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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의 天國’ ‘農夫의 結婚式’|新東亞

‘게으름뱅이의 天國’ ‘農夫의 結婚式’

피테르 브뢰헬

  • 박상희 | 샤론精神健康硏究所 所長

    入力 2015-08-20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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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름뱅이의 천국’ ‘농부의 결혼식’
    “다 먹고 살자고하는 일이지”. 이 말은 우리가 日常에서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만큼 먹는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매우 重要한 일입니다. 人間 삶의 基本을 이루는 것은 ‘衣食住(衣食住)’입니다. 衣食住 가운데 어느 게 가장 重要하냐는 물음은 모두 다 重要하기 때문에 事實 意味 없는 質問일 수 있지만, 우리 社會에서 ‘옷’과 ‘집’으로 대표되는 ‘의(衣)’와 ‘週(住)’와 比較해 ‘飮食’으로 대표되는 ‘式(食)’은 相對的으로 注目을 덜 받아왔습니다.

    아마도 그 까닭은 옷과 집이 自身의 社會的 位置를 드러내기 때문에 神經을 많이 쓰는 反面, 飮食은 適當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먹방’ ‘쿡放’과 같은 料理 프로그램이 最近 우리 社會에서 相當한 人氣를 끌고 있다는 點입니다. 勿論 옛날에도 저녁 食事時間에 料理 프로그램이 放映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큰 人氣를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왜 먹放과 쿡放이 갑자기 人氣를 끌게 된 것일까요. 이런 自刎을 하다보니 먹는 것과 飮食을 다룬 美術 作品은 어떤 게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을 게 至賤으로 널린 곳

    飮食을 畫幅에 담은 作品 中 제게 가장 印象的인 그림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1525年頃~1569)의 ‘게으름뱅이의 天國’입니다. 브뢰헬은 16世紀 플랑드르 繪畫를 代表하는 畫家입니다. 브뢰헬은 흔히 ‘農民의 브뢰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農民의 生活相을 많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또 브뢰헬 家族은 모두 畫家이기도 했습니다. 첫째 아들 피테르 브뢰헬과 둘째 아들 얀 브뢰헬 모두 有名한 畫家가 됐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이름이 같아서 아버지는 臺(大) 피테르 브뢰헬, 첫째 아들은 소(小) 피테르 브뢰헬로 불립니다. 여기서 다루는 이는 勿論 아버지 피테르 브뢰헬입니다.



    注目할 것은 브뢰헬이 活動한 時期가 16世紀라는 點입니다. 브뢰헬은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와 같은 時代의 畫家입니다. 神話와 宗敎가 이들의 主要 主題였던 것과 比較할 때, 農民 生活을 다룬 브뢰헬의 畫風은 매우 이채롭습니다. 勿論 브뢰헬 亦是 宗敎的 敎訓을 담은 作品을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俗談’ ‘農夫의 結婚式’ ‘눈 속의 사냥꾼’ 等 그가 남긴 主要 作品들을 보면 브뢰헬은 매우 現實的인 畫家였습니다.

    이러한 畫風의 差異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라는 地域的 差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敎皇廳이 있는 이탈리아는 基督敎로부터 큰 影響을 받은 反面,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支配를 받았지만 16世紀 유럽의 産業을 主導했습니다. 브뢰헬이 活動한 都市는 앤트베르펜과 브뤼셀인데, 앤트베르펜은 當時 유럽 經濟의 中心地였습니다.

    獨逸 뮌헨 알테피나코테크에 있는 ‘게으름뱅이의 天國’(The Land of Cockaigne, 1567)은 獨特한 作品입니다. 이 그림은 플랑드르 地域에 傳承된 이야기와 關聯됩니다. 傳해 내려온 當時의 어느 詩(詩)는 먹을 게 豐盛한 땅을 게으름뱅이들의 天國으로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돼지가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며, 구워진 거위가 접시 위에 놓였습니다. 집 울타리는 소시지로 이뤄지고, 지붕에는 빵이 널렸으며, 뒤便에는 牛乳가 江처럼 흐릅니다. 한마디로 먹을 게 至賤으로 널린 곳, 그곳이 바로 게으름뱅이의 天國이라는 것입니다.

    作品 한가운데는 農民, 軍人, 學者를 象徵하는 세 사람이 作品 題目처럼 게으르게 누워 있습니다. 當時 社會 階層을 代表하는 이들입니다. 이들 모두 먹을 게 이렇게 널려 있으니 굳이 분주하게 움직일 必要가 없습니다. 社會를 構成하는 모든 이가 더없이 게으르고 懶怠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게으름뱅이의 天國이라는 메시지입니다.

    食慾은 欲望의 中心

    브뢰헬은 왜 이 作品을 그린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見解가 提示됐습니다. 어떤 이는 當時 貧困한 現實에 對해 먹을 게 豐足하길 바라는 所望을 담았다고 봤고, 어떤 이는 플랑드르가 繁榮하던 時節이라 豐足한 現實을 反映했다는 反對의 解釋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브뢰헬이 게으르고 貪食하는 者들에게 警告하는 敎訓을 안겨주려 이 그림을 그렸다고 主張했습니다. 世上 그 어디에도 이런 天國이 存在하지 않으니 게으르지 말고 熱心히 일하라는 道德的 敎訓이 담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解釋하든 ‘게으름뱅이의 天國’은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高尙한 主題가 아니라 먹는 飮食에 關한 日常的인 主題를 諧謔的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먹는 것은 重要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重要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먹는 것은 生命과 直結됐기 때문입니다. 이 點에서 最近 우리 社會의 먹放과 쿡放 烈風은 자연스러운 現象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먹放 烈風의 背景은 現代社會의 特性인 ‘欲望’이라는 時代的 흐름입니다. 오늘날 人間의 欲望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西洋 歷史는 中世를 支配한 ‘神의 時代’에서 近代를 支配한 ‘理性의 時代’로 變化했고, 그것은 다시 脫現代를 支配하는 ‘欲望의 時代’로 變化해왔습니다.

    이런 欲望의 中心을 이루는 것은 食慾이 아닐까요. 내가 只今 먹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새로운 食慾을 刺戟 받기도 합니다. 一種의 ‘欲望의 代理滿足’李 먹放 烈風에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먹放 烈風은 現代人이 받는 極甚한 精神的 스트레스를 드러내주는 現象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精神的으로 견디지 못할 만큼의 무게를 堪當해야 할 때 빠른 滿足을 줄 수 있는 肉體的인 기쁨이나 快樂을 찾는 傾向이 있습니다. 이런 傾向이 過度하게 擴張될 때 病理的으로 드러나는 現象은 主로 性(性)과 關聯된 疾患이지만, 먹는 것과 關聯된 疾患도 꽤 많습니다. 相談사인 저는 精神的 苦痛을 이기지 못해 深刻한 食餌障礙를 앓는 수많은 사람을 봤습니다.

    畫家는 果然 무엇을 그려야 할까요. 高尙한 美의 再現圖 重要하지만, 日常의 喜怒哀樂을 表現하는 것도 意味 있는 일이 아닐까요. 當代의 다른 畫家들과 比較할 때 브뢰헬이 平凡한 이들의 日常을 畫幅에 담은 理由가 이러한 洞察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먹放·쿡放 烈風의 心理

    먹放 烈風을 이은 쿡放 烈風도 바로 이런 ‘日常의 再發見’이라는 意味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쿡放 烈風이 일어난 까닭은 먹放 烈風과는 多少 다릅니다. 먹放이 個人의 欲望과 精神的 苦痛과 關聯이 있다면, 쿡放은 社會的 狀況과 더 關聯돼 보입니다. 여러 사람은 最近의 景氣 不況과 1人 家口의 增加가 쿡放 烈風을 가져왔다고 指摘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집밥’李 外食보다는 低廉합니다. 빠듯한 生活을 하는 大多數의 사람은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습니다. 그러니 싼 材料를 가지고도 맛난 飮食을 만들 수 있도록 코치해주는 쿡放에 魅了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이들의 境遇 反復되는 買食에 지치게 됩니다. 홀로 食堂에 가서 외롭게 食事하느니 TV 속의 셰프와 함께, 或은 아프리카 TV와 같이 畵面 속에서 많은 사람과 實時間으로 疏通하면서 料理를 만들어 먹는 方式을 擇합니다.

    또한 主體的 觀點에서 볼 때, 飮食을 直接 만드는 것은 多少 번거롭지만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 人間은 무엇인가를 만들 때 創造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게 엄청난 藝術 作品의 創造일 必要는 없습니다. 平凡한 집밥이라도 精誠 들여 만드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줍니다. 쿡放 烈風에는 이러한 複合的인 要因들이 結合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뢰헬의 ‘農夫의 結婚式’(Peasant Wedding, 1568) 亦是 먹는 것을 보여주는 作品입니다. 잔칫床에는 粥과 麥酒가 놓였고, 結婚式에 參與한 祝賀客들이 먹고 마시며 흥겨운 時間을 보냅니다. 作品 한가운데 오른쪽에는 新婦가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傳統社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結婚式 風景과 아주 類似합니다. 브뢰헬은 農夫로 假裝하고 시골에 가서 結婚잔치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作品에는 이러한 그의 體驗이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美術史 博物館에 있는 ‘農夫의 結婚式’을 두고도 ‘게으름뱅이의 天國’에서처럼 見解가 엇갈립니다. 한便에선 브뢰헬이 이 그림을 그린 理由가 當時 農民의 어리석음을 諷刺하고 꾸짖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特히 이 作品은 大食(大食)을 批判하는 作品이라고 解釋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便에선 이러한 見解가 지나치게 道德主義的 視角이라고 主張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粥과 麥酒가 披露宴의 主 메뉴입니다. 이런 素朴한 披露宴의 모습은 오히려 農民 生活에 對한 브뢰헬의 따뜻한 視線과 共感, 그리고 유머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게으름뱅이의 천국’ ‘농부의 결혼식’
    農民에게서 聖者를 보다

    제가 보기에 아마도 眞實은 이러한 두 解釋 中間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農民의 삶이 갖는 素朴함과 소란스러움, 그런 共同體的 情緖에 共感하면서도, 同時에 그것이 지나치게 消費的이고 享樂的인 方向으로 흐르는 것에 對해 道德的인 警告를 하려 했던 게 브뢰헬의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브뢰헬의 作品을 볼 때마다 繪畫의 意味에 對해 그가 품은 생각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브뢰헬은 이 企劃에서 다룬 적이 있는 엘 그레코와 同時代人입니다. 브뢰헬이 16世紀 全般을 代表하는 畫家였다면, 엘 그레코는 16世紀 後半을 代表하는 畫家입니다. 엘 그레코는 宗敎的 熱情으로 가득한 畫家입니다. 그는 恩惠와 感動이 넘치는 宗敎畫를 우리에게 膳物했습니다. 하지만 브뢰헬은, 비록 基督敎의 道德的 敎訓을 重視했더라도, 農民을 包含한 當時 사람들의 日常에도 큰 關心을 가졌습니다.

    브뢰헬에겐 每日의 日常이 宗敎生活 못지않게 重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點에서 브뢰헬은 제게 큰 感動을 안겨줍니다. 늘 비슷하고 지루한 日常을 所重히 생각하고 默默히 最善을 다하는 平凡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宗敎的인 感動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브뢰헬이 그린 거칠고 素朴한 農民들의 얼굴과 손에서 엘 그레코가 그린 聖스러운 聖者의 얼굴과 손을 보았다고 한다면 제가 誇張하는 것일까요.



    박상희

    ‘게으름뱅이의 천국’ ‘농부의 결혼식’
    ● 1973年 서울 出生

    ● 이화여대 基督敎學科 文學博士, 美國 스탠퍼드대 社會學科 房文學者

    ● 現 샤론精神健康硏究所 所長, JTBC ‘事件班長’ 固定 패널

    ● 著書 : ‘自己對象 經驗을 통한 逆機能的 하나님 表象의 變化에 對한 硏究’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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