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최재서
崔載瑞
作家 情報
出生 1908年 2月 11日 ( 1908-02-11 )
大韓帝國 黃海道 해주군
死亡 1964年 11月 16日 ( 1964-11-16 ) (56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立中央醫療院
職業 文學評論家·英文學者
活動期間 1930年 - 1964年
장르 文學評論·飜譯·英語英文學

최재서 (崔載瑞, 1908年 2月 11日 - 1964年 11月 16日)는 植民地 朝鮮 大韓民國 의 文學評論家 兼 英文學者이다. 號는 석경우(石耕牛), 筆名은 학수리(鶴首里), 상수시(尙壽施), 석경(石耕), 石經生(石耕生). [1]

生涯 [ 編輯 ]

成長 및 敎育 [ 編輯 ]

1908年 2月 11日 出生. 出生地는 黃海道 해주군 해주면 北行政 72番地. [1] 鄕里에서 小學校 過程을 마친 後 學業에 뜻을 품고 上京, 第2高等普通學校 (現 경복고등학교 )에 入學하였다. [2]

卒業 後 1926年 4月 경성제국대학 豫科 文科 入學, 1928年 修了. 同年 4月 경성제대 법문學部 英文科 入學, 1931年 3月 卒業. 同年 4月 京城帝大 大學院 進學, 1933年 3月 卒業. 以後 英國 런던大學校 遊學. [3] [4]

歸國 後 京城帝大 時節 英文學을 指導한 사토 기요시 敎授에게 實力을 인정받아 경성제대 법문學部 英語講師로 就任하였으나, 타 敎授들의 朝鮮人 起用 反對로 인해 不得已 講師職을 辭退하고 京城法學專門學校 英語講師로 자리를 옮겼다. [2] [5] 이에 絶望, 憤慨한 崔載瑞는 어느 늦은 밤 歸家해서는 "I have no country, I have no father, I have no money······" 하며 絶叫했다. [2]

법전 外에 보성전문학교 에서도 敎鞭을 잡았다. [3]

初中盤期 批評 活動 [ 編輯 ]

1930年代 初中盤 崔載瑞는 코스모폴리턴적 以上을 바탕으로 敎養의 企劃을 展開해나갔다. 崔載瑞는 英文學的 敎養과 植民地 現實 사이에 存在하는 隔差를 朝鮮文化 發展이라는 目標를 통해 解消하고자 했고, 外國文化 硏究者이기보다 朝鮮 文壇의 批評者를 自任하였다. [6]

崔載瑞의 批評은 西歐理論을 紹介·解說하고 朝鮮文學을 分析·指導하는 二元的 方式으로 展開되었는데 電子가 後者의 基準이 되었다는 點에서 緊密한 聯關 關係를 맺는다. [6]

崔載瑞의 批評的 立場은 카프 退潮의 雰圍氣와 맞물려 새로운 文學 建設을 向한 헤게모니 企劃의 性格을 띠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카프의 理念主義와 大衆文學의 感傷主義는 藝術性 未達의 象徵으로 朝鮮文學 發展을 沮害하는 要素였으며, 이를 代身할 方法論으로 헉슬리 , 루이스 等 理論을 變奏한 諷刺文學論과 心理的 리얼리즘論을 提示하였다. 이것은 英文學的 敎養에 根據한 理論이었기 때문에 朝鮮 文壇의 創作과는 乖離가 적지 않았으나, 當時 文壇에 新鮮한 理論的 刺戟을 주는 한便, 리얼리즘에 對한 論議를 活性化하는 契機를 마련했다는 點에서 意義가 있다. [6]

1930年 中盤 유럽의 知性論이 파시즘的 野蠻과의 對決을 標榜하던 것과 別個로 崔載瑞는 朝鮮 文壇을 겨냥하여 文學的 知性論을 展開한다. 여기서의 知性은 作品 構成에 必須的인 作家의 知的 能力을 말하는데, 文學傳統의 修鍊과 敎養의 習得을 통해서만 達成되는 一種의 資質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個人의 自律的 完成에 對한 信念만으로는 戰爭으로 인한 時代的 問題에 對應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모럴論을 통해 文學과 政治의 調和 可能性을 打診하며, 自身이 旣存에 收容했던 人文主義的 敎養, 精神分析學이라는 科學을 뛰어넘을 새로운 原理를 希求하는 한便, 當時 유럽에서 擡頭된 파시즘 文學을 批判하였다. 이는 그러나 理論의 次元에서 提起되었을 뿐 實際 創作의 方向을 提示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小說樣式論은 이러한 狀況을 小說의 技法과 形式論으로써 解決하려 한 努力의 一環이다. 中篇小說을 통해 短篇과 長篇, 藝術性과 大衆性이라는 朝鮮 文壇의 暗默的 二分法을 解決하고자 하였으나 1930年代 後半에 이르면 長篇小說을 통해 社會成果 歷史性을 獲得하고자 하는 變化를 보인다. [6]

人文社 設立과 《人文評論》 [ 編輯 ]

1937年 12月 大學을 떠나 [7] 인문사 를 創立하였다. 社長 崔載瑞의 業務는 企劃은 勿論 다양한 實務 領域을 包括했다. 刊行物 校正을 直接 보고 小賣商을 訪問해 書籍 委託을 打診하는 等 營業도 擔當했다. 최재서 外의 構成員에 對해서는 昭詳한 바가 없다. 인문사 出版物의 筆陣은 경성제대 出身 文人·學者, 《 朝鮮日報 》 關係者, 外國文學 專攻者, 마르크스주의자 等 다양했는데, 英文學者 미하라 요시아키는 이런 左右糾合적 體制를 " 人民戰線 적 文化政治 프로젝트"라고 일컬었다. 이광수 와 같은 巨大出版者本이 選好한 선대 文人은 이에 除外되었다. [8] 人文社는 1938年 4月부터 41年 4月 《 人文評論 》 終刊까지 單行本 16卷, 年鑑 4卷, 《人文評論》 通卷 16號를 出刊했다. 人文社가 出刊한 文學서의 類型은 時局協力文學, 大衆文學, 純文學으로 分類할 수 있다. [9] 《人文評論》李 1941年 4月 終刊을 맞이한 以後 人文社는 새로운 出版物을 내지 못한 채 《國民文學》 創刊으로 轉機를 맞이, 旣存의 合資會社가 아닌 株式會社로 再出發하였다. [10]

人文社의 核心 企劃은 文學의 商業化와 俗物 敎養의 普及에 反擊을 加하는 全作長篇小說 總署와 世界名作小說 叢書 發刊에 있었다. 최재서, 김남천 , 林和 를 中心에 둔 批評家 集團은 小說의 發表 形式을 바꿈으로써 商業的 저널리즘의 攻勢를 防禦하고 새로운 장르 實驗을 통해 世態와 內省의 世界로 轉落한 리얼리즘을 更新하고자 했다. 이는 作家 自身의 覺醒은 勿論 轉換期 現實을 올곧게 認識하고 展望하기 위한 方策이라는 點에서 文段의 고른 支持를 얻었다. [11]

1939年 10月 《人文評論》 創刊. 30年代 後半 유럽에서 파시즘이 得勢하여 人文 精神이 破産 宣告 直前에 놓였다는 觀測이 現實化되었고 日本의 支配 圈域에서는 새로운 理論的 支柱로 東亞新秩序 談論을 公式化하는 作業이 한창이었다. 카프 退潮로 인해 沈滯된 朝鮮 評壇은 무엇이 올바른 時代精神인지 헤매던 雰圍氣에 있었으나 政治的 論理에서 派生된 동아協同體論이나 世界史의 哲學을 檢證 없이 受容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狀況에서 創刊된 《人文評論》은 世紀에 要求되는 認識論을 찾는 한便 現實 再現과 歷史的 展望의 養畜을 擔當할 敍事文學 更新의 方法論을 點檢하는 場으로 기능했다. [12] 《人文評論》의 創刊號는 東亞共通의 文化를 宣言的으로 强調했으나 旣存의 西歐 普遍主義에 近件韓 世界文學이라는 틀이 維持되는 가운데 동아를 中心으로 하는 새로운 世界性의 摸索이 進行되는 樣相을 보였고 때로는 相互矛盾되는 世界性 或은 이에 對한 志向이 共存하기도 했다. [13] 崔載瑞는 동아新秩序를 批評의 原理로 受容하는 것에 대단히 신중한 態度를 보였고, 特有의 理論的이고도 中立的인 論調를 維持하였다. [14]

1940年 6月 獨逸에 依해 파리가 陷落되자 崔載瑞와 같은 西歐 文化의 傳統 속에 파시즘과 맞서 싸울 源泉이 있다고 믿었던 知識人들은 近代의 終焉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 같은 해 11月 演說文에서 崔載瑞는, 近代精神으로서의 自由主義와 個人主義가 르네상스의 生命靈을 잃었다, 自由主義의 文學的 解釋인 個性 追求, 個性 表現도 奇拔한 個性과 病的인 開城, 反抗的 個性으로 轉落했다, 오늘날의 病弊는 作家의 孤立으로 생겨난 結果이므로 個人 意識 代身 一般 意識을 追求할 必要가 있다고 主張했다. 過去 30年代 中盤 主知主義 文學論을 展開하며 主張한 內容과 거의 同一하지만, 未確定된 範疇에 不過했던 一般 意識이 國民 意識으로 確實히 規定되었다. 以後의 批評에서 崔載瑞는 새로운 目標를 "文化主義의 反省", "文化의 國民化"로 要約했다. 여기서 文化主義는 近代 個人主義와 樂觀的 進化論의 産物로 文化的 價値의 永遠性과 自律性을 重視하는 態度를 말한다. 一般 國民들의 生活 條件과 知識人들의 個人主義的 文學 精神이 乖離돼 文學 亦是 死滅 危機 앞에 놓였으니 國家以上이라는 새로운 基準을 適用해 이 같은 問題들을 解決하고 國民文化를 建設하자는 것이 그의 主張이었다. [16]

朝鮮에서 '文化主義'는, 西歐의 生活 形式을 表面的으로 模倣한 輕薄한 '文化生活'과 對比되는 것으로 西歐의 그것처럼 否定的 意味는 띠지 않았다. 崔載瑞는 自己 땅 없이 코스모폴리彈的 大氣에서 헤매던 朝鮮의 文化主義者에게도 國民文化라는 安息處가 생겼음을 强調했다. 이에 따라 崔載瑞는 國策 協力을 새로운 批評 課題로 闡明하며, 다만 批評이 當局의 指示를 그대로 받아쓰지 말 것을 端緖로 달았다. 아널드의 말처럼 當代 最高의 思想과 知識을 社會 全般에 擴充, 偉大한 創作 時代를 準備하는 것을 批評의 任務로 삼아야 한다고 主張했다. 이 亦是 過去 〈朝鮮文學과 批評으 任務〉에서 强調된 바였으나, 西歐의 人文主義 傳統이 日本의 國民文化로 代替되었다는 差異가 있을 뿐 文化의 以上이라는 目標를 내려놓지 않았다. [17]

《國民文學》 [ 編輯 ]

1941年 11月 《 國民文學 》 創刊. 《國民文學》의 發行人 兼 編輯人은 최재서, 發行社는 人文社였다. 1940年 8月 《 東亞日報 》와 《朝鮮日報》, 1941年 4月 《 文章 》와 《人文評論》이 廢刊된 狀況에서 《國民文學》은 朝鮮文壇 그 自體라고 할 수 이는 位相을 獲得했다. 總督府 警務當局은 《國民文學》으로의 잡지 一元化를 用紙 節約 때문이라고 했으나 實은 이를 통해 朝鮮文壇의 革新을 一擧에 解決하려는 意圖를 지니고 있었다. 創刊號에서 崔載瑞는 國民文學을 日本의 國家 以上을 原理로 삼아 東洋文學을 指導할 使命을 띤 文學으로 定義하며 이제까지 朝鮮 文壇에 蔓延했던 創作 精神의 龜裂과 主題 貧困을 解決하기 위해서는 國民的 立場에 서서 國民 生活과 國民的 感情에서 素材와 駐在를 發見해야 하며 이것이 朝鮮의 有能한 作家를 救援할 수 있는 唯一한 方法이라고 主張했다. [18]

《國民文學》 創刊과 同時에 文壇의 共通語가 朝鮮語에서 日本語로 바뀌었다. [19] 國語 專用이라는 總督府의 方針에 積極的이었던 최재서였지만 創作 用語 問題는 最大 苦悶거리였다. 小說이라는 장르는 그에 있어 時代的 危機에 맞설 美學 探究의 契機를 提供해왔으나 서투른 日本語로 쓰인 小說에는 어떠한 美學도 發見할 수 없었다. "朝鮮의 文學은 朝鮮의 말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었던 최재서였기에 朝鮮語 藝術의 存立을 打診해보았으나 學務課長에게 國語 常用을 더욱 徹底히 하라는 소리만 들었다. [20]

1942年 5·6月 合倂號에서 《國民文學》은 最終的으로 "國語 雜誌로의 轉換을 決議"했다. 이것은 1942年 5月 8日의 朝鮮人 徵兵制 實施 決定에서 비롯되었다. 崔載瑞를 비롯한 知識人들은 徵兵制를 朝鮮人에게 日本人과 똑같은 國民의 地位를 附與해주는 機會로 보았다. [20]

問題는 늘 簡單明瞭하였다. ――너는 日本人이 될 自身이 果然 있는가. 이런 質問은 다시 다음과 같은 疑問을 일으켰다. 日本人이란 무엇인가? 日本人이 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日本人이기 爲해서는, 朝鮮人이라는 것을 어떻게 處理해야 하는가?
이들 疑問은 知性的인 理解나 理論的인 造作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마지막 障壁이었다. 그렇지만 이 障壁을 뛰어넘을 수 없는 限, 八紘一宇度 內鮮一體度 大東亞共榮圈의 確立도 世界新秩序의 建設도, 통틀어 大東亞戰爭의 意義조차 아리송해진다. (...)
여기서 나 自身의 體驗을 말해보자. 나는 昨年 末頃부터 여러가지로 나 自身을 整理하리라고 깊이 마음먹고 새해 첫날에는 于先 그 始作으로 創氏를 했다. 그리고 2日 아침에는 이것을 告하기 위해 조선신궁에 參拜하였다. 그 앞에 깊이 머리 숙이는 瞬間 나는 맑은 大氣 속에 빨려들어 모든 疑問에서 解放된 느낌이었다.
――日本人이란 天皇에 奉仕하는 國民이다. [21]

《國民文學》 1944年 4月號, 〈받들어 모시는 文學〉

1943年을 전후해 《國民文學》 紙面에 日本 古典을 紹介分析하는 글이 活潑히 揭載되었다. 메이지 時代 國家만들기의 一環으로 만들어진 이들 日本 古典은 西歐的 世界觀과 敎養을 代身할 純粹한 日本的 報告로 看做돼 새롭게 읽혔다. 《國民文學》은 朝鮮 知識人의 思想 改造를 위해 日本 古典 시리즈를 企劃하고 同時에 國學·國學者, 朝鮮 實學者에 對한 連載를 始作했다. 이러한 雰圍氣 속에 崔載瑞는 古代를 媒介로 새로운 國民文學 理論을 構想했다. 사토 기요시의 市에서 힌트를 얻어 曇徵 惠慈 에서 內鮮一體의 論理化 根據를 抽出했다. 崔載瑞는 쇼토쿠 太子 를 따라 殉死했던 惠慈의 信念과 精神에 注目, 쇼토쿠 太子를 좇아 朝鮮, 中國에서 모인 學者, 僧侶, 藝術家들이 東洋文化의 精髓를 만들어 오늘날 日本 文化의 土臺가 되었다고 했다. 第2回 대동아文學者大會 에 參席한 崔載瑞는 이 자리를 쇼토쿠 太子를 思慕해 各地에서 學者, 藝術家가 모여들었던 1390年 前의 歷史에 견주어 描寫했다. 以後 創氏改名 後 모토오리 노리나가 의 〈 職비令 〉을 土臺로 마침내 天皇으로의 歸依를 決議하였다. 이에 이르러 崔載瑞는 批評이라는 論理的 글쓰기를 繼續할 수가 없었다. 評論으로는 表現할 수 없는 主題를 다루기 위해 崔載瑞는 歷史의 地平을 選擇, 新羅를 素材로 한 小說들을 쓰며 日本語 小說家로 轉身하였다. [22]

光復 後 [ 編輯 ]

1946年 海峯 김형익 이 設立한 시사영어硏究會라는 團體에 關與하였다. 같은 해 11月 1日 東亞大學校 에서 敎授陣 改編補强을 위해 學生 및 職員들이 上京, 當時 演戱大學校 英文學 課長이었던 崔載瑞를 招聘했다. 徐廷柱 가 그를 따라 그해 가을 釜山으로 함께 내려갔다. 崔載瑞의 自筆 履歷書에 따르면 東亞大에서는 1947年 4月 1日부터 1948年 3月 31日까지 在職했다. [23]

1949年 8月 反民當然犯 으로서 反民特委 에 召喚되어 問招를 받았으나, 起訴猶豫 處分을 받고 釋放되었다. [23]

以後, 이상섭 의 證言에 따르면 경복 同門인 배동호 敎授의 薦擧를 통해 1949年부터 60年 後半까지 十餘年 동안 延世大學校 에 在職하였다. 이를 통해 社會的인 地位를 保障받았고, 또한 生活의 安定을 찾았다. 연세대에서 崔載瑞는 主로 文學槪論, 英文學士, 英國文藝批評家 等 講義를 擔當하였고, 이때 쓴 講義 原稿를 바탕으로 1957年 《文學原論》, 1959年 《英文學士》를 次例次例 發刊하였다. 연세대에서는 自筆 履歷書에 따르면 1949年 9月 1日부터 1960年 9月 30日까지, 《연세대학교 百年史, 1885-1985》에 따르면 1947年 9月 1日부터 1961年 3月 19日까지 在職했다. [23]

韓國戰爭 勃發 後 서울이 占領됐을 무렵 逃避生活을 하다 12月 25日 大邱로 避難갔다. 戰時에 崔載瑞는 文藝誌面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에 실린 맥아더 關聯 記事를 論評, 再構成한 《매카더 旋風》, 맥아더 評傳의 飜譯書 《英雄 매카더 將軍》을 次例次例 發刊하였다. [23]

1960年 4·19 革命 以後 氣勢를 몰아 學生들은 御用敎授를 逐出하고 學院運營 正常化를 要求하였다. 연세대에서는 敎授 3人에 對한 理事會의 解任 處分을 不當하다고 抗議하여 學生에 依해 同盟休學이 벌어졌다. 學生들은 敎授 3人에 對한 解任 卽刻撤回, 李寫眞 改編, 當時의 總長署理 美國人 언더우드를 代身해 韓國人 總長 選出을 要求했다. 이에 따라 언더우드의 舍宅을 襲擊, 器物을 破壞하는 過激行動을 벌였다. 이에 崔載瑞를 비롯한 文科大學 敎授 7人은 "暴力 앞에 敎權이 설 수 없다"는 趣旨의 聲明書를 發表, 辭表를 提出하나 理事會의 勸告로 이를 撤回하고 出講했다. 敎授 및 學生은 이를 背信으로 看做, 敎授들은 講義를 中斷하고, 學生들은 敎授 7人의 講義를 拒否했다. 이로 말미암아 崔載瑞는 연세대를 辭職하고 東國大學校 로 前任하였다. 동국대에서는 自筆 履歷書에 따르면 1960年 10月 1日 大學院長에 任用, 1961年 10月 15日 辭職하였다. 《東國大學校百年史》에서는 1960年 11月 25日 任用되었다고 傳한다. 1963年 4月 한양대학교 敎授에 赴任, 死亡할 때까지 在職하였다. [23]

저널리즘 方面에서 1960年 정비석 의 《革命前夜》 筆禍事件 當時 이를 한番 다룬 것을 除外하면 光復 以來 當代 文學에 全혀 손을 대지 않았다. 現場 批評보다도 《 思想界 》 따위를 中心으로 理論 批評 性格을 띤 글을 寄稿하였다. [23]

光復 後 飜譯家로서 셰익스피어 의 《 햄릿 》, 《 아메리카의 悲劇 》, 《 朱紅글씨 》 따위를 力諫하였다. [23] 이 가운데 《햄릿》은 優秀한 飜譯으로 이름이 높다. [24]

1964年 11月 16日, 10年來(來) 持病으로 因해 國立中央醫療院 에서 50歲를 一期로 임종하였다. [1] [25]

史上 [ 編輯 ]

敎養主義 [ 編輯 ]

崔載瑞는 京城帝大 時節 自身을 朝鮮人으로 뚜렷이 認識했으며, 이에 對한 自尊心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이때의 글에 朝鮮이라는 範疇는 全혀 存在하지 않는다. 朝鮮人 學生, 卽 崔載瑞는 西歐-普遍이라는 範疇를 통해 朝鮮의 正體性을 가늠해보았을 테지만, 日本의 國家學을 志向하는 帝國大學의 아카데미즘 안에서는 表出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觀念論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6]

崔載瑞는 校門을 나섬으로써 英文學이라는 普遍에서 떨어져버렸으나, 驛으로 이를 契機로 朝鮮文學을 發見할 수 있었다. 帝國大學 內에서 엘리트로서의 自身의 位置를 證明해준 그의 敎養은 朝鮮의 現實과 맞닥뜨리며 朝鮮을 向한 敎化의 媒介體로 轉換되었다. 敎養의 原말人, 耕作 或은 栽培를 뜻하는 Cultura에서 由來하는 崔載瑞의 筆名인 석경(石耕, 돌밭[=朝鮮 文壇]을 감), 석경우(石耕牛, 돌밭 가는 소)는 崔載瑞의 敎養主義的 信念을 集約한 것임에 다름없다. [26]

崔載瑞를 비롯한 當代 外國文學專攻者들은 外國文學을 參照함으로써 朝鮮文學의 모더니티 或은 普遍性에 이르는 길을 提示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活動分野를 共有했다. 한便 崔載瑞는 水準 以下의 外國文學 硏究者를 批判하며 自身을 餘他 專攻者들과 區別지었다. 그가 가장 問題時限 것은 이들이 쓰던 外國文學 紹介文이 參照物에 不過할 뿐 實際 朝鮮文學의 準據로까지 連結되지 못한다는 點이었다. 아울러 朝鮮의 新文學 樹立을 위해서는 西歐의 理論과 學說, 思想體系를 性急하게 借用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警戒해야 하며, 各樣各色의 理論이 橫行하는 "歐羅巴의 植民地"에서 벗어나기 위해 主觀을 갖고 外國文學을 輸入해야 한다는 것이 國民文學으로의 轉換 以前까지의 변함없는 信念이었다. [26]

光復 後, 批評家로서 1930年代 文壇에서 선보였던 傳統論과 敎養論을 다시금 꺼내들었다. 그는 韓國文學에 傳統이 不在하다고 認識했으며, 西歐敎養을 習得하는 것이 이를 克服하는 實踐的 代案이었다. 따라서 西歐文學의 古典에서 文學의 理念型을 抽出해 不在하는 傳統을 代身하고자 했다. 그러나 當時 韓國文壇에서 傳統은 民族이라는 분명한 警戒 속에서 思惟되었기에 西區 敎養으로써 傳統 不在를 메우겠다는 그의 主張은 크게 說得力을 얻지 못했다. [27]

批評原理 [ 編輯 ]

崔載瑞가 批評的 判斷의 根據로 삼은 것은 그리스·로마 時代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20世紀까지 이어지는 人文主義 傳統, 보다 直接的으로는 19世紀 英國 批評家 매슈 아널드 의 影響力을 바탕으로 展開된 近代영미批評의 系譜였다. 아널드는 Culture를 조화롭고 一貫된 性格을 지닌 것으로 論하며 個人 品性의 涵養과 더불어 共同體 維持를 위한 새로운 根據를 創出했다. 아널드의 理論은 20世紀에 이르러 , 엘리엇 , 리드 等에게 批判的으로 繼承되었으며, 第1次 世界大戰 以後 英國 社會의 混亂 打開를 위한 方法論으로 再整備되었다. 現代의 危機가 個人主義의 過度한 擴張에서 비롯되었다는 反省的 省察 속에서 20世紀 영미 批評家들은 個人을 規制할 原理를 古典的 秩序에서 求했다. 이들은 浪漫主義的 個性의 誤謬를 批判하면서도 根本的으로 人間 完成에 對한 信念을 버리지 않았고, 文學 傳統 안에서 危機를 解決하려 했다는 點에서 아널드적 文化 理想을 追求했다. 高度의 藝術性을 具備한 創作이 그 社會의 發展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했다는 點에서 崔載瑞는 아널드의 槪念을 이어받았다. [28]

흄과 엘리엇이 浪漫主義的 個性의 無限한 擴張을 古典主義的 秩序의 原理를 통해 解決하고자 했다면, 리드와 리처즈 는 精神分析學이라는 科學的 方法論을 導入하여 從來의 主觀的이고 偏頗的인 批評을 刷新하는 데 目標를 두었다. 崔載瑞는 이러한 傾向들을 主知主義 或은 主知的 批評이라는 말로 要約해 朝鮮文壇에 紹介했다. [29]

個人事 [ 編輯 ]

兄弟姊妹로 옥경, 國境, 보경, 애경이 있었으며 외아들이었다. [30] 父親 최경태(崔景台)는 海州에서 태一圓(台一園) 或은 過褒집으로 통한 3萬餘 坪 果樹園을 經營하였다. 父親의 富裕함은 海州에서 넷째가는 것으로 所聞이 나 있었다. [2] [31]

趣味로는 바이올린, 스케이트가 있었으며, 後날 上京했을 무렵 雄辯大會에서 메달을 탔다. [2]

單行本 目錄 [ 編輯 ]

著書
  • 《文學과 知性》(인문사, 1938) [32]
  • 《海外抒情詩集》(編, 인문사, 1938) [32]
  • 《朝鮮文藝年鑑》(共編, 인문사, 1939) [32]
  • 《朝鮮作品年鑑》(共編, 인문사, 1940) [32]
  • 《轉換期의 朝鮮文學》(轉換期の朝鮮文學, 一問, 인문사, 1943) [32]
  • 《新半島文學選集1·2》(編, 一問, 인문사, 1944) [33]
  • 《매카―더 旋風》(향학사, 1951) [33]
  • 《文學原論》(춘조사, 1957) [32]
  • 《英美名著逆株總서 1》(編, 韓日文化史, 1958) [34]
  • 《英美短篇小說鑑賞》(共編, 韓日文化史, 1959) [32]
  • 《英文學士 第1篇 古代·中世》(동아출판사, 1959) [34]
  • 《英文學士 第2篇 르네쌍스便》(동아출판사, 1959) [34]
  • 《英文學士 第3篇 셰익스피어》(동아출판사, 1960) [34]
  • 《崔載瑞評論集》(靑雲出版社, 1961) [32]
  • 《文藝四祖史》(共著, 어문각, 1962) [34]
  • 《增補 文學原論》(춘조사, 1963) [34]
  • 《敎養論》(編, 박영사, 1963) [33]
  • 《셰익스피어 藝術論》(을유문화사, 1963) [32]
  • 《Shakespeare's Art as Order of Life》(New York: Vantage Press, 1963) [34]
  • 《印相과 思索》(연세대학교 出版部, 1977) [33]
曆書
  • 《루소와 浪漫主義》(一門, 上·下, 改造文庫, 1939-1940) [32]
  • 《英雄 매카―더將軍》(일성당書店, 1952) [34]
  • 《朱紅글씨》(을유문화사, 1953) [33]
  • 《햄맅》(演戱춘추사, 1954) [34]
  • 《포우 短篇集》(韓日文化史, 1955) [34]
  • 《아메리카의 悲劇》(박영사, 1959) [32]
  • 《The Golden Treasury》(韓日文化史, 1963) [34]

各州 [ 編輯 ]

  1.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9).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 報告書 IV-18》.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164쪽.  
  2.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關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現代文化出版. 194-197쪽.  
  3. 친일인명사전編纂委員會 (2009). 《친일인명사전: ㅇ~ㅎ》. 民族問題硏究所. 762-763쪽.  
  4. 이혜진. “최재서 批評 硏究” .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182.  
  5.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최재서” .  
  6.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182-186.  
  7. 최지현. “世界文學의 飜譯과 近代 朝鮮의 敎養主義- <<海外抒情詩集>>(1938)을 中心으로 -” . 배달말. 배달말學會: 544-556.  
  8.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98-99쪽.  
  9.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03쪽.  
  10.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52쪽.  
  11.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22-123쪽.  
  12.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30-132쪽.  
  13.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92.  
  14.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108.  
  15.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113.  
  16.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86-187쪽.  
  17.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88-189쪽.  
  18.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89-191쪽.  
  19.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126.  
  20.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197-200쪽.  
  21. 金炳傑, 金奎東. 《親日文學作品選集 1》. 서울: 실천문학사. 389-390쪽.  
  22.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212-217쪽.  
  23. 老敏慧 (2016年 2月). “解放 後 최재서 文學批評 硏究” . 서울대학교 大學院: 8-15.  
  24. 권재현 (2004年 2月 15日). “‘햄릿’ 飜譯은 최재서 作品이 滿點…飜譯本 573種 評價” . 《東亞日報》.  
  25.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關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現代文化出版. 198쪽.  
  26. 서승희 (2010). “최재서 批評의 文化 談論 硏究” . 이화여자대학교 大學院: 21-25.  
  27. 老敏慧 (2016年 2月). “解放 後 최재서 文學批評 硏究” . 서울대학교 大學院: 79-80.  
  28.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65-66쪽.  
  29. 서승희 (2023). 《植民地 近代의 크리틱 : 1930~40年代 韓國文學批評, 制度, 敍事》. 소명출판. 50쪽.  
  30. 최보경 (2011). 〈태一圓 果樹園〉.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現代文化出版. 29-30쪽.  
  31. 崔載瑞 (1977年 8月 31日). 〈果樹園〉. 《印象과 思索》. 延世大學校 出版部. 52-54쪽.  
  32. 김윤식 (2009). 〈최재서 著作 目錄〉. 《崔載瑞의 國民文學과 사토 기요시 敎授》. 301-302쪽.  
  33. 이진영 (2008). “作家硏究資料”. 《작가세계》: 90-108.  
  34. 老敏慧 (2016年 2月). “解放 後 최재서 文學批評 硏究” . 서울대학교 大學院: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