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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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王儉
檀君王儉
고조선의 招待 君主
在位 BC 2333年 ? ~ BC 425年 ?(神話上)
前任 (新設)
後任 부루
崇拜 大倧敎 , 巫俗信仰
民族 韓民族
父母 桓雄 (父親)
熊女 (母親)
配偶者 하백 의 딸
子女 부루

檀君 (檀君, 壇君) 또는 檀君王儉 (檀君王儉)은 韓民族 의 神話的인 時調이자 古朝鮮 의 創建者로 傳해지는 傳說的인 人物이다. [1] [2]

韓民族 의 歷史에서 始祖로 推仰받았으며 大倧敎 等의 宗敎에서는 信仰의 對象이기도 하다. [3] 檀君은 職責으로 보이며 王儉, 王險(王儉) 等으로도 알려져 있다. 韓國 의 歷史서 中에 하나인 《 三國遺事 》, 《 帝王韻紀 》, 《 世宗實錄 》, 《 東國通鑑 외기》 等에서 韓民族 의 始祖로 傳해지고 있으며, [1] [2] 오늘날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도 그를 韓民族 의 祖上으로 認定하며 歷史書에도 登場하고 있다. 그와 別個로 오늘날 檀君의 實存 與否에 對해 여러 論爭이 있는데, 酒類 學界에서는 檀君을 神話上의 人物로 看做하거나 古朝鮮의 統治者를 일컫는 歷史的 稱號로 보고 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其他 非主流 學界에서는 檀君이 歷史的으로 實存했던 人物로 보고 있다.

生涯 [ 編輯 ]

桓雄 熊女 의 맏이이자 長男으로 태어났다. 檀君의 生涯에 對한 記錄은 《 三國遺事 》, 《 帝王韻紀 》, 《 世宗實錄 》, 《 東國通鑑 외기》 等에 簡略하게 記錄되어 있다. 一般的으로 紀元前 2333年 經에 [4] [5] 阿斯達(阿斯達) 또는 平壤 에 都邑을 두고 朝鮮 을 建國하여 1000餘 年 동안 다스렸다고 傳해지며, 檀君의 뒤를 이어 記者 가 朝鮮을 다스렸다고 한다. 檀君은 古朝鮮의 王位에서 물러난 以後 阿斯達의 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1000餘 年 동안 古朝鮮을 다스렸다고 하는 記錄은 現實性이 없기 때문에 朝鮮時代부터 이미 檀君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古朝鮮의 累代에 걸친 國王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解釋하였다. [6]

《高麗史》와 《世宗實錄 地理誌》, 《應製施主》,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三郞城 (三朗城)을 쌓고 太子 부루(夫婁)를 派遣해 하나라 于임금 의 倒産會盟(塗山會盟)에 參席시켰다고 한다.

文獻 記錄 [ 編輯 ]

檀君에 對한 記錄이 있는 文獻으로는 高麗 때의 記錄인 《 三國遺事 》와 《 帝王韻紀 》가 있다. 그 以前 記錄에는 檀君에 對한 言及이 보이지 않는다. 《 三國史記 》에서는 檀君이란 글字는 없지만 “선인 王儉”이란 글字가 보인다.

檀君의 出生과 生涯에 對해 《 三國遺事 》는 桓雄 熊女 와 結婚하여 낳은 아들이 檀君 王儉이라고 記錄한다. 그는 平壤城 에 都邑을 定하고 朝鮮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都邑을 白岳山 阿斯達 로 옮겼다. 그는 여기서 1千5百 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紀元前 1122年(週 武王 13年, 己卯年)에 武王 記者 (箕子)를 朝鮮에 鳳(封)하니, 檀君은 이에 장당경 (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後에 돌아와 阿斯達에 숨어서 山神(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歲였다. [7] 한便, 《 帝王韻紀 》는 若干 다른 記錄을 傳하고 있다. 《帝王韻紀》는 《本紀(本記)》를 引用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桓雄 의 孫女와 神壇樹(神檀樹)의 神이 結婚하여 檀君을 낳았다고 한다. 檀君은 古朝鮮 을 建國하고 1028年 또는 1038年 또는 1048年 [8] 동안 다스리다가 阿斯達의 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帝王韻紀》의 檀君은 ‘박달나무 段(檀)’으로 表記되어 있다.

한便, 王儉(王儉)이란 글字가 最初로 登場하는 記錄은 《 三國史記 》의 高句麗 동천왕 21年( 247年 )조이다. 東川王이 平壤 으로 遷都하였을 때의 記錄에 歲酒로 ‘ 平壤 은 本來 線인(仙人) 王儉이 살던 곳(原文,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登場한다. 人命(人名)으로 王儉이 登場하는 것은 이 記錄이 最初이다. 人名이 아닌 境遇 위만 이 都邑하였던 古朝鮮의 首都에 王儉 또는 王險(王險)李 나타나기도 한다. 《 三國史記 》에는 先人 王儉에 對한 記錄과 함께 線인 王儉이 王이 되어 都邑한 곳이 王險이라 記錄하고 있기도 하다. [9]

그 外에 《 閨怨士禍 》, 《 短期告祀 》, 《 환단고기 》 等 近代에 이르러 登場한 檀君에 對한 詳細한 記錄이 있으나, 이들 記錄은 學界에서 緯書로 判斷하여 認定되지 않고 있다. 一部 在野史學者들만이 이러한 記錄이 魏書가 아닌 眞實이라 主張하고 있다. [10] [11] [12]

檀君에 對한 認識 [ 編輯 ]

檀君은 高麗 말, 大夢抗爭 時期에 注目받기 始作하여 朝鮮 時代부터 本格的으로 國調(國祖)로 推仰되었다. 世宗 때에는 平壤에 檀君과 東明王을 모신 祠堂을 지어 國家的으로 祭祀를 올렸으며 桓因 , 桓雄 , 檀君의 神主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三聖祠가 黃海道 문화현 九月山 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舊韓末 에는 外勢의 角逐에 對抗하는 韓民族 의 求心點으로 大幅 强調되어 檀君敎 (檀君敎)와 같은 宗敎로까지 發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民族主義의 求心點으로 浮刻된 檀君은 日帝强占期 동안 獨立運動의 精神的 土臺로 큰 役割을 하였다. 또한 代宗敎 및 獨立運動 勢力에 依해 檀君 時代의 歷史를 民族主義的 觀點에서 부풀린 《 代動詞江 》, 《閨怨士禍》 等의 魏書 들이 編纂되기도 했다. 한便으로는 日帝 或은 親日派들이 檀君을 宗敎的·學問的으로 利用하여 民心을 撫摩하려 하거나 日선同調론 等의 皇國臣民化 政策에 惡用하기도 하였다. [13]

光復 以後 南韓 의 檀君에 對한 硏究는 古朝鮮 社會에서 가지는 歷史的 意味에 重點을 두었다. 檀君王儉은 古朝鮮 社會의 濟州이자 君長으로, 檀君 大祭司長 的인 性格을 많이 담고 있으며 王儉 은 國家를 統治하는 大君主의 意味를 띠고 있다고 解釋한다. [14] 卽 祭政一致의 指導者이다. [15] 方言의 分布와 比較言語學的으로 살펴볼 때에도 祭司長과 政治的 指導者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把握하고 있다. [16] 최남선 무당 이 ‘단골’로 불리는 것을 注目하여 檀君을 祭司長의 意味로 解釋하였으며, 單(檀)을 祭터(壇)의 다른 表現이라 하여 檀君을 ‘壇君(檀君)’으로 表記할 것을 主張하기도 하였다. 崔南善의 指摘에 對해 巫女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것은 巫女가 서낭堂 이 있는 고을에 산다고 하여 ‘당골네’로 부르는 것일 뿐, 檀君과는 關聯이 없다는 指摘이 있다. [17]

北韓 에서는 光復 以後 檀君 및 檀君神話를 古朝鮮 에서 政治權力이 成立하는 過程을 正當化하기 위해 꾸며진 建國神話로 보는 것이 旣存의 立場이었다. [18] 그러나 1994年 檀君陵 을 發掘할 무렵부터 立場을 바꾸어 檀君 神話는 歷史的 事實을 反映하고 있고 檀君이 實存人物이라고 主張하였다. 또한 檀君은 韓民族 이 세운 國家인 古朝鮮의 最初의 王으로서 出生·建國·무덤이 모두 平壤 에 있다고 主張한다. [19] 평양시 近處에는 北韓이 發掘하여 再建한 檀君陵 이 있으나, 그 事實 與否에 對해서 南韓 學界는 批判的인 立場이다. 特히 1990年代 以後 갑작스러운 立場 變化에 對하여 南韓의 歷史學界는 主體思想 이 北韓의 歷史觀으로 强調되게 된 政治的 要因에 依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

世間의 認識 [ 編輯 ]

1980年代 以後 《환단고기》와 같은 魏書가 流行하면서 世間에는 檀君의 歷代 王系譜가 퍼지기도 하였다. 한便 2007年 靑銅器 時代 의 連帶를 旣存보다 더 오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는 考古學 發掘 結果에 발맞추어 國史敎科書의 古朝鮮 關聯 部分의 敍述에서 古朝鮮의 編年을 조금 더 確定的으로 敍述하는 形態로 指針이 變更되었다. 그러나 言論에서는 이를 “檀君·古朝鮮을 神話에서 歷史로 修正”한다는 刺戟的인 報道를 하여 世間의 誤解를 불러일으켰다. 歷史學界와 國史編纂委員會는 이러한 言論의 報道가 事實이 아니라는 憂慮를 表明하기도 하였다. [21]

宗敎 속의 檀君 [ 編輯 ]

檀君은 朝鮮時代 부터 桓因 , 桓雄 과 함께 國調로 民間에서 崇尙되었으며 國家的으로도 祠堂 을 지어 祭祀하였다. 特히 黃海道 地域에서 檀君 關聯 信仰이 活潑하게 展開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舊韓末 外勢의 侵奪이 激化되면서 檀君에 對한 崇尙은 漸次 强化되어 桓因, 桓雄, 檀君을 信仰의 對象으로 삼는 大倧敎로 發展하기도 하였다. 그 外에도 檀君을 信仰하는 여러 少數 宗敎가 나타나기도 한다.

巫俗 [ 編輯 ]

巫俗 에서는 檀君을 獄黃泉존 , 三神帝釋 等의 天神과 함께 모신다.

飼料 속의 檀君 [ 編輯 ]

魏書 [ 編輯 ]

《三國遺事》에서 引用된 《魏書》(魏書)에는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開國한 國家로 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實際 《魏書》(魏書)에는 關聯 記錄이 없다 [22] [23] .

고기 [ 編輯 ]

《고기(古記)》는 現在 傳해지지 않으며, 《三國遺事》에서 引用되었다. 당고 卽位 50年에 檀君이 平壤城을 首都로 삼고 古朝鮮을 세운 뒤 阿斯達로 都邑을 옮기고 1500年間 다스렸다.

檀君고기 [ 編輯 ]

《檀君고기(檀君古記)》는 現在 傳해지지 않으며, 《世宗實錄》〈地理誌〉에서 引用되었다. 고조선의 賃金은 檀君(檀君), 부루(夫婁), 金蛙(金蛙)의 3臺만 記錄되어 있다.

不渡지 [ 編輯 ]

고조선의 賃金은 臨檢氏(壬儉氏), 부루氏(夫婁氏), 挹婁氏(?婁氏)의 3臺만 記錄되어 있다.

魏書 속의 檀君 [ 編輯 ]

歷史學界에서 緯書로 判斷하고 있는 《 閨怨士禍 》, 《 短期告祀 》, 《 환단고기 》 等의 記錄에는 古朝鮮 을 支配하였던 歷代 檀君 47代의 曆年과 詳細한 治世 內容이 記錄되어 있다. 이들 史書는 47代의 檀君 人命은 거의 모두 一致하지만 曆年과 詳細한 治世 內容은 큰 差異를 보인다. 特히 世上에 公開된 年度가 가장 늦은 《 환단고기 》에는 《 閨怨士禍 》와 《 短期告祀 》에 各各 登場하는 治世 內容이 함께 記錄되어 있어 두 冊을 베꼈을 可能性이 높다.

共通된 47代 檀君의 王號는 다음과 같다.

臺數 漢字 이름 臺數 漢字 이름
1 王儉 王儉 25 率那 솔나
2 夫婁 부루 26 鄒盧 醜로
3 嘉勒 假肋 27 豆密 두밀
4 烏斯 五司/誤沙丘 28 奚牟 해모
5 丘乙 구을 29 摩休 魔휴
6 達文 달문 30 奈休 나休
7 翰栗 한율 31 登兀 등올
8 于西翰 寓書한/오사함 32 鄒密 樞密
9 阿述 아술 33 甘勿 감물
10 魯乙 노을 34 奧婁門 오루門
11 道奚 圖解 35 沙伐 사벌
12 阿漢 阿干 36 買勒 매勒
13 屹達 흘달 37 麻勿 마물
14 古弗 古佛 38 多勿 다물
15 伐音 벌음/後흘달 39 豆忽 두홀
16 尉那 위나 40 達音 달음
17 余乙 여을 41 音次 音叉
18 冬奄 동엄 42 乙于支 乙우지
19 ?牟蘇 丘某소/종년 43 勿理 物理
20 固忽 高홀 44 丘忽 口號/구물
21 蘇台 소태 45 余婁 餘루
22 索弗婁 색불루 46 普乙 步을
23 阿勿 아물 47 古列加 高熱加
24 延那 椽那

朝鮮上古史 [ 編輯 ]

紀元前 2333年 부터 紀元前 1285年까지 1048年間 持續되었다.

閨怨士禍 [ 編輯 ]

紀元前 2333年부터 紀元前 1128年까지 1205年間 持續되었으며 以後는 箕子朝鮮 으로 이어진다.

短期告祀 [ 編輯 ]

紀元前 2512年부터 紀元前 416年 까지 2096年間 持續되었다.

환단고기 [ 編輯 ]

紀元前 2333年 부터 紀元前 238年 까지 2096年間 持續되었다.

各州 [ 編輯 ]

  1. “檀君 (檀君)”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韓國學中央硏究院 . 2024年 1月 1日에 確認함 .  
  2. 檀君 , 《 브리태니커 百科
  3. 박광수 (2009). “大倧敎의 檀君神話 受容과 祭天儀禮의 體系 硏究” . 《宗敎敎育學硏究》 (韓國宗敎敎育學會) 29 : 33?60. 2022年 8月 1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4年 1月 9日에 確認함 .   UCI G704-000911.2009.29..007
  4. 倦勤 等 (1402). 《 東國史略 》.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당요 25年 戊辰年) (國人立爲君(唐堯二十五年戊辰)  
  5. 西曆으로 計算하는 過程에 對해서는 檀君紀元 을 參照.
  6. 東國通鑑 》 〈외기(外紀)〉, 1485年.
  7. 一然 (1281) 古朝鮮 條(條) 第14~20門 “桓雄은 이에 暫時 사람으로 變하여 結婚하였더니, 熊女는 妊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檀君 王儉(壇君 王?)이다. 그는 [...] 平壤城 (平壤城) 只今의 書經(西?)이다. 에 都邑을 定하고 비로소 國號를 朝鮮이라 불렀다. 다시 都邑을 白岳山 阿斯達(白岳山阿斯?)로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或은 방홀山(方忽山) 또는 金未達(今彌達)이라 불렀다. 그는 여기서 1千5百 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周나라 武王(武王)이 王位에 오른 己卯年에 武王이 記者(箕子)를 朝鮮에 鳳(封)하니, 檀君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後에 돌아와 阿斯達에 숨어서 山神(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歲였다.”
  8. 《本紀》의 引用은 1028年으로 되어 있으며, 《帝王韻紀》의 本文에는 1038年이라 表記되어 있다. 그러나 本文에 나타난 年度를 통해 計算을 해 보면 1048年이 實際 在位 鳶島이다.
  9. 정인보 論說委員 (1935年 1月 20日). “五千年間朝鮮(五千年干潮線)의 얼, 始祖檀君(始祖檀君)” . 東亞日報 . 2012年 7月 17日에 確認함 .  
  10. 한창건 (2013.04.20). 《韓國古代史發掘, 馬韓月池局社》. 弘益出版企劃. ISBN   9788994841021 .  
  11. 우실하 (2007.04.09). 《東北工程 너머 遼河文明論》. 소나무. ISBN   9788971393321 .  
  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編輯部 (1996.12.20). 《韓國上古史의 諸問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3. 삿社 미츠아키, 〈韓末·日帝時代 檀君信仰運動의 展開 : 大倧敎·檀君敎의 活動을 中心으로〉, 서울大學校 大學院, 2003
  14. 이병도, 《韓國史對官》, 1983年 , 20쪽.
  15. 이병도, 〈古朝鮮 硏究〉, 1975年 .
  16. 정호완, 〈檀君王儉의 形態論的 풀이〉, 《한글》 第219號, 한글學會, 1993年 3月, 5쪽 ~ 32쪽.
  17. 檀君學會 엮음, 《檀君과 古朝鮮 硏究》, 지식산업사, 2005年 , 409쪽.
  18. 리지린, 《古朝鮮硏究》, 社會科學出版社, 1963年
  19. 장우진, 〈 大同江 流域은 人類의 發祥地이며 朝鮮사람의 發源地〉, 《朝鮮고고硏究》 1號, 1999年
  20. 이기동, 〈北韓에서의 檀君硏究와 그 崇仰運動〉, 《韓國史 市民講座》27輯, 2000年
  21. 古朝鮮 歷史 編入과 靑銅器 起源 경향신문 記事
  22. “三國遺事 키워드事前:魏書” . 2021年 11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1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3. 檀君(檀君)은 왜 中國 史書에 記錄이 없을까

參考 文獻 [ 編輯 ]

  • 一然 (1281). 〈 勸第1 〉. 《 三國遺事 》.  
  • 이승휴, 《帝王韻紀》
  • 《世宗實錄 地理誌》
  • 북애자, 《閨怨士禍》, 고동영 飜譯, 한뿌리, 2005年
  • 이유립, 《환단고기》, 광오理解社, 1979年
  • 縛擒, 《不渡지》, 김은수 飜譯, 註解, 韓文化, 2002年
  • 《短期告祀》, 한뿌리, 1986年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