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成完鍾,
1951年
8月 20日
~
2015年
4月 9日
)은
大韓民國
의
企業人
,
政治人
이다. 대아건설과
京南企業
會長을 지내고, 第19代 國會議員을 歷任한 그의 墓所는
忠淸南道
瑞山市
음암면
도당리
[5]
에 있다.
國民學校
中退 後 新聞配達과 같은 허드렛일으로 始作하여 대아건설과
京南企業
會長을 지내, 建設業界에서는 '自手成家型 事業家'로 꼽히며
鄭周永
現代그룹
創業主에 主로 比較하였다.
[8]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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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年
忠淸南道
瑞山
에서 出生하여 13歲 때 繼母의 暴力을 避하여
[9]
돈을 벌겠다며 서울로 올라간 어머니를 찾아 동생들과 上京하였다. 家政婦 일을 하던 어머니를 만난 뒤 낮에는 藥局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敎會 附設學校에서 工夫하고, 남의 집 헛間에서 잠을 자며 新聞 配達, 休紙 蒐集에 막勞動까지 하며 生計를 이어가면서도 돈을 모으기 始作했다. 以後 1970年 어머니와 함께 故鄕으로 돌아와 貨物營業所를 차려 단돈 1000원으로 事業을 始作했다.
[10]
[11]
1977年 瑞山土建에 入社하며 建設業을 始作하였고, 當時 代表인 최순기가 個人事情으로 事業을 접으며 誠實히 일하던 성완종에게 引受를 勸誘하여 200萬원에 會社를 買入하였다.
[11]
[12]
1979年 忠淸圈 序列 3位의 建設業體 대아건설(株)를 引受하였고,
[13]
1985年 1月 警 대아建設 株式會社의 代表理事로 就任하였다.
[14]
대아건설은 플랜트 産業 設備 分野에서 土木住宅까지 事業領域을 擴張하며 1993年 코스닥에 上場, 1996年에는
서울特別市
가락동 農水産物市場의 中·都賣法人‘中央廳과’와, 溫陽觀光호텔을 引受하며 事業領域을 擴張하였다.
[11]
성완종은 대아建設 會長으로 在職하며 대아건설과 子會社인 大我레저産業(週), 隊員失業(週), 대완建設(週)를 經營하여 왔다.
[14]
1991年
美國
의
非認可大學
人
퍼시픽웨스턴 大學校
에서 經營學社 學位를 取得하였으며,
[10]
1995年 大韓建設協會 副會長을 歷任했다.
[12]
2003年 옛
大宇그룹
系列社였던 京南企業 持分 51%를 確保하며 引受했고, 2004年 9月 京南企業이 대아건설을 吸收合倂하였다.
[15]
2004年 10月 警 京南企業 株式會社의 會長으로 就任하여 京南企業과 子會社를 經營하였다.
[14]
2007年 12月 31日
李明博
當選人은 성완종을 大統領職 引受委員會에서
科學비즈니스벨트
諮問委員에 임명했다.
[16]
2004年 10月 以來로
京南企業
會長으로 再任하였으나, 第19代 大韓民國 國會議員 選擧에서 瑞山市·泰安郡 地域區 國會議員으로 選出된 以後 會長職을 辭任하였다.
西山奬學財團 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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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완종은 40歲이던 1990年 4月 自身의 私財 31億 원의 寄附로 基金을 造成하여 財團法人 서산장학재단을 設立한다.
[17]
理事長에 就任해 여러次例 西山奬學對象 施賞을 해왔으며,
김대중 政府
에서 任期 마지막達人 2003年 2月 12日
國民勳章
모란장을 受賞하였다. 성완종은 2003年 2月 21日에는 大邱 地下鐵 慘事로 세 男妹를 孤兒로 남겨둔 채 목숨을 잃은 主婦의 事緣을 듣고 遺家族 3男妹에게 初等學校부터 大學卒業 때까지의 登錄金을 全額支給키로 했다.
[18]
2014年 12月 10日 서산장학재단은
京南企業
所有의 베트남 하노이 랜드마크72빌딩에서 하노이國立人文社會科學, 하노이國立백化大學과 奬學事業과 關聯한 姊妹結緣 協約을 맺었다. 서산장학재단은 베트남 敎育發展과 人材育成을 위해 交流·協力을 推進하고 每年 50名의 베트남 奬學生을 選拔해 登錄金에 該當하는 奬學金을 卒業 때까지 支援하기로 하였으며
[19]
, 12月 20日에는 623名에게 總 3億9000餘萬원을 支援하는 2014年度 奬學金 傳達式을 가졌다.
[19]
서산장학재단은 2015年 성완종 理事長의 死亡 時點까지 2萬 5000餘名에게 300億 원의 奬學金을 支給하였다.
[20]
犯罪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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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任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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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年 8月 11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特殊2部는 성완종을 背任증재로 不拘束 起訴했다. 성완종(京南企業 會長)은 김재복 행담도開發(週) 社長으로부터 “2段階 행담도 開發事業의 施工權을 줄 테니 그 代價로 돈을 빌려 달라”는 提議를 받고, “大我레저産業(週) 等 대아건설 系列社들이 120億 원을 無利子로 貸與하여 줄 테니 위 會社들에게 2段階 행담도 開發事業의 施工權을 附與하되, 政府標準품셈에 依해 算出된 設計費대로 都給工事金額을 決定해 달라”는 請託을 하여 김재복에게 承認받았다. 성완종은 2002年 11月 25日 大我레저産業(週) 名義로 30億원, 隊員失業(週) 名義로 70億원, 2003年 1月 15日 대완建設(週) 名義로 20億 원, 合計 120億원을 김재복에게 無利子로 貸與하였다.
[14]
김재복은 성완종으로부터 120億 원을 2年間 無利子로 빌려 19億 2000萬원으로 推定되는 利益을 제공받았다.
[21]
[22]
2006年 2月 6日 서울中央地方法院 第25刑事部(裁判長 이혜광)는 不拘束 起訴된 성완종에게 背任증재 罪로 懲役 6月, 執行猶豫 1年을 宣告했다.
[14]
[23]
2007年 11月 23日 抗訴審 裁判部인 서울高等法院 刑事1部(裁判長 서기석 部長判事) 亦是 原審 判決과 같이 懲役 6個月에 執行猶豫 1年을 宣告했다.
[24]
公職選擧法 違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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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완종은 2012年 4月 總選을 앞두고 서산장학재단을 通해 瑞山 및 泰安 地域住民에게 無料音樂會를 열고, 충남자율방범연합회에 靑少年 善導 支援金 名目으로 1000萬 원을 寄附한 것이 公職選擧法 違反에 該當되어 起訴되었다. 서산장학재단은 會員과 奬學金 受惠者 3萬餘 名에게 歎願書 署名을 提出받아 1審 裁判部인 大田地方法院 瑞山支院에 傳達했다.
[25]
1審에서 無罪를 宣告받았으나, 大田高等法院 抗訴審 裁判部는 서산장학재단이 그동안 忠南防犯聯合會에 支給한 金品이 없었던 點을 들어 公職選擧法에서 例外로 許容한 '定期的으로 支給한 行爲'(公職選擧法 第112條)가 아니어 有罪를 判示했다.
[26]
2014年 6月 26日 大法院 1部(主審 고영한 大法官)가 罰金 500萬 원을 宣告한 原審을 確定하여 議員職을 喪失했다.
[27]
詐欺·橫領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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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年 4月 6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特殊1部(임관혁 部長檢事)는 特定經濟犯罪加重處罰등에關한법률위반(사기, 橫領), 資本市場課金融投資業에관한법률위반으로 성완종에게 拘束令狀을 請求했다. 檢察 搜査 結果 성완종은
京南企業
會長으로 在職하던 2006年∼2013年 5月 會社 財務狀態를 속여
韓國石油公社
로부터 成功불融資金 330億원,
韓國鑛物資源公社
에서 一般融資金 130億원을 받았고,
韓國輸出入銀行
等 金融圈에서 貸出을 받았다.(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성완종은 2008∼2013年 政府 融資에 必要한 信用等級을 維持하기 위해 財務狀態가 좋은 것처럼 9千500億원臺 粉飾會計를 벌였다(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 또한 이를 통해 받은 政府融資金 一部와 會社돈을 빼돌려 200億원臺의 祕資金을 造成(特定經濟犯罪加重處罰등에關한법률위반(횡령))했다.
[28]
政治權 金品 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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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博 政府의 資源外交
와 關聯하여 非理 疑惑에 連累되어 關聯 搜査를 받던 中 法院의 拘束令狀 實質審査가 豫定된 2015年 4月 9日 午前 遺書를 쓰고 서울 청담동 自宅을 나온 直後인 午前 6時부터 50分間 경향신문과 電話 인터뷰를 하고 나서 法院에 出席하지 않고 潛跡했다가 失踪申告를 받은 警察의 搜索 끝에 北韓産 형제봉 附近 300m 地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이 發見되었다.
[5]
[29]
自殺하기 前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
金淇春
前 祕書室長에게 10萬달러,
허태열
前 祕書室長에게 7億원을 줬다"는 等의 事實을 밝히면서 돈 건넨 人士들 擧論 때마다 ‘信賴’가 깨진 서운함 드러냈다.
[30]
[31]
성완종의 屍身 收拾過程에서 上衣 주머니에 있던 이름과 金額이 적힌 金品 메모紙가 發見되었다. A4用紙 8分의 1 크기로 特定人의 이름과 金額 等 모두 55者가 적혀 있었다.
[32]
메모에는
金淇春
,
허태열
前 祕書室長 外에 ‘
劉正福
3億,
홍문종
2億,
洪準杓
1億,
釜山市長
2億’,
李丙琪
大統領祕書室長과
李完九
國務總理의 이름도 적혀 있었으며 言論은 이를 '성완종 리스트'로 부르며 報道하였다.
[33]
이中 釜山市長은 2億 提供 時點 當時의
허남식
前 釜山市長이 아닌
徐秉洙
現 釜山市場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34]
[35]
檢察은 성완종의 200億 代의 祕資金 가운데 30億 원을 現金化했던 것을 確認하고 搜査하고 있었으며
[36]
, 성완종의 知人인 한 某 牧師는 京南企業에 對한 檢察 搜査가 始作된 뒤 京南企業 所有의 溫陽觀光호텔 5層 客室에서 성완종을 만나 "事業을 하면서 丁·官界 人士 100餘 名에게 150億 원을 줬다"며 金品을 먼저 要求하여 事業과 政治를 하는 동안 돈을 줬다고 主張했다. 이에 對해 京南企業 側은 主張할 根據가 없다며 事實이 아니라고 反駁했지만, 溫陽觀光호텔 職員은 2015年 3月 15日 성완종 會長이 호텔에 다녀간 事實이 確實하다고 말했다.
[37]
이에
새누리黨
黨代表
金武星
은 4月 12日 午前에 記者會見을 열고, 聖域없는 徹底한
檢察
搜査를 要求했고,
京鄕新聞
에 성완종이 50分間 對話한 錄取錄을 公開해줄 것을 要請했다. 또한, 성완종이 死亡하기 4~5日 前에 抑鬱함을 呼訴하는 電話를 받았다고 말했다.
[38]
2015年 4月 21日, 成完鍾 리스트가 政治權 뿐만 아니라 金融圈에도 있다는 疑惑이 提起되었다. 當時 金監院長, 金監院 副院長, 輸出入銀行長, 농협銀行長 等이 모두 忠淸 出身에 忠淸포럼 會員이었고, 이들이 危機에 빠진 京南企業 워크아웃에 一定 部分 外壓을 行使한 情況이 捕捉되었다.
[39]
多受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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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民勳章 모란장
- 스리랑카 란자나(외국인 最高勳章)
- 글로벌 經營人 對象(日本能率協會)
- 자랑스런 韓國人 對象((寺)韓國言論人聯合會)
歷代 選擧 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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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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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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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學位 修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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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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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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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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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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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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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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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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