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仁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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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仁 戰鬪
壬辰倭亂 의 一部
날짜 1592年 7月 13日 ( 陰曆 6月 5日 ) ~ 7月 14日 ( 陰曆 6月 6日 )
場所
結果 日本軍의 勝利
交戰國
指揮官
李珖 全羅道 巡察使
곽영 全羅道 防禦使
윤선각 忠淸道 巡察使
金睟 慶尙道 巡察使
權慄 光州 牧師
백광언   조방장
이지시  
이지례  
黃進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社헤에
마나베 私馬勞組
와타나베 시치에몬
兵力
8萬~13萬名 [1] 1600名
被害 規模
1200名 戰死 없음

龍仁 戰鬪 (龍仁戰鬪)는 壬辰倭亂 當時 1592年 7月 13日 ( 陰曆 6月 5日 ) 京畿道 龍仁 에서 李珖 윤선각 等이 이끄는 全羅道 李珖 4萬, 全羅道防禦使 곽영 2萬 + 忠淸道 윤선각 1萬 5千의 約 7~8萬 南道勤王軍(南道勤王軍)李 겨우 1600名의 日本軍에게 크게 敗한 戰鬪이다. 이 戰鬪는 韓國史 5대패展 ( 七千輛海戰 , 쌍령戰鬪 , 현리戰鬪 , 駐筆算 戰鬪 )中 하나이다. 後날 權慄은 黃進과 함께 臥薪嘗膽을 成功하고 행주大捷 에서 成功을 거두었다.

背景 [ 編輯 ]

陰曆 4月 28日 朝鮮 의 盲腸 申砬 忠州 彈琴臺 戰鬪 에서 크게 敗하자 全羅監司 李珖 4萬과 全羅道 防禦使 곽영 2萬, 忠淸道 巡察使 윤선각 1萬 5千으로 都合 8萬 病魔가 龍仁에서 集結하였다. [2] [3] [4] [5] 李珖 等이 全羅道 에서 4萬을 이끌고 全羅道 防禦使 곽영이 2萬 軍士를 거느리고 進擊한다. [6] 李珖 을 盟主로 삼은 뒤 南道勤王軍이라 稱했다. 慶尙道 金睟에겐 軍士가 數百 或은 없었다. [7] 總合 7~8萬餘 名인데 [8] [9] [10] 그들은 10萬이라 呼稱했다. [11] 이광이 처음 出發할 때 軍事수도 10萬이었다. [12] 張孃空轉鉏엔 僧兵까지 합쳐진 10萬이라 나온다. [13]

陰曆 6月 4日 에 最初의 戰鬪를 치렀는데 金睟 가 홀로 慶尙道 의 장사 50名에게 突擊 命令을 내리고 幽谷 察訪 김충민 이 敵 1名을 베고 奉仕 정기룡 江만남 과 郡守 김경로 等이 各各 하나씩 베었고 同鄕인 박태고 가 倭軍 2名을 쏘아 죽이는 等 初期에 5名의 敵을 죽여 戰果를 올렸다.

經過 [ 編輯 ]

그러나 장수들은 作戰 會議에서 意見이 달라 크게 갈라졌다. 光州 牧師 權慄 李珖 에게 詐欺를 蓄積하면서 朝廷의 命을 들어야 한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水原 독성산성 으로 먼저 가서 陣을 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李珖 은 軍律을 어기고 權慄 의 計策을 따르지 않았다. 李珖 은 先鋒將 이지시 와 全羅道 防禦使 곽영 , 防禦使 백광언 의 1000名의 軍士들과 合勢해 7月 13日 ( 陰曆 6月 5日 ) 倭軍을 攻擊했다. 權慄 이 다시 愼重하게 戰鬪를 치르라고 警告를 보냈음에도 不拘하고 백광언 은 적이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갔다가 先鋒將 이지시 , 이지시의 동생 이지례 와 함께 倭軍의 彈丸에 맞아 戰死했다.

盲腸이었던 백광언 이지시 가 죽자 士氣가 크게 떨어졌다. 다음날인 7月 14日 ( 陰曆 6月 6日 ) 軍士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할 때 倭軍이 山골짜기를 따라 奇襲하여 크게 敗해 李珖 金睟 , 곽영 은 逃亡쳤다.

結果 및 影響 [ 編輯 ]

朝鮮軍 7~8萬 名은 겨우 1600名의 倭軍에게 敗北하였다. 好性感 移住는 宣祖에게 말하기를 自身이 龍仁에 到着해서 直接 보니 三道의 勤王兵이 모인 數字가 거의 8萬이라고 말했다. 宣祖는 "8萬의 兵馬兵馬가 무슨 까닭으로 한番에 무너졌느냐"고 當時 三道聯合軍 8萬 大軍의 數字와 그 崩壞 모습을 目擊한 好性感(湖城監) 移住(李柱)에게 質問했다. 好性感(湖城監) 移住(李柱)는 神益이 여러次例 陣을 옮기며 도망치고 백광언(白光彦)·이지시(李之詩)는 節度를 그르쳤기 때문에 싸움에서 졌다고 말했다. [14]


當時 史官의 記錄인 寄齋史草에도 " 全羅道 觀察使 李珖(李洸), 慶尙道 觀察使 金睟(金?), 忠淸道 觀察使 윤선각(尹先覺) 等이 軍事 8萬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向하였는데 그 길이가 40,50里에 걸쳐 行軍하였으며 羊떼 몰듯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全羅道 觀察使 李珖(李洸), 慶尙道 觀察使 金睟(金?), 忠淸道 觀察使 윤선각(尹先覺) 等이 軍事 8萬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向하였다. 이때에 忠淸道와 慶尙道는 모두 殘敗(殘敗)를 입었으나, 唯獨 全羅道만은 物力(物力)李 穩全하여 兵士와 機械와 軍隊 物資와 짐실은 수레가 40ㆍ50里에 가득 차니, 遠近에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朝廷에서도 全羅道가 꼭 成功할 것으로 여겨 손꼽아 勝戰의 諜報가 오기를 기다렸다. 金數는 敗한 나머지 겨우 官軍 1百餘 名을 引率하고 李珖에게 所屬되었다. 이광이 거느린 軍隊는 모두 정예롭고 용맹스러운 兵士로 慶尙道 사람을 얕보았다. 그래서 金睟 以下가 업신여김을 받아, 氣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李珖은 또 어리석고 怯이 많아 兵法을 알지 못했으니, 行軍할 즈음에 軍士들을 兩(羊)을 몰아 풀 먹이는 것같이 하여 흩어져 統一性이 없었으며, 앞과 뒤를 서로 알지 못하였다. 용인현(龍仁縣)의 南쪽 10里 밖에 陣을 치니, 적은 처음에 그 軍勢가 대단함을 보고 敢히 나오지 못했다."

寄齋史草를 적은 史觀은 龍仁에 陣을 친 三道聯合 8萬 大軍의 威勢에 敵이 그 軍勢가 대단하여서 敢히 나오지못했으나 이광이 軍隊를 羊떼같이 몰고다니며 언덕 위의 敵軍의 木柵과 집으로 無酌定 突擊하다가 짙은 안개가 끼이고 敵들의 鳥銃 亂射에 倭軍 4~5千이 나아오자 8萬의 軍隊가 잠깐동안에 다 흩어져버렸다고 적고있다. 8萬 大軍이 버리고간 弓矢(弓矢)ㆍ刀創(刀槍)ㆍ兩者(糧資)ㆍ機械(器械)ㆍ衣服(衣服)ㆍ裝飾(裝飾)李 狼藉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記錄할 수 없었다. 山골짜기에 숨었던 村民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이것으로 生計를 維持하여 산 者가 매우 많았다.


8萬 大軍은 敵의 칼날들에 도륙당해 모두 逃走해 흩어진후 無數히 굶어죽어 3萬만 남았다고한다. [15]

그러나 다 그러한건 아니었으니 光州 牧師 權慄 은 麾下 部隊를 收拾하여 그 軍事로 後에 理致 戰鬪 에서 勝利했다. 潰滅된 朝鮮軍 中에선 各地로 흩어져 재합류하거나 義兵活動을 했던 것들이 史料들에 나타나 보이지만 以後로 8萬, 10만만한 規模로 朝鮮軍이 結集되지는 못하였다.

李珖 은 責任을 지고 罷職되어 拷問을 當하고 流配되었고 이 戰鬪에서 勝利한 倭將 와키자카 야스하루 는 名將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黃進 만이 自身의 部隊를 穩全히 維持한채 退却하게 되었다.

류성룡 은 이 戰鬪에 對하여 《 懲毖錄 》을 통하여 '恰似 봄놀이 같았더라'라고 힐評하였다.


勤王兵이 서로 모이는 것부터 容認戰鬪까지의 過程은 다음과 같다.

忠淸都巡察使 윤선각은 中院中原(忠州) , 서원 , 황간 3次例 戰鬪 敗戰 後 忠淸道 病兵 2萬 5千 中 1萬이 사라지자 1萬 5千을 거둔다. 淸州 移動의 고을들은 積勞에 依해 막히고 百姓들은 고을의 守令들과 함께 山골짜기로 올라가 被害있어 그쪽 軍政軍丁과 百姓들의 數字를 알수가없었다. [16]

全羅道巡察使 李珖 곽영은 本來 全羅道 男子 8萬을 거느리고 公主까지 갔다. 이 兵力은 아주 短期間에 各 고을 守令들로 하여금 急하게 모은 兵力이었다. [17] 그런데 全羅道 軍士들이 反旗를 들고 無數히 돌아가니 全羅道節度使 최원으로 하여금 討伐하게하여 全羅道를 지키도록하니 [18] [19] 全羅道巡察使 李珖은 4萬 軍士를 거느리고 [20] 全羅道防禦使 곽영은 따로 2萬의 軍士를 거느리고 出發해 李珖 곽영은 稷山에서 忠淸都巡察使 윤국형이 거느리고온 1萬 5千 大君 , 慶尙道 巡察使 김수가 이끌고온 軍事 0名 [21] 과 만난다. [22] 윤국형(윤선각)은 稷山에 13 고을 軍事 7千을 稷山에 埋伏시키고 後方을 지키다가 日本軍이 뒤로부터 奇襲을 하려하거든 뒤에서부터 치라고 命한다. 윤국형은 忠淸兵士 神益 防禦使 유옥과 함께 8千 軍士를 거느리고 6月 28日 京畿道 平澤 '眞僞振威' 들판에 到着한다. 이때 三道勤王兵의 數字는 無慮 68000이었다. 거의 7萬이었다. 李珖 윤선각 金數는 이를 대충 '6萬'이라 하고 水原에 올라가 雉鷄한다. [23] [24]

이 때 全羅道는 勤王兵이 다 떠나버린 德分에 度내가 텅텅 비어있었다. [25]

眞僞들판에 到着한 李珖 윤선각 金數는 眞僞 들판에서 作戰會議를 여는데. 이때 그들은 自身들의 軍事를 10萬이라 稱했다. 그 理由는 眞僞들판에 京畿道 避難民과 忠淸道 避難民까지 모여서 無慮 13萬의 軍勢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26] 이때 三道勤王兵에는 男子들이 새로 自願하여들어와 勤王兵의 病魔는 8萬이 되었다. 避難民들까지 合치면 13萬이었다. 李珖은 그들을 羊떼 몰듯이 몰고가다가 배고프면 食糧들을 먹였다. [27] 軍糧 運搬은 百餘里에 뻗치고 旗발은 해를 가렸다. [28] 그래서 宣祖實錄,寄齋史草에는 龍仁에 온 三道勤王兵의 數字가 8萬으로 나온다. [29] [30] [31]

그 狀態로 三道勤王兵은 眞僞벌판에서 進軍. 水原을 거쳐 龍仁 들판까지 쭉 進軍해갔다. 6月 3日 水原 독산성으로 三道勤王兵 13萬이 오니 水原의 日本軍은 엄청난 大兵力이 갑자기 오는 것을 보고 退却해 龍仁으로 朝鮮軍을 誘引한다. [32]

李珖은 陽川 北쪽 浦口를 건너서 서울의 日本軍을 앞뒤로 들이치기위해 調整에 支援 要請을 보낸다. [33]

忠淸巡察使 윤국형은 水原의 敵이 攻擊하지도않았는데. 달아나는걸보고 殊常히 여겼다. 그는 眞僞들판 말고는 京畿道와 忠淸道 사이에는 軍士를 駐屯시킬만한 곳이 하나도 없으므로 龍仁의 日本軍과 竹山의 日本軍이 朝鮮軍의 補給路를 遮斷한다면 위태롭다고 判斷했다. 그래서 한 陣을 眞僞에 남겨두려했으나 勤王軍 司令部의 反對로 이루어지지못했다. [34]

중위장 光州 牧使 權慄이 臨津江에 防禦線을 쳐야하며 그러면 軍糧길이 뚫린다면서 少數의 잔챙이들을 相對할 時間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李珖은 이를 듣지않았다. [35] 權慄은 백광언 이지시가 敵을 가벼이 여기는 교만한 狀態에 빠져있기에 自身의 軍士가 가까이 오기까지 日本軍과 交戰하지말라했으나 백광언 이지시는 權慄의 말을 금세 잊어버렸다. [36] 이때 서울의 日本軍 司令官들은 各各 銀빛 漆한 가마를 타고 盛大하게 熱病하여 軍隊의 威嚴을 보였다. 붉은 옷을 입은 婦女들이 말을 타고 雙을 지어 나오는데 날마다 그치지 않아서 엄청나게 壯大했다. 日本軍의 機動部隊가 光州(廣州)에서 와서 숨어 있다가 朝鮮軍이 양천에 이르기를 기다려 南쪽에서 襲擊하여 몰아쳐서 陽川 江물에 全部 밀어넣어 溺死시키려하고 있었다. [37] 그래서 朝鮮軍은 臨津江으로 가기도 힘들었다.

백광언,이지시는 李珖에게“우리 軍士는 비록 많다 하나 모두 여러 고을에서 모은 烏合之卒이니 兵力의 많음과 적음을 論하지 말고 모두 그 고을 守令을 將帥로 삼아 어느 고을은 선봉을 하고 어느 고을은 中軍을 시켜 한 곳에 모이지 말고 10餘 둔으로 나누어 있으면 한 津이 비록 敗하더라도 곁에 있는 진이 繼續해 들어가서 次例次例 서로 救援하게 되니 이긴다면 반드시 完全히 이길 것이고, 敗하더라도 全部가 敗하지 않을 것이오.” 라고 했으나 李珖은 無視했다. [38]

6月 5日 이광이 용인현 南쪽 10里에 나아가 陣치고 先鋒將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龍仁에 가서 偵探하고는 日本軍이 龍仁 現(縣)의 北쪽 문소산(文小山)에 陣을 치고 있음을 確認했는데. 그 氣勢가 弱해 보였다.

李珖은 백광언이 過去 自己에게 칼을 가지고 "왜 빨리 勤王안하느냐"고 脅迫해서 自身이 거기에 降伏한 記憶이 떠올라 火가 났다. 백광언이 道路를 偵探하고 돌아와서 李珖에게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해서 進擊이 쉽지않다고 告하니 軍令을 어겼다는 罪目을 들이대며 이광이 백광언을 棍杖을 甚하게 쳐서 거의 죽게 되었다. 백광언이 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敵에게 죽겠다.” 하고 傷處部位를 싸매고 일어나 이지시와 더불어 出擊한다. [39]

이광이 백광언과 이지시가 거느린 淨甁精兵 2千 [40] 으로 하여금 肉薄戰을 計劃한다. 李珖은 조방장 이지시와 先鋒 守令들을 광언에게 소속시키고 敵이 今方 可視圈에 들어왔다 하고 출격하게했다. 狂言ㆍ指示가 바로 敵의 陣터까지 달려들어 나무하고 물긷는 敵兵 10女給을 一方的으로 虐殺한다. 그러자 모든 軍士들이 敵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한 氣色이 보였다. 밤이 되어 狂言 等을 시켜 敵의 陣을 奇襲하여 울타리를 넘어 바로 들어가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찍어 머리 10餘 個를 베었다. 그렇게 卯時부터 斜視까지 문소산 日本軍에게 挑戰을 걸었으나 日本軍은 나오지않았다. 肉薄戰으로 卯時부터 斜視까지 挑戰하여도 敵이 나오지 않았다. 忠淸都巡察使 윤국형과 神益 유옥 忠淸道軍도 함께 攻擊했다.

午時가 되자 朝鮮軍은 기운이 풀렸다. 마침 짙은 안개가 꽉 차서 咫尺을 分揀하지 못하였다. 陣中에 있던 적이 모두 언덕에 올라 안개를 利用해서 銃을 쏘고 뒤에서 掩襲하고 日本軍 機動部隊가 풀 속으로 기어 들어와서 群衆에 들어와 左右에 베고 찍으니, 이지시ㆍ백광언과 고부 郡守 이윤인(李允仁)ㆍ함열 縣監 정연(鄭淵) 等이 모두 被殺되고 8萬 大軍이 사기가 빠졌다.

그렇게 2千 精銳兵이 죽고 忠淸道君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退軍하여 中途에 駐屯하니 광교산 옆이었다. 이 싸움에서 敗했다는 報告가 가기도 前에 李珖은 陣을 옮겨서 日本軍을 向해 進擊하려 하기에

忠淸都巡察使 윤국형이“交戰한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 더 앞으로 나간다면 敵과의 距離가 가장 가깝게 되므로 設令 不幸한 일이 생기더라도 軍士들이 물러가 駐屯할 곳이 없고, 광교산 近處는 地形이 險하고 平易한지도 探知해 보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갔다가는 반드시 後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을 굳게 지키고 繼續하여 軍士를 더해서 聲援하도록 하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軍士들의 마음도 後援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터이므로 이것이 上策일 것이다.”하나 李珖은 또 다시 無視했다.

新詩(申時)에 山林이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광교산 近處로 陣을 옮겼으니, 地形이 매우 좋지 못한 곳이었다. 이튿날 아침 6日 三道勤王兵 13萬이 行進해서 광교산(光敎山)에 陣을 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와키자카 야스하루 騎馬部隊가 갑자기 덤벼들었다. 먼저 온 다섯은 쇠로 만든 탈을 쓰고 白馬를 타고 白旗를 갖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突進했다. 神益이 先鋒으로 앞에 있다가 먼저 무너졌다. 연이어 日本軍 應援部隊 4, 5千이 朝鮮軍과 서로 2, 3里 距離에서 對峙하여 山골짜기를 따라 旗발들을 펼쳐 軍事의 數字가 많은 것처럼 僞裝하며 鳥銃을 한番 쐈다.

그러자 10萬 장사가 한꺼번에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 무너지는 것 같았다. 李珖 등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繼續해 달아나고 8萬 軍士가 잠깐 동안에 모두 흩어졌다. 日本 起兵 두어 名이 10里나 쫓아오다가 갔다. 李珖 等이 敎書(敎書)ㆍ人夫(印符)ㆍ基(旗)ㆍ軍紀ㆍ軍糧 等을 버려서 길이 막혔는데 敵이 모두 불태우다가 지쳐 그만뒀다. 三道勤王兵 8萬 避難民 5萬이 버리고간 弓矢(弓矢)ㆍ刀創(刀槍)ㆍ兩者(糧資)ㆍ機械(器械)ㆍ衣服(衣服)ㆍ裝飾(裝飾)李 狼藉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이루 다 記錄할 수 없었다. 山골짜기에 숨었던 村民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이것으로 生計를 維持하여 산 者가 매우 많았다.

朝鮮軍 8萬名 中 5萬名은 굶어죽고 3萬名은 無事히 살아돌아갔다. [41]

이로부터는 나라에 防禦하는 者가 없게 되어 日本軍이 威勢를 限껏 떨치면서 마치 無人之境을 달리듯 팔로(八路)를 席卷하였다. 그리고 各 頭目들을 制度(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京城에 駐屯하였는데, 釜山에서 平壤에 이르기까지 各 社(舍)마다 堡壘를 쌓아 防壁을 삼았다. 이때 日本軍의 數가 投降한 朝鮮 農民까지 합쳐 大略 25~26萬쯤 되었다. [42]

忠淸都巡察使 윤국형은 自身의 著書 '문수만錄'에 이때 일을 이렇게 回想하였다. "우리들은 白面 書生으로 病暇의 일을 알지 못하여 規模와 計劃이 몹시 拙劣해서 마침내 이런 失敗를 當했으니, 只今도 생각하면 圓筒하나 어찌하랴."


李珖은 이 敗戰으로 인해 宣祖에게 끌려가 죽을 程度로 拷問을 當해 몸이 망가졌다.


龍仁 戰鬪의 意味 [ 編輯 ]

屈辱의 蒙塵을 한 宣祖에게는 倭敵에 對한 敵愾心과 復讐心이 가득했다. 都城을 回復하고 反擊을 꾀하기 위한 手段이 바로 朝鮮 南部의 軍事 8萬 名(龍仁 戰鬪)과 北部의 軍事 1萬3千(臨津江 戰鬪)였다. 비록 都城을 倭敵들에게 빼앗기긴 했으나 北上하느라 지치고 많이 傷한 日本軍을 相對로 反擊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北軍과 南君 모두 敗하며 朝鮮 自力으로 都城을 回復하지 못하게 된다.

人口 損失 [ 編輯 ]

各州 [ 編輯 ]

  1. 宣祖實錄,寄齋史草 寄齋雜記,燃藜室記述
  2. 寄齋史草
  3. 宣祖 29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8月 26日(癸丑) 1番째記事
  4. 宣祖 140卷,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8月 28日(癸巳) 2番째記事
  5. 宣祖 27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6月 28日(丙辰) 11番째記事
  6. 選手 26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5月 1日(更新) 24番째記事 이광이 4萬의 軍事를 거느리고 進擊하다
  7. 象村集 , 選手 26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5月 1日(更新) 24番째記事 이광이 4萬의 軍事를 거느리고 進擊하다
  8. 宣祖 29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8月 26日(癸丑) 1番째記事 好性感 移住를 引見하고 高敬命의 死亡, 僧軍의 活躍 等을 묻다
  9. 寄齋史草
  10. 宣祖 140卷,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8月 28日(癸巳) 2番째記事
  11. 選手 26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5月 1日(更新) 24番째記事 이광이 4萬의 軍事를 거느리고 進擊하다
  12. 寄齋史草
  13. 國譯 張孃空轉서 2卷 資憲大夫 吏曹判書 이재의 理工行長
  14. 宣祖 29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8月 26日(癸丑) 1番째記事
  15. 宣祖 140卷,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8月 28日(癸巳) 2番째記事
  16. 宣祖 27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6月 28日(丙辰) 11番째記事
  17. 처음 李珖은 戰亂이 나던 當初에 勤王할 뜻이 없었다. 前 光州 牧師 정윤우(丁允祐)가 이광을 가 보고 勤王할 大義를 極力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徵兵令이 내려오자 이광이 비로소 蒼黃하게 軍士를 모으려 하였다. 軍事 모을 時限은 急迫하고 장마가 겹쳐서 고을 守令들이 늦게 到着하였다는 譴責을 받을까 두려워 軍士들을 急히 몰아쳐서 普通 路程의 배로 가도록 재촉하니 스스로 목을 매어 自殺하는 軍士까지 있었으나 敢히 怨望하지 못하였다. 이광이 8萬 軍士를 거느리고 公主까지 와서 -燃藜室記述
  18. 遠征에 이르니 淳昌(淳昌)ㆍ玉과(玉果)의 軍士들이 멀리 가기가 싫어서 형대원(邢大元)ㆍ調印(趙仁)을 盟主(盟主)로 推戴하여 갈재[蘆嶺]를 占據하고 叛亂을 일으켜 本郡(本郡)으로 軍士를 돌려 鄕社堂(鄕社堂)을 불태웠다. 이광이 兵士 최원을 시켜 進軍하여 討伐해서 베어 죽였다. 潭陽ㆍ南原ㆍ求禮ㆍ順天 軍士들은 途中에서 모두 흩어지고, 光州ㆍ羅州 軍士는 容顔까지 와서 亦是 흩어졌다. 樹齡(守令)들이 길에서 軍士를 召集해도 一齊히 모이지 않고 李珖 亦是 中途에서 망설이고 前進하기를 싫어하는 뜻이 있었다. 《日月錄》-燃藜室記述
  19. 이광이 8萬 軍士를 거느리고 公主까지 와서 賃金이 西島로 播遷(播遷)했다는 所聞을 듣고 群衆에 令을 내려 말하기를, “임금의 行次가 西島로 가서 나라의 存亡(存亡)을 알 길 없으니 이미 어쩔 道理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軍士를 돌려 全州로 退却하였더니 道內 사람들이 憤慨하고 不平하였다. -燃藜室記述
  20. (1萬甁兵과 보인保人보급수송병이다. 윤국형의 문수만錄에 따르면 이광의 軍事 中 '病兵'李 萬名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置重을 輸送하는 보인普及輸送病이란 것이다.)
  21. 자앙(子昻 金睟(金?))은 軍士가 없어서 다만 牙兵(牙兵)과 軍官(軍官) 百餘 名만을 거느리고-문수만록 윤국형 저
  22. 選手 26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5月 1日(更新) 24番째記事
  23. 宣祖 27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6月 28日(丙辰) 11番째記事
  24. 宣祖實錄 27卷, 宣祖 25年 6月 21日 己酉 2番째記事 1592年 名 萬曆(萬曆) 20年 三南의 監査가 水原에 陣을 치고 朝廷의 指揮를 請하다
  25. 宣祖實錄 27卷, 宣祖 25年 6月 28日 丙辰 4番째記事
  26. ○ 26日에 3度 勤王兵(勤王兵)李 眞僞(振威) 들판에 모이니 무릇 13萬이었다. 旗발은 해를 가리고 軍糧 運搬은 百餘 里에 뻗쳤다. 京畿ㆍ忠淸道 避難民들은 이 軍士를 잘못 믿고 돌아와서 모여든 사람도 더러 있었다.-연려실기술
  27. 李珖은 또 어리석고 怯이 많아 兵法을 알지 못했으니, 行軍할 즈음에 軍士들을 兩(羊)을 몰아 풀 먹이는 것같이 하여 흩어져 統一性이 없었으며, 앞과 뒤를 서로 알지 못하였다.-기재사초
  28. ○ 26日에 3度 勤王兵(勤王兵)李 眞僞(振威) 들판에 모이니 무릇 13萬이었다. 旗발은 해를 가리고 軍糧 運搬은 百餘 里에 뻗쳤다. 京畿ㆍ忠淸道 避難民들은 이 軍士를 잘못 믿고 돌아와서 모여든 사람도 더러 있었다. -燃藜室記述
  29. 宣祖 29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8月 26日(癸丑) 1番째記事
  30. 宣祖 140卷,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8月 28日(癸巳) 2番째記事
  31. -寄齋史草
  32. 水原의 적은 大軍이 갑자기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 龍仁의 敵과 합쳤다. -燃藜室記述
  33. 宣祖實錄 27卷, 宣祖 25年 6月 21日 己酉 2番째記事
  34. 문수만錄 윤국형 저
  35. 燃藜室記述
  36. 燃藜室記述
  37. 《日月錄》
  38. 寄齋雜記
  39. 燃藜室記述
  40. 燃藜室記述
  41. -宣祖 140卷,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8月 28日(癸巳) 2番째記事
  42. 象村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