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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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時政府 外交官 으로 旺盛하게 活動한 獨立運動家 정한경.

정한경 (鄭翰景, 1890年 [1] ~ 1985年 [2] )은 大韓民國 의 獨立運動家, 外交官이다. [3] 1910年 , 美國 으로 亡命해 샌프란시스코 에서 안창호 , 李承晩 等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를 組織했다. 1918年 10月 1日 , 대한인국민회 全體代表會를 열어 파리 講和會議 에 派遣할 韓國人 代表를 選拔할 때, 李承晩 , 민찬호 와 함께 뽑혀 워싱턴 으로 갔지만 美國 政府가 韓國代表 派遣을 承認하지 않은 탓에 出國을 저지당하였다. 1919年 4月 14日 부터 4月 16日 까지 3日間 필라델피아 에서 열린 臺韓人自由大會 에 參加하여 韓人들의 獨立意志를 宣言하는데 큰 寄與를 하였다. 以後 臨時政府 歐美委員會 에서 各國의 外交部 와 交涉하면서 活潑한 獨立運動 을 展開하였다.

1944年 , 大韓民國 臨時政府 外務委員 兼 祕書主任, 1949年 1月 , 週日 代表部 工事, 1949年 4月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6大 丹粧을 歷任하였다.

生涯 [ 編輯 ]

一名 韓經(漢慶). 平安南道 順天 出身. [4]

1914年 , 네브라스카 州立大學 化學 實驗室 에서 女學生들과 남긴 記念寫眞.

1904年 , 14살의 나이로 掉尾하여 1906年 , 學業을 위해 네브라스카 커니 로 옮겼다. [3] 初中高等學校 過程을 모두 마치고 네브라스카 初級大學으로 進學했다. [3] 네브라스카 州立大學에서 學士와 碩士를 받고 아메리칸 유니버시티에서 博士學位를 받았다. [5]

1910年 , 샌프란시스코 에서 獨立運動을 目的으로 안창호(安昌浩)·李承晩(李承晩) 等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組織하여 在美僑胞 의 自治活動과 獨立精神 昂揚에 힘썼다. [4]

1918年 , 시카고 노스웨스턴 大學 助敎授가 되었고, 이때부터 本格的인 獨立運動에 나섰다. [3]

1920年 가을, 워싱턴 에서의 外交活動을 마치고 호놀룰루 行 船舶 위에서 레이 (Lei)를 목에 걸고 있는 정한경.

파리 平和會談 前後 [ 編輯 ]

1918年 11月 , 獨逸 이 降伏하여 世界 大戰 이 끝나고 파리 에서 萬國 平和會議 가 開催되자, 太平洋 沿岸 및 뉴욕 居住 僑民들을 中心으로 김규식 과 함께 神考慮回 를 組織하여 平和會議에서 韓國의 立場을 披瀝할 수 있도록 計劃했다. [3] 이에 따라 美洲 各地에서 모인 在美韓人 全體會議가 대한인국민회 中央總會 主催로 開催되고 이 會議의 決意에 따라 破棄 强化會議에 派遣할 代表로 李承晩 , 민찬호 와 함께 그를 選出했다. 이에 따라 1919年 12月 , 프랑스行 旅券 을 發給 받고자 했으나 日本 代表團의 强力한 反撥로 挫折되고 말았다. [3]

1919年 2月 25日 , 獨立運動 事務를 專擔할 臨時委員會가 設置될 때 副委員長에 選任되어, 李承晩·민찬호(閔瓚鎬) 等과 같이 韓國이 完全한 政府를 樹立하고 內治와 外交의 權利가 있을 때까지 國際聯盟 委任統治 로써 保護받게 해달라는 內容의 委任統治 請願書를 講和會議 各國 代表들과 우드로 윌슨 (Wilson, T. W.) 大統領에게 提出, 美國 上院 에서 韓國 獨立 問題를 討議하게 하였다. [4] 主要 內容은 아래와 같다.

첫째, 列强은 韓國 日本 의 虐政으로부터 救出하라.
둘째, 列强은 將來 韓國의 獨立 을 保障하라.
셋째, 韓國은 當分間 國際聯盟 의 統治 아래두자.

1919年 4月 14日 부터 3日間 필라델피아 獨立記念館 에서 열린 第1次 韓人聯合會의 에 參加하여 大韓獨立宣言式을 盛大하게 擧行하는데에 큰 役割을 擔當하였다.

1919年 5月 , 雜誌 『아시아』 [6] 에 '오늘의 韓國'이라는 主題로 寄稿했다. [3]

1919年 9月 , 在美僑胞의 愛國誠金 30萬 달러를 모아 傷害(上海)로 傳達,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活動을 도왔다. [4]

1920年 10月 , 그는 호놀룰루 僑民들의 招請을 받고, 李承晩을 代身하여 '太平洋會議 韓國代表'의 資格으로 參席, 韓國의 獨立運動과 民族精神 에 對하여 演說함으로써 熱烈한 呼應을 받기도 하였다. [3]

또 정한경은 基督敎 人士와 世界 弱小國 同盟會를 背景으로 美國 政治家들을 訪問하고 美國 議會 에서 韓國의 獨立을 妖妄하게 하는 한便, 新聞紙上에 聲明書 를 發表하여 美國人의 支持와 聲援을 要請하였다. 아울러 '北美合衆國의 東洋政策(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平和會議(The Peace Conference)' 等의 글을 著述하여 韓國 獨立의 不可避性을 力說했다. [3]

1921年 , 정한경은 大韓民國 臨時政府 歐美委員部 委員에 任命되었다. 以後 정한경은 臨時政府 의 워싱턴 委員部 委員으로 獨立運動을 持續하였다. [3]

太平洋 戰爭 時期 [ 編輯 ]

1944年 5月 , 臨時政府에서 그와 임병직 을 前後救濟會의, 太平洋學會 等 國際會議에 代表로 派遣했다. [3]

1944年 10月 20日 ,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會議에서 外務委員 兼 祕書主任에 選任되어 臨時政府와 緊密한 連絡을 擔當하면서 口味 方面에 對한 外交 活動을 强化하였다. [4] 1985年 , 95歲의 나이로 別世했다. [3]

事後 [ 編輯 ]

大韓民國 政府 는 1962年, 建國訓長 독립장을 追敍하였다. 1995年 , 그의 遺骸를 國內로 奉還하여 國立大前賢充員 獨立有功者 墓域에 安葬했다.

기타 [ 編輯 ]

1983年 3月31日 , 콜로라도 스프링스 에서 인터뷰에 應하고 있는 老年의 정한경 博士.

정한경 博士는 높은 知識과 雄辯術, 그리고 英文 著述을 바탕으로 一齊 의 侵略과 아시아 의 勢力均衡, 그리고 韓國이 自主獨立國임을 呼訴하고자 言論 出版 等 글을 통해 美國 社會 깊숙히 파고들었던 美洲 獨立運動 의 旗手였다. [3]

美國 社會에서는 'Henry Chung De Young'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李承晩 博士 를 가장 尊敬하는 人物이라고 말했다. 李承晩 博士와의 關係는 1次 世界大戰 부터 始作하여 2次 世界大戰 때까지 워싱턴 에서 同居同樂하며 外交를 통한 獨立運動을 함께 벌였다. “李承晩 博士는 固執이 센 분이고 妥協하기 어렵고, 獨裁的인 性格도 없지 않아요. 그러나 그분은 疑心없는 愛國者이지요.”라고 表現했다. [3]

“나는 마음으로는 島山 安昌浩 先生의 精神을 平生 따르면서 살았지만, 몸은 李承晩 博士를 돕는 外交 一線에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3]

정한경 博士는 平生동안 국민회 , 興士團 , 同志會 에 加入하지 않고 獨立的으로 일을 했다. 그의 獨立論은 '韓國은 弱小國 이므로 强大國 人 美國을 움직여야만 對한 의 獨立이 可能하다'는 外交 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3]

美國人 兆나 女史와의 사이에 큰 아들 에드윈 情, 헨리 鄭, 데이빗 情 그리고 딸 프란시스를 두고 있다. [3]

著書 [ 編輯 ]

1922年 , 정한경은 《韓國事情 [7] 》이라는 冊을 英文 으로 執筆하여 韓國의 歷史 , 支持(地誌) 및 政治關係와 一齊 의 敎會 彈壓 等 侵略野慾을 指摘함으로써 크게 好評을 받았다. [3]

受賞 [ 編輯 ]

갤러리 [ 編輯 ]

各州 [ 編輯 ]

  1. 海外殉國 獨立有功者 7位 還國 -聯合뉴스
  2. 海外殉國 獨立有功者 7位 還國 -聯合뉴스
  3. “英文 著述과 外交論으로 獨立運動에 나선 정한경” . 《대한인국민회 記念財團》.  
  4. “정한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이로서 정한경은 李承晩 以後 美國 에서 2番째 博士 가 되었다.
  6. 노벨文學賞 受賞者인 펄 벅 이 創刊한 雜誌이다.
  7. 國內 飜譯 題目은 '韓國의 狀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