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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論 (基督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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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틴 禮拜堂 에 있는 아담의 創造

人間論 (Christian anthropology)은 基督敎 神學 의 領域에서 하나님 과 關聯된 人間을 硏究하는 學問이다. 基督敎 人間論은 時間과 空間을 넘어서 人間의 物理的 社會的 特性을 比較硏究하는 人類學의 社會的 學問과는 區別된다. 基督敎 神學의 人間論은 하나님으로부터 創造된 人間 卽 하나님의 形象 과 犯罪로 인해 墮落한 人間을 다루는 領域, 그리고 그리스도 로 回復된 義人을 다룬다. 하나의 觀點은 人間의 本性과 構成要素를 硏究한다. 그것은 聖書 가 말하는 것에 根據하여 人間을 構成하는 , 같은 槪念들에 關한 것이다. 人間의 構成要素에 對해서는 傳統的인 見解로 三分說, 二分法 및 一元論 (人類學의 意味에서)이 있다. [1]

正義 [ 編輯 ]

人間이란 存在는 누구인가? 플라톤 은 人間을 몸과 靈魂으로 分離된 二元論 적 思考를 가진 者로, 몸이 靈魂을 붙잡는 監獄으로 理解하고 죽은 後에 靈魂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動物에 들어가서 淨化되고 이데아 로 간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動物과 植物도 靈魂이 生命의 原理이기에 人間과 動物의 區別은 分明치 않다. [2] 人間은 理性과 自由意志를 가지기에 人間이라고 데까르트 는 말하였다. 現代 哲學者들 가운데 니체 , 하이데거 , 싸르트르 等은 人間의 本質을 사람의 自由性에서 찾는다. 恒常 만들어져가는 途中에서 責任性을 强調한다. 人間의 實存을 이념적 本質로 보지 않고 決斷의 行爲 卽 歷史的으로 存在한다고 한다. 니체는 人間은 動物과 初인 사이에 늘어져 있는 줄, 그것도 深淵 위에 있는 줄로 表現했다. 하이데거는 人間은 오늘날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謠 가장 알 수 없는 神祕라고 했다. 人間은 動物과 같지 않기 때문에 進化論的으로 人間論이 理解될 수는 없다. 人間이 가진 可恐할만한 存在와 同族 破壞性은 進化論的으로 어떻게 說明이 可能할까? 人間이 道德的으로 漸漸 高等化되는 存在와는 反對的인 存在가 아닌가? 地球上의 犯罪와 暴力은 漸漸 더 惡해지고 있다. 이런 思想은 人間을 未來를 向해 만들어져 가는 存在로 責任을 가진 者로 본다. 그렇다면 늘 人間은 不完全 存在요, 죽음에 直面해 있는 不幸한 存在로 가는 것이다. 이들은 未來를 主管하시는 하나님의 主權과 하나님의 나라의 完成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人間은 누구인가가? 人間에 對한 定義는 쉽지않다. 古代 헬라에서는 너 自身을 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델피 (Delphi) 神殿의 信託이었고, 소크라테스 의 말로도 有名하다. [3] 그들에게 있어서 自身들을 아는 것은 哲學的 命題이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와 같은 사람은 人間이 平生 ‘眞正한 自身이 되는 法’(自身의 眞正한 모습을 아는 것)李 人生의 目標라고 본다. [4] 進化生物學者들은 사람 을 生物學的 接近으로 理解한다. 人類學者들은 人間을 文化와 文明의 觀點에서 理解한다.

神學的 人間 [ 編輯 ]

神學的 人間의 理解는 聖經을 통하여 人間을 理解하기 始作한다. 또한 基督敎 神學者들의 理解를 통하여 人間을 좀더 統合的으로 糾明한다. 罪의 觀點에서 본 칼빈 은 人間이 自己 自身을 省察한다면 自身에 對하여 窮極的으로 失望하게 된다고 말한다. 人間을 聖經으로부터 理解했던 傳統的인 神學과 달리 現代 神學者들은 聖經 中心이 아닌 哲學的 體系가 중심되어 哲學과 聖經을 混合하여 人間을 理解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啓示를 理性的, 科學的, 哲學的으로 解釋하는 것은 限界가 있다.

  • 어거스틴 - 原罪로 墮落하였고 恩惠로 救援받는 人間을 말한다.
  • 펠라기우스 는 人間의 全的 墮落과 救援의 無能力을 否認하고 自力救援을 主張한다.
  • 루터 의 義人事賞은 어거스틴의 恩寵論에서 왔다. 罪人이며 義人을 同時的으로 말한다.
  • 칼뱅 - 하나님의 形象으로 創造되었나 墮落으로 歪曲되어 그리스도로 인해 形象이 回復되어야 함을 말한다.
  • 슐라이에르마허 와 리츨 - 칸트 나 新 칸트의 哲學 體系를 使用하여 純粹한 內在的 人間論을 主張한다.
  • 키에르케고르 - 人間은 하나님 앞에 선 單獨者이다. 피造成의 槪念으로 說明한다. 人間은 生과 死의 緊張 속에서 自身의 피造成을 깨닫고 自身의 實存을 發見한다는 것이다.
  • 바르트 -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人間性을 回復한다고 본다.
  • 루돌프 불트만 - 실존적 自己理解를 强調한다.
  • 고가르텐 - 律法과 福音의 要求 아래 있는 對話的, 活動的 人格 사이의 緊張에서 解釋한다.
  • 틸리히 ? 人間을 疏外 狀態에 빠진 字로 說明한다.
  • 니부어 - 하나님의 形象과 同時에 罪人을 말한다. 니부어는 人間의 自己의 有限性을 認定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努力하는 存在者 卽 罪人으로 人間을 말한다.
  • 몰트만 과 판넨베르그 - 마르크스나 블로號, 마르쿠제 等의 辨證法的이고 進化論的 唯物史觀을 中心으로 普遍私的이고 進化論的 人間學을 主張한다.

人間論의 重要性 [ 編輯 ]

神學은 三位 하나님을 아는 것만 아니고 그 분의 形象으로 만들어진 人間을 아는 學問이다. 勿論 이 두 主題들을 完全하게 理解한다는 것은 不可能하다. 칼빈은 人間이 그의 思想이 하나님을 卽刻的으로 向하지 않는 限 自己 自身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칼빈은 人間은 宗敎의 씨앗(divinitatis sensum)을 가졌기에 自然 本能的으로 하나님에 對한 理解力이 마음에 심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墮落으로 그것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는 참된 知識을 저버렸다고 한다. 古代 헬라에서는 너 自身을 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델피(Delphi) 神殿의 信託이었고, 소크라테스의 말로도 有名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自身들을 아는 것은 哲學的 命題이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와 같은 사람은 人間이 平生 ‘眞正한 自身이 되는 法’(自身의 眞正한 모습을 아는 것)李 人生의 目標라고 본다. 그러나 自己를 省察할 수 人間은 窮極的으로 失望하게 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聖經은 人間을 아는 것은 人間의 哲學的, 道德的 價値를 넘어 靈的인 永遠한 眞理와 關聯되어 있다. 人間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을 섬기며 그를 영화롭게 할 때, 窮極的인 人間의 存在의 價値가 드러난다. 人間은 하나님의 形象대로 지은 받은 存在로서 自身을 아는 것은 말할 必要도 없이 重要하다. 그러므로 人間은 하나님이 세우신 創造 目的을 實現을 위하여 自身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形象을 따라 우리의 模樣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空中의 새와 六畜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自己 形象 곧 하나님의 形象대로 사람을 創造하시되 男子와 女子를 創造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福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生育하고 蕃盛하여 땅에 充滿하라, 땅을 征服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生物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 16-28)

人間은 하나님의 形象(模樣)으로 創造되었다는 事實이 人間의 참된 正體性을 먼저 보여준다. 人間은 스스로 存在하지 않았고 나 또한 스스로 獨立性을 가진 存在가 아니다. 人間은 하나님이 創造하신 世界를 돌보는 責任者로 부름을 받았다. 이런 廳지기 使命에서 人間은 하나님의 主權을 認定하며, 그의 榮光을 위하는 것(苦戰10:31, 롬11:36)과 그를 永遠토록 즐거워하는 삶을(시73:23-28) 살게 된다(WSC,Q.1.1, WLC.Q.1.1).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WSC.Q.2)? 舊約과 新約聖經에 包含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그를 어떻게 영화롭고 즐거워하는지를 引導하는 唯一한 規則이다(WSC. Q.2.A). 人間은 自身의 能力의 限界와 罪人인 것을 알아야 한다. 人間은 하나님의 形象을 입은 存在임에도 不拘하고 墮落한 罪人으로 하나님을 위한 참된 善을 行할 수 없는 無能한, 全的으로 腐敗한 人間이 되었다. 따라서 人間은 全的으로 墮落한 罪人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關係를 가질 수 없고 自身의 使命을 바르게 實現할 수 없는 存在이다. 따라서 人間은 사랑의 救世主를 必要로 한다. 人間은 墮落하였으나 如前히 하나님의 形象을 가진 存在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存在이다. 참된 人間性의 回復은 人間 스스로 이룰 수 없다. 人間은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鎭靜한 人間으로 存在할 수 없다. 福音은 眞正한 人間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發見된다고 한다. 聖經은 참된 人間의 바른 使命과 義務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主張한다.

人間論 硏究 方法들 [ 編輯 ]

人間을 理解하기 위한 學問的 方法으로 人類學的, 自然科學的, 社會學的, 心理學的, 哲學的 方法 等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다. 實存主義的 方法을 追求하는 者들은 喪失된 自我를 찾는 것이 人間學이라고 본다. 그러나 참다운 人間論 理解의 神學的 方法이란 하나님의 啓示를 올바른 聖經的 解釋을 통하여 追求하는 方法이다. 이 方法의 妥當性은 人間의 全的인 腐敗를 前提하고 救援과 回復을 말하는 聖經으로 解釋되어야 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三位 하나님에 對한 올바른 理解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人間에 對한 論議가 이루어지며, 그리고 人間論에 對한 豐盛한 理解는 基督論, 救援論 그리고 敎會論으로 連結되어서 人間의 마지막인 終末論까지 도움이 된다.

最近 人間論의 主題들 [ 編輯 ]

人間論의 主題는 主로 傳統的으로 人間의 起源, 人間의 性質, 하나님의 形象, 罪이다. 그러나 最近 人間에 對한 存在論的 質問이 實存主義 哲學의 影響으로 일어났으며, 進化論의 影響으로 生物學的 人間 理解로 始作되었고 科學의 發達로 人間 複製까지 다루어지게 되었다. 遺傳子工學의 發展으로 人間의 遺傳 情報를 解釋하게 되었다. 旣存의 靈魂, 罪, 하나님의 形象과 같은 主題는 칸트의 影響으로 倫理的인 領域에서 理解되었다. 社會學의 影響으로 人間을 社會와 關係 속에서 機能的인 役割을 强調하는 傾向이 20世紀에 나타났다. 20世紀는 神學的으로 基督論을 많이 다루었지만 實存主義 影響으로 人間에 對한 새로운 理解의 場을 열었다.

聖經의 人間 [ 編輯 ]

人間이 누구인지에 對한 質問(詩篇 8: 4; 욥 7: 17; 15: 14; 時 144: 3)은 그리스도와 關聯하여 答하여 진다. 히브리서 2張 6-9節 “暫間 동안 天使보다 못하게”되신 분으로, 榮光과 尊貴로 冠을 쓰시고 萬物이 그 발아래 服從케 된 이 그리스도 안에서 解決이 있다. 人間은 하나님의 形象으로 創造된 被造物이다. 人間의 몸과 靈魂으로 構成된 要素를 가진 存在이다. 하나님의 形象과 靈魂을 가진 存在로서 人間은 動物과 區別된 存在이다. 人間은 自由意志를 가진 存在이다. 墮落으로 救援에는 無能力하지만 지, 情, 義를 가진 者이다. 人間은 言語를 使用하는 解釋學的 存在이다. 이것을 가지고 人類의 文明을 이루어 나간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天地를 創造하셨고,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그의 百姓들에게 말씀을 約束하셨다.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은 自身이 人間의 모습을 取하여 人間들과 말씀하셨다. 우리 人間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기에 人間은 言語를 使用하는 存在이다. 人間은 하나님의 命令을 附與 받은 存在者이다. 다른 被造物과 關聯하여 받은 能動的 命令을 받은 存在이다. 人間은 하나님의 命令에 順從해야 할 存在이다. 人間은 하나님과 言約關係로 그 存在의 狀態가 드러나게 된다. 行爲言約과 恩惠言約 속에서 人間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人間은 墮落한 存在로 하나님의 形象이 腐敗되었다. 人間은 罪人이다. 人間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拘束 받아 새로운 被造物로 거듭 날수 있는 存在이다. 人間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義人이다. 人間은 땅위에서 苦痛과 訓鍊을 통하여 聖靈님으로 聖化되어야 할 存在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靈肉이 完全하게 될 終末論的인 存在이다. 人間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永遠한 生命에 居하는 者가 된다.

解釋者로서 人間 [ 編輯 ]

人間은 解釋하는 存在이다. 人間은 自身의 周圍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言語로 表現하는 解釋的 機能을 갖고 그 機能을 使用하도록 創造되었다. 創造된 아담이 人類 最初로 한 일은 바로 解釋 行爲였다. 創世記 2張 19-23節은 아담의 解釋的인 能力을 보여주는 重要한 記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各種 들짐승과 空中의 各種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各 生物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六畜과 空中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配匹이 없으므로. ...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中의 뼈요 살 中의 살이라 이것을 男子에게서 取하였은즉 女子라 稱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아담은 言語를 使用하여 이름을 짓는 解釋的인 能力을 遺憾없이 使用하고 있다. 따라서 人間은 하나님에 依해 解釋的인 機能을 타고났으며, 그의 삶의 現場에서 이 能力을 使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義務이며 特權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自身들의 삶의 現場을 解釋하는 것은 必然的인 것이며 매우 重要한 使役임을 깨닫게 된다. 니콜라스 월토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解釋이란 우리의 삶에 스며있어서 避할 수 없고 解釋 없이 人間은 이 世上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은 世上을 올바르게 解釋할 줄 알고 더 나아가 크리스천의 共同體뿐만 아니라 人類에게 올바른 解釋的 遺産을 남겨할 責任이 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基督敎가 世上에 준 것은 解釋學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에게 解析學의 重要性을 다시 한 番 認識하게 해 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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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명준, 聖經的 組織神學 (서울: 기쁜날 2014), 251
  3. '너 自身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 아니다, 오마이뉴스
  4.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人生授業』(서울: 이레, 2010), 20, 24

參考 文獻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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