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徵用者 목숨값 擔保 政治資金 챙겨<br>굴욕적 會談 幕後엔 滿洲人脈 布陣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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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年 '韓日協定'에 署名하는 朴正熙 大統領. 왼쪽부터 정일권 總理, 朴 大統領, 이동원 外務長官, 김동조 駐日大使.

來年은 韓日關係詞에서 한 劃을 긋는 해가 될 것이다. 日帝가 大韓帝國의 外交權을 强壓的으로 剝奪한, 이른바 '乙巳條約'李 强制 締結된 지 100年이 된다. 또 1945年 日帝로부터 解放된지 60年, 그리고 1965年 그들과 國交正常化 條約(韓日協定)을 맺은 지 40年이 되는 해다.

政府 韓日協定 文書 公開 '注目'

過去事 眞相糾明 問題를 놓고 政治權이 論難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政府가 韓日協定 締結 當時 日本에 對한 請求權과 經濟協力 等을 規定한 協定 文書 5件의 公開를 檢討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注目되고 있다.

서울行政法院이 지난 2月 日帝時代 强制動員 被害者와 遺族들이 外交部를 相對로 낸 訴訟에 對해 “韓日協定 文書 57件 中 5個의 文件을 公開하라”며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내린 바 있다.

政府가 公開를 檢討中인 文書 가운데는 韓國側 協商 當時 韓國側에서 日本 政府와 企業들을 相對로 損害賠償을 請求하지 못하도록 한 發言錄 等이 包含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日本 政府는 그동안 韓國人 强制動員 被害者와 遺族들이 損害賠償을 要求할 때마다 65年 맺은 韓日協定에 따라 個人請求權은 消滅됐다고 主張해왔다. 따라서 이들이 韓日協定 無效訴訟을 내거나 韓國政府를 相對로 損害賠償 訴訟을 낼 境遇 적잖은 論難이 豫想된다.

特히 日本 政府가 北-日 修交協商에 支障을 줄 수 있다며 非公開를 要請한 文書도 一部 包含된 것으로 알려져 이 文書가 公開될 境遇 韓日間에 外交的 波長도 豫想된다.
지난 12日 民族問題硏究所(所長 임헌영)는 1965年 韓日協定 締結過程의 뒷去來와 關聯된 一連의 文件을 發掘, 言論에 公開했다. 이 文件들 가운데서 가장 注目을 끈 것은 '韓日關係의 未來' 라는 題目의 1966年 3月 18日子 美 中央情報局(CIA) 特別報告書였다.

이 報告書에 따르면, 當時 朴正熙 政權은 軍士쿠데타를 한 1961부터 韓日協定을 締結한 65年 사이 5年間에 걸쳐 6個의 日本企業들로부터 執權與黨인 民主공화당 總豫算의 2/3에 該當하는 6600萬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當時 韓國政府는 日本을 相對로 朝鮮人 徵用, 徵兵, 慰安婦, 學徒兵 等 日帝下 强制動員 被害者들의 補償名目으로 請求權 資金 協商을 벌이고 있었다. 日本 企業들이 공화당에 政治資金을 提供한 것은 이 渦中에 發生한 것으로, 結局 朴 政權은 앞에선 請求權資金 協商을 하면서 뒤로는 이를 빌미로 祕密 政治資金을 받아 챙긴 셈이다.

공화당은 이밖에도 1967年 第6代 大統領選擧를 앞두고 在日 韓國企業을 相對로 巨額의 政治資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報告書는 "알려진 바에 依하면 政府放出美 6萬톤을 日本에 輸出하는 過程에 介入한 8個의 韓國 會社가 民主공화당에 11萬5000달러를 支拂했다"고 적었다. 이들이 돈을 건넨 窓口는 當時 權力 第2人者 김종필 前 中央情報部長이었다.

韓日協定 締結過程의 검은 '뒷去來'

韓日 國交正常化를 위한 韓日會談의 큰 議題 가운데 하나는 35年間 日帝의 强壓支配에 對한 대일 請求權 問題였다. 이에 對해 李承晩, 張勉 政權에서는 이렇다할 進展을 보지 못하다가 1961年 5.16 軍士쿠데타로 執權한 朴正熙 政權에 와서 急進展을 보았다.

여기엔 朴正熙의 日帝下 經驗(大邱師範學校, 滿洲 軍官學校, 日本 陸士 等)과 日本側 '滿洲 人脈'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幕後에서 韓日會談 成事를 도왔으며, 또 朴政權 下에서 韓日間 蜜月外交의 連結고리 노릇을 하였다.

▲ 朴正熙가 滿洲 神經軍官學校 再校時節 校長으로 있던 나丘某 中將(當時 階級)
ⓒ 同德臺
軍士쿠데타 6個月 뒤인 1961年 11月. 朴正熙 當時 最高會議 議長은 첫 外國訪問地로 日本을 찾았다. 朴 議長 一行이 日本에 到着한 11月 11日 저녁 도쿄 市內 日本 首相官邸에서는 그를 歡迎하는 晩餐會가 열렸다. 兩國 頂上과 參謀들이 마주 앉아 있는 긴 테이블 끝에 한 老人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朴 議長이 招請한 '特別손님'이었다.

公式 祝杯가 끝 난 後 朴 議長은 술甁을 들고 테이블 끝머리에 앉은 이 老人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國家元首의 體面도 차리지 않고 이 老人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술을 한 盞 올렸다. 그리고는 流暢한 日本語로 "校長 先生님, 健康하십니까?"라고 人事를 건넸다. 이 老人은 朴正熙가 2期生으로 卒業한 滿洲 神經軍官學校에서 校長을 지낸 나丘某(南雲親一郞)였다.

이날 晩餐場 主賓이었던 이케다(池田) 受賞은 "謝恩(師恩)의 美德을 안다는 것은 우리 東洋의 美德으로, 朴正熙 先生에게 敬意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朴 議長에게 極度의 讚辭를 바쳤다. 朴 議長의 이같은 態度는 信義를 重視하는 사무라이 後孫을 自處하는 日本側 人士들로부터 커다란 好意를 이끌어 냈다.

朴正熙 "명치維新의 知事를 본받아..."

朴 議長의 이같은 '낮춤 姿勢'는 다음날 있은 日本 執權 자민당 幹部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도쿄 市內 中心街 아카사카의 한 料亭에서 열린 日本 政界의 幕後 實勢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日本式 禮法을 갖췄다. 그리고는 統治哲學을 묻는 한 日本側 人事의 質問에 對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무 經驗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荒廢한 祖國을 建設하려는 意欲만 旺盛합니다. 마치 日本 메이지(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젊은 支社들과 같은 意欲과 使命感을 가지고 그 분들을 본받아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 富强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突然 '명치維新의 知事'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參加한 日本側 人士들도 唐慌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執權 期間 中 日本을 배우거나 따라잡자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 朴正熙는 靑瓦臺 時節 日本 軍歌를 부르는 等 자주 '日本 鄕愁'에 빠졌었다고 한다. 寫眞은 朴正熙가 60年 後半 靑瓦臺에서 말을 타는 모습.
ⓒ 김종신氏 提供

特히 그는 靑瓦臺 時節 日本式 服裝으로 말타기를 즐겼으며, 술자리에선 日本 軍歌와 '敎育勅語'를 줄줄 朗讀해 周圍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日本式 敎育의 結果로 '日本 鄕愁'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時期 朴正熙는 앞선 日本을 배우려면 韓日 國交正常化가 切實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2年 10月 20日 美國 訪問 길에 오르는 朴正熙 議長은 하루 前인 19日子로 이케다 日本 首相 앞으로 親書 한 桶을 썼다. 親書 傳達者는 김종필 當時 中央情報部長이었다.

"... 本人은 極東의 安寧平和와 自由陣營의 團結이라는 見地에서 韓日 兩國의 國交正常化가 早速히 이룩돼야 한다는 要望이 增大해 감에 따라 兩國間의 第 懸案問題 解決을 위한 好轉된 기운이 마련되고 있음을 보고 이를 欽快(欽快)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本人으로서는 이와 같이 이룩된 좋은 雰圍氣를 現在 進行中인 國交正常化 會談을 相互 滿足할 수 있는 妥結로 이끌도록 하는데 最大限으로 利用하는 것이 우리들의 義務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表現은 두루뭉수리한 것이었지만 核心은 韓日會談을 早期에 타결짓자는 것이었다. 朴 議長은 金鍾泌 部長에게 親書를 쥐어보내면서 이番엔 請求權 問題를 妥結지으라고 特命을 내렸다. 金 部長을 만난 이케다 受賞은 11月 4日 유럽巡訪에 앞서 11月 3日子로 朴 議長 앞으로 보낸 答信에서 "早速한 妥結을 期待한다"고 和答했다.

日本 政界의 幕後巨物 懊惱 반보쿠

日本 政界의 幕後人物 韓日會談을 幕後에서 성공시킨 懊惱 반보쿠 日本 자민당 副總裁. 寫眞은 懊惱가 1962年 12月 大規模 訪韓團을 이끌고 訪韓했을 때 朴正熙 議長을 만나는 場面. 왼쪽부터 朴議長, 최영택 週日代表部 參事官, 오노 副總裁.
이처럼 好轉된 雰圍氣 속에서 이 해 11月 12日 김종필은 오히라 日本 外相을 만나 請求權 問題를 마무리 지었다. '無償 3億弗, 有償 2億弗, 民間次官 1億弗+α'를 骨子로 한 '金-오히라 메모'가 바로 그것이다.(이동원 前 外務長官에 따르면, 當時 日本의 外換保有高는 12抑佛이었다고 函) 金-오히라 會談을 幕後에서 도운 사람은 日本 政界의 巨物 懊惱 반보쿠(大野伴睦) 日本 자민당 副總裁였다.

第5代 大統領選擧에서 當選된 直後인 1963年 11月 5日 朴正熙 議長(當時는 大統領 當選者 身分)은 오노 앞으로 使臣(私信) 하나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使臣에서 "韓日 兩國 國交交涉에 關해 陰陽으로 配慮해 주신 데 對해 敬意를 표한다... 다가오는 貴國의 總選擧에서 勝利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勿論 이 使臣에는 한 韓國人 企業家에게 도움을 달라는 個人的인 付託도 있다.

▲ 朴 大統領은 오노 副總裁에게 '시사(侍史)'라는 用語를 써가며 깍듯이 禮遇를 갖췄다. 寫眞은 朴正熙가 最高會議 議長 전용지에 1963年 11月 5日子로 懊惱에게 보낸 使臣의 마지막 腸.
그러나 當時 韓國側 最高權力者인 朴正熙 議長이 日本 執權黨 副總裁인 懊惱에게 使臣 末尾에서 自身을 낮춰 '시사(侍史)'라고 指稱한 걸로 봐 그에 對해 最高의 禮遇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달 뒤 朴 大統領 就任式에 祝賀使節로 訪韓했다가 歸國길에 "아들의 成功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고 發言해 物議를 빚었다.

公式 外交채널이 아닌 幕後人事를 통한 祕密協商은 副作用을 낳기 마련이다. 金-오히라 間에 對日 請求權 問題가 屈辱的으로 마무리 된 事實이 國內에 알려지면서 朴 政權은 거센 抵抗에 直面하게 됐다. 이른바 '6.3事態'로 불리는 1964年 中盤期 學生들의 韓日協定 反對鬪爭이 그것이다.

이 해 4.19를 始作으로 反對示威가 本格化 된 後 6月 3日 示威隊가 及其也 靑瓦臺 入口까지 몰려가 마치 4年前의 '4.19'를 연상시켰다. 朴 政權은 及其也 非常戒嚴令을 宣布하여 反對示威 鎭壓에 나섰다.

그러나 事態가 惡化되자 朴 政權은 이를 收拾할 犧牲羊이 必要했고, 結局 請求權 協商의 主役인 김종필 當時 공화당 議長이 辭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좀처럼 事態가 收拾되지는 않자 政府는 日本側의 謝罪 使節을 物色하기에 이르렀다.

日本側 外交라인은 '滿洲 人脈'

1965年 2月 17日 解放 後 처음으로 日本側 閣僚가 韓國을 찾았다. 그는 詩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日本 외상이었다. 그의 카운터 파트는 當時 38歲의 이동원 外務長官. 李 長官은 이番엔 韓國에서 會談을 열면서 日本側의 公式 謝罪를 받아낼 料量이었다. 李 長官은 이같은 破格的인 戰略을 朴 大統領에게 報告한 後 裁可를 얻어 進行한 것이었다.

會談 當日 朴 大統領은 鎭海 別莊으로 내려가면서 李 長官에게 "政權도 會談도 무너져선 안되오, 알아서 잘 하시오!"라는 當付의 말을 남겼다. 이날 저녁 시이나를 위해 삼청동 청운각에서 열린 晩餐場에는 各 軍 參謀總長級 將星들도 大擧 參席했었다. 이는 詩이나 外傷에 對한 '無言의 壓力'이었던 셈이다. 多幸히 그는 韓國側의 期待에 副應해 줬다. 그는 "兩國 間 오랜 歷史 中 不幸한 時間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써 깊이 反省한다"고 말했다.

시이나 外相의 訪韓과 公式 謝罪는 그저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訪韓을 爲해 日本側 外交라인을 說得한 結果였다. 當時 日本側 外交라인은 知韓派 巨物인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前 首相의 人脈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滿洲人脈'으로 連結돼 있었다. 시이나 外相은 기시가 滿洲國 産業部 次長 時節 그 밑에서 部下로 일했다. 또 當時 首相인 사토(佐藤榮作)는 기시의 親同生이었다.

韓日協定 締結로 公式 國交를 樹立한 朴 政權은 以後 韓日間 蜜月時代를 謳歌하게 된다. 여기에는 韓日協定 締結을 幕後에서 도운 日本 政界의 知韓派 右翼人士들과 朴正熙처럼 日帝下 經驗을 가진 韓國側 人士들이 카운터 파트가 돼 다리 役割을 했다. 日本 도쿄 高等事犯을 나와 滿洲國 官吏를 지낸 최규하 前 大統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14年間 總 7次 會談 開催...學生 等 反對鬪爭 展開
'屈辱的' 韓日會談 締結 經緯

▲ 6.3事態 當時 거리로 나와 韓日協定 調印 反對를 외치는 市民과 大學生들.
日帝 植民統治가 끝나고 이 땅에 政府가 樹立된 以後 어떠한 形態로든 日本에 對해 適切한 關係定立이 必要했다. 李承晩 政府는 1951年 10月 20日 첫 豫備會談을 始作으로 關係設定에 나섰다. 이로부터 始作된 韓日會談은 1965年 6月 22日 韓日協定이 調印될 때까지 總 7次例의 本會議를 거쳤고, 無慮 14年이 걸렸다. 그 사이 政權도 두 番 바뀌었다.

韓日會談은 中途에 여러 次例 고비를 겪었다. 1953年 4月 15日 開催된 2次 會談에서는 平和線 問題, 在日僑胞 强制退去 問題 等을 놓고 論難 끝에 會談이 決裂됐으며, 이어 10月 6日부터 再開된 3次 會談에서는 日本側 首席代表 구보타(久保田貫一郞)의 '妄言'으로 또다시 會談이 決裂됐다.

4次 會談은 1957年 豫備會談을 거쳐 1958年 4月 15日 始作되었는데, 在日僑胞 北送問題로 難航을 거듭하다가 1960年 4·19革命에 依한 李承晩 政權의 崩壞로 다시 中斷됐다. 그後 張勉 政權이 韓日會談 再開를 推進, 그 해 10月 25日 第5次 會談이 열렸으나, 1961年 5·16軍士쿠데타로 다시 中斷되는 曲折을 겪었다.

1961年 10月 20日 再開된 第6次 會談은 軍事政權의 剛한 意欲으로 急速히 進展돼 이듬해 11月 12日 김종필 當時 中央情報部長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日本 外相과 會談, 對日 請求權問題와 平和線, 法的 地位問題가 妥協點에 到達했다.

그러나 對日請求權 協商 等을 놓고 野黨과 學生들이 屈辱的 協商이라며 韓日會談 反對運動을 거세게 펼쳤다. 그러나 1965年 2月 20日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日本 外相이 訪韓, 基本條約에 假調印하면서 完全妥結을 보았고, 그 해 6月 22日 調印式을 거쳐 12月 18日 批准書를 日本과 交換함으로써 韓日協定은 大單元의 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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