 도시락을 注文해놓고 點心은 每日 같은 걸 먹어요. ‘愛着옷’이 있어서 옷도 거의 그것만 입고요. ―웹小說에 入門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만은 記憶해라’ 팁 하나 주신다면?한 番에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時間이 걸린다는 것을 留念하고 너무 빨리 抛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初盤에 期待가 크면 무너지기 쉽거든요. 重要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에요. 중꺾마, 時代를 貫通하는 말이네요.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2-11
    • 좋아요
    • 코멘트
  • ‘줄리엣’ 許施 “15歲때 性虐待” 映畫社에 6000億 訴訟

    1968年 映畫 ‘로미오와 줄리엣’의 主演俳優인 올리비아 許施(71)와 레너드 위팅(72)李 撮影 當時 事前 約束과 달리 裸體 撮影을 강요받아 性醜行 및 兒童 搾取를 當했다며 製作社를 相對로 6000億 원臺 訴訟을 提起했다. 3日(現地 時間) AP와 AFP通信에 따르면 줄리엣 役을 맡았던 許施와 로미오 役의 위팅은 파라마운트픽처스를 相對로 5億 달러(藥 6365億 원) 規模의 訴訟을 냈다. 이들이 美國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1審法院에 提出한 所長에 따르면 프랑코 製皮렐리 監督(2019年 死亡)은 映畫 後半部에 나오는 베드신 撮影을 앞두고 俳優들에게 皮膚色깔의 속옷을 입고 撮影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撮影 當日, 속옷 없이 몸에 簡單한 化粧만 한 채로 撮影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監督은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카메라 位置를 調整하겠다고 했지만 映畫에는 위팅의 엉덩이와 許施의 가슴이 그대로 露出됐다. 當時 허시는 15歲, 위팅은 16歲였다. 두 俳優는 “監督은 반드시 裸體로 撮影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映畫가 失敗하고 俳優들의 커리어度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俳優로서 다른 選擇肢가 없었다. 이는 性醜行과 兒童搾取에 該當한다”고 主張했다. 이어 “數十 年間 精神的 苦痛에 시달렸고, 以後 커리어는 映畫(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成功的이진 못했다”고 밝혔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1-05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올리비아 핫세 “性醜行 및 兒童 搾取 當했다”… 製作社에 訴訟

    1968年 映畫 ‘로미오와 줄리엣’의 主演俳優인 올리비아 핫세(71)와 레너드 위팅(72)李 撮影 當時 事前 約束과 달리 裸體 撮影을 강요받아 性醜行 및 兒童 搾取를 當했다며 製作社를 相對로 6000億 원臺 訴訟을 提起했다. 3日(現地時間) AP와 AFP通信에 따르면 줄리엣 役을 맡았던 핫세와 로미오 役의 위팅은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相對로 5億 달러(藥 6365億 원) 規模의 訴訟을 냈다. 이들이 美國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1審法院에 提出한 所長에 따르면 프랑코 製皮렐리 監督(2019年 死亡)은 映畫 後半部에 나오는 베드신 撮影을 앞두고 俳優들에게 皮膚色깔의 속옷을 입고 撮影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撮影 當日, 속옷 없이 몸에 簡單한 化粧만 한 채로 撮影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監督은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카메라 位置를 調整하겠다고 했지만 映畫에는 위팅의 엉덩이와 핫세의 가슴이 그대로 露出됐다. 當時 핫세는 15歲, 위팅은 16歲였다. 두 俳優는 “監督은 반드시 裸體로 撮影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映畫가 失敗하고 俳優들의 커리어度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俳優로서 다른 選擇肢가 없었다. 이는 性醜行과 兒童搾取에 該當한다”고 主張했다. 이어 “數十 年間 精神的 苦痛에 시달렸고, 以後 커리어는 映畫(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成功的이진 못했다”고 밝혔다. 이番 訴訟은 兒童 性犯罪에 對한 公訴時效를 限時的으로 없앤 캘리포니아 州法 改正에 따라 이뤄졌다. 2020年 法을 改正해 聖人이 어린시절 겪은 性犯罪에 對한 訴訟을 3年 間 提起할 수 있도록 하자 마감日인 지난해 12月 31日까지 州 法院에 多數의 所長이 接受됐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1-04
    • 좋아요
    • 코멘트
  • 볼턴-애덤스-스타일스… 海外 스타들이 다시 몰려온다

    빌리 아일리시, 아이유, 블랙핑크, 조용필…. 2022年은 팬데믹으로 數年間 멈췄던 國內外 歌手들의 콘서트가 기지개를 켠 한 해였다. 새해에도 그 氣勢가 이어진다. 7500萬 張의 音盤販賣量을 記錄한 美國 싱어송라이터 마이클 볼턴, 英國 보이밴드 원디렉션 막내에서 홀로서기에 成功한 海里 스타일스 等 錚錚한 海外 스타들의 來韓公演이 열린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等 國內外 個性派 밴드들도 觀客을 만난다. 가장 期待를 모으는 건 오랜만에 來韓하는 傳說的인 스타들의 公演이다. 볼턴은 2014年 來韓 後 9年 만에, 캐나다 出身인 ‘록의 傳說’ 브라이언 애덤스는 1994年 처음 韓國을 찾은 뒤 29年 만에 訪韓한다. 梨泰院 핼러윈 慘事로 지난해 11月 열릴 豫定이었던 콘서트를 延期한 볼턴은 이달 14, 15日 서울 영등포구 고척스카이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When a Man Loves a Woman’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等 수많은 히트曲을 保有하고 있다. 애덤스는 3月 서울 송파구 올림픽公園 SK올림픽핸드볼競技場에서 公演한다. ‘Lonely Nights’, ‘Straight From The Heart’ 等으로 人氣를 얻은 그는 正規 4輯 ‘Reckless’(1984年)가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1位를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첫 來韓 消息만으로 온라인 音樂 커뮤니티를 들끓게 한 스타일스는 3月 20日 서울 올림픽公園 KSPO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2017年 發賣한 솔로 1輯 ‘Harry Styles’의 收錄曲 ‘Sign of the Time’, ‘Kiwi’를 히트시키며 홀로서기에 成功했다. 김도헌 大衆音樂評論家는 “英國 밴드 콜드플레이度 4月 來韓을 檢討하고 있어 올해는 엔데믹과 맞물려 名望 있는 海外 아티스트들의 公演이 大擧 열릴 것으로 期待한다”며 “볼턴과 애덤스는 全盛期였던 1980年代를 經驗한 中壯年層이 즐길 수 있고, 볼턴의 ‘When a Man Loves a Woman’, 애덤스의 ‘Heaven’은 20代 亦是 멜로디만 들어도 알 程度로 時代를 뛰어넘는 名曲이기에 子女와 父母가 함께 가기 좋은 公演”이라고 말했다. 國內外 個性派 밴드들의 協同 公演에 對한 期待도 크다. 韓國 밴드 새少年이 音樂的 色깔이 맞는 海外 아티스트들을 招請해 함께 公演하는 브랜드 公演 ‘헬로, 월드!’가 4年 만에 열린다. 이달 28, 29日 서울 廣津區 예스24라이브홀에서 開催되는 이番 公演에는 벨기에와 韓國 混血 댄서 兼 뮤지션 MEYY, 노르웨이界 美國人 뮤지션 Okay Kaya, 日本 女性 힙합 뮤지션 Awich가 새소년과 公演을 펼친다. 日本 인디밴드 보노보스는 2月 3∼5日 韓國 뮤지션 까데號, 오존, 구남과 協同 公演을 연다. 김윤하 大衆音樂評論家는 “새소년, 보노보스처럼 마니아層 팬덤을 지닌 인디 뮤지션과 이제 막 活動을 始作하는 젊은 世界 音樂家들의 交流 公演에 期待가 크다. 觀客들에게는 協同 舞臺를 펼치는 新進 아티스트도 덤으로 알 수 있는 契機”라고 말했다. 인디 밴드들의 單獨 公演도 準備돼 있다. 夢幻的인 音樂과 포근한 美聲으로 사랑받는 美國 드림팝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5年 만인 2月 5日 서울 江西區 KBS아레나홀에서 팬들을 만난다. 韓國系 美國人 드러머가 所屬된 美國 인디밴드 서머솔트도 3月 7日 서울 麻浦區 롤링홀에서 첫 來韓 公演을 한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1-04
    • 좋아요
    • 코멘트
    PDF紙綿보기
  • ‘올스톱’ 됐던 콘서트, 기지개 활짝… ‘레전드’ 스타들 韓國 온다

    最年少 그래미賞 5冠王의 빌리 아일리시, 韓國 솔로 女歌手 最初로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主競技場에서 公演한 아이유, 世界 兩大 팝 차트인 美國 빌보드 차트와 英國 오피셜 차트를 席卷한 블랙핑크, 9年 만에 新曲으로 컴백한 ‘假王’ 조용필 까지…. 지난해 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만났던 歌手들이다. 2022年은 팬데믹으로 ‘올 스톱’됐던 콘서트가 기지개를 켜기 始作하는 한해였다. 2023年도 그 氣勢를 이어간다. 7500萬 張의 音盤販賣高를 記錄한 美國 싱어송라이터 마이클 볼튼, 英國 보이밴드 원디렉션 막내에서 홀로서기에 成功한 海里 스타일스 等 錚錚한 海外 스타들이 來韓한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等 國內外 個性派 밴드들도 觀客을 만난다. ●마이클 볼튼, 브라이언 애덤스, 海里 스타일스…레전드들의 來韓 가장 期待를 모으는 건 오랜만에 來韓하는 ‘레전드級’ 스타들의 公演이다. 볼튼은 2014年 來韓 後 9年 만에, 캐나다 出身인 ‘록의 傳說’ 브라이언 애덤스는 1994年 첫 來韓 後 29年 만에 來韓한다.이태원 핼러윈 慘事로 11月 8, 9日 豫定이었던 콘서트를 延期한 볼튼은 이달 14, 15日 서울 영등포구 고척스카이돔에서 팬들을 만난다. 그는 ‘When a Man Loves a Woman’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等 수많은 히트曲을 保有한 實力派 보컬리스트다. 애덤스는 3月 서울 송파구 올림픽公園 SK올림픽핸드볼競技場에서 公演한다. ‘Lonely Night’, ‘Straight From The Heart’ 等으로 人氣를 끌기 始作한 뒤 正規 4輯 ‘Reckless’(1984年)가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 1位를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대표곡으로 꼽히는 ‘Heaven’李 收錄된 이 앨범은 1200萬 張이 팔렸다. 이番 公演은 지난해 3月 正規 15輯 ‘So Happy It Hurts’를 發賣한 뒤 始作한 월드투어의 一環이다. 지난해 11月 첫 來韓 消息만으로 온라인 音樂 커뮤니티를 들끓게 한 스타일스는 3月 20日 서울 송파구 올림픽公園 KSPO돔에서 公演을 연다. 그는 2017年 發賣한 솔로 1輯 ‘Harry Styles’의 收錄曲 ‘Sign of the Time’, ‘Kiwi’를 히트시키며 홀로서기에 成功했다. 김도헌 大衆音樂評論家는 “해리 스타일스는 첫 來韓公演을 갖고, 英國 밴드 콜드플레이度 4月 來韓을 檢討하고 있는 만큼 올해는 앤데믹과 맞물려 名望 있는 海外 아티스트들의 公演이 大擧 열릴 것으로 期待한다”며 “볼튼과 애덤스는 그들이 全盛期를 누리던 1980年代를 經驗한 中壯年層이 즐길 수 있고, 볼튼의 Lonely Night, 애덤스의 Heaven 等은 20臺가 멜로디만 들어도 알 程度로 時代를 뛰어넘는 名曲이기에 子女世代가 孝道公演 次元에서 父母님과 함께 가기에 좋다”고 말했다. ●새소년, 시가렛 애프터 섹스 等 個性派 밴드 公演도 ‘네임드 뮤지션’들의 歸還만큼이나 音樂 팬들의 期待感이 큰 건 國內外 個性派 밴드의 協同公演이다. 韓國 밴드 새少年이 音樂的 色깔이 맞는 海外 아티스트들을 招請해 함께 公演하는 브랜드 公演 ‘헬로, 월드!’는 4年 만에 열린다. 이달 28, 29日 서울 廣津區 예스24라이브홀에서 열리는 이番 公演에는 벨기에와 韓國 混血 댄서 兼 뮤지션 ‘MEYY’, 노르웨이界 美國人 뮤지션 ‘Okay Kaya’, 日本 女性 힙합 뮤지션 ‘Awich’가 새소년과 舞臺를 펼친다. 日本 인디밴드 보노보스가 2月 3~5日 韓國 뮤지션 까데號, 오존, 구남과 여는 協同公演도 期待를 모은다. 김윤하 大衆音樂評論家는 “팬데믹 期間에는 國家 間 移動이 어려워 海外 아티스트들과의 協演도 가로막혔었다. 새소년, 보노보스처럼 마니아層 팬덤을 지닌 인디 뮤지션과, 이제 막 活動을 始作하는 젊은 世界 音樂家들의 交流 公演에 期待가 크다. 觀客들에게는 協同 舞臺를 펼치는 新進 아티스트도 덤으로 알 수 있는 契機”라고 말했다. 인디 밴드들의 單獨 公演도 準備돼있다. 夢幻的인 音樂과 포근한 美聲으로 ‘追憶을 召喚하는 목소리’라는 修飾語가 붙는 美國 드림팝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5年 만인 2月 5日 서울 江西區 KBS아레나홀에서 팬들을 만난다. 이들의 代表曲 ‘K.’, ‘Sweet’ 等은 韓國에서 特히 큰 사랑을 받았다. 韓國系 美國人 드러머가 所屬된 美國 인디밴드 서머솔트도 2014年 데뷔 後 첫 韓國 公演을 3月 7日 서울 麻浦區 롤링홀에서 가진다. 아이돌 그룹도 콘서트에 나선다. FNC엔터테인먼트의 보이 밴드 엔플라잉은 이달 7, 8日 예스24라이브홀에서 브랜드 公演 ‘&CON’(엔콘)을 세 番째로 開催한다. 드러머 재현의 軍 入隊 前 마지막 ‘完全體’ 公演이 될 展望이다. 보이밴드 더 로즈는 이달 20日 예스24라이브홀에서 월드 투어 一環으로 ‘The Rose Heal Together World Tour In Seoul’을 연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1-03
    • 좋아요
    • 코멘트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