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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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
金南天
北朝鮮國 文化宣傳省 隸下 文化藝術特報祕書官
(前 北朝鮮國 文化宣傳省 ?下 文化藝術特報秘書官)
任期 1949年 6月 1日 ~ 1950年 5月 20日
主席 金日成
副主席 김두봉
總理 金日成
副總理 박헌영
홍명희
金策

이름
別名 兒名(兒名)은 김효식 (金孝植)
身上情報
出生日 1911年 3月 16日
出生地 日帝 强占期 平安南道 成川
死亡日 1953年 8月 6日 ( 1953-08-06 ) (42歲)
學歷 日本 호세이 大學校 英語英文學科 除籍
經歷 北朝鮮 1期 最高人民會議 代議員
正當 無所屬

김남천 (金南天, 1911年 3月 16日 ~ 1953年 8月 6日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小說家 兼 文學評論家이며 兒名(兒名) 김효식 (金孝植)이다.

生涯 [ 編輯 ]

平安南道 成川郡 에서 出生하여 1929年 平壤高等普通學校 를 나왔다. 以後 日本 도쿄 로 留學하여 호세이 大學校 에 入學하였다가 1931年 除籍되었다.

日本 에서부터 社會主義 運動에 參與하며 카프 의 少壯派 評論家로 活潑한 活動을 펼쳤다. 林和 와 함께 文藝 運動의 볼셰비키 火를 主唱하였고, 勞動爭議에도 直接 參加하였다. 1931年에 第1次 카프 檢擧 事件 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 加擔 嫌疑로 起訴되었다.

出獄 後 監獄에서의 經驗을 土臺로 한 短篇 〈물〉(1933)을 發表하고 文學的 實踐에서의 階級的 主體 問題를 놓고 林和 와 論爭을 벌였다. 長篇 《大夏》(1939), 聯作인 《經營》(1940)과 《맥》(1941) 等을 發表했다.

太平洋 戰爭 終戰 直後 美軍政 地域에서 左翼 活動을 始作했다. 조선문학가동맹 을 結成하여 左翼 文人들의 求心點 役割을 擔當하던 中, 1947年 經에 林和 等과 함께 越北했다. 越北 後 第1期 最高人民會議 代議員, 朝鮮文學藝術總同盟 書記長을 歷任하였다.

韓國 戰爭 에도 朝鮮人民軍 從軍 作家로 參戰했으나, 休戰 協定 後 박헌영 을 中心으로 한 남로당 勢力의 肅淸으로 오랜 同志인 林和 가 死刑 判決을 받았다. 이때 김남천度 함께 肅淸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正確한 死亡 時期는 알 수 없다. 1953年 이나 1955年 에 死刑당했다는 설, 1977年 까지도 生存해 있었다는 說이 있다.

大韓民國 에서는 越北 作家라는 理由로 김남천에 對해 言及하지 못하고 꼭 必要한 境遇에는 이름 한 글字를 지우고 言及하다가, 1987年 6月 抗爭 以後 이름을 되찾고 全集이 出刊되는 等 再照明되었지만 아직도 北韓 의 文藝史에는 金南天의 痕跡이 남아있지 않다.

參考 資料 [ 編輯 ]

  •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82~84쪽쪽. ISBN   89-521-04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