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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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
吳延寵
오연총 영정 (조선 초기에 제작된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현전하는 영정은 1925년 3월 후손이 함경남도에 있는 사당에서 모사한 이모본이다.)
오연총 影幀
(朝鮮 初期에 製作된 原本은 流失되었으며,
現傳하는 影幀은 1925年 3月 後孫이
咸鏡南道 에 있는 祠堂에서 模寫한 李某本이다.)
高麗國 兵部郎中
(高麗國 兵部?中)
任期 1098年 8月 21日 ~ 1098年 9月 29日
君主 高麗 肅宗 王옹

이름
別名 시호 文樣(文襄)
身上情報
出生日 1055年
出生地 宋나라 四川省 聖徒 (成都)
死亡日 1116年 陰曆 5月 10日 (享年 62歲)
國籍 高麗
學歷 文科 及第
經歷 文官 및 軍人 兼 政治人 出身
門下侍郞同平章事(門下侍郞同平章事) 歷任
正當 無所屬
本館 海州 (海州)
父母 아버지 梧亭(吳?) [1]
親姻戚 甥姪 김함 (金?)
査頓 尹瓘 (尹瓘)

오연총 (吳延寵, 1055年 ~ 1116年 6月 22日 ( 陰曆 5月 10日 ) [2] )은 高麗 중기의 文身 이다. 本貫은 海州 (海州)이다. 文科에 及第한 後 起居郞, 兵部郎中 等을 歷任했으며, 官職은 吏部尙書, 中書侍郞, 門下侍中 平章事 等을 거쳐 受胎位 上柱國에 이르렀다. 尹瓘 과 함께 女眞族 討伐에 參與하였고, 別武班 을 編成하여 訓鍊하였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오연총은 梧亭(吳?)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설에는 1055年 (高麗 文宗 9年, 宋나라 人種 7年) 中國 四川省 (泗川省) 聖徒 (成都) 林孃에서 誤첨(吳瞻)의 18世孫인 오백영(吳伯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初期 生涯는 文獻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그의 家門에 一部 傳한다. 誤첨(吳瞻)은 오(吳)나라 太白王 의 25世孫인 誤記 (吳起; 楚나라 宰相)의 45代孫이다. 書記 500年 ( 지증왕 1年)에 中國 에서 新羅 로 건너온 中國人 무惠空(武惠公) 誤첨은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咸陽 에서 2男 1女를 두고 22年間 살다가 다시 中國으로 건너갔다. 그 때 두 아들 中에 둘째 아들 오응(吳應)이 그대로 新羅 에 남아서 살았다고 한다. 그 後 오응의 12代孫 오광우가 族姪 오우경과 980年에 中國 宋나라에 들어가 四川省 聖徒 임앙에 살았는데 다시 4代孫인 오연총이 1076年 (高麗 文宗 30年)에 다시 高麗에 들어와 定着하여 살았다고 한다. [3] [4]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家勢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5] 젊어서 가난했으나, 學問에 힘써 文科에 及第했다. [6] 1079年 (文宗 33年) 文科 (文科)에 壯元及第(壯元及第)였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學問에 힘써 文科 에 及第하였다. [7]

1096年 (肅宗 元年) 10月 遼나라 에 使臣으로 가서 天安節(天安節)을 賀禮하고 歸國했다. 1098年 (肅宗 3) 起居郞(起居?)에 任命되었다가 兵部 郎中(兵部?中)을 거쳐 시랑 (侍郞)으로 昇進했다. [6] [8]

1100年 (肅宗 5) 7月 相서(尙書) 王下 (王?)와 함께 宋에 使臣으로 가서 徽宗 (徽宗)의 卽位를 祝賀하고 이듬해 6月 歸國했는데, 이 때 송 사람들이 購入을 許諾하지 않던 稀貴 書籍인 《 太平御覽 》을 皇帝의 許諾으로 購入하는 데 成功했다. [6] [9] 宋나라 皇帝가 肅宗에게 《太平御覽(太平御覽 宋 나라 때에 編纂한 百科事典 類의 冊)》 1千 卷을 하사하였다. 年銃이 아뢰기를 "神들이 宋 나라에 있을 때에 館伴(館伴) 中書舍人 赦文官(謝文瓘)李 神에게 말하기를, '國王께서 글을 좋아하여 近來에 解凍(海東)에 文物이 크게 일어난다는 所聞이 들리고 올린 標章(表章)의 文章이 매우 아름다워 朝廷에서 아주 歎美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肅宗이, “《太平御覽》은 文宗(文宗)께서 일찍이 求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이고, 《信義보구房(神醫普救方)》은 世上에 救濟하는 要緊한 醫書인데, 이제 짐이 두 가지를 모두 얻었으니 이것은 使臣의 能力이로다. 登極을 祝賀하려고 갔던 使臣과 峯위社(奉慰使)로 갔던 鄭ㆍ部 使臣과 隨行員의 官爵을 모두 올려 주라." 하였다.

이 공으로 中서 死因 (中書舍人)에 拔擢되었으나, 外職으로 나가기를 自願했으므로 王이 그를 全州 牧師 (全州牧使)로 내보냈는데, 情事를 行하는 것이 너그럽고 公平하며 苛酷하지 않으니 官吏와 百姓들이 安樂을 누렸다. [6]

그의 勤務 考課 成績이 가장 높자, 1104年 (肅宗 9) 3月 召喚되어 樞密院 左承宣 (左承宣)· 兄夫 시랑 (刑部侍郞)·知 御史臺 社(知御史臺事)에 任命되었고, 3달도 되지 않아 尙書左丞(尙書左丞)·한림侍讀學士(翰林侍讀學士)로 昇進했다. [6] 오연총은 情事를 너그럽고 공정하게 處理하고 苛酷하지 않아서 官員과 百姓들이 그를 便하게 여겼다고 한다. [10] 그러나 王의 試驗이었다는 見解도 있다. 그에 依하면 王이 그의 장상(將相)의 材質(才質)이 있다 하여 將次 크게 쓰고자 臨民(臨民)함을 試驗할 目的으로 全州 牧師 로 보냈다는 것이다. [11]

官僚 生活 [ 編輯 ]

같은 해 王이 南京(南京)에 行次했을 때, 權知樞密院副使(權知樞密院副使)로서 平章事(平章事) 이오 ·參知政事(參知政事) 오수증 (吳壽增)·判御史臺事(判御史臺事) 任意 (任懿) 等과 함께 扈從했고, [12] 다음 달 樞密院副使(樞密院副使)·翰林學士(翰林學士) [13] , 이듬해 東知樞密院事(同知樞密院事)·祕書監(秘書監)·翰林學士承旨(翰林學士承旨) [14] 知樞密院事(知樞密院事)·御史大夫(御史大夫)·翰林學士承旨, [15] 동북면兵馬使(東北面兵馬使)·지行營兵馬使(知行營兵馬事), [16] 冬季行營兵馬使(東界行營兵馬使)를 次例로 거쳤다. [17]

1106年 (睿宗 元年) 神騎軍(神騎軍)의 徵發 條件 緩和를 建議하여 許諾받았다. [18] 같은 해 王이 書經(西京)의 用言(龍堰)에 宮闕을 짓고 巡幸하는 일을 臣下들에게 議論하게 했는데, 術師(術士)가 讖書(讖書)를 利用해 이를 勸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오연총은 男警의 工事가 막 끝나 百姓들이 疲勞하고 財政이 枯渴되었음을 理由로 들어 反對했으나, 王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6]

이듬해 平章事(平章事) 최홍사 (崔弘嗣) 等의 喪主로 書經 宮闕 創建이 다시 擧論되자, 亦是 세 가지 理由를 들어 反對했으나 王은 끝내 최홍사 等의 말을 들었고, 輿論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6]

여진 征伐 [ 編輯 ]

같은 해 餘震 (女眞) 征伐이 決定되자, 오연총은 尹瓘 (尹瓘)의 副元帥(副元帥)로 任命되었고 [19] , 9城을 쌓은 後인 1108年 (睿宗 3) 協모同德稚園功臣(協謀同德致遠功臣)에 책록되고, 左僕射(左僕射)·參知政事로 옮겼다.

같은 해 熊州(雄州)에 재侵入한 餘震을 물리치고 改善하여, 楊口진국(攘寇鎭國)의 공信號와 搜査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 官職이 더해졌다. [6]

그러나, 이듬해에도 餘震이 재侵入해 吉州(吉州)를 包圍해 陷落될 危機에 處했다.

이에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出廷했으나, 길목인 공험진(公?鎭)에서 女眞에게 奇襲을 當해 大敗했다. [20]

高麗軍은 다시 吉州로 進軍하려던 次에 餘震 쪽에서 請한 和親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를 理由로 윤관과 함께 再伸(宰臣)들의 繼續되는 彈劾을 받은 끝에, 1110年 (睿宗 5) 官職과 공信號를 박탈당했다. [6]

같은 해 表文을 올려 辭讓했음에도 不拘하고, 수사공(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中書侍郞平章事)·判三司事(判三司事)로 復職되었다. [6]

3次 女眞族 討伐 出征 [ 編輯 ]

大元帥 尹瓘

1107年(睿宗 2年)에 別武班 17萬 名을 거느리고 北上, 여진村落 129個를 쳐서 砲로 1030名, 射殺 4940名 等 큰 功을 세웠다. 當時 女眞族은 우리 나라 東北部에서 滿洲에 걸쳐 살면서 北部 國境地帶인 咸興 地方을 威脅하자 高麗의 北進 政策에 逆行이 되었던 女眞族을 掃蕩하려고 出征하였으나 累次 失敗하고 心慮 끝에 그 原因이 女眞族의 騎兵임을 깨닫고 王命을 받아 오연총은 都元帥 尹瓘 과 함께 兵力을 이끌고 동북면의 女眞族에게 總攻擊令을 내린다. 女眞族 5千을 射殺하고 130餘 名을 生捕한 뒤 이 곳에 9個의 城을 쌓아 國境을 튼튼하게 하고 돌아오니 王은 尹瓘, 오연총 等의 功을 致賀하고 功臣에 錄勳하였다.

척頃입費도, 尹瓘 等이 女眞族征伐 直後 國警備를 세우는 場面 (17世紀 民畫)

1107年 (高麗 睿宗2年) 여진 征伐에 對한 弔意(朝議)가 決定되어 王은 순천관(順天館)에 出漁(出御)하여 閱兵한 後 그와 尹瓘에게 銀抛株式(恩布酒食)을 分社(分賜)하고 공에게 高麗軍 副元帥(副元帥)를 除授하고 尹瓘에게는 高麗軍 怨讐(元帥)를 除授하여 30萬 大軍을 주어 餘震征伐(女眞征伐)의 張도(壯途)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副元帥職을 辭讓하였으나 윤관의 勸告로 받아들인다. 윤관이 蓋然(慨然)하여 말하기를『오공이 아니면 누가 같이 出征하여 나라를 求하리까?』하다. 出戰 할 때 王은 經營前(景靈殿)에서 親히 부철(斧鐵:鐵도끼)를 내리다. 그해 女眞族과 싸워 大勝을 거둔다. 이어 女眞族(女眞族) 조을內(兆乙乃)等 3280名이 投降(投降)하다.

餘震 遠征을 勝利로 이끈 뒤 祭場(諸將)으로 하여금 持戒(地界)를 定하고 熊州(雄州).榮州(英州).福州(福州).吉州(吉州)等 4城을 築城(築城)하였다. 그리고 豆滿江 건너 선춘령(先春嶺)에 高麗國 定界碑(定界碑)를 세우는 것을 監督하였다.

4次 女眞族 討伐 戰爭 [ 編輯 ]

그러나 女眞族은 다시 變更을 쳐들어왔고, 1108年 (高麗 睿宗 3年) 1月 尹瓘 , 척준경 , 왕자지 等과 함께 別武班을 이끌고 出征하였다. 그러나 街閑村(加漢村) 戰鬪 中 險曲에서 尹瓘 과 함께 女眞族에게 포위당하고 捕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斥候頃(拓後京)李 後發隊를 이끌고 急襲하여 求하여 劇的으로 살아났다. 3月 30日 砲로 346名, 말 96匹, 소 300豆를 鹵獲하여 捕虜와 戰利品을 가지고 尹瓘 等과 함께 開京으로 改善하였다.

高麗의 征伐과 9星 設置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女眞族은 완옌부를 中心으로 모여 武力抗爭을 繼續하였고, 使者를 보내 9城을 돌려주고 生業을 便安히 해주면 子孫 代代로 배반하지 않고 朝貢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城을 되돌려달라고 哀乞하였다. 이에 一部 主和派들은 9城을 되돌려주자고 主張하였고, 윤관과 오연총은 9城을 지킬 것을 主張하였으나 當時 高麗는 女眞族의 攻勢 앞에 9城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形便이었다. 또 9星 사이의 距離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無理한 軍事動員으로 百姓들의 怨望이 일어나서 朝廷에서도 火評論이 大勢를 이루게 되었다.

1109年 9月 同德稚園功臣(同德致遠功臣)의 勳號(勳號)를 내리고 尙書左僕射 參知政事(尙書左僕射參知政事)가 되었으며 自首眼球(紫繡鞍具)와 구마(廐馬)韓 疋을 下賜받았다. 그러나 餘震이 재侵入하여 熊州를 包圍하자 副元帥로 兵力을 이끌고 出征하여 擊破하고 되돌아왔다. 9月 다시 楊口진국功臣(攘寇鎭國功臣)에 搜査도 延英殿大學史(守司徒延英殿大學士)가 되었다.

敗戰과 削奪, 復職 [ 編輯 ]

以後 尹瓘 과 함께 軍隊를 整備하던 中, 1109年 10月 女眞族 길走性 을 陷落시키자 冬季病魔副元帥(東界兵馬副元帥)로서 윤관과 함께 出征, 길走性 을 包圍한 女眞族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奇襲攻擊을 當하였다. 兵力을 잃고 討伐에 失敗하여 和親을 맺고 돌아왔다. 그러나 11月 和親을 理由로 平章事 최홍사 (崔弘嗣) 等의 彈劾을 받아 한때 官職과 功臣의 資格이 剝奪되고 罷免되었으나 睿宗 의 特別 配慮로 다시 복직시켰다.

以後 吏部尙書를 거쳐 門下侍郞 平章事를 지내고 1110年 中書侍郞平章事 判三司事(中書侍?平章事判三司事)를 거쳐 1112年 搜査도 判尙書兵部事 監修國史(守司徒判尙書兵部事監修國史), 受胎位 監修國史(守司徒守太尉監修國史)를 거쳐 1113年 受胎位 판豫兵府使(守太尉判禮兵部事)가 되고 上柱國(上柱國)의 勳位를 받았으며 이어 判吏部事(判吏部事)가 되었다.

末年 [ 編輯 ]

1112年 (睿宗 7) 2月 27日 사도 (守司徒)·判 兵部 社(判兵部事)· 監修國史 (監修國史)가 더해졌고, [21] 같은 해 9月 12日 문하 시랑 棟 中서문하 平章事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昇進했으며, [22] 이듬해 12月 다시 數 太尉 (守太尉)·판豫兵府使(判禮兵部事)· 上柱國 (上柱國), [23] 1114年 (睿宗 9) 判吏部事(判吏部事)가 더해졌다. [24] 1114年 秋忠功臣(推忠功臣)에 錄勳되었다. 1114年 以後 여러 벼슬을 거쳐 搜査도, 受胎位, 三수국사 上柱國 판 二部 , 禮部 , 兵部 判事(兵部判事)를 지내고 스스로 退職을 請하였다. 그러나 睿宗은 그가 有名한 學者이자 智略을 두루 갖춘 軍人임을 들어 끝까지 그의 助言을 받고자 退職을 允許하지 않았다. [25]

以後 病 때문에 여러 次例 글을 올려 辭職을 請했으나, 王은 元老인 그에게서 繼續 도움을 받고 싶었으므로 이를 許諾하지 않았다. [6] 1116年 搜査도(守司徒)를 거쳐 수 太尉 監修國史 上柱國(守太尉監修國史上柱國)李 되었다.

1116年 3月 門下侍中 平章事 (門下侍中平章事)에 除授되었다. 1116年 (睿宗 11) 5月 享年 62歲로 卒瑕疵, 文樣(文襄)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6] 王은 그의 葬禮 때 모든 臣下들이 參席하도록 했다. [6]

아들이 없던 그는 조카뻘 되는 親戚 오익(吳翊)을 養子로 粒界(入系)하고 딸 1名은 尹瓘 의 아들에게 出嫁하였다.

事後 [ 編輯 ]

事後 咸鏡南道 에 祠宇(祠宇)가 세워졌다. 그 뒤 1441年 (世宗 23年) 咸鏡北道 北靑 안北史(按北祠)에 配享되었고, 1925年 全南 谷城郡 오곡면 덕산리에 德山社 (德山祠)가 建立되어 祭享되었다. 1925年 3月 咸鏡南道 에 있던 文樣공 社友에서 影幀을 複寫하여 德山社 에 奉安했으며, 德山社는 南韓 땅에 單 한곳 밖에 없는 唯一한 오연총의 祠堂이다. 그의 後孫과 儒林들이 每年 陰曆 3月 3日 祭를 올리고 있다.

評價 [ 編輯 ]

《高麗史》에서는 吳延寵에 對해 그의 列傳에서 이렇게 評했다.

(오연총은) 몸가짐을 바로잡고 恂恂(恂恂)하게 行動을 삼갔으며, 忠誠과 儉素를 自負하며 榮譽를 救하지 않았다. 官職에 있을 때의 持論(持論)은 時弊(時弊)를 除去하는 데 힘쓰는 것이었으며,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公益에 被害를 준 적이 없었으므로, 王이 그를 重히 여겼다.

女眞族 을 討伐하고 江東 6週 東北 9星 을 쌓아 北方의 防禦力을 높인 點을 높이 評價받는다. 平和時에는 文身으로 임금을 모셨고 展示에는 將軍으로 나라를 지키고 國家에 忠誠을 다하는 文武를 兼備했다 [26] 는 視角도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影幀 [ 編輯 ]

元來의 影幀은 朝鮮 時代 初期에 製作되었으나 韓國戰爭 途中 失傳되었고, 現在 傳하는 것은 1925年 3月 그의 後孫이 咸鏡南道 山川群 에 있는 祠堂에서 그림을 模寫해온 模寫本이다.

巫俗의 神의 한사람으로도 崇拜되었다.

기타 [ 編輯 ]

査頓의 由來 [ 編輯 ]

高麗 睿宗 餘震 을 함께 征伐한 都元帥 尹瓘 副元帥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婚姻으로 맺어진 關係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尹瓘 은 下人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向했다. 그런데 前日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便을 바라보니 오연총度 술桶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暫時 後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救해 걸터앉았다. 먼저 尹瓘 이 술盞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盞 勸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度 머리를 숙여 술盞을 받는 例를 表示한 뒤 스스로 채운 술盞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盞을 주고받는 시늉을 하며 風流를 즐겼다. 이때부터 子息 사이의 婚姻을 提案할 때는 '査頓 하자'라는 말이 由來하게 되었다 한다. 査頓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頓修(頓首)의 合成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同名異人 오연총 [ 編輯 ]

中國 에서 건너온 一族인 誤認油 (吳仁裕)의 後孫 中에 高麗 後期의 文臣인 오연총 (吳延寵)있다. 그의 諡號는 楊平공(良平公)이며 다른 이름은 오정총 이다. 250年의 連帶 差異가 나며 이 둘을 區別하기 위해 諡號를 앞에 붙여 文樣공 오연총과 楊平공 오연총으로 부른다.

文樣공 오연총의 6代孫 오현보는 1216年 (高麗 高宗 3年) 거란족 의 侵略을 擊退하였다. 楊平공 오연총의 5寸 堂조카人 오선경(吳先敬)은 朝鮮 定宗 때의 人物로, 1399年 (正宗 1年) 式年 文科에 丙科로 及第했다. 그러나 間或 朝鮮 時代부터 楊平공 오연총(오정총)과 文樣公認 그를 헷갈리는 文獻도 存在한다.

電氣 資料 [ 編輯 ]

《高麗史》 卷96, 〈列傳〉9, 오연총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外조카 〈김함(金?) 墓誌銘〉李 根據이다.
  2. 《高麗史》 卷14, 〈勢가〉14, 睿宗 11年(1116年) 5月 10日(癸卯)
  3. 오탁진 (1397年). 《吳氏30世界도》.  
  4. 1397年 作成된 文獻에 오연총이 韓國 吳氏의 東萊條가 되었다는 文獻이 있으나, 高敞 吳氏의 始祖인 오학린은 17世孫으로서 한림太學士, 都兵馬使를 지냈으며, 오연총보다는 1代 앞서는 人物이기 때문에 海州 吳氏와 始祖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5. 〈김함(金?) 墓誌銘〉을 통해 아버지가 梧亭(吳?)이었고, 尙書右僕射(尙書右僕射)를 지냈다는 事實만 알 수 있을 뿐이다.
  6. 《高麗史》 卷96, 〈列傳〉9, 오연총
  7. 오연총:네이트 韓國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高麗史》 卷11, 〈勢가〉11, 肅宗 元年(1096年) 10月 28日(乙酉)
  9. 《高麗史》 卷11, 〈勢가〉11, 肅宗 5年(1100年) 7月 12日(丁丑); 肅宗 6年(1101年) 6月 7日(病身)
  10. 國譯 《高麗名臣傳》(2004, 남공철 저, 金東周 驛, 城南 文化院 發行) 176페이지
  11. 오연총 年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2. 《高麗史》 卷12, 〈勢가〉12, 肅宗 9年(1104年) 7月 27日(戊戌)
  13. 《高麗史》 卷12, 〈勢가〉12, 肅宗 9年(1104年) 8月 20日(辛酉)
  14. 《高麗史》 卷12, 〈勢가〉12, 肅宗 10年(1105年) 6月 9日(甲戌)
  15. 《高麗史》 卷12, 〈勢가〉12, 睿宗 卽位年(1105年) 11月 4日(戊戌)
  16. 《高麗史》 卷12, 〈勢가〉12, 睿宗 卽位年(1105年) 11月 23日(정사)
  17. 《高麗史》 卷12, 〈勢가〉12, 睿宗 卽位年(1105年) 12月 16日(己卯)
  18. 《高麗史》 卷81, 〈兵志〉1, 兵制, 5軍, 睿宗 元年(1106年) 1月
  19. 仔細한 것은 尹瓘 文書 參照.
  20. 《高麗史》 卷13, 〈勢가〉13, 睿宗 4年(1109年) 5月 16日(更新)
  21. 《高麗史》 卷13, 〈勢가〉13, 睿宗 7年(1112年) 2月 27日(甲寅)
  22. 《高麗史》 卷13, 〈勢가〉13, 睿宗 7年(1112年) 9月 12日(病人)
  23. 《高麗史》 卷13, 〈勢가〉13, 睿宗 8年(1113年) 12月 9日(丙辰)
  24. 《高麗史》 卷13, 〈勢가〉13, 睿宗 9年(1114年) 3月 13日(己丑)
  25. 國譯 《高麗名臣傳》(2004, 남공철 저, 金東周 驛, 城南 文化院 發行) 180페이지
  26. 오연총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