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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作農民의 社會的 安全網 代父母(代父母) 制度|新東亞

相續의 歷史

小作農民의 社會的 安全網 代父母(代父母) 制度

  • 백승종|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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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上에는 父母로부터 물려받을 財産이 全혀 없는 사람이 많다. ‘相續’이란 말 自體가 그들에게는 서러움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過去 西洋에서는 이런 問題를 어떻게 解決했을까. 19世紀까지도 西洋의 地主와 小作農民들은 基督敎의 ‘代父母(代父母)’ 制度를 利用해 問題를 解決하려는 境遇가 적지 않았다. 이렇다 할 國交가 없는 韓國社會와는 달랐다.
    할리우드 액션映畫 中에 ‘대부(Godfather)’라는 作品이 있다. 前後 3篇이 製作돼(1972~1990)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다. 大都市를 舞臺로 活動하는 犯罪組織 ‘마피아’에 關한 이야기였다. 이탈리아 南部 시칠리아 地方 出身들로 構成된 惡名 높은 犯罪組織 마피아는 돈과 權力을 위해 ‘피의 復讐劇’을 反復한다. 各 派의 頭目과 部下들은 ‘大字’와 ‘대부’ 關係로 얽힌 끈끈한 關係다. 部下는 頭目에게 絶對 忠誠을 盟誓하고, 部下들은 頭目으로부터 生存을 保障받는다. 西洋 中世의 封建制度를 떠올리는 ‘意思家族(疑似家族)’ 關係다.

    代父母의 關係는 正말 그처럼 대단한 것인가. 이 制度의 根幹은 基督敎다. 古代 로마時代부터 基督敎의 洗禮式에는 아이 곁에 父母와 나란히 代父母란 存在가 登場했다. 男子아이에게는 代父, 女子아이에게는 代母가 洗禮式에 參與한다. 本來 大父母는 대자 또는 代女의 靈的 保護와 信仰 强化에 責任이 있다. 代子와 代女는 代父母를 믿고 따라야 할 義務가 있다. 이로써 그들 사이에는 一種의 父母子息 關係가 成立한다.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大父母 制度를 重視한다. 가톨릭이 國敎로 機能을 하는 여러 나라, 特히 南유럽과 南아메리카 各國에서는 이 制度의 機能이 뚜렷하다.



    ‘代父母’ 制度는 ‘意思家族’ 關係

    大父母 制度는 歷史를 통해 變化를 거듭했다. 사람들은 이 制度를 통해 社會經濟的 利益을 追求해왔다. 그러나 16世紀 獨逸의 宗敎改革家 마르틴 루터(1483~1546)는 大父母 制度를 辛辣하게 批判했다. 그는 이 制度야말로 信者들의 自由를 抑壓하는 迷信的 手段이라고 攻擊했다. 宗敎改革 以後 유럽 社會는 나날이 世俗化됐고, 大父母 制度 亦是 慣習의 一部가 됐다.

    지난 數百 年 동안 유럽의 農村 社會에서는 ‘意思家族’ 關係가 日常生活의 中心軸이었다. 유럽의 ‘醫師家族共同體’는 大父母 制度를 비롯해 親族 및 義兄弟 關係가 하나로 結合한 것이다. 그 名稱은 地域마다 다양했다. 代表的인 것이 ‘오스頉(Ostal)’ 또는 ‘카社(Casa)’였다. 現代 프랑스 歷史가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理는 15~18世紀 프랑스 南部의 몽打油 마을을 深層的으로 硏究해 名聲을 얻었다. 그에 따르면 몽打油 마을에도 ‘도무스(domus)’라 불리는 醫師家族共同體가 存在했다.

    그 活動은 多方面에 걸쳤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 큰 影響을 주었다. 貧困 問題의 共同 解決을 비롯해 孤兒의 養育, 靑少年의 職業訓鍊, 마을에서 發生한 紛爭의 處理 및 集團的인 復讐까지 그 共同體의 機能에 包含됐다. 醫師家族共同體가 殺人과 集團 暴行 等의 ‘集團 復讐’까지 일삼았다는 事實이 흥미롭다.

    地方마다 差異는 있었으나 유럽 各地에 意思家族共同體가 있었다. 그들은 代父母와 代子女 집안을 親族集團으로 認識해, 內部의 結婚關係를 忌避하는 現象도 보였다. 甚至於 洗禮를 主管한 擔當 司祭의 집안과도 結婚을 禁했다.

    近代國家의 登場과 더불어 醫師家族共同體의 位相에 變化가 나타났다. 國家權力이 擴大一路에 있었고, 그에 따라 私的 領域의 縮小가 不可避했다. 大父母 制度는 弱化됐다. 以後 都市化와 産業化가 速度를 내자, 家族은 直系家族 爲主의 단출한 組織으로 再誕生했다. 이런 판局이라 親父母도 아닌 代父母의 役割은 더욱 縮小됐다. 큰 틀에서 보면 ‘大父母 制度는 西洋 中世의 遺物에 不過한 것이 아닐까’ 하는 疑問이 提起될 程度였다.

    그러나 歷史란 複雜 微妙한 것이다. 일정한 方向을 따라 直線的으로 發展해가는 歷史는 어디에도 없다. 19世紀까지도 가톨릭國家 스페인의 植民地, 곧 아메리카 大陸의 여러 나라에서는 大父母 制度가 외려 强化됐다. 代子女의 一生에 分岐點이 되는 重要 行事마다 代父母가 반드시 入會했다. 그들은 代子女의 養育 또는 敎育에도 關與했다. 代子女는 大父母에 對한 尊敬心을 가져야 하며, 그들의 指示에 服從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宗敎心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看做되는 유럽의 事情도 顯微鏡을 들이대면 달리 보인다. 假令 1845年頃 프랑스 東部 地域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代父母를 통해 醫師親族關係를 形成했다. 아마 유럽 各國의 事情도 비슷했을 것이다.


    한番 흙수저는 永遠한 흙수저

    富의 停滯 現象이 17~19世紀 獨逸 北部에 局限될 理가 없다. 유럽 各國은 勿論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狀況이 여기저기서 反復됐음은 當然하다. 商業的 農業이 盛行한 地域이라 해서 事情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벨름 마을이야말로 이미 17世紀부터 亞麻布를 비롯한 換金 作物 栽培에 힘을 쏟은 곳이었다.

    韓國史 敎科書에서는 17世紀 以後 商業的 農業이 發達해 農民들의 身分 上昇이 活潑했다고 敍述돼 있다. 부지런하면 가난한 農夫도 富者가 되고, 兩班도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筆者가 알기에는 이러한 敍述을 證明하는 具體的인 根據는 發見되지 않았다.   

    地主 家門을 相續한 벨름의 젊은이들은 小作農으로 轉落이 豫定돼 있는 自身의 兄弟들과 어떠한 關係를 維持했을까. 18世紀에 小作農으로 轉落한 大農의 子女들은 大槪 이웃 마을로 移住했다. 家門의 相續者는 單 한 사람, 大槪는 막내아들이었다. 父母의 財産을 그가 송두리째 相續하는 것. 이것이 벨름의 風習이었다. 不公平한 相續制度로 인해 同期 間 社會的 地位는 하늘과 땅처럼 멀어졌다.

    地主의 아들딸들, 곧 大農의 兄弟姊妹 間에 緊張이 造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地主들은 하나의 戰略을 마련했다. 가난해진 兄弟姊妹의 아들딸 卽, 조카들의 大夫가 됨으로써 同氣間에 和解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아직도 親戚이다!’ 이런 信號를 주고받음으로써 社會的 不平等을 조금이나마 解消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世紀 中葉이 되면서 事情이 또 바뀌었다. 農地를 둘러싼 競爭이 熾烈해져 小作農民이 되기도 쉽지 않았다. 外部에서 農地를 求하기 어렵게 되자, 벨름 大農家는 戰略을 修正했다. 그들 子女의 折半假量이 나이가 들어도 本家 오두幕에 눌러앉았다. 그들은 本家의 小作農이 됐다. 生存의 危機 앞에서 血緣은 가장 믿음직한 救命帶였다.

    비슷한 生存 戰略이 明淸時代 中國과 朝鮮王朝 社會에서도 目擊된다. 人口 增加로 農土가 不足해지자 父系血緣集團이 代代로 한 마을에 눌러살았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富裕한 地主로서, 가난한 親戚들에게 農土를 나눠주며 耕作을 맡겼다. 가난한 사람들은 親戚에 依支해 生計를 꾸렸다. 이것이 이른바 同族마을의 낯익은 風景이었다.



    地主 代父母를 選擇하는 理由

    19世紀 벨름의 大多數를 차지하는 典型的인 小作農民은 더욱 큰 危機를 맞았다. 그들에게는 넓은 農地를 所有한 親戚이 없었다. 그들의 生存을 保障해줄 手段은 없어 보였다.

    가난한 小作農民에게도 家族은 삶의 土臺였다. 슐룸봄의 冊에도 記述돼 있듯, 兄弟姊妹가 한 사람의 地主에 기대어 사는 境遇가 적지 않았다. 小作農民들은 合理的인 支柱를 만나면 于先 自身의 兄弟姊妹를 불러들였다.

    때로 大父母 制度를 媒介로 한 ‘意思家族’李 生存의 버팀木이었다. 유럽의 俗說에 따르면, 小作農民들은 子女의 洗禮式 때 自身의 主人인 支柱를 大父母로 모셨다. 地主 夫婦 또는 地主의 未婚 子女가 어린아이의 代父母로 選擇됐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小作農民의 子女들도 張差 代를 이어 그 地主의 保護 아래 살 수 있기를 바랐다.

    正말 그랬을까. 슐룸봄의 冊을 읽어보면, 社會 現實은 俗說과 距離가 있었다. 18~19世紀 벨름의 小作農民 子女의 20%는 地主 또는 地主 子女의 代子女가 됐다. 그 나머지 子女들은 이웃에 사는 다른 地主 夫婦를 大父母로 定했다.

    小作農民들은 大父母 制度를 利用해, 隣近의 여러 地主와 社會的으로 結合했다. 이것은 垂直的 그물網이었다. 平生 남의 小作人으로 살아야만 했기에, 小作農民은 多數의 地主와 敦篤한 關係를 가지는 것이 유리했다. 한동안 마을을 떠나지 않고 多少나마 安定된 生活을 營爲하려는 手段이었다. 大父母 制度는 小作農民의 立場에서도 有用한 手段이었다.

    地主와 小作農民들이 갓난아이의 洗禮式을 契機로 締結한 代父母 關係는 文化的 象徵이기도 했다. 그것은 地主와 小作人의 關係에 情緖的 紐帶感을 附與했다. 或是 萬一의 事態가 發生하면, 地主가 社會的 弱者인 小作農民의 家族을 돌봐야 한다는 道德的 義務感을 確認하는 節次이기도 했다. 實際로 벨름에서는 孤兒가 된 小作農民의 子女를 地主가 데려다 기르기도 했다.

    大父母 制度는 小作農民의 삶을 안정시키는 機能을 했다. 그러나 슐룸봄은 거기에도 明白한 限界가 있다고 못 박았다. 아무리 努力한들 小作農民은 20年 以內에 마을을 떠나게 될 運命이었다. 그런 點에서 이 關係는 限界가 있었다.

    小作農民이 農土를 求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누구였을까. 小作農의 兄弟姊妹를 비롯한 家族이었다. 大多數 農民에게 試鍊을 안겨준 19世紀에 벨름의 小作農民들에게 救世主는 곧 兄弟姊妹요, 媤父母 또는 妻父母였다. 이것이 歷史的 事實이었다. 그렇다 해도 代父母라는 存在가 小作農民의 生存에 큰 도움이 됐다는 事實 또한 否定할 수 없다.  




    백승종
    ● 1957年 全北 全州 出生
    ● 獨逸 튀빙겐대 哲學博士
    ● 서강대 史學科 敎授, 獨逸 튀빙겐대 韓國 및 中國學과 敎授, 프랑스 國立高等社會科學院 招聘敎授
    ● 現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 著書 : ‘백승종의 逆說’ ‘마흔 歷史를 알아야 할 時間’ ‘禁書, 時代를 읽다’ ‘正朝와 不良선비 강이천’ ‘朝鮮의 아버지들’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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