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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 密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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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密約 이란 朴正熙가 日本과 締結한 獨島에 關한 密約을 말한다. 정일권 - 高老 이치로 의 '未解決의 解決'이라는 大原則 아래 1965年 1月 11日 서울特別市 城北洞 박건석 汎洋商船 會長 自宅에서 정일권 國務總理 우노 소스케 自由民主黨 議員이 韓日頂上會談 에서 韓日基本條約 締結 過程 中 큰 問題였던 獨島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合意하였다. 私の?が何とかしようと韓?の足を引っ張っているようですが、日本の政治家として申し?ありません。 [1] [2] 獨島密約은 다음 날 朴正熙 에게 裁可를 받았으며, 이 過程에서 核心 役割을 遂行한 人物은 金鍾泌 前 總理의 親兄 當時 한일은행 專務인 김종락 인 것으로 알려졌다. [1] [3] 김종락은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 大韓民國 日本 이 獨島 問題를 앞으로 解決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다. 一旦 解決로 看做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고 밝혔으며 朴正熙 軍事政府는 獨島密約을 통해 日本으로부터 大韓民國이 韓半島의 唯一한 合法政府라는 認定과 함께 經濟開發에 必要한 資金을 確保했다고 評價했다. [1] 김종필과 獨島密約을 暴露하다가 通譯官의 失手로 失敗했다고 밝혔다. [3] 當時 獨島密約 過程에 參與한 김종락과 시마모토 겐로 前 요미우리 新聞 서울特派員은 獨島密約을 맺었다고 證言하였으나 日本 政府는 獨島密約을 否認하며 祕密裏에 領有權 關聯 密約을 맺는 것은 어떠한 境遇에도 不可能 하다고 밝혔다. [3] [4] 民族文化硏究所 가 公開한 美 中央情報局(CIA) 特別報告書에 따르면, 當時 朴正熙 政權은 軍士쿠데타를 한 1961부터 韓日協定을 締結한 65年 사이 5年間에 걸쳐 6個의 日本企業들로부터 執權與黨인 民主공화당 總豫算의 2/3에 該當하는 6600萬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日本에 쌀을 輸出하는 過程에서 金鍾泌 이 在日 韓國企業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5] [6]

新軍部 登場 以後 密約 文書를 없앴다. 김종락은 “朴正熙 大統領이 暗殺된 以後 全斗煥 氏가 政局을 主導하기 始作하면서 시끄러운 問題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獨島密約 文件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飛行機 안에서 쉬지 않고 淨書한 記錄들도 包含돼 있어 안타깝다”고 實吐했다. [3] 박건석 汎洋商船 會長의 동생인 박동선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1965年 獨島 密約이 있었던 場所가 성북동이 아닌 가회동 自宅이라고 말했다. 韓日 두 나라 政府는 獨島密約을 否認했지만 KBS 取材로 獨島密約을 뒷받침하는 日本 外務省의 內部 資料가 처음 確認되었다. [7]

獨島密約의 內容 [ 編輯 ]

앞으로 解決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一旦 解決한 것으로 看做한다. 따라서 한·日 基本條約에서는 言及하지 않는다'는 大原則 아래 4個 附屬條項으로 構成됐다. [1] [8] [9] [10]

  • 獨島 는 앞으로 大韓民國 日本 모두 自國의 領土라고 主張한다. 이에 反論하는 異議를 提起하지 않는다.
  • 將來에 漁業區域을 設定할 境遇 兩國이 獨島 를 自國 領土로 하는 線을 劃定하고, 두 線이 重複되는 部分은 共同 水域으로 한다.
  • 現在 大韓民國이 '占據'韓 現狀을 維持한다. 그러나 警備員을 增强하거나 새로운 施設의 建築이나 增築은 하지 않는다.
  • 兩國은 이 合意를 繼續 지켜 나간다.

經過 [ 編輯 ]

홍순칠 韓國戰爭 當時 李承晩 에게 獨島에 軍隊를 派遣할 것을 要請하였으나 李承晩은 拒絶하였다. 以後 1953年 4月 20日에 獨島義勇守備隊를 結成하여 日本과 싸우는 等 3年餘 동안 獨島를 지켜왔다. [11]

日本의 枯死키 젠打로 外相은 1962年 3月에 崔德新 當時 外務長官을 만나 “懸案이 解決되더라도 領土問題가 解決되지 않으면 國交正常化는 無意味한 것”이라고 脅迫도 했다. 以後 獨島問題가 繼續되자 美國은 클라크라인 을 設定해 韓國 側의 손을 들어주었고 以後 韓日基本條約 以前까지는 潛潛해졌다.

國際司法裁判所 提訴론 [ 編輯 ]

53年 4月 始作된 2次 韓日會談 漁業分科委 會議에서 日本은 平和線을 否定하기 위해 獨島가 日本 領土라고 主張한 뒤 62年 2月 고사카 젠打로(小坂善太郞) 日本 外相이 김종필 當時 中央情報部長을 만나 “獨島問題를 國際司法裁判所에 提訴하고 韓國側이 應召하길 바란다”고 壓迫했다.

이에 金鍾泌 部長은 62年 10月 오히라 마사요시 (大平正芳) 外相을 만나 “獨島問題는 會談 初부터 韓日會談과 關係 없던 것을 日本이 공연히 끄집어 낸 別個 問題이기 때문에 (國際司法裁判所에 應召)할 수 없다”며 “兩國 國交正常化 後 時間을 가지고 解決해 나가는 것이 賢明하다”고 말했다.

獨島 爆破론 [ 編輯 ]

한便 1962年 9月 3日 第6次 韓日會談 第2次 政治會談 豫備折衷 4次會議에서 이세키 이나지로 局長이 "獨島는 無價値한 섬"이라며 "크기는 히비야 公園 程度인데 爆發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問題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獨島 爆破論이 불거졌다. [12]

以後 1962年 11月에는 金鍾泌 部長이 記者들에게 "獨島에서 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爆破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라는 發言을 했다. [12]

金鍾泌/자민련 前 總裁 (87年 大選候補討論會) : (日本이)강점하려고 하면 爆破해 버리는 限이 있어도 줄 수없다. [13]

第3國 調整論 [ 編輯 ]

같은 해 11月 도쿄 에서 열린 金鍾泌 中央情報部 長과 오히라 마사요시 日本 外相의 幕後 會談에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먼저 獨島에 關한 이야기를 꺼내고 김종필이 이에 제3국의 指導아래 獨島에 關한 問題를 調節해야 한다고 對答하였다. 이 말에 오히라 外相은 생각해볼만한 安易라며 제3국으로 美國 을 指目한다. [12] 이 當時 會談의 주된 이야기 目的은 獨島 關聯 問題가 아닌 韓國 經濟成長을 위한 支援金에 對한 것이었다. 김종필은 第1次 會談에서 獨島에 關한 이야기는 끝낸 것으로 생각하고 2次 會談에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다시 獨島 이야기를 들추어 내자 現在 會談의 이야기 目的과는 관계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위와같이 말했다고 推定된다.

結果 [ 編輯 ]

大韓民國은 金永三 文民 政府때 獨島에 새 接岸施設을 建設함으로써 約束을 깬 것 外에는 거의 密約을 遵守해 왔다. [1] [12] [14] 그러나 文民 政府 때 亦是 日本이 排他的 經濟 水域 의 起點을 獨島로 하겠다는 宣言을 했을 때 김영삼은 排他的 經濟 水域의 起點을 鬱陵島 로 하는 發表를 하고 獨島를 暫定的 措置水域(中間水域)으로 삼는 等 密約을 大體로 지켜왔다. 앞의 文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韓國政府는 漁業協定을 締結하면서 獨島를 起點으로 삼는 境遇와 鬱陵島를 起點으로 삼는 境遇를 假定하여 그 結果를 比較 檢討해 보았다. 日本政府또한 獨島를 起點으로 삼는 境遇와 오키 섬 을 起點으로 삼는 境遇를 假定하여 그 結果를 따져 보았을 것이다. 兩國 모두 獨島를 起點으로 삼았을 때 自國에 유리하다는 事實을 確認하고 獨島를 起點으로 主張하였다. [15] [16] [17] [18] [19] 이와 別個로 金永三 政府때 새로운 密約을 맺었다는 疑惑도 있다. [20]

1965年 大韓民國과 日本國間의 漁業에 關한 協定 [ 編輯 ]

朴正熙는 大選 勝利를 위해 서둘러 漁業協定을 締結하였으나 公開時機를 늦추었다. [21]

1965年 6月 22日 韓日頂上會談 가 이루어지고 同時에 ' 大韓民國과 日本國間의 漁業에 關한 協定 '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內容은 다음과 같다. [14] [22]

  1. 漁業에 關한 水域으로서 12해리까지는 自國의 排他的 管轄權을 行使할 수 있다.
  2. 韓國의 管轄 水域 밖의 周邊에 共同規制水域을 設定하고, 이 水域에서는 主要 漁業의 漁船規模·漁撈期(漁撈期)·最高 出漁 漁船數·集魚燈(集魚燈)의 광도(光度)·總漁獲 基準量 等이 規制된다.
  3. 共同規制水域 外延(外延)인 東京 132˚ 西쪽으로부터 北緯 30˚ 以北에 共同資源調査水域을 設置한다.
  4. 한·日漁業共同委員會를 設置하여 漁業資源의 科學的인 調査, 規制措置의 勸告를 한다.
  5. 韓國側은 水産業協同組合中央會, 日本側은 臺日本水産會議 두 나라 民間團體로 한·일 民間漁業協議會를 設置하여 操業秩序의 維持와 事故處理에 關한 決定과 實務處理를 擔當한다.

[23]

經過 [ 編輯 ]

外務部와 中央情報部는 大韓民國 國民들의 反對에도 朴正熙의 大選日程 等을 勘案해 '12海里 專管水域' 立場으로 물러섰다. 이 期間 韓國은 日本側에 1億 1千 4百萬달러의 漁業協力金을 政府借款 形式으로 供與期間 3年, 利子 3.5%, 3年 据置後 7年間 均等償還 條件으로 要求했으며 日本은 民間借款 形式으로 7千萬달러를 固執했다. 特히 日本은 次官 等 請求權 問題의 代價로 平和線 問題를 解決하려고 했다. 우리 政府는 平和線 問題에 伸縮性을 보일 수있다고 立場을 表明했다. 또한 日本은 1963年 6月 7日 漁業協力에 따른 請求權은 5億달러 以內로 하되 12海里 專管水域의 合意 또는 平和線 撤廢와 漁船拿捕 防止를 前提條件으로 提示했다. [24] 이에 따라 같은 해 7月12日 專管水域을 12마일+α로 하기로 兩國間 意見調律이 이뤄졌다. [24]

1963年 日本側의 要求를 受容한 韓日漁業協定 의 發表를 미룬 情況도 드러났다. 政府는 그 해 7月까지만 해도 ‘12마일 專管水域 方案으로는 零細 漁民의 生活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專管水域을 確保해야 한다’는 立場을 日本에 傳達했다. [25]

하지만 以後 日本側의 12마일 專管水域 主張을 受容할 意思를 밝히고 이를 公開하지 아니하는 方案을 論議하기 始作했다. 特히 8月과 9月 最高會議, 中庭, 外務部 當局者들이 參席한 7次, 9次 韓日問題 對策會議 文書에서는 大選을 考慮한 政略的 論議도 드러났다. [25] 이들은 “(12마일로 한다는 것이) 어느 程度까지 祕密이 지켜지느냐가 問題다. 野黨側의 攻擊 資料가 돼선 안 된다”(중정 國葬), “大統領 選擧 前에는 이 안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최고회의 委員)고 말하기도 했다. [25]

以後 平和線 이 撤廢되고 獨島가 共同規制水域으로 設定되고 公害(公海)가 되었다. 性能이 좋은 日本의 漁船이 東海의 물고기를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하였다. [22] [25]

한便, 大韓民國 政府는 大韓民國이 韓半島 의 唯一한 合法政府라는 原則에 立脚해 北韓 沿岸에 對해선 言及하지 말자는 立場을 固守했다. [24]

大韓民國과 日本國間의 漁業에 關한 協定 은 1998年 1月에 日本 政府에 依해 一方的으로 破棄 通報되었으며 兩國은 以後 새로운 交涉을 통해 韓日漁業協定 을 1998年 9月에 妥結시켰다. [14]

漁業問題와 關한 韓國側 立場 [ 編輯 ]

1963年 7月 19日子 日本側 立場에 對한 回答 [ 編輯 ]

"韓國은 直線 機船法을 韓半島의 全沿岸에 採用하고자 한다. [24] 東海北部의 원산만과 雄基灣의 問題도 있기 때문이다. [24] 北韓 沿岸에 對해 日本側이 異見이 있다고 하나 韓國 國內 問題로 取扱하면 別 問題가 없다. 12海里 專管水域으로는 零細 漁民의 生活 根源을 確保할 수 없기 때문에 40海里 專管水域을 確保해야 하겠다. [24] 日本側 立場대로 韓國 近海에 出漁할 日本 漁船의 總帥 만을 規制하고 漁船 規模, 漁具, 漁獲量 및 操業 水域 等을 規制하지 않는다면 資源保護를 위한 效果的인 措置라고 할 수 없다. [24]

平和線에 關한 公報方案 建議 [ 編輯 ]

"國內 輿論은 韓日 懸案中 特히 漁業. 平和線 問題에 반드시 同調的이라 보기 어렵다. 이 機會에 公報 方案을 于先 施行해 政府 立場에 對한 國民의 理解 乃至 支持를 促進하는게 必要하다. [24] 有力 日刊紙로 하여금 特派員 을 平和線 海域 및 南海岸 農漁村에 派遣해 '平和善意 完璧한 수호는 元來가 不可能하며, 經濟的인 觀點에서 볼때 平和善意 存置가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24] 農漁村의 發展은 平和善意 수호가 前提條件이 아니고 農漁村의 近代化 市場開拓 等이 基本 前提다'와 같은 內容의 結論을 갖거나 그러한 結論으로 誘導되는 '技士'를 數 回에 걸쳐 쓰게 한다. [24] 適當한 段階에서 學者 著名人士로 하여금 平和線은 國際法上 難點이 많다는 趣旨의 內容을 發表케 한다" 라고 1963年 5月10日 外務部가 作成했다. [24]

平和善意 軍事的 意義에 對한 國防部 見解 [ 編輯 ]

國防部는 1963年 7月 12日 平和線이 파기되면 國防上 至大한 惡影響을 招來할 것이다며 憂慮를 表明했다. [24]

漁業問題와 關한 日本側 立場 [ 編輯 ]

日本은 이 立場에 對해 大體로 滿足하였다. [24]

韓日頂上會談 [ 編輯 ]

1951年 부터 1965年 6月 22日 韓日基本條約 (또는 韓日協定 )이 妥結되기까지 14年間 總 7次例에 걸쳐 大韓民國과 日本間에 一連의 協定을 했다.

5.16 軍士쿠데타 로 執權한 朴正熙가 1964年 3月 부터 本格化한 韓日頂上會談 妥結 움직임은 學生을 中心으로 한 極烈한 反對를 불러왔고 1964年 6月 에 그 反對 示威가 絶頂에 이르러 6·3 抗爭 을 招來하게 된다.

會談의 經過 [ 編輯 ]

존 F. 케네디 의 뒤를 이어 執權한 린든 존슨 行政府는 1964年 가을부터, 事實上 中斷 狀態에 빠진 韓日會談을 再開하기 위해 必死的인 努力을 기울였다. 그건 아시아의 國際 情勢 變化 때문이었다. 1964年 1月 中國 - 프랑스 의 國交樹立, 8月 4日 美國 북베트남 爆擊( 통킹 만 事件 ), 10月 16日 中國 의 核 實驗 成功 等은 美國 에게 韓日 두 나라를 묶어야 할 必要性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26] 1965年 1月 9日 朴正熙 는 內外信 記者會見에서 韓日會談을 올해 안으로 可否間 매듭 짓겠다고 宣言했다. 朴正熙의 强力한 意志에 따라 1月 18日 韓日 本會談이 續開되었다. 그 直前인 1月 7日 日本 側 首席代表 다카스기 신이치 (高杉晉一)가 外務省 記者클럽에서 日本의 植民 支配가 朝鮮 에게 유리하였다는 妄言을 하였으나 會談 妥結에 急急한 大韓民國은 이를 問題삼지 않았다. [27]

1974年 韓日大陸棚協定 [ 編輯 ]

1970年 6月에는 濟州島 南쪽 8萬km 2 를 第7鑛區로 定하고 韓國領으로 公式 宣布했다. 하지만 1972年 當時 定說이었던 自然延長설에 依하면 우리나라가 유리한 處地에 있었으나 朴正熙는 共同開發하기로 合意하였다. 1972年 日本이 “韓日間의 中間線에서 日本 쪽으로 넘어온 部分은 兩國이 50%씩 持分을 갖고 共同開發하자”고 提議한 것이다. 現在 日本은 共同開發이라는 地位를 利用해 繼續 遲延시키고 있다. 繼續 遲延시키면 2028年 大陸棚協定이 滿了하는 날 自然延長설 代身 UN의 새 海洋法 이 適用되어서 日本에 유리하게 된다. 韓國이 이 提案을 받아들여 1974年 韓日大陸棚協定이 맺어진다. 日本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濟州島와 中國 大陸에 붙어있는 7鑛區의 海底地形 때문이었다. 日本과 7光球는 깊이가 8000m에 이르는 ‘오키나와 海溝’가 갈라놓고 있다. 當時까지 支配的 理論이었던 自然延長설로 볼 때 日本이 決코 유리하지 않은 狀況이었던 것이다. [28]

獨島 密約 以後 [ 編輯 ]

軍事政權은 獨島 守護 運動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拷問하여 獨島 關聯 運動을 禁止시켰다. 全斗煥 大統領은 直接 放逸해 日本으로부터 40億弗 次官 提供을 約束받았다 [29] 1982年 11月 16日 獨島를 天然記念物 로 指定해 一般人의 出入을 禁止하고 [30]

獨島義勇守備隊將 홍순칠 中央情報部 에 끌려갔다. [31] 1974年 12月의 일이었다. 洪 大將의 未亡人 朴英熙氏는 1974年 12月 男便이 中央情報部에 끌려가 사흘 間 붙잡혀 있으면서 "'앞으로 獨島에 對해 言及하지 마라'고 강요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朴正熙의 獨島密約과 그의 二律背反的 態度의 內幕을 알지 못하는 洪 大將은 1969年, 1972年 두 次例에 걸쳐 獨島開發計劃書를 慶尙南道에 提出하나 無視當하고, 1976年 다시 提出했을 땐 豫算이 없다는 핑계일 뿐인 回信을 받는다. [32] [33] .

80年代 初, 政府는 그가 北韓 放送에서 紹介되었다는 理由로 홍순칠을 다시 拷問하였고 1986年 拷問後遺症으로 숨졌다. [34] [35] 民主化가 되면서 2005年 열린우리당 전병헌 議員 等이 特別法을 制定하여 國家有功者 로 指定해주었다. 또한 홍순칠을 비롯한 獨島義勇守備隊의 다른 有功者들은 國立墓地 에 묻힐 수도 있고 支援金도 타게 되었다. [36] [37] .

1977年 美國地名委員會가 獨島를 리앙쿠르 락스로 變更하고 主權 未指定 地域으로 設定하고 [38] [39] 1988年 美國지리원이 獨島의 表記를 리앙쿠르 락스로 變更하였으나 2006年 獨島를 韓國 領土로 表記하고 元來대로 獨島로 表記하였다. [40]

1997年 7月 當時 김영삼 政權은 排他的 經濟 水域(EEZ)의 起點을 鬱陵島로 하는 發表를 하고 [15] [17] [18] 그 해 10月 暫定共同水域안 (暫定措置水域은 獨島 中間水域)을 公式的으로 받아들여 獨島를 中間水域으로 하기로 日本과 合意하였다. [41] [16] [19] 2006年 大韓民國 政府는 獨島를 强制管轄權 排除宣言을 하였고 EEZ 起點으로 宣布하였다. 하지만 獨島가 中間水域 乃至 暫定水域에 包含되어 있다고 하여 獨島가 韓國의 領土라는 事實이 夫人되는 것은 아니다. 獨島와 그 周邊 12海里는 韓國의 領海로서 韓國이 領有權을 行使하고 있다. 團地 獨島가 發揚하는 排他的 經濟水域이 未定狀態로 留保되어 있을 뿐이다. [42] [43] 오늘날 獨島領有權 毁損이라고 해서 論難이 되고 있는 ‘共同水域’은 이렇게 誕生했다. 1965年 韓日漁業協定에서도 軍事政府에서 中間水域 地位에 該當하는 共同規制水域으로 設定했고 신 한·日 漁業協定은 DJ政權에서 最終 妥結됐지만 問題의 條項을 受容한 것은 YS政權이었다. 金大中 政權에서는 大和堆 漁場 等 獨島 領有權과 相關이 없는 地域에 關해 協商했다. [44]

評價 [ 編輯 ]

한호석 재미 統一學硏究所 所長은 獨島問題를 解決하기 위해서는 密約 破棄가 唯一한 解決策이라고 評價하였다. [4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42年 前 한·日 `獨島密約` 實體는 …
  2. "유인촌 長官은 왜 日本의 '獨島 팸플릿'에 沈默하나?" - 프레시안
  3. [現代史 發掘 大特種] 韓日協定 5個月前 ‘獨島密約’있었다 월간중앙 2007年 4月號
  4. 뉴스채널 :: 每日經濟 TV :: mbn ::
  5.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5374 徵用者 목숨값 擔保 政治資金 챙겨 屈辱的 會談 幕後엔 滿洲人脈 布陣 [實錄 '軍人 朴正熙'-親日과 左翼의 記錄 7(끝)] 1965年 韓日協定 出處 : 徵用者 목숨값 擔保 政治資金 챙겨 屈辱的 會談 幕後엔 滿洲人脈 布陣 - 오마이뉴스 ]
  6. "韓日協定 뒷去來 朴 政權은 賣國政權 5年間 日本企業에 6600萬弗 제공받아"
  7. "시사기획 窓 - 獨島 密約說을 追跡하다"(2015년 4月 21日)
  8. ‘獨島問題’, 密約破棄가 唯一한 解決策이다
  9. 統一新聞
  10. “韓國日報 : 한·日 '獨島密約' 實體 밝혀져” . 2007年 3月 2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8日에 確認함 .  
  11. 마이데일리 記事
  12. " 獨島는 無價値한 섬" 韓日會談서 爆破 提案” . 2012年 5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5月 16日에 確認함 .  
  13.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36801
  14. “김영구, 「韓日 漁業協定, 그 致命的인 失手」” . 2007年 8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23日에 確認함 .  
  15.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16. 憲法裁判所의 韓日漁業協定 合憲判決 反駁 - 오마이뉴스
  17. C뉴스041-忠南地域 인터넷新聞(牙山市, 天安市, 禮山郡, 洪城郡, 唐津郡...)
  18.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19. <데스크 視角>賢明한 憤怒 表出法 :: 네이버 뉴스
  20. 한나라黨 "獨島關聯 密約있다면 밝혀야"
  21. “(韓日外交文書)朴正熙, 大選 勝利위해 漁業協商 讓步” . 2011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21日에 確認함 .  
  22. 獨島本部 `1965年 大韓民國과 日本國間의 漁業에 關한 協定`對한 說明
  23. “國家記錄院 나라記錄포털 > 國政分野別檢索 > 農林海洋水産 > 排他的 經濟水域 > 1965年 한·日 漁業協定”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16日에 確認함 .  
  24. <韓日會談文書 拔萃>-漁業問題ㆍ平和線
  25. " 獨島 爆破하자" 發言, 日本이 먼저 꺼내” . 2006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23日에 確認함 .  
  26. 존 F.케네디의~: 康俊晩,《韓國現代史散策》(1960年便 3卷) (2004年, 人物과사상사) 19쪽.
  27. 1965年 1月 9日~: 康俊晩,《韓國現代史散策》(1960年便 3卷) (2004年, 人物과사상사) 24쪽.
  28. [우리땅 우리魂 領土紛爭 現場을 가다]<21>대륙붕을 지켜라 :: 네이버 뉴스
  29. 길을찾아서 軍部 政權 파고든 세지마의 돈뭉치 / 정경모]
  30. 文化財檢索 | 文化財廳
  31. 韓國日報 : "獨島 死守했는데 빈껍데기 禮遇"
  32. 獨島義勇守備隊將 未亡人 朴英熙氏
  33. 朴正熙 政權은 왜 獨島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34. 實話小說 "아, 獨島 守備隊" 出刊
  35. 이민용 監督의 擁護, 金芙宣의 눈물
  36. 전병헌, 獨島義勇守備隊 特別法 推進 노컷뉴스 | 入力 2005.03.16 10:39
  37. 獨島를 지키는 것이 3·1 精神입니다" 오마이뉴스 | 入力 2006.03.01 00:08
  38. '리앙쿠르 癌'에 滿足해야 하는 現實
  39. 美國 地名위, ‘獨島 韓國領’→‘主權 未指定 地域’ 變更
  40.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41. <데스크 視角> 賢明한 憤怒 表出法 文化日報 2005年 3月 22日子
  42. [서울新聞] [深層 인터뷰]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소 裁判官
  43.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44. <데스크 視角> 賢明한 憤怒 表出法
  45. 獨島問題’, 密約破棄가 唯一한 解決策이다

參考 資料 [ 編輯 ]

「日帝被害者?103万人は適?に算出」 朝鮮日報 2005/01/21 ?? " `103萬名' 數字, 資料없어 주먹九九式 算出" 朝鮮日報 (朝鮮日報) 2005.01.21 (朝鮮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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