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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時節 이야기 1941~1963|新東亞

世界를 向한 熱情과 挑戰 - 송상현 回顧錄

어린 時節 이야기 1941~1963

炎天에 惡臭 풍기던 屍體… 戰爭이 나를 法으로 이끌어

  • 入力 2018-0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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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마다 背囊을 멘 채 집을 나와 食糧을 求하러 倉洞으로 갔다. 애호박, 가지, 오이, 토마토, 감자 等을 얻을 수 있었다. 길에 널려 惡臭를 풍기는 屍體를 참으로 많이 보았다. 커가면서 人間은 왜 꼭 戰爭을 해야만 하며 戰爭을 통해 窮極的으로 達成하고자 하는 目的이 果然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곤 했다.
    <有名 人士들이 남긴 글 中에는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赤裸裸하게 드러내는 勇氣를 보여주는 懺悔의 記錄이 없는 것은 아니나 回顧錄은 於此彼 自己合理化나 자랑이 앞서는 境遇가 많다.> 

    나는 1941年 12月 21日 競技 楊州郡 노해면 창동리 281番地(서울 도봉구 窓5棟)에서 父親 원남(苑南) 송영수와 母親 宋元(松苑) 김현수의 無女獨男으로 태어났다. 生家는 1939年頃 古下(古下) 송진우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家屋인데 當時의 經濟 事情을 反映하듯 工事가 遲遲不進하고 建築 資金이 모자라 안채의 大廳과 마루의 겉 分閤門度 미처 달지 못한 채 新婚인 나의 父母님이 入住했다. 이 집 안房 뒤에 붙은 2칸의 골房 中 하나에서 내가 태어났다. 

    나는 初等學校 入學 年齡에 未達한 狀態로 倉洞초교에 入學해 約 2年間 다니다가 창동을 떠나 四大門 안으로 들어간 後 돌아오지 못했으나 어릴 적 살던 명륜동 31의 9番地 傳貰집이나 원서동 74番地 高下 할아버지 宅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무네미(물넘語라는 名稱이 訛傳된 洞네 이름인데 現在 수유동에 該當), 末尾, 쌍감리(쌍문동), 벌리(번동)를 지나 倉洞까지 數없이 걸어 다닌 어린 時節을 回顧하곤 했다. 그때마다 이 山紫水明하고도 평화로운 農村인 창동 마을이 서울로 編入된 뒤 어쩌면 그렇게도 평화롭던 農村의 痕跡이 깡그리 없어져 버렸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禁할 수 없다. 

    道峯山, 水落山, 불암산 等 아름다운 山이 遠近으로 알맞게 屛風을 친 典型的 農村 마을인 창동리가 肥沃한 門前沃畓을 끼고 形成됐는데 물이 늘常 豐富한 洞네여서 가뭄을 모르는 곳이었다. 태극당 製菓店이 있는 돈암동 電車 終點에서 始作되는 彌阿里고개가 높이를 낮추고 길을 넓혀 다니기가 좀 수월해진 것은 數十 年 뒤의 일이기에 내가 어릴 적에는 꽤나 높고 좁은 미아리고개를 힘들게 걸어 넘으면서 四大門 안에 드나들었다.

    倉洞으로 移住한 志士들

    나는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왼쪽은 돌 사진, 오른쪽은 창동초교 1학년 때 어머니와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競技 楊州郡 노해면 창동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왼쪽은 돌 寫眞, 오른쪽은 倉洞初校 1學年 때 어머니와 집에서 찍은 寫眞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의 時局은 第2次 世界大戰 中이어서 모든 사람이 物質的, 精神的으로 몹시 어렵고 힘든 時期였다. 된醬에 찍은 풋고추 飯饌 한 가지에 깡보리밥으로 끼니를 解決하기도 어려운 時節이었다. 



    日本의 斷末摩的 抗戰으로 因해 英美 聯合軍이 서울을 爆擊할지도 모른다는 判斷下에 서울 郊外인 창동 마을로 옮겨 자리 잡은 名詞가 많았다. 爲堂 鄭寅普(初代 監察委員長), 街人 金炳魯(初代 大法院長), 止軒 장현중, 湖巖 문일평, 一簑 방종현, 小說 ‘林꺽정’의 著者 벽초 洪命憙와 그의 아들인 홍기문, 홍기무 等이 2次大戰 末期의 어려운 삶을 창동에서 僅僅이 이어나갔다. 서울 四大門 안 원서동에 살던 高下 할아버지도 자주 倉洞으로 나와 우리 집에서 여러 날씩 起居하면서 이곳의 어른들과 조심스럽지만 허물없이 어울리셨다고 한다. 特히 爲堂과 가인 先生을 끔찍하게 모시고 가까이했음은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모두들 營養失調로 얼굴이 蒼白하고 日帝의 發惡으로 氣가 죽어 있었으나 唯獨 高下만은 日本의 敗亡이 머지않았음을 유난히도 强調하면서 精神을 바짝 차리고 建國에 對備해야 한다는 뜻을 熱情的으로 强調하곤 했다는 것이 집안 內의 傳說처럼 내려오고 있다. 

    後嗣가 없던 高下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일찍이 內心 養子로 定해놓고 온갖 비밀스러운 任務를 다 시키고는 언제 投獄되거나 苦痛을 當할지 모르는 不安한 狀況에서 事實上 우리 全 家族의 唯一한 生活 責任者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告하는 人文 高等學校를 거쳐 반듯한 大學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아버지의 欲望을 抛棄하게 한 다음 南大門商業學校(現 東姓考)에 들어가게 해 籌板과 浮氣 等을 배우게 했다. 萬一의 境遇에 店員이나 書記로 就業해서라도 집안을 扶養할 準備와 覺悟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後日 아버지는 이 대목을 恨歎調로 回顧하신 일이 있다. 아버지는 高校 時節 晝耕夜讀의 어려운 環境 속에서도 成績이 優秀한 데다가 박준호 校長先生님(박병래 前 聖母病院長 父親) 및 擔任인 場面 先生(第2共和國 國務總理)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後日 場面 總理가 執權하자 政府의 高位職을 提議받았으나 頑剛하게 辭讓했다. 이것은 政治人인 할아버지의 暗殺 悲劇을 거울삼아 絶對로 政治에 參與하지 않겠다는 그분 나름대로의 意志 表現이었다.

    獨立運動 求心點, 古下

    아버지는 寶城專門(高麗大 前身) 商科에 進學한 後 머리를 빡빡 깎고 學校를 다녀 覺皇寺 住持라는 別名을 얻었다고 한다. 보성전문 商學部를 어렵사리 卒業하자마자 暗鬱한 現實에서도 當時 羨望의 職場人 殖産銀行(現 産業銀行) 入社 試驗에 대뜸 合格해 한 달에 90원이라는 巨額의 月給을 받을 꿈에 부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國內 抗日 獨立運動의 求心點인 代表的 指導者의 子孫이 日帝가 세운 金融機關에 勤務할 수가 있는가 하는 是非가 高下 周邊에서 일어나 結局 出勤 하루 前날 이 黃金 職場을 抛棄하고 말았다. 그 代身 當時 唯一한 民族資本으로 設立된 京城紡織(現 경방)에 부랴부랴 就職하고 보니 月給이 40원이었다고 한다. 京城紡織의 오사카 地點에 數年間 勤務하다가 歸國해 倉洞 집에 定着한 뒤로 아버지는 每日 새벽 4時에 일어나서 창동驛에서 汽車로 청량리역에 到着한 다음 戰車로 갈아타고 鷺梁津驛을 지나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長靴 없이는 못 산다는 영등포 所在 경방의 工場까지 힘든 出退勤을 여러 해 동안 繼續했다. 

    어머니는 經濟的으로 넉넉한 집안의 長女로 태어나 귀여움을 獨차지하면서 新敎育을 받은 新女性이다. 結婚 後 複雜한 집안 事情上 生家 시모, 兩家 시모 및 西시모 等 事實上 세 분의 媤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움, 나를 낳으신 뒤 藥과 飮食이 不足하고 療養할 形便이 못 돼 數年間 괴롭혀온 兵馬, 거의 날마다 창동에서 원서동으로 出勤해 高下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엄청난 家事業務量, 獨立運動 指導者 집안에 加해지는 各種 威脅과 恐怖 等을 堪當하면서 한瞬間도 便하게 젊은 時節을 보내신 적이 없다. 더군다나 光復의 기쁨도 잠깐이고, 1945年 12月 30日 새벽 원서동 高下 宅의 舍廊채에서 한현우 等 無賴輩가 媤아버지를 暗殺하는 것을 目擊했다. 어머니는 90歲를 사시고 2009年 여름에 別世하셨다. 아프리카 密林 속을 出張 中이어서 臨終을 못한 것이 平生의 恨으로 남아 있으나 내가 國際刑事裁判所腸이 되어 活潑한 活動을 하는 것을 본 後 殞命하셨다.
     
    집안 어느 누가 暗殺과 같은 엄청나고도 悲劇的인 思惟로 집안 어른이 갑자기 生을 마감하실지 미리 알았겠는가. 아무 準備 없이 慌忙 中에 遺言執行人인 本部인 遊車(柳次·本貫 高興) 할머니의 辯護人 街人 金炳魯 先生의 總指揮下에 結局 宋氏 門中이 民法上의 正式 親族會議를 열어 나의 父親을 高下의 事後 養子로 入籍해 正式으로 法的 家統을 잇게 하는 決意를 했다. 當時 民法에 規定된 대로 事後入養(死後入養) 措置로 인해 그동안 事實上 아들과 며느리 노릇을 한 나의 父母님이 高下의 死後에야 비로소 法的으로 그분의 戶籍上 正式 入養된 後繼者가 됐다. 只今은 家計를 꼭 이어야 한다는 觀念이 많이 稀釋돼 死後養子라는 制度가 民法 改正 時에 廢止됐지만 그 當時에는 重要한 家系 繼承 方法의 하나였다. 나는 이처럼 高下의 피를 直接 받은 孫子는 아니나 高下의 4男 4女 兄弟분 中 손위 큰兄님의 3男인 내 아버지가 아들로서 事後入養을 하셨으니 나는 法的으로 高下의 뒤를 잇는 唯一한 長孫이다.

    “不逞鮮人(不逞鮮人)의 새끼”

    혜화초교 4학년 1반 친구들이다. 6·25전쟁 직전 촬영했다.

    혜화초교 4學年 1班 親舊들이다. 6·25戰爭 直前 撮影했다.

    告하는 日本 留學 後 歸國해 27歲에 中央學校 學監으로 就任했는데, 海外 留學生들의 集結體인 中央學校 校長이 돼 朝鮮歷史를 가르치면서 學生들을 隱密하게 組織했다. 그 學校의 宿直室에 起居하면서 基當 현상윤, 六堂 崔南善, 고우 崔麟, 인촌 金性洙 等과 함께 3·1運動을 劃策하고 中央學校 學生을 中心으로 組織한 學生網을 擴張해 獨立萬歲運動을 主導한 核心 人物이다. 每日 밤 謀議를 하고 傾向 各地 또는 海外 密使들을 몰래 맞이하고 보냈다. 必要한 資金은 季冬에 따로 살림을 차리고 있으면서 밤마다 宿直室 謀議에 合流하던 隣村이 大部分 調達했다. 韓國에 大學이 없던 그 當時 이 젊은 中央學校 校長은 國民에게 새로운 希望을 주는 先進的 知識人이었으나 獨立萬歲運動에 必要한, 全國的으로 名望 있는 元老들의 支持가 如意치 못하자 效果的인 3·1運動을 위해 全國的 組織과 知名度가 있는 손병희 天道敎 敎主나 影響力 있는 基督敎 牧師들을 앞에 모셨다. 

    鍾路警察署 留置場에서 日本 刑事 美瓦家 恣行한 惡毒한 拷問 中에는 高下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놓고 漆黑 같은 어둠 속에서 訓鍊된 警察犬으로 하여금 無差別로 물게 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 過程에서 告하는 生殖 能力을 잃어 다시는 子孫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게 집안 內의 定說이다. 告하는 10代에 父母가 定해준 두 살 위의 處女와 結婚해 딸을 낳았는데 고하가 日本 留學 中 그女가 天然痘로 死亡한 後 血肉이 없는 一生을 사셨다. 고하가 酷毒한 拷問 끝에 1年 7個月의 收監生活을 끝내고 無罪釋放된 것은 適用 法律上의 問題 德分이었다. 獨立運動을 劃策한 行爲를 內亂罪로 다스렸더라면 死刑을 免치 못했을 것이나 當時 法院은 오늘날의 執匙法 違反에 該當하는 罪로 다스리기로 決定했는데 이런 罪에는 豫備 陰謀를 處罰하는 規定이 없어 釋放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光復되기 數日 前부터 웬일인지 원서동 집 周邊에 監視員 數가 突然 增加하고 舍廊채로 高下를 訪問하는 이가 늘었다. 光復 直前인 8月 初 어느 날 일이다. 나는 날이 더워 옷을 거의 다 벗은 狀態로 원서동 집 안마당에서 혼자 놀았는데 制服을 입고 긴 칼을 찬 日本 高官을 따라 안마당으로 들어온 사람이 다짜고짜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不逞鮮人(不逞鮮人)의 새끼” 운운하는 辱을 큰 소리로 했다. 어린 나는 無防備 狀態로 걷어차여 턱을 土房의 臺돌에 부딪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재동 附近 김웅규 外科에 가서 여러 바늘을 꿰맨 後에도 여러 해 동안 크게 苦生했다. 조금 큰 다음 父母님에게 이 일을 물어보았다. 父母님에 따르면 이쿠다(生田) 京畿道知事 等 日帝의 高官들이 政權 引受 交涉 次 高下 할아버지를 祕密裏에 數次例 訪問했는데 고하가 決然히 拒絶하자 火가 난 朝鮮人 隨行員 한 名이 안채로 내려와 내게 憤풀이했다는 것이다. 그가 日帝 總督府에서 높은 管理를 하던 전봉덕(田奉德)이라는 것도 그때 들었다.

    生과 死의 갈림길

    光復 直前 日帝가 朝鮮의 指導者를 모두 죽이고 撤收하리라는 情報를 入手한 告하는 미리부터 病이 깊어 運身을 못하는 시늉을 했다. 더운 三伏 中에도 원서동 舍廊채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高下의 머리맡에서 韓藥을 달이는 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할아버지 어디 아파?’ 하면서 울었던 記憶이 稀微하게 남아 있다. 

    光復이 되자 그야말로 朝鮮 天地의 모든 指導者가 원서동의 高下 宅으로 몰려들었다. 昌德宮과 휘문學校(現 現代建設 자리) 사이로 좁고 길게 난 원서동 골목(昌德宮길)은 할아버지 宅에 이르기까지 사람으로 가득했다. 勿論 오시는 손님들에 對한 모든 치다꺼리는 어머니 몫이었다. 암살당하시던 前날 밤 할아버지는 白凡 金九와 京橋莊에서 信託統治 問題를 協議한 後 늦게 歸家하셨음에도 平常時와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원서동 舍廊채의 居室에서 같이 自己로 돼 있었으나 마침 함께 주무실 손님이 따라오셨고 내가 먼저 아래채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狙擊犯의 銃彈을 避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다섯 살에 처음 겪은 生과 死의 갈림길이다. 高下와 함께 주무시던 손님은 할아버지의 親戚인데 허벅다리에 銃傷을 입어 오래 苦生하시다가 돌아가셨다. 

    倉洞 집에서 할아버지 3年喪을 치렀는데 高下의 暗殺은 집안에 두고두고 甚大한 打擊을 끼쳤다. 家族에는 커다란 트라우마였고 經濟的으로도 어려움을 주었다. 家族들은 앞으로 絶對 政治에 關與하지 않겠다는 것을 再三 盟誓했으며 父母님은 3年喪을 치른 다음 나의 生家를 그대로 놓아둔 채 창동 마을에서 서울 四大門 안으로 移徙를 計劃했다. 그 當時에는 所謂 敵産家屋(日本人이 살다 떠난 不動産을 政府 所有로 삼은 이른바 歸屬財産)李 日本人이 많이 살던 地域에 櫛比했다. 웬만하면 各種 緣故權을 主張해 敵産家屋을 싸게 拂下받아 집을 장만하는 것이 當時의 風景이었고 現在 큰 富者가 된 一部 財閥級 人士는 歸屬財産을 싸게 拂下받아 富의 基礎를 마련했다. 아버지도 비슷한 方法을 摸索하신 模樣인데 어느 날 이것이 高下를 따르던 同志들의 귀에 들어가자 ‘어떻게 代表的 抗日 獨立志士인 高下의 아들이 倭놈들이 남긴 敵産家屋을 拂下받아 살 수가 있는가’라고 嚴하게들 꾸중해 아버지는 이를 抛棄해야만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불號令만 이곳저곳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 食口가 貰집을 轉轉하다 겨우 내 집 한 칸을 장만한 것은 6·25 避難살이 以後 環刀하고도 한참이 지난 1957年의 일이다. 안암동 1街에 작은 韓屋을 힘겹게 買入했다. 서울에 내 집이 없는 狀態에서 청구동의 臨時 居處를 暫時 거쳐 명륜동 1街 31의 9番地의 번듯한 韓屋을 傳貰 내 살면서 내가 轉學한 곳이 혜화初校다.

    李承晩의 거짓 錄音放送

    1959년 2월 28일 경기고 졸업식 때 사진이다.

    1959年 2月 28日 競技고 卒業式 때 寫眞이다.

    初等學校 4學年 때 난데없이 北韓軍이 南侵해 6·25街 勃發했다. 처음에는 그 當時 開城戰鬪에서 이름을 떨친 肉彈10勇士의 武勇談이 示唆하듯 38線 近處에서 늘 있어온 局地的 衝突인 것으로 誤判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自己는 避難 가면서도 國民에게는 걱정 말라고 한 李承晩 大統領의 거짓 錄音放送을 믿고 對備도 없이 있다가 當時 唯一한 漢江 다리마저 爆破되자 도강해 避難할 길이 없음을 알고 명륜동 집 地下室에 숨어 敵治 3個月을 艱辛히 살아남았다. 더운 여름인데 年歲 많으신 할머니, 아직도 腹帶를 두른 채 快差하시지 못 한 어머니, 꼭 人民軍에게 붙들려가기에 適當한 年齡의 아버지, 열 살의 내가 習習한 地下室에 隱居했다. 어머니는 人民軍이 要求하는 대로 努力 動員에 主로 불려가고 나는 혜화初校나 孝悌初校 아니면 창경초교에 出席해 北韓의 노래를 배운 記憶이 난다. 

    나는 날마다 背囊을 멘 채 집을 나와 食糧을 求하러 緣故地 農村인 倉洞으로 갔다. 창동의 아는 집을 찾아가도 쌀이나 보리를 주는 사람은 全然 없고 여름이라서 그런지 애호박, 가지, 오이, 토마토, 감자 等을 조금씩 얻을 수 있었다. 어린 나에게 相當히 무거운 짐이지만 나는 이를 背囊에 지고 다시 창동에서 명륜동 집까지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걸어왔다. 이렇게 석 달間 食糧 供給 責任을 맡았다. 날마다 여름 菜蔬나마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오는 길에 그나마 얻은 것을 人民軍에게 뺏기거나 爆擊 또는 機銃掃射로 인해 逃避하는 過程에서 背囊의 食品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흩어지는 境遇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 食口가 굶기도 했다. 이즈음 길에 널려 炎天에 썩어가면서 惡臭를 풍기는 屍體를 참으로 많이 보았다. 커가면서 人間은 왜 꼭 戰爭을 해야만 하며 戰爭을 통해 窮極的으로 達成하고자 하는 目的이 果然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는 境遇가 더러 있었다. 

    7月 中 어느 날 옆집에서 숨어 지내던 이정우 大檢 檢事가 갑자기 들이닥친 人民軍을 避해 우리 집으로 담을 넘어 逃避한 일이 기억난다. 그분은 全身을 포대기로 둘둘 말아 짐처럼 리어카에 실린 채 우리 집 大門을 통해 巧妙하게 빠져나가 故鄕인 群山 方向으로 危險한 避難길을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파리한 얼굴로 地下室 벙커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恒常 短波 라디오를 들으셨다. 英語를 한 마디라도 理解하는 食口는 아버지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는 하염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유엔 聯合軍이 韓國에 派遣돼 곧 共産軍을 무찌르게 됐다고 말씀했다. 美國 國務長官 拷問 존 포스터 덜레스가 臨時首都 釜山에 와서 避難國會에서 演說했는데 첫마디를 “韓國은 혼자가 아니다(Korea is not alone)”로 始作하면서 유엔 安全保障理事會의 派兵 決意를 傳達한 것이다. 그 後 저 有名한 仁川 上陸作戰으로 맥아더 將軍이 서울을 奪還한 9月 28日까지 우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유엔軍은 破竹之勢로 鴨綠江까지 進軍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北韓을 도와 參戰한 中共軍이 大擧 人海戰術을 쓰는 바람에 戰況이 膠着狀態에 빠지면서 國軍과 유엔軍은 後退한다. 이番에는 우리도 確實하게 避難을 가야 했다. 1951年 1月 4日 서울이 채 陷落되기 直前 酷寒 속에서 우리 食口는 高齡인 할머니를 모시고 萬원인 汽車 칸에 짐짝처럼 실려 여러 날 만에 釜山에 到着했다. 定處 없이 범일동에 있는 舊(舊)朝鮮紡織 倉庫에 볏짚을 깔고 避難살이할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청난 數의 避難民이 머무는 臨時收容所의 바로 옆에서는 말들이 짚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말똥 냄새가 나는 馬廏間에 收容된 것이다.

    말똥 냄새나는 馬廏間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俗談처럼 釜山도 敵의 손에 陷落되지 않는다는 保障이 없어 우리는 배를 타고 巨文島를 거쳐 濟州島로 한 番 더 避難을 갔다. 戰爭이 小康狀態로 접어들고 休戰交涉이 進行 中이므로 우리도 適當한 機會에 陸地로 復歸할 準備를 해야 했다. 나는 우리 食口가 當然히 濟州에서 서울로 가거나 적어도 釜山으로 復歸할 것으로 豫想했다. 그러나 집안 形便이 如意치 못해 난데없이 아무런 緣故가 없는 木浦로 간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只今도 그리로 간 理由를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職場 關係로 釜山에 主로 계시고 家族은 아름다운 儒達山 밑의 都市 木浦에서 뜨내기 避難民의 고달픈 生活을 堪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生疏한 全州로 移徙했다. 日帝가 各 道廳 所在地마다 세운 紡織工場(鍾紡)李 光復 後 拂下됐는데 그中 全州에 있는 工場을 拂下받은 側에서 이 工場의 復舊와 經營을 아버지에게 付託했기 때문이다. 千辛萬苦로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全州에 到着해 學校에 가보니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기내기…” 하면서 연신 놀려대는 級友가 많아 이들과 사귀는 데에는 한동안 時間이 걸렸다. 

    나는 全州에서 中學校 入學 國家考試를 치렀는데 道內 席次에서 首席은 외우 최일섭 軍에게 빼앗겼지만 500點 滿點에 450點이 넘는 水準이어서 全國 席次로 따져 봐도 上位 10等 안에 들었으므로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396點의 競技中學에 들어가고도 남는 成績이었다. 父母님이 나를 競技中學에 보내주실 것으로 굳게 믿었으나 어린 나를 서울로 혼자 留學 보낼 것인지를 두고 많은 苦悶을 하셨다. 家庭 形便上 無理가 돼 눈물을 머금고 電柱에서 中學校에 入學했다. 戰爭 後 破壞되고 흩어진 建物과 敎師陣에도 不拘하고 강택수 校長先生님의 熱誠과 配慮로 傳統 있는 名門 全州 北中學校에서 그런대로 正常的인 敎育을 받을 수 있었다. 3年 後 全校 1等으로 卒業했고 競技고 入學試驗에 合格해 1956年 初 비로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과 달리 還都가 約 3年 遲延된 것이다. 이때도 내가 高下의 孫子로서 中央高校에 進學해야지 어떻게 官立學校人 京畿高校를 가느냐고 高下를 欽慕하고 따르는 분들이 多少 是非를 하셔서 아버지가 좀 곤란하셨는데 一旦 경기고에 入學한 後에는 制度上 轉學할 수도 없는지라 結局 흐지부지 넘어갔다. 나는 경기고에 入學하자마자 혜화初校 同窓들을 다시 만나게 돼 기뻤다.


    “海洋 進出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

    내가 다니던 京畿高校는 雰圍氣가 좋았다. 元來 秀才들이 모이면 競爭이 甚하거나 自己 잘난 것만 내세워 行動하는 수가 많은데 우리 學年 605名은 끼리끼리 서로 통하면서 클럽도 만들고 討論도 많이 하면서 大體로 좋은 關係를 維持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工夫하던 종로구 화동 敎師는 現在는 정독圖書館이 됐지만 江南區 三成洞에 거의 10倍나 넓은 터를 잡아 큰 敎師를 짓고 移轉해 後輩들이 빛나는 傳統을 이어가고 있어 마음이 뿌듯하지만, 奇異하게도 내가 다닌 모든 學校가 廢止됐거나 옛날 場所에서 다른 곳으로 移徙해버린 까닭에 追憶을 가지고 元來의 母校 캠퍼스를 찾는 일이 不可能해져 遺憾이다. 혜화初校, 全州북중, 競技고 甚至於 서울대와 司法大學院까지 없어졌거나 移徙했다. 

    1959年 3月 서울法大에 無難히 入學했다. 왜 何必 法大를 選擇했는가. 當時의 어른들은 官尊民卑 思想이 있어 漠然하나마 子弟가 서울法大에 들어가 國家考試에 合格해 立身出世하는 希望을 壓倒的으로 갖고 있었다. 나의 遊車 할머니가 典型的으로 그러한 분이셨으나 父母님은 適性과 關係없이 無條件 法대로 進學해야 한다고 强要한 일이 全然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보다는 法學이 人文社會科學 中에서 가장 八方美人 格으로 應用될 수 있는 分野라는 點에 着眼해 全 家族의 生活을 책임져야 하는 내가 法大에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을 뿐 明確하게 생각이 整理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려서 6·25戰爭의 慘酷한 結果를 目擊하고는 漸次 커가면서 이 같은 天人共怒할 犯罪를 法으로 다스릴 수 있고, 法으로 再發 防止가 可能한지 늘 물음標를 가지고 深刻하게 생각하면서 그러려면 法學 工夫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 것도 事實이었다. 

    서울에 還都한 以後 나중에 내 丈人이 되는 그 當時 고려대 政治學과 敎授이던 南在(南齋) 김상협 先生께 거의 每年 歲拜를 갔다. 명륜동의 그 宅은 갈 때마다 손님으로 넘쳐나고 活氣가 가득했다. 아무리 바빠도 南在 先生은 나를 別途로 應接室에 案內해 짧은 時間이나마 激勵의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當時 이분이 東京帝國大學에서 政治學을 專攻하신 줄 알았는데 正式으로 法學을 專攻했음에도 그 當時 大部分의 韓國 留學生이 高等文官試驗에 合格해 關係로 進出하는 것과 달리 흔들림 없이 學問의 길을 擇한 분이라는 것을 發見하고 깜짝 놀랐다. 그분은 여러 次例에 걸쳐 나에게 法大에 갈 것을 勸했다. 판·檢事의 길을 걸어도 좋지만 韓國은 半島이고 海岸線이 긴 데다 海洋 進出과 輸出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이니 法大에 가서 公法人 海洋國際法과 私法人 海上法을 모두 工夫해 이 兩 分野를 아우르는 巨大한 바다에 關한 法體系를 세우도록 硏究해보면 어떤가 하는 말씀을 하셨다.

    민주學生義擧와 軍事政變

    1959年 大學에 막상 들어가니 自由黨 末期의 腐敗와 權力濫用이 대단하고 特히 3·15 不正 選擧를 敢行하는 바람에 全 國民의 憤怒를 사 學生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내가 2學年 때인 1960年 4·19 民主學生義擧가 일어난 것이다. 나도 동숭동 캠퍼스에서 故 김증한 敎授님의 民法 講義를 듣다 말고 뛰쳐나와 다른 學友들과 함께 鍾路를 거쳐 國會議事堂 쪽으로 行進해갔다. 아마 이때 大學生들이 처음으로 時局에 關한 데모를 始作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當時에 政治的 野心도 없고 우리가 하는 데모의 政治的 結果에 對한 確信도 없었다. 여러 날 동안 激烈한 데모 中 靑瓦臺(當時 景武臺) 方面으로 行進한 學生 中 死傷者가 많이 생겼다.
     
    그해 여름 자유로운 選擧를 통해 民主的인 場面 政府가 들어섰으나 無能해 基本 秩序조차 維持하지 못했다. 混亂과 無秩序가 極에 達했다. 場面 總理가 아끼는 弟子이던 아버지에게도 이런저런 政治的 接觸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明確하게 距離를 두었다. 事實 自由黨 政權 때도 李承晩 大統領의 夫人 프란체스카 女史가 遊車 할머니를 景武臺로 招請한 것을 우리가 拒絶했을 뿐만 아니라 始終一貫 아버지는 微動도 않았기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해를 넘겨도 無秩序한 政治 狀況이 改善되지 않았으며 1961年 5月 軍事政變이 터지고 말았다. 戒嚴令이 宣布되는 狀況 속에서 學校의 授業이란 거의 없었다. 大學 生活은 講義를 充實하게 들을 수 없는 時局 狀況이어서 學校에 登校하는 날이 많지 않았다. 當時 學生의 出席은 登校해 出席簿에 各自 良心的으로 圖章을 찍도록 돼 있었지만 大槪 어느 學生 하나가 여러 名의 圖章을 들고 와서 모두 찍고 가는 것이 常禮였다. 學校 實情이 이 地境이다 보니 일찍 考試 準備를 始作할 생각으로 入學하자마자 절間으로 들어간 數많은 同期生이 先見之明 있는 사람처럼 여겨져 부럽기도 했다. 나도 公認된 證票를 確保하고자 高等考試를 쳐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合格해 판·檢事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習得한 知識의 尺度를 試驗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考試를 草芥같이 여기던 나는 3學年 때 마음을 잡고 國家試驗 準備를 始作했다. 

    高等考試 行政과 14回 試驗施行 公告가 發表됐다. 行政과 試驗은 資格試驗으로는 이番이 마지막이고 이듬해부터는 3級(只今의 5級) 採用試驗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애當初 行政과 凝視를 目標로 한 바는 없으나 高等考試 司法科와 行政과의 試驗 科目이 當時에는 大部分 重複돼 두어 科目만 더 準備하면 兩科를 치를 수 있는 데다 마지막 試驗이라고 하니 勇氣를 내 行政과 考試를 먼저 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남에게 面駁 주지 말라”

    고등고시 행정과 14회 합격자들. 앞줄 맨 왼쪽이 나다.

    高等考試 行政과 14回 合格者들. 앞줄 맨 왼쪽이 나다.

    合格者 發表 날 할머니 혼자 계시는 돈암동 집에 갑자기 쳐들어온 新聞社 記者들이 내 冊床 서랍을 마구 뒤져 應試票를 가지고 갔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내 寫眞을 入手해야 했던 것이다. 이튿날 한국일보는 最高齡 合格者는 總務處에 勤務하는 金昌植(前 교통부 長官·縣 古下宋鎭禹先生記念事業會 理事長) 氏, 最年少 合格者는 송상현 軍이라고 報道하면서 應試票에서 떼어낸 내 寫眞을 실었다. 나는 1962年 高等考試 司法과 16回를 위해 가을과 겨울을 꼬박 試驗 準備에 보냈다. 高等考試 司法과도 이番이 마지막이고 그다음부터는 司法試驗으로 代替된다고 해서 꼭 合格할 料量으로 熱心히 準備했다. 試驗을 別로 잘 본 것 같지 않아 큰 期待를 하지 않았는데 서울대 卒業式 하루 前날인 1963年 2月 25日 合格者 發表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나는 高下 할아버지를 받들면서 代물림을 통해 日帝 强占期의 彈壓, 6·25戰爭 동안의 苦生을 克服하고 적어도 高下의 名聲에 먹漆하지 않으면서 집안을 維持하고 굶지 않도록 온갖 努力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事實 아버지도 마음만 먹었으면 光復 直後 큰 違法이나 無理 없이 歸屬財産 拂下 等을 통해 큰 財産을 모을 수 있었고, 나도 近 40年 서울大 敎授를 하면서 外部의 各種 誘惑 等을 물리치지 못한 채 뜬구름 같은 一時的 政治的 機會에 놀아나면서 正體性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家訓을 묻는 境遇가 더러 있는데 우리 집은 家訓이라고 똑 떨어지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다만 高下 할아버지께서 平素에 周邊을 깨끗하게 維持하라고 强調했고 남에게 面駁을 주지 말라고 말씀한 것을 지키고자 努力할 뿐이다. 周邊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은 對人關係에서 돈이나 女子 問題에 透明하고 담백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며 面駁을 주지 말라는 意味는 對話 詩 같은 값이면 부드럽고 좋은 말로 相對方을 對하라는 말씀으로 解釋해 實踐하고자 할 뿐이다. 남을 稱讚하고 透明하고도 공정한 言行을 하고자 努力하지만 잘 안 될 境遇가 많음은 修養이 不足한 탓이리라.

    송상현
    ● 1941年出生
    ● 경기고, 서울대 法大 卒業
    ● 高等考試 行政과(14회)· 司法과(16회) 合格
    ● 美國 코넬대 法學博士
    ● 서울對 法大 敎授
    ● 서울對 法大 學長
    ● 國際刑事裁判所 裁判官
    ● 國際刑事裁判所 所長
    ● 現 유니세프韓國委員會 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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