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505年 - 565年)는
東로마 帝國
의 名匠이다. 西洋 歷史에서 손꼽히는 軍事 指揮官
[1]
[2]
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
반달 王國
,
고트族
,
게르만족
을 相對로
帝國
의 故土를 回復한 專攻으로 有名하다.
유스티니아누스 1歲
時期에 活動했다.
初期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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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아
(現在
유고슬라비아
)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軍에 入隊했다. 530年
다라의 戰鬪
에서
死産 帝國
의 軍隊와 싸워 勝利했으나 531年
유프라테스江
가의
칼리니쿰의 戰鬪
에서 完敗, 페르시아와 强化를 맺었다. 532年
콘스탄티노폴리스
에서 將校가 되었다.
軍事的 業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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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족과의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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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年
아프리카
로 航海해
레프키스 마그나
近處에 上陸, 當時
반달族
이 首都로 하고 있던
카르타고
로 向했다. 반달왕국의 王
겔리메르
를 맞은 벨리사리우스의 東로마軍은 카르타고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드 데키미움의 戰鬪
를 벌여 完敗했다. 그러나 겔리메르의 조카가 戰鬪에서 죽어 戰爭에 集中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戰列을 가다듬은 벨리사리우스는
티카메론의 戰鬪
에서 半달君을 擊破, 534年 降伏하게 만들었다.
동고트족과의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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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年, 유스티니아누스 皇帝는
나르세스
를
동고트 王國
戰線에서 解任하고 벨리사리우스를 投入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
를 占領하고
이탈리아
本土로 進擊했다. 536年
나폴리
와
로마
를 收復하고 540年 동고트 首都인
라벤나
를 占領했다. 동고트족을 東로마 皇帝는 믿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괜찮다고 여겨 그에게 王國 折半을 주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王冠을 받았는데 이것이 皇帝의 憤怒를 샀다.
首都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戰線에 재투입되었으며, 빼앗긴
시리아
를 놓고 페르시아와 한동안 交戰을 벌이다가 545年 金 5千 파운드를 戰爭 補償金으로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代身 페르시아軍이 로마령을 5年間 侵攻하지 않는 것으로 强化協定을 맺었다.
541年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狀況은 달라져 있었다. 그가 擁立한 동고트 王
日디바드
는 暗殺되었고
土틸라
가 王이 되어 있었으며, 土틸라의 동고트軍은 東로마君을 무섭게 몰아내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土틸라에 對해 攻勢로 들어갔으나, 머지않아 유스티니아누스 皇帝에 依해
나르세스
로 交替되었다.
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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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年
벨리사리우스는
도나우江
을 건넌
不可르族
戰線에 投入되어 그의 長壽로서 經歷의 마지막 勝利를 거두었다.
562年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橫領 嫌疑로 告訴되어 懲役이 宣告되었으나, 現代 硏究者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
가 꾸며낸 謀陷이었다. 皇帝는 곧 벨리사리우스를 풀어주었다.
565年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皇帝가 모두 世上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