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호
(柳宣浩,
1953年
9月 27日
~ ,
全羅南道
靈巖郡
)는
大韓民國
의 辯護士이자 第15·17·18代
國會議員
을 지낸 政治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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否認 곽경리와 1男 1女의 子女가 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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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 第23回
司法考試
에 合格하여 司法硏修院을 修了하고 辯護士 事務室을 開業했다. 以後
朴鍾哲
拷問致死 事件,
富川署 性拷問 事件
(1986年),
林秀卿
訪北 事件(1989年), 勞動者 詩人
박노해
事件 等의 時局事件을 辯護하였으며 特히
박노해
事件에서
國家安全企劃部長
을 相對로 抗告해 '安企部가 被疑者의 辯護人 接見을 制限하는 것은 法律에 違背된다'는 大法院 決定을 이끌어냈다.
[2]
[3]
進步
性向의 法曹人 團體인
民辯
의 發起人으로 參與하며 人權 辯護士로 活動했다.
在野出身들로 構成된 '統一時代 民主主義 국민회의'를 통해 1994年 政界에 入門하여 1995年
새정치국민회의
軍浦市
地區黨委員長으로 맡아 이듬해 4月의
15代 總選
에서 當選됐지만, 2000年
16代 總選
에서는
한나라黨
金富謙
議員에게 再檢票까지 가는 勝負 끝에 254票 差로 惜敗했다.
落選 以後에
京畿道
政務副知事(2001年 6月 ~ 9月),
靑瓦臺
政務首席(2001年 9月 ~ 2003年 2月)을 지낸 뒤,
열린우리당
創黨 發起人으로 參與했다. 그러나
17代 總選
을 앞두고 中央黨 側에서 金富謙
[4]
과의 競選 要求를 默殺하고, 新生 選擧區 安山市 檀園區 乙에 公薦하자 脫黨 後 無所屬 出馬를 試圖했다.
하지만 2004年 3月 12日
盧武鉉 大統領 彈劾 訴追案
이 國會를 通過하면서 辭表 憂慮가 提起되자 열린우리당에 復黨했다. 그 後 故鄕인
長興郡·靈巖郡
에 戰略 公薦되어 再選에 成功했고, 2008年 3選 國會議員으로
大韓民國 國會
第18代 國會 前半期
法制司法委員會
委員長으로 活動하다가 18代 國會 後半期 國土海洋委員會 議員으로 在職했다.
公職選擧法 違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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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年 7月 14日 光州地方法院 長興支援 第3刑事部(裁判長 구회근, 判事 박정제, 判事 임수희)는 公職選擧法違反으로 起訴된 유선호에게 罰金 70萬원을 宣告했다. 유선호는 選擧運動 期間 前에는 選擧運動을 할 수 없음에도 不拘하고 公式 選擧運動期間 前인 2008年 3月 20日 17:40 警 OO信用協同組合 2層 會議室에서 열린 민주당 親睦團體인 强震民主우정회 모임에 參席, 參席者들에게 地域區가 疏外되지 않게 하겠다는 等 도와달라는 趣旨의 말을 함으로써 選擧運動 期間 前에 選擧運動을 하였다. 또한 같은 날 18:00景 OOO 食堂에 가서 地域 元老들과의 相見禮 자리에 參席하여 함께 食事를 하면서 “地域 元老들에게 人事를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番 選擧에서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事前選擧運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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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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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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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年 5月 30日~2000年 5月 29日: 15代 國會議員(京畿 軍浦, 국민회의)
- 2000年:
새千年民主黨
軍浦 地區黨委員長, 人權委員長
- 2001年 5月 17日~9月 9日: 京畿道 政務副知事
- 2001年 9月 11日~2003年 2月 23日: 靑瓦臺 政務首席
- 2004年 5月 30日~2008年 5月 29日: 17代 國會議員(全南 靈巖·長興, 열린우리당)
- 2008年 5月 30日~2012年 5月 29日: 18代 國會議員(全南 靈巖·長興·康津,
統合민주당
)
歷代 選擧 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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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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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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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年 5月 30日 - 2000年 5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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