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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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畫
林和
北傀 人民 政府 文化宣傳省 第1副相
任期 1950年 9月 2日 ~ 1951年 9月 9日
前任 김강
後任 조일명
主席 김두봉
受賞 金日成
長官 허정숙 北傀 文化宣傳上
次官 定率 北傀 文化宣傳省 第2副相
안막 北傀 文化宣傳省 第3副相

이름
別名 本名(本名)은 림인식(林仁植)
다른 筆名(筆名)은 林和(林華), 임다다(林多多), 김철우(金鐵友), 양남수, 量다림다
雅號(雅號)는 雙手大人(雙樹臺人), 성아(星兒), 淸로(靑爐)
닉네임은 朝鮮의 루돌프 발렌티노
身上情報
出生日 1908年 10月 13日 ( 1908-10-13 )
出生地 大韓帝國 漢城府 東西區域 동숭房
居住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
死亡日 1953年 8月 6日 ( 1953-08-06 ) (44歲)
死亡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
國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學歷 1925年 京城 寶城高等普通學校 中退
經歷 嘲笑文化協會 中央委員會 副委員長
正當 無所屬
兄弟姊妹 림貞淑(누나), 림校植(兄)
配偶者 地下聯 (再婚), 리귀례(離婚)
子女 림蕙蘭(딸)

林和 (林和(文化語: 臨畫 ), 1908年 10月 13日 ~ 1953年 8月 6日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是認 이며 文學 評論家 , 政治人 ( 小說家 , 映畫評論家 , 映畫俳優 , 演劇俳優 等으로도 暫時 活躍.)이다. 大韓帝國 漢城府 (只今의 大韓民國 서울) 出身이며, 本名은 임인식 (林仁植)이며, 雅號(雅號)는 雙手大人(雙樹臺人), 성아(星兒), 淸로(靑爐)이다. 그 外에도 '林和'(林華), '김철우'(金鐵友) 等의 筆名을 使用하였다.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카프)의 멤버(카프 書記長 歷任)로 活動하였으며, 解放 以後에는 政界에 進出하여 朝鮮共産黨 再建運動과 建國準備委員會 活動, 남조선로동당 創黨 活動 等에 參與했다. [1] [2]

1947年 美軍政 의 彈壓을 避해 越北, 南北 協商 에 參與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建國에 參與하였으나 從前(休戰)된 直後인 1953年 8月 6日 에 지난날 區 남로당 中心 人物이었던 이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 最高裁判所 軍事裁判部에서 ‘미제間諜’ 關聯 嫌疑로 인하여 死刑 宣告를 받고 銃殺刑 執行되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大韓帝國 漢城府 의 어느 小市民 家庭에서 次男(2男 1女 中 막내)으로 태어나 1925年 日帝强占期 京城府 寶城高等普通學校 를 中退했다. 作家 以上 , 政治가 리强國 等과는 1921年 私立 京城 寶城高普 入學 同期生이었다. 1920年代 後半부터 創作과 批評 (評論)으로 文壇 活動을 始作했으며( 1927年 ), 이 무렵 親舊인 윤기정 과 함께 映畫俳優 로도 活動했다.

抗日 作家, 文筆 活動 [ 編輯 ]

林和, 1932年 무렵
美術家 김복진 이 그린 林和 素描

林和(臨畫)라는 筆名은 그가 本格的으로 文壇 活動을 始作하던 1927年 頃부터 階級文學에 關心을 보이며 쓰기 始作했다. 1929年 에 詩 〈우리 옵바와 火爐〉, 〈네거리의 순이〉 等을 發表하여 代表的인 傾向派 詩人으로 자리를 잡고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을 代表하는 作家로 浮上했다.

1930年 에는 約 1年 동안 日本 留學을 다녀와 1931年 歸國한 以後로도 參與的인 性向을 代表하는 카프에서 左派 文學 理論을 生産하고 金基鎭 , 김화산 等을 攻擊하는 各種 論爭에 積極 參與하면서 活潑히 活動했다. 카프 活動으로 第1次 카프 檢擧 事件 때 逮捕되어 收監되기도 했다.

第2次 카프 檢擧 事件 以後 1935年 自身이 書記長 職銜까지 지낸 카프가 强制的으로 解散된 以後 純粹 文學으로 轉向하는 듯하였으나, 太平洋 戰爭 終戰 後 조선문학건설본부 , 조선문학가동맹 等 左翼 文學 團體에 積極 參與하면서 박헌영 에게 魅了된 以後 남로당 路線을 걸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日帝는 그에게 懷柔를 하며 轉向을 勸告했지만 拒否하였다. 그는 對話숙에 强制로 入所되었지만 創氏 改名 은 끝까지 拒否하였고, 總督府는 그를 要視察 人物로 指定하여 監視하였다. 特히 박헌영 과의 關係를 疑心, 內通 與否를 重點的으로 監視하였다. 結局 그는 皇軍 慰問 作家團의 主된 人物로 活動하며 親日의 行爲를 했지만, 그 程度는 弱했던 것 같다.

解放 以後 [ 編輯 ]

박헌영

박헌영 의 熱烈한 追從者였던 그는 1945年 8月 15日 여운형 , 安在烘 等이 이끄는 建國準備委員會 에 加擔하였으나, 1945年 8月 20日 박헌영 이 서울(1945年 8月 15日 光復 以前까지는 京城府 )에 나타나자 그와 함께 朝鮮共産黨 再建運動에 同參했다.

1930年 첫 結婚을 하여 1935年 離婚을 한 以前 配偶者(前妻)인 리귀례(이귀례, 1911年 ~?)와 사이에 1932年 에 無男獨女 외동딸 림蕙蘭(임혜란)을 두었지만 리귀례 氏와는 性格差異 等으로 인하여 結婚을 한지도 約5年餘만인 1935年 離婚을 한 以後에 그로부터 1年 後 1936年 小說家 地下聯 ( 1912年 ~ 1960年 ?)과 再婚을 하였으며, 再婚 計杯 否認(두番째 배우자)인 地下聯 (本名 리현욱)이라는 小說家 의 사이에서는 子女가 없었을뿐더러 再婚을 한지도 9年 後 1945年 8月 15日, 光復(解放)을 目睹한 그는 그로부터 2年 後 1947年 두 番째 配偶者이며 小說家 地下聯 과 함께 北傀( 平壤 )로 越北하였고, 1948年 4月 當時 開催된 第1次 前朝鮮 帝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 에 參席했다. 그해(1948年) 8月 2日 , 暫時 北傀 黃海道 海州 로 건너가 海州에서 開催된 第2次 前朝鮮 帝政黨 社會團體 連席會議 에 參席한 뒤, 平壤 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48年 9月 9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 樹立에 同參하였다. 1953年 當時 박헌영 , 리强國 , 리승엽 남로당 首腦部 出身 收受名의 同僚 都堂 黨僚와 함께 스파이 嫌疑로 逮捕되어 死刑 宣告를 받았다. 1953年 그해 銃殺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詳細한 內容은 公開되지 않았다.

映畫俳優로도 活動하였던 作家 臨畫(林和)는 흰 皮膚에 秀麗한 外貌로 '朝鮮의 루돌프 발렌티노 '로 불렸다고 하며, 김유영 이 演出한 映畫 《婚家》(1929)에 主演으로 出演한 적도 있을만큼 多才多能한 人物이었던 것으로 傳해진다. [3] 草創期에는 '임다다'라는 筆名을 쓰면서 다다이즘 性向을 보였고, 카프 時節에는 마르크스주의 에 基盤한 ‘移植文學論’을 내세우는 等 外國의 最新 文化 理論을 輸入하여 自生的으로 消化하는 데 뛰어난 能力을 보였다.

臨畫(林和)의 移轉 配偶者(離婚을 한 첫 配偶者)는 日本 留學 時節에 함께한 同志 리북만 (이북만)의 누이同生 리귀례(이귀례)였다. 臨畫 作家와 리귀례 氏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림蕙蘭(임혜란)이 있었는데, 臨畫(林和)는 그 딸을 생각하며 韓國 戰爭 中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詩를 썼다. 이 詩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은 “英雄的 鬪爭에 蹶起한 우리 後方 人民들을 侮辱하고 그들에게 敗北主義的 感情과 投降主義思想을 說敎하였다”고 하여 肅淸의 빌미로 삼았다. [4] 越北 作曲家인 김순남 이 作曲하여 韓國 戰爭 時期에 人民軍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人民抗爭가〉의 作詞家이기도 하다.

事後 [ 編輯 ]

韓國 戰爭 勃發 後 中共 滿洲 ( 둥베이 지린省 창춘 )에 避難車 머물고 있던 計杯(두番째 배우자)인 地下聯 氏( 作家 )는 1953年 當時 박헌영 系列이 沒落하면서 臨畫(林和)가 間諜 嫌疑로 處刑 措置되었으며 屍身도 찾을 수 없다는 事實을 뒤늦게 알고 울면서 失性한 狀態가 되어 關聯 鬱火病 等으로 死亡했다고 알려져 있다. [5]

2001年 9月 에 發掘돼 公開된 當時 美軍 情報將校(美軍 少領)인 조지 實利(當時 美國 陸軍 少領 )의 報告書에 따르면 林和 詩人이 美軍 隸下 防諜隊(CIC)의 要員으로 分類되었다는 것이 드러나, 旣存 通說대로 리强國 김수임 을 통해 南韓 情報를 蒐集해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존 벨 베어드(後날 1949年 豫備役 美國 陸軍 大領 豫編)가 김수임과 連結된 리强國(이강국)을 통해 北側 情報를 蒐集했을 수도 있을 可能性을 示唆하고 있다. [6] [7]

家計 [ 編輯 ]

評價 [ 編輯 ]

日本의 小說家 마쓰모토 세이초 는 그의 平壤(北韓)에서의 活動을 小說化한 「北의 詩人, 林和(原題: 北の詩人)」( 1964年 )이라는 作品을 쓰기도 했다. 이는 1987年 서울(大韓民國)에도 飜譯本이 紹介되었다.

肯定的 評價 [ 編輯 ]

否定的 評價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臨畫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형민. 林和의 悲劇 . 레디앙. 2014年 8月 20日.
  2. 惜閔. (今週의 歷史속 人物) 詩人 林和, 北韓에서 銃殺 . 每日新聞. 2016年 8月 6日.
  3. 문태준 (2008年 2月 18日). “[愛誦詩 100篇-第36篇] 우리 오빠와 火爐 - 林和” . 朝鮮日報 . 2008年 6月 1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김윤식 (2007). “文學과 政治의 郵政은 어떻게 可能하고 또 持續되는가 - 白鐵과 林和의 境遇”. 《文學의 文學》 (가을 創刊號): 318~341쪽.  
  5. 《朝鮮日報》 (2001.9.5) 越北作家 林和(林和)의 崎嶇한 運命 Archived 2016年 3月 5日 - 웨이백 머신
  6. "남로당 核心 이강국·臨畫 美軍防諜隊 스파이였다" 中央日報 2001.09.05
  7. 2001年 9月에~:정운현, 〈남로당 核心 이강국·臨畫 CIC 要員으로 活動했다〉,《대한매일》(2001.9.5.)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