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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最後의 날, 白江 大海戰|新東亞

現職 外交官이 쓴 韓中 5000年

百濟 最後의 날, 白江 大海戰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總領事, 政治學博士

    入力 2017-08-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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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3年 8月 백제-왜 聯合海軍이 中國과 韓半島, 日本 勢力이 모두 關與한 東北亞 最初의 國際海戰에서 大敗했다. 백제와 왜는 英國과 美國의 關係처럼 백제를 세운 夫餘系가 왜의 建國에 關與했다가 熊進 時代를 전후해 倭가 백제보다 더 强大해져 거꾸로 倭가 백제에 相當한 影響을 미친 것으로 推定된다.
    高句麗가 수·黨 交替期(615~625)를 틈타 4世紀 毛用선비족의 全然·後緣(前燕·後燕)처럼 華北으로 進出했다면 關東(허베이, 허난, 산둥, 산시 等)을 掌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베이는 高句麗 領土와 接했고, 거란·해, 突厥, 말갈 等 塞外民族 수도 많았으며, 산둥半島는 랴오둥半島와 咫尺의 距離로 高句麗 海軍力으로 統制 可能한 範圍 內에 있었다. 當時 高句麗의 國力이나 國際情勢에 비춰볼 때 高句麗는 全然·後緣과 달리 占領地를 長期間 統治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高句麗는 後方이 튼튼하지 못하던 선비足과는 달리 랴오허-鴨綠江-大同江-禮成江 流域이라는 튼튼한 後方基地를 갖고 있었다.



    高句麗의 實技

    그럼에도 高句麗가 關東의 範圍를 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判斷된다. 數百萬 名에 不過한 高句麗人 中 華北 占領과 統治를 위해 相當數가 떠나면 本據地가 百濟, 新羅, 말갈 等의 攻擊을 받아 危機에 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高句麗가 수(隋)와의 16年에 걸친 戰爭으로 苦痛받았고, 南쪽의 挑戰 勢力인 新羅에 對한 反擊이 緊要했다 해도 수·黨 交替期에 中國 內部 動向을 袖手傍觀한 것은 큰 失策이다. 高句麗는 中國의 戰亂에 介入해 一部를 占領함으로써 中國 情勢에 影響을 미치고, 나아가 △高句麗 △中國 △突厥界 薛延陀(薛延陀) 等 몽골高原의 遊牧國家 間 鼎足之勢(鼎足之勢)의 勢力均衡을 만들었어야 했다.

    영류왕(在位 618~642)을 비롯한 高句麗 指導部는 中國에서 數十 年間 戰亂이 持續되거나 最小限 3, 4個 나라로 分裂될 것으로 豫想한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의 지나치게 消極的인 大(對)中國 政策은 黨에 틈을 내줬으며, 도리어 高句麗는 黨의 分裂政策에 놀아나 淵蓋蘇文의 아들들이 相殘(相殘)을 벌인 끝에 滅亡당하고 말았다.

    唐 太宗 李世民(李世民)은 630年 몽골高原에 자리한 東突厥(東突厥)을 멸망시키고, 隣近 北方民族 首長들로부터 農耕-遊牧 2個 世界의 敗者라는 뜻을 가진 千加한(天可汗)으로 推戴되는 等 國力을 急速히 强化했으나 高句麗는 수·黨 交替期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東突厥을 制壓한 唐나라가 壓迫해오자 631年 初가 돼서야 北部 부여성(扶餘城)에서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千里長城을 쌓기 始作했다. 그해 7月 黨(唐)은 高句麗가 造成해놓은 랴오시 景觀(景觀)을 破壞했다. 景觀은 高句麗 侵攻前에서 戰死한 隋나라 兵士의 骸骨을 모아 쌓은 것으로 一種의 傳承塔이다. 高句麗 指導部는 黨의 挑發에 緊張했으며 백제 義慈王은 新羅를 攻擊했다.





    滅亡 危機 直面한 新羅

    義慈王은 642年 8月 扶餘輪蟲(扶餘允忠)에게 1萬餘 兵力을 주어 新羅의 대야성(陜川)을 攻掠하게 했다. 대야성이 陷落된 後 新羅는 洛東江 右岸(右岸) 領土 大部分을 백제에 빼앗기고, 洛東江 左岸(左岸) 압량주(慶山)에 最後의 防禦線을 쳤다. 압량주에서 首都 月城(慶州)까지의 距離는 40~50㎞에 지나지 않는다. 新羅는 高句麗 前線에서도 밀려나 東海岸 國境이 하슬라(江陵)까지 縮小됐다.

    백제와 高句麗의 攻擊을 막아내지 못해 滅亡 危機에 直面한 新羅는 金春秋를 派遣해 高句麗에 軍士 支援을 要請하는 한便, 金庾信을 압량주 軍司令官으로 任命해 戰列을 再整備했다. 642年 가을 榮留王을 죽이고 政權을 掌握한 高句麗 淵蓋蘇文이 軍事支援을 拒否하자 新羅는 唐나라에 매달렸다. 唐나라는 太宗이 直接 指揮한 645年 高句麗 侵攻前에서 敗北하자 新羅를 利用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랴오허와 漢江 2個의 戰線에서 高句麗를 侵攻하기로 方針을 定했다.

    645年 나카노오에 王子(덴지 天皇)가 쿠데타를 통해 執權한 後 倭國(倭國)은 唐나라를 改革 모델로 삼아 ‘다이카 改新(大化 改新)’을 推進하면서 唐나라의 同盟國 新羅와 多少 가까워졌다. 압량주까지 後退하며 滅亡의 危機에 몰린 新羅의 金春秋가 直接 왜와 交涉했지만, 倭를 백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計劃은 失敗로 끝났다.


    百濟, 黃昏에 물들다

    百濟 指導部는 新羅-黨 同盟 構築 等 國際情勢 變化에 둔감했다. 백제는 新羅를 侵攻하기 위한 陸軍力 增强에 置重하느라 海軍을 等閑視했다. 660年 15萬 大軍을 실은 唐나라 艦隊가 京畿만(京畿灣)까지 南下해 德물도(덕적도)에 20餘 일이나 寄港했는데도, 高句麗 征伐을 準備하는 줄로만 알 程度로 狀況을 제대로 把握하지 못했다.

    唐나라軍은 錦江(錦江)을 타고 올라가 新羅軍과 合勢해 私費(扶餘)와 熊進(公主)을 빼앗고, 義慈王의 降伏을 받아냈다. 金庾信이 이끄는 新羅軍은 高句麗를 치는 것처럼 보이게 漢江 流域으로 北進하다가 方向을 틀어 南下해 황산벌에서 夫餘系백(扶餘階伯)의 決死隊를 擊破하고, 私費와 熊進 攻擊戰에 合勢했다.

    백제에서는 곧 복국(復國) 運動이 일어났다. 百濟 復興軍이 支援을 要請하자 왜는 黨과 復興軍 사이에서 難處한 處地에 빠졌다.부흥군 指導者 鬼室福信(鬼室福信)李 援兵과 함께 義慈王의 아들 부여풍의 歸國을 要請한 때가 660年 10月인데, 倭가 부여풍을 백제로 보낸 것은 거의 1年 뒤인 661年 9月이다. 왜는 決斷을 내린 뒤에는 破格的으로 復興軍을 支援했다. 661年 天王 사이메이(齊明)가 急逝한 뒤 나카노오에가 卽位를 미루면서까지 復興軍 支援에 全力을 다할 程度였다. 왜는 662年 1月 화살 10萬 個와 穀食 種子 3000席을 援助했으며, 2個月 뒤인 3月 피륙 300段을 追加로 보냈다. 倭가 百濟 복국 支援에 나서기로 한 데는 662年 1月 淵蓋蘇文이 平壤 近郊에서 唐나라軍 10萬 名을 전멸시키고, 2月에는 平壤 近郊에 孤立된 당장(唐將) 蘇定方이 新羅軍으로부터 軍糧 支援을 받은 後 艱辛히 退却한 것도 影響을 미쳤다.

    鬼室福信이 指揮한 百濟 復興軍은 泗沘城 駐屯 唐軍을 包圍할 만큼 氣勢를 올렸으나 全權을 掌握한 鬼室福信과 國王 부여풍 間 葛藤이 激化했으며, 663年 6月 부여풍은 鬼室福信을 殺害했다. 부여풍은 그해 8月 왜와 高句麗에 使臣을 보내 援兵을 要請했다. 왜는 追加 派兵했으며 高句麗는 新羅의 變更을 攻掠했다.

    百濟 復興軍 內部에 混亂이 일어났음을 把握한 新羅는 서둘러 出兵했다. 黨은 雄鎭에 駐屯하던 類人猿(劉仁願)의 增兵 要請에 따라 海軍 7000名을 追加 派兵했다. 黨의 손人事와 類人猿, 新羅 文武王이 이끄는 陸軍 및 唐나라 頭相과 義慈王의 아들 不여륭(扶餘隆)이 이끄는 170餘 隻의 艦船에 나눠 탄 海軍이 水陸 挾攻으로 復興軍의 首都 走流性(두루性)으로 進擊했다. 陸地에서는 復興軍 騎兵이 新羅軍과 맞섰으며, 바다에서는 倭에서 건너온 1000餘 隻의 艦船이 白江(白江) 江邊에 碇泊했다. 倭國 船團은 셋으로 나뉘어 唐나라 海軍을 攻擊했지만 干潮(干潮) 時間差 等으로 인해 數的으로 優勢했음에도 네 番 모두 大敗했다. 白殭에 集結한 왜 艦船 가운데 400隻이 불탔다. 舊唐書와 新唐書, 資治通鑑, 三國史記 모두 白江 海戰에 對해 “煙氣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描寫한다.

    倭國 長壽 에치노 다쿠쓰는 數十 名을 죽이며 奮戰했지만 끝내 戰死했고, 규슈의 豪族(豪族) 치쿠시老幾微 사쓰야마는 唐나라軍에 잡혀 8年間 抑留됐다가 歸國했다. 부여풍은 몇 사람만 거느린 채 高句麗로 달아나고, 살아남은 倭軍 艦隊는 흩어진 兵士들과 百濟 流民을 태우고 唐나라軍에 쫓기면서 艱辛히 歸國했다. 白江 大海戰은 中國과 韓半島, 日本 勢力이 모두 관계된 東北亞 最初의 海戰이었다.



    연개소문家의 相殘

    白江 大海戰을 끝으로 韓半島와 왜(倭)의 關係가 一段落됐다. 백제와 왜는 英國과 美國의 關係처럼 백제를 세운 夫餘系가 왜의 建國에 關與했다가 熊進 時代를 전후해 倭가 백제보다 더 强大해져 거꾸로 倭가 백제에 相當한 影響을 미친 것으로 推定된다. 陸地에서도 唐軍이 百濟 復興軍을 制壓하고 首都 走流性을 陷落시킴으로써, 任存城의 지수신(遲受信)을 除外한 復興軍 勢力이 潰滅했다. 이때 舍宅喪輿와 흑치상지, 倭軍, 耽羅(耽羅) 使臣 모두가 降伏했다.

    백제 滅亡 後 唐나라로 끌려간 백제 王族 및 貴族은 相當한 立地를 構築했다. 皇室 傍系인 李翁이 出世를 위해 義慈王의 曾孫女 부여태非(扶餘太妃)와 婚姻할 程度였다. 唐나라로 끌려간 百濟人 大部分은 黨의 政策에 따라 랴오허 流域 建安城으로 이주당해 渤海의 西晉(西進)을 막는 役割을 맡았다. 百濟人들은 唐나라에 依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制壓한다는 以夷制夷(以夷制夷)의 手段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그 過程에서 立地를 强化할 수 있었다.

    663年 百濟가 滅亡함에 따라 高句麗는 랴오허와 漢江 流域 2個의 戰線에서 敵軍을 막아야 했다. 高句麗는 黨이나 新羅 等 外敵이 아니라 연개소문 아들끼리 벌인 權力鬪爭 餘波로 沒落했다. 동생들과의 權力鬪爭에서 敗北한 長男 연남생은 唐나라에 投降했으며, 唐나라 정복군 大將 移籍(逝世적)은 668年 연남생을 香徒로 삼아 新羅의 支援을 받아 平壤城을 陷落하고 高句麗를 滅했다.
     
    唐나라는 國力에 비해 過度하게 膨脹했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韓半島 南部에까지 勢力을 뻗쳤으며, 高句麗를 멸망시킴으로써 랴오허, 쑹화場(松花江)을 넘어 黑手말갈(黑水靺鞨)의 根據地 헤이룽장 流域까지 勢力을 넓혔다. 여기에다 몽골高原의 薛延陀를 制壓하고, 키르기즈와 우즈베키스탄을 包含한 中央아시아와 길기트를 包含한 파키스탄 東北部로까지 勢力을 뻗쳤다.

    唐나라는 過度하게 膨脹하면서 內外 모두의 抵抗에 부딪혔다. 過度한 戰費 支出로 症勢(增稅)가 不可避해짐에 따라 經濟 中心地인 장화이(江淮)를 비롯한 到處에서 民亂이 일어났다. 거란과 渤海의 攻擊에 對備해 設置된 허베이, 산시, 산둥 地域 節度使들의 割據는 唐나라의 分裂을 재촉했다. 티베트 高原의 吐蕃, 滿洲의 渤海, 윈난의 南朝(南詔), 中央아시아 사라센 압바스 王朝, 몽골 高原의 後突厥(後突闕)의 抵抗은 帝國의 分裂을 加速化했다.


    티베트의 興氣

    黨(唐)의 强敵은 西쪽에서 出現했다. 티베트 高原에서 興起한 吐蕃이었다. 高句麗가 滅亡한 다음 해인 669年 가르첸링이 이끄는 吐蕃軍은 薛仁貴가 指揮한 唐나라-吐谷渾 10萬 聯合軍을 청해호 南쪽의 다페이촨(大非川)에서 擊破했으며, 餘勢를 몰아 新疆의 안서 4陣(安西四鎭) 卽, 카라샤르, 쿠차, 호탄, 카슈가르를 掌握했다. 몽골高原의 突厥이 復興하고, 滿洲와 韓半島 北部를 領域으로 하는 渤海가 獨立했으며, 新羅가 唐軍(唐軍)을 물리친 것도 다페이촨 戰鬪에서 唐나라가 吐蕃에 大敗했기 때문이다. 가르첸링의 吐蕃軍은 678年 이경현이 이끄는 唐나라 18萬 大軍을 칭하이湖 附近의 칭펑링(承風嶺)에서 大破했는데, 이로써 칭하이의 티베트火가 鞏固해졌다.

    東突厥이 滅亡한 지 50餘 年이 지난 679年 아쉬나(阿史那) 部族長 쿠틀룩(Qutluk)李 톤油쿡(Tonyukuk)과 함께 突厥을 再建했다. 몽골高原을 中心으로 突厥帝國을 再建한 쿠틀룩은 唐나라에 攻勢를 取해 허베이와 산시, 간쑤省 變更을 週期的으로 掠奪했다. 쿠틀룩의 동생 카프間(默?)도 唐나라에 對한 攻勢를 繼續해, 前突厥(前突厥) 全盛期의 領土를 거의 回復했다. 이때 高句麗 遺民 10萬餘 名도 突厥에 合流했다. 그中 고문간(高文簡)은 카프間의 사위가 돼 ‘高麗王莫離支(高麗王莫離支)’라고 稱했다. 以後 고문간과 高空의, 固定部 等이 이끄는 高句麗人들은 쿠틀룩과 카프間 後孫 間 內紛이 일어나자 唐나라에 降伏했으며 內몽골에 定住했다.

    唐나라가 新興 吐蕃과 後突厥의 攻擊에 시달릴 때 랴오허 流域으로 强制 이주된 高句麗 殘存 勢力이 거란족이 蜂起한 機會를 利用해 復興 運動에 나섰다. 처음에는 걸걸중상과 乞士비우, 나중에는 大祚榮이 指揮한 高句麗 別付(別部) 靺鞨系 中心의 復興軍은 高句麗가 滅亡한 30年 뒤인 698年 唐나라 追擊軍을 擊破하고 東牟山性(지린省 옌볜朝鮮族自治州 鈍化視)을 中心으로 渤海(渤海)를 세웠다. 걸걸중상(乞乞仲象)과 乞士비우(乞四比羽)의 ‘걸걸(乞乞)’ 또는 ‘걸(乞)’은 우리말 ‘클(크다)’을 音叉(音借)한 것이다. 大祚榮(大祚榮)과 대야발(大野勃)을 包含한 걸걸중상의 子孫이 大氏(大氏)를 稱한 것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世界의 首都, 長安

    카프間의 아들 뵈귀(Innel)를 죽이고 加한 자리에 오른 쿠틀룩의 아들 빌게(716~734)는 725年 唐나라와 外交 關係를 樹立했으며, 服屬 部族의 叛亂을 平定하고 後突厥을 안정시켰다. 빌게는 둘闕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진 톤유쿡을 시켜 唐나라軍을 간쑤 地域에서 大破하고, 河西回廊 地帶를 蹂躪했다. 後突厥의 歷史는 731年 死亡한 빌게의 동생 퀼테긴(Kultegin)의 業績을 기린 오르콘 鼻紋(Orkhon Inscription)에 잘 나타나 있다. 퀼테긴의 葬禮式에는 唐나라, 거란, 티베트, 소그드, 부하라, 키르기스에서 온 弔問 使節이 參席했다. 突厥語와 漢文으로 새겨진 톤油쿡 碑文은 前突厥(前突闕) 敗亡의 原因을 첫째, 衰退期 指導者들의 怠慢과 無知. 둘째, 突厥 百姓의 어리석음과 同族 間 對立. 셋째, 突厥 文化 抛棄와 中國化 追從. 넷째, 中國 王朝의 內部 分裂策 等이라고 指摘했다. 또한 “移動하는 者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突厥을 弱하게 만드는 佛敎와 道敎 等 異質的인 宗敎를 받아들이지 말고 突厥精神을 保存하자”는 말도 包含돼 있다.

    唐나라는 韓文化(漢文化)를 基本으로 했으나 皇室이 선비족인 까닭에 선비的 要素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唐나라 李氏는 五胡十六國(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한족 王朝 西凉(西?) 李氏를 先祖로 한다고 主張하나, 實際는 북위(北魏) 무천진 선비족 出身 대야氏(大野氏)의 後孫이다. 太宗 李世民의 境遇 어머니는 선비足 杜氏(竇氏), 아내도 선비족 長孫氏(長孫氏)다. 太宗은 ‘玄武門의 政變’에서 殺害된 親同生 이원길의 아내 梁氏를 後宮으로 들였으며, 高宗은 아버지 太宗의 後宮이던 巫祖(武照)를 아내로 삼았고, 玄宗은 아들 獸王 姨母(李瑁)의 아내 양옥진을 빼앗아 後宮으로 뒀다.



    勳自足의 나라 소발率

    唐나라는 外國人이라 해도 能力 있는 者는 要職에 拔擢하는 等 내·외국인 間 差別을 두지 않았다. 흑치상지, 고선지, 이정기, 不몽寧察, 哥舒翰, 안록산, 李謹行과 그의 아들 이다조 等 수많은 外國 出身 人士가 高位職에 올랐다. 長安은 唐나라의 首都일 뿐만 아니라, 東아시아와 中央아시아-中東을 아우르는 世界의 首都 구실을 했다. 따라서 人材와 物産이 長安으로 모여들었다. 

    선비족을 祖上으로 둔 太宗 李世民의 後宮 巫祖(則天武后)는 655年 高宗의 皇后로 冊封된 以後 政權을 잡았다. 則天武后는 705年 死亡할 때까지 50年間 絶對 權力을 한 次例도 놓지 않았다. 690年 國名을 아예 週(周)나라로 바꾸고, 洛陽으로 遷都하기까지 했다. 則天武后는 太宗의 妻男이며 무천진 人脈의 中核인 宰相 長孫無忌(長孫無忌)를 殺害하는 等 西魏→北周→數→黨에 이르기까지 政權을 오로지韓 선비족 무천진 人脈(關?集團) 爲主에서 벗어나 西魏(西魏)-北齊(北齊) 地域이던 關東 出身들도 起用했다.

    則天武后는 自身에게 反對하는 者는 子孫이라 해도 容恕하지 않은 冷酷 無慈悲한 政治人이었다. 아들 利弘, 孫女 靈胎君主를 包含한 皇族들과 重臣들을 數없이 죽였다. 그러나 적인걸(狄仁傑)과 姚崇(姚崇), 장간지(張柬之) 等 必要한 人材를 키우고, 나라를 效率的으로 統治해 國富를 增大시키는 等 相當한 業績을 이룩했다.

    則天武后가 죽은 뒤 孫子 이융기는 쿠데타를 일으켜 叔父인 中宗의 皇后 魏氏(韋氏) 日當을 除去했다. 그는 皇帝(玄宗)가 된 다음 積極的인 對內外 政策을 取했다. 顯宗 時代에도 唐나라와 吐蕃은 伸張과 中央아시아에 對한 霸權을 놓고 戰爭을 繼續했다. 唐나라와 吐蕃 間 戰爭에서 核心 地域은 파키스탄 東北部 勳自足의 나라 소발率(길기트)이었다. 소발率(小勃律)은 東쪽은 티베트, 西쪽은 아프가니스탄, 南쪽은 인더스강, 北쪽은 伸張과 連結되는 要衝地였다. 소발率은 사마르칸드(康國),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샤흐리샤브즈(史國) 等 中央아시아의 오아시스 都市國家에서 唐나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구멍(咽喉) 같은 곳으로 吐蕃이 掌握하고 있었다.




    製紙 技術의 유럽 傳播

    747年 高句麗 遺民 出身 안서都護府 副都護(副都護) 高仙芝는 7000餘 名의 兵士를 거느리고 파미르 高原을 넘어 放心하고 있던 吐蕃軍을 擊破한 데 이어 氷河로 뒤덮인 다르코트 溪谷을 달려 내려가 소발率性을 陷落시킴으로써 中央아시아에 對한 唐나라의 霸權을 確立했다. 그로부터 3年 뒤인 750年 高仙芝는 다시 中央아시아 遠征길에 올랐다. 타슈켄트가 사라센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中央아시아에 對한 唐나라의 影響力이 弱化되던 時期다.

    高仙芝가 이끄는 黨(唐)-西域(西域) 10萬 聯合軍은 751年 1月 타슈켄트性(城)을 包圍했다. 高仙芝는 타슈켄트王을 속여 降伏을 받아냈다. 當初 約束과 달리 長安으로 連行된 타슈켄트王은 처형당했으나 中央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사라센 압바스 王朝로 넘어갔다. 唐나라의 中央아시아 支配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다.

    사라센은 페르가나 溪谷을 넘어 키르기즈의 탈라스 强까지 觸手를 뻗쳐왔다. 751年 8月 高仙芝가 指揮하는 唐나라軍은 탈라스 戰鬪에서 사라센과 突厥界 카를룩 聯合軍에 大敗했으며, 이로써 唐나라의 中央아시아 支配는 終熄됐다. 이때 唐나라軍 陣營에 있던 製紙 技術者가 사라센軍에 잡혀간 것이 製紙 技術이 사라센(中東)과 유럽에 傳播되는 起源이다.

    唐나라는 750年 楊貴妃(楊貴妃) 一家인 宰相 量쇠(양국충)와 檢남節度使(劍南節度使) 선우中通의 指揮下에 윈난(남만)의 白族(白族) 王國인 南朝(南詔)를 攻擊했으나, 各라봉(閣羅鳳)李 指揮하는 南朝軍과의 노남 戰鬪에서 戰死者 7萬餘 名을 내는 等 大敗했다. 7世紀 初 백族이 쿤밍(昆明) 西北部에 位置한 代理를 中心으로 蒙首(蒙?), 月石(越析), 시랑(施浪), 等섬(??), 낭宮(浪穹), 夢死(蒙舍) 等 6個의 條(詔·나라라는 뜻)를 建設했으나, 夢死를 除外한 5個 나라는 곧 西北쪽으로부터 侵攻해온 吐蕃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吐蕃과 敵對關係이던 唐나라는 남竈王 피라角(皮邏閣)을 支援해 吐蕃의 影響下에 있던 餘他 5個의 條를 멸망시키고 737年 윈난을 統一하게 했으나, 南朝가 急成長해나가자 威脅을 느낀 나머지 侵攻한 것이다.



    唐, 滅亡하다

    唐나라는 753年 家眷(賈?), 754年 異腹(李宓)에게 大軍을 주어 지난番의 敗戰을 雪辱하게 했으나 거듭 慘敗하고 말았다. 南朝의 最全盛期를 가져온 姨母審(異牟尋)李 在位하던 793年 南朝는 土蕃을 擊破했으며, 卷風雨(勸豊祐)가 統治하던 829年에는 쓰촨으로 北進해 청두(成都)를 占領했다. 안록산-史思明의 난 以後 吐蕃이 長安까지 侵攻하자 國力을 强化한 남照度 쓰촨을 蠶食해 들어갔다. 南朝는 미얀마, 라오스, 泰國, 북베트남 方向으로도 勢力을 뻗어나갔다. 南朝의 攻勢에 밀려 윈난 一帶에 居住하던 타이, 샨 種族이 오늘날의 인도차이나 地方으로 밀려났다.

    唐나라는 南朝에 對備해 구이저우(貴州)와 광시(廣西) 方面에도 守備軍을 增强하지 않을 수 없었다. 南朝에게마저 밀린 唐나라의 黃昏이 붉게 물들었다. 南朝 亦是 873年 北方 前進基地인 청두를 喪失한 다음부터 衰落의 길을 걸었다. 混亂 끝에 902年 한족 出身 權臣(權臣) 정매사가 政權을 簒奪해 大將畫局(大長和國)을 세웠다. 927年에는 檢남節度使 量간정이 大將畫局을 멸망시키고 大義令國(大義寧國)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10年 뒤인 937年 桶海節度使 단사평(段思平)李 여러 部族의 支持를 받아 大義令國을 멸망시키고 大理國을 세웠다.

    後突厥에서는 오즈微視 샤드가 741年 텡그리 可汗을 죽이고 스스로 可汗에 登極했다. 오즈微視에 反對한 後突厥 支配層 大部分은 742年 唐나라에 投降했다. 弱體化된 後突厥은 위구르族에 依해 滅亡당했으며, 이는 唐나라의 危機를 심화시켰다. 몽골高原의 돌궐족이 舒川(西遷)함에 따라 몽골高原과 신장, 랴오허 流域이 한꺼번에 不安定해졌다. 唐나라를 滅亡으로 이끈 것은 안록산-史思明의 난, 황소(黃巢)의 亂과 함께 沙陀돌궐족(沙陀突厥族)의 南下였다. 안·社의 亂으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唐나라는 黃巢의 亂과 뒤이은 朱全忠의 背反, 沙陀突厥의 侵攻으로 滅亡했다.




    백범흠
    ● 1962年 慶北 醴泉 出生
    ●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卒業, 政治學博士
    ● 駐中國大使館 總領事
    ● 現 駐프랑크푸르트總領事館 總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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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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