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馬島 征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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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次 對馬島 征伐
(第一次對馬島征伐)
電氣 倭寇 의 一部
날짜 1389年 ( 昌王 2年) 陰曆 2月
場所
일본의 기 日本 나가사키현 (長崎縣)의 附屬島嶼
結果 高麗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朴葳 (朴?)
김종연 (金宗衍)
최칠석 (崔七夕)
박자안 (朴子安)
무로마치 倭寇
兵力
軍艦 100隻 理想 兵力: 10,000名 不明
被害 規模
正確한 數字는 알 수 없음 正確한 數字는 알 수 없음
倭船 3百餘 隻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官舍와 民家를 다 불태웠다.
第2次 對馬島 征伐
(第二次對馬島征伐)
電氣 倭寇 의 一部
날짜 1396年 (太祖 5年) 陰曆 12月
場所
일본의 기 日本 나가사키현 (長崎縣)의 附屬島嶼
結果 未詳
交戰國
指揮官
5도병마도통처치사 김사형 (金士衡)
都兵馬使 南在 (南在)
兵馬使 신극공 (辛克恭)
體察使 李茂 (李茂)
무로마치 倭寇
兵力
不明 不明
被害 規模
不明 不明
이 때 動員된 5度 兵船의 數와 軍隊의 規模나 征伐의 結果 等에 對한 記錄이 없어 仔細한 內容을 알 수 없다. 한便 많은 倭寇들이 投降하고 추운 날씨가 繼續되었던 點을 注目해 實行段階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月 30日에 돌아올 때까지 約 2個月間의 事情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第3次 對馬島 征伐
(第三次對馬島征伐)
電氣 倭寇 의 一部
날짜 1419年 (世宗 1年) 陰曆 6月 19日
場所
일본의 기 日本 나가사키현 (長崎縣)의 附屬島嶼
結果 朝鮮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3群島統社 柳政鉉 (柳廷顯)
3軍都體察使 이종무
中軍節制使 雨雹(禹博)·이숙무(李叔畝)·皇上(黃象)
左軍都節制使로 遺習(柳濕)
左軍節制使로, 朴硝(朴礎)·박실(朴實)
友軍都節制使 이지실(李之實)
友軍節制使,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   항복
兵力
戰艦 227隻, 軍事 17,285名 未詳
被害 規模
正確히 알 수 없음 不明
敵兵 114名을 斬首, 21名을 捕虜로 했으며, 1,939號의 家屋을 불태웠다.

對馬島 征伐 (對馬島征伐)은 13世紀 에서 16世紀 까지 韓半島 中國 을 侵略하여 擄掠질하던 倭寇 의 本據地인 쓰시마섬 (對馬島)을 征伐한 事件이다.

歷史的으로 第1次 對馬島 征伐은 1389年 ( 高麗 昌王 2年) 朴葳 가 이끌었으며, 第2次 對馬島 征伐은 1396年 ( 朝鮮 太祖 5年)에 있었다. 가장 有名한 제3차 對馬島 征伐은 1419年 ( 世宗 1年)에 이종무 가 이끈 征伐로, 己亥東征 (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1] 日本 에서는 오에이의 외구 ( 日本語 : ?永の外寇 )라고도 부르며, 當時 對馬島에서는 累카다케 戰爭 ( 日本語 : 糠嶽戰爭 )이라고 하였다.

背景 [ 編輯 ]

쓰시마는 韓國과 日本 兩國 사이에 있어 仲介를 맡는 特殊 事情도 있거니와, 元來 그 土地가 狹小瘠薄(狹小瘠薄)하여 食糧을 밖에서 求해야 生活을 維持하므로 高麗 末부터 朝貢과 同時에 米穀(米穀)을 받아갔다. 또 朝鮮에서도 쓰시마 섬을 優待하였으며 쓰시마는 通常의 利益을 獨占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飢饉이 들 때에는 海賊으로 나타나 海岸을 掠奪하므로 兵士를 일으켜 征伐하게 되었다.

第1次 征伐 [ 編輯 ]

1389年 (昌王 2年) 陰曆 2月에 朴葳 가 兵船 1百 隻을 이끌고 쓰시마를 攻擊하여 倭船 300隻을 불사르고, 老事態 (盧舍殆)를 眞滅하여 高麗의 民間人 砲로 男女 1百餘 名을 救出하였다.

第2次 征伐 [ 編輯 ]

1396年 (太祖 5年) 陰曆 12月 門下右政丞(門下右政丞) 김사형 이 오도 病魔處置社(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를 征伐하였다.

第3次 征伐 [ 編輯 ]

原因 [ 編輯 ]

1418年(太宗 18), 對馬島에 큰 凶年이 들어 飢饉이 發生하자, 對馬島人들이 明나라 海岸으로 掠奪을 가던 途中에 朝鮮의 舒川郡 (舊 비인 庇仁)과 海州 (海州) 海岸을 掠奪하는 일이 發生했다. [2] 當時 對馬島主(對馬島主)인 소 社다시게 (宗貞茂)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 (宗貞盛)가 그 地位를 繼承하였는데, 朝鮮은 새 逃走인 소 사다모리가 倭寇 를 煽動한 것이라고 疑心하여, 直接 對馬島에 對한 征伐을 論議하였다. 드디어 1419年(世宗 1年) 6月 9日, 象王 太宗이 對馬島 征伐을 宣布하였다. [3]

結果 [ 編輯 ]

象王 太宗의 主導 아래 장천군 이종무 를 三軍 都體察使로, 領議政 柳政鉉 을 三道 都統使(三道都統使)로, 議政府 參贊 최윤덕 을 三軍 都節制使(三軍都節制使)로 命하고, 雨雹(禹博), 이숙묘(李叔畝), 皇上(黃象)을 中軍 節制使, 遺習(柳濕)을 左軍 都節制使, 朴硝(朴礎)와 박실(朴實)을 左軍 節制使로, 이지실(李之實)을 友軍 都節制使로, 김을화 와 이순몽(李順蒙)을 友軍 節制使로 삼아 慶尙道 , 全羅道 , 忠淸道 의 3度에 있는 兵船 227隻과 兵士 1萬7千 名을 거느리고 陰曆 4月에 出兵하도록 命하였다. 出兵을 指示한 世宗은 太宗과 함께 漢江 두모포에 擧動海 宴會를 베풀며 出征式을 갖는다. [4]

1419年 (世宗 1) 陰曆 6月 19日 巨濟島 南쪽 주원放砲를 出發하여 20日에 쓰시마 섬에 到着하였다. [5] 이종무는 逃走 種精選에게 降伏을 勸하였으나 對答이 없자 倭寇 1百餘 名을 斬首하고 2千餘 好意 家屋을 불태우고, 131名의 明나라 捕虜를 찾아내었다. 29日에는 家屋 70餘 號를 태우고 明나라 사람 15名과 朝鮮人 8名을 救出하였다.

이종무 將軍은 左軍과 友軍에게 두持砲에 布陣하라 命令하고 自身은 陰曆 7月 3日 에 主力艦隊(舟師)를 이끌고 巨濟島 로 撤收했다. 對馬島 征伐을 始作한지 13日만이다. 征伐軍 指揮部를 一旦 撤收시킨 太宗은 兵曹判書 조말생 으로 하여금 對馬島 逃走에게 降伏 勸告文을 보내도록 했다. [6]

歸化한 倭人 등현(藤賢)李 降伏 權顧問을 가지고 對馬島로 떠났다. 對馬島는 예부터 朝鮮의 땅이었으니 本國으로 돌아가든지 降伏하라는 것이다. 危機를 느낀 對馬島 逃走가 도이短刀로(都伊端都老)에게 信書(信書)를 보내어 降伏하기를 빌고 人身(印信)을 내려 줄 것을 請願했다.

對馬島를 다녀온 도이短刀로(都伊端都老)가 壽康宮에 무릎을 꿇고 對馬島 島主의 降伏을 傳했다. 太宗은 降伏을 加納하고 交遊했다. [7] 도이短刀로(都伊端都老)를 對馬島로 돌려보낸 太宗은 征伐軍의 全面 撤收를 命했다. 두持砲에 陣을 치고 있던 左軍과 友軍이 撤軍했다.

結果 [ 編輯 ]

이 遠征은 180名의 朝鮮軍이 戰死하는 等 많은 人命 犧牲이 따랐으며 分明한 軍事的 勝利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遠征隊가 돌아온 後 다음 遠征을 論議하였으나 事情上 實行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遠征 以後 대마도주(對馬島主)가 降伏을 請하여 옴으로써 事態가 一段落되게 되었다. 對馬島主는 또한 臣下의 例로서 섬길 것을 盟誓하고 倭寇 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朝貢 을 바칠 것을 約束하였다. 世宗 이 이를 許諾하고 以後 삼포를 開港 할 때에 對馬島 逃走에게 通商의 權限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關係로 轉換되었다.

이 征伐 以後 相當 期間 동안 倭寇의 侵入을 防止하는 效果를 가져왔으며, 通商을 許諾하여 日本人들로 하여금 平和的으로 貿易과 來往을 하도록하는 政策을 펼 수 있는 基盤이 되었다.

明나라의 日本 征伐 遮斷 [ 編輯 ]

2009年 3月 19日 한국역사연구회 學術 發表會에서 ‘朝鮮 初期 對馬島 征伐의 原因과 目的’을 發表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講師는 己亥東征이 倭寇 掃蕩보다는 明나라의 日本 征伐을 沮止하기 위한 外交 戰略이었다고 主張했다. 이에 對한 根據로 于先 己亥東征 以前 10年間 倭寇로 因한 被害가 거의 없었다는 點을 꼽는다. 高麗末부터 太宗 初期까지 氣勝을 부렸던 倭寇의 侵入은 太宗 9年(1409)부터 크게 減少했다. 10年 만의 倭寇 被害에, 그것도 對馬島가 朝鮮과의 友好的 關係를 위해 努力하던 狀況에서 朝鮮이 大規模 出兵을 敢行한 點은 理解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出征 命令 4日 만에 65日分의 軍糧과 1萬 7000餘名의 兵力을 準備한 대목도 以前부터 對馬島 征伐을 緻密하게 計劃했음을 示唆한다.

朝鮮의 被害가 뜸했던 때, 倭寇의 主要 活動 舞臺는 明나라 沿岸地域이었다. 明나라는 日本 쇼군을 통해 倭寇를 制御하는 方式을 取했지만 원道義에 이어 登極한 원意志가 積極的으로 協助하지 않자 日本 征伐을 計劃한다. 朝鮮은 明나라의 움직임에 觸角을 곤두세웠다. 明나라가 日本 征伐에 나서면 明나라의 關係 改善에 努力해온 太宗으로선 이에 介入하지 않을 名分이나 方法이 없기 때문이다.

朝鮮은 最小限의 犧牲으로 戰爭을 막기 위해 結局 朝鮮은 明나라의 日本 征伐을 막으려면 名의 倭寇 被害를 줄이는 것이 가장 重要하다고 判斷, 對馬島 征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分析이다. 對馬島 遠征軍이 大規模 部隊 編成에도 不拘하고 意圖的으로 全面戰을 回避한 것도 征伐의 目的이 倭寇의 擊滅이 아니라 朝鮮의 威力을 誇示하는 象徵的인 攻擊이란 推測을 뒷받침한다. 朝鮮은 征伐을 斷行하면서도 日本과 對馬島와의 關係를 極端的인 狀態로까지 몰고 갈 意圖는 없었던 것이다.

이 講師는 朝鮮이 對馬島를 征伐해 明나라의 日本 征伐을 事前에 遮斷하는 한便 對外 目標인 北方地域, 特히 餘震으로의 進出과 影響力 擴大라는 一擧兩得을 取했다고 把握한다. 倭寇를 制御한 功勞로 餘震 地域의 實力行使에 對한 明나라의 暗默的 同意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對馬島征伐 [對馬島征伐] (두산百科 頭皮디아, 두산百科)
  2. [네이버 知識百科] 對馬島征伐 [對馬島征伐]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飢饉이 들어 生活이 窮乏해지자, 對馬島의 倭敵이 明나라에 掠奪하러 가는 途中 朝鮮의 沿岸을 掠奪하게 되었고, 이것이 契機가 되어 己亥東征이 決行되었다.
  3. 世宗實錄 》, 〈 元年(1419年) 六月 九日 〉(原文), 〈 元年(1419年) 6月 9日 〉(飜譯文)
  4. “[萬波息笛]두모포” . 서울경제신문. 2019年 6月 16日.  
  5.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熊進知識하우스 2004年 初版175刷 p121
  6. 世宗大王實錄 4卷 1年 7月 17日 (更新)
  7. 世宗大王實錄 5卷 1年 10月 18日 (己丑)
  8. 이순녀 記者 (2009年 3月 18日). “朝鮮 世宗1年 對馬島 征伐 “倭寇 掃蕩보다 明의 日征伐 遮斷 戰略”” . 서울新聞 . 2009年 3月 18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