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智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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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智泰 (金智泰, 1908年 6月 14日 [1] - 1982年 4月 9日 )는 大韓民國 의 無所屬 및 自由黨 陣營 政治人, 言論人, 釜山 地域 土豪의 아들로 부산상고 首席 卒業 後 東洋拓殖株式會社 에 入社해 5年 勤務했다. 退社 時期, 東洋拓殖株式會社 로부터 蔚山 地域 2萬坪의 田畓을 10年 分割償還 條件으로 拂下 받았고, 이를 基盤으로 太平洋 戰爭 時期 一齊 郡守事業으로 富를 이룬 [2] 親日派 , 賣國奴 이다. 光復 以後에도 釜山 一帶의 有力한 실크財閥였고, 言論文化事業에도 進出하여 4.19 革命의 始初가 되는 記事를 쓴 釜山日報 의 使嗾로 歷任했으나, 同時에 이기붕 에게 朝鮮絹織의 脫稅默認兆로 自由黨에 選擧資金 1000萬圜을 供與했다는 事實이 言論에 大大的으로 報道되면서 3.15 不正選擧 를 거들었다는 非難을 받았다. [3] 成功한 事業家였지만, 自身에게 適用된 農地改革法 違反, 脫稅 , 密輸 嫌疑를 撫摩하기 위해 朴正熙 執權 後 釜山日報와 MBC 100% 株式과, 釜山 땅 10萬坪을 政權에 獻納했다. 金智泰의 遺族인 김도성, 김영찬, 김후성, 이명선, 김영철 等이 金智泰의 親日 履歷을 問題삼은 民間人 數 十名을 對象으로 集團 死者名譽毁損 訴訟을 걸어 論難이 일었다. 金智泰 遺族 側 擔當 法務法人은 율立으로, 民辯 所屬인 하주희가 代表辯護士로 있다. [4]

略歷 [ 編輯 ]

1908年 釜山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金京仲, 어머니는 慶州李氏로 외아들이다. 釜山에서 12臺를 살아온 그의 집안은 財力家였다. 祖父 김채곤은 通度寺 信徒會長을 맡았을 뿐 아니라 育英第(育英齊·釜山鎭初等學校 前身)라는 靑少年 敎育機關 運營에 獻身해 隣近 住民들로부터 '金四日 令監님'으로 稱頌을 받았다. [5] 父親인 김경중은 日本에 留學한 인텔리였으나 家庭에는 疏忽한 家長이었다. 金智泰가 세 살 때 어머니는 外家가 있는 동래군 書面 超邑吏로 移徙했다.

以後 釜山鎭公立普通學校에 進學했는데 그는 特히 算數에 素質을 보였다. 學業成績이 優秀했던 金智泰는 普通學校 5學年 때인 1922年 4月에 영주동에 있는 3年制의 釜山鎭公立商業學校(부산상고)에 入學했다. [6]

1927年 釜山公立商業學校 를 卒業하고, 같은 해 日本人 校長의 推薦을 받아 日帝 收奪의 核心 機關인 東洋拓殖株式會社 釜山支店에 入社하였다. 1932年 肺結核으로 東洋拓殖株式會社 를 退社하면서 蔚山地域 土地 2萬坪을 拂下받았다. 그의 資本家로서의 始初는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拂下받은 蔚山 땅 2萬 坪이었다. 釜山支店長에게 人心을 얻어 東京의 本社와 議論하여 拂下받았다고 傳해지며 이 땅을 基礎로 資本家로 成長한다. 人造絹을 生産하는 織物工場으로 事業을 始作했으나 얼마 못가 失敗한다. 以後 製紙業에 進出하여 지類製造, 지類貿易, 不動産業 等으로 中日戰爭에 一齊 軍納事業으로 富를 쌓았다.

朝鮮纖維韓國生死(週) 社長, 釜山商工會議所 初代會長, 釜山日報 社長, 慶南陸上競技聯盟會長 等으로 活動하였다. 1950年 無所屬으로 第2代 民議員, 1954年 自由黨 所屬으로 第3代 民議員을 歷任하였다.

解放 後 朝鮮絹織(前 아사히 絹織), 三和고무, 製絲業(製絲業) 等을 主軸으로 釜山 一帶의 실크財閥을 넘어 全國的인 資本家로 成長하였다. 1949年 釜山日報 를 引受하였다. 1958年 夫日奬學會 를 設立하였고, 1959年 釜山문화방송 을 開局하고, 1961年 文化放送 (서울)을 開局하였다.

1954年 12月 四捨五入 改憲 에 反對하다가 自由黨 該當 行爲者로 除名되었으며, 1957年 5月에 復黨했으나 1958年 5月 第4代 民議員 選擧에서 落選하고 政界에서 隱退하였다. 1960年 4.19 民主革命 當時 不正蓄財者 名單 1號에 올랐다. 1961年 5·16 軍士 政變 直後에 不正蓄財 嫌疑로 拘束되었으며, 1961年 12月 30日 不正蓄財 還收金으로 5億 4570萬 圜을 냈다.

그 後에 1962年 5月, 다시 國內財産逃避防止法, 關稅法 및 刑法, 農地改革法 違反 嫌疑로 朴正熙 軍事政府의 軍檢察로부터 懲役 7年을 求刑받았다. 같은 해 6月 20日 拘束된 狀態에서 釜山日報, 한국문화방송, 釜山문화방송 및 夫日奬學會 所有의 釜山 市內 땅 10萬 147坪을 5·16 奬學會에 無償寄贈한다는 寄附 承諾書에 署名하고 捺印하였다. 形式은 合法을 取했으나 强壓이었고 寄附 承諾書가 變造된 事實 等이 드러나기도 했다. [7]

金智泰는 1971年 8月 7日, 自筆로 쓴 (夫日奬學會·釜山日報·문화방송 等의) 讓渡經緯書를 5·16奬學會에 보냈다. 當時 情·財界에 釜山日報와 文化放送 賣却說이 播多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金氏는 이 書信에서 賣却한다면 創設者인 本人이 引受하겠다고 强調했다. 그 內容 中에는 夫日奬學會의 强壓的인 讓渡書類 날인 內容이 담겨있다. <<1962年 當時 中央情報部 釜山支部長 박용기氏에 依하여 本人이 釜山刑務所에 投獄되어 軍事裁判이 進行 中, 戒嚴司令部 法務官室에서 고원증氏가 미리 作成한 讓渡 書類를 持參하여 捺印을 강요당하고, 쇠고랑을 찬 손으로 本意 아닌 捺印을 하게 되었음>> [8]

1982年 死亡했다. 否認 파평尹氏. 葬地는 양산시 하북면 초산리 山17.

親日 活動 [ 編輯 ]

金智泰는 日本人 校長의 推薦을 받아 日帝 植民地 收奪의 核心 機關인 東洋拓殖株式會社 釜山支店에 入社하였다. 當時 內鮮一體 를 强調하던 時代 雰圍氣를 勘案하면 金智泰가 日本人 校長의 推薦을 받아 入社했다는 事實은 論難의 素地가 있다.

金智泰는 自身의 自敍傳 '나의 履歷書'(1976)에서 自身이 東洋拓殖株式會社 에 入社해 職務에 忠實했던 內容을 쭉 썼다. 1927-32年에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末端 社員으로 5年間 勤務한 것만으로는 親日派라 하긴 어렵다는 一角의 主張이 있으나, 5年은 當時 時代相을 勘案했을 때 民間 經歷으로 決코 짧은 時間이 아니었다. 이는 同時代 人物들의 履歷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言論人을 비롯해 日帝時代의 엘리트들 中 民間 分野에서 10年 勤續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따라서 當時 5年 經歷은 現在와 判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짧지 않은 期間이다. 다른 情況證據들과 함께 綜合해서 보면 金智泰의 親日 疑惑은 더 짙어진다.

金智泰의 資本家로서의 始初는 1932年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拂下받은 蔚山 땅 2萬 坪이었다. 金智泰가 日帝로부터 拂下받은 땅에서 收穫한 벼는 分割償還金을 갚고도 每年 100席 以上의 쌀이 남았다고 한다. [9] 當時에 日本人도 1萬坪 以上 拂下받기 힘들었는데, 金智泰가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5年을 勤務했다고 日帝에서 退職金으로 2萬坪을 내주었다는 點은 눈여겨 볼만한 事實이다. 金智泰 評傳(紋亢羅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 2003年 石筆出版社)에서도 東洋拓殖株式會社 의 拂下가 '엄청난 特惠'였음을 記錄하고 있다. [10]

金智泰는 東洋拓殖株式會社 가 준 땅을 擔保로 1934年에 貸出을 받아 人造絹을 生産하는 釜山鎭織物工場을 引受하게 된다. 첫 事業이 失敗로 끝나자, 그는 織物 事業을 하면서 알게 된 日本의 織物都賣商 하기노 商店의 紹介로 日本 오사카에 있는 이시이(石井) 鐵工所를 찾아가 支流 關聯 機械들(高速 權知(捲紙)機器)을 注文하고 3個月 동안 實習했다. 여기서 東洋拓殖株式會社 時節 拂下받은 땅이 그의 事業 再起의 契機가 된다. 金智泰는 歸國하여 蔚山農場을 擔保로 釜山 第2金融組合에서 融資를 받아 1935年 9月 범일동에서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를 設立한다. 原料는 日本 屈指의 製紙會社인 王子製紙와 太陽製紙에서 供給받았는데 事業은 날로 繁昌했다. 參考로, 王子製紙 (王子ホ?ルディングス株式?社, ?ji H?rudingusu Kabushiki-gaisha)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가 1872年 2月 12日 設立한 會社로, 現在도 日本 最大이자 世界 3位의 製紙會社로 有名하다. 當時 朝鮮의 事業家가 日本 屈指의 會社로부터 原料를 供給받는다는 것은 想像하기 어려운 特惠였다.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 設立 1年 뒤인 1937年 勃發한 中日戰爭으로 戰爭 特需까지 겹쳐 事業은 한層 더 活氣를 띄게된다.

事業에 自身이 생긴 金智泰는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의 支流 生産業에 머물지 않고 日帝의 또 다른 收奪機構人 朝鮮殖産銀行 釜山支店에서 巨額을 貸出받아 支流 貿易業에까지 事業을 擴張했다. 1970年 9月 19日 每日經濟 記事를 보면 이 때 朝鮮殖産銀行 의 日本人 釜山支店長은 金智泰가 동척에 勤務하던 時節 바둑을 같이 두던 相對로, 이러한 因緣으로 그에게 相當한 資本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11] 朝鮮殖産銀行 東洋拓殖株式會社 와 함께 獨立運動家 나석주 가 爆彈 投擲을 考慮했던 日帝의 代表的인 植民 收奪 機構였다. 한便, 金智泰는 不動産業에도 손을 대 釜山뿐 아니라 金海와 東萊, 慶州에까지 進出해서 旣存 蔚山農場 外에 東來와 金海의 農土를 中心으로 目算(牧山)農場을 設立하는 한便 釜山不動産會社까지 設立하게 된다.

1938年 5月 6日 者 동아일보 記事를 보면, 金智泰가 忠南 禮山郡 광시면에 있는 大興錦山을 鑛業權者로부터 買收하였다는 記事가 나온다. 當時 鑛山 事業은 日帝의 도움 없이는 圓滑히 進行하기가 어려웠다는 點에서 이 또한 金智泰가 日帝에 協力하여 事業의 繁昌을 圖謀했다는 ‘間接證據’ 또는 ‘情況證據’로 考慮될 수 있을 것이다. [12]

金智泰의 또 다른 親日疑惑은 그가 日帝의 戰爭遂行을 위한 郡守事業을 했다는 것이다. 支流와 不動産業으로 巨大資本을 蓄積한 金智泰는 1943年 日本人이 經營하던 朝鮮鑄鐵工業合資會社를 引受하게 된다. 이 會社는 鑄物 爲主의 機械類를 生産했는데 때마침 太平洋戰爭 中이라 軍需品 工業의 好景氣에 便乘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金智泰는 38歲 젊은 나이로 釜山에 居住하는 韓國人 中 戶別稅를 가장 많이 낼 程度로 財産家로서의 탄탄한 基盤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金智泰는 釜山鎭織物工場,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 朝鮮鑄鐵工業合資會社 等을 運營하면서 軍服, 包裝箱子, 軍需物資 生産을 하였고 戰爭特需로 돈을 번 것이다. [13] 卽, 中日戰爭 時期부터 日帝 軍納事業을 한 것은 事實이고, 結局 親日派 疑惑은 異例的인 日帝의 特惠에서 起因한다고 봐도 無妨하다. 日帝强占 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 第2條(正義)에 따르면 14. 日本帝國主義의 戰爭遂行을 돕기 위하여 軍需品 製造業體를 運營하거나 大統領令이 定하는 規模 以上의 金品을 獻納한 行爲 亦是 親日反民族行爲로 指目하고 있다. 金智泰 本人 亦是 東洋拓殖株式會社 로부터 蔚山 地域 2萬坪의 田畓을 10年 分割償還 條件으로 拂下 받아 이를 基盤으로 中日戰爭 의 一齊 郡守事業으로 富를 이뤘다고 自身의 回顧錄에서 밝힌 바 있다.

金智泰는 光復 以後 赤山(敵産) 企業이던 아사히絹織(朝鮮絹織株式會社의 前身)의 管理人을 맡게되었고, 이렇게 引受한 朝鮮絹織을 통해 貰를 擴張해나갔다. 1954年 신발製造工場으로는 當時 全國 最大 規模였던 三和고무를 引受해 全國 10代 財閥의 班列에 오르게 된다.

1960年 4.19 革命 當時 金智泰는 不正蓄財者 名單 1號에 올랐으며, 當時 釜山 學生들은 金智泰의 집으로 몰려가 “惡質親日財閥을 處斷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自由黨 時節에 國會 國防委員會 所屬으로 20餘萬 坪의 農地를 便法으로 購入한 바 있는데, 이것이 釜山 地域 民心을 激發시켰던 것이다. 이 當時 興奮한 市民들이 金智泰의 집으로 몰려가 騷亂을 피우고 甚至於 똥물을 뿌린 일이 있다. [14]

情況證據上 親日派로 볼 餘地는 많으나,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親日名單이나 親日人名事典에 收錄된 바는 없다. 친일인명사전을 整理할 때 政權의 影響力을 憂慮하는 視角이 있었다. 노무현 政府 時節이던 2003.8.24日 民主黨은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을 發議했다. 原案에는 親日行爲 對象을 "銀行會社 等의 幹部 또는 職員으로서 우리 民族의 財産을 收奪한 行爲, 經濟侵奪을 爲해 日本帝國主義가 만든 各種 經濟機關과 團體에 在職한 者 中 侵奪行爲에 積極協力한 者"로 規定하였다. 이에 根據하면 金智泰는 親日名單에 當然히 包含된다. 그러나 以後 무슨 理由에서인지 規定이 變更되었다. 改正案에는 "東洋拓殖株式會社 또는 殖産銀行 等의 中央 및 地方組織 幹部로서 우리民族의 財産을 收奪하기 위한 意思決定을 中心的으로 遂行하거나 그 執行을 主導한 行爲"로 親日行爲 對象이 縮小되었고 이 基準에 依해 金智泰는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지게 됐다(개정안은 2004.3.2日 本會議 通過). [15]

參考로 2012年 大韓民國 法院에서는 金智泰 親日을 主張했던 朴槿惠 의 死者名譽毁損 嫌疑를 "嫌疑없음"으로 終結시켰다. [16] 2019年 金智泰 遺族들이 提起한 郭尙道 · 羅卿瑗 · 閔庚旭 議員의 死者名譽毁損 嫌疑 亦是 無嫌疑로 終結되었는데, 이는 一般 國民들의 常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金智泰가 親日을 했다고 判斷할 수 있는 相當한 根據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法院의 判決과는 相關없이 現在 김도성, 김영찬, 김후성, 이명선, 김영철 等 金智泰의 遺族들은 民間人 數 十名을 對象으로 集團 死者名譽毁損 訴訟을 걸고 있다. 擔當 法務法人은 율立으로, 民辯 所屬인 하주희가 代表辯護士로 있다. [17]

遺族들의 金智泰 獨立運動 造作 [ 編輯 ]

2004年 金智泰의 遺族들은 金智泰가 獨立運動團體인 조선청년총동맹 의 "釜山支部 幹部職을 맡았다가 釜山警察署에 拘束까지 됐다"고 말했다. [18] 그러나 조선청년총동맹 은 1924年 220餘個의 社會主義 系統 靑年團體들이 主軸이 되어 만들어진 團體로 1925年 日帝의 依해 瓦解되었으며, 遺族들이 主張하는 時期에 金智泰의 나이는 不過 17-18歲에 不過했다. 當時 조선청년총동맹 을 이끌었던 김사국 , 최창익 , 이영 等은 各各 1895年生, 1896年生, 1889年生으로 모두 1908年生인 金智泰보다 10살 以上 많았다.

더욱이 金智泰의 遺族들은 金智泰가 1927~31年에 存在했던 社會主義 系列 獨立運動團體인 新幹會 의 幹部를 歷任하였고, 한글學校에서 夜學乙였다. [19] 그러나 이 時期는 金智泰가 東洋拓殖株式會社 에 入社하여 일하고 있을 때였다(김지태는 1927年 東洋拓殖株式會社 에 入社하여 1932年 肺結核으로 退社하였다). 日帝의 代表的인 收奪 機構였던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일하며 獨立運動團體의 幹部를 歷任했다는 論理도 말이 안되거니와 當時 그가 20~24歲의 나이에 錚錚한 社會主義者들을 제치고 巨大 社會團體의 幹部가 되었을 理가 萬無하다. 當時 新幹會의 主要 構成員은 安在烘 , 이상재 , 김병로 , 오화영 , 홍명희 , 허헌 等 金智泰의 아버지뻘 以上 되는 世代들이었다(더구나 金智泰는 校長의 推薦을 받고 동척에 入社했다).

이렇게 蓋然性이 떨어지는 主張들은 遺族들의 遺書 造作 疑惑과 맞물려 金智泰에 對한 親日 疑心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要因이 되기도 했다.

參考로, 金智泰와 同名異人인 抗日運動家 金智泰(1911-1937)가 社會主義 系列의 獨立運動團體에서 일하다 投獄되었다는 事實만 歷史的 事實로 確認된다. [20]

不正蓄財 [ 編輯 ]

성공회대 敎授 한홍구 와 金智泰의 遺族들은 金智泰가 親日派가 아니며 不正蓄財者가 아니라는 事實을 强調해 왔다. 이를테면 한홍구는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된 金朱烈의 寫眞을 실은 新聞社가 事實은 金智泰가 運營하던 釜山日報였다는 點을 浮刻하며 그를 自由黨과 李承晩에 맞서 싸운 의로운 人物인 것처럼 描寫했다. [21] 그러나 金智泰의 不正蓄財는 儼然한 歷史的 事實이다.

金智泰는 50年代에도 이미 非理로 口舌數에 올랐던 人物로 1959年 國稅廳으로부터 生死輸出視 2億 500여만환의 稅金을 逋脫한 嫌疑로 5開會辭 代表들과 함께 租稅處罰法 違反嫌疑로 告訴당했다. 이 亦是 遺族들은 自由黨에 迫害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앞서 言及되다시피 4.19 革命 以後 第2共和國 때도 그는 不正蓄財者로 指目되었다. 오히려 이기붕에게 朝鮮絹織의 脫稅默認兆로 自由黨에 選擧資金 1000萬圜을 供與한 事實이 알려지면서 3.15 不正選擧를 거들었다는 非難을 받았다. 더구나 5.16 軍事政變이 터지기 前에 不正蓄財者로 指目되어 當時 基準으로 5億換衣 不正蓄財 還收金을 追徵당했고, 1961年 2月에는 反民主行爲者 公民權制限 對象者 審査 名單에 올랐다. 金智泰는 場面 總理 및 第2共和國 의 核心 人士들과 個人的인 親分이 있는 關係였음에도 不拘하고 處罰을 避할 수 없었던 것이다.

朴正熙가 執權하기 以前인 1950年 後半~60年代 初盤의 言論 記事들은 金智泰가 不正蓄財를 했으며, 李承晩의 自由黨에 資金을 獻納했다는 것을 具體的인 額數와 時期까지 指摘하고 있다. [22] [23] [24] [25] [26] [27] [28]

1962年 高等軍法會議는 金智泰에게 懲役 7年刑을 求刑했는데, 이 때 金智泰의 不正蓄財 嫌疑는 크게 세 가지로 各各 農地改革法 違反, 脫稅 , 그리고 密輸 였다.

  • 農地改革法 違反: 1952年 釜山 大宴洞 마을에 '國軍이 土地를 徵發한다'는 所聞이 나돌면서 발칵 뒤집어졌다. 住民들은 洞네로 進入한 軍人들에게 "땅을 이렇게 빼앗아가는 法이 어디 있느냐”며 哀願했지만 當時 戰爭 中이던 雰圍氣 때문에 함부로 토를 달數가 없었다. 結局 마을住民들은 언젠가 되돌려 줄 것이라는 期待를 하며 삶의 터전을 내놓는다. 그러나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漠然한 期待는 當時 國防委員會 所屬이었던 金智泰가 징발당한 農民들의 땅을 引受하면서 물거품이 된다. 金智泰의 遺族이 朴正熙 政府에 빼앗겼다고 主張하는 土地 10萬 坪 中 4萬坪이 이 大宴洞 土地이며, 本來 主人은 땅을 부치던 이 地域 農民들이었다. 金智泰와 몇몇 브로커들이 國家에 徵發된 땅이라는 點을 惡用해 "政府에선 補償金을 주지 않으니 一旦 넘기라"는 甘言利說로 當時 배우지 못한 農民들을 속여 巧妙한 方法으로 引受해간 것이었다. 金智泰의 搜査를 맡았던 박용기 當時 中央情報部 釜山支部長은 “國軍에 徵發되어 있는 農民들 所有 田畓을 金氏가 國防委員이라는 身分을 活用해 歇값에 넘겨받아 致富 手段으로 利用했다”면서 “땅을 징발당한 農民 後孫들의 主張은 事實”이라고 確認했다. 또 “特히 땅 部分은 金氏가 農民들에게 怨聲을 사게 된 가장 큰 理由”라고 덧붙였다. 大宴洞을 비롯해 釜山 서면 一帶 土地 10萬 坪은 金智泰가 自身의 釋放을 위하여 釜山 土地를 國防部에 寄贈했으나 釋放되지는 못했다, 擔當檢事인 오영근이 땅을 받고 釋放해 줄 수는 없다며 釋放을 拒否했기 때문이다. 이에 金智泰는 황영주를 통해 國家再建最高會議와 接觸하여 5.16奬學會에 土地 寄贈을 提案하여 土地를 寄贈했다. 金智泰의 이 釜山 土地는 部日奬學會의 所有가 아니었으며, 全部 借名으로 所有하고 있었다.
  • 脫稅 : 1959年에 金智泰는 朝鮮紡織을 運營하면서 營業稅, 物品稅, 法人所得稅 等을 逋脫했다는 嫌疑로 檢察 調査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이기붕 에게 朝鮮絹織의 脫稅默認兆로 自由黨에 選擧資金 1000萬圜을 供與했다는 事實이 言論에 大大的으로 報道되면서 3.15 不正選擧를 거들었다는 非難을 받았다.
  • 密輸 : 軍事政權 當時 財産을 獻納한다고 覺書를 썼을 當時 金智泰의 집에서는 다이아몬드 半指, 外製 카메라 等 密輸品이 發見됐다. 參考로 이 時節은 李起鵬이 집에서 橘 한박스 나왔다고 辱먹고, 美製 中古 冷藏庫를 賂物로 받았다고 非難을 받던 時代였다.

朴正熙 政府와의 癒着 疑惑 [ 編輯 ]

金智泰 遺族들은 그동안 朴正熙 政府 時期 내내 夫日奬學會 財産을 빼앗기는 等 自身들이 逼迫받는 ‘犧牲者’의 位置에 있었음을 强調한 바 있다. 假令 2012年 金智泰의 26살 年下 아내 송혜영은 미디어스와의 單獨 인터뷰에서 62年에 朴正熙 政權이 '密輸罪'라고 했었던 다이아몬드 半指와 外製 카메라를 다 팔아야 할 程度로 生活이 窮乏했다고 말했다. [29] 그런데 當時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現在 市價로 約 10億이 넘는 高價品이다. 萬若 正말로 송혜영이 高價의 密輸品들을 市場에 내다 팔았다면 生計에 어려움을 느낄 何等의 理由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7캐럿은 金智泰 側의 主張이고, 當時 中央情報部 釜山支部의 搜査 責任者는 10캐럿이라고 主張한 바 있다.

金智泰가 1960~70年代 내내 國內 10代 財閥로 乘勝長驅했다는 點을 勘案했을 때, 또 金智泰 會社의 全盛期 亦是 1960~70年代였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30] , 朴正熙 政府 時節 生活苦로 苦生했다는 송혜영의 主張은 根據를 잃는다. 金智泰는 1968年에는 國內에서 李秉喆 다음으로 出資 企業體들을 많이 所有하고 있는 企業人으로 報道된 적도 있다. [31]

金智泰는 1962年 朴正熙 政府에게 半强制的으로 財産 및 土地를 上納한 以後 오히려 政權과 癒着하여 事業이 더 繁昌하게 되었다고 疑心해볼 수 있다. 淨水場學會 側은 金智泰 遺族의 訴訟과 關聯하여 “金 氏는 1962年 財産 獻納 以後 政府로부터 海外借款, 銀行借入 等에서 많은 惠澤을 받았다” [32] 고 主張하였으며, 前職 中央情報部 高位 官僚 亦是 비슷한 趣旨의 證言을 한 바 있다. "5·16 以後 當時로는 調達받기 어려운 次官 1800萬 달러를 融資받는 等 (金智泰는) 革命政府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當時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어요. 特惠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生死나 신발 等을 育成해서 엄청나게 富者가 됐고 해마다 輸出商을 받았어요. 그리고 朴正熙 政權 以後 子息들이 企業을 잘못 運營해 結局 不渡가 난 겁니다." [33]

實際로 金智泰는 1962年 以後 꾸준히 會社를 발전시켜 1968年에는 朴正熙 政府로부터 石塔産業勳章을, 1969年에는 銅塔産業勳章을, 1970年에는 은탑産業勳章을 받았다. [34] [35]

1976年 1月 金智泰가 펴낸 그의 自敍傳 '나의 履歷書'에는 第7回 輸出의 날 記念式에 朴正熙와 함께 찍은 寫眞이 添附되어 있다. 또 金智泰의 自敍傳에는 朴 前 大統領이 直接 쓴 ‘盛業百歲(盛業百世)’라는 揮毫도 나오는데, ‘一九六八年 五月 大統領 朴正熙’ 옆에 樂觀이 찍혀 있고, 右側 上段에 ‘位金智泰社長(爲金智泰社長)’이라고 적혀 있다. [36] 따라서 金智泰가 朴正熙에 對해 盲目的인 惡感情만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1973年, 金智泰는 東方證券 을 引受해 金融業에도 손을 뻗었다. 1979年, 第2次 午日쇼크의 餘波로 會社가 휘청거릴 때는 朴正熙 政府로부터 巨額의 救濟金融을 받기도 했다. [37] 萬若 朴正熙 政府가 金智泰를 逼迫하기만 했다면 이런 일들은 不可能 했을 것이다. 또 金智泰가 朴正熙 政府 時期 自身의 2世들에게 正常的으로 會社 經營權을 넘겨주는 일도 不可能했을 것이다. [38]

이렇다 보니 軍事政權과의 癒着 疑惑이 있다. 金智泰는 事業을 擴張해야 하고, 朴正熙는 經濟를 성장시켜야 했으니 各自의 必要에 따라 조심스럽게 關係를 維持하는 不可近不可遠 關係를 맺었다는 疑惑이다.

淨水場學會 返還訴訟 [ 編輯 ]

朴正熙 政權이 만든 5.16 奬學會(82年 淨水場學會 로 名稱이 變更 됨)은 1961年 金智泰가 獻納한 釜山日報, 한국문화방송, 釜山문화방송(MBC)李 母胎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 分明한 事實이다. 金智泰의 遺族들은 淨水場學會 가 金智泰가 1958年 設立한 夫日奬學會 의 財産을 母胎로 만들어졌음을 主張하며 國家를 相對로 株式返還訴訟을 걸었다. 이 때문에 18代 大選 當時 淨水場學會 贓物論爭이 벌어졌다.

그러나 金智泰의 夫日奬學會 는 애初에 이름만 있지 形體가 없는 小規模 團體에 지나지 않았다. 基本的으로 奬學財團을 設立하려면 문교부의 認可를 받아야 하며, 基本 財産 保有가 必須的인 設立 要件인데, 夫日奬學會 는 公益財團으로 設立許可를 받은 적도 없고 基本財産 또한 單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夫日奬學會 라는 非營利法人은 法的으로 存在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거기다 淨水場學會 가 金智泰가 100% 全部를 寄附한 것은 아니다. 現 淨水場學會 財産의 15.96%만 金智泰가 寄附하고, 나머지는 이병철 삼성그룹 會長, 박흥식 化身産業 社長 等 國內企業人과 一般國民, 在美僑胞 等이 寄附한 基金이다. 여기에 석호필博士 같은 親韓派 外國人들이 寄附한 資金도 資料를 통해 알 수 있다.

金智泰의 遺族들은 朴正熙가 5.16 쿠데타 居士資金으로 500萬 圜을 金智泰에게 要請한 것에 拒絶當한 怏心을 품고 財産을 빼앗겼다고 主張하고 있다. 그런데 金智泰는 1976年 '나의 履歷書'라는 自敍傳을 냈는데, 여기엔 朴正熙나 그 勢力이 革命居士資金을 要請했다는 內容이 없다. 오히려 이 冊에는 朴正熙의 親筆 揮毫와 같이 찍은 寫眞이 添附되어있다.

國家情報院 過去事件眞實糾明을 통한발전위원회는 2005年 7月 22日 夫日奬學會(現 淨水場學會) 獻納과 京鄕新聞 賣却 疑惑 事件 調査 結果를 發表했다.

  • 첫째, 朴正熙 國家 再建 最高會議 議長의 指示에 依해 搜査되었음이 當時 中央情報部 支部長이었던 박용기 氏의 陳述에서 確認되었으며,
  • 둘째, 62年 6月 20日 金智泰가 拘束狀態에서 强壓에 依해 作成된 寄附承諾書에 署名을 했으나 이마저도 拘束 中 寄附의 疑惑을 지우기 위해 釋放 以後인 6月 30日로 變調되었음이 國立科學搜査硏究所의 筆跡鑑定에 依해 確認되었으며,
  • 셋째, 朴正熙 最高會議 議長의 大邱師範 動機인 부산일보 主筆 황용주의 釋放을 빌미老漢 金智泰에 對한 財産抛棄 慫慂이 事實로 밝혀졌으며,
  • 넷째, 경향신문의 賣却過程에서도 中央情報部長 김형욱 을 앞세워 몇 番의 間諜事件을 통해 壓力을 行使하였음이 確認되었으며,
  • 다섯째, 一連의 過程 속에 中央情報部와 國家再建 最高會議를 비롯한 國家 主要機關의 組織的이고 緻密한 計劃 下에 이루어졌음이 國家機關에 依해 最初로 事實로 糾明되었다. [39] [40] [41]

2007年 5月 29日 眞實 和解를 위한 過去史委員會는 5.16 軍士쿠데타로 執權한 政府가 淨水場學會(옛 夫日奬學會) 財産을 强奪했다고 結論내렸다. 1962年 釜山의 實業家 金智泰 氏가 土地와 文化放送 株式 等 財産을 國家에 獻納한 것은 拘束 搜査 等 國家權力의 强壓 때문이었다고 判斷했다. 過去事委員會는 國家가 金 氏 遺族에게 謝過하고 獻納받은 財産도 返還하라고 勸告했다. [42]

眞實糾明 決定을 받은 金氏의 遺家族들은 2010年 6月에 法院에 淨水場學會와 國家를 相對로 낸 株式讓渡 等 請求訴訟을 냈다. 金氏 側은 "朴 前 大統領이 死亡하고 난 以後 1980年에 土地 返還請求 意思를 表示했고, 過去事整理委員會의 眞實糾明 決定을 送達받은 以後 損害賠償을 請求한 것이므로 公訴時效가 남아있다"고 主張했다.

하지만 釜山에서 進行된 訴訟에서 1·2審 裁判部는 모두 "金 氏가 强迫으로 인해 스스로 意思決定을 할 수 있는 餘地를 ‘完全히’ 박탈당한 狀態에서 土地를 獻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贈與의 意思表示는 强迫을 理由로 取消할 수 있지만 金氏가 株式을 贈與한 1962年 6月 20日부터 10年이 經過할 때까지 贈與 行爲를 取消했다고 볼 證據가 없으므로 取消權은 이미 消滅했다"고 밝혔다. (事件番號: 2010加合56697) 大法院은 2014年 2月 13日 金智泰氏 長男 永久 氏를 비롯한 遺家族 6名이 淨水場學會와 國家를 相對로 낸 株式讓渡 等 請求訴訟 上告審에서 審理不續行 棄却 決定을 내렸다. [43]

卽, 軍事政府 時節 이루어진 金智泰의 個人 財産 寄附는 (朴正熙 政府 및 中央情報部의 ‘强壓’이 一部 있었다 할지언정) 贈與 行爲 取消를 要請하지 않았기 때문에 '完全한 强奪'은 아니라는 것이 裁判部의 公式 判決이며, 金智泰 本人이 拘束狀態를 면하기 위해서 軍事政府와 協商을 벌인 結果로 解釋할 수 있을 것이다.

金智泰 遺族의 遺書造作 및 稅金逋脫 [ 編輯 ]

金智泰는 1972年부터 아들을 各 會社 代表로 임명했다. 長男에겐 朝鮮絹織, 次男에겐 韓國生死, 三南에겐 三火를 맡겼다. 問題는 그가 經營 一線에서 물러나면서 事情이 나빠졌다. 삼화는 신발 輸出이 活氣를 띤 德分에 잘나가 1977年 綜合貿易商社가 됐으나 大規模 不實債券이 發生해 1979年 銀行管理를 받게 됐다. 다른 두 會社의 事情도 비슷했다. 金智泰는 所有하고 있던 不動産을 擔保로 提供해 세 會社가 銀行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이 돈의 性格에 對해 遺族들은 그들끼리의 訴訟에서 '救濟金融'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3社가 銀行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한 1982年 4月 金 氏가 他界해 遺族들은 相續을 받게 됐다. 相續은 財産뿐만 아니라 債務도 함께 물려받는다. 그들은 金 氏가 銀行에 擔保 設定한 不動産도 相續받아야 한다. 그런데 세 企業이 銀行 돈을 갚지 못하면, 巨額의 相續稅를 내고 相續받은 그 不動産을 銀行에 넘겨야 했다. 企業들이 銀行 빚을 갚을 可能性은 稀薄했다. 相續稅만 날리게 된 것이다.

金 氏 死亡 1年이 지난 1983年 7月 7日 遺族들은 동부산稅務署에 相續稅를 申告하면서, 이 不動産을 세 아들이 經營하는 會社에 贈與한다고 쓰여 있는 金 氏의 遺書를 提出했다. 遺書는 死亡 7個月 前인 1981年 9月 15日 作成한 것으로 돼 있었다. 遺書가 나오면 贈與는, 金 氏가 死亡하면서 바로 이뤄진 것으로 본다. 金氏의 死亡과 同時에 企業으로 土地가 有增됐으니 遺族들은 相續稅를 낼 必要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金 氏의 自筆 遺言書가 나왔다고 하자 稅務署 側은 筆跡이 다른 것 같다며 金 氏의 筆跡을 알 수 있는 文書 提出을 要求했다. 遺族들은 生前에 金氏가 쓴 便紙를 내놓았다. 그런데 筆跡이 달랐다. 그리하여 遺書를 놓고 眞僞 論爭이 일었다.

1984年 2月 동부산稅務署는 金 氏의 遺書를 認定하지 않고 相續稅 116億 원을 賦課했다. 그 後 釜山地法에서 勝訴한 遺族들은 國稅審判所에 審判 請求를 했다. 이 請求가 棄却되자 그해 12月 遺族 全員의 이름으로 大邱高法에 相續稅 賦課 取消 訴訟을 냈다. 遺族들은 이 遺書가 眞짜라는 것을 立證하기 위해 1982年 8月 釜山地法에서 받은 檢印 심판서 等을 證據로 提出했다. 그러자 1986年 3月 大邱高法은 原告 勝訴 判決을 했다. 동부산稅務署는 不服해 上告했으나 1986年 12月 大法院이 棄却해 遺族들은 最終 勝訴를 確定지었다. 相續稅 賦課를 取消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努力에도 不拘하고 세 企業은 2世 經營體制로 들어선 後 沒落의 길을 걸었다. 1982年 東方證券 태평양화학 에 팔았고, 朝鮮絹織도 1985年 거제리 工場을 팔아 下請業體로 轉換했다. 以後 1992年에 韓國生死와 삼화가 不渡났고, 朝鮮絹織도 1995年 中國으로 移轉하려다 失敗한 後 徐徐히 門을 닫았다.

그러던 2006年 金智泰의 6男이 서울中央地法에 長男, 次男, 3男 等을 相對로 한 구상금 請求 訴訟을 냈다. 6男은 金智泰 氏 첫 夫人의 所生인데 繼母, 繼母가 낳은 子女, 金 氏의 두 小室이 낳은 子女 等 異腹兄弟들과 함께 親兄들을 相對로 구상금 請求 訴訟을 내면서 '遺書는 假짜였다'고 主張했다.

1審에선 求償權 債券은 이미 消滅했다는 理由로 原告 敗訴 判決을 내렸으나, 2010年 大法院은 原審을 破棄하고 서울高法으로 歡送했다. (事件番號: 2010나54094) 2011年 5月 還送審을 맡은 서울高法 民事9部는 앞에서 整理한 대로 金 氏의 遺書가 假짜인 것을 認定했다.

1980年代 짜장면 곱배기의 價格이 500원이고, 會社員들의 平均 月給이 50萬원이었던 것을 考慮해보면, 80年代의 116億은 오늘날 930億 程度에 該當하는 巨額이다. 卽, 金智泰 遺族들이 金智泰의 遺書를 造作한 것이 事實이라면 그들은 無慮 930億이나 되는 稅金을 不法的으로 逋脫한 것이 된다.

政治的인 論難을 떠나, 遺族들이 財産 때문에 金氏 遺書를 造作한 것이 事實이라면 그들이 淨水場學會를 빼앗겼다며 國家에 返還訴訟을 提起하는 것도 眞情性이 疑心받게 된다.

以外 履歷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0年 總選 2代 國會議員 慶南 釜山市 甲 無所屬 12,521票
28.89%
1位 初選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慶南 釜山市 甲 自由黨 27,659票
33.97%
1位 再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慶南 釜山市 부산진구 甲 無所屬 9,911票
22.05%
2位 落選

各州 [ 編輯 ]

  1. 링크
  2. “[釜山 經濟 野史] 人物便 金智泰 ① 光復以前 企業活動”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3.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4. “[하주희 辯護士] 金智泰 遺族 訴訟 代理 맡아 - 율립消息 > 法人消息 > 法務法人 율립”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5. “[釜山 經濟 野史] <23> 人物便 金智泰 ① 光復以前 企業活動” . 釜山日報. 2009年 1月 13日.  
  6. “[李漢久의 韓國財閥社·43]韓國生死-1 事業과의 因緣” . 경인일보. 2018年 1月 23日.  
  7. “文化放送 寄附承諾書 變造됐다” . 시사저널. 2012.02.26.  
  8. “淨水場學會 誕生의 祕密 담은 文件 單獨 入手” . 시사저널. 2012.02.25.  
  9. “[釜山 經濟 野史] 人物便 金智泰 ① 光復以前 企業活動”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0. “大邱 中·南區 國會議員 郭尙道 : 네이버 블로그”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3. “[釜山 經濟 野史] 人物便 金智泰 ① 光復以前 企業活動”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4. “大邱 中·南區 國會議員 郭尙道 : 네이버 블로그” . 2020年 12月 6日에 確認함 .  
  15. “大邱 中·南區 國會議員 郭尙道 : 네이버 블로그”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16. “朴槿惠, 金智泰氏 '死者名譽毁損' 訴訟서 "嫌疑없음 "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17. “[하주희 辯護士] 金智泰 遺族 訴訟 代理 맡아 - 율립消息 > 法人消息 > 法務法人 율립”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18. “故 金智泰氏 親日派 風聞에 遺族들 反駁”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19. 박재현 (2019年 10月 30日). “金智泰 氏 遺族, '親日 人士' 主張 편 郭尙道 議員 等 告訴(綜合)”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0. “金智泰 | 大韓民國 獨立運動家”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1. “朴正熙는 왜 〈부산일보〉에 눈毒들였나” . 2012年 7月 30日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3.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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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7.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29. " 朴槿惠 年俸 20億 받을 때 난 悲慘한 生活…죽기전 恨 풀고 싶어" - 미디어스”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0.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2. “金智泰 親日-不淨腐敗 疑惑 攻防 眞實은...” . 2019年 8月 19日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3. “淨水場學會로 얽힌 朴正熙와 金智泰” . 2012年 10月 18日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5.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6. “淨水場學會로 얽힌 朴正熙와 金智泰” . 2012年 10月 18日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7.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2020年 12月 8日에 確認함 .  
  39. 朴正熙, 중정에 夫日奬學會·경향 强奪 指示 오마이뉴스 05.07.22
  40. 淨水場學會 傾向賣却 事件 眞相糾明 미디어오늘 2005年 2月 3日
  41. " 夫日奬學會 寄附承諾書 一部 變造 " . 聯合뉴스. 2005.07.22.  
  42. “過去史委 "夫日奬學會 强奪 맞다”” . 시사저널. 2007.05.29.  
  43. “金智泰 遺族, '淨水場學會 返還訴訟' 敗訴 確定” . 뉴시스. 2014.02.28.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