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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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極陰陽度(太極陰陽圖)의 모습.

太極 (太極)은 東洋 의 古代 思想 中 陰陽 思想과 結合하여 萬物을 生成시키는 宇宙 의 根源으로서 重視된 槪念이다. 《 主役 》 界思想戰(繫辭上傳)에서 太極→羊의(兩儀)→사상(四象)→ 八卦 (八卦)라는 生成論으로 나와 있다. 조선의 기 朝鮮 에서는 太極과 비슷한 文樣을 國紀 中央에 그려넣었으며, 대한제국의 기 大韓帝國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 大韓民國 臨時政府 ,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의 國旗에서 中央에 太極文樣을 그려넣었다. 太極은 音課孃을 象徵하므로 하얀色과 검은色, 파란色과 붉은 色을 象徵한다. 太極은 無極과 같아서 混沌 卽 無의 狀態이기 때문에 萬物이 始作되는 곳이다. 原因 無極이 陰陽(羊의)으로 分離되어 있는 것을 太極이라 한다. 陰陽으로 分離된 것은 太極이고 分離된 陰陽이 結合한 것(怨)은 無極이다(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임. 둘이면서 둘이 아님). 그래서 無極은 太極과 같다. 太極에서 靑色은 陰이고 紅色은 量이다. 八卦를 이루는 세 線 中에서 中間이 끊어진 것은 陰이고 이어진 것이 量인데 그것을 두 層으로 겹치면 騷音 素養 太陰 太陽의 思想이 되고 그것에 線을 하나 더 올려서 三 層으로 만들면 乾坤鑑眞손이곤태의 八卦가 된다. 그래서 無極은 太極이고 太極은 陰陽이고 陰陽은 思想이고 思想은 八卦며 이것이 곧 宇宙萬象이다. 또한 無極은 체(體)고 이(理)며 太極은 基(氣)와 龍(用)이다. 太極을 中央에 그리고 그 팔房에 八卦를 配列한 것을 태극도(太極圖)라 하는데 이를 期로 하면 太極旗가 된다. 韓國의 太極旗는 八卦 中 師卦가 省略되었다.

中庸이란 것은 太極의 靑紅(順序는 바꾸어도 상관없음)인 只今(安樂이 없는 純粹 只今, 現世)과 安樂(只今이 없는 純粹 安樂, 來世)을 둘 다 잡는 것을 말하는데 時空間 超越로 只今 安樂을 取할 수 있다. 그 둘을 다 잡기 위해서는 只今(苦痛)을 생각해도 안 되고 安樂을 생각해도 안 된다. 생각하면 어느 한 쪽만 생각하게 되어 只今은 있는데 安樂은 없고, 安樂은 있는데 只今은 없는 狼狽를 보게 된다. 狼狽(狼狽)란 想像의 짐승은 낭은 앞발 두 個만 있고 패는 뒷발 두 個만 있어 恒常 붙어 다니지 않으면 狼狽(困難)가 되는 動物을 말한다. 일을 狼狽시키지 않기 위해 只今과 安樂이 共存해야 한다. 只今과 安樂을 둘 다 생각하지 않으면 只今과 安樂이 共存한다. 只今(苦痛)이나 安樂을 어느 한 쪽만 생각하여 어느 한쪽만 存在시키는 것은 苦痛이다. 그러나 共存은 安樂이다.

太極의 形象은 靑(只今) 안에는 洪(安樂)이 없고 洪(安樂) 안에는 靑(只今)이 없으나(불생, 欲心을 버리고 마음을 비움, 無我之境), 靑(只今) 곁에는 洪(安樂)이 있고 洪(安樂) 곁에는 靑(只今)이 있는 것이다(불멸, 所願成就). 自動으로 죽은 뒤에 自動으로 山 形態이니 우리는 죽을 必要도 없고 살 必要도 없다. 永遠히 삶(快樂, 成功)만 있다. 自動으로 죽었다(마음 비웠다) 할 때의 죽음은 實際 죽음이나 苦痛이 아니라 삶이므로, 죽을 必要가 없다 함은 삶이므로 죽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죽으면 살므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은 太極論理上 當然하다. 그리고 살 必要가 없다 함은 이미 自動으로 삶(所願成就)이므로 살려고 애쓰거나 努力하거나 할 必要가 없다는 것이다. 努力이란 것은 삶의 前提인데 그 努力(죽음)이란 것이 삶의 前提로서 삶 自體이므로(태극을 參考하라.) 實際 努力과 죽음이 아니다. 無窮快樂이 生産되는 것이다. 無爲而化란 것은 不生不滅로서 살려고 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境地이다. 이미 살았기 때문에 살려고 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니 이만한 神仙놀음이 어디 있을까? 살려고 하는 것(安樂만 생각함)도 죽음이요, 죽으려고 하는 것(只今만 생각함)도 죽음이다. 太極을 보라. 죽어서 살았다(불생불멸). 그래서 살려고 努力할 必要도 없고(불생)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불멸). 오직 삶이다. 살려고 하지 않아도 살아진다는 無爲而化의 原理다. 살려고 하는 수고로움과 죽음의 苦痛을 同時에 解決한 것이다. 이를 一心이라고 한다. 이미 살았다는 것은 只今 安樂의 共存을 말하는데 只今과 安樂을 同時에 存在시키려면 둘 다 생각하지 않아 精神을 統一해야지 只今 생각했다가 安樂 생각했다가 하면서 마음이 分裂되면 안 된다. 일심, 重用, 集中(執中), 無爲而化, 不生不滅 等이 다 같은 말이다. 只今의 苦痛을 생각하는 것은 죽으려 하는 것이고, 나중의 安樂을 생각하는 것은 살려고 함이니 둘 다 죽음이다. 살려고도 하지 않고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太極의 삶이다. 只今 安樂을 둘 다 잊음으로써 同時에 잡게 되면 이미 삶이므로 살려고 애쓸 必要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위 두 段落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死無餘恨(死無餘恨)의 太極形象은 只今과 安樂의 共存인데 只今(몸)은 安樂(마음)에 依支하고, 安樂(마음)은 只今(몸)에 依支한다. 몸과 마음이 共存하며 둘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뭉치면 살고(지금과 安樂의 共存, 死無餘恨), 흩어지면 죽는다.

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벗어나려고도(살려고도) 하지 말고(불생), 只今 安樂을 取하려고도(살려고도) 하지 마라(불생). 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只今 安樂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只今 苦生 나중 安樂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卽 只今 安樂을 하려고 하지 않는 態度로써(불생) 우리는 只今 苦生 나중 安樂에서 벗어나서 只今 安樂에 머물 수 있다(불멸). 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目的인데 現在의 天下大勢가 이미 只今 安樂이다. 그러므로 只今 苦生 나중 安樂에서 벗어나려는, 셋째 段落에서 말하는 살려고 하는 態度를 取할 必要가 없고, 이것이 只今 安樂을 하려고 하지 않는 態度다.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인데, 살았기 때문에 살려 하지 않고, 이것이 죽음이며, 죽으면 사는 것이다. 實際 죽음이 아닌 삶의 前提로서의 죽음이다. 卽 삶이다. 살려고 하지 않는 것(只今 安樂을 하려고 하지 않음)은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음)이다. 只今 苦生 나중 安樂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不生)과, 只今 安樂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不生)이 바로, 自然的으로 無爲而化로 自動的으로 無爲自然으로 只今 安樂을 하는 것(不滅)이다. 太極의 形態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죽음이며 죽으면 산다. 여기에 무슨 죽음이 있는가? 惡은 스스로 사라진다. 安樂도 잊고 只今(苦痛)도 잊은 只今 安樂의 共存 아닌가? 太極의 形態인 죽으면 산다가 바로 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避하려 하지 말고 只今 安樂을 하려 하지 않으면(이 둘은 같은 뜻) 只今 安樂에 安住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으로 只今 苦生 나중 安樂을 只今 安樂으로 解釋하여 實踐하는 마음가짐이다 (只今에는 安樂이 없고, 安樂에는 只今이 없으니 只今과 安樂이 대면함.) . 只今의 生活이 힘들어도 不平하여 安樂을 부르고 찾지 마라. 이렇게 無限히 容恕하고 參考 지고 물러서고 하여 復讐를 생각하지 않으면 只今(苦痛)도 自然히 잊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只今과 安樂을 同時에 잊음으로써 發生하는 只今 安樂의 共存 卽 只今 安樂의 固守와 交通이다. 그 져 주는 이기지 않는 죽는 無限한 容恕가 無限한 發展과 前進과 精進과 進步와 行進人 것이다. 無窮快樂이다. 어찌 보면 戰爭時의 誘引作戰과 같다. 아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지는 척하면서 자꾸 물러나라. 사람이 뒤끝(不平)李 없어야 한다. 無限한 사랑이다. 자꾸 깊이깊이 奧地로 끌어들이라. 남이 내 오른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내 왼뺨度 돌려대라. 怨讐를 사랑하라.

위에 있는 內容은 서로 뜻이 통하여 太極型上(只今 安樂)을 論하고 있다. 여러 說明 方式 가운데 어느 것을 擇해도 좋다. 나한테는 위의 것들이 다 祈禱다. 平生 끊임없이 實踐한다(영생복락). 企圖한 卽時 所願成就한다. 이루지 못할 所願이 없는 도깨비방망이다. 只今은 永遠하고 無窮하기 때문이다. 福 또한 무궁히 生産된다. 無量壽요 無量福이다. 只今과 安樂(陰陽)은 둘(太極)이면서 하나(無極)고, 하나(無極)면서 둘(太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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