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和
(林和(文化語:
臨畫
),
1908年
10月 13日
~
1953年
8月 6日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是認
이며
文學
評論家
,
政治人
(
小說家
,
映畫評論家
,
映畫俳優
,
演劇俳優
等으로도 暫時 活躍.)이다.
大韓帝國
漢城府
(只今의 大韓民國 서울) 出身이며, 本名은
임인식
(林仁植)이며, 雅號(雅號)는 雙手大人(雙樹臺人), 성아(星兒), 淸로(靑爐)이다. 그 外에도 '林和'(林華), '김철우'(金鐵友) 等의 筆名을 使用하였다.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카프)의 멤버(카프 書記長 歷任)로 活動하였으며, 解放 以後에는 政界에 進出하여
朝鮮共産黨
再建運動과
建國準備委員會
活動,
남조선로동당
創黨 活動 等에 參與했다.
[1]
[2]
1947年
美軍政
의 彈壓을 避해 越北,
南北 協商
에 參與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建國에 參與하였으나 從前(休戰)된 直後인
1953年
8月 6日
에 지난날
區 남로당
中心 人物이었던 이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 最高裁判所 軍事裁判部에서 ‘미제間諜’ 關聯 嫌疑로 인하여 死刑 宣告를 받고 銃殺刑 執行되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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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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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帝國
漢城府
의 어느 小市民 家庭에서 次男(2男 1女 中 막내)으로 태어나
1925年
日帝强占期
京城府
의
寶城高等普通學校
를 中退했다. 作家
以上
, 政治가
리强國
等과는
1921年
私立 京城 寶城高普 入學 同期生이었다.
1920年代
後半부터
時
創作과
批評
(評論)으로 文壇 活動을 始作했으며(
1927年
), 이 무렵 親舊인
윤기정
과 함께
映畫俳優
로도 活動했다.
抗日 作家, 文筆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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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林和(臨畫)라는 筆名은 그가 本格的으로 文壇 活動을 始作하던
1927年
頃부터 階級文學에 關心을 보이며 쓰기 始作했다.
1929年
에 詩 〈우리 옵바와 火爐〉, 〈네거리의 순이〉 等을 發表하여 代表的인 傾向派 詩人으로 자리를 잡고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을 代表하는 作家로 浮上했다.
1930年
에는 約 1年 동안
日本
留學을 다녀와
1931年
歸國한 以後로도 參與的인 性向을 代表하는 카프에서 左派 文學 理論을 生産하고
金基鎭
,
김화산
等을 攻擊하는 各種 論爭에 積極 參與하면서 活潑히 活動했다. 카프 活動으로 第1次 카프 檢擧 事件 때 逮捕되어 收監되기도 했다.
第2次 카프 檢擧 事件
以後
1935年
自身이 書記長 職銜까지 지낸 카프가 强制的으로 解散된 以後 純粹 文學으로 轉向하는 듯하였으나,
太平洋 戰爭
終戰 後
조선문학건설본부
,
조선문학가동맹
等 左翼 文學 團體에 積極 參與하면서
박헌영
에게 魅了된 以後
남로당
路線을 걸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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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는 그에게 懷柔를 하며 轉向을 勸告했지만 拒否하였다. 그는 對話숙에 强制로 入所되었지만
創氏 改名
은 끝까지 拒否하였고, 總督府는 그를 要視察 人物로 指定하여 監視하였다. 特히
박헌영
과의 關係를 疑心, 內通 與否를 重點的으로 監視하였다. 結局 그는 皇軍 慰問 作家團의 主된 人物로 活動하며 親日의 行爲를 했지만, 그 程度는 弱했던 것 같다.
解放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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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
의 熱烈한 追從者였던 그는
1945年
8月 15日
여운형
,
安在烘
等이 이끄는
建國準備委員會
에 加擔하였으나,
1945年
8月 20日
박헌영
이 서울(1945年
8月 15日
光復 以前까지는
京城府
)에 나타나자 그와 함께
朝鮮共産黨
再建運動에 同參했다.
1930年
첫 結婚을 하여
1935年
離婚을 한 以前 配偶者(前妻)인 리귀례(이귀례,
1911年
~?)와 사이에
1932年
에 無男獨女 외동딸 림蕙蘭(임혜란)을 두었지만 리귀례 氏와는 性格差異 等으로 인하여 結婚을 한지도 約5年餘만인
1935年
離婚을 한 以後에 그로부터 1年 後
1936年
小說家
地下聯
(
1912年
~
1960年
?)과 再婚을 하였으며, 再婚 計杯 否認(두番째 배우자)인
地下聯
(本名 리현욱)이라는
小說家
의 사이에서는 子女가 없었을뿐더러 再婚을 한지도 9年 後 1945年 8月 15日, 光復(解放)을 目睹한 그는 그로부터 2年 後
1947年
두 番째 配偶者이며
小說家
人
地下聯
과 함께 北傀(
平壤
)로 越北하였고,
1948年
4月
當時 開催된 第1次
前朝鮮 帝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
에 參席했다. 그해(1948年)
8月 2日
, 暫時 北傀
黃海道
海州
로 건너가 海州에서 開催된 第2次
前朝鮮 帝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
에 參席한 뒤,
平壤
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48年
9月 9日
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 樹立에 同參하였다.
1953年
當時
박헌영
,
리强國
,
리승엽
等
남로당
首腦部 出身 收受名의 同僚 都堂 黨僚와 함께 스파이 嫌疑로 逮捕되어 死刑 宣告를 받았다. 1953年 그해 銃殺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詳細한 內容은 公開되지 않았다.
映畫俳優로도 活動하였던 作家 臨畫(林和)는 흰 皮膚에 秀麗한 外貌로 '朝鮮의
루돌프 발렌티노
'로 불렸다고 하며,
김유영
이 演出한 映畫 《婚家》(1929)에 主演으로 出演한 적도 있을만큼 多才多能한 人物이었던 것으로 傳해진다.
[3]
草創期에는 '임다다'라는 筆名을 쓰면서
다다이즘
性向을 보였고, 카프 時節에는
마르크스주의
에 基盤한 ‘移植文學論’을 내세우는 等 外國의 最新 文化 理論을 輸入하여 自生的으로 消化하는 데 뛰어난 能力을 보였다.
臨畫(林和)의 移轉 配偶者(離婚을 한 첫 配偶者)는
日本
留學 時節에 함께한 同志
리북만
(이북만)의 누이同生 리귀례(이귀례)였다. 臨畫 作家와 리귀례 氏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림蕙蘭(임혜란)이 있었는데, 臨畫(林和)는 그 딸을 생각하며
韓國 戰爭
中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詩를 썼다. 이 詩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은 “英雄的 鬪爭에 蹶起한 우리 後方 人民들을 侮辱하고 그들에게 敗北主義的 感情과 投降主義思想을 說敎하였다”고 하여 肅淸의 빌미로 삼았다.
[4]
越北 作曲家인
김순남
이 作曲하여 韓國 戰爭 時期에 人民軍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人民抗爭가〉의 作詞家이기도 하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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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 戰爭
勃發 後
中共
滿洲
(
둥베이
지린省
창춘
)에 避難車 머물고 있던 計杯(두番째 배우자)인
地下聯
氏(
作家
)는 1953年 當時
박헌영
系列이 沒落하면서 臨畫(林和)가 間諜 嫌疑로 處刑 措置되었으며 屍身도 찾을 수 없다는 事實을 뒤늦게 알고 울면서 失性한 狀態가 되어 關聯 鬱火病 等으로 死亡했다고 알려져 있다.
[5]
2001年 9月
에 發掘돼 公開된 當時 美軍 情報將校(美軍 少領)인 조지 實利(當時
美國 陸軍
少領
)의 報告書에 따르면 林和 詩人이 美軍 隸下 防諜隊(CIC)의 要員으로 分類되었다는 것이 드러나, 旣存 通說대로
리强國
이
김수임
을 통해 南韓 情報를 蒐集해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존 벨 베어드(後날 1949年
豫備役
美國 陸軍
大領
豫編)가 김수임과 連結된 리强國(이강국)을 통해 北側 情報를 蒐集했을 수도 있을 可能性을 示唆하고 있다.
[6]
[7]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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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評價
[
編輯
]
| 이 文壇은 아직 未完成입니다.
여러분의 知識으로 알차게
文書를 完成해
갑시다.
|
日本의 小說家
마쓰모토 세이초
는 그의 平壤(北韓)에서의 活動을 小說化한 「北의 詩人, 林和(原題: 北の詩人)」(
1964年
)이라는 作品을 쓰기도 했다. 이는
1987年
서울(大韓民國)에도 飜譯本이 紹介되었다.
肯定的 評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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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否定的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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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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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臨畫를 演技한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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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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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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