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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政安全部 ‘6個 政權 長官級 人士 現況’|新東亞

行政安全部 ‘6個 政權 長官級 人士 現況’

이명박 政權 ‘嶺南 偏重’ 最高… 전두환·노태우 政權보다 높아

  • 허만섭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mshue@donga.com / 구자홍 동아일보 新東亞 記者 jhkoo@donga.com

    入力 2008-04-08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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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政權, 忠淸·江原 出身 拔擢도 最高
    • 歷代 政權 모두 靑瓦臺는 大統領 故鄕出身 重用
    • 內閣 人選, 公薦 過程에서 이너서클 權力移動
    • 李在五·이상득·류우익·朴榮濬 ‘4人坊 急浮上’
    • 出帆 한 달, 李明博 核心 公約 줄줄이 留保·延期
    • 한나라 文件 “法律 先進化 비전으로 突破하라”
    행정안전부 ‘6개 정권 장관급 인사 현황’

    李明博 大統領이 3月8日 靑瓦臺에서 長官級 官僚·處長·廳長들에게 任命狀을 授與하고 있다.(위) 行政安全部 文件.(아래)

    지난 2月25日 낮 12時30分頃 記者 一行은 粘埴食事 後 서울 光化門 四거리 附近 茶집에서 茶를 마시고 있었다. TV에서는 李明博 大統領이 汝矣島 國會議事堂에서 열린 就任式을 끝내고 서울市廳 廣場에 들러 市民들과 握手하는 場面이 나왔다. 茶집에 있던 손님들이 關心 어린 視線으로 TV를 지켜봤다. 그中 한 사람이 “조금 있으면 大統領 카 퍼레이드 行列이 이곳을 지나가겠네. 밖에 나가서 直接 구경하자”고 했다.

    그러자 大部分의 손님들이 우르르 道路邊으로 몰려나갔다. 이윽고 이 大統領이 乘用車 지붕 밖으로 上半身을 내밀어 손을 흔들면서 지나가자 손님들은 拍手를 치고 携帶電話로 寫眞을 찍어댔다. 사람들의 그런 期待와 關心 속에 이 大統領은 靑瓦臺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명박 政權 出帆 後 한 달餘가 지난 只今은 어떨까.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5年 任期의 大統領이 國民에게 첫선을 보이는 것은 內閣과 靑瓦臺 祕書陣을 꾸리는 데서 始作된다. 知人들의 面面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듯, 大統領 周邊에 布陣된 사람들을 보면 國政 運營의 方向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명박 政權에선 人事를 둘러싼 雜音이 그치지 않았다.

    大統領職引受위 時節부터 생겨난 ‘고소영 S라인’(高麗大, 소망교회, 嶺南, 서울市廳 出身 重用 人事)을 筆頭로 ‘강부자’(江南 땅 富者) 內閣, ‘강금실’(江南의 金싸라기 같은 땅 實所有主) 內閣이라는 新造語가 流行했다. 甚至於 5代 司正機關腸(國精院長, 法務長官, 靑瓦臺 民政首席, 檢察總長, 警察廳長)李 모두 ‘嶺南 出身’으로 채워졌다 하여 ‘오사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여기에 더해 靑瓦臺 祕書室을 總括하는 大統領室長(류우익·慶北 喪主)과 地自體 業務를 管掌하는 行政安全部 長官(元世勳·慶北 榮州)까지 嶺南 出身으로 채워져 ‘이명박 政權=嶺南 政權’이라는 批判의 목소리가 높았다.



    ‘地域 偏重 人事’ 正確한 測定法

    人事와 關聯된 論難 中 特히 ‘地域 偏重 人事’ 論難은 選擧에서 무서운 ‘後暴風’을 일으킨다. 總選을 눈앞에 둔 이명박 政權이 이런 論難을 自招했다는 것 自體가 一旦은 問題로 指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政權에 對해 部分으로 全體의 性格을 評價한 點, 印象批評에 치우친 點은 없는지도 따져볼 必要가 있다. 人事의 ‘地域 偏重度’를 正確히 測定한 다음, 그 結果를 갖고 評價하는 것이 合當한 順序다.

    가장 合理的인 測程法 中 하나는 이명박 政權의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와 靑瓦臺 首席祕書官 全體를 對象으로 出生地別 頻度를 測定한 다음 이를 以前 政權의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와 靑瓦臺 首席祕書官 全體의 出生地別 頻度와 比較해 兩者 間에 뚜렷한 差異點이 있는지를 把握해보는 方法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신동아’는 行政安全部가 作成한 ‘大統領 祕書室 首席以上 및 長官(級) 異常者 現況(第5共~李明博 政府)’ 文件을 單獨 入手해 統計 處理했다. 여기서 ‘長官級 以上’이란 國務總理, 各 部處 長官 等 國務委員과 大統領室長(옛 大統領祕書室長), 國精院長, 國務總理室長(옛 國務調整室長), 公正去來委員長, 金融委員長 等 政府 職制上 ‘長官級 以上’ 人事를 모두 包含한 槪念이다. 行政安全部 資料에는 歷代 政權의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 및 靑瓦臺 首席祕書官의 出身地域이 出生地 基準으로 分類되어 있었는데 ‘신동아’는 分析作業 때 이를 그대로 適用했다.

    행정안전부 ‘6개 정권 장관급 인사 현황’

    李明博 政府의 國務會議 모습.

    그 結果 分析 對象 6個 政權 初代 內閣의 全體 長官級 以上 官僚 中 嶺南 出身이 차지하는 比重은 이명박 政權 33.3%, 김영삼 政權 32.3%, 김대중 政權 32.1%, 노무현 政權 31.3%, 全斗煥 政權 25.0%, 노태우 政權 21.9% 順으로 나타났다.

    卽, 이명박 政權은 6個 政權 中 嶺南 出身 官僚의 比重이 가장 높은 政權으로 드러났다. 10年 만의 政權交替로 誕生한 첫 內閣에서 大統領 故鄕 出身者들이 大擧 起用됐다는 點은 政權을 잃은 篇에는 疏外感을 주는 일이며 國民和合 側面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結果를 두고 이명박 政權에 對해 “最惡의 地域 偏重 人事를 했다”고 攻擊하는 것은 無理다. 왜냐하면 嶺南 偏重 수치에 있어 1~4位인 李明博,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政權의 差異가 매우 작기 때문이다. 1位 이명박 政權과 4位 노무현 政權의 嶺南 出身 比重의 差異는 不過 1.9%에 不過했다. 이는 長官 한 名이 嶺南 出身이냐 非嶺南 出身이냐에 따라 1位와 4位의 順位가 뒤바뀔 수 있을 程度의 적은 差異다. 5年 前 노무현 政權 初代 內閣을 두고 누구도 ‘嶺南 政權’이라고 規定하진 않았다.

    慶尙道 軍部 政權 性格인 全斗煥 政權과 노태우 政權의 嶺南 偏重度가 民主化 以後 政權에 비해 確然히 낮다는 點이 耳目을 끈다. 實際로 5, 6共和國에 參與했던 人士들은 “5, 6共和國은 政權의 正統性이 相對的으로 弱했기 때문에 大統領들은 오히려 輿論의 支持基盤을 鞏固히 하기 위해 地域 均分 人事에 努力한 側面이 剛했고 經濟成長 等 實績을 낼 수 있는 能力 爲主의 人事를 한 傾向이 있었다”고 說明했다.

    또한 김대중 政權의 境遇 大統領 出生地가 湖南임에도 嶺南 出身을 重用했다.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 中 大統領 故鄕인 湖南 出身의 比重도 28.6%에 그쳤다. 이는 김대중 當時 大統領이 嶺南-6共 出身인 김중권氏를 初代 大統領祕書室長에 起用한 것과 脈을 같이한다. 金 當時 大統領은 本人이 ‘湖南色’李 워낙 剛했기에 初代 內閣 人事에 있어 嶺南을 積極 配慮한 側面이 있었다는 것이다.

    ‘蕩平 그룹’과 ‘嶺南 그룹’

    결론적으로, 6個 政權의 初代 內閣을 比較했을 때 전두환·盧泰愚·김대중 政權은 ‘地域 蕩平 人事에 努力한 그룹’으로 김영삼·노무현·李明博 政權은 ‘嶺南 出身을 重用한 그룹’으로 分類된다.

    이명박 政權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의 境遇 嶺南 中에서도 大邱·慶北(TK)의 躍進이 두드러진다. 全體 嶺南 出身 33.3% 가운데 TK 比率은 23.8%였고, 釜山·慶南(PK)은 9.5%였다. 전두환·노태우 政權 初期 內閣에서 TK 出身이 차지한 比重이 各各 7.1%와 12.5%였던 點을 勘案해보면 이명박 政權에서 TK 出身이 23.8%를 차지한 것은 相當히 높은 水準임을 알 수 있다. PK 出身 比重이 한 자릿 手로 떨어진 것도 노태우 政權(9.4%) 以來 처음이다.

    忠淸·江原 出身이 大擧 拔擢된 點도 이명박 政權의 初代 長官級 人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다. 講院 出身의 境遇 이명박 政權을 除外한 歷代 모든 政權에서 차지하는 比重이 한 자릿數였다. 김대중 政權에서는 ‘0’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政權에선 講院 出身의 比重은 14.3%로 껑충 뛰어올랐다. 李 大統領은 江原道 春川에서 文化體育관광부로부터 部處 業務報告를 받는 자리에서 “이番 內閣은 江原道 內閣이다. 한승수 總理가 江原道 出身이고 이상희 國防部 長官과 김하중 統一部 長官이 모두 江原道 出身”이라고 發言해 論難이 일었다. 歷代 政權과 比較한 數値로 보면 빈말은 아니다.

    忠淸圈의 境遇도 마찬가지. 노무현 政權의 初代 長官級에서 忠淸 出身은 8.6%에 不過했던 것이 現 政權에서는 19.0%로 높아져 歷代 政權 中 最高를 記錄했다.

    比重이 높아진 地域이 있으면 낮아진 地域도 있는 法. 首都圈 出身과 湖南 出身의 比重은 낮아졌다. 湖南은 김영삼 政權 以後 줄곧 20%臺 比重을 維持했지만 이명박 政權 들어 14.3%로 줄었다. 統合민주당이 ‘嶺南 偏重’과 함께 ‘湖南 忽待論’을 提起하고 나선 데에는 이 같은 偏差가 빌미가 되고 있는 것이다.

    행정안전부 ‘6개 정권 장관급 인사 현황’

    李在五 이상득 류우익 박영주(왼쪽부터 次例로)

    MB 靑瓦臺 ‘故鄕 偏重’ 歷代 4位

    初代 靑瓦臺 首席祕書官 人選의 境遇 全斗煥 政權을 뺀 나머지 5個 政權에서는 모두 大統領 故鄕 出身들이 大擧 拔擢된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政權(PK) 45.5%, 김대중 政權(湖南) 42.9%, 노태우 政權(TK) 37.5%, 김영삼 政權(PK) 33.3%, 이명박 政權(TK) 33.3%, 全斗煥 政權(TK) 11.1% 順이었다. 한 靑瓦臺 首席祕書官 出身 政治人은 “首席祕書官의 境遇 大統領의 國政 哲學에 對한 理解가 重要하다. 同鄕 出身이 많다는 點이 반드시 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飯(反) 李明博’ 勢力은 TK出身이 靑瓦臺 首席祕書官에 많이 拔擢됐다는 點을 根據로 ‘이명박 政權=TK 政權’이라고 攻擊해왔다. 그러나 分析 結果 靑瓦臺 人選에서 大統領 故鄕 出身이 重用되는 것은 歷代 政權에서 普遍的으로 나타나는 現象이며 故鄕 出身 比重에 있어서도 이명박 政權은 6個 政權 中 4位에 그쳤다.

    根源的 質問인 ‘이명박 政權은 嶺南 政權인가?’에 對해 이명박 政權과 歷代 5個 政權의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首席 祕書官 全員을 比較分析한 結果 다음과 같이 答辯할 수 있다.

    “이명박 政權은 數値上 長官級 以上 官僚 人選에서 ‘嶺南 偏重’李 歷代 最高이며 전두환, 노태우 政權 때보다 그 程度가 甚하다. 그러나 嶺南 偏重의 偏差는 金永三·金大中·노무현 政權과 比較했을 때 매우 작다. 靑瓦臺 首席祕書官 人選에서 이명박 政權의 大統領 故鄕 出身 偏重은 歷代 政權과 比較했을 때 그리 甚한 便이 아니다. 이명박 政權이 地域均衡 人事에 더 努力해야 할 必要는 있지만 ‘이명박 政權=嶺南 政權’이라는 圖式은 誇張된 것이다.”

    人事는 政權 權府(權府) 內部의 權力 關係를 엿볼 수 있는 尺度다. 人事에 影響力을 行使할 수 있는 權力만이 眞正한 權力으로 評價되기도 한다. 이명박 政權 出帆 直前과 出帆 以後 한 달間 靑瓦臺와 國會는 激變의 나날을 보냈다. 靑瓦臺-內閣 人選 및 總選 候補者 公薦 等 굵직한 人事 懸案을 處理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의 對象이 됐다”

    大選 前 이명박 政權의 側近 그룹은 大略 最高意思決定 모임인 6湮晦(이상득 國會副議長, 박희태 選對委員長, 李在五 議員, 김덕룡 議員, 최시중 常任 顧問, 정두언 議員)를 筆頭로 MB 側近 議員 그룹(이방호 事務總長, 朴亨埈 代辯人, 주호영 議員, 정종복 議員, 임태희 議員), 서울市廳 出身 그룹, 安國포럼 出身 그룹, 專門家 出身 그룹, 言論人 出身 그룹, 고려대 人脈 等으로 區分됐다.

    그런데 靑瓦臺-內閣 人選 및 總選 候補者 公薦 過程에서 이들 이명박 政權 이너서클의 內部 力學關係에 큰 變化가 생겼다. 大選 當時 이 大統領과 자주 獨對한 某 議員은 靑瓦臺에 自身의 補佐官을 들餘넣는 데에도 失敗했다. 外部에 알려진 것과 實際의 힘은 儼然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事例다. PK 出身 한 重鎭 議員의 境遇 그의 影響力下에 있던 여러 人士가 大選에서 ‘意味 있는’ 功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 中 만족스럽게 拔擢된 이는 한 名도 없어 周圍를 놀라게 했다. 自尊心 傷하는 職級을 提議받아 當事者가 拒絶하기도 했다. ‘파워’와 ‘파워’가 부딪쳐 밀린 것이다. 甚至於 李 議員마저 公薦 脫落의 쓴盞을 들어야 했다.

    MB의 側近으로 통한 다른 議員은 政府의 行政-豫算을 컨트롤하는 靑瓦臺 要職에 自身과 親한 公職者를 앉혔고 自己 사람들을 一定 程度 靑瓦臺에 入城시키는 데는 成功했다. 그러나 이들의 靑瓦臺 內 部署 配置와 職級은 뜻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內閣 人選에서는 影響力을 거의 發揮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記者는 “總理 人選에 對해 물으니 돌아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옛날 버전을 얘기하더라. ‘페인트 모션’을 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歷代 政權 初代 長官級 以上 官僚 出身 地域 頻度(%)
    地域 全斗煥 盧泰愚 金永三 金大中 盧武鉉 李明博
    首都圈 서울 21.5 25.0 12.9 3.6 20.0 9.5
    京畿 7.1 9.4 6.5 3.6 8.6 4.8
    仁川 3.6 3.1 0 0 0 0
    小計 32.2 37.5 19.4 7.2 28.6 14.3
    忠淸圈 忠南 3.6 6.3 12.9 10.7 5.7 9.4
    忠北 7.1 3.1 3.2 3.6 2.9 4.8
    大戰 0 3.1 0 3.6 0 4.8
    小計 10.7 12.5 16.1 17.9 8.6 19.0
    湖南圈 全北 0 3.1 9.7 7.2 5.7 9.5
    全南 7.1 12.5 9.7 21.4 11.4 4.8
    光州 0 0 3.2 0 2.9 0
    小計 7.1 15.6 22.6 28.6 20.0 14.3
    嶺南圈 TK 慶北 7.1 9.4 12.8 14.3 5.7 23.8
    大邱 0 3.1 6.5 3.6 11.4 0
    小計 7.1 12.5 19.3 17.9 17.1 23.8
    PK 慶南 17.9 9.4 6.5 10.6 14.2 9.5
    釜山 0 0 6.5 3.6 0 0
    小計 17.9 9.4 13.0 14.2 14.2 9.5
    小計 25.0 21.9 32.3 32.1 31.3 33.3
    江原 江原 7.1 3.1 3.2 0 5.7 14.3
    濟州 濟州 0 3.1 0 0 2.9 0
    以北 以北 17.9 6.3 6.4 14.2 2.9 4.8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權力 移動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한 白眉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6湮晦 멤버인 박희태 議員의 地域區 公薦 脫落. 朴 議員은 한나라당 競選 當時 이명박 候補의 選對委員長으로서 ‘李明博 競選 勝利’의 1等 功臣이었다. 한 與圈 人士는 “新聞 1面에 실린 ‘박희태 公薦 脫落’ 記事를 보고 놀랐다. 事前에 脚本이나 시나리오가 있었다면 朴 議員은 그 脚本이나 시나리오의 ‘主體’가 아닌 ‘대상’인 셈이었다. 朴 議員 本人도 衝擊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人事는 “各種 人選過程의 흐름을 追跡하다보면 李明博 權府의 수많은 名望家 中 李在五 議員, 이상득 副議長, 류우익 大統領室長, 박영준 靑瓦臺 企劃調整祕書官 等 4人坊이 權力의 核心으로 急浮上했음이 드러난다”고 밝혔다. ‘傳統的 MB 2人者’인 李在五 議員은 大選 後半 “坐視하지 않겠다”는 發言으로 박근혜 前 代表 側의 集中 攻勢를 받아 最高委員職을 辭退하는 等 2線으로 退陣했으나 各種 人選過程에서 그 파워를 急激히 復元·强化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李明博 大統領의 親兄 이상득 副議長과 그의 補佐官 出身인 박영준 祕書官은 靑瓦臺-內閣 조각을 事實上 主導했다는 評을 듣고 있다. 大選 當時 全國 廣域市道別로 專門家, 敎授, 地域 輿論 主導層을 中心으로 李明博 支持 포럼을 結成하는 等 ‘組織’을 맡았던 朴 祕書官은 靑瓦臺-政府-國會-公企業을 網羅하는 이명박 政權의 ‘큰 그림’을 그리는 役割을 遂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與圈 人士는 “서울大 敎授 出身인 류우익 室長은 大選 前에는 이명박 候補의 諮問 敎授 그룹 一員이었으나 大統領室長에 任命된 뒤 靑瓦臺에 對한 掌握力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4月 總選 結果에 따라 이명박 政權 내 權力 構圖는 다시 요동칠 것이라는 展望이 나온다.

    實績도, 變化도, 感動도 없다

    ‘이명박 政權의 한 달’에 對한 輿論의 大體的 評價는 그리 厚한 便이 못된다. 多少 性急한 얘기이긴 하지만 ‘實績’도 없고, ‘變化’의 모멘텀도 없고, ‘感動’도 없다는 것이다. ‘電報대’ ‘어륀지(오렌지)’ 類의 ‘레토릭 政治’에 國民은 슬슬 食傷해하고 있다. 오히려 長官 內定者들에 對한 各種 疑惑 提起에 이들이 奇想天外한 比喩로 對應하면서 이명박 政權의 첫印象은 구겨졌다.

    “自然의 一部인 땅을 사랑할 뿐이다”, “汝矣島가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은 地域은 아니다. 살 만한 곳이 아니라서 送波에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分讓받았다”, “(論文 重複 揭載) 썩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夫婦 敎授 財産 30億은 다른 사람에 비해 兩班인 셈이다”, “(골프 會員券) 4000萬원 주고 산 것이라 싸구려라고 答했다”….

    박관용 前 國會議長 인터뷰

    “地域 按排가 꼭 옳은 건 아니다”


    행정안전부 ‘6개 정권 장관급 인사 현황’
    김영삼 政權 初代 大統領祕書室長을 지낸 박관용 前 國會議長은 “大統領 人事를 두고 (地域 偏重 等) 하나의 基準만을 놓고 옳다 그르다 얘기하는 것은 穩當치 않다”고 말했다.

    ▼ 李明博 政府 初代 內閣 人選을 둘러싸고 地域 偏重 人事라는 批判이 提起되고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大統領이 行한 人事를 두고 어느 하나의 基準만을 놓고 옳다 그르다 얘기하는 것은 穩當치 않다. 政權마다 나름의 特性이 있는 것 아니냐.”

    ▼ 現 政府 靑瓦臺 首席級 가운데에는 서울과 嶺南을 除外하고, 湖南과 忠淸 出身이 하나도 없는데, 甚한 것 아닌가.

    “(地域) 안배형 人事를 통해 地域 統合을 誘導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能力 爲主의 人事도 할 수 있다. 더 重要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政權을 運營해 나가느냐다.”

    ▼ 文民政府 初代 內閣과 靑瓦臺 首席級 人事를 살펴보면 比較的 地域別로 고른 分布를 보이고 있던데, 當時에 出身 地域을 考慮했기 때문 아닌가.

    “勿論 考慮했다.”

    ▼ 當時와 比較해 볼 때 李明博 政府에서는 地域 按排가 없었다는 指摘도 있는데.

    “地域 偏重이란 意味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地域과 關係없이 國政 運營 方向에 맞춰 뜻이 맞는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것이다. 例를 들어 美國의 케네디 大統領은 동생을 法務長官 시키기도 하지 않았나. 우리나라 現實에서는 不可能하겠지만. 그때와 只今 狀況을 單純 比較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런 答辯들은 多數 國民의 普遍的 價値判斷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명박 政權에 對한 支持와 信賴를 低下시켰다. 노무현 政權의 失敗에서 立證됐듯 ‘常識에 半(反)하는 政權’만큼 危殆로운 政權은 없다.

    한나라당 戰略 文件은 大選 勝利 直後인 2007年 12月 中旬 이명박 當選者 側에 “國務總理-長官 人事聽聞會에 徹底히 對備하여 ‘野黨의 道德性 攻勢’를 遮斷하라”고 注文한 바 있다. 다음은 ‘신동아’ 2008年 1月號에 報道된 이 文件 內容 中 一部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大統領이 總理로 指名한 장상 前 總理署理에 對해 僞裝轉入을 理由로 國會 認准을 拒否한 바 있고 總理署理 制度도 憲法 趣旨에 맞지 않다고 批判한 바 있다. 統合新黨은 總理 人事聽聞會 및 長官 人事聽聞會를 18代 總選 戰略의 核心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總理 指名者의 道德性 問題가 불거질 境遇 總理 認准을 反對해 새 政權을 腐敗政權으로 낙인찍고 이 政權에 對한 牽制心理를 擴散시키려 할 수 있다. 統合新黨이 이명박 當選者의 道德性 問題를 集中 攻擊하는 데 이어 總理 및 長官들에 對해서도 聽聞會에서 僞裝轉入, 不動産投機, 脫稅, 兵役 等에서 疑惑이 提起될 境遇 한나라당의 總選 構圖가 不利해질 可能性이 큰 만큼 人事檢證 시스템이 그 어느 때보다 重要하다. 引受위에서 總理 指名者와 新任 長官 候補의 人事檢證을 제대로 하기 위한 特別팀 構成을 檢討할 必要가 있다.”

    한나라당 ‘戰略 文件’

    文件은 2~3月에 實際로 일어난 일들을 마치 본 것처럼 족집게처럼 正確하게 豫測했고 그 對備策을 提示했다. 그러나 檢證 시스템은 거의 稼動되지 않았다.

    大選 直後 作成된 한나라당의 또 다른 戰略 文件은 세 가지 提案을 담고 있었다. 이 文件은 于先 이명박 當選者 側에 “國政의 헤드쿼터人 ‘靑瓦臺’를 가장 優先的으로, 確實하게 掌握하라”고 勸告했다. 그러나 大統領職引受위는 正反對로 갔다. 盧武鉉 大統領과의 舌戰 以後 政府 部處로부터 業務 報告를 받는 過程에서 靑瓦臺만 빼버린 것이다. 이 當選者 側은 就任일이 가까워져서야 靑瓦臺 業務를 들여다보기 始作했다. 그 사이 盧武鉉 大統領 側은 主要 人物 데이터베이스, 인터넷 國政管理시스템(이지원) 等 靑瓦臺의 核心 機能을 政府記錄保存所로 보내 封印해버리거나 廢棄했다.

    이 때문에 이 大統領 側은 長官 內定者 人選이나 道德性 檢證에 이들 機能을 全혀 活用하지 못했다. 한나라당 關係者는 “일의 先後를 바꾼 것이다. 3月 中旬에도 靑瓦臺 業務를 確實히 掌握하지 못했다. 政權 初期 不安한 모습이 자주 나타난 原因이다”라고 했다.

    文件은 이어 “引受위 稼動 直後부터 노무현 政權이 임명한 政府傘下機關·公企業 任員들에 對해 强度 높은 退陣壓力을 加해야 한다”고 注文했다. 다음은 關聯 內容이다.

    “노무현 大統領은 政府傘下機關의 機關長, 任員, 監査 等의 任期를 法으로 保障하는 措置를 取했다. 卽, ‘公共機關 運營에 關한 基本法’을 制定하여 醱酵시킴으로써 反對 政派로 政權이 交替되더라도 自身이 任命한 落下傘 人士들을 退出시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盧 大統領 側은 甚至於는 任期가 남은 一部 人士들을 退任하게 한 뒤 다시 그 자리에 再任用함으로써 이들이 3年 任期를 더 누린 뒤 2009~2010年이 되어야 退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새 政府가 傘下機關 人事權을 實際로 行使할 수 있는 자리는 20餘 個에 不過하다. 人的 交替의 當爲性을 强力하게 說破하는 方式으로 政權 引受 初期 반드시 可視的, 大大的 人的 交替 雰圍氣를 만들어둬야 한다. 人的 交替 없는 政權 交替는 그 基盤이 不安定할 수밖에 없다. 또한 大統領이 人事權을 제대로 活用할 수 없으면 總選 公薦 過程에서 落薦者 配慮가 어렵고 이는 系派 間 葛藤 激化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提案 亦是 實行되지 않았다. 이명박 政權의 ‘노무현 사람들 退陣 攻勢’는 4月9日 總選에 臨迫한 3月 中旬이 되어서야 本格化됐다. 實技(失期)로 인해 ‘選擧를 앞둔 政治攻勢’로 받아들여져 그 名分이 退色됐다. 힘을 얻은 민주당의 거센 反撥을 招來함으로써 實際 退陣 效果도 크게 떨어졌다. 政權 初期부터 權府의 意中이 國政에 反映되지 않고 말이 먹혀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文件의 앞선 두 提案은 實行에 옮길 때를 이미 놓쳐버린 것이지만 마지막 提案은 이명박 政權에 機會를 주고 있다.

    “法律 先進化는 總選 勝利 戰略”

    文件은 “國民은 ‘經濟 살리기’ ‘國家 先進化’에 對한 期待 때문에 이명박 政權을 選擇했다”고 前提한 뒤 “이런 國民的 期待에 副應하기 위해선 政權 引受 直後 國家 先進化 目標 達成을 위한 ‘매우 具體的인 實行 計劃’을 提示해야 한다”고 提案했다. 文件은 “그 實行 計劃은 바로 ‘法律 先進化’”라고 밝혔다. 文件은 “‘法律 先進化’는 한나라당의 總選 勝利 戰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現在까지 이명박 政權은 ▲大運河, 輿論 收斂 以後로 延期 ▲7% 經濟成長 目標 下向調整 ▲不動産 去來 活性化 措置 延期 等 核心 公約을 줄줄이 뒤로 미루고 있다는 印象을 주고 있으며 國民에게 經濟 살리기를 위한 具體的 ‘액션 플랜’을 提示하지 못하고 있는 狀態다. 다음은 文件의 關聯 內容이다.

    “具體的 實行 計劃이 提示되지 않는 ‘經濟 살리기’ 비전은 空虛하다. 김영삼 政權은 執權 直後 國民에게 ‘新經濟 100日 計劃’이라는 ‘經濟 살리기’ 實行計劃을 發表했다. ‘短期的 景氣 浮揚策’이라는 批判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2008年 執權 直後 ‘經濟 살리기’의 最初 實行 計劃으로 ‘法律 先進化’가 國民에게 提示돼야 한다. 새 政權은 規制 緩和 및 改革을 통해 企業 投資를 活性化하고 大規模 外資를 誘致해 成長과 雇傭을 創出한다는 構想이다. 그런데 노무현 政權도 規制 緩和 및 改革을 積極 推進했으나 失敗했다. 그 理由는 旣存의 法律은 그대로 둔 채 그 法의 施行令, 規則만을 整備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施行令을 줄이고 뜯어 고쳐도 根本的으로 法이 잘못되어 있으면 行政府는 法律에 依해 執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規制 改革은 限界에 直面한다. 施行令은 公務員의 行政便宜主義에 依해 언제든 任意로 復活한다.

    國內에는 現在 5000餘 個의 法律이 있다. 그中 經濟活動 關聯 法律의 大部分은 1960~70年代 만들어져 只今까지 部分的으로 땜질해온 것들이다. 말하자면 朴正熙 大統領이 國民所得 100달러 나라를 1000달러 나라로 성장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法律을 가지고 只今 國民所得 2萬달러 나라를 4萬달러 나라로 成長시키려 하니 現實과 안 맞는 것이다. 韓國이 두바이나 싱가포르가 되려면 먼저 韓國의 經濟 法律이 두바이나 싱가포르의 經濟 法律 程度로 先進化되어 있어야 可能하다.

    따라서 經濟 살리기의 첫 段階인 規制 緩和 및 改革은 現實에 맞지 않는 經濟 法律을 果敢하게 廢止하고 世界 各地의 先進 法律을 參照하여 國家 先進化를 促進할 수 있도록 法律을 大幅 整備하는 根本的인 方式이 되어야 한다. 法律 先進化는 韓國 經濟를 産業化 時期의 足鎖로부터 解放시켜주는 確實한 方法이다. 이렇게 法的으로 完璧히 保障되어야 企業도 本格的 投資를 하게 된다. 立法機關인 國會 內에 ‘法律 先進化 特委’를 構成하여 專擔토록 할 必要가 있다. 法律 先進化는 經濟 살리기의 매우 具體的인 액션 플랜으로 國民에게 刻印될 수 있다. 또한 ‘李 같은 法律 先進化를 위해서는 이명박 政權의 總選 過半議席 確保가 絶對 必要하다’는 點을 國民에게 說得하면 한나라당의 總選 勝利가 可能하다.”

    MB, 公職 受任 初期 恒常 危機

    李明博 大統領의 境遇 흥미로운 點은 公職 受任 初期엔 例外 없이 危機를 맞았다는 點이다. 현대건설에서 나와 1992年 國會議員이 된 直後 財産公開 波動에 휘말려 이명박 議員은 當時 신한국당 指導部에 依해 ‘議員職 辭退’ 壓迫까지 받았다. 2002年 서울市長에 就任한 直後에는 ‘서울市 奉獻’ 發言, ‘히딩크 寫眞’ 波紋, 버스 大亂 等으로 精神없이 난타당했다. 이番 引受委 過程 및 大統領 就任 初期의 陣痛도 그 때와 비슷하다. 이런 理由로 이 大統領의 한 側近은 樂觀論을 편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어제의 MB와 오늘의 MB는 다르다. MB는 每日 ‘鎭火’한다. 그는 놀라울 程度의 學習力을 갖고 있다. 公職 受任 初期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施行錯誤를 겪지만 自身을 向한 批判의 核心을 재빨리 看破하고 修正하여 正常軌道에 오른다. 그 때부터는 特有의 推進力을 發揮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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