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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職 外交官의 ‘韓日關係 新패러다임’ 提言|新東亞

現職 外交官의 ‘韓日關係 新패러다임’ 提言

日 國民性으론 反省 不可能, 對日 햇볕政策이 唯一한 代案

  • 정연택 外交通商部 外交力量評價團 팀長 ytjeong91@mofat.go.kr

    入力 2008-04-05 12: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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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實用主義’를 내건 새 政府가 出帆했다. 우리 外交의 아킬레스腱이라 할 수 있는 韓日關係 亦是 ‘實用의 時代’에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過去史 葛藤 問題를 털어내는 過程이 必須다. 現職 外交通商部 公務員이 韓日 過去事 葛藤의 根源을 獨特한 視角으로 分析하고 그 解法을 提案해왔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李明博 政府가 出帆했다. 李明博 大統領의 發言으로 보면 向後 5年은 産業化, 民主化를 貫通해온 ‘理念의 時代’를 뒤로하고 先進化로 代辯되는 ‘實用의 時代’가 到來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外交의 아킬레스腱이라 할 수 있는 韓日關係 亦是 例外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只今껏 韓日關係를 貫通해온 ‘理念의 時代’를 끝내고 ‘實用의 時代’를 맞으려면 過去史 葛藤 問題를 어떻게든 털어내는 過程이 必須不可缺하다.

    日本은 1953年 韓日會談 交涉 初期 구보타 間이치로(久保田貫一郞) 代表의 妄言(“日本의 統治는 韓國人에게 恩惠를 베푼 것”)을 筆頭로 끊임없이 過去事를 美化하고 否定하는 態度를 보였다. 이제는 過去事로 인한 葛藤이 年中行事가 돼 兩國의 眞正한 協力과 發展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는 決코 兩國關係 增進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消耗的인 外交戰에 發展的 에너지를 浪費할 뿐이다.

    韓日關係는 아무리 兩國 頂上 間에 ‘韓日間 파트너십 共同宣言’을 採擇하고, 表面的 友好를 維持한다 해도 過去史 葛藤을 國民이 首肯할 수 있도록 明快하게 解決하지 않고는 眞正한 協力을 期待할 수 없다. 또한 緊密한 韓日 協力 없이는 東北亞의 眞正한 平和도, 繁榮도, 安全保障도, 堅固한 共同體 形成도 이뤄질 수 없다.

    過去事 問題로 兩國 間 葛藤이 끊임없이 反復되는 데에는, 그러한 葛藤을 生産하는 ‘깊은 原因’이 반드시 存在할 것이다. 또한 그 原因은 多分히 精神的인 것과 關聯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筆者는 이런 點에 留意해 다양한 資料와 文獻을 檢討한 結果 韓日 過去事 葛藤과 聯關된 것으로 推定되는 日本人의 精神的 要素(國民性) 다섯 가지를 抽出했다. 日本人의 이 다섯 가지 國民性에 對해서는 이미 여러 國內外 學者가 硏究한 바 있으므로 그 硏究 成果에 基盤을 두고 日本 國民成果 韓日 過去事 葛藤의 連結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接近이 妥當한지에 對해 理論(異論)이 있겠지만, 過去事를 否定·美化하는 日本人의 性向을 特定해내는 데에는 相當한 效用性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日本人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性質, 卽 特性(trait)이 分明히 存在하고, 그것이 우리들과는 너무나 다른 過去史 認識 態度를 形成하고 있음이 明白하기 때문이다.



    神道와 天皇制

    日本人의 精神 原形에 다가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日本人의 精神生活과 密接한 關聯이 있는 宗敎意識을 살펴봐야 한다. 日本人의 宗敎觀엔 다른 民族의 宗敎觀과는 다른 特異한 面이 있다. 日本人 個個人은 별다른 宗敎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大部分의 日常生活이 매우 宗敎的이라는 點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新生兒에게 信徒(神道)寺院의 祝福을 받게 하고, 結婚擇日은 佛敎僧侶로부터 받고, 結婚式은 基督敎式으로 하며, 葬禮式과 祭祀는 佛敎式으로 한다. 또한 거의 모든 家庭에 부쓰團(佛壇)이나 加味다나(神柵)를 備置해 祖上과 英雄, 自然의 靈들을 모신다. 特히 祖上神이 집안을 保護한다고 생각하며, 各 家庭은 地域의 神社나 節(佛敎 宗派)에 所屬되어 祖上의 冤魂을 기리고 崇拜한다.

    이러한 宗敎的 寬容性은 原始時代 때부터 비롯됐다고 하는데, 그 中核은 信徒다. 日本 文化廳에서 發行한 ‘宗敎年鑑(2006)’에는 ‘信徒’가 “日本民族의 固有한 神 및 神靈에 關聯된 信念을 基盤으로 發生 展開되어온 宗敎를 總稱하는 말이다. 또한 神과 神靈에 關聯된 信念 및 傳統的인 宗敎的 實踐뿐 아니라 널리 生活 속에 傳承돼온 態度나 思考方式까지 包含한다”고 說明돼 있다.

    그런데 信徒의 가장 固有한 모습은 孤辰圖(古神道)에서 찾아볼 수 있다. 日本語의 ‘가미(神)’는 語源上 ‘가미(上)’와 通한다. 그것은 善惡 귀천 强弱 大小와는 相關없이, 超人間的이냐 아니냐를 不問하고 어떤 意味에서든 威力 있는 存在를 뜻한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日本人에게 天皇을 否定하는 것은 日本人 스스로를 否定하는 것이다.

    宇宙 森羅萬象 가운데 威力을 發現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미’가 될 수 있는데, ‘야오요로즈노가미(八百萬神)’라는 觀念이 그것이다. 卽, 天體 산 들 江 바다 바람 비 等을 비롯해 새 짐승 벌레 水木 풀 金屬 돌 等 自然現象이나 自然物에까지 ‘가미’라는 名稱이 붙여지는 것이다. 爲人이나 英雄 貴族 等이 ‘가미’로 여겨지기도 하며, 自然이나 人間의 여러 能力이 神格化한 境遇도 적지 않다.

    信徒는 大陸으로부터 傳來된 佛敎, 儒敎, 道敎의 影響을 받아 오랜 歲月 修正과 變容을 거듭해왔으나 本質的 內容은 오늘날까지 日本人들 마음속에 繼承되고 있다. 그러한 信徒의 現實的 表象으로서 天皇制(天皇制)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天皇制는 初期 日本의 國家 形態(氏族國家)에서 비롯됐다고 보이는데, 初期 日本 天皇의 權力은 매우 微弱했다. 그러나 律令國家時代를 거치면서 漸次 그 權威가 確立됐다. 卽 氏族의 象徵的 首長에서 儒敎的 理念의 根據를 지닌 律令적 天子(天子)의 모습으로 變化하게 된 것이다. 中世 및 近世 幕府時代에는 貴族階級이 成長하면서 天皇의 權威가 弱化됐으나, 19世紀 메이지 維新을 契機로 維新勢力 執權을 위한 名分 및 近代國家 形成을 위한 國民統合의 象徵으로 다시 權威를 回復했다.

    天孫降臨

    天皇의 意味를 보다 正確히 理解하려면 只今도 天皇 卽位式에서 行해지는 對象制(大嘗祭)를 살펴봐야 한다. 信徒 行事로 進行되는 卽位式은 ‘센소(踐祚, 3種 神奇 全數)’ ‘卽位의 예’ ‘對象制(卽位宗敎行事)’ 세 가지 節次로 進行된다. 이 中 特記할 만한 節次가 對象制다. ‘덴노레이(天皇靈)의 接着’이라 하는데, 日本의 기키新瓦(記紀神話, 天皇家에서 定한 日本神話) 가운데 天孫降臨(天孫降臨)을 再現하는 意識이다.

    이 意識은 새 天皇이 되는 者가 한밤中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遺棄덴(悠紀殿)이라는 日本 全體를 代表하는 ‘덴(殿)’에 혼자 들어가 아마테라스(太陽神)와 함께 그해에 난 新코쿠(新穀)를 먹는 것으로 始作된다.

    그 後 天皇은 니니기(日本의 個國 時調)가 降臨할 때 뒤집어썼다는 馬島코오후水魔(眞床追衾)를 덮고 잠을 잔다. 卽, 天孫降臨을 再現하는 것인데, 이때 前任 天皇에 接着하고 있던 덴노레이가 新任 天皇에게로 옮겨 接着된다고 한다. 一說에 依하면 馬島코오후水魔라는 이불 속에서 新任 天皇이 女神인 아마테라스와 性的인 關係를 맺는 意識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參加할 수 없는 비의(秘儀)다.

    이처럼 對象制는 先進國 日本의 國民 處地에서도 믿기 힘든 精靈崇拜(애니미즘) 意識이다. 하지만 그런 節次를 통해 天皇은 資格을 얻고, 日本人이 要求하는 超自然的인 存在가 되며, 또 禮拜의 對象으로 發展해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나아가는 것이다.

    天皇은 이른바 平和憲法에 依해 日本과 日本國民 統合의 象徵이라고 規定되어 있으나, 實은 以前부터 그러한 象徵이었다. ‘萬歲一計’의 天皇이 日本의 象徵이라고 宣言하는 것은 日本이라는 國家와 民族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存在했다는 意味다. 日本이라는 民族意識, 國家意識이 成長한 것은 近代에 들어서면서부터이지만 天皇은 이미 이러한 觀念을 통해 日本文化와 歷史의 象徵이 될 뿐 아니라 스스로 그 存在 根據를 獲得한다.

    메이지 維新 以後 西洋의 發達된 技術文明과 强力한 實力의 原因이 基督敎에 있다고 생각한 一部 國學者들은 天皇과 國體(國體)에서 基督敎에 對한 代案을 發見했다. 따라서 天皇은 純粹하게 日本的인 것을 象徵하게 됐으며, 特히 天皇이 中心이 되는 信徒는 純粹한 日本을 象徵하게 됐다.

    歷史上 日本을 크게 변화시킨 두 事件이 있다. 하나는 에도時代 300年間의 鎖國政策을 무너뜨린 페리 提督의 ‘黑線來降(黑船來港)’이며, 또 하나는 第2次 世界大戰 敗北다. 두 番의 革命的 契機는 以前 時代와는 180度 다른 日本을 만들었다. 이런 劇的인 轉換을 可能케 한 精神的 힘이 바로 天皇制에 있다고 日本人들은 느끼는 것이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地震, 쓰나미 等 日本의 自然災害는 日本人에게 人間的 反省과 歷史的 思考를 할 수 없는 價値觀을 심었다.

    卽, 天皇은 國家를 超越한 歷史的 象徵이며, 日本과 日本文化 그 自體로서 日本人의 마음을 깊숙이 支配하며, 日本의 歷史와 民族의 피가 되어 綿綿히 흐르는 原理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日本人의 自負心(正體性)의 頂點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天皇이 支配한 20世紀 前半의 歷史를 否定하고 反省하는 것은 日本人들에게 그리 簡單치 않은 일이다. 天皇制가 日本人 마음(歸屬意識)의 本鄕이며, 日本人 自身의 正體性까지 規定하는 狀況에서 이를 否定하는 것은 窮極的으로 日本人 스스로를 否定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日本的 集團意識

    日本人의 家庭, 社會的 集團, 또는 趣味나 親舊 等의 동아리모임에서 ‘우리(我ク)’라는 感情의 發現이 폭넓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個人의 役割意識이나 開城, 客觀的이고 理性的인 생각보다는 一體感, 歸屬感, 동아리情緖 같은 것이 優位를 占한다. 어떻게 하든 ‘와(和)’를 重要하게 여기고 全員一致를 要求하는 傾向을 보인다.

    또한 日本人은 몇 名만 모여도 저절로 一體感을 가진 集團이 되고, 自己의 생각을 表現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對해 同調的 姿勢를 取하는 境遇가 많다. 이런 삶의 方式이 日本人에게는 正常的인 것으로 여겨지며, 또 그들의 마음을 便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다른 民族의 境遇 특별한 狀況에 놓이거나 意圖的으로 造作할 때에 集團意識이 發現하는 데 反해 日本人에게서는 平常時에도 集團意識이 潛在된 情緖로서 持續된다. 이런 獨特하고도 뿌리 깊은 ‘日本的 集團意識’이 形成된 起源을 찾아보면 다양한 歷史的, 環境的 要因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日本人의 宗敎觀과 密接하게 聯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日本人들은 말(言)에도 ‘靈魂’이 있다고 믿었다. 이를 言令信仰(言靈信仰)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말을 하면 말한 사람의 靈魂이 말에 옮겨 붙어 말의 靈魂이 되고 그 말해진 事物에 到達해 그 事物의 靈魂이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말(言, 고토)과 事物(事, 고토)의 一體性이 確保된다. 結局 말을 한 사람과 불려진(이름 붙여진) 事物이 똑같은 靈魂을 共有하는 ‘한 무리(동아리)’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萬物이 個個의 事物로 있으면서 同時에 靈魂, 卽 生命을 같이하는 ‘같은 무리(仲間)’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言卽死(言卽事)의 一體感이 사람들과의 關係에서도 한 동아리, ‘우리 感情’을 强化시켜왔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日本的 集團意識이 된 듯하다.

    言令信仰은 信徒와 結合돼 集團意識을 더욱 발달시켰다. 가장 흔한 形態가 그 地域의 神社를 中心으로 形成된 우지코(氏子)라는 信仰集團이다. 우지코는 特定 紳士가 있는 地域에 사는 사람들, 그 紳士를 받들고 있는 信者의 무리를 가리킨다. 卽 日本人이라면 自動的으로 自己가 살고 있는 地域 紳士의 우지코가 된다. 그中 가장 큰 것이 天皇을 中心으로 하는 國家信徒다.

    아마에와 集團情緖

    그런데 日本人 組織體에서는 그 組織이 무슨 目的으로 만들어졌든 相關없이 構成員이 그 組織體에 融和되는 것이 先決課題다. 融和에 依해 ‘우리 感情’이 形成돼 마침내 ‘그곳 사람(そこの人)’으로 인정받고 活動이 可能하게 된다. 卽 먼저 ‘憂恥(內)’ 사람이 되어야 한다.

    一般的으로 集團의 基礎單位인 家族은 家族成員, 卽 父母와 子息, 男便과 아내 等이 生物學的 뿌리를 가진 愛情으로 連結돼 있다. 日本 家庭에서도 그런 愛情關係의 骨格은 같지만 여기에 日本的 集團意識이 덧붙여짐으로써 獨特한 情緖가 생겨난다.

    家族 構成員 사이에는 愛情의 끈이 剛하기에 固執을 부리거나 싸움을 해도 그 끈이 끊어지는 境遇는 거의 없다는 ‘安心感’이 있다. 이 安心感과 集團意識의 非理性的 傾向이 連結되면 自己主張을 無限히 行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家族 내 日本的 集團意識이 肥大해져 各 成員의 自己 放縱을 容認하거나 容認되는 狀態를 日本人들은 ‘아마에(甘え, 응석)’라고 한다. 日本人이 만드는 ‘憂恥 集團’의 雰圍氣도 家族의 境遇보다는 制限되지만, 그 基調는 아마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卽, 아마에는 日本的 集團意識의 가장 一般的인, 그리고 代表的인 情緖(表出樣態)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原爆 被害者를 追慕하는 히로시마 平和記念公園.

    아마에의 ‘憂恥 集團意識’이 그 集團 內部에 머물러 있을 때 ‘소토(外)’는 無關心한 世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掃討가 어떤 形態로든 憂恥에 作用하거나, 소토에 作用하지 않으면 안 되는 事情이 憂恥에 생겨 集團意識이 바깥으로 向할 때에는 憂恥와 掃討 사이에 緊張關係가 생기게 된다.

    掃討가 憂恥에 對해 融和的인 姿勢를 보이면 問題가 없다. 하지만 同化를 拒否하거나 敵對的인 境遇 아마에는 排他的 感情, 優越感, 輕蔑感, 敵의, 성냄 等의 集團 雰圍氣로 變해 소토에 對해 攻擊的이 된다. 憂恥에 高揚된 集團意識은 構成員의 客觀的 判斷力을 抑制하기 때문에 掃討를 公正하게 受容할 수 없게 되고, 이를 排除 또는 破壞하려 함으로써 憂恥의 集團意識은 더욱 强化된다.

    日本의 敗北로 戰爭이 終結된 以後 日本人은 다시 憂恥 集團社會 속에서 하루바삐 復興하기 위해 努力했다. 그들에게 戰爭에서 일어난 일들은 아득한, 無關心한 掃討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强烈한 攻擊性으로 치달았던 集團意識이 平常時로 돌아와서는 閉鎖的인 憂恥 集團意識으로 移行했다.

    大槪 戰爭으로 인해 膨脹했던 集團意識이 사라지면 戰爭에서 일어났던 自身의 行爲가 集團意識人 ‘우리 感情’的인 것으로 稀釋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個人의 일로 刻印된다. 여기서 甚한 良心의 呵責이 생긴다. 그러나 日本人은 集團意識에 對한 親和性이 剛하기에 平常生活로 돌아오더라도 各各의 家庭이나 職場에서 憂恥 集團에 沒入해 ‘우리 感情’을 주된 情緖로 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過去의 일은 個人의 일로 刻印되지 않고 漠然하게 되어버린다. 憂恥 集團에 숨어 個人의 責任을 느끼지 못하는 精神構造가 形成되는 것이다.

    日本人들은 흔히 過去를 ‘물에 흘려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日本人 特有의 ‘쉽게 잊어버림’의 原因은 日本人들이 日本的 集團意識에 늘常 浸潤되어 있다는 事實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自身들이 아시아에서 恣行한 壓迫, 收奪, 殘虐行爲에 對해 反省하는 기운이 自發的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旅行 中에 當한 猖披는 버리고 오면 된다’ 같은 俗談에서도 이와 같은 日本的 集團意識의 無責任한 메커니즘이 觀察된다.

    自然順應적 現實主義

    日本의 自然은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큰 災害를 가져다준다. 地震, 颱風, 번개, 海溢(쓰나미), 冷害, 旱魃 等 自然災害는 日本人에게 늘 두려운 存在였다. 그것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影響이 ‘自然에 順從하기만 하면 萬事가 잘된다’는 價値觀을 낳았다. 이런 생각이 集團을 가장 優先順位에 두는 日本人의 삶의 原理인 것이다. 卽 ‘自然의 秩序에 默默히 順從하다가 죽어가는 것이 人間의 삶’이라는 宗敎意識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는 具體的으로 自身의 所屬 集團에 對한 絶對的 歸屬位式으로 나타났으며, 信徒는 그 中心思想이다. 이것이 自己中心的 世界觀을 지닌 民族을 形成케 했다.

    이런 日本이기에 人爲的인 災難도 自然災害처럼 보는 思考方式이 자라났다. 重要한 것은 그 쇼크로부터 하루바삐 벗어나서 破壞되고 잃어버린 것을 迅速하게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自然災害와 같다고 생각해버리기에 人間的 反省이 없고, 結果的으로 歷史的 側面에서 思考할 수 없게 된다.

    흔히 日本人은 現實的인 問題에 對한 對應 姿勢가 世界에서 第一 훌륭하다고 한다. 第2次 世界大戰 後의 廢墟와 大混亂을 눈 깜짝할 사이에 克服해 世界 2位의 經濟大國이 된 事實이 이를 證明한다. 그런데 ‘自然에 順從하는 삶’이라는 價値觀은 그대로 日本人의 歷史意識이 되어 나타났고, 他民族에는 理解할 수 없는 行動規範이 되었다. 元來 죽음에 對한 두려움에서 出發한 神과 祖上에 對한 崇拜는 徹底하게 現實主義로 變해 日本人의 意識을 支配했다.

    日本人의 現實認識은 個人의 내면적 問題보다 現實社會를 向하고 있다. 日本人의 가장 큰 關心은 現在의 安定된 生活을 어떻게 保護할까, 當面한 問題를 어떻게 하면 이른 時日 內에 解決할 수 있을까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態度나 立場은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無責任한 態度 變化를 보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제의 帝國主義者가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民主主義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現實의 變化에 迅速히 適應해가는 日本人의 方法이다.

    ‘긴 것에는 감겨라’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征韓論을 主張하는 日本 政客들. 卓子를 치며 熱辯을 吐하는 이가 征韓論의 主唱者 사이고 다카모리다.

    日本人은 自然現象이든 人爲的인 것이든 늘 過去를 잊는 것으로 現在의 狀況에 對處해왔다. 이것이 오늘날 日本의 繁榮을 만들었지만, 同時에 日本의 가장 큰 弱點으로 指摘된다.

    日本이 決코 잊어서는 안 될 過去 中에 20世紀 日本帝國主義時代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日本人들은 天皇을 絶對神으로 信奉하고, 國家를 위해 生命을 버릴 수 있다는 意識을 심는 敎育을 하며, 아시아人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苦痛을 안겨준 그 時代를 까맣게 忘却하고 있다. 只今의 敎科書에 侵略時代의 記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大部分의 日本人은 그런 事實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敎育받은 일도 없거니와 過去의 일엔 關心이 없기 때문이다.

    日本은 世界 唯一의 原子爆彈 被害國이다. 勿論 自身들이 招來한 結果였지만 被害는 대단히 컸고, 軍人이 아닌 선량한 國民을 殺傷한 것은 國際法上으로도 問題가 있다. 美國은 原子爆彈 投下 卽時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들어와 具體的인 調査를 벌였다. 卽 日本을 첫 原爆實驗場으로 活用한 것이다.

    이에 對해 美國에 激烈히 抗議할 만도 한데 日本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잊어버리고 있는 狀況이다. 反核示威는 꾸준히 하고 있으나, 美國에 對한 直接的인 抗議나 賠償要求는 하지 않았다. 自身들이 行한 일뿐 아니라 當한 일도 나쁜 것은 잊어버리는 日本人의 態度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個人的인 面에서 봐도 過去의 自身을 돌아본 뒤 現在의 自身을 把握하지 않기 때문에 反省할 게 없고, 그저 모든 것을 自然現象的인 偶然의 問題로 돌려버린다. 이것이 大部分 日本人의 歷史意識이라 할 수 있다.

    日本人이 자주 쓰는 俗談 中에 ‘긴 것에는 감겨라(長ぃものには卷かれろ)!’가 있다. 權力이나 勢力 있는 것에는 反抗하지 말고 참고 따르는 것이 得이 된다는 뜻이다. 日本人 特有의 婉曲語法을 살려 美化했지만 結局은 ‘强者에겐 屈服하라’는 至極히 現實主義的인 메시지다. 이런 日本人들이 弱者에게 配慮심을 發揮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萬若 韓國이 世界 最强國이거나 적어도 日本과 對等한 國力을 가진 强大國이었다면 日本은 일찌감치 過去事를 眞摯하게 謝過했을 것이다. 只今처럼 過去事를 否定하거나 美化하는 等의 妄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7年 3月 아베 總理의 慰安婦 發言騷動 때도 아베 總理는 被害 當事國인 韓國이나 中國이 아니라 美國의 부시 大統領에게 自身의 眞意가 歪曲됐다고 解明한 바 있다.

    서로에 對한 優越感

    朝鮮 太祖(李成桂)는 卽位하자마자 日本의 무로마치 幕府(室町幕府)에 國交 樹立을 要請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이에 應해 1404年 兩國 사이에 國交가 맺어졌다. 무로마치 幕府의 쇼군은 中國으로부터 日本國王 稱號를 얻었기 때문에 朝鮮 王과 對等한 立場에서 外交를 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73年 무로마치 幕府를 打倒하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0年 日本 全國을 統一했다. 히데요시는 다음 目標를 ‘入黨(入唐, 明나라 征伐)’에 두고, 먼저 쓰시마로 하여금 朝鮮國王이 自身을 拜謁할 것과 服屬할 것을 交涉하도록 命令했다. 그는 朝鮮國王을 쓰시마처럼 日本 國內의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 地方政權)로 보았던 것 같다.

    1589年 朝鮮에 派遣된 쓰시마 使節은 히데요시의 命令을 그대로 傳達하지 못하고, 새 政權에 對한 通信社 派遣을 要請하는 交涉에 나섰다. 朝鮮 政府도 倭寇 殘黨의 侵犯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通信社 派遣을 決定했다.

    그러나 1590年의 通信社 一行에 對한 히데요시의 答서는 國家 間의 儀禮를 갖추지 않은 不遜한 것이었다. 于先 自身은 ‘太陽의 아들’임을 强調하고, “내가 明나라에 들어가는 날, 士卒을 이끌고 軍營에 臨해 더욱 더 人猛(隣盟)을 다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며 明나라를 征伐하는 데 길案內를 해줄 것을 분명하게 要請했다. 朝鮮이 이를 拒否하자 히데요시는 1592年 4月 15萬名의 軍隊를 動員해 朝鮮 侵略을 開始했다.

    日本의 朝鮮侵略 後 朝鮮과 日本은 한동안 國交斷絶 狀態가 持續됐다. 히데요시 事後 實權을 掌握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中斷된 兆·日 關係를 回復하기 위해 쓰시마 領主인 邵氏(宗氏)에게 조일강화를 交涉하게 했다. 1606年 朝鮮은 에도 幕府(江戶幕府)의 强化 要求에 對해 두 가지 條件을 提示했다. 하나는 朝鮮을 侵略했을 때 朝鮮國王의 墓를 毁損한 犯人을 붙잡아 朝鮮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朝鮮國王에게 國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두 番째 것은 日本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要求였다.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日本의 過去事 反省을 期待하는 것은 不可能하다. 認識의 大轉換이 必要한 時點이다.

    그러나 國交 回復이 遲延될 것을 두려워한 쓰시마 영주는 이에야스의 國書를 僞造하고, 陵墓를 파헤친 盜賊으로 쓰시마의 罪人 3名을 捕縛해 보냈다. 이에 朝鮮은 日本이 두 가지 要求에 應했다고 評價하고, 1607年에 ‘回答 兼 刷還社(回答兼刷還使)’로서 正使 여우길, 府使 鯨銛, 從事官 정호관을 三司로 하는 467名의 大使節團을 派遣해 國交를 回復했다.

    朝鮮은 1636年에 처음 通信使를 日本에 派遣한 以後 1811年까지 아홉 次例에 걸쳐 通信使를 派遣했다. 通信社는 ‘神의(信義)를 주고받기 위한 謝絶’이라는 뜻으로 兩國 關係가 大登함을 나타내는 外交形態다. 그러나 實狀은 自身을 中華文化의 繼承者라고 생각하는 朝鮮과, 日本을 中心으로 하는 華夷秩序 속에서 朝鮮을 바라본 幕府가 서로에 對한 優越感을 背景으로 成立된 것이었다.

    역지聘禮와 征韓論

    18世紀 들어 조일 交隣의 精神을 흐리게 하는 두 가지 傾向이 나타났다. 하나는 역지聘禮(易地聘禮) 問題였으며, 다른 하나는 神國(神國)思想의 登場이었다. 역지聘禮는 朝鮮通信使를 迎接하는 場所를 首都인 에도(江戶)에서 쓰시마로 바꾸자는 것으로, 여기에는 日本 自體의 事情(飢餓, 凶作 等으로 인한 經費 負擔)과 함께 朝鮮에 對한 하대관이 作用했다.

    역지聘禮에 直接 影響을 준 冊은 日本의 朱子學者 나카이 지쿠盞(中井竹山)의 ‘草茅危言(草茅危言, 1789年)’ 10卷으로, 이 冊에서는 “진구(神功)의 遠征 以來 韓國이 우리에게 服屬되어 朝貢을 바친 것은 歷史的으로 오래된 일인데, 只今의 事情은 그와 다르다”라는 認識을 大前提로 “元來 邊方의 보잘것없는 使節에게 莫大한 費用을 들여서 應接할 必要는 없으나, 韓人의 來聘은 隣交(隣交)에 없어서는 안 될 일”이므로 쓰시마에서 應接해야 한다는 提案을 했다.

    또한 18世紀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그의 門下를 自請한 히라打 亞쓰打네(平田篤胤)의 國學(國學) 思想이 風靡한 時期였다. 노리나가는 ‘兼狂人(鉗狂人)’에서 “元來 皇國(皇國)은 四海萬國을 비춰주는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가 태어나신 本國으로서, 그 皇孫의 生命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天地와 함께 永遠히 다스리는 나라이며 萬國의 始原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런 神國思想은 臺(對)朝鮮 外交를 에도時代의 ‘일본국 大君’과 ‘朝鮮 國王’의 對等한 關係를 日本의 ‘皇帝’와 造船 ‘國王’의 上下關係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意圖, 卽 에도時代의 交隣關係에 異議를 提起하고 征韓論(征韓論)이 擡頭하는 思想的 背景이다.

    19世紀 中葉 러시아, 英國, 美國 等이 通商을 要求하자 幕府는 1854年에 美日和親條約을, 1858年에 美日修好通商條約을 맺었으며, 네덜란드 러시아 英國 프랑스와도 같은 條約을 맺었다. 이 條約들은 領事裁判權을 認定했으며, 關稅 自主權을 갖지 못한 不平等조약이었다.

    그 後 1863年 쓰시마番의 無事 오시마 圖謀勞組(大島友之允)가 龜尾列强의 侵略에 앞서서 日本이 朝鮮을 侵略해야 한다는 建議書를 幕府에 提出하자, 幕不渡 이를 받아들여 朝鮮의 國內事情을 探索할 計劃을 세웠다. 그리하여 메이지 維新 直前 幕府의 對朝鮮 外交는 龜尾勢力의 壓倒的인 影響力에 依해 크게 變質될 兆朕을 보였다. 當時 日本은 메이지 維新으로 天皇 中心의 國家體制 建立의 기운이 旺盛해 朝鮮은 天皇에 當然히 復屬되어야 할 存在로서, 그때까지 쇼군과 朝鮮國王 間의 對等한 外交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以後 메이지 新政府는 1875年 江華島事件을 일으켜 이듬해 2月 朝日修好條規(江華島條約)를 締結함으로써, 마침내 定한(征韓)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러한 朝鮮侵略政策을 具體化하는 데 重要한 政治的 理念의 틀을 提供한 人物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다. 그는 ‘脫亞論(脫亞論)’(1885.3.16)과 ‘朝鮮民衆을 위하여 나라의 滅亡을 祝賀함’(1885.8.13)이라는 社說을 통해 朝鮮에 對한 蔑視를 露骨的으로 드러내고 이를 日本 國民에게 刻印시켜 나갔다.

    淸日戰爭을 文明進步의 是非를 묻는 싸움으로 본 후쿠자와의 脫亞論 主張과 朝鮮 滅亡論은 그 後 日本人의 大國意識에 큰 影響을 끼쳤다. 日本人의 韓國人에 對한 民族差別意識은 日本의 韓國侵略에 拍車를 加하게 했고, 以後 日本人의 韓國館을 形成해왔다. 脫亞意識과 朝鮮 蔑視官은 政策 次元에서만이 아니라 日本 國民 意識 속으로 깊이 浸透했으며, 36年間의 植民地時代를 거쳐 오늘에 이렀다.

    1941年 12月8日 日本의 眞珠灣 奇襲攻擊으로 太平洋戰爭은 始作됐다. 美國은 1944年 7月7日 日本軍의 太平洋 支配 根據地이던 사이判을 陷落했고, 1944年 가을부터는 美空軍 B-29 長距離 爆擊機가 사이判을 發進基地로 삼아 도쿄를 비롯한 日本 主要 都市를 晝夜로 無差別 爆擊했다. 日本 全國이 불에 탄 들판처럼 보였다.

    被害者意識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日本에서 불고 있는 嫌韓類를 보여주는 漫畫들. 韓國에 對한 歪曲된 視線을 바로잡기 위해 日本人에 對한 過去史 敎育이 必要하다.

    第2次 世界大戰 中 美·英·蘇의 첫 會同은 1943年 11月 테헤란 會談이며, 두 番째가 1945年 2月 얄타 會談이었다. 이 會談에서는 極東 및 東南아시아에 關한 密約이 締結됐다. 蘇聯은 獨逸 降伏 後 3個月 以內에 對日(對日)參戰을 約束하고, 그 代價로 러일戰爭 以前에 러시아 帝國이 確保하고 있던 滿洲에서의 權利와 남사할린, 지시마(千島) 等을 되돌려받는 데 對해 美·英의 承認을 받아냈다. 이것은 1941年 締結된 일·蘇 中立條約과 矛盾된 祕密協定이었다. 蘇聯은 1945年 4月7日, 日·蘇 中立條約을 破棄했다.

    1945年 8月8日 對日宣戰布告를 하며 滿洲로 進擊한 蘇聯軍은 攻擊 첫날에 蘇聯 國境, 滿洲 國境에 굳건히 構築해놓은 日本軍의 要塞를 粉碎했다. 難攻不落과 無敵을 자랑하던 日本關東軍 國境警備隊가 壞滅됐다. 蘇聯軍은 開戰 後 數日 만에 400km 以上 進擊하며 滿洲의 中心部까지 制壓, 日本關東軍에 致命的 打擊을 안겨줬다.

    前後에 밝혀진 當時 日本 記錄에 依하면, 日本 降伏의 直接的이고 決定的인 原因은 原爆 投下가 아닌 蘇聯의 對日參戰에 있었다. 이런 點에서 日本의 背信感은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日本의 被害는 蘇聯의 對日參戰이라는 背信뿐 아니라 滿洲에서 벌어진 蘇聯軍의 殘惡한 殺傷과 뒤 이은 日本人의 시베리아 强制連行으로 더욱 더 擴大됐다. 이는 從前 後에도 日本人 가슴에 아픈 記憶으로 남아 被害者意識으로 刻印되었다.

    當時 滿洲地域에는 關東軍 78萬名, 一般人 72萬名 等 150萬의 日本人이 居住하고 있었다. 그中 소련군의 滿洲侵掠으로 숨진 사람은 34萬3000餘 名이나 되었는데, 停戰(8月19日) 以後 死亡者가 27萬8000餘 名(시베리아 連行 後 死亡者 5萬5000餘 名 包含)에 達했다.

    日·蘇 停戰協定締結 後 滿洲에 駐屯하던 日本軍 60萬名에 對한 시베리아 强制連行이 始作됐다. 停戰 4日 後인 8月23日 스탈린이 “日本軍 捕虜 最低 50萬名 以上을 蘇聯 國內로 移送, 시베리아 等地에서 强制勞動에 從事시킬 것”을 命令했기 때문이다. 이는 捕虜의 取扱에 關한 國際法을 完全히 無視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强制連行者들이 日本으로 歸還한 것은 1949~1950年으로 이들은 4年餘 동안 말할 수 없는 苦痛을 겪었다. 오늘도 日本人들은 當時 蘇聯의 殘忍無道함을 記憶하고 있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난 後 聯合國은 戰爭을 일으킨 日本에 對하여 軍事法廷을 열어 戰爭 責任을 斷罪했다. 이 判決에서 絞首刑 7名, 終身禁錮刑 16名, 20年 禁錮刑 1名, 7年 禁錮刑 1名이 各各 言渡됨으로써 被告 28名 中 死亡者(2名)와 精神病者(1名)를 除外한 25名 全員이 有罪判決을 받았다.

    日本人(特히 右派)들은 이 判決에 對해 “一方的 報復裁判”이며, 國際法을 無視한 裁判이라고 主張한다. 그들은 典範으로 規定된 이들이 平和條約이 發效되기도 前에 聯合國에 依해 목숨을 잃은 것은 不當한 일이고, ‘戰犯’이라는 規定 自體가 戰爭이 끝난 後 裁判 때 만들어진 것이어서 ‘罪刑法定主義’에 違背되기 때문에 裁判으로 成立될 수 없다고 말한다.

    認識의 大轉換

    特히 ‘典範’을 規定한 ‘平和에 對한 罪’란 自衛戰爭이 아닌 戰爭을 開始하는 일을 말하는데, 그러한 名目으로 國家의 指導者를 處罰하는 일은 ‘그때까지의 國際法 歷史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印度의 팔 判事가 國際法上의 根據를 充足시키지 못하므로 被告 全員의 無罪를 主張했는데도 聯合國 總司令部(GHQ)는 팔 判事의 意見 公表를 禁하고, 裁判에 對한 批判을 一切 許容하지 않았다고 主張했다. 오늘날 日本人들이 갖고 있는 被害意識의 一端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에서 살펴본 日本 國民性을 勘案할 때 果然 日本은 韓日 過去事 葛藤 問題에 있어 우리가 期待하는 水準의 眞正한 謝過와 反省을 할 수 있을까. 筆者는 不可能하다고 判斷한다. 그것은 지난 60餘 年間 日本 政治 指導者와 日本 政府가 取한 態度와 問題 發言(所謂 妄言)을 綜合해보면 今方 알 수 있다.

    그들의 생각과 立場은 一時的이거나 可變的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精神 밑바탕에 자리 잡은 固有한 日本的 要因들에 依해 形成된 것으로 너무나 確固해서 우리의 期待와는 달리 變化될 可能性이 全혀 없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國民과 政府가 한목소리로 日本을 非難하고 謝過와 反省 要求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은 無意味할 수도 있다. 日本에 對한 對策을 새로이 冷徹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被害者라는 道德的 正當性(名分論)을 根據로 日本에 對해 메아리 없는 外侵을 繼續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精神的 構造(現實論)는 그것을 受容할 수 없는 狀態다.

    새로운 對日政策은 對日外交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水準의 劃期的인 것이라야 한다. 이제 日本이 自發的으로 變하기는 事實上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以上 漠然한 대일認識의 大轉換이 必要하다. 卽, 우리 國民의 눈과 마음에 덧씌워진 當爲論의 名分과 被害意識, 劣等感, 憎惡心을 가슴에 묻고 宿命的으로 永遠히 사이좋게 지내야 할, 이 世界에서 가장 獨特하고도 不可思議한 이웃을 끌어안을 수 있는 認識의 大轉換이 必要하다. 그러한 發想의 大轉換은 過去 우리 政府가 施行한 對北 햇볕政策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06年 8月15日 盧武鉉 大統領은 光復節 慶祝辭에서 ‘北韓이 저지른 戰爭과 拉致 等 지난날을 容恕하자’는 趣旨의 發言을 통해 ‘條件 없는 容恕’를 하자고 主張한 바 있다. 2007年 6·25戰爭 57周年 參戰勇士 慰勞宴에서도 盧 大統領은 “끊임없이 相對를 警戒하고 敵對的 感情을 부추겨서는 信賴를 쌓을 수 없고, 和解와 協力의 對話도 이뤄질 수 없다. 相對를 認定하고 包容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속에 남아 있는 憎惡의 感情도 어떻게든 지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6·25街 남긴 뼈아픈 敎訓과 參戰勇士들의 犧牲을 잊지 않으면서도 過去의 怨恨을 克服하기 위해 努力하고 있다”고 밝혔다.

    筆者는 ‘같은 民族’이라는 要素만 除外하면 日本과 北韓의 境遇가 매우 類似하므로 結局 우리가 두 까다로운 이웃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宿命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日本에 對해서도 北韓에 對해서처럼 果敢하게 ‘容恕’할 必要가 있다고 본다.

    이와 關聯해 世界的인 指揮者 벤더民 젠더의 逸話가 있다. 그는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나던 날 유대人 할아버지로부터 “只今부터 우리 家族은 獨逸人을 憎惡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런 글도 쓰지 말며, 그런 마음조차 갖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疑訝해 하는 家族에게 할아버지는 “獨逸이 우리 未來까지 不幸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憎惡는 憎惡의 對象보다 憎惡하는 主體에게 더 해롭고, 憎惡心에 사로잡힌 사람의 精神健康만 나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日本을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의 앞날에 무슨 利得이 있겠는가. 特히 다음 世代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日本에 對한 反感과 憎惡心 속에서 成長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日本에 對해서는 精神的 障礙者가 되기 쉽고 均衡 잡힌 智慧를 갖추기 어렵다. 이는 벤더民 젠더의 할아버지가 한 말처럼 日本이 우리의 未來까지 不幸하게 하는 큰 損害를 가져오는 端緖가 될 수도 있다.

    對日 햇볕政策의 必要性

    筆者는 이제 日本에 對해 마음으로부터의 ‘容恕’가 必要하다고 본다. 그것이 只今껏 踏步狀態에 있는 韓日關係를 飛躍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起爆劑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日本에 對한 ‘容恕’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點에서 推進할 必要가 있으며, 結局은 우리 國益에 많은 利益을 가져다줄 것으로 確信한다.

    本質的으로 日本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過去에 對한 眞正한 反省이 不可能한 民族이다. 그런 日本에 對해서 細細한 名分과 論理를 따지기보다는 大局的 見地에서 被害者인 우리가 加害者인 日本에 ‘寬容’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反芻의 機會를 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關聯해 2007年 5月10日 서울大에서 ‘日本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의 和解’라는 主題로 講演한 日本 ‘아사히신문’ 와카미야 요시浮靡(若宮啓文) 論說主幹은 筆者의 생각과 같이 우리 政府가 日本에 對해 햇볕政策을 펼쳐줄 것을 主張한 바 있다. 와카미야 論說主幹은 ‘日本의 良心’으로 알려진 代表的인 知韓派 人物로, 지난해 保守誌 ‘요미우리신문’을 說得해 야스쿠니神社 參拜 反對宣言을 이끌어내는 等 韓日 問題에서 進步的인 목소리를 내온 言論人이다.

    그런 그가 서울대 講演에서 결론적으로 注文한 것이 우리 政府(國民)의 對日 햇볕政策이다. 勿論 그가 이 政策을 推進해야 하는 本質的 論據를 提示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要請은 日本人으로서 우리가 願하는 日本人의 眞正한 謝過와 反省이 거의 不可能함을 逆說的으로 證明하는 것이라고 본다.

    只今처럼 우리가 被害者라는 立場에서 一方的으로 日本을 非難하고 無視하는 것은 아무런 效果가 없고 오히려 그들의 反撥과 억지만 부추겨 逆效果를 가져왔다. 卽, 個人의 境遇와 마찬가지로 國家關係에서도 被害者인 우리가 度量을 가지고 容恕하고 包容하려고 할 때 오히려 日本의 態度 變化를 誘導할 수도 있을 것이다. 容恕한 뒤 愛情을 가지고 日本을 바로 보면, 그들의 長點도 發見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長點을 稱讚해주면 日本의 自發的 態度 變化를 充分히 期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이 現在의 膠着狀態를 打開하는 唯一한 突破口라고 생각한다.

    유럽은 지난 50餘 年間 EU統合과 CSCE/OSCE(유럽 安保와 協力에 關한 會議) 活動을 통해 地域統合과 域內 紛爭防止를 同時에 達成하고 있다. 또한 世界는 빠르게 글로벌化하는 同時에 地域統合의 方向으로 나아가며 다른 國家들끼리의 自由貿易協定(FTA) 等을 통한 經濟統合을 推進하고 있다. 東北아시아에서도 中國과 日本이 서로 競爭하는 가운데 相互補完的인 關係(‘戰略的 互惠關係’)를 발전시키기로 合意했다. 2007年 4月 원자바오(溫家寶) 總理는 日本 國會 演說을 통해 過去事 問題에 對한 宥和的 立場을 闡明함과 同時에 始終一貫 ‘過去보다 現在와 未來가 重要하다’는 點을 力說했다.

    道德的 優位에 依한 容恕

    이처럼 冷嚴한 國際政治의 力學關係 속에서 우리는 只今도 ‘過去’라는 사슬에 매여 더 以上의 兩國關係 發展動力을 얻지 못하고 있는 實情이다. 그러나 果然 日本이 우리에게 그렇게 價値 없고 無意味한 存在인가에 對해 正直한 省察이 必要하다. 特히 모든 面에서 中國과 日本 사이에 끼여 國家 發展의 새로운 推進動力을 시급히 찾아야 하는 狀況에서 앞으로 外交戰略을 어떻게 構想하고 實踐해나갈 것인지는 무엇보다 重要하다.

    그 窮極的인 行態는 東北亞 共同體를 通한 獨創的인 世界構想과 世界戰略이 돼야 할 것이다. 그 첫째 理由는 東北亞에서 霸權主義 登場은 韓半島에서의 葛藤과 對立의 激化로, 그리고 우리 民族의 不幸으로 나타났다는 點에서 반드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世界貿易體制 속에서 우리의 交涉力을 높이고, 커져가는 國際金融의 不安定性에 對處해 經濟的·金融的 地域共同體 構築을 促進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21世紀 世界經濟에서 가장 力動的인 地域이 될 東北亞에서 域內 自由貿易의 擴大, 戰略的 提携 强化 等 經濟協力 擴大를 통해 우리 經濟의 第2의 跳躍을 이뤄 名實共히 先進經濟로 進入하기 위해서다. 넷째로는 무엇보다 우리 民族의 宿願인 統一을 앞당기기 위해서다. 統一 問題는 決코 民族 內部만의 問題가 아니며, 東北亞 安保共同體와 經濟共同體의 構築이라는 ‘큰 움직임’ 속에서 南北統一의 決定的 契機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國家的·時代的 召命 아래 筆者는 防禦的·受動的 一面外交街 아니라 攻擊的 能動的 統合外交(軍事·通商·文化, 政府 및 民間을 總括)를 强化해야 한다고 본다. 그 첫걸음으로서 日本과의 過去事 問題 解決은 不可避한 先決課題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日本에 對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道德的 優位를 確固히 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우리 國民과 政府가 日本의 過去事 美化와 否定의 態度에 對해 堂堂하게 批判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는 被害者이고, 그들의 過去 殘虐行爲가 人類普遍的 價値에 비춰볼 때 매우 非人間的이고 非道德的이라는 點 때문이다.

    最近 한 日本 知識人은 “韓國人은 實際로는 過去事 淸算을 願하지 않는다. 日本에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韓國人은 (過去事 提起를 통해) 日本을 道德的으로 낮은 存在로 여김으로써 滿足感과 快感을 얻는다”는 心理分析을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眞心으로 日本을 容恕하고 包容했을 때는 果然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 우리의 容恕 行爲에 따른 自矜心은 우리 民族의 人格과 品格을 高揚시킬 것이며, 한없는 자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萬一 日本이 먼저 眞情으로 謝過한다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痛快하거나 시원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억지로 빚을 받아낸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日本人은 元來 惡人이었고, 그들이 原子爆彈 洗禮를 받은 것은 잘못에 對한 膺懲이었기에 當然한 일이었다는 思考에는 暴力에는 暴力으로 膺懲한다는 ‘復讐’의 事故가 깔려 있다. 暴力과 怨恨은 어느 한쪽이 끊지 않는 限 終結되지 않는다. 暴力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主體는 被害者 側이다. 그런 意味에서 日本은 美國을 容恕해야 할 것이며, 韓國은 日本을 容恕해야 한다. 憤怒는 決코 謝罪를 부르지 못한다.

    여기서 한 가지 指摘할 것은, 우리가 日本과의 過去事 問題에 있어 ‘容恕’를 한다고 해서 過去事를 完全히 잊어버리자는 것은 아니라는 點이다. 그것은 眞正한 友好의 밑거름이 아니라 또다시 兩國 間 不幸을 부를 실마리가 될 수 있다. 眞正한 兩國 善隣友好關係를 위해 容恕는 하되 지난 歷史는 記憶해야 한다. 後世를 위한 敎訓으로 삼고 時間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日本이 우리의 眞心을 理解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筆者는 다음과 같은 和解를 위한 政策을 提案한다.

    和解를 위한 方案

    于先 우리 大統領이 直接 韓日 過去事 問題를 더 以上 外交問題化하지 않을 것이며 兩國 協力關係를 最高 水準으로 格上시킬 것을 提案하는 內容의 聲明을 對外的으로 闡明해 向後 對日關係의 劃期的 改善을 追求할 것을 宣言한다. 이러한 容恕와 和解의 精神을 나타낼 可視的인 行事로 日王의 訪韓을 推進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參考로 日王의 中國 訪問은 1992年에 實現됐다.

    둘째, 兩國 間 實質交流를 大幅 擴大한다. 무엇보다도 只今까지 兩國關係 發展이 遲遲不進한 原因은 過去 淸算의 未洽 때문이었으며, 그 根本 理由는 서로 相對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가장 먼저 擴大 推進해야 할 ‘實質’交流事業 分野는 相對方 國民의 情緖와 文化 等 精神文化에 對한 理解를 促進하기 위한 硏究다. 이를 위해서 兩國 政府가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具體的으로는 于先 19世紀 中葉 以後부터 1945年까지 約 100年間의 兩國 關係史에 對한 大大的인 學術硏究를 推進해 徹底히 資料에 根據한 客觀的이고도 公正한 歷史에 對한 視角을 再正立하려는 努力을 始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只今까지 잘못된 相互理解에서 비롯된 時間과 精力의 浪費를 最大限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眞正한 善隣友好關係가 싹틀 수 있을 것이다.

    直接 國民을 對象으로 하는 것으로는 (只今까지 거의 試圖된 적이 없지만) 서로가 相對國 製作 近現代史 TV 프로그램을 交換 放映하거나, 相對方 國民이 읽을 만한 歷史冊 等을 相對方 言語로 飜譯해 相對國의 各級 學校와 圖書館 等에 配布하는 等 根本的 對策 樹立에 努力한다.

    셋째, 東北亞共同體 建設의 推進을 主導한다. 未來志向的인 兩國關係 建設을 위하여 한·중·일을 中心(러시아, 몽골 等 包含)으로 하는 東北亞共同體 創設을 主唱, 域內 統合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取해 이 같은 論議를 主導的으로 이끌어간다. 特히 韓日 FTA 締結을 위한 協商을 早速히 再開, 和解와 同伴者로서의 意志를 具體的으로 表明한다. 또한 다양한 分野에서 國際問題 解決을 위해 두 나라가 協助 努力을 倍加할 것을 約束한다.

    ‘容恕는 하되 잊지는 말자’

    勿論 過去를 ‘記憶’하기 爲한 政策도 繼續돼야 한다.

    먼저 過去事 淸算作業을 위한 眞相糾明作業을 持續的으로 推進한다. 政府는 過去事 關聯 日本 政府 및 民間 所藏 資料의 公開가 實現될 수 있도록 雰圍氣 造成에 앞장서고, 生存者의 證言을 聽取토록 努力한다. 또한 政府가 直接 大規模 學術大會를 열어 論爭이 되고 있는 各種 歷史賞 問題들(韓日竝呑條約에 對한 不法性 論難, 日本軍 慰安婦 强制連行 論難 等)에 對한 客觀的 論議를 誘導하는 等 歷史的 眞實 糾明을 위해 持續的인 努力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日本에 對한 直接敎育을 試圖한다. 日本 政府와 協議(合意)하거나 우리 政府 獨自的으로 日本 內에 日帝 强占期(太平洋戰爭 包含) 博物館(展示館)을 開設하기 위해 努力한다. 獨立記念館 等에서 所藏하고 있는 各種 資料의 賃貸 等을 통해 日本 政府가 疏忽히 하고 있는 日本 國民의 歷史敎育을 爲한 政策을 樹立, 施行한다.

    또한 博物館(展示館) 設置와 竝行해 日本 駐在 우리 公館(大使館 및 領事館) 施設을 積極 活用, 假稱 ‘日帝時代 常設展示館’을 設置해 日本 國民에 對한 常時敎育을 試圖한다. 그리고 向後 中·長期的 期間을 定해 國內 및 日本 內 著名한 韓日 關係史 敎授 等 專門家들에 依한 日本 內 歷史講演會를 持續的으로 實施해 日本 國民에 對한 直接敎育을 試圖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過去史 記憶作業을 통한 日本의 自省을 促求하기 위해 過去 韓日 歷史 問題에 責任이 있는 微影 等 强大國들에 對해 日本의 바른 歷史認識이 東北亞 및 世界의 平和·安保에 重要한 關鍵이라는 認識을 심어주는 外交的 努力을 기울이고, 유엔 等 國際機構의 眞實糾明活動에 積極 同參한다.

    筆者의 꿈이긴 하지만 우리의 ‘對日 햇볕政策’李 結實을 본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現在의 過去事 葛藤(敎科書 歪曲 問題, 日本軍 慰安婦 問題, 야스쿠니神社 參拜 問題, 獨島 問題 等)도 解決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또한 韓日關係가 한瞬間에 가장 좋은 方向으로 進展될 可能性도 있다. 왜냐하면 政治는 生物이며 이는 國際政治에서도 똑같이 適用되는바, 容恕와 稱讚은 不可能을 可能케 하는 强力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只今은 不俱戴天의 怨讐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筆者의 提案처럼 된다면 世界에서 가장 사이좋은 이웃이 되어 只今까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未來가 펼쳐질 수 있다. 그때는 더 以上 過去처럼 外勢의 侵略에 依해 나라의 運命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容恕와 寬容의 國家 大韓民國’으로 命名되어 全世界로부터 尊敬을 받게 되고, 北韓과 日本을 同時에 包容하여 韓半島平和體制를 鞏固히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東北亞共同體를 主導하는 名實相符한 世界의 中心國家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리더

    현직 외교관의 ‘한일관계 新패러다임’ 제언
    정연택

    1960年 釜山 出生

    서울대 社會敎育과 卒業, 日本 와세다代 歷史學部 數學

    日本 게이오대 法學部 訪問硏究員

    1991年 外務考試(25期) 合格

    現 外交通商部 外交力量評價團 팀長


    曺國 雄飛(雄飛)의 그 꿈이 實現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프랑스 知性 자크 아탈리의 다음과 같은 忠告를 새삼 새겨본다.

    “韓·中·日 3國을 보다 密接하게 묶으려는 試圖는, 아시아에서 리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血眼이 되어 있는 中國이나 日本으로부터는 始作되기 어렵다. 中國이나 日本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韓國이 過去 歷史나 領土 問題로 인한 懸案을 슬기롭게 解決할 수 있다면 中國과 日本이라는 두 競爭國家를 政治的, 經濟的으로 가깝게 만드는 데 牽引車 役割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韓國은 經濟的, 地政學的 狀況에서 매우 重要한 役割을 遂行할 수 있으며, 未來에 中心的인 國家로 浮上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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