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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신동아

名士에세이

山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 入力 2018-0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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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삶, 숨, 時, 술, 새 그리고 산. 시옷의 世界에서 튀어나온 한 글字의 말들. 읊조리고 있노라면 숲 香氣가 스며들며 숨이 트인다. 그中에서도 나의 精神的 自畫像이라 할 수 있는 風景은 斷然 山이다. 産銀 幼年의 뜰이기도 하다. 無等山 虎狼이라 불릴 만큼 기운차게 無等山을 오르내렸던 아버지.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세 살 적부터 山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아주 어릴 적에는 온 家族이 逍風 삼아 바람재까지만 오르곤 했지만, 學年이 올라갈수록 아버지와 오르는 無等山의 높이와 코스는 다양해졌다. 높이를 뽐내지 않으면서도, 어디로 오르든 다양한 얼굴로 반기며 너른 품에 안아주는 산이 無等山 말고 또 있을까.

    山에서 마신 神祕한 藥

    아버지의 山行은 主로 退勤 後인 土曜日 午後와 禮拜가 끝난 日曜日 午後에 이루어졌다. 7兄弟 中 몇몇 언니 오빠는 서울에서 大學을 다니고, 바로 위 오빠와 언니는 光州에서 中·高校를 다닐 때, 난 初等學生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土曜日과 日曜日 午後가 되면 아버지가 山에 가잘까 봐 집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薄俸으로 7兄弟를 공부시키느라 분주했던 엄마의 삶에는 山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週末에 主로 집에 남은 건 나뿐이었던가. 혼자서 山行할 아버지가 왠지 쓸쓸해 보여 나는 아버지를 따라 週末마다 無等山을 올랐다. 

    아버지의 山行 準備는 “約 챙기거라”는 한 마디로 始作했다. 이 말은 곧 나에게 山에 갈 準備를 하라는 信號였다. 敎會 長老이던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聖經에 나오는 葡萄酒를 해마다 담가 缸아리에 넣고 地下室에서 熟成시켰다. 葡萄와 雪糖만 섞었기에 絶對 술이 아니다, 그래서 飮酒가 禁止된 敎會에서 葡萄酒로 聖餐式을 하는 거 아니냐며, 엄마는 聖스러운 飮料 다루듯 그렇게 葡萄酒를 만들곤 했다. 

    熟成된 葡萄를 삼베 천에 담아 손으로 一一이 짤 때는 일손이 不足하다며, 어린 나에게도 삼베 천을 쥐여줬다. 마루에 앉아 짜고 남은 葡萄 찌꺼기가 아까워 짜는 내내 오물거리며 씨를 퉤퉤 뱉다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고추잠자리처럼 뱅뱅 돌며 붉어지다 及其也 캄캄해지곤 했다. 우리 집에서 葡萄酒는 絶對 술이 아니었던 거다. 神靈한 藥이었다. 아버지와 登山할 때마다 나는 그런 藥을 水桶에 담아 背囊에 챙겼다. 葡萄酒가 떨어졌을 땐 때론 그 藥은 人蔘酒가 되고 때론 엄마가 만들어놓은 또 다른 알 수 없는 神祕한 飮料가 되기도 했다. 重要한 건 아버지와 登山할 때면 늘 藥을 準備했다는 거다. 山에 올라 아버지와 어린 딸은 그 藥을 즐거이 마셨다. 추울 때일수록 效果는 컸다. 그래서일까, 시옷의 世界에서 튀어나온 말 中 두 番째로 좋아하는 單語가 술이 되어버린 건. 나에게 술은 如前히 神聖한 飮料日 뿐이다. 

    敎師였던 아버지는 放學만 하면 무슨 擧事를 準備하듯 긴 山行을 計劃했다. 아버지의 寶物 箱子는 다름 아닌 다락房. 다락房은 恰似 登山用品店을 彷彿케 할 만큼 登山 道具로 꽉 찼다. 羅針盤만 해도 奇奇妙妙한 模樣의 것이 數도 없이 많았고, 크기와 機能이 다른 코펠과 버너도 여럿 있었다. 그 當時 서울 을지로에 있던 K2 手製 登山靴點에서 注文 製作한 가죽 登山靴도 철 따라 몇 켤레씩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와 바로 위 오빠, 언니 登山靴까지 合하면 내 눈엔 登山靴 가게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는 다른 곳에는 돈을 쓰지 않았지만 登山用品에 對해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當時 언니 오빠와 나는 겨울 登攀 때면 겨울用 두툼한 半(半) 스타킹을 두 벌 程度 껴 신고 달타냥이 칼싸움할 때나 입었을 법한 단추 달린 두꺼운 七部 바지를 입고 登山하곤 했다. 只今도 求하기 어려운 그런 登山服들을 그 옛날 아버지가 어디서 購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의 寶物 箱子

    엄마에게 甚하게 야단맞고 속이 傷할 때면 난 소리 없이 아버지의 寶物 箱子인 다락房으로 올라갔다. 서글픈 마음에도 아버지의 登山用品들은 神奇하기만 해서 하나씩 만져보노라면 어느새 엄마에 對한 섭섭함이나 서러움이 사라졌다. 구석에서 이름도 쓰임새도 알 수 없는 異常한 模樣의 登山用品이라도 發見할라치면 기쁨 섞인 놀라움을 안고 다락房을 내려오곤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 밥 줘”하며 平穩을 되찾곤 했던 내 어린 時節 逸脫의 空間, 다락房. 

    아버지는 山行 準備를 할 때면 다락房을 하루에도 몇 番씩 오르내렸다. 4泊 5日 程度의 放學 山行에는 바로 위 오빠와 언니도 자주 同行했다. 背囊에 챙겨야 할 짐을 配分하는 일도 아버지의 몫이었는데, 背囊 무게는 막내인 내가 堪當하기에는 만만찮게 무거웠다. 나의 가벼운 抗議에 아버지는 “네 짐은 漸漸 가벼워질 것이니라”고 했다. 4泊 5日 동안 먹을 飮食 材料와 道具로 꽉 찬 언니 오빠의 背囊과는 달리, 내 背囊엔 쌀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背囊은 漸漸 가벼워졌지만 山行은 갈수록 힘들었다.
     
    放學 山行은 便安하고 多情한 無等山을 떠나 全國의 名山 巡禮로 이어졌다. 겨울 雪嶽山에서 아이젠을 하고도 危險한 벼랑길을 지나갈 때면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아버지가 앞장섰다. 바로 뒤에 내가, 내 뒤에 언니와 오빠가 뒤따랐다. 아버지는 아무리 危險한 氷板길이 나와도 앞서갈 뿐 “이곳, 操心해라”는 한 마디 外엔 돌아보는 法이 없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뎌야 할 내 발걸음은 내가 決定해야 했다. 그렇게 處女 적까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낯선 山과 親해져 갔다. 

    이제는 해마다 혼자서 無等山을 오른다. 無等山은 어느 季節에 찾아도 多情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훨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山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져서이리라. 黎明을 뚫고 아버지와 함께 無等山 天王峯(只今은 登山 統制 區間이지만)을 오른 어느 해이던가, 떠오르는 새해 첫 太陽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똑같은 해이련만 유난히 붉구나. 어느 때보다 모두의 念願이 뜨거워서겠지. 해는 저절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어둠이라는 두꺼운 알을 뚫고 孵化하는 듯하구나.” 植民地 時代와 獨裁 政權, 그리고 그 끔찍한 光州抗爭 中에도 끝까지 敎育 民主化를 貫徹해나간 아버지의 눈에 太陽은 그리 보였나 보다. 

    증심사에서 出發해 중머리재와 장불재를 거쳐 서석대에 오른다. 물결처럼 겹겹이 이어지는 山 稜線을 暫時 바라보다 中峯으로 돌아 桐華寺터 길로 접어든다. 아버지와 즐겨 찾던 코스다. 桐華寺터 길로 접어들면 人跡도 없고 고즈넉하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주나무 한 그루를 만나면 無心히 안아본다. 차가운 몸과 마음이 따스해진다. 無等山에는 아버지가 있다. 雪嶽山에도 白雲山에도 智異山에도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 뒤를 따르는 내가 있다. 山은 내게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강맑실
    ● 1956年 光州 出生
    ● 四季節出版社 代表
    ● 한국출판인회의 山岳會 前 會長
    ● 한국출판인회의 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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