混潮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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混潮 시게루
出生地 日本 , 효고현
服務 일본 제국 육군 군기 日本 帝國 陸軍
服務期間 1894年 ~ 1936年
最終階級 대장 大將(大?)
指揮 日本 帝國 陸軍 第10師團
關東軍 司令官
主要 參戰 러日 戰爭
시베리아 出兵
中日 戰爭

混潮 시게루 ( 日本語 : 本庄 繁 , 1876年 5月 10日 ~ 1945年 11月 30日 )는 日本 帝國 日本 帝國 陸軍 軍人 , 華族 이다. 作爲 男爵 . 日本 帝國 陸軍 第10師團長· 關東軍 司令官·侍從武官長 等을 歷任하였으며, 中日 戰爭 當時에는 陸軍 大將이었다.

1896年 9月에 日本 陸軍士官學校 에 入學해 1897年 11月에 卒業, 1898年 6月에 陸軍 步兵 少尉로 任官했다. 以後 步兵 第4旅團長, 陸軍 無關, 第10師團長을 거쳐 1931年 8月에 關東軍 司令官과 軍事참衣冠에 次例로 올라 滿洲事變의 頂點에 섰다. 第2次 世界大戰 直後인 1945年 11月 聯合軍 最高司令部(GHQ)에서 逮捕令이 내려졌고, 11月 30日 割腹으로 自殺했다.

生涯 [ 編輯 ]

混潮 시게루는 1876年 , 효고현 에서 農夫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6年 9月에 日本 陸軍士官學校에 入學해 1897年 11月에 卒業, 1898年 6月에 陸軍 步兵 少尉로 任官되었다. 混潮의 動機 中에는 마사키 振子部로 (眞崎甚三?),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아라키 사다오 (荒木貞夫), 마쓰이 이와네 (松井石根) 等 後에 日本 陸軍 의 將星이 되는 人物들이 있었다.

混潮는 中尉로 進級해 1902年 부터 陸軍大學校에 入敎했지만 러日 戰爭 을 理由로 中退하였고, 1906年 에 다시 들어가 다음 해 11月에 卒業하였다. 卒業 後에는 參謀 本部에서 勤務하였다. 參謀 本部에 勤務할 當時에는 參謀本部원의 資格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主宰하기도 했다. 後에 그는 參謀 本部 지나 課長이 되었고, 1919年 步兵 第11聯隊長으로 옮겨가 시베리아 出兵 에 加擔하였다. 出兵이 끝난 直後에는 장쭤린 (張作霖) 軍事 顧問을 맡았다.

그는 步兵 第4旅團長, 陸軍 無關, 第10師團長을 거쳐 1931年 8月 에 關東軍 司令官과 軍事 참衣冠에 次例로 올라 滿洲事變 의 頂點에 섰다. [1] 關東軍 司令官 時節에는 韓人애국단 의 유상근(柳相根)과 최흥식(崔興植)이 그를 暗殺의 對象으로 삼았으나 發覺되기도 하였다. [2] 1935年 에는 러日 戰爭 第1次 世界 大戰 , 滿洲事變 의 功을 認定받아 男爵 爵位를 授與받았고, 다음 해 4月 豫備役으로 編入되었다. 君을 退社하고 나선 1938年 4月에 새로 생긴 負傷兵 保護院 總裁, 1939年 7月부터 軍事 保護院 總裁가 되었고, 1945年에는 祕密顧問官이 되었다.

第2次 世界 大戰 直後인 1945年 11月, 聯合軍 最高司令部 에서 그에 對한 逮捕令이 내려졌고, 11月 30日 에 日本 陸軍大學 內 報道會 理事長室에서 割腹 自殺로 生을 마감하였다. [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史 이야기 21:解放 그날이 오면》143쪽~144쪽
  2. 《白凡逸志》240쪽
  3. 《日本帝國 興亡史 (우리의 눈으로 본)》298쪽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