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英蘭 (法曹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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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英蘭
2015년 4월 15일의 김영란
2015年 4月 15日의 金英蘭
京畿 水原地法 의 部長判事
任期 1998年 2月 27日~1999年 3月 3日
大統領 金大中
總理 櫜鞬
임창렬 (權限代行)
金鍾泌
長官 金種求 法務 長官
박상천 法務 長官
次官 원정일 次官
최경원 次官

서울家庭法院 의 部長判事
任期 1999年 3月 3日~2001年 2月 21日

大法院의 大法官
任期 2004年 8月~2010年 8月

身上情報
出生日 1956年 11月 10日 ( 1956-11-10 ) (67歲)
出生地 大韓民國 慶尙南道 釜山市
(只今의 大韓民國 釜山廣域市 )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經歷 서울地方法院 部長判事
大田高等法院 部長判事
大法院 大法官
서강대학교 法學專門大學院 碩座敎授
第3代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
亞洲大學校 法學專門大學院 碩座敎授
大韓民國 大法院 量刑委員會 委員長
正當 無所屬
本館 金海 (金海)
兄弟姊妹 김문석 (男동생)
配偶者 강지원
子女 2女

金英蘭 (金英蘭, 1956年 11月 10日 ( 1956-11-10 ) ~)은 서울家庭法院의 部長判事, 大法院의 大法官 等을 지낸 大韓民國의 法曹人(判事 出身의 辯護士)이자 大學 敎授 兼 敎育人이다. [1]

國民의 政府 時代에 서울家庭法院의 部長判事 等을 지냈다. 그 後 參與 政府 時節이던 2004年 8月, 최종영 大法院長 提請으로 大法官 에 任命돼 次期 政府 때였던 2010年 8月까지 在職했다. 이는 大韓民國 司法史 最初의 女性 大法官이었다. 그리고 後날 제3대 國民權益委院長 으로서 請託接待禁止法 草案을 마련했다.

生涯 [ 編輯 ]

1956年 11月 10日 釜山 에서 태어났다. 1975年 京畿女子高等學校 卒業 하였다. 1978年 第20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였고 1979年 서울大學校 法大를 나온 그女는 어린 時節부터 文學을 좋아했고 大學校 1學年 때 쓴 短篇小說이 '서울大'라는 校誌에 실리기도 했다. 法曹人 강금실 , 趙培淑 等이 大學 時節 親舊였다. 司法硏修院 生 時節 서울地方檢察廳 檢査時報로 일하게 되었을 때 서울地方檢察廳에서 檢査 生活을 하던 강지원 을 만났고 後에 結婚하였으며 강지원과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2] [3]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 時節 ' 不正請託 및 金品等 收受의 禁止에 關한 法律 '을 提案하여 2012年 8月 立法 豫告하였다. [4] 國民權益委員會 의 委員長을 맡던 中 2012年 男便인 강지원 辯護士의 大選 出馬와 함께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職을 辭退했다. 강지원은 2004年 김영란이 大法官에 任用되었을 때 '外助 專念을 위해' 法律事務所 代表辯護士職 辭退와 함께 一切의 示唆放送프로그램 進行도 中斷했었다. [3] 2014年에 韓國 YWCA 聯合會가 選定한 第12回 韓國女性指導者上 大賞을 受賞하였다. [5] [6]

判事 活動 [ 編輯 ]

서울民事地方法院, 서울家庭法院, 서울地方法院 東部支院, 釜山地方法院, 수원지방법원, 서울地方法院 南部支院 等에서 判事 生活을 하였다. 1991年 서울高等法院 判事가 되었고, 1993年에는 大法院 裁判硏究官이 되어서 5年間 裁判硏究官으로 勤務하였으며, 1998年 水原地方法院 部長判事가 되었다.

以後 1999年 3月 서울家庭法院 部長判事, 2001年 2月 서울地方法院 部長判事, 2003年 2月 大田高等法院 部長判事로 在職하다가 2004年 7月 23日 최종영 大法院長에 依해 大法官에 提請되었다.

參與連帶 司法監視센터는 이 決定이 4名의 候補者 가운데 女性이면서 가장 나이가 적음에도 不拘하고 김영란을 新任 大法官으로 提請했다는 點에서 大法院의 變化를 보여주고 있다고 評價했다. [7]

김영란이 大法官으로 提請된 것은 8年 先輩들을 건너 뛴 破格 人事였다. [2]

이 提請 直後 강병섭(司試 12回) 서울中央地法院長과 李榮愛(司試 13回) 春川地法院長이 辭表를 提出했다. 강병섭은 大法官 提請 過程과 法院에 對한 市民團體의 影響力을 憂慮하는 發言을 통해 김영란이 大法官으로 提請된 것을 迂廻的으로 批判했다. [8]

大法官 [ 編輯 ]

2004年 8月 11日에 大法官 任命을 위한 國會 人事聽聞會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란은 四兄弟와 戶主制의 廢止에 積極的으로 贊成하는 等 旣存 大法官들에 비해 進步的인 立場을 보였다. 또 子女가 父系 姓을 따르는 것이 男女 平等에 어긋나는지에 對한 質問에 "法 感情의 側面을 考慮해야 하지만, 世界的인 趨勢나 生物學的 硏究 結果는 그렇다"고 答했다. 敎育 側面에서는 公敎育이 社會 發展에 寄與한 點은 認定하면서도 多樣性이 不足한 面이 있다며 自身이 子女를 代案學校 보낸 理由를 說明했다. [9]

김영란은 駐韓美軍地位協定 (SOFA)에서 나타나는 韓美關係에 對해 再正立이 必要하다는 意見을 보였다. 國家保安法 에 對해서는 自身이 專門的이지 못하다며 廢止에 對한 뚜렷한 立場을 밝히지 않았다. [9]

2004年 8月 23日 國會는 金英蘭 大法官 候補에 對한 任命案을 通過시켰다. 이로 인해 김영란은 大韓民國 에서 最初의 女性 大法官이 되었고, 1982年 以後 22年만에 40代 大法官이 되었다. [10] 司法硏修院 11期 김영란은 大法官 任命 當時 滿 48歲의 젊은 女性으로, 司法硏修院 2, 3期 出身들이 擧論되던 大法官 자리에 60餘 名의 先輩들을 제치고 任命되었기 때문에 이 人事는 破格的인 것이었다. [3] [5]

김영란은 人事 聽聞會에서는 死刑制 廢止에 贊成했으나, 2006年 殺人罪로 起訴된 被告人에 死刑을 宣告했다. 또 環境權을 理由로 工事를 中止할 수 없다는 旣存의 判例를 그대로 따라 천성산 터널工事 中斷 假處分 申請을 棄却했다.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 [ 編輯 ]

2011年 10月 27日(現地時間), 김영란은 남아프리카공화국 首都 프리토리아에서 툴리 마돈셀라 國民權益保護院長을 만나 兩 機關 間 友好協力 方案에 對해 協議했다. [11]

金英蘭法 制定 [ 編輯 ]

一名 '金英蘭法'으로 命名된 《 不正請託 및 金品等 收受의 禁止에 關한 法律 》案은 2年 半이라는 오랜 論議를 거쳐 2015年 1月 8日 國會 政務委員會를 通過하였으며 같은 해 3月 3日에 國會 本會議를 通過하여 1年 6個月의 猶豫期間을 거친 後 2016年 9月 28日부터 施行된다. [12] [13]

敎授 活動 [ 編輯 ]

大法官 退職後에 辯護士 開業을 하지 않고 2010年 10月 西江大學校 法學專門大學院 夕座敎授로 任用돼 敎育者로서의 삶을 始作하게 되었다.

2019年 1月 西江大學校 法學專門大學院 碩座敎授에서 退職하였다.

2019年 8月 亞洲大學校 法學專門大學院 夕座敎授로 任用되었다.

評價 [ 編輯 ]

女性 法曹界의 象徵的 人物로 꼽힌다. 차분하고 溫和한 性品과 뛰어난 裁判 能力으로 法曹界에서 信望이 두텁다는 評價이다. 大法官으로 在職하면서 女性 等 社會的 弱者와 少數者의 權利를 伸張하고 國民의 基本權 保護를 위해 努力했다는 評價를 받았다. 女性의 宗中院 資格을 認定하고 學校의 宗敎行事 參與 强要가 宗敎의 自由를 侵害한다는 意見을 냈다. 또 四兄弟와 戶主制에 反對했고 良心的 兵役拒否者에 對한 代替服務制 導入에 贊成했다. 서울特別市 鍾路區 選擧區에서 첫 女性 選擧管理委員長으로 選任되기도 했다. [14] 두 딸은 모두 代案學校 (人性 特性化 學校) 出身인데, 두 딸을 代案學校에 보낸 理由에 對해 김영란은 夫婦가 典型的인 엘리트 敎育을 받은 사람들이라서 아이들은 자유로운 學校에 보내서 個性을 살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

大法官으로서의 評價 [ 編輯 ]

김영란을 비롯한 5名의 進步的 大法官들은 13名의 大法官이 모두 모이는 全員合議體에서 普通 少數者를 配慮하거나 進步 性向의 意見을 냈지만, 大法官 4名으로 이뤄진 小部(小部)에서는 旣存 判例와 法理論을 벗어나지 못한 判決이 大部分이었다는 評價를 얻었다. [15] 김영란은 進步的 大法官들과 다른 大法官들을 連結해주는 다리 役割을 했다는 分析이 있다. [16]

禿수리 5兄弟 [ 編輯 ]

김영란은 大法院 內에서 뚜렷한 進步的 色彩를 내는 判決들을 보이며 박시환 , 김지형 , 이홍훈 , 전수안 等의 大法官들과 함께 '禿수리 5兄弟'라고 불리기도 했다. 特히 中央日報 의 分析에 따르면, 檢事 出身인 안대희 大法官과는 分析에 使用된 判決에서 滿場一致를 보인 것을 除外한 18件의 判決 中 16件에서 反對 意見을 내는 모습을 보였다. [17]

김영란은 全員合議體에서 上肢帶 臨時 理事의 理事 選任의 適法性을 主張했고, 蔚山 北區廳長의 全國公務員勞組 不法罷業 參加者에 對한 昇進을 蔚山市長이 取消한 것은 裁量權의 濫用이라고 하는 等 進步的인 意見들을 냈다. 三星 에버랜드 事件에서는 轉換社債 發行이 有罪라고 主張하기도 했다. [18]

主要 判決 [ 編輯 ]

'왕따' 事件 [ 編輯 ]

2003年 '王따' 學生이 大田市와 加害學生 家族 等을 對象으로 낸 損害賠償 請求 訴訟에서 김영란이 이끄는 裁判部는 "왕따 當한 學生 側도 原因提供 等 50%의 責任이 있다"는 1審을 깨고, "學校는 어느 組織보다 弱者에 對한 保護와 配慮가 切實히 必要한 곳"이라면서 "被告들은 1億1千6百餘萬원을 賠償하라"면서 原告 一部 勝訴判決을 내렸다. [19]

上肢帶 理事 選任 事件 [ 編輯 ]

上肢帶學校 에 派遣된 臨時理事가 鄭理事를 選任한 事件에 對해, 多數의 大法官들은 區 財團側의 理事들이 私立學校의 正體性을 代辯한다며 區 財團側의 손을 들어주었고, 김영란을 비롯한 少數의 大法官들은 適法한 節次에 依해 任命된 臨時理事들이 鄭理事를 選任한 것은 當然하다는 意見을 냈다. 當時 이에 對해 保守 陣營에서는 私學 自主性을 찾았다며 반겼고, 進步 陣營에서는 非理 私學에 對한 牽制가 어려워졌다며 憂慮를 表示했다. [20]

三星 에버랜드 轉換社債 低價 配定 事件 [ 編輯 ]

1996年 12月 三星 에버랜드가 轉換社債를 歇값에 發行해 李在鎔 을 除外한 97%의 株主가 轉換社債를 引受 直後 失權함으로써 李在鎔 이 集中的으로 轉換社債를 가질 수 있었던 事件에 對해, 金英蘭 等 5名의 少數 大法官들은 株主配定이 아닌 第3者 配定으로 會社가 損害를 입었다며 허태학 박노빈 에게 有罪를 主張했다. 하지만 6名의 多數 大法官들은 形式的으로 株主 配定方式을 取했기 때문에 이는 無罪라고 主張했고, 結局 1, 2審의 判決을 뒤집고 허태학과 박노빈에게 無罪가 宣告되었다. [21]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家族 [ 編輯 ]

共著 [ 編輯 ]

  • 김두식·김영란.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쌤앤파커스. 2013年. ISBN   9788965701439

賞勳 [ 編輯 ]

  • 2010年: 淸朝勤政勳章, 자랑스러운 競技인
  • 2014年: 第12回 韓國女性指導者上 對象

各州 [ 編輯 ]

  1. 이연우. 강지원·김영란 夫婦 “이웃들이 더 잘 사는 世上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 레이디경향. 2011年 4月號.
  2. “建國 以後 첫 女性 大法官 된 김영란 判事” . 新東亞.  
  3. 박이은頃. "少數人權 위한 多數說得이 天職" Archived 2014年 5月 25日 - 웨이백 머신 . 女性新聞. 2004年 9月 3日.
  4. 김현준. 通過 어려웠던 法案, '失明' 달고 世上 속으로 '쏙~ 쏙' . 주간한국. 2014年 4月 24日.
  5. 김수희. “살기 빠듯하다고 ‘女性’이란 價値 잊으면 안되죠” Archived 2014年 11月 2日 - 웨이백 머신 . 女性新聞. 2014年 10月 29日.
  6. 고영득. 金英蘭 前 大法官 “金英蘭法, 時間 걸리더라도 처박아두지만 말라” . 京鄕新聞. 2014年 11月 6日.
  7. 김영란 判事 最初 女性大法官 提請 歡迎 (참여연대 司法監視센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判決도 輿論 눈치 봐야하나`” . 中央日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金英蘭 大法官候補 人事聽聞會 開催 : 政治 : 인터넷한겨레
  10. 권박, 효원 (2004年 8月 11日). “김영란의 '色彩'... "死刑-戶主制 廢止해야 " . 오마이뉴스 . 2009年 6月 10日에 確認함 .  
  11. 김윤희. 金英蘭 權益委員長, 南아共 權益委 訪問 . 헤럴드經濟. 2011年 10月 28日.
  12. 유한범. 金英蘭法 制定, 더 미룰 수 없다 Archived 2015年 2月 14日 - 웨이백 머신 . 허핑턴포스트. 2015年 2月 13日.
  13. 윤성한. "김영란法이 '批判' 言論人 彈壓? 그 反對일 것" . 미디어오늘. 2015年 2月 13日.
  14. 민철. 金英蘭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폴리뉴스. 2010年 12月 31日. 2016 金英蘭法 만듬
  15. “‘判例에 갇힌’ 進步性向 5人, 새 바람은 없었다” . 京鄕新聞. 2009年 1月 12日 . 2009年 6月 10日에 確認함 .  
  16. “범민련·송두율·全公勞 건건이 衝突 … 大法院은 ‘理念 對決’ 中” . 中央日報. 2008年 5月 28日. 2008年 5月 3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10日에 確認함 .  
  17. “金英蘭 - 안대희, 박시환 - 김황식 ‘물과 기름’” . 中央日報. 2008年 5月 28日. 2008年 5月 3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12日에 確認함 .  
  18. https://m.lawtimes.co.kr/Content/Article?serial=47304
  19. ' 王따' 被害學生에 責任물어선 안돼”. 東亞日報.  
  20. < “判決批評-判決읽기2: 우리가 上肢帶 事件을 注目하는 理由” . 참여연대 司法監視센터. 2007年 5月 25日. 2008年 12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10日에 確認함 .  
  21. " 大法院, 三星 앞에서 分別을 잃었다 " . 프레시안. 2009年 6月 2日.  
  22.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804291523456674
  23. 大法官 候補 김영란은 누구 : 政治 : 인터넷한겨레
前任
李在五
第3代 國民權益委員會 委員長
2011年 1月 1日 ~ 2012年 12月 11日
後任
(職務代行) 박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