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慶宮

昌慶宮(昌慶宮)
大韓民國 私的
서울大癌病院 에서 바라본 昌慶宮
種目 私的 第123號
( 1963年 1月 18日 指定)
時代 朝鮮 成宗 14年( 1483年 ) 創建
광해군 7年( 1615年 ) 再建
住所 서울特別市 鍾路區 昌慶宮로 185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昌慶宮 (昌慶宮)은 서울特別市 에 있는 宮闕로 朝鮮 成宗 (1483年) 때에 建築하였다. 昌慶宮은 西쪽으로 昌德宮 과 붙어 南쪽으로 宗廟와 通하는 [1] 곳에 자리하고 있다. [2] [3] 또, 高麗의 國璽를 넘겨받은 [4] 수창궁(壽昌宮)의 청심정(淸心亭) [5] 과 同一한 이름의 亭子 [6] 를 가까이하고 있다. 朝鮮 時代에는 昌德宮 과 함께 東闕 (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牆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補完하는 機能을 가지고 있었다. 昌慶宮의 元來 이름은 수창궁(壽昌宮)과 매우 類似한 壽康宮(壽康宮)으로 世宗 이 卽位하면서 上王인 太宗 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成宗 14年( 1483年 ) 세분의 對比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重建하고 이름을 昌慶宮으로 바꾸었다. 昌慶宮은 肅宗 인현왕후 를 詛呪한 張禧嬪 을 處刑한 日課 英祖 思悼世子 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正祖 가 昇遐한 일 等 크고 작은 宮中 悲劇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7]

日帝强占期 에 動物園과 植物園, 李王家博物館 이 들어서고, 이름도 ‘昌慶苑’(昌慶苑)으로 格下되는 等 受難을 겪었다. 1963年 1月에 私的 第123號로 指定되었고, 1983年에는 動物園과 植物園을 서울大公園 으로 옮기고 이름도 昌慶宮으로 되찾았다.

歷史 [ 編輯 ]

朝鮮 初期 [ 編輯 ]

昌慶宮은 元來 1418年 世宗이 卽位하면서 上王인 太宗을 모시기 위해 지은 壽康宮(壽康宮, 太宗이 世宗에게 禪位한 뒤 居處한 宮49)이 있던 곳이다. [8] 成宗 15年(1484年)에 大王大妃인 世祖의 비 정희왕후 尹氏, 成宗의 生母 소혜왕후 韓氏, 睿宗의 繼妃 안순왕후 韓氏를 모시기 위하여 壽康宮을 擴張하여 세운 別宮이 바로 昌慶宮이다. [8]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大匕弓, 景福宮, 昌德宮의 南向 配置와 區別지으려고 動向으로 配置하였다. 成宗 때에는 停電인 明政殿(明政殿), 便殿인 文政殿(文政殿), 寢殿인 守令戰(壽寧殿), 그리고 環境展(歡慶殿), 경춘전(景春殿), 人量田(仁陽殿), 通明殿(通明殿), 양화당(養和堂), 餘暉當(麗暉堂), 四星角(思誠閣) 等이 建立되었으며, 宮의 둘레는 4,325尺이었다. [8]

壬辰倭亂 以後 [ 編輯 ]

昌慶宮은 壬辰倭亂 때 倭軍의 放火로 모두 消失되었다. 광해군 卽位初부터 重水가 進行되어 왔는데, 情勢가 어수선하여 一時 工事가 停止되었다가 光海君 7年(1615年) 4月에 王이 정릉동 行宮에서 昌德宮으로 다시 居處를 옮기면서 臣下들의 反對 속에 昌德宮 營建의 工事에 다시 着手하였다. 이에 따라 主要 建物들을 再建하기 始作하여 이듬해 11月에 마무리되었다. [8] 光海君 때 重建된 以後에는 昌德宮의 附屬 宮闕로 活用되었으므로 昌德宮과 더불어 東闕로 불렸다. 昌慶宮 再建보다 7年 앞서 昌德宮이 먼저 再建되어 法宮이 됨에 따라 昌慶宮은 朝鮮 前期에는 그다지 活用되지 않았으나, 昌德宮과 隣接한 關係로 朝鮮 王朝 歷史의 重要한 舞臺로 活用되는 機會가 많아졌다. [8] 昌慶宮은 잦은 火災로 建物이 消失되었다가 再建되기를 反復하였는데, 仁祖反正 李适의 亂 으로 通明殿·環境展·양화당 等 많은 建物들이 消失되었으며, 亂이 鎭靜된 後 1619年에 다시 重修되었다가 純祖 때 火災로 다시 毁損되었다.

肅宗 때에는 紳士年의 變故와 新任年(辛丑年과 壬寅年)의 士禍가 일어났다. 肅宗은 張禧嬪 을 寵愛하다가 張禧嬪이 肅宗의 繼妃 閔氏를 紳士年 701年에 희빈을 處刑하고 그의 一家를 肅淸하였는데, 當時 희빈은 主로 宮內의 취선당에 居處하였다. 辛丑年(1721年)과 壬寅年(1722年)에는 王世子의 卽位를 두럴싸고 老論과 少論이 對立하다가 老論의 代身들이 죽임을 當한 事件이 東宮 處所를 中心으로 벌어졌다. 英祖 때에는 思悼世子 가 뒤주에 갇혀 죽는 事件이 昌慶宮에서 일어났다. 當時 世子가 갇힌 뒤주는 宮內 宣人門 안뜰에 있었다. [9]

日帝强占期 [ 編輯 ]

昌慶宮은 順從이 卽位하고 나서 急速히 變形되기 始作하여 日帝 强占期에 決定的으로 毁損되었다. [10] 1909年 日本 帝國 大韓帝國 純宗 皇帝의 마음을 달랜다는 理由로 强制로 昌慶宮 內部 宮門, 담牆, 많은 殿閣들을 毁損하고 宮 안에 日本式 建物을 세우고, 動物園과 植物園을 만들어 遊園地로 造成하였다. [7] [11] 卷農場 자리에는 蓮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蓮못가에 亭子를 짓고 宮苑을 日本式으로 바꾸었다. [10] 그 뒤쪽에는 植物館을 짓고, 東쪽에는 培養黨을 지었으며, 通明殿 뒤 언덕에는 日本式 建物을 세워 博物館 本官으로 삼았다. [10] 또한 日帝는 남아있는 建物들도 改造하여 博物館의 陳列室로 만들었다. [10] 1911年에는 慈慶殿터에 2層 規模의 李王家博物館 을 새로 지었으며 昌慶宮의 名稱을 ‘昌慶苑’으로 바꾸어 格下하였다. 1915年에는 文政殿 南西쪽 언덕 위에 昌慶宮 藏書閣 을 建立하였고, 1922年에는 벚꽃을 數千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年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10] 日帝侵略期에 日本人들에 依하여 昌慶苑으로 戰略하면서 大部分의 建物이 撤去, 毁損되었다. 또한 昌慶宮과 宗廟 사이를 가르는 道路는 1912年 日帝가 計劃하였으나, 宗廟가 毁損될 것을 憂慮한 順從이 反對하여 建設이 미루어졌고, 順從이 世上을 떠나자 곧바로 工事가 强行되어 1932年에 道路가 났다. 그러나 1980年代 後半의 發掘, 復元 工事로 明政殿, 文政殿 一郭만이 復舊되었다.

解放 以後 [ 編輯 ]

昌慶宮은 解放 以後에도 繼續 洞·植物園으로 쓰이다가 1981年 大韓民國 政府에서 昌慶宮 復元 計劃이 決定되면서 原形을 되찾기 始作하였다. [10] 1983年 12月 31日子로 公開 觀覽이 廢止되고 名稱도 昌慶苑에서 다시 昌慶宮으로 回復되었으며, [10] 이듬해인 1984年 1月 水晶宮의 撤去를 始作으로 6月에는 動物 飼育場을 閉鎖한 뒤 서울大公園으로 移管하였다. [12] 1986年 8月까지 動物園과 植物園 關聯 施設과 日本式 建物을 撤去하고 없어졌던 明政殿에서 명정문 사이 左右 回廊과 文政殿을 옛 모습대로 回復하여 1986年 8月 23日 一般에 公開하였다. [12] 1992年에는 日本式 建物인 藏書閣이 撤去되었다. [13]

建築 [ 編輯 ]

朝鮮古跡圖譜의 昌慶宮 配置도.

昌慶宮이 位置한 곳은 西쪽으로 昌德宮 과 붙어있고 南쪽으로 宗廟 와 통하였다. 昌慶宮은 朝鮮時代 王宮 가운데 唯一하게 動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8] 南向을 하지 않고 東向을 한 理由는 이 宮이 別宮으로 造成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地形上으로도 動向이 適合하였던 듯하다. [8]

現在 昌慶宮에는 朝鮮時代 建物로는 明政殿(國寶 第226號) , 通明殿(寶物 第818號) , 弘化門 (寶物 第384號), 崇文堂·함인정·環境展·경춘전·양화당·集福軒·영춘헌·觀德亭·月勤務·선인문·명정문과 明政殿 回廊(寶物 第381號)李 있고, 石造物로는 옥천교 (寶物 第386號), 風旗臺 (寶物 第846號), 關賤待 (寶物 第851號), 昌慶宮內 八角七層石塔(寶物 第1119號)李 있다. [12] 現 樂善齋(樂善齊) 地域은 元來 昌慶宮에 所屬되었었으나 只今은 昌德宮 境內에 있다. [12]

昌慶宮의 正殿이고 明政殿이고, 明政殿의 出入門인 명정문은 中門이며, 宮闕의 正門은 弘化門이다. [12] 弘化門의 左右에는 廙閣이 있고, 弘化門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沃川에 옥천교가 있다. [12]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昌慶宮은 景福宮의 흥례문, 昌德宮의 진선문에 該當하는 門이 없어 弘化門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構成된 點에서 다른 規模에 비해 規模가 작고 格式이 떨어진다. [12] 昌慶宮의 中心 建物인 弘化門, 명정문, 明政殿은 中心軸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地形을 살려 建物을 配置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左右 對稱을 이루지 않고, 周邊 行脚도 이에 맞추어 若干 틀어져 있다. [12]

入口 [ 編輯 ]

弘化門 [ 編輯 ]

弘化門(弘化門)은 昌慶宮의 正門이다. 正面 3칸, 側面 2칸의 重層 隅진閣지붕으로 同鄕이며, 門 왼쪽인 西北쪽 모서리에 階段이 있어서 위層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12] 大韓民國 寶物 第384號로 指定되어 있다. 1484年 에 세웠으나 壬辰倭亂 때 불탄것을 1616年 에 다시 지어서 現在에 이르고 있다.

朝鮮時代에 王이 百姓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英祖는 弘化門 앞에서 均役法에 對한 贊反 與否를 百姓에게 直接 물었고, 孝心 깊은 正祖는 어머니 혜경궁 洪氏 의 回甲을 記念하여 百姓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옥천교 [ 編輯 ]

昌慶宮 金川 위에 놓은 다리이다. 大韓民國 寶物 第386號로 指定되어 있으며 創建 當時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宮闕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法典이 있는 宮闕의 雁足과 外部의 空間을 區分하는 役割을 하며, 宮闕 뒤의 産科 짝을 이루어 좋은 運을 불러들이는 吉地가 되라고 宮闕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衿川'이라 부른다. 昌慶宮의 金川은 沃川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沃川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外傳 [ 編輯 ]

명정문을 들어서면 正面에 停電인 明政殿이 있고 그 앞에는 自然石을 깐 넓은 마당이 있으며, 가운데 左右로 品階石(品階石)이 놓여 있다. 이 部分은 四方이 行廊으로 둘러싸여 있다.

명정문 [ 編輯 ]

명정문(明政門)은 昌慶宮의 停電인 明政殿의 出入門이다. 명정문은 弘化門과 같이 東向을 하였는데, 明政殿으로 이어지는 東西 中心軸 線上에 正確하게 놓이지 않고, [12] 南쪽으로 約 1.2m 벗어나 있다. [14] 門의 左右에 連結된 東行脚을 명정문에 맞추어 配置하였기 때문에 行脚으로 둘러싸인 明政殿 앞뜰은 반듯한 四角形이 아니라, 若干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14] 行脚은 2칸 幅의 복랑이며, 景福宮의 行廊에 비해 높이가 낮다. [14]

明政殿 [ 編輯 ]

明政殿은 昌慶宮의 停電이다. 大韓民國 國寶 第226號로 指定되어 있다. 停電은 成宗 15年(1484年)에 創建되었다가 壬辰倭亂으로 消失된 것을 光海君 8年(1616年)에 重建한 建物로 現存하는 朝鮮時代 宮闕의 停電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14] 2段의 月臺 위에 正面 5칸, 側面 3칸의 單層 八作지붕 建物로 지어, 重層인 景福宮이나 昌德宮의 正殿보다 格式이 낮다. [14] 特異한 點으로는 建物 뒤쪽에 退칸 形式의 月廊을 두고 있으며, 建物 內部의 앞쪽으로 高柱를 세우고 뒷部分 기둥은 모두 省略하였고, 正面 量 協칸의 壁面 下部를 顚覆돌로 쌓아 點을 들 수 있다. [14] 明政殿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除外한 세 面에만 傾斜地에 맞추어 月臺를 造成하였고, 坐向度 地勢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正門인 명정문의 中心과 軸이 一致하지 않는다. [14]

文政殿 [ 編輯 ]

王이 日常 業務를 보던 곳이다. 昌慶宮의 便殿인 文政殿은 明政殿의 오른쪽인 南쪽으로 明政殿과 直交하며 서 있다. [15] 여기서 思悼世子의 壬午花邊이 始作되었다. 實際로 죽은 곳은 宣人門 쪽이라 한다. 元來 12칸이었으나 復元 때 9칸으로 復元하였다. 東闕圖에서 보면 文政殿 周邊에 回廊이 쳐져있다.

崇文堂 [ 編輯 ]

崇文堂(崇文堂)은 明政殿의 後殿에 該當하는 建物로 1830年에 다시 세웠다. 임금이 臣下들과 競演을 열어 政事와 學問을 討論하던 곳으로, 王이 太學生들을 接見하여 主演을 베풀었던 곳이다. [15] 앞쪽에 設置한 樓閣型 退마루로 出入하였고, 英祖 임금의 親筆 懸板이 現在까지 남아있다.

빈陽文 [ 編輯 ]

內戰 [ 編輯 ]

崇文堂 밖으로는 內戰의 殿閣들이 展開된다. [15] 崇文堂의 西北쪽으로 함인정이 있고, 그 左右로는 담이 둘러져 있다. [15] 이 담 뒤便으로 環境展·경춘전 等의 沈澱이 있고, 그 北쪽으로 內戰의 停電인 通明殿이 있다. [15] 環境展에서 通明殿으로 이르는 一帶는 王과 王妃가 起居하던 곳으로, 다른 空間에 비해 相對的으로 格式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15]

함인정 [ 編輯 ]

元來 燕山君때 지은 人量田이 있던 터이나 倭亂때 타버렸다. 仁祖가 仁祖反正 後 仁王山 밑에 仁慶宮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附近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臣下들을 接見하는 場所로 많이 使用되었다. 元來 함인정은 全面 열린 空間이 아니었다. 3面은 막힌 空間이었다. 함인정과 環境展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殿閣이 있었으나 消失되어서 現在는 없다.

경춘전 [ 編輯 ]

元來 大妃殿으로 쓰인 建物이다. 仁粹大妃 가 居處하던 곳으로 혜경궁 洪氏 가 거쳐하던 곳이기도 하다. 正祖 , 憲宗 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 仁粹大妃와 인현왕후, 혜경궁 洪氏가 昇遐한 곳이다.

環境展 [ 編輯 ]

環境展 또한 沈澱임에도 不拘하고 龍마루가 있다. 또한 中宗 이 環境展에서 薨逝하였으며, 世子 時節의 광해군 , 光海君의 世子 이지 , 소현세자 等이 居處하였다가 소현세자 事後 1652年 (孝宗 3年) 14歲까지 숭선군 이 여기서 居處하였다.

咸陽門 [ 編輯 ]

昌德宮 과 통하는 門이다. 後援 入口 右側에 자리하고 있다.

通明殿 [ 編輯 ]

寶物 第818號. 通明殿은 昌慶宮에 있는 王과 王妃의 沈澱 兼 宴會用 建物이다. [15] 明政殿 西北쪽 宮闕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東쪽에 있는 環境展과 함께 南向하고 있다. [15] 昌慶宮 創建 때인 1484年에 지은 建物은 壬辰倭亂 때 불타고, 1616年에 再建하였으나, 다시 正祖 14年(1790年)에 불에 타 消失되었다. [15] 只今의 建物은 純祖 34年(1834年) 昌慶宮의 殿閣 大部分을 再建할 때 지은 것으로, 建物은 正面 7칸, 側面 4칸 規模인데, [15] 正面 5칸, 側面 2칸을 감싸며 退칸이 設置된 形式을 하고 있다. [16] 지붕은 八作지붕이며, 昌德宮 大造殿과 같이 龍마루가 없다. [16]

東闕圖에는 이 建物이 터만 남은 것으로 보아 順調33年 以前에 불탄 것으로 보이며 肅宗 때 張禧嬪이 仁顯王后를 謀害하기 爲해 通明殿 뜰에다가 詛呪하는 物件을 심어다놓았다 發覺되어 죽임을 當했다.

양화당 [ 編輯 ]

양화당(養和堂)은 王妃의 生活 空間으로 1484年 (成宗 15年)에 지어졌다. 壬辰倭亂과 李适의 亂, 丙子胡亂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每番 다시 지었으며 1830年(純祖 30年)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年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仁祖는 남한산성으로 避身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居處하기도 하였으며, 懸板은 純祖의 글씨이다. 양화당은 正面 6칸, 側面 4칸 規模의 單層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八作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恐怖는 새 날개 模樣의 匿空 樣式이다.

영춘헌 [ 編輯 ]

영춘헌(迎春軒)은 昌慶宮의 北쪽에 있는 沈澱 建物이다. 正祖 書齋 였으며 이곳에서 昇遐했다, 正祖 代 以後 王들도 書齋로 使用하였다. < 東闕圖(東闕圖) >( 1824 ~ 1830 )에 그려진 영춘헌은 集福軒의 東南쪽에 있지만 全面 空間은 담牆으로 區劃되어 別個의 領域을 形成하였다. 그런데 1830年 (純祖 30年) 8月 1日 環境展에서 始作된 火災로 함께 消失되었다. 現存하는 영춘헌은 1834年 (純祖 34年)에 重建된 建物로, 火災로 消失된 영춘헌을 다시 지으면서 以前과 달리 영춘헌과 集福軒이 이어져 有機的으로 連結되었으며 集福軒은 영춘헌의 附屬 建物이 된, 現在와 같은 建築 形態가 完成되었다. [17]

集福軒 [ 編輯 ]

集福軒(集福軒)은 昌慶宮에 있었던 後宮들의 居處이다. 元來의 모습은 < 東闕圖(東闕圖 )>( 1824 ~ 1830 )를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이때의 모습은 영춘헌의 北西쪽에 있으며 가운데 넓은 大廳을 中心으로 左右에 溫突房을 둔 中心 建物 뒤쪽으로 行脚이 둘러싸 閉鎖的인 마당을 갖춘 形態이다. 그런데 1830年(純祖 30年) 8月 1日 火災로 消失된 영춘헌을 1834年 (純祖 34年)에 다시 지으면서 以前과 달리 영춘헌과 集福軒이 이어져 有機的으로 連結되었으며 集福軒은 영춘헌의 附屬 建物이 된, 現在와 같은 建築 形態가 完成되었다. [18]

기타 [ 編輯 ]

動物들은 서울大公園으로 옮겨지고, 宮 안에 있던 벚나무는 모두 뽑아 없앴다. 이제 昌慶宮에서 벚꽃을 찾기 어렵다. 代身 잘 가꿔진 소나무가 볼만하다. 特히 춘당지 뒤쪽의 <韓國自生植物花壇>은 韓國植物로서 越冬이 可能한 中部地方 自生植物을 모아놓은 花壇으로 世界的 稀貴植物인 미선나무를 비롯해 400餘 種 600餘 포기가 심어져 있어 都市 어린이들이 自然生態를 익힐 수 있는 空間이다. [7]

通明殿의 西쪽에는 蓮못이 造成되어 있다. [16] 蓮못은 南北 길이 12.8m, 東西 길이 5.2m의 長方形인데, 蓮못 위에는 길이 5.94m, 幅 2.56m의 簡潔한 돌다리가 東西로 놓여있다. [16] 이 蓮못은 北쪽에서 約 4.6m 떨어진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直線으로 設置한 石臼를 통해 瀑布로 떨어지도록 考案하였다. [16] 通明殿 北쪽 언덕 위에는 環聚情이 있다. [16] 정자인 함인정은 正面 3칸, 側面 3칸의 正四角形 平面 建物로 二翼工의 簡潔한 構造가 돋보인다. [16]

춘당지 [ 編輯 ]

춘당지(春塘池)는 元來 조그마한 蓮못이었으나 1909年 日帝에 依해서 內農圃(賃金이 直接 밭을 일구고 農事의 風·흉을 豫測하던 곳)가 헐리면서 只今의 호리甁 模樣이 되었다.

大溫室 [ 編輯 ]

昌慶宮 植物園 이라는 名稱으로 잘 알려져 있다. 日本人 후쿠바가 設計, 프랑스 會社가 施工을 擔當하였고, 大韓帝國 純宗 隆熙 元年( 1907年 )에 起工하여 隆熙 3年( 1909年 )에 竣工하였다. [19] 建築 當時에는 170餘 坪(藥 570餘m 2 )으로 東洋 最大 規模의 木造 植物園이었으며, 各種 稀貴 植物을 展示하였다.

1969年에 兩옆에 돔 模樣의 溫室이 設置되어 있으나 昌慶宮 復元工事 中 撤去되었다. 2004年 2月 6日 登錄文化財 第83號로 指定되었다.

觀德亭 [ 編輯 ]

觀德亭(觀德亭)은 1642年에 지었으며 활을 쏘던 精子였다. 앞쪽의 넓은 빈터는 軍事 訓鍊과 武科試驗場으로 쓰였다고 傳한다. 精子 뒤로는 丹楓 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들이 丹楓의 아름다움을 읊은 詩가 傳한다.

關賤待 [ 編輯 ]

寶物 第 851號. 肅宗 14年( 1688年 )에 세워진 天文 觀測臺. 瞻星臺(瞻星臺)라고도 한다.

높이는 2.2m이고, 階段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代 위에는 99cm의 받침臺가 놓여 天文 觀測機構를 設置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昌德宮 金虎門 밖에 세워졌으나, 日帝强占期 에 移轉되었다가 現在의 자리에 옮겨졌다.

關賤待 위에는 별을 觀測하는 器具인 蘇間의(小簡儀)가 놓였으나, 現在는 남아있지 않다.

집춘門 [ 編輯 ]

집춘門(集春門)은 觀德亭 北쪽, 成均館과 昌慶宮 사이의 담牆에 난 宮門으로 文廟(文廟, 또는 成均館)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歷代 임금들이 이 門을 거쳐 成均館으로 行次하였다. 日帝時代때 成均館을 잇는 길을 없애버려 쓸모가 없어졌으나 2008年 成均館을 잇는 길을 종로구에서 復元하였다.

科學의 門 [ 編輯 ]

昌慶宮과 國立어린이科學館 사이에 놓여 있는 門이다. 1973年 故 朴正熙 前 大統領의 命令으로 지어졌으며, 朴正熙 大統領의 親筆이 걸려있다. 暫時 동안 閉鎖되었으나 最近에 開放되었다.

月勤務 [ 編輯 ]

正祖가 어머니인 혜경궁 洪氏가 思悼世子의 祠堂인 景慕宮(現在 서울대학교病院 자리)에 便하게 가기 위해 세운 門이다.

宣人門 [ 編輯 ]

이 門 附近에서 莊祖(思悼世子)가 뒤주속에서 殞命했다는 이야기가 傳해지고 있다.

風旗臺 [ 編輯 ]

朝鮮時代 後期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되는, 바람의 方向과 世紀를 재는 風紀를 세웠던 昌慶宮에 있는 石臺이다. 고려대학교 博物館 所長의 〈東闕圖(東闕圖)〉에 花崗石 風旗臺 그림이 있다.

사라진 殿閣 [ 編輯 ]

慈慶殿 [ 編輯 ]

正祖가 어머니인 혜경궁 洪氏를 위해 지었던 殿閣이다. 慈慶殿에서는 景慕宮이 한눈에 보였다고 한다. 高宗때 景福宮 重建詩 撤去하여 景福宮의 자미黨을 짓는데 活用했다. 日帝때 藏書閣이 세워진 곳이다.
藏書閣은 1992年에 撤去되었다.

저승戰 [ 編輯 ]

肅宗 의 母后이자 顯宗 의 整備인 명성왕후 金氏가 이곳에서 昇遐했다. 警鐘 王世子 時節 居處하였기에 警鐘의 事後 警鐘의 繼妃 선의왕후 어씨도 이곳에서 살았다. 以後 思悼世子 의 桐宮殿이 되었다가 火災로 全燒되었다.

通貨戰 [ 編輯 ]

임금의 便殿이었던 것으로 推定되고 있고 純祖 33年 火災때 불탄 以後 아직도 重建되지 않았다.

落選當 [ 編輯 ]

市民黨 [ 編輯 ]

昌慶宮의 東宮戰으로서 王世子나 王世弟가 代理淸淨을 하거나 政務를 보던 곳으로 쓰였다. 여기서 市民이라는 뜻은 百姓이 利益되게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英祖 가 王世弟 時節 여기서 居處하였다.

妖花當 [ 編輯 ]

취선당 [ 編輯 ]

肅宗 때 희빈 張氏가 居處했던 殿閣. 閑中錄 記錄에 依하면 저승戰 건너에 位置하였고, 英祖時代에 저승戰의 燒廚房으로 改造되었다. 英祖 時代에 저승戰과 함께 火災로 全燒되었다.

環聚情 [ 編輯 ]

闕內各司 [ 編輯 ]

日帝가 植物園과 動物園을 세우기 前만 해도 存在했었으나 1900年 初盤에 動物園을 세우면서 다 헐어버렸다.

昌慶宮管理所 [ 編輯 ]

事件 事故 [ 編輯 ]

昌慶宮 放火 事件 [ 編輯 ]

2006年 4月 26日 放火犯 채종기 가 昌慶宮 文政殿 에 불을 질러 400餘 萬원 相當의 財産被害가 났지만 多幸히 門짝만 타는데 그쳤다.

各州 [ 編輯 ]

  1. 朝鮮王朝實錄, 太祖 5卷 3年 1月 7日 (丁未) 1番째記事 / 수창궁에서 賀禮를 받고, 宗廟에 가서 監督官에게 工事를 簡單히 하도록 命하다
  2. [1] Archived 2020年 9月 19日 - 웨이백 머신 [ 서울이야기 ] 東闕(東闕) : 昌德宮과 昌慶宮 한국역사연구회
  3. 風水 論難 ‘서울 율곡로’ 開通 월간조선 2019年12月31日子
  4. 朝鮮王朝實錄, 太祖 1卷 1年 7月 17日 (病身) 1番째記事 / 太祖가 百官의 推戴를 받아 수창궁에서 王位에 오르다
  5. 朝鮮王朝實錄, 定宗 4卷 2年 5月 1日 (乙丑) 3番째記事 / 수창궁 後援 청심정에서 척席놀이를 구경하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
  6. 청심정 文化컨텐츠닷컴
  7. 글로벌 稅契對百科 》〈 昌慶宮
  8. 異常해, 2004, p.83.
  9. 異常해, p.84
  10. 異常해, 2004, p.84.
  11. 1909年 日本이~: 이이화, 《韓國史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近代化바람》(한길사, 2004) 55쪽.
  12. 異常해, 2004, p.87.
  13. 昌慶宮 藏書閣 撤去, 《東亞日報》, 1992.11.2
  14. 異常해, 2004, p.88.
  15. 異常해, 2004, p.89.
  16. 異常해, 2004, p.91.
  17. 영춘헌, 《朝鮮王朝實錄事前》
  18. 集福軒, 《朝鮮王朝實錄事前》
  19. 정초석(머릿돌)에는 ' 短期 4242年'에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參考로 檀紀 4333年은 逆算하면 2000年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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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昌慶宮 -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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