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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壞, 흔들림, 幻想… 傷處 받은 男子의 일그러진 사랑|新東亞

破壞, 흔들림, 幻想… 傷處 받은 男子의 일그러진 사랑

  • 강유정 映畫評論家 noxkang@hanmail.net

    入力 2008-04-04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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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男子의 사랑은 破壞다. 갖고 싶은 꽃을 꺾어버리는 矛盾 속에 欲望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男子의 사랑은 흔들림이다. 그가 反하는 것은 女子가 아니라 흔들린다는 것 그 自體다. 흔들림은 위태롭지만 흔들림이 없는 삶은 권태롭다. 男子의 사랑은 喪失이다.순수가 사라진 後 남은 사랑은 幻想이다.
    파괴, 흔들림, 환상… 상처 받은 남자의 일그러진  사랑

    映畫 ‘달콤한 人生’.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救援한다고 말한다. ‘매트릭스’의 네오를 살린 것이 트리니티의 사랑이었듯이 말이다. 때로 사람들은 그런 結論은 어처구니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永遠한 사랑은 언제나 浪漫的 數式으로 가득하다.

    장윤현 監督의 ‘黃眞伊’도 사랑했던 사람의 遺骸를 뿌리며 永遠을 約束하고 ‘銀杏나무寢臺’의 主人公들도 歲月을 거듭한 사랑 앞에서 눈물 흘린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偉大한 救援일까? 때로 사랑은 舊怨이라기보다는 毒藥인 듯싶다.

    사랑은 銅錢의 兩面처럼 憎惡와 짝을 이룬다. 사랑의 앙금은 未練으로 남기도 하지만 憎惡라는 다른 얼굴로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이 强烈할수록 떠나간 사랑에 對한 毒氣 어린 詛呪가 따라붙는 境遇를 種種 目擊한다. 어제까지 서로를 어루만지던 두 사람이 말할 수 없는 怨讐가 되어 서로 으르렁거린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容恕할 수 없는 感情의 아이러니. 사랑과 憎惡는 比例關係라서, 사랑할수록 相對를 破壞하고자 하는 欲望이 커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高潔한 感情 속에 숨은 이 破壞的 欲望은 쉽게 理解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아름다운 것을 破壞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所有하고자 하는 欲望의 原理이기도 하다. 갖고 싶은 꽃을 꺾어버리는 矛盾 속에 사랑에 對한 欲望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 ‘當身’을 破滅하고자 하는 欲望이 熱情으로 解釋될 수 있는 餘地도 여기에 있다.



    죽어서도 容恕 안 되는 ‘當身’

    ‘暴風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가 쓴 小說 原作으로도 有名하다. 이 作品은 ‘鬼氣’와 ‘사랑’이라는 矛盾된 單語가 어떻게 化學作用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復讐心으로 凝結돼 憎惡로 꽃피운다. ‘暴風의 언덕’은 消盡되지 않은 사랑의 沈澱物이 憎惡로 變質된 過程을 잘 보여준다. 저 至毒한 사랑의 對象이 되고 싶으면서도 너무도 慘酷해 함부로 그 바람을 말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이 바로 히스클리프의 사랑인 셈이다.

    所有할 수 없는 사랑의 殘酷함

    어린 時節부터 親舊이자 愛人으로 지내 온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些少한 誤解로 서로 멀어지게 된다. 캐서린의 葛藤을 變心으로 誤解한 히스클리프는 남아 있는 사랑의 感情을 代를 이은 復讐心으로 代替한다.

    復讐는 殘酷하기 이를 데 없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딸을 볼모 삼아 아들과 結婚시키고, 甚至於 땅에 묻혀 腐敗된 캐서린의 屍體를 파헤쳐내기도 한다. 그는 世上에 存在하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은 憎惡다. 그는 살아 있는 내내 自身을 背信한 캐서린을 憎惡하고 詛呪한다. 變해버린 와인이 毒이 되듯이 향긋했던 한때의 追憶은 致命的 患部가 되어 沈潛한다. 사랑은 憎惡로 곪아가다 暴力으로 바뀐다. 所有할 수 없는 사랑이란 이토록 殘酷하고 殘忍한 데가 있다.

    캐서린에 對한 히스클리프의 執着은 傳說이 되어 남는다. 이 殘酷하고 섬뜩한 러브스토리는 碇泊할 곳을 찾지 못한 熱情의 困境을 斟酌케 한다. 單 한 사람을 向한 마음이 準備되어 있을 때 그것은 어떤 方式으로든 相對에게 흐르기를 願한다.

    제니퍼 챔버스 린치 監督의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는 所有할 수 없는 女子에 對한 破壞的 欲望의 또 다른 極限을 보여준다. 映畫 속 主人公인 外科醫師 닉은 色情的이다 못해 危險해 보이는 女子 헬레나를 만나게 된다. 그女를 본 瞬間 닉은 그女에게 매료당하고 約婚女도 어머니도 모두 잊게 된다. 파티 場所에 와 噴水臺에 뛰어들어 몸을 적시는 헬레나. 그女는 그런 自身의 行動이 뭇 男性의 視線을 끌 것이라는 事實을 알고 있다. 걸어서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런웨이 모델 컷이 完成되는, 100名 中 한 名꼴의 아름다움을 所有한 女子이니 말이다.

    파괴, 흔들림, 환상… 상처 받은 남자의 일그러진  사랑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

    닉은 헬레나에게 여러 番 마음을 告白하지만 그女에게 닉은 小心하고 寒心한 샌님에 지나지 않는다. 헬레나는 그의 마음을 拒絶할 뿐 아니라 嘲笑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女가 事故를 當하고 만다. 實力 있는 外科醫師인 닉은 女子의 四肢를 切斷해 집 안에 가둬둔다.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는 이른바 ‘말이 안 되는’, 或은 倫理的으로 危險한 여러 가지 생각이 配置되어 있다. 假令 닉은 헬레나의 팔다리를 잘라내 살아 있는 토르소로 만들어버린다. 그女는 그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만지거나 抵抗할 수도 없고 게다가 달아날 수도 없다. 닉은 헬레나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혀주고 맛있는 飮食을 待接한다. 그리고 娼女를 불러 섹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닉이 헬레나에게 하는 行動은 男子들이 自身이 所有하고 싶은 女子에게 하고 싶은 倒錯的 衝動의 蓄積物이라 할 수 있다. 社會生活을 하는 常識的이고 道德的인 슈퍼에고가 할 수 없는 리비도의 要求를 닉이 하는 셈이다.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에 드러나 있는 欲望은 女子를 所有하는 것이 아니라 ‘獨占’하는 것이다.

    가두고 싶은 欲望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로 飜譯됐지만 ‘헬레나를 가두다(Boxing Helena)’라는 原題는 男子의 歪曲된 사랑을 훨씬 鮮明하게 보여준다. 男子는 自身이 當한 苦痛만큼을 돌려줌으로써 둘 사이 感情의 均衡을 잡고자 한다. 意外로 사랑이란 自身이 가진 愛情뿐 아니라 苦痛마저 共有하려 한다. ‘當身’을 사랑하면서 입은 自尊心의 傷處를 더 큰 傷處를 통해 回復하고자 한다. 그것이 復讐心이라 불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復讐가 사랑의 反證인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或은 變心한 女子에 對한 復讐心은 사랑에 對해 平凡한 期待를 가진 觀客을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는 사랑의 깊은 속내 中 하나다. 사랑의 反對말이 無關心이라는 말이 있듯, 憎惡는 處分되지 않은 感情으로 인해 加熱된다. 復讐라는 말이 無色할 程度로, 그 憎惡가 무너뜨리는 對象이 실은 스스로라는 點에서도 그렇다.

    憎惡가 破壞하는 것은 사랑했던 相對가 아니라 結局 自己 自身이다. 相對方에 對한 憎惡는 代價로 自己 自身을 要求한다. 憎惡心은 快感을 키우는 뼈와 살이 아니라 自滅을 加速化하는 毒으로 내면화한다. 캐서린의 幽靈에 시달리는 히스클리프, 女子를 괴롭히지만 結局 스스로 더 큰 아픔을 겪는 男子의 모습이 그렇다.

    ‘暴風의 언덕’과 ‘男子가 女子를 사랑할 때’에는 道德이나 倫理的 秩序 너머에 있는 사랑이 그려져 있다. 事前에 登載되지 않은 사랑의 陰鬱한 裏面이 이 矛盾的 衝動 속에 融解되어 있는 셈이다. 自己愛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은 사랑의 代價를 要求한다. 내가 相對를 사랑한다면 나르시시즘은 늘 그 異常을 돌려받기 願한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아무리 받아도 不足한 異常心理 아닐까. 憎惡로 뒤바뀐 사랑에 滿足이 있을 수 없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相對를 客觀的 打者로 想定한 사랑은 끝없이 외로운 旅路다.

    가두고 싶은 것, 어쩌면 사랑은 이 欲望과 뒤섞이곤 한다. 사랑하는 것을 所有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瞬間 사랑은 달라지고 만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永生을 누리는 惡魔가 된 드라큘라 亦是 마찬가지다.

    사랑은 世上을 救援한다지만 한 사람의 靈魂을 廢墟로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를 廢墟로 만들 수도 있기에 사랑은 偉大한 아이러니이며 逆說인 것이다. 結局 목숨까지 앗아가야 滿足하는 큐피드度 있다.

    誘惑을 기다리는 ‘男子’

    김지운 監督, 이병헌 主演의 ‘달콤한 人生’은 바람에 흔들리는 垂楊버들을 보여주며 始作한다. 바람과 함께 畵面은 漸漸 밝아진다. 그때 한 男子의 목소리가 다가온다.

    “어떤 弟子가 있었습니다. 弟子는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只今 흔들리는 것은 바람입니까, 나무입니까? 스승이 말하길, 只今 흔들리는 것은 바로 네 마음이니라.”

    決코 이뤄질 수 없는 달콤한 꿈

    파괴, 흔들림, 환상… 상처 받은 남자의 일그러진  사랑

    幸福

    ‘달콤한 人生’은 男子의 흔들림에 關한 映畫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 뜻을 세우고 이름을 알리고 家庭을 만들고 삶을 經濟하는 男子의 삶, 그中 가장 絶頂의 나이라고 할 수 있을 40은 不惑(不惑)의 나이라고 한다. 不惑은 무엇인가? 迷惑(迷惑)되지 말 것,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다.

    40이 不惑人 것은 흔들릴 理由가 없어 흔들림에 가장 弱한 나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職場도, 家庭도, 財政도 모두 安定的일 때 흔들림은 誘惑으로 다가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흔들릴 마음의 準備가 되어 있던 나무의 對答이었듯이 흔들릴 準備가 되어 있는 者들에게 바람은 바람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男子, 아직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組織의 2人者이자 가꾸고 견디어야 할 것이 즐길 것보다 더 많은 男子, 30代의 선우는 誘惑에 눈을 감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흔들려서는 안 될 가장 危險한 瞬間 바람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보스이자 1人者가 사랑하는 女子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映畫는 선우가 女子에게 흔들리는 瞬間 ‘바람’에 依해 뿌리가 뽑혀버린 나무를 感覺的으로 보여준다. 女子가 自身의 소리에 귀 기울인 채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漠然히 그女를 바라보던 선우는 어느 瞬間 갑자기 그女에게 사로잡혀버린다. 理由는 없다. 平素의 그女가 自身이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철없고 제 마음대로인 그女는 골칫덩어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女의 그 철없음이 瞬間 다른 意味로 解釋된다.

    ‘달콤한 人生’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선우가 그女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목숨의 威脅을 받는다는 點이다. 보스는 그의 잘못된 行實이 아니라 그릇된 選擇, 흔들림 自體를 追窮하고 斷罪하고자 한다. 보스는 그를 땅에 파묻고 絶對로 容恕할 수 없다고 말한다. 重要한 것은 ‘흔들림’ 自體라는 듯 酷毒한 刑罰을 준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거울을 보며 하루를 整頓하는 男子의 삶, 그 차갑고 端正한 삶에 끼어든 女子로 인해 선우의 삶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는 그女의 손을 잡아본 적도, 가까이서 그女의 體臭를 맡아본 일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女로 인해 기꺼이 삶의 方向을 轉換한다. 그렇지 않을까.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친 老人의 사랑은 무엇일까. 다만 그女로 인해 삶의 進路가 暫時 달라진 것이 아닐까. 흔들림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支離滅裂할까. 映畫의 에필로그는, 그런 點에서 한 篇의 詩임에 분명하다.

    “弟子는 깊은 잠을 자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럼, 왜 울었느냐? 그 꿈은, 決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戀愛하는 ‘男子’

    이루어지지 않은 所望, 가지 않은 길 때문에 人生은 달콤해진다. 선우는 그女에게 魅了되었다기보다 무엇인가에 매료당할 어떤 瞬間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便이 옳다. 선우가 반한 그女가 特別히 아름답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선우는 보스의 愛人에게 반하지만 그 理由가 鮮明히 提示되어 있지 않다. 선우는 그 感情에 對해서 仔細히 말하지 않는다. 그가 반한 것은 ‘흔들린다는 것’, 그 自體인 셈이다.

    “사랑이 어떻게 變하니?”

    언젠가 드라마 作家 노희경은 이 映畫를 두고 少年의 사랑이라 말한 바 있다. 허진호 監督의 作品 ‘봄날은 간다’는 ‘韓 女子’를 理解할 수 없었던 少年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率直히 말해 失敗談이라는 便이 옳다. 少年은 女子를 理解할 수 없다. 少女가 男子를 理解할 수 없듯이.

    ‘봄날은 간다’는 그 理解할 수 없음의 魅力과 致命性에 對해 읊조린다. 라면을 먹자며 먼저 誘惑하는 女子, 寢臺 밑 깊숙한 곳에 結婚寫眞을 버려둔 女子,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어 離別을 宣言하는 女子, 그 女子는 疑問투성이다.

    어떤 男子에게든 한 女子가 미스터리로 다가갈 때가 있다. 바로 그女를 사랑할 때. 사랑할 때 그女는 커다란 물음標처럼 危險하고 어렵다. 對答을 求하는 者에게 사랑은 傷處로 남는다. 사랑은 不均衡한 人間關係라서 純眞한 쪽이 傷處를 입는 境遇가 許多하다.

    사랑이란 興味롭게도 누군가에게는 加害者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被害者로 刻印된다. 그리고 참 異常하게도 내가 被害者였던 사랑이 오래도록 記憶에 남는다. 加害者였을 때, 못되게 굴었던 사랑은 그저 한때의 追憶으로 사라져 좋았던 時間만 取捨選擇해 앙금으로 남는다. 사랑할 때만큼 利己的인 境遇도 없다.

    映畫 ‘幸福’은 허진호 監督의 焦點이 少年의 사랑에서 男子의 戀愛로 옮겨왔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注目해야 할 것은 純眞하고 熱情的인 少年이 成長하고 나면 때 묻고 破廉恥한 男子로 變해버린다는 事實이다. 男子의 成長에는 純眞과 破廉恥의 中間이 없다. 至毒한 女子를 만나 悲慘한 사랑을 한 後 少年은 男子로 成長해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 男子는 眞正한 사랑 或은 純粹와 毒하게 訣別한다.

    少年은 傷處가 아물고 나면 露骨的이고 破廉恥하게 그 傷處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復讐는 사랑했던 女子에 對한 미움이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것에 너무 많은 것을 내준 自己 自身에 對한 嫌惡에 가깝다. 그렇게 少年에서 男子가 된 그들은 사랑을 不信한다.

    憤怒하고 미치도록 갖고 싶은 그女

    황정민과 임수정이 主演을 맡은 ‘幸福’에서 황정민은 恥事하다 못해 殘忍한 男子로 登場한다. 술과 담배, 煤煙에 찌든 몸을 끌고 男子는 都市에서 시골로 옮겨온다. 그곳에서 들꽃처럼 純粹하게 自身에게 突進해오는 한 女子를 만난다. 女子는 自身의 손을 잡고 싶어 하고, 自身과 함께 잠들고 싶어 하고 自身과 키스한 後에 또 키스하고 싶다고 告白한다. 男子는 이 告白에 對해 묻는다.

    “正말 넌 내가 그렇게 좋니?”

    끄덕끄덕.

    “世上에 正말 그런 게 있긴 있구나.”

    男子의 對答, 世上에 正말 그런 게 있긴 있구나, 라는 말은 어쩌면 過去 少年이던 時節의 自身에 對한 回想일지 모른다. 그 男子도 먼 옛날엔 그랬던 적이 있다. 그女가 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다주고 싶고 그女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무슨 危險度 堪當할 수 있을 것 같았던 時節.

    파괴, 흔들림, 환상… 상처 받은 남자의 일그러진  사랑
    강유정

    1975年 서울 出生

    고려대 國語敎育科 卒業, 同 大學院 碩·博士(國文學)

    高麗大·극동대 講師

    동아일보 新春文藝 入選(映畫評論), 조선일보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경향신문 新春文藝 當選(文學評論)

    現 高麗大·韓國綜合藝術臺 講師


    하지만 이제 男子의 記憶 속에 그 瞬間들은 堆積物이 된 채 굳어져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男子는 사랑을 둔화시킨다. 男子가 된 少年에게, 사랑은 人生이라는 비즈니스의 一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男子’에게는 목숨을 건 執着도, 世代를 건넌 憤怒도, 그리고 흔들림에 對한 기다림도 모두 幻想일지 모른다. 日常 속 넥타이를 매고, 書類가방을 든 채 地下鐵을 타는 그 ‘男子’들 말이다.

    少年들은 ‘靈水’처럼 自身이 必要한 瞬間 獻身的 보살핌을 줄 어떤 女子를 必要로 할 것이다. 그리고 少年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언제나 憤怒하고 미치도록 所有하고 싶은 ‘그女’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男子’에게 少年의 欲望은 幻想과 다르지 않다. 現實에 조금씩 磨耗되면서 少年의 사랑은 稀釋된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戀愛가 남는다. 欲望과 現實의 이 二律背反的 均衡 속에 삶은, 그리고 戀愛는 持續된다. 幻想 속에 있기에 倒錯的 欲望으로 彩色된 그女이기에 더 아름다운 當身, 當身에 對한 欲望은 오늘도 혼잣말 속에 모습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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