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
(貞洞第一敎會)는
大韓民國
에 最初로 세워진
監理敎
敎會
中에 하나이다.
德壽宮
옆인
中區
정동길 46 (
貞洞
)에 있다. 正式名稱은 "基督敎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이거나 "정동제일감리교회"이다. 흔히
정동제일교회
,
情動監理敎會
로 指稱되며,
정동교회
라고도 부른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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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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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는
朝鮮
末期인
1885年
에 設立된 韓國 最初의 監理敎 敎會中에 하나이다. 美國人
改新敎
宣敎師
헨리 아펜젤러
가 1885年
10月 11日
에 정동에 있는 自身의 舍宅에서 韓國人 監理敎 信者들과 함께
禮拜
를 한 것을 정동제일교회의 始初로 삼고 있다. 監理敎團의 代表格으로 여러 分野에서 "韓國 最初" 記錄을 保有하면서 韓國 社會에 많은 影響을 끼쳐왔다.
文化的 價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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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의 벧엘禮拜堂은
1897年
에 建築되어 韓國 最初의 西洋式
改新敎
敎會로 불리며
大韓民國의 史跡
第256號로 指定되어 있다. 韓國 最初의
파이프 오르간
도
1918年
에 이 敎會에 奉獻되었으며, 정동聖歌臺는 韓國의 改新敎 音樂 文化를 先導했다.
1887年
에 設立된 貞洞婦人病院은 韓國 最初의
어린이
와
婦女子
專用
病院
이다. 정동에는 初期
改新敎
學校인
배재學堂
과
梨花學堂
이 設立되어
開化期
新敎育의 發祥地가 되기도 했다.
1918年 韓國 最初로
파이프 오르간
이 設置되었으며, 開化期에 많은 音樂家를 輩出하였다.
建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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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年
에는 敎人數가 200名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名을 受容할 수 있는 現代式 禮拜堂을 建築하기로 하고
1895年
9月에 着工하여
1897年
12月 26日에 奉獻式을 가졌다. 이 建物이 現在까지 唯一하게 남아 있는 19世紀 敎會建物이다.
이 때, 朝鮮과 大韓帝國의 有名한 建築技士
심의석
(沈宜錫)李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의 建築에 參與하였다. 정동교회는
1895年
에 着工,
1898年
10月에 竣工되었는데, 이 敎會의 3層 甓돌組 鐘塔(鐘塔) 建造는 建築技術士敵으로 獨立門의 石造構造物과 함께 重要한 意味를 가지는 것이다.
[1]
歷史的 貢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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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의 招待 擔任牧師는
아펜젤러
宣敎師가 맡았고,
1902年
에 第4代 擔任
牧師
로
최병헌
牧師가 赴任하면서 韓國人이 擔任을 맡게 되었다. 第5代
懸鶉
, 第6代
孫貞道
, 第7代
李弼柱
擔任牧師는
大韓民國 國家報勳處
의
獨立有功者
敍勳을 받은 獨立運動家들이다.
1919年
에는 擔任牧師 李弼柱와 傳道師
박동완
이
民族代表 33人
으로 參與하면서
3·1 運動
에 積極的으로 同參했다.
3·1 運動
에 參加했다가 逮捕되어 獄死한 梨花學堂 學生
柳寬順
烈士도 정동교회 信者였다.
韓國의 開化運動을 이끌었던
윤치호
는 정동교회의 長老로 始務하였다. 그는
105인 事件
後 親日性向을 보였으며, 京城
YMCA
의 總務와 會長을 歷任하였다.
大韓民國 初代大統領
李承晩
은 1956年 정동교회의 名譽長로 推戴했다.
서재필
이 정동교회靑年會를 中心으로 協成會를 組織하여 獨立協會의 前衛隊를 만들 때
노병선
,
신흥우
等과 함께 主導하였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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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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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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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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