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慰禮城) 또는
漢城
(漢城)은
百濟
의 初期 都邑地였다.
漢江
을 基準으로 하여 河南慰禮城과 하북위례성으로 區分하기도 한다.
三國史記
에는 "性의 西便에는 배와 나루터, 東便 一帶에는 軍事訓鍊과 民家 마을, 그리고 길쭉한 四星(蛇城)으로 쌓여져 있어 이 城壁이 이어져 嵩山(崇山)에 이르렀다."라고 記錄되어 있다.
名稱의 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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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禮城이라는 名稱이 어디에 나왔는지에 對해서는 여러 意見이 있다.
漢江
을 뜻하는 옛 이름 阿利水(阿利水)·郁李下(郁利河)의‘아리’·‘욱리’에서 왔다고도 하고, 百濟에서 王을 가리키는 呼稱이었던 於羅暇(於羅瑕)에서 왔다는 意見과, 울타리를 말하는 純우리말 '우리'에서 由來했다는 意見이 있다.
[1]
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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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와 朝鮮 時代까지
三國遺事
에서 慰禮城의 位置를
稷山
(稷山)으로 非情한 것에 따라,
天安 성거산 慰禮城
을 慰禮城으로 推定해 왔다. 하지만 以後
정약용
은
三國史記
에 江을 건너 都邑을 옮겼다는 記錄에 注目하여, 慰禮城을 河南과 河北으로 分離해 하북위례성을 漢江 以北 地域으로, 具體的으로는
北漢山
東쪽 기슭에 옛 城郭이 남아있고 一帶 地名이 한良賈縣(漢陽古縣)이라는 點에서 이 一帶를 하북위례성으로 推定하였다.
[2]
三國遺事에서 慰禮城을 稷山으로 推定한 理由는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475年 南쪽으로 避亂하던 文周王이 暫時 머무른 곳이라는 意見과, 熊津 遷都 後 地名이 옮겨간 現象으로 보는 意見이 있다.
[1]
한便 三國史記에서는 慰禮城을 "位置는 알 수 없고 地名만 남아있는 곳"으로 分類하였다.
河南慰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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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南慰禮城(河南慰禮城)은
紀元前 5年
부터 紀元後
475年
까지 백제의 首都였으며, 一般的으로
서울特別市
의
夢村土城
및
風納土城
으로 比定되지만 遺跡·遺物의 調査가 貧弱해 明快한 解答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1]
백제의 始祖인
온조왕
勢力은 漢江 以北 地域에 定着했다가,
樂浪
,
말갈
等 北쪽으로부터의 攻擊을 效果的으로 防禦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漢江
과
南漢山
사이로 都邑을 定한 것으로 推定된다.
[2]
하북위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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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河南慰禮城을 首都로 定하기 前에 暫時
百濟
의 都邑이었던 곳으로, 位置는 세검정, 中浪川, 上溪洞, 우이동 等 여러 推測이 있으며 방학동에 남아있는 放學動 土城을 하북위례성으로 보기도 한다.
[2]
하지만,
三國史記
初期 記錄을 否定하는 立場에서는 하북위례성의 存在 自體를 否定하고 백제의 都邑이 처음부터 河南慰禮城이었다고 看做한다.
[1]
[2]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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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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