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근交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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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근交代 ( 日本語 : ?勤交代 山킨코타이 [ * ] )는 各 다이묘 를 定期的으로 에도 를 오고 가게 함으로써 各 番에 財政的 負擔을 加하고, 볼모를 잡아두기 위한 에도 幕府 의 制度이다. 이 制度에 따라 各 番은 도쿠가와가에 反旗를 들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도쿠가와 가가 15代에 걸쳐 繁榮을 누리는 要因이 되었다. 山킨(?勤, 참근)은 一定 期間 主君(李 境遇는 쇼군 )의 膝下에 오고 가는 것, 코타이(交代, 交代)는 餘暇를 提供 받아 領地에 돌아가 行政 事務를 보는 것을 意味한다.

小盧베 番 참근交代 行列圖(1) / 難彈視 文化博物館 所藏
小盧베 番 참근交代 行列圖(2) / 難彈 時 文化博物館 所藏
小盧베 番 참근交代 行列圖(3) / 難彈 時 文化博物館 所藏

槪要 [ 編輯 ]

가마쿠라 時代 이미 고케닌 들로 하여금 가마쿠라 로 出仕하도록 한 것을 참근交代制의 起源으로 보고 있으며, 當初에는 쇼군 에 對해 다이묘 들이 表하는 服屬의 儀禮로써 始作되었던 것이 에도 時代인 1635年에 3代 쇼군 이에미쓰 에 依해 도쿠가와 쇼軍歌에 對한 軍役 奉仕를 目的으로 制度化되었다.

이 制度에서 여러 다이묘들은 1年 週期로 에도와 自身의 領地를 오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에도를 떠나는 境遇에도 自身의 正室 婦人과 뒤를 이을 아들을 에도에 늘 常住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측실 및 다른 庶子의 境遇는 이러한 義務에서 자유로웠다). 領地에서 에도까지 가는데 드는 旅行經費는 勿論 에도에서 머무르는 동안 들어 가는 費用 또한 다이묘 自身이 모두 負擔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는 各 番에 莫大한 財政的 負擔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다이묘 或은 다이묘 自身의 家族을 人質로 잡아두는 形態로써 여러 番의 軍事力을 저하시키는 效果도 있었다는 것이 참근交代制가 지닌 效果에 對한 旣存의 通說로, 이러한 副次的인 效果를 除外하고도 무엇보다도 戰爭이 없는 太平時代였던 에도 時代에 참근交代制는 쇼군과 다이묘 사이의 主從關係를 보여주는 하나의 軍事的 儀禮이기도 했다. 나아가 《語觸서관보集成》(御?書?保集成)에 따르면 「旣存의 人員數가 近來에 들어 와서 몹시 많아졌다. 이는 한便으로는 國軍(國郡)의 費用이고 한便으로는 人民의 勞苦이다. 앞으로는 이에 걸맞는 待接으로 이를 節減해 주어야 할 것이다」(??の員?近?甚だ多し。且つは?郡の費、且つは人民の?なり。向後その相?を以てこれを減少すべし)라고 되어 있어, 다이묘의 참근交代 때에 들어 가는 支出을 節減해 줄 것을 要求하고 있다. 이에 따라 260年에 걸쳐 長期的으로 日本을 支配하는 에도 幕府 政權을 支撐하는 端初가 마련되었다.

沿革 [ 編輯 ]

名稱 [ 編輯 ]

에도 城 에 모인 다이묘들

〈참근交代〉(?勤交代) 라는 名稱이 一般的이다. 에도 를 오고 가며(勤, 勤務할 近) 쇼군을 謁見하는 것이(覲, 뵐 近) 一般的이기 때문에,〈?勤〉은〈?覲〉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또한,〈交代〉(交代)는〈교체〉(交替)라고 쓰이는 境遇가 있다.

間에이 12年( 1635年 ) 〈 巫歌製法도 〉에서 참근交代를 規定한 弔問에는

大名小名在江? 交替 所相定也??夏四月中可致 ?勤 ?者之員?……

라고 쓰여져 있어,〈?勤〉과〈交替〉의 用語가 쓰이고 있다. [1]

起源 [ 編輯 ]

참근교대는 가마쿠라 時代 當時, 고케닌 가마쿠라 에 오고 갔던 點에 起源을 두고 있다.

센고쿠 時代 센고쿠 다이묘 의 一部는 自身이 居處하는 誠意 조카마치 에 自身에게 服屬해 있던 부시 들을 모았고, 그 中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城 ? 주라쿠 다이 ? 후시미性 에서 自身의 統治에 服從한 다이묘에게 邸宅을 提供해 그곳에 妻子息을 살게 한 것으로부터 참근敎大의 原形이 생겨났다. [2] 다이묘들은 1年을 單位로 오갔다.

制度의 完成 [ 編輯 ]

참근敎大에 利用되었던 度기와校 (常盤橋) ( 기타큐슈時 )

게이初 5年( 1600年 ) 세키가하라 戰鬪 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勝利해 霸權을 쥐자 여러 다이묘들은 도쿠가와氏 의 歡心을 사기 위해 에도 에 出仕하여 도쿠가와를 謁見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前例를 본따 에도 城 아래에 邸宅 을 提供하고 다이묘의 아내( 情實 )와 子息(男子의 境遇라면, 後繼者)을 에도에 居住하게 하는 制度를 設立해, 當初에는 自發的인 出仕였지만 漸次 制度로 定着해 갔고 3代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의 政權인 間에이 12年( 1635年 )에는 巫家第法度의 改正에 따라 참근交代 制度가 義務化되었다. [3]

間에이 19年( 1642年 )에는 후다이 다이묘 에게도 참근交代가 義務化되어, 原則的으로 幕府의 職權을 가진 者를 除外한 모든 다이묘가 참근交代를 行하게 되었다.

그 後 [ 編輯 ]

참근交代 制度는 8代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執權 때 財政 窮乏을 理由로 部分的으로 緩和되었던 時點을 除外하고 에도 時代 全般에 걸쳐 固守되었다.

幕府 末期 分큐 2年( 1862年 ) 8月 에는 分큐의 改革 의 一環으로, 3年에 1番(100日) 出仕하는 것으로 緩和되었다. 그 後, 겐지 元年( 1864年 ) 9月 今文의 便 以後 當時 情勢를 幕府가 過信하고 本來 制度로 되돌렸으나 따르지 않는 도 많았다.

過程 [ 編輯 ]

間에이 12年( 1635年 ) 참근交代 制度의 起源에서는, 모든 다이묘는 1年마다 에도와 自身의 領地를 往來했고, 妻子息은 볼모로 에도에 常住해야 했으며, 그 旅程 費用이나 에도에서의 滯留費는 모두 그들의 負擔이었다. 다만, 미토 도쿠가와가 等의 一部 新版 ? 후다이 다이묘, 그리고 大部分의 하타모토 는 領地가 에도와 가깝거나 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例外的으로 참근交代를 行하지 않고 에도에 常住해 조후 라고 불리었다. 幕府의 公職에 있는 후다이 다이묘 또한 마찬가지였다. 코타이料理아이 (交代寄合) 라고 불린 格式 높은 하타모토 는 다이묘에 準해서 참근交代를 行했다. [4]

참근交代 制度의 目的은 모든 다이묘들의 資本의 支出을 强要함으로써 勢力을 약화시켜 謀反 等을 行하는 것을 억지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진다. [5] 單, 幕府로서도 本來의 趣旨는 軍役 奉仕에 있었기 때문에 番의 財政이 破綻나 軍役이 不可能하게 하는 것은 참근敎大의 趣旨를 根本的으로 否定하는 것이 되기에 다이묘 行列 을 制限하는 等의 措置를 取했다. 그렇지만 모든 다이묘는 겉치레를 좋아하여 威嚴을 보이기 위해 種種 制限을 어기는 境遇도 있었다. 財政이 豐足하지 않은 零細한 다이묘들度 費用을 아끼지 않고 다이묘 行列을 華麗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努力을 한 境遇도 있었다.

참근교대는 軍役이므로 다이묘는 保有 兵力인 負荷 부시 多數를 隨行員으로서 데리고 에도에 出仕하고 다시 領地에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移動할 境遇엔 '다이묘 行列' 이라고 하는 大大的인 行進을 할 必要가 있었다. 이 때문에 費用이 커지고, 참근교대는 다이묘의 財政을 壓迫하게 되었다. 交互 7年( 1722年 ) 幕府의 財政 逼迫을 背景으로 制定된 아게마이노세 (上米の制) 에서는 祿俸 1萬石에 對하여 100席의 쌀을 上納하게 하였고, 그 代身 참근交代 遂行時 에도 體制 期間을 半年으로 줄여주는 措置를 取했다.(1730년에 한 次例 成果를 올린 뒤, 廢止되었다.)

이 外에, 참근交代 制度 下에 태어난 다이묘의 相續者는 모두 에도에서 자라나기 때문에, 各 다이묘를 精神的으로 領地와 결부시키기 힘들게 하는 效果를 냈다고도 일컬어진다. [6]

참근交代 制度로 인해, 街道와 驛站이 整備되었고 다이묘 行列이 消費하는 厖大한 費用에 依해 繁榮하였다. 同時에 多數의 다이묘 隨行員이 脂肪과 에도를 往來했기 때문에, 그들을 거쳐 에도의 文化 가 全國에 퍼지는 效果를 達成했다. [7] 例를 들면, 덴抛 12年( 1841年 ) 기슈 도쿠가와가 (紀州?川家) 11代 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 (?川?順)의 참근交代에서는, 부시 1639名, 人夫 2337名, 말 103疋을 거느렸다. 旅程 中 들리는 히라카打 駐쿠 (枚方宿)에서는, 準備를 위해 히캬쿠 나 기슈 番 番社가 번주가 到着하기 數 個月 前부터 駐쿠에 와 있었다고 記錄되어 있고, 그 準備까지 巨額의 支出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孤山케 기슈番 의 다이묘 行列 等은 格式과 權威를 實感하게 하는 대행렬이었기 때문에, 數 많은 農民이 구경하러 찾아 올 程度였다. 이 制度에 依한 經濟的 效果나 文化的 效果는 대단히 커, 에도 時代 社會 秩序의 安定과 文化의 繁榮을 이룩하게 되었다. 또한, 참근交代로 인해 에도에 單身 赴任하는 各 番의 家神은 相當한 數에 이르러, 이 結果 에도 人口 의 約 折半을 부시가 차지하게 되었고, 遊廓 이 蕃盛하게 되었다. 에도의 人口가 女性에 비해 男性이 極히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時代劇 等에서는, 다이묘 行列이 지나가면 庶民이 바닥에 엎드려 조아리는 場面이 자주 登場 하지만, 實際로 庶民이 바닥에 엎드려야만 하는 境遇는 自身의 主君으로 있는 다이묘와 도쿠가와 가의 行列 뿐이었고, 그 外의 다이묘에게는 조아릴 義務가 없었다. 다만, 當然한 일이나 行列이 나아가는 것이 보이면 길을 讓步해 주어야 했다.

各州 [ 編輯 ]

  1. 當時의 文書는 當然히 손수 쓴 文書로,〈?〉글자는 康熙字典 체인〈參(ムムム人?)〉字를 쓴 것이 아닌, 弱體〈(ムニニ人水)〉로 쓰여 있다.
  2. 야마모토 히로부미《참근交代》第1張 참근敎大의 歷史 1 참근敎大의 源流, 마루야마 야스나리의 說明에 따라. p28~p29
  3. 요시무라 土曜禹(吉村豊雄)〈 참근敎大의 制度化에 따른 古刹 : 間에이 巫歌法制度와 호소카와 氏(細川氏) 구마모토 大學 《文學部 論叢》Vol.29, 1989年 3月 ISSN 0388-7073 p28~p49
  4. 代代로 領地에 餘暇를 주시다. (代?采地への暇を賜う) ( 管政府 )
  5. 이 主張에는 理論(異論)이 있는데, 支出을 强要해 謀反을 막는다는 것은 結果論일 뿐, 當初 幕府에는 그러한 意圖는 없었다는 說이 現在는 有力하다.
  6. 《에도3??년〈평범한 부시〉는 이렇게 살았다》야와타 카즈誤(八幡和?), 우스이 요시노리(臼井喜法)
  7. 와타나베 마사코〈 참근敎大에 對하여 假造短期大學 (華頂短期大?)《假造박물관학硏究》Vol.5, 1998年 12月 ISSN 0919-7702 p27~p44

參考 文獻 [ 編輯 ]

  • 山本博文 (1998). 《?勤交代》. 講談社(現代新書). ISBN   4-06-149394-9 .  
  • 丸山雍成 (2007). 《?勤交代》. 吉川弘文館(日本?史叢書). ISBN   978-4-642-06664-8 .  
  • 忠田敏男 (2003). 《?勤交代道中記 加賀藩史料を?む》. 平凡社(ライブラリ?). ISBN   4-582-76463-0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