淨水場學會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財)淨水場學會
形態 財團法人
創立 1962年 7月 14日 [1]
創立者 大韓民國 政府( 國家再建最高會議 )
市場 情報 非上場
本社 所在地 서울特別市 중구 정동길 3

(財)淨水場學會 (正修?學會) 또는 5.16 奬學會 大韓民國 의 奬學 財團이다. 1962年 6月 4日 國家再建最高會議 硏究報告(國務會議)에서 「5·16 奬學會 設立」안이 報告되었다. 設立 趣旨는 5.16 을 契機로 國家再建과 人間改造의 革命 [2] 精神이 世代를 이어가며 靑少年들 사이에서 電解흐르는 奬學事業을 汎國民的이며 擧族的으로 推進하는 中心機構가 되고자 하는 데 있다. [3] 奬學 事業은 中·高等學校와 大學校 및 碩士·博士 學位 過程, 其他 硏究生 等을 對象으로 하였고, 奬學基金은 國內外 寄附金(喜捨金)으로 마련하고자 하였다. 報告 以前부터 美國 하와이 在外僑民들로부터 1萬 달러의 設立資金이 들어왔으며, 民間 人士들도 寄附 意向을 밝혀왔다. [4]

歷史 [ 編輯 ]

經濟的인 어려움으로 學業과 硏究를 할 수 없는 有能한 人材들을 支援하기 위해 5.16 以後 大韓民國 統治機構가 된 國家再建最高會議 文敎社會委員會가 세운 團體이다. 그 前身은 1958年 金智泰 가 設立한 夫日奬學會 다. 金智泰 는 그동안 꾸준히 親日 疑惑이 있던 釜山 出身의 企業人으로, 自身에게 適用된 農地改革法 違反, 脫稅, 密輸 等의 嫌疑를 撫摩하기 위해 1962年 朴正熙 政府에게 夫日奬學會와 釜山日報 , 文化放送 (MBC)를 넘겼다. 1962年 5·16奬學會 로 設立했으나 1979年 朴正熙의 事後 1982年 朴正熙 의 ‘正’과 그의 夫人 육영수 의 ‘數’를 따와 現在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現在 文化放送 持分 中 30% 그리고 釜山日報 持分 100%를 保有하고 있다. 朴槿惠 가 8代 理事長을 歷任했고, 최필립 9代 理事長을 이어 김삼천이 10代 理事長을 맡고 있다. 國家에 獻納했다던 夫日奬學會를 이어받은 淨水場學會는 現在 박근혜 側近이 理事長을 맡고 있다. [5]

運營 [ 編輯 ]

淨水場學會는 主로 朴正熙의 親姻戚과 側近이 運營하여 왔다. 朴正熙의 同壻인 조태호 와 딸인 朴槿惠 가 各各 5·8代 理事長을 지냈고,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 朴浚圭 前 부산일보 社長, 진혜숙 前 靑瓦臺 總務祕書 等 側近들이 理事를 지냈다. 淨水場學會는 奬學 活動을 통해 ‘人的 네트워크’도 構成하고 있다. 奬學生들은 大學에 다닐 때는 ‘ 청오回 ’, 卒業 뒤에는 ‘ 상청회 ’라는 모임에 加入된다. 1966年 만들어진 상청회는 敎授 會員이 400餘名이며, 金淇春 前한나라당 議員과 현경대 새누리黨 濟州道黨委員長 等 政治人도 加入되어 있다. [6] [7]

資産 [ 編輯 ]

2012年 現在 淨水場學會의 資産은 다음과 같다.

種類 內容
株式 MBC 持分 30% (6萬株)
釜山日報 持分 100% (20萬株)
不動産 서울 中區 정동 경향신문사 敷地 2,385m²
金融 銀行預金 200億 [8]
기타 住商複合아파트 한 채
總資産 238億 6000餘萬원 [8]

1995年 9月 22日 約 130億의 資産을 保有하고 있던 淨水場學會는 15年 동안 100億원 假量의 資産이 늘어났다. [8]

理事長 [ 編輯 ]

1962年 7月 14日 設立된 淨水場學會의 歷代 理事長은 다음과 같다. [9]

名稱 聲明 任期 履歷
5.16 奬學會 이관구 1962年 ~ 1965年 再建國民運動本部腸
엄민영 1965年 ~ 1968年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 拷問
김현철 1968年 ~ 1979年 國務總理, 공화당 創黨 發起人
최석채 1979年 ~ 1980年 朴正熙 前 大統領 親舊
1982年 1月 14日 淨水場學會로 改稱
淨水場學會 조태호 1980年 ~ 1988年 朴槿惠 姨母夫
金昌煥 1988年 ~ 1992年 育英財團 어린이會館腸
김귀곤 1992年 ~ 1995年 奬學金 受惠者 모임 상청회 拷問
朴槿惠 1995年 ~ 2005年 새누리당 大選候補, 18代 大統領
최필립 2005年 ~ 2013年 朴正熙 前 大統領 公報祕書官(1978)
리비아 大使(1990)
김삼천 2013年 ~ 現在 상청회 會長

論難 [ 編輯 ]

夫日奬學會를 所有한 金智泰는 5.16 쿠데타로 執權한 朴正熙 政權에게 夫日奬學會와 釜山日報, mbc를 넘겼다. 國家에 獻納했으나 所有는 朴正熙 一家가 獨占하고 있다. 쿠데타로 執權한 朴正熙 軍事政權은 當時 釜山의 代表的 企業人이자 釜山日報 四柱이던 金智泰 氏를 不正蓄財者로 몰아 金 氏의 財産인 釜山日報와 한국문화방송, 釜山문화방송을 强奪해 5·16奬學會를 出帆시켰다. 淨水場學會의 設立經緯 및 實所有主에 對한 論難이 存在한다. [10] [11] 또한 橫領과 脫稅疑惑이 일기도 했다. [12]

設立 過程 論難 [ 編輯 ]

5.16奬學會의 母胎인 夫日奬學會 의 所有權이 移轉되는 過程이 法律的·政治的으로 瑕疵가 없는 ‘企業家의 獻納’이냐, 아니면 ‘權力의 强奪’이냐 與否가 論難이다. 또한 國家로 獻納한 財産을 5.16 奬學會로 不法 移轉한 것도 論難이 되고 있다. 夫日奬學會는 金智泰 의 財産으로 만들어진 奬學會였다. 金智泰는 5.16 이듬해인 1962年 3月 財産海外逃避 嫌疑 等으로 當時 中央情報部 에 逮捕돼 두 달 程度 拘禁生活을 하다 夫日奬學會와 釜山日報 , 한국문화방송 , 釜山문화방송 等의 運營權 抛棄覺書를 쓴 며칠 뒤 公訴取下로 풀려났다. 朴槿惠는 여러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夫日奬學會의 財産 抛棄는 獻納이었다"고 主張했다. 하지만 金智泰의 큰아들 김영구 前 朝鮮絹織 會長은 "그해 5月 25日 釜山 郡守基地司令部 法務官室에서 아버지가 手匣을 찬 狀態로 運營權 抛棄覺書에 署名하고 圖章을 찍었다"며 "내가 長男이라 印鑑 圖章을 가지고 가, 現場을 똑똑히 目擊했다"고 主張했다. 5.16 奬學會는 金智泰가 財産을 '獻納'韓 닷새 뒤 設立됐다. [13]

그러나 金智泰의 夫日奬學會 는 애初에 이름만 있지 形體가 없는 小規模 團體에 지나지 않았다. 基本的으로 奬學財團을 設立하려면 문교부의 認可를 받아야 하며, 基本 財産 保有가 必須的인 設立 要件인데, 夫日奬學會 는 公益財團으로 設立許可를 받은 적도 없고 基本財産 또한 單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夫日奬學會 라는 非營利法人은 法的으로 存在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거기다 淨水場學會가 金智泰가 100% 全部를 寄附한 것은 아니다. 現 淨水場學會 財産의 15.96%만 金智泰가 寄附하고, 나머지는 이병철 삼성그룹 會長, 박흥식 化身産業 社長 等 國內企業人과 一般國民, 在美僑胞 等이 寄附한 基金이다. 여기에 석호필博士 같은 親韓派 外國人들이 寄附한 資金도 資料를 통해 알 수 있다.

淨水場學會는 겉으로는 公益으로 包裝했지만 實際로는 이를 私有化하고 있다는 批判도 있는데, 實際 朴槿惠는 1995年부터 2005年까지 淨水場學會 理事長職을 맡기도 했다. 이와 關聯하여 金永三 은 淨水場學會와 育英財團을 '不正蓄財의 手段'이라고 批判하기도 했다. [14] 이에 앞서 2005年 言論勞組 淨水場學會 共同對策委는, 淨水場學會의 文化放送 株式, 釜山日報 株式, 嶺南大, 不動産 等 그 財産을 最小 1兆원이라고 推算했으며, 많게는 10兆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15]

淨水場學會 不法 獻納 確認 [ 編輯 ]

國家情報院 過去事件眞實糾明을 통한발전위원회는 2005年 7月 22日 夫日奬學會(現 淨水場學會) 獻納과 京鄕新聞 賣却 疑惑 事件 調査結果를 發表했다.

  • 첫째, 朴正熙 國家 再建 最高會議 議長의 指示에 依해 搜査되었음이 當時 中央情報部 支部長이었던 박용기 氏의 陳述에서 確認되었으며,
  • 둘째, 62年 6月 20日 金智泰가 拘束狀態에서 强壓에 依해 作成된 寄附承諾書에 署名을 했으나 이마저도 拘束 中 寄附의 疑惑을 지우기 위해 釋放 以後인 6月 30日로 變調되었음이 國立科學搜査硏究所의 筆跡鑑定에 依해 確認되었으며,
  • 셋째, 朴正熙 最高會議 議長의 大邱師範 動機인 부산일보 主筆 황용주의 釋放을 빌미老漢 金智泰에 對한 財産抛棄 慫慂이 事實로 밝혀졌으며,
  • 넷째, 경향신문의 賣却過程에서도 中央情報部長 김형욱 을 앞세워 몇 番의 間諜事件을 통해 壓力을 行使하였음이 確認되었으며,
  • 다섯째, 一連의 過程 속에 中央情報部와 國家再建 最高會議를 비롯한 國家 主要機關의 組織的이고 緻密한 計劃 下에 이루어졌음이 國家機關에 依해 最初로 事實로 糾明되었다. [16] [17] [18]

朴槿惠는 淨水場學會를 國家獻納 또는 理事陣을 交替해야 한다는 主張에 對해 淨水場學會와 自身은 關聯이 없다고 主張했다. 朴槿惠는 淨水場學會는 公益財團이기 때문에 理事陣이 곧 主人이며, 이미 社會에 還元된 것이기 때문에 더 以上 還元할 수 없다고 主張했다. [19] [20] 하지만 이런 發言에 對해 '그렇다면 그들 主張대로 公益法人인 育英財團을 두고, 朴槿惠의 兄弟들끼리 싸우는 理由가 무엇이냐'며 朴槿惠의 認識과 그 家族의 行態에 對한 批判도 끊이지 않고 있다. [15]

2007年 5月 29日 眞實 和解를 위한 過去史委員會는 5.16 軍士쿠데타로 執權한 政府가 淨水場學會(옛 夫日奬學會) 財産을 强奪했다고 結論내렸다. 1962年 釜山의 實業家 金智泰 氏가 土地와 文化放送 株式 等 財産을 國家에 獻納한 것은 拘束 搜査 等 國家權力의 强壓 때문이었다고 判斷했다. 過去事委員會는 國家가 金 氏 遺族에게 謝過하고 獻納받은 財産도 返還하라고 勸告했다. [21]

淨水場學會 返還 訴訟敗訴 [ 編輯 ]

眞實糾明 決定을 받은 金氏의 遺家族들은 2010年 6月에 法院에 淨水場學會와 國家를 相對로 낸 株式讓渡 等 請求訴訟을 냈다. 金氏 側은 "朴 前 大統領이 死亡하고 난 以後 1980年에 土地 返還請求 意思를 表示했고, 過去事整理委員會의 眞實糾明 決定을 送達받은 以後 損害賠償을 請求한 것이므로 公訴時效가 남아있다"고 主張했다.

하지만 釜山에서 進行된 訴訟에서 1·2審 裁判部는 모두 "金 氏가 强迫으로 인해 스스로 意思決定을 할 수 있는 餘地를 ‘完全히’ 박탈당한 狀態에서 土地를 獻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贈與의 意思表示는 强迫을 理由로 取消할 수 있지만 金氏가 株式을 贈與한 1962年 6月 20日부터 10年이 經過할 때까지 贈與 行爲를 取消했다고 볼 證據가 없으므로 取消權은 이미 消滅했다"고 밝혔다. (事件番號: 2010加合56697) 大法院은 2014年 2月 13日 金智泰氏 長男 永久 氏를 비롯한 遺家族 6名이 淨水場學會와 國家를 相對로 낸 株式讓渡 等 請求訴訟 上告審에서 審理不續行 棄却 決定을 내렸다.

卽, 軍事政府 時節 이루어진 金智泰의 個人 財産 寄附는 (朴正熙 政府 및 中央情報部의 ‘强壓’이 一部 있었다 할지언정) 贈與 行爲 取消를 要請하지 않았기 때문에 '完全한 强奪'은 아니라는 것이 裁判部의 公式 判決이며, 金智泰 本人이 拘束狀態를 면하기 위해서 軍事政府와 協商을 벌인 結果로 解釋할 수 있을 것이다.

2012 大選 政治 爭點化 [ 編輯 ]

2012年 大選에서 박근혜 候補의 檢證 過程에서 淨水場學會 問題가 擧論되고 있으며 政治爭點化되었다. 野圈에서 眞相糾明 要請과 政治爭點化를 主導하였다. 反對로 박근혜 候補와 새누리당 側은 金智泰 가 親日 行跡을 했다고 主張하였다. [22] 金智泰의 親日疑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金智泰는 日本人 校長의 推薦을 받아 日帝 植民地 收奪의 核心 機關인 東洋拓殖株式會社 釜山支店에 入社하였다. 當時 內鮮一體 를 强調하던 時代 雰圍氣를 勘案하면 金智泰가 日本人 校長의 推薦을 받아 入社했다는 事實은 論難의 素地가 있다.

金智泰는 自身의 自敍傳 '나의 履歷書'(1976)에서 自身이 東洋拓殖株式會社 에 入社해 職務에 忠實했던 內容을 쭉 썼다. 1927-32年에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末端 社員으로 5年間 勤務한 것만으로는 親日派라 하긴 어렵다는 一角의 主張이 있으나, 5年은 當時 時代相을 勘案했을 때 民間 經歷으로 決코 짧은 時間이 아니었다. 이는 同時代 人物들의 履歷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言論人을 비롯해 日帝時代의 엘리트들 中 民間 分野에서 10年 勤續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따라서 當時 5年 經歷은 現在와 判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짧지 않은 期間이다. 다른 情況證據들과 함께 綜合해서 보면 金智泰의 親日 疑惑은 더 짙어진다.

金智泰의 資本家로서의 始初는 1932年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拂下받은 蔚山 땅 2萬 坪이었다. 金智泰가 日帝로부터 拂下받은 땅에서 收穫한 벼는 分割償還金을 갚고도 每年 100席 以上의 쌀이 남았다고 한다. 當時에 日本人도 1萬坪 以上 拂下받기 힘들었는데, 金智泰가 東洋拓殖株式會社 에서 5年을 勤務했다고 日帝에서 退職金으로 2萬坪을 내주었다는 點은 눈여겨 볼만한 事實이다. 金智泰 評傳(紋亢羅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 2003年 石筆出版社)에서도 東洋拓殖株式會社 의 拂下가 '엄청난 特惠'였음을 記錄하고 있다.

金智泰는 東洋拓殖株式會社 가 준 땅을 擔保로 1934年에 貸出을 받아 人造絹을 生産하는 釜山鎭織物工場을 引受하게 된다. 첫 事業이 失敗로 끝나자, 그는 織物 事業을 하면서 알게 된 日本의 織物都賣商 하기노 商店의 紹介로 日本 오사카에 있는 이시이(石井) 鐵工所를 찾아가 支流 關聯 機械들(高速 權知(捲紙)機器)을 注文하고 3個月 동안 實習했다. 여기서 東洋拓殖株式會社 時節 拂下받은 땅이 그의 事業 再起의 契機가 된다. 金智泰는 歸國하여 蔚山農場을 擔保로 釜山 第2金融組合에서 融資를 받아 1935年 9月 범일동에서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를 設立한다. 原料는 日本 屈指의 製紙會社인 王子製紙와 太陽製紙에서 供給받았는데 事業은 날로 繁昌했다.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 設立 1年 뒤인 1937年 勃發한 中日戰爭 으로 戰爭 特需까지 겹쳐 事業은 한層 더 活氣를 띄게된다.

事業에 自身이 생긴 金智泰는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의 支流 生産業에 머물지 않고 日帝의 또 다른 收奪機構人 朝鮮殖産銀行 釜山支店에서 巨額을 貸出받아 支流 貿易業에까지 事業을 擴張했다. 1970年 9月 19日 每日經濟 記事를 보면 이 때 朝鮮殖産銀行 의 日本人 釜山支店長은 金智泰가 동척에 勤務하던 時節 바둑을 같이 두던 相對로, 이러한 因緣으로 그에게 相當한 資本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殖産銀行은 東洋拓殖株式會社 와 함께 獨立運動家 나석주 가 爆彈 投擲을 考慮했던 日帝의 代表的인 植民 收奪 機構였다. 한便, 金智泰는 不動産業에도 손을 대 釜山뿐 아니라 金海와 東萊, 慶州에까지 進出해서 旣存 蔚山農場 外에 東來와 金海의 農土를 中心으로 目算(牧山)農場을 設立하는 한便 釜山不動産會社까지 設立하게 된다.

1938年 5月 6日 者 동아일보 記事를 보면, 金智泰가 忠南 禮山郡 광시면에 있는 大興錦山을 鑛業權者로부터 買收하였다는 記事가 나온다. 當時 鑛山 事業은 日帝의 도움 없이는 圓滑히 進行하기가 어려웠다는 點에서 이 또한 金智泰가 日帝에 協力하여 事業의 繁昌을 圖謀했다는 ‘間接證據’ 또는 ‘情況證據’로 考慮될 수 있을 것이다.

金智泰의 또 다른 親日疑惑은 그가 日帝의 戰爭遂行을 위한 郡守事業을 했다는 것이다. 支流와 不動産業으로 巨大資本을 蓄積한 金智泰는 1943年 日本人이 經營하던 朝鮮鑄鐵工業合資會社를 引受하게 된다. 이 會社는 鑄物 爲主의 機械類를 生産했는데 때마침 太平洋戰爭 中이라 軍需品 工業의 好景氣에 便乘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金智泰는 38歲 젊은 나이로 釜山에 居住하는 韓國人 中 戶別稅를 가장 많이 낼 程度로 財産家로서의 탄탄한 基盤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金智泰는 釜山鎭織物工場, 朝鮮知己(紙器)株式會社, 朝鮮鑄鐵工業合資會社 等을 運營하면서 軍服, 包裝箱子, 軍需物資 生産을 하였고 戰爭特需로 돈을 번 것이다. 卽, 中日戰爭 時期부터 日帝 軍納事業을 한 것은 事實이고, 結局 親日派 疑惑은 異例的인 日帝의 特惠에서 起因한다고 봐도 無妨하다. 日帝强占 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 第2條(正義)에 따르면 14. 日本帝國主義의 戰爭遂行을 돕기 위하여 軍需品 製造業體를 運營하거나 大統領令이 定하는 規模 以上의 金品을 獻納한 行爲 亦是 親日反民族行爲로 指目하고 있다. 金智泰 本人 亦是 東洋拓殖株式會社 로부터 蔚山 地域 2萬坪의 田畓을 10年 分割償還 條件으로 拂下 받아 이를 基盤으로 中日戰爭 의 一齊 郡守事業으로 富를 이뤘다고 自身의 回顧錄에서 밝힌 바 있다.

金智泰는 光復 以後 赤山(敵産) 企業이던 아사히絹織(朝鮮絹織株式會社의 前身)의 管理人을 맡게되었고, 이렇게 引受한 朝鮮絹織을 통해 貰를 擴張해나갔다. 1954年 신발製造工場으로는 當時 全國 最大 規模였던 三和고무를 引受해 全國 10代 財閥의 班列에 오르게 된다.

1960年 4.19 革命 當時 金智泰는 不正蓄財者 名單 1號에 올랐으며, 當時 釜山 學生들은 金智泰의 집으로 몰려가 “惡質親日財閥을 處斷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自由黨 時節에 國會 國防委員會 所屬으로 20餘萬 坪의 農地를 便法으로 購入한 바 있는데, 이것이 釜山 地域 民心을 激發시켰던 것이다. 이 當時 興奮한 市民들이 金智泰의 집으로 몰려가 騷亂을 피우고 甚至於 똥물을 뿌린 일이 있다.

情況證據上 親日派로 볼 餘地는 많으나,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親日名單이나 親日人名事典에 收錄된 바는 없다. 친일인명사전을 整理할 때 政權의 影響力을 憂慮하는 視角이 있었다. 노무현 政府 時節이던 2003.8.24日 民主黨은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을 發議했다. 原案에는 親日行爲 對象을 "銀行會社 等의 幹部 또는 職員으로서 우리 民族의 財産을 收奪한 行爲, 經濟侵奪을 爲해 日本帝國主義가 만든 各種 經濟機關과 團體에 在職한 者 中 侵奪行爲에 積極協力한 者"로 規定하였다. 이에 根據하면 金智泰는 親日名單에 當然히 包含된다. 그러나 以後 무슨 理由에서인지 規定이 變更되었다. 改正案에는 "東洋拓殖株式會社 또는 殖産銀行 等의 中央 및 地方組織 幹部로서 우리民族의 財産을 收奪하기 위한 意思決定을 中心的으로 遂行하거나 그 執行을 主導한 行爲"로 親日行爲 對象이 縮小되었고 이 基準에 依해 金智泰는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지게 됐다(개정안은 2004.3.2日 本會議 通過).

參考로 2012年 大韓民國 法院에서는 金智泰 親日을 主張했던 朴槿惠 의 死者名譽毁損 嫌疑를 "嫌疑없음"으로 終結시켰다. 2019年 金智泰 遺族들이 提起한 郭尙道 · 羅卿瑗 · 閔庚旭 議員의 死者名譽毁損 嫌疑 亦是 無嫌疑로 終結되었는데, 이는 一般 國民들의 常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金智泰가 親日을 했다고 判斷할 수 있는 相當한 根據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法院의 判決과는 相關없이 現在 金智泰 遺族들은 民間人들을 對象으로 集團 死者名譽毁損 訴訟을 걸고 있다. 擔當 法務法人은 율立으로, 民辯 所屬인 하주희가 代表辯護士로 있다.

淨水場學會 出身 人士 [ 編輯 ]

지난 1962年 設立 以後 淨水場學會(5.16奬學會 包含)의 奬學金을 받은 이들은 2013年 當時 3萬8000餘 名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于先 政界 人物들로는 새누리당에 金淇春 , 현경대 , 김기도 , 강성구 前 議員과 金在庚 議員, 민주당 손봉숙 , 채수찬 , 홍창선 前 議員과 오제세 議員, 自由先進黨 朴善英 前 議員 等이 있다. 그中 金淇春, 현경대 前 議員은 喪廳會長 出身으로 상청회의 兩大 軸으로 꼽힌다. 두 議員은 지난 大選에서 朴 大統領의 元老諮問그룹으로 活躍했었다.

또 法曹界에서는 신승남 前 檢察總長, 주선회 前 憲法裁判官, 허만 서울高等法院 部長判事와 성영훈 前 大檢察廳 公判訟務部長 等이 淨水場學會 出身이고, 行政官僚界에서는 서석준 前 經濟副總理, 안병영 前 敎育部總理, 임상규 前 農林部 長官 等이 淨水場學會 出身이다.

放送·體育界에서도 蹴球解說가 신문선 氏, 양상문 前 프로野球 롯데 監督, 정은아 아나운서 等이 淨水場學會 出身이다. 하지만 상청회 會員들이 가장 많이 進出한 領域은 學界다. 상청회 會員 中 約 400名이 現在 全國 各 大學에서 敎授로 活動하고 있다. 이들 敎授들 中 몇몇은 自發的으로 청오回 會員들을 指導하며 상청회 會員으로서 活動을 펼치고 있다. [2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再)淨水場學會 (2021年 12月). “國稅廳 公示 要約情報” . 《1365寄附포털》. 行政安全部.  
  2. 當時 5·16 軍士政變 은 政變 主導 勢力에 依해 革命으로 看做됐다.
  3. “5.16?學會(奬學會) 國家再建(國家再建) 人間改造(人間改造) 가슴마다 스미도록” . 《東亞日報》 (4面: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2年 7月 11日.  
  4. “「5.16奬學會」를設立” . 《京鄕新聞》 (1面: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62年 6月 5日.  
  5. “김삼천 新任 淨水場學會 理事長 "박근혜 大統領과 한 番 만났다 " . 오마이뉴스. 2013.03.28.  
  6. 淨水場學會 어떻게 運營되나 한겨레
  7. 淨水場學生 3萬名, 朴槿惠의 '資産'일까 오마이뉴스
  8. 釜山日報 팔지마! 淨水場學會는 어떤 組織? , 뉴스토마토, 2012年 3月 17日
  9. 淨水場學會의 主要 現況 , 京鄕新聞, 2012年 8月 23日, 강병한 記者
  10. '숨은 恐龍' 淨水場學會 大選길 爭點으로 한겨레
  11. 박근혜 代表, 淨水場學會 理事長 물러나야 오마이뉴스
  12. " 朴 淨水場學會 橫領.脫稅 疑惑 " . 聯合뉴스. 2007.06.12.  
  13. 박근혜代表 淨水場學會 理事長 論難 , 한겨레新聞, 2004年 12月 23日, 정재권 記者
  14. 김경은 記者 (2015年 4月 7日). “[커버스토리]‘朴正熙 贓物遺産’ 언제 元所有主에 돌려주려나” . 《週刊京鄕》 . 2015年 4月 2日에 確認함 .  
  15. 윤경원 記者 (2007年 5月 30日). " 코드맞춘 國家機關의 大選介入 試圖 " . 《데일리안》 . 2015年 4月 2日에 確認함 .  
  16. 朴正熙, 중정에 夫日奬學會·경향 强奪 指示 오마이뉴스 05.07.22
  17. 淨水場學會 傾向賣却 事件 眞相糾明 미디어오늘 2005年 2月 3日
  18. " 夫日奬學會 寄附承諾書 一部 變造 " . 聯合뉴스. 2005.07.22.  
  19. 與野 '淨水場學會' 論難 朝鮮日報
  20. "淨水場學會와 저랑 이젠 關係 없어요" 朴槿惠 "이미 社會에 還元" 朝鮮日報
  21. “過去史委 "夫日奬學會 强奪 맞다”” . 시사저널. 2007.05.29.  
  22. “[朴·文·安 大選 戰爭] 與, 金智泰 親日行跡·盧聯關性 浮刻시켜 鎭火” . 國民日報. 2012.10.22.  
  23. " 또 側近?" 淨水場學會 出身 人脈 地圖 大公開” . 日曜新聞. 2013年 4月 8日.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